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새라불, 사로, 계림, 금성, 동경?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9. 13:52

새라불, 사로, 계림, 금성, 동경?

    역사가 옛날로 갈수록 지리(地理)의 문제는 첨예한 논쟁거리다. 대부분의 역사논쟁에서 현재 우리가 역사(歷史)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 그 지역에 나라를 세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땅에 살던 자신들의 종족적 옛조상이나 다른 종족의 것을 계승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정립한 것이기 때문에 만약 지역이 아니고 문화라면 시들시들할 것도 지역문제만 나오면 날카롭다.

  해묵은 독도논쟁이나 뜨거운 감자인 일본의 한반도 경영설(임나일본부설), 백두산 정계비 등등은 물론이고 한사군의 위치, 대진국(발해)의 위치 등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있는 것들이 많다. 이 문제는 또한 일단 설정한 내용을 고고학이나 문헌으로 증빙하는 실증사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신라의 수도로 알고있는 경상도 경주는 그곳에서 많은 신라고분과 절터, 돌조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추정이 가능하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것과 고고학적 논증을 합쳐 그곳이 신라의 수도 서라벌이고 금성이고 동경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백제의 경우는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백제가 해상국가였고 중국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삼국 중에 가장 능했으므로 중국 고분과 비슷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가 중국 것이라고 알고있는 것 중의 많은 것들이 백제의 것이다. 하다 못해 우리가 알고있는 백제의 도읍은 거의 엉터리이며, 김부식의 의도적인 왜곡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중국 책만을 가지고 백제의 위치를 추정한다면 아마 알고계시는 것과 엄청 달라서 매우 기쁘시거나 속상하실텐테, 이것은 다음번에 풀어보겠다. 어쨌거나 지역의 문제가 실증 만의 문제인가 하는 문제는 한 가지만 알고 두 번째는 모를 때 그런 것이다.

  이제부터 두번째는 무엇이고 그것을 알면 어떻게 되는지를 살펴보자. 신라의 서라벌이나 고구려의 국내성이나 백제의 한성 등 기마종족의 도읍은 주로 “벌”이다. 불, 부여, 부리, 벌, 펴라(평양) 등 신성한 벌의 의미이며 이것은 나라, 누리 등의 강역과 일정한 차이를 가진다. 누리가 강역이라면 불이나 벌은 그 중에서 도읍에 해당한다. 그런 면에서 “신라”를 서라불, 새라불로 읽으면 그것은 “벌”이고 새라, 사로, 새나라로 읽으면 “누리”를 의미한다.

  어쨌거나 기마민족의 도읍형태는 정착민족인 중국의 그것과 달라서 상당히 유동적이다. 일찍 농경종족으로 정착한 중원의 민족과는 달리 기마종족의 도읍은 “계속 이동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도읍을 옮기는 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다. 계속 밝은 들판을 찾아 “아사달”을 옮기는 특성을 고구려의 흩어진 고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스키타이 종족의 대부분이 이런 이동식 도읍을 가지고 있다.

  초기에는 이것이 마치 몽고족의 천막촌과 비슷한 형태를 가졌을 것이지만 나라와 도읍이 생기는 옛조선 이후로는 어느 정도 규모와 기능 면에서 천막촌을 넘어섰다. 이른바 “성곽”이 보이는 시점이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성곽은 정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머무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건국후 일정기간을 넘기고 고대국가로의 기틀을 잡는 시점인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오면 이런 이동식 수도를 정착식으로 바꾸려고 군왕들이 상당히 노력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이때부터 이동식 도읍이 아닌, “정착성 천도”가 나타나는데 백제는 근초고왕 이후, 고구려는 장수왕 이후, 신라는 진흥왕 이후다. 가장 늦은 나라는 물론 고구려였다.

  백제는 초기부터 중국땅에 원거리 식민지를 두고있어 도읍이 그저 이동거점에 불과했으므로 비교하기가 어렵다. 물론 신라는 기록에 보기를 도읍을 옮긴 사실이 드물다. 그러나 신라가 원래 6부족이 통합한 형태로 출발한 것과 “새땅(새라불,서라벌)”이라는 도읍명칭을 기억한다면 이런 추정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신라가 어디서부터 옮겨왔는지는 전혀 기록이 없다. 그들이 처음부터 지금의 경상도에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지금부터 필자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시라. 신라를 계림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계”자는 꼬꼬닭을 의미한다. 이를 음으로 그대로 옮긴 말로는 “길림”이 있고 뜻을 우리말로 풀어놓은 것은 대구의 옛명칭인 “달구벌(닭벌)”이 있다.

  이처럼 한 지방의 명칭이란 전이에 전이를 거듭하는 법이어서 지금의 명칭이 그때 그대로라고 믿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경상북도 상주의 옛 이름은 “낙양落陽”이었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우리 국토의 절반 이상이 신라다. 하다못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옛이름이 신라(사로-서라벌-셔블)가 아닌가!

  아직까지 나는 기억한다. 대구에서 태어나 16년을 살았던 나는 경주에 갈 기회가 많았다. 다보탑, 첨성대, 안압지, 포석정이니 하는 것들을 찾아가보면 어린 아이 장난감 수준이어서 “실망”만을 안고 돌아온다. 이게 천년고도라고? 그렇다니 믿어야지 하면서, 아, 우리는 겨우 이거란 말인가...

  석굴암도 나를 감동시키지는 못했다. 유네스코가 지정하면 뭣 하나, 이 산골에 암자하나 덩그렇게 있는, 그래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자랑하라고? 그래서 그 후로 경주에는 안갔다. 서울 와서 고등학교 다닐 때 수학여행을 경주로 간다길래, 화딱지가 나서 사흘내내 문 닫고 소주만 마셨다. 물론 내 불량기가 경주 탓은 아니다.

  이런 실망은 아무리 에밀레종의 신비와 그윽한 신라불상의 미소가 세계적인 거라고 해도 달래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황룡사 9층탑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으로 치면 단층건물만 즐비하던 경주에 황룡사 9층탑은 거의 20층 빌딩의 높이고 경주시 어디서나 보이는 첨탑이었고 황룡사 절터는 불국사의 20배에 해당하는 크기로 지금도 떡하니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큰 첨탑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 전망할 수 있는)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왕의 위엄을 진짜로 상징하던 대궐은 어디있었나?
 
  없다!!! 없다! 궐터가 없다.

  천년왕국의 수도에 궁궐도 궁궐터도 없고 무덤과 절만 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사실인가? 사실이다. 이거야말로 불가사의 중에 불가사의다. 500년 조선왕조만해도 4대문 안에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 덕수궁, 경희궁(이중 창경궁과 경희궁은 일제가 완전히 없앴고 경복궁과 창덕궁은 뼈대만, 덕수궁은 흔적만 남았다. 차라리 운현궁(?)은 온전히 있다.)5개가 있다.

  그런데 천년동안 왕조를 유지한 신라의 도읍에, 한 번도 옮긴 적이 없는 서라벌에 궐터가 없다! 왕들이 죄다 중이었다? 왕들은 절에 살았다? 왕들은 다 구름 위에 살았다? 일년내내 여행만 다녀서 필요없었다? 황제가 지방을 순시하고 세우는 것이 순수비다. 이 순수비를 세웠다는 것은 스스로 황제라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다. 황제의 나라 신라에 궁궐이 없고 천년이 지난 지금 궐터가 사라지고 없다?

  독자여러분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실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안다. 어느 고대, 중세국가건 일단 도읍을 정하면 맨 먼저 하는 일은 궁궐 짓는 일이다. 궁궐을 짓기 위해 터를 정하고 성곽을 그린다. 도읍의 문을 달고 주문(主門)과 궁궐의 대문을 잇는 큰 길을 낸다. 이 길에 돌을 박아 진흑탕이 되는 것을 막는다. 궐을 다 지으면 길을 세우고 집들을 들인다. 외곽의 성에 망루를 세우고 돌담을 쌓아 요새를 만든다. 이 표준은 중원과 만주와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안틀리다. 어느 나라도 자기나라 서울에 절과 무덤과 탑과 제단을 쌓으면서 궁궐을 안만드는 기이한 짓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풍파에 시달려 땅으로 가라앉는다해도 천년이다. 천년도읍의 궁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평양이고 개성이고 하다못해 예성강 하구언덕에도 궁궐터는 남아있다. 그런데 천년신라의 도읍에 궐터가 없다니, 이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닌가! 누가 좀 찾아주시라. 못찾겠으면 확실한 이유라도 일러주시라!

  그러나 독자 여러분, 삼국사기를 아무리 읽어도 신라의 서라벌이 지금의 경상도 경주라는 이야기는 없다. 정말? 정말! 그래서 나는 짐짓, 경주가 정말 서라벌인가? 하는 해괴하고 황당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도 상상력이라면 상상력이다. 이거, 무덤터 아냐? 이거 지방 토호의 소왕국 터 아냐? 진짜 신라의 서라벌은 다른 곳에 있는거 아냐? 물론 단정은 못하지만 이런 상상을 쭉 하던 중 이런 상상을 기상학적으로 증빙하는 어느 기인 학자를 만나 상상력이 확신으로 변했다. (이 학자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다)

  이렇게 엄연한 문제를 우리는 잊어버린다. 이거야말로 정말 문제다. 왜 없나! 대답해라. 아무도 문제를 안삼는다. 궁궐터를 누군가 묻어버리고 산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불타 없어졌더라도 있어야할 것 아닌가?

  이 문제를 신라와 이웃했다는 백제로 옮기면 문제가 더 심각하다. 거기는 궐터는 커녕이고 지방토호의 대가집 흔적도 없다. 낙화암? 고란사? 당신은 지금 그게 사실이라고 믿고있는가?

  삼천궁녀와 소정방이 낚은 백마강의 용을 당신은 정말 믿는건가? 백제,Hundred government 해상제국 백제의 자존심을 이렇게 뭉게도 되는건가?

  나는 못믿겠다.

  사실 고대사 X파일이라는 구상을 하게된 것도 바로 이 수 없는 불가사의에 쌓인 적막한 세월의 말없는 아우성을 누군가 들으려고 해야하지 않겠냐는 등골 오싹한 바람소리 때문이었다. 뉴욕(New York)사람들이 만약 옛날부터 요크(York)는 아메리카에 있었다고 믿는다면 그것도 웃기는 거 아냐?

  이 문제도 비슷한 듯한데? 정말 웃긴다. 이거 정말 어떻게 된건가?

  우리가 꿈꾸는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