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Hovenweep 인디언 유적과 신라의 첨성대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9. 13:24

                               

Hovenweep 인디언 유적과 신라의 첨성대

 

 

첨성대의 추적으로 앞선 글에서 나는 하늘 우물 기우제 제단설을 주장했다. 이제 나는 신라의 첨성대에 대한 또 다른 기원 추적으로 미국 인디언들의 '첨성대'에 대한 소개를 하려 한다. 유타주에 있는 Hovenwell 인디언 유적은 신라의 첨성대의 구조와 그 어떤 연관성이 있을 개연성에서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2004년 10월 나는 콜로라도주를 거쳐 유타주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특히 Hevenweep National Monument는 나에게 신라의 첨성대를 연상하게 하는 많은 자극을 주었다. 첨성대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로 알려져 왔지만, 천문대로서도 여러가지 의문이 제기되어 온 바 첨성대의 용도에 대하여 많은 추론들이 이어져 왔던 터에 내가 본 Hovenweep 인디언 유적지는 대단히 자극적이었다. 시대에 있어서도 Hovenweep 시대는 신라의 첨성대 시대와 무관하지 않다.

 

내가 본 Hovenweep 유적지는 작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나있는 콜로라도 동남부와 유타주의 남동부에 그리고 아리조나주와 뉴멕시코주의 이른바 Four Corner에 위치한 넓은 사막 복판 계곡에 곳곳에 돌로 쌓은 '첨성대' 같은 고대 건축물들이 흩어져 있었다. 첨성대처럼 네모난 돌로 둥근 원형 형태로 쌓은 돌 탑(그곳에서는 Round Tower라고 부른다)에는 첨탑 꼭대기에 井자형 돌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도록 아깝게도 모든 타워들이 상단부가 무너져 있었다.

 

 

그러나 Hovenweep 타워의 중간 부분엔 첨성대처럼 작은 네모진 창이 있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이러한 창문의 역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첨성대의 중간 창문의 역할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는 찾아낼 수 있을까? 나는 그곳의 모든 고대 인디언 타워들의 구조를 낱낱이 살펴보았다. 그 결과 생각해낸 것은 중간 창문은 적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 진지로서 입구를 작게 만들고 적을 관측하고 공격하기 위한 중간 참호 역할을 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호번위프(Hovenweep) 인디언 유적의 방문센터에서 얻은 자료에 의하면 이 돌탑들은 이른바 Pueblo로 불리는 인디안들이 A.D. 1300까지 활동하다 사라진 흔적으로 남아 있다. 처음엔 그들이 절벽 아래 동굴에 살거나 흙으로 만든 건축물에 살다가 900년대에 돌로 된 타워 형태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곳에서 어떤 형태로 돌탑을 쌓는 문화를 가져오다 이곳으로 옮겨왔는지는 그 어느곳에서도 설명되지 않았다. 

 

 

네모진 돌로 쌓은 돌로 된 원형 첨성대와 그 어떤 형태의 그곳 국립모뉴먼트 사무실에서도 호번위프 타워들이 어떤 용도로 쓰여졌는지 그 구분은 정확한 자료가 없이 막연한 추측만을 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경주의 첨성대의 기원과 같은 상황이었다. 아래 사진은 멀리 첨성대같이 장방형 돌로 둥글게 쌓아올리고 중간에 창문이 있는 라운드 타워를 멀리서 본 풍경이다. 이러한 라운드 타워가 그곳의 설명에서도 명쾌하게 지적하지 못하고  '전망대'였는지 '제단'이었는지 논쟁이 되고 있었다.

 

 

 

 

Hovenweep 유적지는 창문이 중간쯤에도 있으면서 어떤 것은 아래쪽에도 있었다는 점이 첨성대와 다른 점이었다. 돌탑 형식도 둥근 형태를 중심으로 가끔 타원형도 쌍둥이도 네모진 것도 있었다. 원형이 아닌 돌탑의 경우 전망대 성격보다 주거지 또는 방어 성루 같은 역할을 한듯한 보다 위험한 곳에 세워져 있었다. 물론 높은 곳의 라운드 타워인 경우 제단이나 전망대 역할도 했을 것인지 또 다른 숨은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곳 방문센터에서 보여주는 비디오에는 주로 원형으로 된 타워를 중심으로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스크린을 보고 내가 찍은 장면과 설명 나레이션은 내용에서는 돌탑 안에서 사닥다리를 사용했다고 그들은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첨성대처럼 타워 정상부가 井자형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이 현재 무너져 남아있는 꼭대기 상태 그 자체로만 시물레이션을 만들어 설명하고 있었다. 지붕에 비가 샐텐데도 아무런 예상을 못하여 그냥 꼭대기는 비어있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딘가 상단부에 井자 모양이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더 자아내게 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그곳 National Monument 방문센터에서 보여준 비디오 자료 설명 가운데 보여주는 사람의 얼굴을 새긴 토기 장명이었다. 꼭 신라의 기와 토기에 그려놓은 사람 얼굴과 유사한 토기 모습을 비쳐주고 있었다. 실제 토기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 당시의 타워 건축방법이나 토기에 새긴 얼굴의 모습에서 신라인들의 그것과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에 새삼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동양의 신라인들의 영향에 대하여 다시한번 돌아보게 했다.

 

 

만약에 첨성대가 선덕여왕이 건축했다고 하지만 Hovenweep 인디언 유적지처럼 고대 신라인들의 방어진지의 전망대로서 아니면 그 어떤 제단으로서 역할을 했다고 한다면 그 모양새에서도 서로 일치되는 점이 상당부분 있다. 특히 내가 주목한 것은 Hovenweep 유적지에서 타워들의 네모난 입구가 신라의 첨성대처럼 상당히 높은 곳이 아니면 아래쪽에 난 경우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절벽쪽에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아래 사진참조)

 

 

 

 

신라의 첨성대는 그 구조상 Hevenweep 인디언 유적지의 라운드 타워와 유사한데가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이에 대한 상호 연결성 등을 연구해 볼 여지가 남아 있다. 미국 인디언들의 역사는 1만년 이상에서 Hovenweep 유적지의 14세기까지 신라인들과 같은 고대 동아시아인들의 석조 건축양식 및 제단 건축법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전혀 배제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이미 오하이주에 있는 Serpent Mound와 경주 포석정의 관계에 대하여 글을 올린 바가 있다. 오랜 세월 다양한 유적을 남긴 미국 인디언들의 문화는 신라의 수수께끼의 하나인 경주의 첨성대와 연관하여서도 보다 면밀한 추적이 필요하다.  

(07/05/05 오두방정)

 

 

 

 

첨성대(瞻星臺)는 기우제를 위한 우물 제단이었을까

 

 

삼국유사에 선덕여왕(善德女王  632∼647)때 지은 것으로 기록된 첨성대는 동양에서 최고 오래된 천문대로서 신비한 탑의 반열에 올라 있는데 피사의 사탑 이미지처럼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 발표되어 다시 한번 첨성대에 대하여 관심을 끌게 한다.

 

오늘 뉴스를 보니 국보 31호인 경주 첨성대(瞻星臺)가 북동쪽으로 2.07도 기울어져 있다고 한다. 배재대 손호웅 교수 팀이 첨단 기술을 이용해 실측했더니 첨성대 지붕의 북쪽 끝이 남쪽에 비해 7.2㎝, 동쪽 끝이 서쪽에 비해 2.4㎝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첨성대에 대한 뚜렷한 그 용도에 대하여서는 확실한 실증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데서 천문대설이 힘을 얻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정설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이미 첨성대에 대하여 한글의 기본 네 자음인 ㅇ, ㅁ, ㅅ, ㄹ의 원초적인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는데서 한글 창제에서 그 이미지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 <첨성대는 한글 이미지의 원산지일까>라는 글을 올린 바 있다. 더불어 <첨성대와 북두칠성> 그리고 <신화 이야기36: 첨성대는 별이 떨어진 곳이었을까>에서는 신라의 '아기왕' 탄생 신화에 연관하여 별이 떨어진 자리를 기념하여 탑을 세웠을 가능성도 제기한 바 있다. 오늘 세번째로 나는 첨성대의 용도에 대하여 첨성대 하늘 기우제설을 내놓으려 한다.

 

물론 뚜렷한 역사적 기록들이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문화 유산 가운데 가장 신비한 유적의 하나인 첨성대에 대한 관심을 보다 폭넓은 상상력으로 접근하게 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면에서 나는 이와같이 새로운 가설을 주장하고자 한다. 그러나 기존 주장들보다 분명히 설득력이 있어 보일 것이다. 왜 기우제설인가라는 것은 첨성대가 우물을 닮아 있다는 것에 유추할 수 있다. 신라 선덕여왕이 세운 첨성대는 하늘을 향한 우물 즉 '천정'(天井)으로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천정'이란 말은 우리말에서 방 안에서 지붕쪽으로 바라보는 대들보가 보이는 지붕천정 즉 순 우리말로 '보꾹'을 말하는데 이 천정은 천장(天障)의 잘못된 표기라고도 하나 우리말의 '천정'(天井)은 엄연히 존재했다. '천정'(天井)은 하늘로 올려 세운 우물이란 뜻으로 땅 속으로 들여다보는 대신 하늘로 들여다보는 그야말로 하늘 우물의 '천정'(天井)이다.

 

하늘 우물 '천정'(天井)이라는 말은 왜 남아 있으며 건물 안에서는 '하늘'이 왜 '천정'(天井)으로 표현되어야 할만큼 우물(井)이 강조되어야 했을까? 그것은 역사속의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땅에서는 우물이요 하늘에서는 비였기 때문이다. 우물가에 정화수를 떠놓고 북두칠성이 그  안에 담기기를 비는 가장 큰 기원은 비가 오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정화수 기원은 우물 기우제의 축소형이었다. 고대 기우제의 장소는 우물이 가장 대표적인 기우제 장소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상의 왕이 나라를 다스리거나 하늘에 대한 기원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차지했던 '신의 권위'가 비에 연결되어 있었음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엘리야의 기우제에서 여호와의 신의 권능을 증명해보이고자 바알신의 기우제 권능보다 자신의 신을 불러 '기우제 대결'을 하는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특히 동양에서 왕의 권위는 비를 내리게 하는 기우제의 효과에서 평가되어지기도 했다는 것은 그만큼 하늘의 비는 대단히 중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비가 오지 않으면 우물을 파서 마실 물은 물론 농작물을 경작할 물을 공급했다. 그렇기에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우물에 연결하여 '하늘 우물'에서 비가 내리는 것으로 믿어졌던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비가 오지 않으면 그 기우제를 지내는데 우물에 기우제를 지내는 수가 많았던 것이다.

 

서울의 구로구 시흥동에 있는 호암산(해발 315미터)에 한우물이라는 우물은 용보(龍洑) 또는 천정(天井)이라고도 불렸는데 그 이름만 보아도 기우제와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한우물'이라는 말이 '하늘우물'에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이 우물의 표현에서 용보란 말은 용의 보 즉 봇물의 보이며, '천정'이라는 하늘 우물로 표현한만큼 요긴한 우물이었음을 의미한다. 한우물의 크기는 길이가 22m, 너비 12m의 작은 연못 규모의 큰 우물이기에 대단히 큰 우물이기에 용이 만들어내는 보(洑)나 하늘 우물 '천정0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에는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라 기록하여 호암산에 성(城)이 있어 그 성안에 있는 연못이 가물면 기우제를 지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우물에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은 허다하다. 

 

그렇다면 기우제 제단으로서 경주의 첨성대는 신라시대의 우물과 유사한 면이 있을까?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는 첨성대는 화강석 석조물로 높이 9.17m, 윗지름 2.5m, 밑지름 5.17m, 지대석(地臺石) 1변의 길이 5.35m이다. 하나의 우물 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사이즈다. 위쪽 정상부에 또 각 4개씩으로 짜여진 정자석(井字石) 2단이 놓여 있다.

 

그렇게 보면 첨성대 상단부의 우물 입구 같은 정(井)자를 비롯하여 그 크기나 모양만큼 첨성대는 우물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첨성대의 아래 기단부의 사각형과 위쪽으로 둥글게 올라간 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의식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전체 모양이 우물 모양이라는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첨성대=기우제 제단설은 필자가 처음 주장하는 것이지만, 첨성대=우물설은 이미 나온 주장들이 있다. 작년 2004년 10월에 발표된 건국대 김기흥(사학) 교수의 "첨성대는 천문관측대가 아니라 선덕여왕의 꿈과 비원이 담긴 우주우물"이라는 주장은 새로운 주장처럼 보도되기도 했다. 김교수의 이와같은 주장은 문화계 인사들로부터 "학자로서 고고학 연구차원에서 이같은 주장을 이해할 수는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문헌이나 고증이 부족해 신빙성이 낮다"고 비판되기도 했다.

 

여기에서 김기흥 교수의 첨성대=우물 주장은 그저 강의 자리에서 발표한 내용으로 되어 있어 김교수가 처음 주장한 것처럼 인용되는 것에 나는 반대한다. 이미 첨성대는 그 지역 주민들에게 오랜 세월 우물의 하나로 인식된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김기흥 교수가 발표하기 이전에 이미 '첨성대=우물' 주장은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기록의 방증이 부족할 때 때로는 시인이나 상상력이 높은 사람들에 의하여 '이미지 대조'는 이루어져 있는 경우가 자주 있어왔다. 첨성대=우물의 경우도 같은 경우이다. 1973년 대한일보의 신춘문예에 당선된 정호승 시인의 당선작 <첨성대(瞻星臺)>에는 다음과 같은 시귀절이 들어 있다.  

 싸락눈 같은 별들이 싸락싸락 내려와

 첨성대 우물 속에 퐁당퐁당 빠지고

 나는 홀로 빙 빙 첨성대를 돌면서

 첨성대에 떨어지는 별을 주웠다.

정호승 시인은 1973년에 이미 첨성대를 우물 이미지로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 검색에도 가능한 이와같은 인터넷 정보는 작년 2004년 10월에 주장된 김기흥 교수의 '첨성대=우물' 주장의 실제적 정보가 되었던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 분명한 것은 근거 문헌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김교수의 주장보다는 정시인의 주장이 최소 30년 먼저라는 사실인 것은 틀림없다는 점을 나는 지적해두고자 한다.

 

우물의 윗부분은 대개가 통나무로 사방 서로 걸친 井자처럼 되어 있다. 우물 井자만 이야기 하면 흔히 경주 호우총에서 발굴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井자만을 의식하기 쉽지만 [사원(辭源)]에 의하면 "[井]...혹왈황제소작(或曰黃帝所作)...우대부식읍어정(虞大夫食邑於井), 후위씨(後爲氏). " 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의 황제(黃帝)때부터 井자는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井자는 그러니까 한자문화가 파급된 모든 곳에서 우물로 인식될 수 있었으리라.

 

井자는 그 모양에서 고대 정전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답을 9등분한 井자의 모습으로 거기에는 우물을 중심한 공동체의 경작의 방법론이 숨어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물을 둥글게 만들어 사용한 것도 있지만, 동네의 여러 사람들이 퍼다 먹는 우물은 대개가 井자를 만들어 우물을 만들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집 우물도 井자로 나무를 사방으로 걸쳐 만들어졌던 기억이 난다. 특히 우리집 우물도 첨성대 모양처럼 위에는 井자 모양으로 되어 있지만 안으로 내려다보면 둥글게 돌로 쌓고 위보다 안으로 내려갈수록 넓었다. 경주의 첨성대의 모양이 땅 속에 묻혔다고 생각하면 전통 우물의 모양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신라시대 궁궐에서 사용하는 우물의 경우는 우물의 입구가 정(井)자의 화강석으로 얹어 첨성대 모양에 일치한다. 반면에 일반 민중들이 사용하는 우물의 경우에는 목재나 돌로 원형 우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井자형 우물이 동네에 들어온 것은 신라시대 이후에 신라의 궁중우물이 보편화되어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는 속담이 있지만, 우물은 혼자 파는 것이 아니다. 마을을 만들고 필요한 곳에 우물을 파려면 여러 사람들이 공동으로 우물을 파야 가능하기 때문에 우물은 동네문화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우물가에서 생기는 많은 이야기들은 아낙네들의 '입방아 장소' 이상 동네의 물을 공급하는 연유로 중요한 중심 장소의 하나였다. 특히 신화에서 우물가에서 아기가 태어났다는 것은 여인네들이 물길러 가서 아기를 낳았을 수도 있을 것이란 추측 이상의 우물에 비치는 북두칠성의 신앙에도 연결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신라시대의 주요 인물들이 우물가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나정'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물론 그의 부인도 '알영정' 우물에서 태어났다. 우물과 신라와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이다. 선덕여왕이 우물 형태의 첨성대를 축조했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우물과 연관된 신라 시조에도 연결된다.  

 

우물이 북두칠성이 비치는 의미처럼 첨성대가 하늘의 별과도 관계된다면 경주에서 발굴되는 우물에는 왕들의 신화와 더불어 첨성대에 연결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다. 언젠가 KBS에서도 첨성대와 구조가 아주 유사한 경주의 우물 구조를 보여준 적이 있기도 하지만, 경주시 동천동 681-1번지의 아파트 공사 도중 발굴된 우물은  신라시대의 우물이 첨성대와 유사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경주대학교 박물관의 조사지역(약 3천평)에서 발굴된 20여기의 우물들의 구조는 대체로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형태로 첨성대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첨성대 모양과 닮은 사적 246호인 김유신 장군 집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굴된 재매정의 모습

 

김유신은 태대각간의 자리에까지 오른 거의 왕의 반열 수준의 높은 인물이다. 위의 사진에서 보는대로 그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굴된 재매정이라는 우물은 첨성대처럼 위가 井자형이고 내려갈수록 원형으로 넓어져 있다. 1993년 발굴된 재매정은 깊이는 5.7m이며, 가장 넓은 부분은 1.8m이고, 바닥의 지름이 1.2m로 벽돌같이 다듬은 돌로 만들었다.

 

첨성대가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것은 유명한 동양학자 조셉 니이담이 지은 <중국과학 기술사>(1953년)에 경주의 첨성대가 당나라의 천문대의 구조를 영향을 주었다는 내용에서부터였다. 그때부터 첨성대는 '동양최고의 천문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용도에 대하여서는 아직도 많은 논쟁이 되고 있다.  

 

이미 1970년대에 천문대로서 첨성대의 문제점들이 지적되기 시작했다. 첨성대 중간의 창문이 사람이 드나들기에 충분하지 못하다는 점과 그리로 통해서 하늘을 관측한다는 가설 또한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것과 사다리로 위쪽으로 오르내리기나 지름 2.85m의 정상부의 크기가 천문관측기를 갖다두고 볼 충분한 공간도 아니며 그렇다고 사람이 거기에 올라가서 보아야할만큼 아주 높은 곳도 아니란 점 등이 지적되었다.

 

첨성대가 27단으로 되어 있다고 해서 선덕여왕이 27대란 점을 강조했다는 것은 너무 편협한 이론이다. 차라리 정상부 井자 돌까지 합쳐 28단으로 쌓은 것은 하늘의 별자리 28숙(宿)을 상징한다는 설명은 보다 보편적일 수 있다. 내가 주장하는대로 첨성대가 하늘우물에 기우제를 지내는 우물제단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할 때는 첨성대 모양과 연관하여 모순되는 점은 없다.

 

동시에 첨성대가 불교적으로 수미산을 상징한다는 해석은 통일신라시대 당시의 '하늘'의 개념은 당시의 종교적인 배경에서 수미산은 하늘의 산이나 같은 믿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첨성대는 그 이름에서도 유사한 강화도의 마니산 '참성단'이나 평양의 '첨성단'과도 같이 하늘에 기우제 등 제사를 지낼 수 있던 곳이라는 점에서 첨성대=기우제 우물제단설은 첨성대의 용도에서 가장 근접한 새 이론이 될 수 있다. 천문 즉 하늘을 읽는다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비를 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첨성대의 '천문대' 주장도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모순된 추측은 아닌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물에 기우제를 지내는 전형적인 고대 기우제 관습에 비춰볼 때 하늘 높이 우물을 만들어 하늘 우물 '天井'에 비를 기원한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추론이 된다. 특히 첨성대는 그 모양이 우물 모양이라는 점에서 고대 정치종교적 배경에는 기우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지금까지 단지 첨성대가 우물이라는 전통 민간 인식을 바탕한 정호승 시인의 시 이미지의 주장에서나 김기흥 교수의 첨성대=우물 주장을 넘어 신라의 선덕여왕은 왕으로서 하늘의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한 기우제 제단으로서 하늘 우물을 형상화시킨 첨성대를 축조했다고 보는 것은 또 하나의 첨성대 용도에 대한 새로운 주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첨성대가 선덕여왕에 의하여 축조되었으나 그녀가 죽은 1년 후에 완성되었다는 면에서 어떤 면에서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우물 탄생과 관련하여 선덕여왕은 그녀의 사후에 태어날 곳을 첨성대 하늘우물로 미리 만들어두었는지는 아직 열려진 상상이다. 

 

그러나 수많은 우물 기우제에 연관하여 첨성대는 기우제를 지내기 위한 하늘 우물로서 천정(天井)을 상징화시켜 건축된 기우제 제단이었을 것이라는 나의 새로운 주장은 첨성대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하늘에서 두레박이 내려온다는 견우직녀의 전설 속에 두레박은 '우물'을 연상하게 한다. 첨성대는 하늘에 있는 우물에 두레박을 드리우고자 하는 지상의 선덕여왕의 간절한 기우제를 위한 기원의 상징이 들어 있었으리라. 그 신비하게 만들었을 두레박은 무거운 돌이 아니었을 것이기에 사라져 오늘날 첨성대로 그 우물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 첨 성 대 - 

 

                              하늘 우물(天井)에

                              두레박 드리우는 선덕(善德)

                              단비 내리는 정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