몽골 초원의 늑대가 만주 삼림의 호랑이를 대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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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나라와 흉노제국의 공존은 만주의 탁발선비족(北魏)에 의한 북중국 정복으로 이어졌다. 수(隋)-당(唐)나라와 돌궐제국의 공존은 만주의 거란족(遼)과 여진족(金)에 의한 북중국 정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몽골 고원에서 징기스칸의 등장은, 북중국에서 만주족 정복국가와 통일된 몽골족 제국의 대결이라는 전혀 새로운 상황을 전개시켰다 흉노와 위구르 돌궐족은 한족 왕조에 대해 갈취(喝取)전략을 사용했다. 징기스칸의 초기 목표 역시 중국 본토의 정복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족 조정들과는 달리, 만주족의 금나라 조정은 몽골족에 대한 유화정책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한족 전통을 따라) 갈취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왕조 자체가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몽골족에 대항해 싸웠던 것이다. 몽골 지배자들은 몽골어로 주요 정무를 수행하고, 궁전 마당에 천막을 치고 살며, 몽골 고원에서 여름을 보내고, 피나는 내부투쟁을 통해 황제를 선택하는 전통을 유지하면서 중국화 현상을 막으려 노력했다. 쿠빌라이는 중국인과의 결혼을 억제했으며, 자신도 몽골 여인만을 후궁으로 들였다. 원나라가 망한 후, 몽골의 지배자들은 중국의 언어와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다. 그들은 단순히 군대를 이끌고 몽골고원으로 달아나 버린 것이다. 1368년, 자신의 본고향으로 도망 온 몽골족은 북원(北元)을 세워, 17세기 초에 만주족 청나라에 정복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이제 북원의 첫 번째 황제가 절반은 한국 사람이란 이야기를 들으면 놀랄 사람도 많을 것이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몽골 초원의 늑대가 만주 삼림의 호랑이를 대체
몽골족의 원(元)이 여진족의 금(金)을 대체
홍원탁 (서울대 교수)
북중국에서 만주족의 금나라와 대결하게 된 몽골제국
▲ The Mongol Conquests (1206-31)
Black (1999: 69)
한나라와 흉노제국의 공존은 만주의 탁발선비족(北魏)에 의한 북중국 정복으로 이어졌다. 중국의 수-당나라와 (위구르-투르크) 돌궐제국의 공존은 만주의 거란족(遼)과 여진족(金)에 의한 북중국 정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몽골 고원에서 징기스칸(1206-27)의 등장은, 북중국에서 만주족 정복국가와 통일된 몽골족 제국의 대결이라는 전혀 새로운 상황을 전개시켰다.
징기스칸이 1206년에 몽골 부족들을 모두 통합하기 이전의 몽골족은 초원지대의 약소 부족에 속했으며, 대부분의 몽골 고원은 돌궐족들이 점거하고 있었다. 이미 7세기 초에 돌궐족의 일부는 당 태종(626-49)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달아났다. 이제 몽골 제국과 만주족 (요와 금) 왕조 등, 양쪽에서 밀어오는 압력 때문에, 대부분의 돌궐족들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방향으로 달아날 수 밖에 없었는데, 본의 아니게 몽골족의 유라시아 정복 통로를 미리 개척하고, 범-유라시아 몽골제국 출현을 위해 초원의 고속도로를 깔아준 꼴이 됐다.
유목정복자들은 정복을 하러 갈 때, 항상 도중에서 마주치는 온갖 유목민들을 자신들의 깃발 아래로 거둬들이려 노력했다. 바투(1227-55)가 (징기스칸의 유언에 의해 바투에게 특별히 할당된) 단지 4,000명에 지나지 않는 순혈(純血) 몽골군을 이끌고 1236-41년 기간 중 유럽 침공을 성공적으로 수행, 흑해와 코카서스 북쪽의 초원지대를 포함하는 고대 스키타이 지역 전체를 점령하고 러시아 공국들을 복속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오래 전에 이 지역에 이주 정착한 돌궐족들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
몽골족은 모두 합해 150만 명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거란족, 한족, 위구르족, 티벳족, 터어키족, 페르시아인 등을 포함해)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는 모든 종족들을 되도록이면 전부 다 몽골의 군대와 정부기구에 흡수 편입시키고자 노력했다. 예컨대 항복한 송나라의 장수 하나가 몽골족이 하천에서 싸우는 함대를 건조하는 작업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몽골군이 하천과 운하가 많은 남중국 정복을 좀더 빨리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많은 신부군(新附軍, 항복한 송군)이 몽골족 혹은 (거란, 여진, 고려인을 포함하는) 북중국 한족 장교의 지휘를 받는 새로운 부대로 조직되거나 기존의 원나라 군대에 편입됐다. 2
징기스칸은 유동적인 연합체 형태로 뭉쳤던 부족-씨족의 군대를 전면적으로 재편성하여, 엄격한 위계질서를 갖춘 군대조직을 창출했다. 병사의 수가 1,000명이 넘은 부족 또는 씨족은 1,000명 단위로 분할을 하여 몇 개의 맹안(猛安)을 조직했다. 1,000명이 안 되는 맹안은 다른 씨족이나 부족에 흩어져 있는 친척들, 심지어는 전쟁포로까지 끌어 모아 채웠다. 15살에서 70살까지의 성인 남자는 모두 전쟁에 필요하면 동원이 될 수 있었다. 각 부대 단위 별로 목초지가 배정됐고, 병사들의 가족은 모두 동일한 지휘체계에 편입됐다. 그러나 세습 지휘관들은 봉건 귀족이라기보다는 장교단을 구성했다. 천인(千人)장들의 수입은 관행적으로 그들이 관할하는 자급자족형의 군인 가족들로부터 징수하는 조세와 전쟁에서 획득하는 전리품에 의존했다. 그러나 원나라 수립 이후, 이들 지휘관은 세습적으로 급료를 받는 귀족이 됐다. 3
▲ Mongol Empire Black (1999: 68) | ||
흉노와 위구르-돌궐은 전통적으로 한족 왕조에 대해 갈취 전략을 사용했다. 징기스칸의 초기 목표 역시 중국 본토의 정복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5 그러나 한족 조정들과는 달리, 만주족의 금나라 조정은 몽골족에 대한 유화정책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한족 전통을 따라) 갈취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왕조 자체가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몽골족에 대항해 싸웠던 것이다.
몽골족은 1227년에 서하, 1234년에 금, 1259년에 고려, 1279년에는 남송을 정복하였다 Janhunen(1996: 134)은 “동아시아에서 몽골의 정복이 쉬웠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서하와의 전쟁은 20년간(1207-27) 지속되었고, 금과는 24년(1210-34), 고려와는 40년(1219-59), 남송과는 44년간(1235-79) 전투가 지속되었다”고 말한다.
한족이 선비족의 북위,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과 대치했을 때에는 중국대륙 남쪽에서 그들의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족은 한족 왕조를 완전히 소멸시켰다. 한족 국가의 영역 전체를 완전히 정복해버린 것은 훗날 만주족 청나라에 의해 모방되는 것이다.
몽골족은 신속하게 항복을 받아내고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대량학살이라는 공포작전을 채택했다. 그들은 도시를 불사르고 농토를 파괴하여 목초지로 만들었다. 동(東)이란의 경우, 인구의 5분의 4가 학살되었다. 몽골족의 야만성은 정주(定住)의 문명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1234년에 금나라를 정복할 즈음, 몽골족은 수많은 문명화된 자문관들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미 이민족의 지배에 익숙해져 있던 북중국에 제국을 세워 통치하는 기술도 습득할 수 있었다. 징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1260-94)는 남송을 멸망시키기 8년 전인 1271년에 자신을 원나라의 황제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동 투르키스탄의 위구르-돌궐족은 저항없이 곧바로 항복을 했기 때문에, 징기스칸은 위구르 지배자를 자신의 5번째 아들이라고 불렀다. 몽골은 위구르 문자를 채택하여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했다. Ledyard(1983: 348)는 “몽골족의 일상생활에 한족의 습속(習俗)이 침투하기 이전에 이미 위구르 문자의 영향을 받았고, 중앙아시아의 행정과 통치 기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적인 흐름이 몽골인의 생활에 침투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역사적인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다양한 서비스와 기술들이 몽골인들에게 이미 제공되었었기 때문에 구태여 한족들로부터 유사한 기술과 서비스를 얻으려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몽골족이 한족 생활 관습에 근접했을 때, 그들이 마주치게 된 높은 수준의 문명이란 것은 한족에게서만 발견하게 된 것이 아니었기에, 한족 문명의 유혹에 잘 넘어가지 않았다”고 말한다.
모든 돌궐-몽골족 나라들은 한 개의 제국으로 통합됐다. 만주로부터 카스피해에 이르기까지 대상(隊商)들의 왕래가 방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철권적 규율의 적용됐다 20만 마리의 말들이 역참(驛站)에 배치되어 제국의 우편 왕래 서비스를 수행했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황제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최소한 이론상으로는 징기스칸의 후손들이 지배하는 모든 제국을 통괄하는 몽골 제국의 칸으로서, 몽골족에 의한 세계평화 체제가 실현된 것이었다.
몽골제국의 쇠퇴
쿠빌라이는 1264년에 수도를 몽골고원의 카라코룸에서 (당시 대도로 불려진) 북경으로 옮기고, 원나라(1206-1368)의 황제가 되었다. 중국대륙 전역을 정복하고 통치한 최초의 이민족 왕조였다. 주요 거점지역에는 몽골족 수비대가 주둔했다. 위구르족, 티베트족, 터키족, 아랍인 및 중국화된 여진족 등을 행정기관에 사용했다. 6 만주, 몽골, 투르키스탄, 티베트는 만리장성 아래의 중국본토에서 적용된 것과는 다른 행정조직으로 지배했다. 7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몽골 군호(軍戶)의 전투력은 왕년에 떨쳤던 용맹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8 몽골 수비대 사회에서 유교를 배우고 중국 여자와 결혼을 하는 것이 흔한 현상이 됐다. 몽골 조정과 귀족들은 분열되어 황제 계승 투쟁에 몰입했으며, 각 경쟁자들은, 로마의 친위대와 유사한 역할을 했던, 황실의 친위대를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자 노력했다.
몽골 지배자들은 몽골어로 주요 정무를 수행하고, 궁전 마당에 천막을 치고 살며, 몽골 고원에서 여름을 보내고, 피나는 투쟁을 통해 황제를 선택하는 전통을 유지하면서 중국화 현상을 막으려 노력했다 쿠빌라이는 중국인과의 결혼을 억제하였으며 자신도 몽골 여인만을 후궁으로 들였다. 반면 한족에게는 정복자의 관습을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원나라가 망한 후, 몽골의 지배자들은 중국의 언어와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다. 9 그들은 단순히 군대와 함께 몽골고원으로 달아나 버린 것이다. 1368년, 자신의 고향으로 도망을 해 온 몽골족은 북원(北元)을 세워, 17세기 초에 만주족 청나라에 정복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이제 북원의 첫 번째 황제가 절반은 한국 사람이란 이야기를 들으면 놀랄 사람도 많을 것이다.
왕조의 실체를 보전한 고려
고려에서는 1170년에 불만을 품은 장수들이 반란을 일으켜, 많은 수의 거만한 문관들을 처형한 다음, 새로운 왕을 옹립하고, 100여 년에 걸쳐 무단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들은 귀족 가문과 불교 사찰들의 권력남용과 전횡을 허용한 왕을 질책하였다. 무신 지도자들은 후에 몽골 침입의 여파로 몰락하게 된다.
13세기 초, 여진족 금나라는 몽골의 거듭되는 침공을 당하고 있었다. 거란족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을 얻고자 하였으나, 금 나라의 수도가 1215년에 함락된 후, 몽골의 압력은 거란족을 고려 땅으로 밀어냈다.10 몽골-고려 연합군은 1219년에 거란족을 쳐 부쉈으나, 이 사건 이후, 몽골은 고려 조정에게 대규모의 조공을 바칠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고려왕은 몇 차례 조공을 거절하여, 1231년 이후, 일련의 몽골 침략을 초래했다. 고려왕은 농민들에게 산성에 올라가 저항을 계속하라고 명령을 한 다음 강화도로 피신하여, 거의 30년 가까이 몽골에 완강하게 저항을 하다가 1259년, 무신 지배자들을 축출한 문신 정권 하에 항복을 했다.
Ledyard(1983: 325)는 “원나라의 영토가 금 나라와 송 나라를 모두 흡수하게 되자, 만주 전체가 중국 본토와 합쳐져 동일한 통치권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 고려는 왕조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 고려의 북방 영토는 몽골이 빼앗아 직접 지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일본열도의 가마쿠라 막부를 굴복시키려고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벌인 몽골의 원정을 지원하기 위해, 고려는 수백 척의 배를 건조하였고 보급물자를 제공했다. 두 차례의 침공을 위해 고려는 900척의 배와 1만5,000의 수군, 5,000-1만명의 병사를 제공했지만, 심한 폭풍우로 인해 모두 완전한 실패로 끝이 났다. 11
원나라 조정은 고려에 대해 유화정책을 채택하여, 1274년에 쿠빌라이의 딸을 고려 왕세자에게 시집보냈다. 고집 센 고려 지배자들을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유전자적으로 틀림이 없는 방법으로 정복하려 한 것이다. 그 후, 고려의 왕위 계승자는 원나라 황실의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아야만 했다. 12 원나라의 부마(駙馬)국 형태로 고려 조정은 독립 국가의 통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3 하지만 유전적으로 보면, 고려왕은 빠른 속도로 순혈의 몽골 왕자에 가깝게 되었다. 일종의 보복이라 할까, 고려의 여인이 1340년에 원나라 마지막 황제(順帝, 1333-1368, 1368년에 북경을 떠나 1370년에 몽골에서 사망)의 두 번째 부인인 기황후(奇皇后)가 되었다. Dardess(1994: 580)에 의하면, 그녀의 새로운 지위가 원-고려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 것을 우려하여 몽골 조정 내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제2황후 추대를 반대했다. 그녀가 낳은 황자가 1353년에 후계자로 옹립되어 1370년에는 북원의 황제가 된 것이다.
고려 조정에서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기황후의 형제는, 주원장이 남경을 점령한 1356년 공민왕(1351-74)에 의해 제거됐다. 기황후는 끈질기게 황태자를 졸라, 1364년에 원정군을 보내 고려왕의 교체를 시도했으나 몽골군은 고려군에게 전멸되었고 이를 계기로 한반도에서의 몽골 영향력은 소멸됐다. 14
1356년, 고려는 함경도 쌍성에 있는 원나라의 군 사령부를 공격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냈다. 당시 지방의 토호이며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의 협조는 고려가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368년, 기황후 일족이 만주지역에 흩어져 있던 원 나라 피난민들을 모아 일족의 몰락을 복수하고자 하였을 때, "공민왕은, 고려가 옛 고구려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만주를 지배할 정당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전통적 주장을 새삼 내세워 최영과 이성계 등 두 명의 뛰어난 장수들을 만주로 보냈다. 이성계(1335-1408)는 함경도에서 3대에 걸쳐 천호(千戶)장을 지낸 군인 집안의 5대손이었다. 이성계가 함흥평야 방면으로 쳐올라 갈 때, 최영은 서쪽의 요동으로 쳐들어가 1371년에 요양을 점령했다. 하지만 요하의 동쪽이 모두 자신의 땅이라고 거듭 주장을 해 오던 고려 조정은 정작 그들이 얻은 것을 차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회군을 시켰다. 곧이어 명나라 군대가 요동 지역으로 진주하여 논쟁의 여지를 영구히 제거시켜 버렸다"고 Henthorn(1972: 129)은 말한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3-4 (2005. 8. 13)
정리: 강현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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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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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카스피해 부근의 볼가강 하류, 정복한 킵챠크 돌궐족 거주지역 한 복판에 수도를 둔 바투의 킵챠크 칸 제국은 역사책에서 골든 호드(알탄 오르도)라 부른다. 유럽의 이들 몽골 지배자들은 동화되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징기스칸의 제국들이 중국, 페르시아, 투르키스탄 등지에서 모두 축출된 다음에도 계속 명맥을 유지해, 1502년까지 유럽 땅에 진을 치고 존속했다. 테머레인 대제(1336-1405)는 자신을 징기스칸과 차카타이의 후손이며 계승자라고 공언하였으나, 사실은 트랜스-옥시아나 지역의 돌궐 귀족계급 출신이었다. 그는 1397년에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비로서 그 위대한 징기스칸 가계의 일원이 된 것이다. 티무르의 장대한 정복 위업은 징기스칸 군대의 규율 속에서 탄생한 돌궐 군사에 의해 수행된 것이었다.
2. 핵심을 이루는 몽골족 군대에 추가하여, 신부군, 여진군, 거란군, (심양)고려군, 기타의 군대들이 있었다. Hsiao (1978: 15-6, 74, 174) 참조.
元史 卷九十八 志第四十六 兵一 …其繼得宋兵 號新附軍 叉有遼東之糺軍 契丹軍 女直軍 高麗軍 …
3. Hsiao (1978: 14, 25)
4. Hsiao (1978: 33-39)
5. Jagchid and Symons(1989: 19-20)에 의하면, “징기스칸(1206-1227)은 금 나라와 변경교역 및 조공을 확보하여 중국으로부터 필수품을 얻고자 했으나 실패하였다. 일단 교역과 조공 확보의 길이 막히자, 징기스칸에게는 전쟁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징기스칸이 1213년에 북중국 평원에 진입하여 중도(中都, 북경)를 에워 쌓을 때, 그의 목표가 영토적 혹은 정치적 지배보다는 물자 확보에 있었다는 것은, 그의 행동을 보면 명백하게 나타난다 당시 금나라 조정으로부터 대규모의 선물을 받고, 주변 지역을 약탈한 다음에, 징기스칸은 몽골고원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징기스칸은 영토를 점령할 생각은 없었고, 단순히 전리품을 얻어 부하들에게 나누어주려 하였다. ... 그러나 1236년, 몽골 조정의 거란족 출신 고문인 옐루추차이(耶律楚材)와 …간의 대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몽골의 정책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즉, 옐루추차이는 오고타이 칸에게, 귀족들이 백성들로부터 멋대로 강탈을 하게 내버려 두지를 말고, 조정이 관료들을 임명하여 매년 직접 세금을 걷어 들이고, 연말에 이를 귀족들에게 분배하도록 권고하였다.”
6. Fairbank and Goldman (1992: 122-123) 참조. Hsiao(1978: 3)는 “몽골족은 중국을 전통적인 중국식으로 통치하려 하지 않고, 군사적인 사고방식으로 통치하려 했다”고 말한다.
7. Hsiao (1978: 57-60) 참조. 메마른 중앙아시아에 15만 명의 기병대를 유지시켜야 할 필요는 원나라 재정을 고갈 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8. 남송 멸망 후, 원나라는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어 사람들은 전쟁을 몰랐으며, 장수들의 후손은 대대로 지휘관직을 세습하였다. Hsiao (1978: 26-7) 참조. 몽골 병사들은 영농생활에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 병사들의 가족은 만성적인 성인남자의 부재와 군 지휘관으로부터의 착취에 시달려야 했다. 가난해진 군호와 그들 상급 지휘관 사이의 유대감은 사라졌다. 이전에 북중국에 주둔을 하면서 농토를 배정 받은 금나라 여진족 병사들은, 훗날 청나라의 팔기군들 모양, 비록 힘은 들었지만 영농생활을 하면서 병역의무를 수행하였다. 왜 몽골 병사들은 중국 땅에서 적정 수준의 삶을 전혀 영위할 수 없었을까? Hsiao(1978: 20)는 이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여진족과 만주족은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소규모이나마 영농생활을 경험한 적이 있었지만, 몽골족은 전혀 그런 경험이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9. Janhunen (1996: 166) 참조. Ledyard (1983: 326)는 “중국지역에 이주 정착했던 대부분의 거란족과 여진족은 그들의 정복 통치가 끝났을 때 한족에 동화되어 흔적이 없어진 데 비해, 몽골족들은 원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몽골족 그대로 살아 남았다”고 말한다.
10. Lee (1984: 148) 참조. 몽골이 금 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1209년이고, 수도를 함락시킨 것은 1215년이었으나, 19년이 지난 1234년에 가서야 비로서 금 나라를 완전히 정복할 수 있었다.
11. 두 번째 몽골 원정군의 규모는 중국 남부로부터 출발한 3,500척의 배와 100,000만의 병사들, 고려로부터 출발한 900척의 배와 40,000명의 병사들이었다.
12. 훗날 충열왕(1274-1308)이 되는 고려 왕세자와 몽골 공주와의 결혼은 1274년에 이뤄졌다. 이후 100여 년 동안 7명의 몽골 공주가 고려 왕자와 결혼을 하였으며, 그들 자식 중 세 명이 고려 왕위에 올랐다. Henthorn (1972: 123) 참조.
13. 몽골은 고려 왕실의 지손(支孫)을 데려다 요양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하여 상당한 규모에 달하는 그 지역 고려인 사회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훗날 고려의 군주들은 “심왕(瀋王)”이란 명칭으로 요양 지역에 대한 형식상의 통치권을 부여 받았다. Henthorn (1972: 123) 참조.
14. 元史 卷一百一十四 后妃一 完者忽都皇后奇氏 高麗人 生皇太子愛猷識理達臘…初…進爲宮女…立爲第二皇后 初奇氏之族在高麗者 怙勢驕橫 高麗王怒 盡殺之 [至正] 二十三年 后謂皇太子曰 汝何不爲復讎耶? 遂立高麗王族人留京師者爲王…用兵一萬…過鴨綠水 伏兵四起 乃大敗 餘十七騎而還 后大慚… 二十五年…皇后崩…后宜正位中宮 帝不答…二十八年 從帝北奔
新元史 卷二百四十九 列傳 第一百四十六 外國一 高麗 至正十三年 [1953] 冊立皇太子…太子奇皇后所出也 奇氏高麗人本微賤…皇后兄子奇轍爲大司徒富貴震一時… 十六年 有密告奇轍潛通 雙城叛民謀逆祺殺之 夷其族… 二十三年 皇太子欲爲奇皇后復仇 乃立德興君…爲國王… 發遼陽行省兵送之…祺聞其事…書曰 世祖皇帝… 釐降帝女於忠烈王 且許以不革國俗 以至於今… 二十四年 [1964]…以大兵一萬圍義州爲崔瑩等所敗 一軍皆沒
新元史 卷二十六 本紀 惠宗四 至正二十四年 春正月 [1364] 朱元璋自稱吳王 是月 崔帖木兒與 高麗人戰於定州敗績 … 三十年 [1370] 惠宗崩於應昌 皇太子卽皇帝位… 改元宣光… 宣光元年 明太祖洪武四年也 [1371] 遼陽行省…降於高麗 十月 高麗兵陷五老山寨… 二年 [1372] … 大破明…兵於嶺北自是明兵不復渡漠
The Mongol Steppe Wolf
Replacing the Forest Tiger
the ruzhen jin replaced by the mongol yuan
Wontack Hong
Professor, Seoul University
a mongolian empire confronting a manchurian state in north china
The co-existence of the Han dynasty and the Xiong-nu empire was followed by the conquest of North China by the Manchurian Touba Wei dynasty. The co-existence of Sui-Tang China and the (Uigur-Turks) Turkic empire ended with the occupation of North China by the Manchurian Qidans and Ruzhens. The appearance of Chinggis Khan (1206-1227) in Mongolia, however, produced an entirely new situation in which a united Mongol empire confronted a Manchurian conquest dynasty in North China.
Before Chinggis Khan united the Mongol tribes in 1206, the Mongols were one of the weaker tribes in the steppes and most of Mongolia had been occupied by the Turks. In the early seventh century, some Turkish tribes had fled west under attack by Tai-zong of Tang (626-49). Now under the combined pressure of both the Mongols and Manchurian dynasties (Liao and Jin), most Turks were forced to move towards Central and West Asia, unintentionally opening the route for the Mongol conquest of Eurasia and paving the steppe turnpikes for the trans-continental Mongol empire.
A nomadic conqueror always attempted to draw under his banners all kinds of nomads he could collect on his way to conquest. Batu (r.1227-55) could successfully wage the European campaigns of 1236-41, occupy the whole of ancient Scythia, including steppes north of the Black Sea and Caucasus, and also enforce suzerainty over the Russian principalities, leading less than 4,000 pure-blooded Mongol troops (that were allocated specifically to him by Chinggis Khan’s dying wish), only by mobilizing the Turks that had settled in those regions a long time ago.1
Numbering less than 1.5 million, the Mongols tried to incorporate all ethnic groups that submitted without fighting (including the Qidans, Chinese, Uighurs, Tibetans, Turks and Persians) into their armies and government. A surrendered Song commander, for instance, helped the Mongols in the construction of a river fleet, expediting the conquest of southern China full of rivers, canals, and streams. Many former Song troops (termed newly-adhered armies) were either organized into new units with Mongols or Northern Chinese (including Qidan, Ruzhen and Koreans) as their officers, or were incorporated into the existing Yuan ranks.2
Chinggis Khan had completely reorganized the tribal or clan armies, united only in a fluid association, into a more rigid hierarchical force. A tribe or clan exceeding a thousand fighters was divided into several units (Ming-an) of 1,000, while the Ming-an with a smaller number of fighters was filled by assembling kinsmen who had been scattered in other clans or tribes, or even by co-opting war captives. All male adults between fifteen and seventy years of age were liable for military service when needed. Each unit was assigned grazing land, and the families were also put under the same administration. The hereditary chieftains, however, constituted an officer corps rather than a feudal aristocracy. The chieftains had been accustomed to exacting levies from the self-sufficient military families under their jurisdiction and depending on the spoils acquired in campaigns, but after the founding of the Yuan dynasty, officers became a hereditary salaried aristocracy.3
The Tai-zu of the Northern Song dynasty had designated all the elite troops, including the offspring of politically privileged families, as the Imperial Guard (divided into a couple of mutually independent contingents to provide a counter-balance) and also kept about half of them in the capital region, effectively ensuring the loyalty of influential families and discouraging the regional uprising and usurpation of the throne. Chinggis Khan created the Imperial Guard from among the sons and younger brothers of commanders of proven loyalty, the offspring of aristocratic families all over Mongolia, and the royal hostages offered by surrendered kings to serve as his own bodyguard and also as personal domestic staff of imperial household. It was a hostage camp, an academy for young aristocrats promised a future of prominent official positions, a form of privileged apprenticeship for the future ruling class, a key link in maintaining Khan’s personal relationship with aristocracy and, at the same time, a rudimentary executive organ to transform the loose confederation of nomadic chieftains into a centralized autocratic despotism.4
The Xiong-nu and Uighur Turks had traditionally pursued the strategy of extortion against the Han Chinese dynasties. The conquest of mainland China did not, at first, appear to have been a primary goal of Chinggis Khan either.5 Unlike the Han Chinese courts, however, the Manchurian Jin court flatly refused appeasement with the Mongols. Instead of yielding to extortions (in the traditional Chinese fashion), they fought the Mongols until the dynasty was itself completely destroyed.
The Mongols conquered the Western Xia in 1227, the Jin in 1234, Korea in 1259 and the Southern Song in 1279. According to Janhunen (1996: 134), “none of the Mongol conquests in East Asia was easy, for their military actions lasted 20 years against the Western Xia (1207-27), 24 against the Jin (1210-34), 40 against Korea (1219-59), and 44 against the Song (1235-79).”
The Han Chinese had been able to maintain their cultural and political integrity in the south when they confronted Xianbei Wei, Qidan Liao, and Ruzhen Jin. The Mongols, however, completely wiped out the Chinese dynasty. The complete conquest of all the territory of the Han Chinese state was emulated later by the Manchu Qing.
The Mongols had adopted the terror tactic of massacre to obtain prompt submission and prevent rebellion. They burned down cities and destroyed farm fields to convert them into steppe. In Eastern Iran, four-fifths of the population was slaughtered. The Mongol barbarity was born of ignorance of sedentary civilization. After the conquest of the Jin in 1234, however, the Mongols had time to collect many civilized advisors and to learn the art of ruling an empire in the North China plain that was already well experienced in alien domination. Khubilai (r.1260-1294), the grandson of Chinggis, was able to declare himself the emperor of Yuan in 1271, eight years prior to the final extinction of the Southern Song.
The Uighur Turks in East Turkestan had submitted peacefully to Chenggis Khan who referred to the Uighur ruler as his fifth son. The Mongols adopted the Uighur script for their written language. Ledyard (1983: 348) notes: “It may have been simply a historical accident that Uighur literary influence, Central Asian administrative and governing techniques, and Christian and Islamic religious currents penetrated Mongol life before Chinese practices did, but the effect was to provide the Mongols with many services and techniques that insulated them from the need to seek similar things from China. And when the Mongols did become closely associated with Chinese life, it was not the only form of higher civilization they had encountered, and they were therefore less susceptible to its lure.”
All the Turko-Mongol nations were unified into a single empire. From Manchuria to the Caspian, an iron discipline was imposed in order to ensure the unmolested travel of caravans. More than two hundred thousand horses were distributed among the relay stations in service of the imperial mails. Khubilai was not only the emperor of China, but in theory the Khan of the entire Mongol Empire of Chinggis-Khanite appanages, realizing the Pax Mongoliana.
Fall of the Mongol Empire
Khubilai Khan transferred his capital from Karakorum in Mongolia to Beijing (known then as Dadu) in 1264 and became the emperor of Yuan (1206-1368). It was the first foreign dynasty to conquer and rule all of China. The Mongols were garrisoned at key points. They used Uighur, Tibetans, Turks, Arabs, and sinicized Ruzhens in government offices.6 Manchuria, Mongolia, Turkestan and Tibet were placed under administrative systems different from those employed in mainland China below the Great Wall.7
With the lapse of time, the fighting capacity of the Mongol military households began to lose every vestige of their vigor.8 In garrison communities, not only Confucian learning but also marriage with Chinese women became common. The Mongol court and nobility were divided, and engaged deeply in succession struggles, each contender striving to control the Imperial Guard that functioned like the Roman praetorian cohorts.
The Mongol rulers resisted sinification by conducting their business in the Mongol language, living in tents erected on the palace grounds, spending their summers in Mongolia, and maintaining the tradition of choosing the emperors through bloody competition. Khubilai Khan discouraged Mongols from marrying Chinese, and he himself took only Mongol women into the palace. The Han Chinese, on the other hand, were not forced to adopt the conqueror’s customs. After the collapse of the Yuan dynasty, the Mongol rulers simply fled with their troops, avoiding Chinese linguistic and cultural domination.9 The Mongols fled back to their old homelands in 1368, founding the Northern Yuan which survived into the early 17th century to be conquered by the Manchu Qing. one may now get surprised to hear that the first emperor of the Northern Yuan was a half Korean.
Koryeo preserving its dynastic existence
In Koryeo, a group of discontented military generals revolted in 1170, enthroned a new king, and purged a large number of arrogant civilian aristocrats, commencing a century of military rule. They chastised the king for allowing the abuses practiced by the aristocratic families and the Buddhist establishment. The military rulers later fell as an aftermath to the Mongol invasions.
By the early thirteenth century, the Ruzhen Jin came under sustained Mongol attack. The Qidan had taken the opportunity to assert their independence, but following the fall of the Jin capital in 1215, Mongol pressure drove the Qidan into Koryeo territory.10 The Mongol-Koryeo coalition forces destroyed the Qidan in 1219, but after this incident the Mongols demanded from the Koryeo court heavy annual tribute. The Koryeo king, however, refused to pay tribute on several occasions, inviting thereby a series of Mongol invasions beginning in 1231. Ordering peasantry to keep fighting in the mountain fortresses, the Koryeo rulers, entrenched in the Kang-wha Island, stubbornly waged resistance against the Mongols for almost 30 years until its surrender in 1259 under the new civilian leadership that replaced the military rulers.
Ledyard (1983: 325) notes: “The territory of the Yuan dynasty … combined that of Jin and Song, so that Manchuria was wholly joined with China and placed under the same administration. … Koryeo was able to preserve its dynastic existence … although … Koryeo’s northern territory … was removed and placed under the direct Mongol administration.”
Needing to sustain the abortive Mongol campaigns against the Kamakura shogunate on the Japanese islands in 1274 and 1281, the Koryeo constructed hundreds of warships and provided the necessary provisions. It furnished about 900 ships, 15,000 sailors, and 5,000 to 10,000 troops for two invasions that ended in complete disaster because of heavy storms. 11
The Yuan court adopted a policy of reconciliation, and Kublai Khan gave his daughter to the crown prince of Koyreo in 1274, plotting in this way a slow but sure genetic conquest of stubborn Koryeo rulers. Thereafter a succession of Koryeo kings had princesses of the Yuan imperial house as their primary consorts.12 As a son-in-law nation to Yuan, the Koryeo court could maintain its position as sovereign ruler of an independent state.13
Genetically, however, the Koryeo kings rapidly converged to the pure blooded Mongol princes. Seemingly a retaliation of sorts, Koryeo exported a woman to become in 1340 the second empress, called Empress Ki, of the last Yuan Emperor (Shun-di, r.1333-68, d.1370). According to Dardess (1994: 580), in view of “the effect of her new status on the complex issue of Yuan relations with Korea,” many Mongols had opposed to making her second empress. She gave birth to the Prince Imperial who was installed as heir apparent in 1353 and ascended the throne of Northern Yuan in 1370.
Empress Ki’s brothers, who came to exercise mighty power in the Koryeo court, were eliminated by King Kong-min (1351-74) in 1356, the year Zhu Yuan-zhang seized Nan-jing. Empress Ki could at last persuade the Prince Imperial in 1364 to send an army and replace the Koryeo king, but the Mongol force was annihilated, marking the end of Mongol power in the Korean peninsula.14
In 1356, Koryeo had sent an army to attack the Yuan commandery headquarters at Ssang-seong, Ham-gyeong province. The cooperation of Yi Ja-chun, who was a local magnate and father of Yi Seong-gye, had played a decisive role for Koryeo to recover its lost territory.
When the family of the Empress Ki assembled Yuan refugees in Manchuria in 1368 with the intention of avenging the downfall of their clique, “King Kong-min dusted off the tradition that Koryeo was the successor to the old state of Koguryeo and thus the rightful sovereign of Manchuria and sent two of his best generals, Chi Yong-su and Yi Seong-gye, into Manchuria. Yi Seong-gye (1335-1408) was the fifth-generation scion of a military family which had for three generations held the post of Chief of one Thousand in the Korean northeast. … While Yi Seong-gye swept north through the Ham-heung plains, General Chi drove west toward Liao-dong and took the city of Liao-yang [in 1371]. The Koreans were unprepared to hold their gains and recalled their armies, although they repeatedly brought up their claim to all lands east of the Liao River. Ming forces soon moved into the area, permanently settling the question (Henthorn, 1972: 129).”
[각주]
1 The Batu’s khanate of Kipchak, with its capital at the lower Volga near the Caspian in the midst of subjugated Kipchak Turks, was to be known to history as the Golden Horde (Altan-ordo). These Mongolian rulers in Europe survived as unassimilated foreigners encamped on European soil until 1502, long after the Chinggis Khanites had been driven out of China, Persia and Turkestan. Tamerlane (1336-1405) declared himself the heir and continuator of Chinggis Khan and Chagatai, but he belonged to a Turkic aristocratic clan in Transoxiana. He was brought into the great Chinggis Khanite family only by marriage in 1397. The Timurid epic conquests were executed by the Turkic forces that were born of Chinggis Khanite military discipline.
2 In addition to the core Mongol army, there also appeared the Newly-adhered (former Song) army, the Ruzhen army, the Qidan army, the Korean army (of Shen-yang), and others. See Hsiao (1978: 15-6, 74, 174).
元史 卷九十八 志第四十六 兵 一 …其繼得宋兵 號新附軍 叉有遼東之糺軍 契丹軍 女直軍 高麗軍 …
3 Hsiao (1978: 14, 25)
4 Hsiao (1978: 33-39)
5 According to Jagchid and Symons (1989: 19-20), “Chinggis (r.1206-1227) sought and failed to sustain trade and tribute arrangements with the Jin which would have enabled him to obtain essential goods from China. once exchange institutions were closed to him, Chinggis’s only alternative was war. … The interest of Chinggis in securing goods rather than territory or political power is apparent by his activities in 1213 when he entered the North China plain and besieged Zhong-du (Beijing). After receiving bounteous gifts from the court and plundering the countryside, he returned home. To this point in his career, Chinggis had no designs to occupy land, but rather sought booty to reward his followers. … However, as early as 1236, as evidenced by the following dialogue between the Qidan scholar-advisor to the Mongolian court … and …, the [Mongol] policy began to change. Ye-lü Chu-cai admonished Ögödei Khan: … The court should appoint officials to collect the tax and distribute it the [the nobles] by the end of the year, and not allow them to freely extort from the people. …”
6 See Fairbank and Goldman (1992: 122-123). Hsiao (1978: 3) notes that: “They tended to think in military terms and never made any serious attempt to rule China in traditional Chinese fashion.”
7 See Hsiao (1978: 57-60).
The necessity to maintain more than 150,000 troops garrisoned in arid Inner Asia exhausted the Yuan dynasty.
8 After the annihilation of the Southern Song, the Yuan was at peace for a long time and the people did not know war. The descendants of the generals inherited the offices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See Hsiao (1978: 26-7).
The Mongol soldiers were ill adapted to farming life, and their families suffered from the chronic absence of male adults and exploitation by corrupt military superiors. The solidarity between the impoverished military households and their superiors disappeared.
The Ruzhen soldiers of the preceding Jin dynasty had been allocated land in North China and been able to lead, with difficulty to be sure, a decent agricultural life to support their military duties, as did the bannermen of the Qing much later. Why were the Mongolian soldiers utterly unable to make a decent living on Chinese land? Hsiao (1978: 20) answers this question in this way: “we must bear in mind that the Ruzhen and Manchus had some agricultural experience before they entered China -– which was certainly not the case with most if not all the Mongols.”
9 See Janhunen (1996: 166).
Ledyard (1983: 326) notes: “while most Qidan and Ruzhen residents of Chinese areas simply blended into the landscape when their regimes came to an end, the Mongols were still very much Mongols when the Yuan dynasty’s days ran out.”
10 Lee (1984: 148)
The Mongols commenced their drive against the Jin in 1209, and captured the Jin capital in 1215, but it took another 19 years to conquer the Jin dynasty (in 1234).
11 The second Mongol invasion force amounted to 3,500 ships and 100,000 soldiers who sailed from South China, and 900 ships and 40,000 soldiers who left from a Korean port.
12 The marriage of the Koryeo crown prince, later King Chung-yul (1274-1308), to a Mongol princess took place in 1274. In the century that followed seven Mongol princesses were married into the Koryeo royal family, and the offspring of three of these unions held the throne. See Henthorn (1972: 123).
13 A cadet branch of the Koryeo royal family was given appointments as governors of the Liao-yang area to govern the large Korean communities there. Later Koryeo monarchs were given honorary control of the Liao-yang area and invested with the title of “King of Shenyang 瀋王.”
See Henthorn (1972: 123).
14 元史 卷一百一十四 后妃一 完者忽都皇后奇氏 高麗人 生皇太子愛猷識理達臘…初…進爲宮女…立爲第二皇后 初奇氏之族在高麗者 怙勢驕橫 高麗王怒 盡殺之 [至正] 二十三年 后謂皇太子曰 汝何不爲復讎耶? 遂立 高麗王族人留京師者爲王…用兵一萬…過鴨綠水 伏兵 四起 乃大敗 餘十七騎而還 后大慚… 二十五年…皇后崩…后宜正位中宮 帝不答… 二十八年 [1968] 從帝北奔
新元史 卷二百四十九 列傳 第 一百四十六 外國一 高麗 至正 十三年 [1953] 冊立皇太子…太子奇皇后所出也 奇氏高麗人本微賤…皇后兄子奇轍爲大司徒富貴震一時… 十六年 有密告奇轍潛通 雙城叛民謀逆祺殺之夷其族… 二十三年 皇太子欲爲奇皇后復仇 乃立德興君…爲國王… 發遼陽行省兵送之…祺聞其事…書曰 世祖皇帝… 釐降帝女於忠烈王 且許以不革國俗 以至於今… 二十四年 [1964] …以大兵一萬圍義州爲崔瑩等所敗 一軍皆沒
新元史 卷二十六 本紀 惠宗四 至正二十四年 春正月 [1364] 朱元璋自稱吳王 是月 崔帖木兒與 高麗人戰於定州敗績 … 三十年 [1370] 惠宗崩於應昌 皇太子卽皇帝位… 改元宣光… 宣光元年 明太祖洪武四年也 [1371] 遼陽行省…降於高麗 十月 高麗兵陷五老山寨… 二年 [1372] … 大破明…兵於嶺北自是明兵不復渡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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