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을 대변하는 고스톱 | |||||||||||||||||||||||||||||||||||||||||||||
우리나라에서 화투놀이가 성행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게임이 단순하여 누구든지 쉽게 규칙을 익힐 수 있고 또 놀이가 상당히 재미도 있다. 수학적으로 머리를 쓰면서 게임의 승부를 예측하는 묘미도 곁들여져 상대방의 허점도 찔러보면서 자신의 승리를 시도한다. 일종의 지혜 겨루기이지만 생각지 못한 운과 불운이 겹쳐져 재미를 배가시켜준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매달리는 것이다.
화투놀이는 여러 가지지만 그 중에서도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애용되고 있는 것은 고스톱이다. 한 주간지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고스톱 인구는 2000만 명으로 한국인구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수준이다. 온라인 고스톱을 전문으로 하는 한 인터넷의 경우 회원 수가 무려 500만 명이 넘는다. 고스톱이 우리 생활에 가장 밀접한 놀이 중의 하나라는 말이 결코 과장은 아닌 셈이다. 고스톱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고스톱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1960년대 말이며 대중적인 놀이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중반부터이다. 1980년대부터는 아랫사람과 윗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놀이로 일반화되기 시작하면서 폭발적으로 보급된 것이다. 그런데 학자들은 화투(일반적으로 19세기경 일본 쓰시마섬[對馬島]의 상인들이 장사차 한국에 왕래하면서 퍼뜨린 것으로 추정)의 원본이자 세계인들이 즐기는 트럼프의 뿌리가 우리나라의 전통놀이인 투전으로 추정한다. 이규태에 의하면 『도박백과』의 저자 P. 아널드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카드놀이를 한 것이 한국이며 화살그림을 그린 갸름한 투전(鬪錢)이 카드의 시조라고 그 구조적 특징을 들어 설명했다. 미국의 부르클린 박물관장인 S. 크린도 극동 여러 나라의 놀이를 조사한 보고서에서 한국의 투전을 서양카드의 뿌리로 추정했다. 투전이 길쭉한 종이로 되어 있는데다 손에 들고 펼치는 모양이 카드와 유사하며 특히 ‘소몰이’ 방법은 고스톱 놀이와 구조적으로 흡사하다. 소몰이에서 ‘이랴’하는 것이 고스톱에서 ‘고’, ‘워’하는 것이 고스톱에서 ‘스톱’하는 것과 같다. 소를 몰고 가는 말이 투전에 그대로 쓰이면서 고스톱과 같은 형태로 변형되었다는 것으로 이 설명에 의하면 한국의 투전이 세계를 반바퀴 돌아 화투라는 형태로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 고스톱 도박론 고스톱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화투를 놀음이나 도박의 대명사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래 화투놀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화투가 조선시대 말에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후 재산도 제법 있고 글자깨나 깨친 신지식인들이 마땅한 일자리가 없자 주로 기생집을 전전하면서 화투치기를 즐겼다. 기생집에서 소위 하이칼라들이 즐겼던 ‘주색잡기’의 도구가 바로 화투놀이였다.
당시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들에게는 잘난 척하는 지식인 하이칼라들의 주색잡기가 예쁘게 보였을 이가 없다. 농사철에는 밤낮 농사일에 시달리고 농한기에는 새끼를 꼬거나 짚신을 삼는 등 늘 생활고에 시달리는 농민들에게 화투놀이는 딴 세상 사람들이 하는 놀이였다. 그러나 개화시대에 국민의 대다수로부터 비난을 받던 화투가 현대에 들어와서도 똑 같은 비난을 받아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농민이든 상인이든 봉급생활자이든 학생이든 시간만 있으면 화투놀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스톱은 소규모 모임에서 여흥으로 이용된다. 고스톱은 이제 하이칼라의 주색잡기가 아니라 일반 대중이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소도구가 된 것이다. 고스톱을 비난하거나 옹호하기 위해서는 우선 도박이 무엇인지, 투기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도박 즉 놀음은 ‘돈이나 재물을 걸고 따먹기를 하는 행위’로 ‘일시적 오락에 불과한 때를 제외하고는 형법상 범죄’가 된다. 도박은 돈 따먹기를 일시적인 놀이로 삼지 않고 직업적으로 즉 재산증식의 목적이나 생계유지의 수단으로 할 때 범죄행위로 간주된다. 일반적으로 도박을 불법으로 간주하지만 도박의 특징은 도박을 하는 놀이의 종목이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주사위, 카드, 마작, 당구, 장기, 테니스, 볼링, 골프 등 어느 것도 돈을 걸고 직업적으로 하면 노름이자 도박으로 간주되어 형법상 범죄가 성립된다. 거액의 돈 내기 골퍼나 거리의 장기꾼들이 단속의 대상이 되는 근거이다. 반면 공공 장소에서의 도박을 합법화한 것을 상업적 게임이라고 하며 그 대표적인 것이 복권, 경마, 카지노 등이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성행하고 있는 것이 복권이며 그 다음이 카지노이지만 한 편에서는 불법이 되고 다른 한 편에서는 합법이 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도박은 자신이 득을 보기 위해서는 타인이 손해를 보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또한 직업적으로 도박을 업으로 삼을 경우 결국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도박을 불법으로 간주하며 특별히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상업적 게임으로 합법적인 도박을 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고스톱이 다른 도박 게임과 다른 것은 종래의 화투놀이인 ‘섰다’나 ‘짓고땡’ 등과 같이 자신의 의지로만 게임을 이끌어 갈 수 없다는 점이다. 최소한 3명이 있어야 하며 4~5명일 경우 선의 위치에 따라 의무적으로 죽어야 한다. 게임의 행방을 점칠 수도 없다. 자신이 아무리 좋은 패를 갖고 많은 점수를 얻고 있더라도 상대방이 순식간에 3점을 얻는다면 게임을 즉시 종료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스톱은 구조상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박이나 투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고스톱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이 ‘운칠기삼(運七技三)인데 이는 승부에 있어 운이 70%이고 기술이 30% 작용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고스톱에서는 초보자라도 일방적으로 돈을 잃지 않으며 운만 좋으면 초보자도 계속 선을 잡을 수 있다. 이 때의 운이란 요행수가 아니라 확률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확률은 과학적이고 공정한 것을 뜻함으로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가 주어진다. ■ 민중을 우선하는 고스톱 고스톱을 보다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스톱이 카드놀이의 일종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고스톱이라는 놀이는 세계 각 국의 모든 카드놀이가 지니고 있는 보편성을 지니면서 우리 나름대로의 문화적 특성을 갖고 있는 놀이다. 고스톱에서도 때때로 대형사고가 나기도 한다. 비나 오동 3장이 들어와 흔들고 쓰리고와 피박 등이 겹쳐지면 점수를 곱으로 계산하기 때문이다. 판쓸이 했을 때나 설사했을 때 피를 한 장씩 부조하기도 하는데 이런 규칙이 한탕주의를 조장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곱으로 계산해준다는 것은 판을 키운다는 뜻이 아니라 점수를 내기 어려운 특별한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패 3장을 들고서도 점수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며 쓰리고를 할 수 있는 경우도 하루 종일 놀이하는 도중이라 하더라도 두세 번 나올까 말까이다.
곱으로 계산한다는 것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점수를 내었으므로 그 공로를 인정해준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다. 고스톱을 치다보면 판쓸이가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든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판쓸이를 할 경우 상황을 극적으로 변모시키는데 이 판쓸이는 우연성이 개제되어야 가능한,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일어난다. 설사를 먹어올 때 1장씩 부조하는 것도 설사를 견제하는 구실을 한다. 먹는 것에 눈이 멀어 욕심을 부리다 보면 설사를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경고이다. 설사규칙은 화투치는 당사자가 현실 감각을 갖게 유도하기 위한 규칙이지 빈익빈 부익부를 조성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이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양의 트럼프는 고상한 놀이로 생각하면서 고스톱은 투기로 몰아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 국제선 비행기를 이용할 때 안내원들이 손님들에게 트럼프나 화투를 나누어주기도 한다. 이 때 트럼프나 화투를 주는 것이 투기나 도박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님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고스톱에서 가장 특이한 규칙은 무엇보다도 피가 특별히 존중받는다는 사실이다. 종래의 화투 즉 민화투는 광과 열, 띠가 차례로 20점, 10점, 5점을 받게 되며 가장 많은 장수를 갖고 있는 피는 점수와 상관이 없다. 점수도 띠, 열, 광이 곱으로 늘어나 소위 지체가 높을수록 점수를 많이 받는다. 민화투는 단적으로 신분을 차별하는 봉건사회를 나타낸다. 민화투에서의 피는 띠, 열, 광을 벌어들이는데 동원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못 가진 자 즉 상놈의 역할은 가진 자(양반)의 재산을 증식시키는 구실을 할 뿐이다. 반면 고스톱은 피, 띠, 열, 광끼리 모아서 계산한다. 각 패가 나름대로의 점수를 지니고 있는 동시에 일정한 기준에 이를 때 비로소 1점이라는 자격을 얻는다. 즉 피는 10장, 띠와 열은 5장이 1점이며 광은 제각기 1점이다. 그러나 고스톱은 아주 절묘한 규칙을 갖고 있다. 고스톱은 피가 가장 불리할 것 같지만 실은 가장 유리하다. 피가 유리하다는 것은 숫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스톱을 부르려면 광은 3장, 열과 띠는 7장, 피는 12장을 모아야 한다. 그런데 광은 모두 5장임으로 60%, 열은 9장임으로 77.8%, 띠는 10장으로 70%를 가져와야 하지만 피는 24장이어서 50%만 먹으면 된다. 고스톱을 칠 때 피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이 때문이다. 광의 경우는 60%만 먹으면 됨으로 열과 띠보다 수월하게 점수가 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도 절묘한 규칙이 있다. 즉 비광이 포함되는 경우는 3장을 먹어도 2장으로 간주한다. 적어도 광으로 3점을 나려면 비광을 제외한 광 4장 중에서 3장을 가져와야 하므로 80%를 가져와야 한다. 광으로 나는 것이 띠로 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스톱 규칙은 개정되면서 점점 피를 우대하는 쪽으로 발전했다. 피를 우대한다는 규칙이야말로 고스톱이 국민의 다수를 이루는 민중에게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는 국민적 오락거리로 변했음을 뜻한다. 피박이 생긴 것도 민중의식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피박’의 규칙은 누구든지 기본적으로 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패가망신한다는 것을 뜻한다. 바가지를 써도 크게 쓴다. 민중을 우습게 여겨서는 어떤 경우든 곤란하다는 의식이 철저하게 포함된 것이 피박임을 알 수 있다. 고스톱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규칙은 승부를 가리지 않고 중도에서 포기하게 만드는 ‘소당’이다. 즉 다른 두 사람이 점수가 날 수 있는 패를 갖고 있는 경우 나머지 한 사람이 소당이라 하여 승부의 포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소당을 거는 사람은 두 사람의 승부에 중재를 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바가지를 쓰기 십상이다. 이것이 바로 여타 투기나 도박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큰 증거 중의 하나이다. 어떤 투기도 중재나 화해가 통용되지 않는다. ‘독박’이라는 제도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독박은 특정한 사람이 점수가 날 패를 의도적으로 던져주는 등 불공정 놀이를 하는 사람을 견제하기 위한 규칙이다. 고스톱에서 이런 불공정행위가 인정되면 두 사람이 짜고 한 사람을 궁지에 몰 수도 있고 특정한 사람이 계속해서 돈을 딸 수도 있다. 이른바 ‘짜고 치는 고스톱’이 가능한 것이다. 말하자면 정경유착이나 권력에 아부하는 형태인데 민중의 놀이판에서 이러한 부조리가 인정될 리 없다. 즉 독박 규칙은 부정을 저지른 사람이 책임을 지라는 뜻으로 그야말로 정의롭게 살지 않으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스톱이 절묘한 놀이라는 것은 놀이에 들어가기 전에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끼리 협의하여 이미 개발된 수많은 규칙 가운데 적절한 것을 선택한다는 점이다. 때로는 새 규칙을 만들어 넣기도 하고 잘 알려진 규칙을 제외시키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기본적인 규칙의 골격은 유지한다. 규칙은 마을에 따라 다르고 세대와 직업에 따라서도 차이를 보인다. 고스톱이 지역이나 연령 또는 직업에 따라 알맞은 규칙들이 정해진다는 것은 공동체의 다양한 개성과 특수성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고스톱이야말로 규칙의 규칙까지 세심한 배려를 고려한 민주적 놀이임을 알 수 있다. 민중의 놀이에서 고스톱만큼 민주성을 갖고 있는 것이 있으면 말해보라는 대중의 항변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이해했을 것이다. ■ 한국인의 놀이에 대한 자부심 고스톱의 폐해로 자주 지적되는 것은 고스톱판을 벌리는 사람들이 밤샘을 한다는 것이다. 건강을 해치기 십상이다. 그러나 놀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고스톱만이 밤샘을 하는 것은 아니다. 원래 놀이는 밤새워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고대의 축제를 보면 ‘남녀노소가 밤낮을 쉬지 않고 며칠 씩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추었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탈춤도 저녁에 시작하여 다음날 새벽에 먼동이 틀 때라야 판을 거두며 ‘횃불놀이’, ‘강강수월래’ 등도 밤늦게까지 한다. 밤샘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이들 놀이 모두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많은 사람들이 고스톱 자체를 건강한 놀이로 여기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데서나 고스톱을 친다는 것이다. 이는 고스톱이 어느 장소에서도 판을 벌일 수 있을 만큼 보편성을 갖고 있다는 뜻도 된다. 놀이에서 고스톱만큼 좁은 장소에서 여러 명이 간단하게 즐길 수 있는 것도 많지 않다. 어느 장소에서도 고스톱을 칠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 되면 됐지 단점이 될 수는 없다. 물론 언론이나 지식인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공공장소에서 여러 사람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데도 버젓이 고스톱 판을 벌리면서 돈을 거는 것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 역시 식견 없는 사람들의 책임이지 고스톱 자체가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더구나 고스톱이 노인들의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가 돌아 경로당마다 화투를 돌린 적이 있다. 카드나 화투 놀이가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것과 같이 손 자극운동을 꾸준히 하는 것이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데는 많은 의학자들이 동조하고 있다. 고스톱을 대한민국 국민 거의 대부분이 즐긴다는 것은 그만큼 놀이로서의 장점과 매력이 있다는 뜻이다. 더구나 고스톱을 친다고 해서 도박을 하는 것도 아니다. 어느 게임이나 놀이와 마찬가지로 고스톱도 도박이라는 멍에로 빠질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유혹을 뿌리치고 고스톱을 즐기고 있다. 고스톱을 제대로 알고 대접한다면 고스톱이 망국병이라는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다. 2004/1/25 이종호(과학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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