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장 한국, 인도, 수메르, 이스라엘 >
필자는 수메르 전문가가 아니므로 우리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 간단히 몇 가지만 말하고저 한다. 먼저 인도와 수메르에 관련된 사항들을 나의 저서에서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 제 1절 수메르의 역사. ("한"에서 발췌) >
성경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한국과 수메르-이스라엘에 대해 알지 못하고 단순히 성경만 대하니 종교사상의 뿌리를 알 수 없으며 성경에 대한 보편성, 객관성, 공정성이 없는 무조건적 옹호론에 지우쳐 편파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
이것은 지도자들이 인류의 역사를 모르는 채 일방적인 사상주입으로 지나치게 절대성을 부여하게 되어 그 성경속에 빠지게 됨으로서 우리민족의 역사, 전통, 사상을 깡그리 배척하는 정복자 로마의 앞잡이노릇을 하고있다.
모든 역사와 종교는 그 뿌리가 있으며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없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수메르, 아카드, 바빌론, 이집트, 그리스, 앗시리아, 가나안의 역사와 전통에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이들 모두의 뿌리는 수메르다.
수메르의 역사는 갈데아 우르, 키시, 니느웨, 바빌론, 수샤, 하란, 가나안, 헷, 시리아, 이집트 등의 지역에서 1,700년대부터 현재까지 엄청난 유물유적이 발굴되어 세계의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왔다.
수메르민족은 폐르샤만쪽 이란 남부 쟈그로스 산맥쪽에서(창11:31) 점차 이라크 남부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BC.4,500∼4,000년경부터 도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BC.3,5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에 확실히 나타나고 문자적 기호를 사용하였으며 BC. 3,000년경에는 열 개정도의 도시국가 형태가 성립된 것으로 보여진다고 한다.
BC.2,900∼2,700년경에는 키시의 첫 왕조(메타나)가 설립되고 교육을 시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BC.2,600년 전후시대 우르 제1왕조가 성립된다.
인구가 많아지고 전쟁이 많아지는 시대다.
스메루의 첫 왕조는 키시, 우르(제1왕조 BC.2,600년 전후, 메산네 팟다). 에렉(우르크, BC.2,600년 전후, 태양신 우투의 아들 메스키아 가쉘)인데 키시는 우르에게 정복당하고 우르는 에렉에게 정복당한다.
BC.2,500년경까지 아답왕 루갈 아넨문두가 수메르 전지역을 정복한다.
이 시대부터 역사를 기록했다.
BC.2,450년경 라가쉬 왕조가 성립되고 할랍의 일(IL: 一, 한)이 일어난다.
아카드(창10: 11의 아캇)왕조의 창시자 사르곤대왕(BC.2,300∼2,230)은 수메르 전지역을 평정한다.
BC.2,100년경 굿트족에게 정복된다.
BC2,060년 우르 남무가 우르3왕조를 건설하는데 부패사회 쇄신개혁법으로 유명하다.
대략 60년쯤 후부터(BC.2,000년경) 아모리인들과 엘람인들의 침략에 시달려 힘을 잃는다.
이 시기에 지구랏이 건설된다.
BC.1,970년 바빌론에게 정복된다.
BC.1,750년 바빌론 6대왕 함무라비 대왕에게 수메르는 완전히 멸망한다.
이로부터 수메르의 문명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바빌로니아의 역사가 전개된다.
바로 이 시기에 아브라함이 이라크 남부 갈데아 우르를 떠나는 시대이다.
이스라엘민족의 방랑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은 "몽고리안+흑인+백인"의 혼혈족임이 밝혀졌는데 아브라함이 혼혈되었다 하드라도, 옛날에는 집단부족국가나 도시국가가 주로 동일민족집단으로 형성된다는 일반적인 경향으로 볼 때 수메르의 첫째도시인 갈데아 우르에서 살았으므로 수메르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수메르인은 몽골지역과 중국지역에서 이동한 몽고리안 족속들이다.
후세에 히브리인들이 셈족계열의 형태가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숫자적으로 많은 셈족과의 혼혈 때문이다.
수메르족은 터키를 거쳐 그리스에 건너가서 스파르타를 건설했고 밝한(발칸)반도와 함께 서구문명의 원조가 되었다.
< 제 2절 문자와 문화 >
상고대(上古代)의 서아시아 언어는 크게 셈족어(아카드어)와 비셈족어(수메르어)로 분류된다.
다만 수메르어는 아카드어에 대단히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바빌론 비문연구에서 나타난 것을 보면;
1.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 나갔다.
2. 음절어(音節語)와 표의문자(表意文字)다.
3. 각각의 기호가 결합하여 한 단어를 형성하거나 싸인 하나가 단어를 의미할 수도 있다.
4. 단어가 발음과 의미는 같아도 기록되는 방식이 다르다.
5. 한 개의 싸인은 하나 이상의 음을 가지는 다음문자(多音文字)다.
6. 셈족어의 자음은 거의 불변인데 모음은 변화가 심하다. 그런데 모음도 자음처럼 불변한 것으로 보이는 음절, 문자체는 수메르어로 추정된다.
7. 수메르 설형문자는 BC.3,500년경 태호 복희씨가 사용한 팔괘부호와 비슷하고 소아시아에서 영국까지 이동한 켈트 고음부의 오감문자 등과 흡사하다.
8. 구윤직 비문이 스키타이 쐐기문자를 고안했음이 밝혀졌다.
9. 바빌론어는 앗시리아어와 함께 아카드어로 통용되었고 아카드어는 수메르어를 기층으로 하고있으며 문자와 문명을 고스란히 이어 받았다는 것이 발굴된 토판기록에서 밝혀졌다.
10. 히브리어는 고대 중동의 여러 언어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지극히 인위적인 언어라는 것이 밝혀졌다.
11. 수메르어는 BC3,500∼BC1,750년경까지 자취가 남고 그 이후는 아카드어와 바빌론어에 흡수되어 사라진다.
12. 바빌론지역의 토판기록은 BC4,500∼BC2,500년의 기록이 대부분인데 쐐기모양의 작대기를 조합하여 그려놓은 것이 대부분이다.
초기에는 선을그어 표현했는데 이집트의 그림표와 비슷하다.
13. 수메르어는 처음에 세로로 쓰다가 나중에는 가로로 썼다.
BC15세기까지 지중해 연안도시와 국가들 사이에 통신수단으로 썼다.
설형문자는 BC4,500∼BC100년경까지 북쪽 아르메니아에서 남쪽 인도양과 동쪽의 폐르샤 서쪽의 지중해 연안까지 광범위하게 쓰여졌다. (인도-서아시아 전체가 수메르어 권에 있었다.)
14. 구약성서의 모든 주석은 쿰란 사본과 우가릿 토판에 관련맺지 않고서는 언급이 불가능할 정도라고 한다. 쿰란 사원은 에세네파로서 성경에서 적극적으로 배척 당했으며 아침마다 태양신을 경배했다.
※ 기독교 서양파에서는 에세네파가 불교적인 색체가 강한 이단이라고 몰아 부쳤으나 실제로는 한국의 전통을 지키고 조상이 물려준 인간도야의 수련법인 선(仙)수련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를 불교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 옛 조상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받은 대 스승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에세네파는 전통적으로 흰옷을 입었고 태양을 경배했으며 옹관묘를 사용하는 등 우리민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문제는 선종(仙宗)과 불교 그리고 기독교에 넓게 함축되어 있는 공통유사성을 최대한 배척하여 모든 동양적인 색채를 깡그리 말살시키고 독립적인 종교를 추구하고 자 했던 것이다.
기독교는 역사적인 뿌리, 사상적인 뿌리, 종교적인 뿌리를 모두 잘라내고 창조적인 종교가 되었는데 그 시조를 예수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을 예수이전의 조상이나 역사가 없는 신생아로 만들어 버렸다.
이스라엘민족의 대부분은 바로 이점을 용납하지 않게 되고 예수를 메시아로 취급하지 않게 되었다.
로마제국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오랜 역사를 가진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라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국이 우리 태고사 1,600년을 잘라내고 일본이 우리 상고사 4,000년을 잘라먹은 것과 똑같은 역사 말살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거대한 정치권력의 힘을 가진 서양파에게 동양파가 숙청당하고 모든 경전을 불태우게되었던 배경이다.
그래서 지금 성경은 로마의 성경이지 동양인 이스라엘의 성경이 아니다.
● 로마는 당시 수많은 식민지 통치에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중앙통제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의 중심사상인 "원수를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일곱번의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는
① 지배자인 로마에 항거하지 않는 "사랑과 용서"라는 교리가 로마의 식민지배에 정치적 이용가치가 충분히 있고,
②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모든 식민지에서 사용함으로서 언어소통을 원활히 하여 식민지배에 도움이 되게 하고,
③ 라틴어를 널리 보급하고 사용함에 따라 자기민족의 언어와 관습을 버리게 되어 독립적인 민족성을 잃어버리게 됨으로서 로마정권에 순화되어 반항하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게 하며,
(일제시대에 일본의 일본어 보급과 창씨개명이 이와 비슷한 정책이다.)
④ 이렇게 뭉쳐진 사상무장은 전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무서운 힘을 가진다는 목적이 뚜렸 했다.
이러한 로마의 정책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로마는 망했지만 종교는 살아남아 세계를 정복했고 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위대한 동양의 성자 예수의 제자들이 아니고 로마가 빌려다 간판으로 사용하는 로마황제의 병사로 둔갑하여 기독교가 가는 곳에서는 언제나 그 민족의 전통과 사상과 관습과 문화가 깡그리 사라지는 독선적인 정복을 하여왔고 더불어서 자기 몸을 희생해서 사랑과 용서를 가르친 예수의 가르침과는 정 반대로 로마제국의 방법대로 무력을 동원하여 세계를 서양사람들이 정복하여 서양의 시대를 열게 되었으며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살육을 감행한 종교가 되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런 점을 고찰해서 이대로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역사를 로마예수 이전으로 연결하여 동양적 사상을 회복시킬 것인가를 깊이 숙고해야 될 것이다.
이대로 계속하는 것은 서양의 노예밖에는 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예수로 회복시키고 동양적 경전을 추가해야만 북한과 중국에 가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15. 슈트트가르트의 교구목사이며 튀빙겐대 신학교수인 그프뢰더는
"기독교 교회는 에세네파 공동체에서 나온 것이며 그들이 발전시킨 사상과 규칙 없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16. 우가릿 토판에 의하면 BC.1,200년경에 알파벳 시초의 원형문자가 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성경 시편 29가 폭풍신 바알에게 바친 가나안의 옛 찬송을 야훼식으로 개작했다는 것이 우가릿 점토판에서 입증되었다.
시편 104 : 2, 3, 6, 7, 10, 13절 등은 같거나 우가릿 토판과 비슷하다.
17. 안(AN), 아누(ANU)는 수메르의 최고신, 하늘신이다.
인(IN, EN)은 수메르의 인과 아카드어의 베룸은 "주님"을 의미한다.
BC.3,000∼2,000년 까지 사용했다.
BC.2,000년경부터 "인"에 대한 호칭에 혼란이 생기는데 이 시기는 침략을 받은 때이고 여러 강족이 등장하며 사회의 부패가 심했다고 한다.
18. "인"은 불교의 인달라(인드라: 釋迦帝桓:SAKRA-DEVANNA-INDRA)와
수메르왕 인-사쿠사나(IN-SAKUSANNA)가 어간에서 발견되는 사크(SAK), 안(AN), 인(IN) 등과 일치되며 모두 최고로 높은 신을 뜻한다.
※ 인도의 불교는 힌두신이 불교에 귀의하였다고 하였으니 불교사상- 힌두사상(힌머리사상: 제천사상: 천주사상)- 드라비다 사상- 수메르 사상(소머리 사상: 제천사상: 천주사상)- 밝달사상(제천사상: 천주사상)-밝나라 사상(제천사상: 천주사상)으로 그 뿌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상고시대의 사상은 "삼신이란 주체는 한분의 하느님이고 그 작용이 셋이다.
작용의 나타남이 하늘, 땅, 사람이다."고 하여 창조주 하느님을 첫 조상으로 믿는 종교였다.
※ 환인(桓因)이란 말은 옛 우리말 "밝음의 신(태양신)"이 민족의 이동에 의하여 인도로 건너가서 인도의 베다나 법화경의 인드라(Indra)의 의미를 한문으로 바꾸어 쓴 것인데 인드라는 하늘나라의 빛의 신이다.
즉 태양신을 의미한다.
이것을 후세에 불교의 영향으로 환인이라고 바꾸어 부른 것이니 한국인은 환인이란 말을 쓰지 않는 것이 좋다.
19. 홍수이전의 왕들의 이름 7개가 나온다.
※ 우리 밝나라 7세환인과 수메르의 7대왕, 그리고 일본서기의 신세7대(神世七代)는 같은 역사를 말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20. 알버트. A. 트래버는 "수메르 초기문명의 특징은 많은 점에서 중앙아시아 어느 고원지대에서 내려온 고산족 같다."고 하였다.
사무엘. N. 크램머는 "수메르족은 본향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이 높은 산꼭대기에서 신들에게 예배한 것으로 보아서 산악 고원지대에서 내려온 것 같다."고 하였다.
레오날드 울리경은 " 수메르족이 본고장에서는 높은 장소에서 예배했음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신들의 회의 장소인 수메르의 에쿠르(EKUR)는 "산의 집"이고 앗시리아의 아슈르(ASHUR: 큰산)성전은 "큰산의 집"이란 뜻이다.
홍수후 진흙을 구워 인조산을 만든 것이 지구랏이다.
이것을 "하느님의 산, 하늘언덕"이라고 했다.
이집트인이 임호텦피라밋을 조서왕(BC.2,650)때 처음 세웠는데 이때는 수메르의 문자. 건물양식, 기타 문화적 영향을 받은 후이다.
피라밋의 원조는 몽골(쉔시)이며 약 6,000년 전에 세계최대의 피라밋을 이미 건설했다.
21. 고대 한국과 이스라엘의 관습과 사상이 무려 33가지나 똑같다.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같다는 결론이다)
22. 노아 홍수에 나오는 까마귀는 수메르의 홍수설화에 있다.
※ 7만년전의 견우와 직녀이야기에 나오는 까마귀는 수메르, 몽골족, 바빌론, 이스라엘의 성경, 북유럽의 스웨덴, 네델란드, 아이슬란드의 창조설화나 홍수설화에 다 나오고 중앙아시아, 캄차카반도, 알래스카, 북미대륙에도 나오며, 고구려, 백제, 신라, 일본에도 어김없이 나온다.
까마귀는 태양신의 정기(양기) 즉 성령새이다.
이것은 지역에 따라 제비(중국), 기러기, 오리, 늑대 등으로 바뀌었고 서양은 비둘기로 바뀌었다.(알다이 신화 참조)
23. 인종이 검은머리다.
언어는 교착어로서 중국보다는 한국과 일본의 고대언어에 더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씨름, 상투, 소머리사상, 모계전통, 60진법과 음력사용, 주택구조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같다.
< 그림1. 사상과문화 표 >
(이상 "유왕기" 저 한(HAN)에서 발췌)
< 그림3. 씨름 >
< 제 3절 : 한국, 인도, 수메르 >
(7만년 하늘민족의 역사에서 발췌)
1. 수메르족은 BC.5,000∼4,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에 나타나서 BC.3,000년경부터 고도문명을 전하고 BC.2,000년경에 아모리인에 멸망하여 사라졌는데 태양숭배, 삼신숭배(하느님), 간장점, 상투, 평좌법, 씨름 등이 우리와 같다.
2. 흉노족인 훈족, 훈나라의 "훈"은 "한"의 방언으로 보인다.
※ 한국과 몽골은 왕을 "한, 간, 가안, 가한, 칸)등으로 썼다. 이 "한"은 민족의 이동과 지역적인 방언으로 수메르는 "안", 흉노는 "훈", 중국은 "군(君)"이 되었다.
3. 한국어는 알타이어 기층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모든 알타이어와 친근관계가 있을 수 있다.
4. 이집트의 파라오(대저택), 인도-유럽의 페리 대자(城), 희랍어의 페리, 메소포타미아의 해뜨는 동편지(東便地) 이란 즉 페르시아, 아사달시대의 페라(평나, 백악, 평양, 불내, 불함, 부악, 붉악, : 도성, 도성이 있는 산 : 밝은 땅),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모두 어원이 비슷하거나 같은 의미다.
5. 인도의 드라비다어(구자라트어)는 한국어와 같은 계열이다.(헐버트)
6. 남인도 드라비다 언어 중 "ㄱ, ㄴ, ㄷ, ㄹ, ㅁ, ㅅ, ㅇ"의 자음과 "아, 야, 어, 여, 오, 요, 우, 으, 이"의 모음이 한글(가림다)과 같다.
7. 간지스강의 신이 "강가(GANGA)" 여신인데 강가란 말은 우리말의 "강(江)"과 같다.
8. 드라비다어족과 우랄알타이어족 사이는 먼 친근성이 있다.(맹게스)
9. 드라비다어족의 타밀어 중 날(日)은 몽고어의 나라(太陽)와 비교되고 한국어의 날(日)과 같다.
10. 수메르어와 중국어는 같은 뜻을 가진 단어들의 소리, 글씨가 같고 글자발전도 중국문자처럼 6단계로 발전된 것이 입증되었다.
11. 수메르어는 교착어이다. 한국어는 교착어이다.
12. 수메르어는 혈통적, 언어적으로 고산지대에서 온 것이다. 또는 중앙아시아 고원에서 내려온 듯 하다.
13. 수메르란 소를 말하며 우르(UR)도 소를 뜻하는 말이다.
14. 고대 인도의 광역에 티베트와 몽고, 서부이란이 포함된다고 하였다.
15. 드라비다 민족은 BC.4,000∼BC.3,000년경에 나타났다.
16. 소련의 드라비다 연구가 앤드로노프는 인도 모헨죠달의 인장문명이 드라비다어족의 언어로 쓰여진 것 같다며 BC.4,000년경 외부에서 나온 민족 같다고 하였다.
17. A. 콘드러톱은 "인도반도에서는 발생과 멸망이 수수께끼인 오랜 문명이 발견되었는데 이 문명의 창시자는 문자를 지녔고 그 언어는 타밀인과 기타의 드라비다 민족의 언어를 닮고 있다."고 했다.
18. 원 인도문명은 BC.3,000년 중반에 갑자기 개화하여 문자와 세련된 예술,도시, 하수시설 등을 갖추었으나 BC.2,000년경 갑자기 사라졌다. 아리안족의 침입시기와 일치한다.
드라비다족은 약 5,000년 전의 고도 문명족으로 성곽도시와 관개용 땜을 건설했는데 맨처음 서북부지역에 근거하다 점차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주로 인도 북부지역에 강력한 왕국들을 수립하였으며 남부에까지 왕국들을 세웠다.
이들은 인도인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들의 신은 지금도 믿어지고 있으며 타밀어, 테레구어, 말라야어, 카나다어, 투루어 등의 많은 언어가 현재 인도남부 전역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이러한 언어들로 된 문화는 대단히 깊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 타밀인과 드라비다족이 지금도 한글과 똑같은 문자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사달시대에 가림토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 몽골의 원나라시대에 서쪽의 위글문자를 나라 글로 썼는데 이 표음문자는 고려에도 전파되어 15세기 세종대왕이 한글창제에 긴요하게 이용되었다.
따라서 한글의 원형은 인도의 드라비다문자이고 드라비다 문자는 아사달의 가림토이다.
한글의 유래도 모르고 쓸것이 아니라 언어학자들의 연구와 증명이 있기를 바란다.
20. BC.4,000∼BC.3,000년경에는 인도반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긴밀한 접촉이 있었고 문명이 서로 형제 같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으며 꽃병과 인장이 닮은 것 등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따라서 세계의 학계는 두 문명의 모체가 있을 것으로 보는데 필자는 그 문명이 바로 만주와 몽골을 중심으로 한 밝나라- 밝달나라- 아사달로 이어진 문명 외에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21. 인더스문명의 주인공인 드라비다 종족은 중앙아시아인 인지 서아시아인 인지 그 기원을 아직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인도 땅에 가장 오래 전부터 살고있던 종족은 드라비다종족, 티베트와 버마종족, 고리아(몽고리아) 종족이 대표라는 것이 오늘날의 언어, 인종학의 정설로 되어있다.
22. 석가모니 모친 마야부인은 구리족(拘利族, 九離族, 九黎族, 句麗族)이고 석가모니 가족은 동일조상(同一祖上) 이라고 했으니 티베트와 네팔종족은 모두 고구려의 조상인 고리족(골족) 이었음이 나타난다.
23. 불교가 동쪽(중국,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중국 한(漢)나라에 범서와 불탑이 있었다.
처음에 휴도라 하고 뒤에 부도라 하니 혹칭 불도, 불타란 모두가 같은 말이다.
(한국 아사달 시대의 소도를 말함)
석가모니 부친은 수두단나(首頭檀那: 세상에서 제일 밝은 단군: 임금과 제사장을 겸함)였으니 소머리 사상의 이름이다.
24. 수메르어는 한국어와 동일한 교착어로서 어근을 같이한다.
25. 수메르인들은 고대의 문자적 기호를 가지고 온 듯 하다.(C.H.고든)
26. 수메르의 제1왕조(BC.2,600년경)를 건설한 엔릴 영웅이 소호국(少昊國) 사람이다.(문정창)
27. 수메르의 여왕 슈브엩(BC.2,900년경)의 무덤 속에서 발굴된 악기 끝에 소머리가 그려져 있다. 수메르인은 동방에서 왔다.(크램머)
28. "복코에는 사라진 열 부족 중(이스라엘 열 부족) 일부가 중국까지 갔다는 전설이 있다."
(보카라 선교이야기)
29. 1983년 시리아 역사가 K.S.살리비 교수는 :
"팔레스타인 지역은 결코 성경의 이야기가 발생한 지역일 수가 없다. 성경의 수 천개의 지명중 팔레스타인에서 찾을 수 있었던 곳은 몇 개뿐이었다."
"히브리어 성경과 다른 자료들을 다 동원해도 팔레스타인에서의 초기 유대민족의 역사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세기 이상에 걸쳐 히브리인들의 자취를 메소포타미아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히브리인들의 자취가 메소포타미아에서부터 시리아 북부를 통해 팔레스타인으로 이동한 경로를 보여주고 있다지만 그러한 자취들이 실제로 발견될 수 없다"
(이상 7만년 하늘민족의 역사에서 발췌)
※ 요 점 :
시대, 언어, 관습, 사상 등에서 몽고, 중국, 한국과 인도, 수메르가 같은 지역에서 살다가 갈려나간 동일 문명족이라는 것이 나타난다. 또 성경의 발생지는 지구상에서 오직 만주와 백두산 외에는 없을 것이다. 기독교계의 적극적인 연구를 바란다. 따라서 기독교의 미래는 인류의 원조인 밝검(환인)과 밝달검(한웅) 그리고 아사달검(한검)을 바로 세워야 세계최고종교로 부상할 수 있다.
수메르는 서양의 원조일 뿐이다.
제 4절 한국의 옛 역사기록
1. 한웅이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신의 정기가 충만한 나무, 생명나무, 영생수) 아래 오셔서 바람의 신(풍백), 비의 신(우사), 구름의 신(운사)를 데리고 생명, 곡식, 형벌, 질병, 선악의 5사를 주관하며 인간의 360여 가지를 모두 주관하여 세상을 교화하였다.
밝달검(한웅)이 하느님께 제사지내고 교화를 베풀고 천경과 신고를 가르쳤다.
(삼성기전하편)
2. 반고가 공공, 유묘, 유소, 수인을 데리고 돈황지역(천산동쪽, 감숙성 서북)에 나라를 세우니 견족( 族)의 왕 반고가한 이다.
(삼성기전하편)
3. 치우한웅 때는 삼신(하느님)을 조상으로 삼고 소도를 관리하였다.
(삼성기전하편)
4. 치우족이 티베트에서 800년간 치우왕국을 이루었다.(한단고기)
5. 1세 아사달검 51년(BC.2,283) 혈구에 삼랑성을 짓고 제천단을 마리산에 쌓으니 참성단이 그것이다.
나라 안에 큰 모임이 있었으니 10월 상달이면 하늘에 제사지내고 백성들 모두 기쁨에 넘쳐 환호하며 즐겼다. (국중대회)
6. 2세 부루 한검 원년(BC.2,240) 하늘에 제사 드렸다.
7. 3세 가륵 한검 6년(BC.2,177) 열양(하북성 북부)의 욕살 색정을 약수(弱水 : 천산동쪽 감숙성 주천지역에서 몽고국경 남쪽 고비사막 거연으로 흘러드는 강)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같혀 있게 했다. 후에 용서하고 그 땅에 봉하니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
(중국사기에서 말하는 흉노의 본거지가 바로 여기다.)
8. 3세 가륵한검 8년(BC.2,175) 강거(몽고 서남쪽)의 반란을 지백특(티베트)에서 정벌했다.
9. 5세 구을한검 원년(BC.2,099) 명을 내려 태백산(백두산)에 단을 쌓고 사자를 보내 제사를 올리게 했다. 구을한검 8년(BC.2092)인도사람이 표류하여 동쪽 바닷가에 도착하였다.
※ 약 4,100년 전에 인도사람이 표류하여 바닷가에 도착하였다면 그 이전부터 인도와 한국은 바닷길로 서로 통교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기록은 이집트, 수메르, 인도의 유물에서 5,000년 전의 배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미 5,000년 전부터 한국, 인도, 수메르, 이집트가 바다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문명문화가 육로보다 더 빨리 전파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예를 들어보면 만주와 중국대륙에서 발전된 문자의 형태가 갑자기 인도의 인더스문명권에 나타나고 또 수메르 문명권에도 차근차근 발전된 형태가 아니고 갑자기 발전된 문명형태가 나타나는 것은 육로에 의한 점진적인 형태가 아니라 바닷길로 빠르게 전파되어 나타난 형태라고 보여진다.
10. 9세 아술한검 2년(BC.1,984) 청해(청해성)의 욕살 우착이 군대를 일으켜 궁성을 침범하니 한검께서 상춘으로 피했다. 우지, 우율 등에게 명하여 토벌하고 죽이게 한 후 삼년 뒤에야 도읍으로 돌아왔다.
11. 11세 도해한검 원년(BC1,891) 12명산에 국선(화랑, 선랑의 전신)의 소도(선법, 진리, 무예를 익히는 곳)를 설치케 했다. 큰 밝달나무로 한웅의 상을 만들어 모시고 제사지내며 웅상이라고 했다. (불상의 시초)
10월 대시전(大始殿: 시조 한웅의 추모당: 후세에 불교가 들어와 민족의 시조를 쫓아내고 부처를 두고 대웅전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을 세우고 시조 커밝한웅의 모습을 그려 모셨는데 머리 위에는 광채가 번쩍 번쩍하여 마치 큰 해와 같았다.
12. 13세 홀달한검 16년(BC.1,767) 하나라 걸왕이 덕을 잃어 은나라와 합세하여 하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견군( 軍: 반고의 견족군사 : 중국 섬서성 감숙성 지역에 거주 : 西夷, 夷)을 끌고가서 낙랑(북경지역 군사)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의 빈기( 岐 : 周, 秦, 漢나라 본거지: 섬서성 4새의 땅)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
후에 은나라가 건국됨에 철수하였으나 가난한 사람들이 남아서 농사지으며 살았는데 그들은 풍속을 잃지 않고 지키며 살았다. 후세의 진나라, 한나라 시대는 그들을 서이(西夷), 서융(西戎), 융적(戎翟) 등으로 부르며 오랑캐라고 천대하였으면서도 그들의 여러 가지 풍속과 관습을 받아들였고 천제와 산천제 등을 지냈다.(규원사화)
13. 15세 대음한검 2년(BC.1,660) 겨울 10월 양운국(청해성, 티베트지역?)과 수밀이국(발하시호- 파미르 지역일대 ?)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10년(BC1,652) 한검께서 서쪽 약수(천산동쪽, 감숙성 서북)에 가셔서 신지 우속에게 명하여 금철과 고유를 채취하게 했다.
14. 16세 위나한검 28년(BC.1583) 삼신상제께 제사지냈다.
15. 18세 동엄한검 20년(BC.1465) 티베트인이 특산물을 바쳤다. 서역의 변방을 둘러보고 서장(티베트)에 보내어 함문경(바라문경)을 구해왔다.
우수주(牛首州: 수메르국)의 앙골과 동생 장골이 난을 일으켜 서쪽 변두리 백성들이 피해를 입으니 부여후가 평안할 수가 없었다. 이에 웅가 충달을 보내 치게하니 예후와 속진후(진번후)가 군사로 도와서 5년만에 앙골을 평정할 수가 있었다.
16. 20세 고흘한검 40년(BC.1341) 공공(共工)인 공홀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17. 21세 소태한검 47년(BC.1,291) 은나라 무정왕(BC.1,339∼1,280)이 귀방(산서성, 섬서성 북쪽: 원래의 고구려 본거지 : 중국은 이 땅을 훈육, 귀방, 흉노, 동호 등으로 기록했음)을 쳐 이기더니 대군을 이끌고 색도(산동성), 영지(하북성 천안현 서쪽 : 북경서쪽 고죽국 위치)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군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49년(BC.1,289) 개사원(서요하 상류일대)의 욕살 고등이 귀방(개사원 서쪽)을 습격하여 멸망시키니 일군국(몽고남쪽, 천산동쪽의 알류, 거연일대?)과 양운국(청해성일대?)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 이때의 고등은 아사달 서쪽 전체인 서 요하로부터 티베트까지 관할하게 되므로서 그 세력이 엄청나게 커져서 아사달의 우현왕이 되었고 그 세력을 이어받은 손자 색부루는 군사혁명으로 아사달의 한검이 된 후 나라이름을 조선이라고 고친다.
한국과 중국의 기록에 조선이라고 쓰여진 국호는 이때 이후부터 사용된 이름이므로 그 이전에는 국호가 아사달(朝, 또는 朝那)이었다. 이때부터 왕의 칭호를 왕검이라고 쓴다.
18. 24세 연나왕검 2년(BC.1,160) 여러 한((汗)들이 조서를 받들고 소도를 증설하여 하늘에 제사지냈다.
19. 27세 두밀왕검 원년(BC.997)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 등이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20. 32세 추밀왕검 3년(BC.847) 선비산(섬서성 북쪽, 서쪽, 몽고남쪽 일대)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 추밀왕검 12년(BC.838) 초나라 대부 이문기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이상 한검세기 참고)
21. "대진국 성종에 이르러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여 이물, 철원, 사불, 암연 등의 여러 부를 두고 북쪽(흥안령 서쪽)은 염해, 나산, 갈사, 조나(朝那), 석혁, 및 남북 우루를 공략하여 여러 부를 두고 ---- 난하의 동쪽은 장령, 장령의 동쪽은 동평이라 하며 우루는 북쪽(동몽골 흑룡강 상류 남북)에 있다.
※ 우루는 흑룡강북쪽에 있었는데 6,500년 전후의 지구변동 때 몽골고원쪽으로 이동하여 동몽골 흑룡강 상중류의 시베리아에 있다가 후에 점차 남하하여 부여의 옛 땅인 흑룡강남쪽으로 내려와 동몽골 흑룡강상류를 경계로 남우루와 북우루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베리아가 추워지자 캄차카반도 지역의 구다천국과 우루국, 부여등은 점차 남하하여 서요하와 북경일대에서 우리역사의 주축세력을 이루게 된다. 이들중의 일부와 수메르족이 서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 한국기록의 요점 :
1. 수메르란 이름은 BC.7,200년 전에 만주 동부에 있던 나라로서 BC.4,500년 전후의 지구변동으로 민족일부가 서쪽으로 이동하였는데 후세에 "소머리"가 알파벳 문자로 표현하면서 발음이 수메르로 된 것이다.
한문식으로는 "수미리"인데, 만주동북부지역의 원래 스메루 본거지는 후세에 발음이 바뀌어 주신, 수신, 숙신, 속신, 조선, 소밀, 속말, 말갈 등으로 변하고 대략 BC.4,500년 전부터 민족이 이동하면서 가지고 간 "소머리"는 천산지역, 인도지역,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더 오래 까지 지속되었다가 수메르가 망하면서(BC.1,750년경) 서아시아에서는 사라지게 되는데 우리역사에는 BC.997년 전까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는 국가적인 면모가 아니라 동양보다 훨씬 뒤에 생긴 후발 소성읍(小城邑)국가였는데 서양인들이 수메르란 중심국가로 인정하면서부터 세계에 국가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BC.3,000년 전후의 한국과 중국의 광대한 국가규모로 보면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는 작은 성읍에 불과했다. 민족의 이동경로를 보면 수메르란 이름이 여러 지역에 있을 수 있고 수메르의 중심국가는 지금의 발하시호 근처였을 것으로 보여지며 여기를 중심으로 해서 남북으로는 몽고에서 인더스강 하류까지, 동서로는 티베트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큰 십자벨트(十字belt)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인도는 티베트, 몽골, 서부이란이 광역이었다."
"가나안 지방의 경계선은 시돈에서 시작하여 그랄 쪽으로 내려가다가 가지에 이르고 거기서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 쪽으로 라사에 이르렀다. 이것이 씨족과 언어와 지방과 부족을 따라서 갈려나간 함의 후손들이다"(창10:19)에서 티베트의 라사가 나온다.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사라진 이스라엘 열 부족을 찾는 일을 맡은 단체가 펴낸 저서 중에 구약성서에 언급된 이름들 중 언어학적으로 캐쉬미르와 그 주위에서 유사하거나 같은 것들 즉 부족, 씨족, 가문 개인, 마을, 지역, 기타의 지명을 포함하여 적어도 300개 이상을 열거할 수 있다고 한다."
"캐쉬미르 주민들은 외모, 신체적 특징, 생활방식, 태도, 도덕, 성경, 옷 입는 방식, 언어관습, 풍습, 습관 등이 전형적인 이스라엘 민족의 것이다"
(7만년 하늘민족의 역사 참고)
이러한 후세의 연구로 나타난 것도 과거의 민족분포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전세계가 내세우고 있는 수메르는 동양에 있던 수메르국의 변두리에 있었던 작은 읍락국들의 역사일 뿐이다. 이것이 서양문명의 원조가 되었는데 서양문명이 세계를 지배할 만큼 발전하니 그들의 뿌리가 커다랗게 확대되고 부각되었으며 세계문명의 원조라고까지 둔갑된 것이다. 수메르국의 중심은 결코 메소포타미아가 아니다.
2. 우리 관경이 북쪽으로는 구다천국이 있는 캄차카 반도까지 나타나고 서쪽으로는 티베트까지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말과 관습이 민족의 이동과 함께 넓게 확산되었다. 요하 서쪽 소개마 지역- 몽고- 알타이- 천산- 티베트- 파미르지역은 서로 붙어있고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인도지역과 수메르지역, 터키지역에 우리의 문명문화가 쉽게 전달될 수 있는 인접지역에 속하고 있다. 세계 모든 민족의 신화에 나오는 하늘기둥, 생명나무, 영생수등의 나무는 한웅의 신단수로부터 뻗어나간 것이다. 인도, 수메르, 터키지역의 말과 풍습이 우리와 같거나 닮은 것은 한민족의 이동과 교류에 의한 것이다.
3. 중국인들이 오랑캐나 흉노라고 한 민족이 모두 우리민족임이 나타난다.
제 5절 : 중국의 고기록
1. 복희는 수인씨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복희 BC3,528-3,413)
2. 복희의 뒤를 이어 여와(여오와 또는 여호와로 발음할 수 있음)가 임금이 되었다.
3. 복희와 여호와는 중국, 인도, 수메르의 중심인 곤륜산에서 결혼하였다.
4. 신농이 일어나 임금이 되니 여와족은 밀려나게 되었다.
(신농 : BC.3,218 - 3,078)
4. 신농의 유웅국 마지막 임금 유망은 우리 밝달나라 치우한웅에게 쫓겨 산서성으로 밀려났고 또 황제헌원에게 패하여 신하(바람의 신 풍백)였던 소호국(少昊國)의 장수들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야 했다.
(헌 원 : BC2,692 - 2,592)
(소호국 : BC.3,700∼BC.2,600년경)
※ 중국의 기록에서 복희- 여와족(BC.3,528∼3,200), 신농족(BC.3,218∼2,600), 소호족(BC.3,700∼2,600)들이 전쟁에 패한 시기와 메소포타미아에 새로운 문명이나 새로운 왕조가 나타난 시기가 일치하고 언어, 풍속, 문자 등이 한국, 중국, 수메르가 같으니 이들의 이동민족임을 알 수 있다.
수메르의 우르 왕조를 건설한 사람이 "메스 안내바다" 즉 바다로 온 사람이라고 했으니 이들 중 소호족은 바다로 이동한 것이 틀림없다고 본다. 그런데 수메르 신화에 그 모습이 마치 물고기 같다고 했으므로 중국에서 고기비늘처럼 생긴 갑옷을 입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치우한웅(BC.2,700)의 갑옷을 처음 본 중국인들도 무엇인지를 몰라서 "짐승의 몸을 하고 사람의 말을 했다." "동두철액 즉 머리는 구리이고 이마는 쇠로 되었다"고 했을 정도이니 머나먼 수메르 지역에서는 고기 비늘처럼 생긴 갑옷 입은 사람을 큰 물고기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또 건국시기도 일치한다.
스페인의 코르테스에게 점령당한 멕시코 조상들의 깃털달린 뱀(갑옷 입은 사람) 케찰코아틀도 우리민족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중남미 인디오들의 역사가 단계적으로 발전된 문명이 아니고 여러번에 걸쳐서 갑자기 개화된 문명으로 나타나는 것은 중국과 한국의 전쟁시기에(BC.3,000∼AD.1,300년) 배를 타고 이동한 부족집단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정창씨는 우르왕조 건립자가 소호국 사람(갑옷입은 장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복희-여와족은 먼저 도착하여 수메르 최초의 도시 키시를 세웠다가 나중에 도착한 강력한 무기와 갑옷을 입은 소호국 사람의 우르왕조에게 패하고 우르는 또 다른 동족들이 세운 우르크에게 패하게 되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성읍국가(城邑國家)를 세운 같은 족속간의 대결인 셈이다. 밝나라가 12왕국이었으니 12부족의 대결과 단합이 이루어졌을 수 있다. 복희-여와족은 치우씨이고, 신농족은 고시씨이며, 소호족은 김천씨이다. 그러므로 수메르는 씨족의 성읍(城邑)으로 나타난다.
밝달나라 한웅의 역대는 치우씨와 고시씨가 경쟁적으로 가장 많은 한웅이 되었다고 하는데 기록으로 전하는바가 없어서 구분할 수 없다.
중국의 상고시대는 고시씨와 치우씨의 혈족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고시씨는 한반도의 조상 고시례의 방계혈통으로서 소전, 신농, 헌원, 고양, 고신, 요임금, 순임금, 하나라, 주나라 성씨이고 치우씨는 5세 태우의 한웅 - 복희씨 - 치우한웅 - 강태공의 제나라로 이어졌다.
나라이름만 한국과 중국이지 중국의 백성과 임금들은 모두 우리와 같은 동이족이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이러한 혈통족벌의 대결이 사라졌다.
따라서 상고역사는 한국의 땅이다, 또는 중국의 땅이다 하는 관경에 집착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모두 집안싸움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만주까지 다 중국의 땅이니 상고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가 되었다. 따라서 누가 이겼고 누가 졌다는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으나 역사를 후세의 강약에 맞추어 편파적으로 써서는 아니 되므로 공정하고 정직하게 고칠 필요가 있다.
제 6절 : 알타이 신화(전 서울대 교수 박시인 박사 저서)에서 발췌
1. 한국의 수리(首利, 鷲), 인도의 수랴(SURYA)는 모두 태양신을 의미한다.
2. 수메르 역사 연구가들은 토판기록 해석으로 수메르인이 검은머리의 사람이라고 했고 이란고원 동쪽 혹은 중앙아시아에서 이동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통설로 되어있다.
3. 수메르와 고대 중국의 글자가 상형(象形), 지사(指事), 회의(會意), 형성(形聲), 전주(轉注), 가차(假借)의 여섯 단계로 발전한 것이 같고 두 나라 말이 상당수 같은 단어를 공유하고 있다. 이것은 인종적, 문화적으로 같고 또 왕래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4. 나일강 하류 고대 이집트 왕조중 힉소스(HYKSOS)는 BC.1,750년경 중앙아시아 이동민족이 세운 왕조다. 이 시기는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나는 시기이다.
5. 몽고말과 한국말은 같고 모음조화 현상도 같다. 몽고족은 고구려 서북변에서 실위몽골(室韋蒙골)로 역사상에 나타난다.
6. 성경의 빛의 하느님과 어둠의 마귀는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의 빛의 하느님인 아후라마즈다와 어둠의 마귀 아힐만을 본딴 것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의 비석에는 머리위 공중에 아후라다마스가 있는데 사람의 몸에 새의 두 날개를 가진 형상이다.
※ 수메르의 아라(ALA)는 하늘과 인간의 중간에 있는 수호신을 의미한다. 희랍어에서 발전한 영어 아라(ala)는 "날개, 날개모양"의 뜻이므로 현대에도 서양사람들이 날개 달린 천사를 그림과 영화에 사용하는 것은 모두 수메르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고 그것은 한국의 성령새(검새)를 뿌리로한 인류사상의 전달이지 결코 그리스의 사상이 아니다.
조로아스터교에서 BC.4세기쯤 파생된 미트라교의 미트라 신을 태양신이라 하고 미트라 신의 길 안내자를 까마귀라고 한다. 동북아시아의 나랏님을 햇님이라 하고 그 길 안내자를 까마귀라고 하였으니 이 새는 분명 까마귀이다.
미트라 신의 탄생을 깊은 산의 무화과나무 아래 큰 바위가 갈라지면서 한 손에 횃불, 또 한 손에 검을 들고 나와 세상을 밝게 비추고 세상을 정복한다는 신이다. 이 미트라 신의 길을 안내해준 새가 까마귀(성령새)였다.
(성인들이 성령을 받을 때 하늘에서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성령새는 바로 햇님의 정령새인 까마귀이다.)
7. 남북 아메리카 대륙의 마야, 아즈텍, 잉카 등의 수수께기 문명의 조각에 중국 은나라, 주나라 시대의 청동기에 사용된 타오테(T'AOT'IEH)라는 괴상한 무늬와 같은 것이 사용되어 연구자들의 주목을 끌어왔다고 한다
남북 아메리카 문명도 동북아시아의 전쟁시기에 맞추어서 물결처럼 파동적으로 갑자기 발전 개화된 문명으로 나타났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한 연구가 요구된다. 그들의 인종, 언어, 풍습 등이 너무나 많이 우리와 같다.
제 7절 : 기록의 종합적 검토
1. 메소포타미아 역사는 BC.5,000∼4,500년경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어떤 인종인지는 구분할 수 없다.
※ 이 시기는 북극이 아프리카에 있었기 때문에 BC.4,500년 이전시대의 자취들은 옛날 시베리아에 에스키모 같은 소수인 들이 살은 것과 같이 인도나 메소포타미아 도 소수인 들이 거주한 흔적을 말한다.
지구기온이 12,500년 전에 현재와 비슷하다가 계속 상승하여 7,500년 전후시대에는 현재보다 약 2.5도나 높았다가 점차 하강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지구의 빙하가 완전히 사라졌을 정도이니 현대인의 감각으로는 얼마나 무더운 시대였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의 기후감각으로 과거를 판단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 시대에 북극이 아프리카에 있었지만 현재처럼 북극권이 강하고 큰 것이 아니라 현재의 반절정도로 북극권이 쇠약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수메르나 인도지역에 사람이 살수 있었다. 다만 소수인들이 천산- 파미르- 인도- 메소포타미아에 살은 흔적이지 결코 대집단의 거주형태는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구석기와 신석기유물들이 나온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일부학자들은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수메르가 인류문명의 시원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다. 빗살무늬토기도 우리보다 훨씬 늦다.
2. BC.4,500∼4,000년경부터 민족적 집단이 도착된 것으로 나타난다.
※ 지금까지 역사를 연구한 결과와 같다. 정확한 판단이라고 본다.
BC.4,500년 전후에 아프리카에 있던 북극이 현재위치로 이동하고 지구기온이 높아 서아시아 일대가 급격히 따뜻해져서 사람살기에 아무런 장해가 없었다. 이때는 일본, 한반도, 만주, 중국동해안, 시베리아 동해안이 거대한 해일로 덮치고 많은 땅이 물에 잠기자 사람들이 몽고고원지대와 서쪽으로 급격히 이동하는 추세에 있었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때는 환경이 열악하고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선발민족이 이동한 것이다.
BC.4,000년 전후시대는 한웅이 몽고지역에서 왕권을 물려받고 백두산지역으로 오는 도중 반고에게 천산 동쪽지역에 나라를 세우게 하였으므로 이때부터 동과 서의 통로역할이 되어 다수의 이동이 이루어지기 시작 한 것이다.
3. BC.3,500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고도문명이 나타나고 인더스문명은 BC.3,000년경부터 고도문명이 나타난다.
※ 이것은 이라크지역은 주로 평지로 연결되어있고 인도지역은 험준한 파미르고원을 넘어야 했으므로 약간 늦게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4. BC.4,000∼BC.3,000년경은 인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긴밀하게 접촉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 이것은 두 지역이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긴밀하게 접촉을 가지고 있었다면 같은 동포들이 나뉘어 살았다는 증거이며 언어와 풍속이 서로 닮았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므로 다른 민족 다른 지역보다는 훨씬 긴밀한 접촉을 가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약 5,300년경의 유물로 추정되는 원통형 인장에 새겨진 배는 이 시기 이전부터 수메르와 인더스강 유역의 모헨죠달 문명권은 바다로 접촉했음을 알 수 있다.
< 배그림 >
5. BC. 3,000경에 메소포타미아지역에 10개정도의 도시국가 형태가 나타난다.
※ BC.3,500∼3,000년 사이에 인구이동이 많이 이루어 졌음이 나타난다.
이 시기에 복희의 뒤를 이은 여와가 신농에게 밀려났다. 이때 여와족 일부가 이동하여 메소포타미아에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인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그들의 조상 이름인 여와 또는 여오와(여호와는 알파벹 발음이지 수메르식 발음이 아니다)를 신성시하여 신격화시킨 이름으로 보여진다. 수메르의 문자가 복희의 팔괘 획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는 바로 여와족에 의해서 처음으로 문자가 나타난 것이라고 보여진다.
우리민족은 한민족인데 하느님 또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6. BC.2,500년경 아답왕 루갈이 수메르 전지역을 정복하여 통일한다. 그후 수메르는 BC.2,200년대에 사르곤 대왕에게 전지역을 정복당한다.
※ BC.3,000∼2,200년까지는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전쟁이 많았던 시기이다. 바빌로니아의 최초 민족구성이 어떤 인종인지를 확실히 알 수 없어서 아쉽지만 바빌론도 역시 몽고리안과 혼혈된 민족일 것이다. BC.2,600년경에 수메르 제1왕조가 건설되었는데 "제1왕조의 엔릴영웅이 소호국 사람이다."고 했다. 그런데 유웅국 마지막 왕과 소호족이 치우한웅과 헌원에게 패하여 쫓겨난 것이 BC.2,700∼2,600년 사이이므로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7. BC.2,000년경 아모리인과 엘람인들의 침략에 힘을 잃게 된다. BC.1,950년에 바빌론의 함무라비 대왕에게 수메르는 완전히 멸망한다. 수메르의 전통을 이어받은 함무라비왕(BC.1,792∼1,750)은 태양신을 예배했다.
아카드왕(BC.2,254∼2,218)이 자그로스 산맥의 룰루비족을 정복한 기념비에는 꼭대기에 해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태양신을 숭배한다는 의미이다. 또 신들만이 쓴다는 두 뿔이 달린 모자를 쓴 나람신의 모습은 치우한웅(BC.2,700-)이후의 갑옷과 투구가 전달된 것으로 보여진다. 투구에 소머리 모양의 뚜 뿔은 고구려시대까지 이어온 우리의 소머리 사상과 풍모이다.
8. 수메르어는 BC.3,500∼1,750년경까지 존속되다가 그 이후로는 아카드어와 바빌론어에 흡수되지만 언어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나는 시기가 바로 BC.1,750년경이다.
9. 이스라엘민족은 여러 민족과 혼혈되어 우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졌다.
문자의 발전과정이 중국과 비슷하지만 언어는 몽고, 한국, 중국, 티베트, 인도, 메소포타미아가 서로 친척관계에 있으며 관습과 사상은 한국- 인도- 수메르가 가장 가깝다. 문자는 중국과 가깝고 말은 한국과 가장 가깝다.
한국과 수메르의 관습과 사상이 무려 33가지나 일치하고 있어서 인간생활 전부가 우리와 같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10. 수메르는 안(an), 아누(anu)가 최고신인 하늘신이고 인(in) 또는 닌(nin)은 아카드어의 베룸(주님)을 의미한다. 이 칭호들은 BC.3,000∼2,000년까지 많이 사용되었다.
안(an)은 우리말의 한(han)이 변한 것이고 인(in) 도는 닌(nin)은 우리의 인(仁; 님)이 그대로 사용된 것이다. BC.2,000년경부터 "인"에대한 혼란이 생기는데 강족들이 등장하고 전쟁이 많아졌으며 정복당했기 때문이다.
11. 홍수이전의 왕들의 이름이 7개가 사용되었다.
※ 6,500년 전후의 지구변동(대홍수) 이전의 "7세환인"시대가 수메르에서도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의 "신세7대(神世七代)"도 환인시대를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12. 우리는 정통왕권을 물려받은 적통(嫡統)민족으로서 9,200년 전부터 대략 2,000년 전까지 무려 7,000년 동안 시베리아, 몽골, 파미르지역까지를 관할해온 동북아시아의 주인이었다. 따라서 역사, 전통, 관습, 사상, 언어, 문화 등 전반에 걸쳐서 몽골, 중국, 한국, 티베트, 인도, 수메르가 서로 친척간이었음이 드러난다. 이들의 모체문명은 한국이다.
우리가 티베트, 파미르 지역까지 영향권에 두고 있었던 BC.1,600년경까지의 수메르는 티베트- 파미르- 인도- 서남몽골(알타이지역)- 메소포타미아가 광대한 민족의 십자벨트를 이루고 수메르의 중심은 파미르- 알타이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메소포타미아는 수메르 민족벨트의 끝자락에 불과한 지역인데 역사기록의 유물유적이 많이 나오게 됨으로서 메소포타미아가 마치 수메르의 본부이며 중심인 것처럼 이해되기에 이른 것이다.
< 그림 >
우리 역사기록에 나타나는 수메르국은 메소포타미아가 아니고 파미르- 알타이지역에 있었던 수메르 중심본국으로 보여진다.
수메르지역의 족속은 만주쪽에서 건너간 수메르족과 우르족, 중국쪽에서 건너간 복희- 여호와족, 신농족, 소호족, 몽골쪽에서 건너간 골족, 알타이지역의 여러 족속들이 이란, 이라크, 터키지역에서 일어나 서아시아의 역사를 이룬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중 일부가 이집트에 왕국을 세웠다.(BC.1,750년 힉소스 왕조). 이집트는 수메르의 영향을 받아서 수메르 보다 늦게 BC.2,900년경에 문자가 나타난다고 한다.
아시아대륙의 모든 문명의 원조는 아리수 문명이며 한국은 아리수문명, 황하문명, 인더스강문명, 메소포타미아문명, 이집트 나일강문명의 원조이다.
원시반본의 계절에 새로운 문명은 인류문명의 원조인 한국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인들에게 "나?!" 가 있는가?
상고역사는 역사학자들이 거의 외면하고 있고 또 공자, 석가, 예수를 신처럼 떠받드는 종교계가 상고시대의 우리조상들을 배척하니 상고역사가 살아날 희망마저 끊어진 상태이다.
거기에다 인류문명의 원조는 수메르라고 주장하고, 서양철학을 태양처럼 받들면서 우리철학은 있는지조차 모르는 무식쟁이들이고, 물질문명의 노예가 되어 무슨 민족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
한국은 경제대국이나 군사대국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중국의 몫이다.
태평양의 물은 많아지는지를 모르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2미터, 3미터가 올라온 후에야 알게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처음에는 하찮게 생각하고 신경도 쓰지 않지만 태평양의 물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한 거대한 힘으로 올라온다.
올라온 다음에는 전 인류가 눈을 크게 뜨고 경악하게 된다.
그것이 중국이다.
중국은 앞으로 20년쯤 후에는 미국과 평행하게 되고 그 이후로는 점차 미국을 압도할 것이다.
말하자면 미래의 세계패자는 중국이라는 말이다.
손바닥만한 한국이 어찌 중국과 경쟁할 수 있겠는가 ?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중국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사실상의 독재정치인데도 중국인 특유의 커다란 대륙성기질로 일치 단결하여 미래를 향해 매진하고 있는데 한국인들은 작은 경제발전을 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렇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만과 얼마간의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고,
경제발전과정에서 물질문명에 젖어서 사람들은 지나치게 이기심을 갖게되어 사회도덕이 타락했으며, 문어발 식 기업으로 재벌왕국을 누려왔던 대기업들은 세계적인 최고의 상품을 개발하지 않고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여 신속하게 산하기업들을 정리하고 2-3개 품목으로 세계 일류상품을 만들어 국가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보이지 않고 있다.
이들은 아마도 10년쯤 후에는 약화되어 유명무실한 기업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충분히 안고 있다. 대기업들의 이러한 정신자세는 국가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어 한국의 경제성장에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더욱이 일부 대기업들이 건설하고 있는 초고층 대형물의 건설은 나라의 앞날에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는 징조이므로 한국은 앞으로 20년 이내에 또 한번의 어려운 일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종교인들은 오직 자기종교만이 절대라는 아집속에 빠져서 여러 종교계통의 학교재단에서는 종교역사보다 오래된 우리의 상고역사를 외면하거나 부정하고 배척하며, 학자들은 지금 서양학문의 기풍을 반절정도는 쓰레기로 버려야 하는데도 모든 학문의 기풍이 서양의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 할뿐 아니라 인류최고의 역사와 민족철학을 모르는 상태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니 그러한 지식을 전달받은 학생들이 민족의 내일을 훌융하게 설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정치가들은 권력을 향한 이기주의 집단으로 비쳐질 만큼 타락되어 있으면서 어떻게 민족의 미래를 꿈꿀 수 있겠는가? 국민들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흩어진 민족에게 희망이 있을 것인가?
한국은 경제대국이나 군사대국을 꿈꾸어서는 아니 된다. 경제는 꾸준히 노력하여 국민생활을 적정하게 이끌어 가야하고 군사력은 최소한의 미사일을 확보하여 무시되지 않을 정도의 힘은 가져야 한다.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무모하게 추진하면 일본의 경우처럼 국민들에게 실망과 답답함을 주게되어 정치가는 살아남기 힘들어 진다. 일본의 경제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과거의 경제성장시대처럼 발전하지 못한다고 아우성대고 불평을 한다. 시대가 바뀌어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의 돌파구는 군사대국화의 길로 나아가 국민들의 스트레스를 해소시키고 경제대국 대신에 군사대국이라는 우월감을 지속시키는 방법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도 세계질서를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 때문에 최첨단 과학무기를 세계에 배치하여 계속해서 패권을 장악하려 하지만 결국은 동북아시아의 군사력을 일본에 나누어줘서 미국의 패권유지에 일본을 이용하게 됨으로서 중국과의 군사대결국면으로 치닫게 될 것이고 한국은 다시 1,900년대의 4대강국사이에 낀 조약돌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미국은 한국을 최대한 이용하지만 결국은 한국과 일본 중 일본을 최후까지의 반려자로 삼고 한국은 최악의 경우 포기하던가 아니면 2차 대전 때처럼 한국을 흥정거리나 희생물로 삼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한국의 지식인과 정치가들이 이런 정도를 알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한국의 돌파구는 학문과 사회정서를 민족의 정서교육으로 통일시키는 일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러면 한국은 다시 하나가 될 것이며 그때부터는 상상 이상의 도약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제일 큰 걸림돌이 되는 종교집단의 이해와 양보와 화합이다. 각자가 최고를 지향하지 않고 모두 합해서 큰 하나를 이루자는 종교지도자들의 솔선이 아니면 한국의 장래는 자꾸만 늦어지고 자꾸만 뒤떨어지게 되어 결국은 너도나도 모두 망하게 된다.
한국도 고도성장시대가 끝났다. 이제는 절약과 안정을 추구해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이 할 일을 해야한다. 한국이 할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를 이끌어나갈 정신문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중국은 힘의 패자가 되고 한국은 정신 주도국이 되어 한국, 중국, 인도가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여 아시아가 패권지역이 되도록 하는 것이 한국이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교육이 민족정서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교육부와 학자들이 할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지금의 학자들이나 종교인들은 현재상황이 100년이나 200년 갈 줄 알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학문에 대한 고집과 자기종교에 대한 아집이 강철같이 단단하게 굳어있어서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머지않아 그들은 무너지고 산산히 깨어지는 날 그때가 되어서야 통곡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다. 그래서 지금 모든 교육을 민족의 정서교육으로 바꾸어야 그나마 우리 본연의 길을 갈 수 있는 희망이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제 8절 : 언어이동과 파생 및 변형.
(1). 지난 6,500년간 인류의 이동은 알타이∼바이칼의 몽골고원에서 동서남북으로 이동했다는 것은 세계의 어떤 학자도 부인할 수 없는 정설이다.
알타이지역을 거쳐 천산산맥 서쪽을 지나 사마르칸드에 이르러서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캐쉬미르의 목초지대를 거쳐 인도로 들어가고, 다른 한쪽으로는 이란고원 북쪽에서 카스피해지역 남단과 이란고원을 넘어 터키를 통하여 유럽의 발칸반도에 이르는 이동경로는 이제 다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서 세계의 학자들이 아무도 주장하지 않은 바닷길이 있다. 이 바닷길은 증거가 희박하고 증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누구도 주장하지 못한 부분이다. 그러나 역사를 더듬어보면;
① 바닷길을 통하여 거석문화가 이어지고
② 5,000년 전 이전부터 항해술이 있었다는 유물이 인도, 수메르, 이집트에서 나왔고
③ 피리레이스의 옛 지도 원본은 6,500년 전 이전시대에도 항해술이 있었다는 증명이다.
그러므로 한국, 인도, 수메르가 5,500년∼2,500년 전까지 바다를 통하여 교류가 있었다고 단정한다. 따라서 육로와 해로를 통하여 민족의 이동과 언어가 전달되고 하나의 말이 여러 개의 말로 파생되고 변형되어 오늘날의 수많은 언어들이 생긴 것이다. 그러한 예를 몇 가지 들어보겠다.
(2). 한(han); 한(한국), 가한(한국, 몽골), 가안, 간(한국 : 신라의 마립간, 거서간), 안(수메르).
(3). 환인(桓仁); 환인, 환님(한국), 안닌, 안님(수메르)
(4). 소머리 :
① 우리말 발음 : 소머리, 소미리, 소미로, 수미리, 수미루, 수미르
(알파벹 발음 수메르: sumer).
② 변형발음 : 소밀, 속말, 말갈(흑수말갈)
소신, 소선, 수신, 수선, 주신, 주선, 조선, 숙신, 직신
③ 한문식 발음; 우수(牛首), 우두(牛頭), 수두(首頭).
※ 소머리는 6,000년 전부터 한님께 제사드리는 제물로 쓴데서 비롯된 말이며 소머리민족 즉 수메르민족이란 한님의 자손으로서 조상이신 한님께 제사드리는 천손민족이란 뜻이다.
그래서 하늘에 제사드리는 산의 이름은 모두 머리산, 마리산이 되었고 이 말은 만주의 우수주(牛首州), 가야산의 우두산(牛頭山), 일본의 우두천왕(牛頭天王), 우두사(牛頭寺)가 되었고 제사드리는 소머리를 흰 소머리로 하였기 때문에 흰머리산이 되었는데 대략 6,500년 전부터 약 3,000년 전까지 이동한 우리민족에 의해서 인도지역에서는 힌머리- 히머리 -히머리아- 히마라야산이 되었고 한국은 후세에 한문을 쓰게 되면서 백두산(白頭山)이라고 하였다.
인도의 신두강(sind:辛頭江)도 흰머리강(제일의강)흰물 즉 천수라는 우리말이다.
모헨죠달은 밝달의 "달"을 가져간 말이다
인도의 힌두교는 바로 흰머리교, 백두교, 소머리교 즉 하느님을 받드는 천신교(천주교)이며 우리민족의 전통신앙이다.
우리민족은 여러 한웅님들이나 한검님들께서 공자, 석가, 예수처럼 위대한 성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제왕이 되었어도 반드시 하느님의 자손으로서 조상이신 하느님께 경배하고 제사를 드렸다.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는 하느님께 제사드리지 않고 부처만을 경배하여 왔는데 이는 부처가 하느님을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계에서는 부처가 하느님이냐 아니냐를 확실하게 대답해야 하며 만약 하느님 본체가 아니고 예수처럼 하느님의 아들정도라면 지난 2,500년간 하느님을 외면한 죄를 받아야 한다.
그 벌은 무서울 것이다.
(5). 밝 :
① 밝 : 중국 은나라 서울 박( ), 박씨(朴氏: 한국). 밝달-박달- 배달.
② 밝- 박- 백(白, 百)- 맥(貊)(한국, 중국). 밝알-백알- 배갈- 바이갈(바이칼)
③ 밝산- 백산(천산, 한산, 성산) (한국)
④ 밝강- 백강(白江)- 신강(白江)- 신두강(新頭江)- sind강(인도)
⑤ 밝- 백씨(白氏)- 해씨(解氏)(한국)
⑥ 밝-백(白)- 해, 히(日)- 께, 까(日, 年)(한국, 일본)
⑦ 밝마루- 개마(고원)- 해마루. 개사- 해사 -아사(해뜨는 동쪽 또는 동산, 시간표시언어로는 아침)- 아시(처음, 아침)(한국)
5-1. 발 :
① 밝한- 박한, 발한- 변한(弁韓). 밝조선- 발조선- 번조선(番朝鮮).(한국)
② 밝-발(發)(한국, 중국), 발해(渤海)(한국). 밝아시호- 발하시호(중앙아시아)
③ 밝내(朴川, 泊耐, 陽川)- 벌내(伐川)- 백수(白水, 白河), 열수(列水), 패수(浿水) (한국, 중국)
④ 밝아강- 발가강- 볼가강( 러시아)
⑤ 밝마루- 박마루- 팍마루- 파마루- 파미르(인도)
⑥ 밝한반도- 발칸반도
5-2. 바 : 바라문(인도), 바-로(파라오의 원음: 이집트), 바-알신(앗시리아)
5-3. 부 : 부르, 부루, 부여, 부도, 부처, 부악, 백악, 북악(한국).
부다(가야)(인도)
해부루(한국)- 해브리, 해브라이(알파벹식 발음)- 히브리, 히비리, 이비리. (이스라엘)
5-4. 불 : 불(火, 太陽), 불타(火, 太陽, 光明), 불함산(不含山), 불내(不耐).
(한국). 불가리아(불가리아: 밝- 발가- 불가)
5-5. 파 : 밝나라- 파나라.(한국). 파(巴)나라(중국).
밝문- 발문- 바라문, 파라문(인도)
밝마루- 파마루- 파미르(인도)
바-로- 파라오(태양의 아들, 왕)(이집트)
페리, 페르, 페르시아(이란), 페루(남미 페루) ,바리- 파리(프랑스)
(6). 골 :
원래 "골"이란 말은 지구변동으로 인한 대홍수로 사람들이 높은산, 고원, 언덕에서 살게됨에 따라 뾰족한 산이 아닌 둥그런 동산, 높은 언덕, 고원 등에서 사는 마을 즉 "고을"을 말한다.
고산신앙이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이유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홍수가 물러간 후에는 사람들이 점점 평야지의 강, 호수, 바닷가나 계곡의 물가로 내려와 살게되니 높은 곳의 뜻이 반대로 낮은 곳인 "물", "계곡(谷)"의 뜻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또 나라라는 개념을 가지기도 하였는데 고리아, 만주리아, 앗시리아, 사마리아, 이탈리아, 불가리아---등으로 쓰이다가 끝에 골, 또는 고리의 "리"가 빠지고 "아"만 붙은 이름으로 변하였다.
노아, 수아, 시므아, 리비아, 에티오피아, 페니키아, 아라비아, 리디아, 코카시아, 게르마니아, 인도네시아, 알바니아, 러시아, 이디오피아, 알제리아, 필라델피아, 코롬비아 ---등으로 "아"가 물 또는 물가란 뜻으로 쓰였다.
원래의 "아" 즉 인류 시원의 "아"는 하늘을 나타내는 뜻이었다.
그래서 한글에서는 하늘을 본뜬 글자가 "아"이다. 수메르 말 "아"는 높은물, 하늘물(天水), 아들, 아버지, (하늘 또는 태양이)찬란하게 빛나는 등의 뜻으로서 하늘을 나타내다 후에는 하늘과 물 즉 음과 양을 모두 나타내고 있다. 중국어 발음은 "해, 에, 하이, 아이"등으로 말하는데 원래 우리말의 "해"가 발음이 변해서 "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6-1. 골 : 싸릿골, 박달골,---(한국). 골고다, 골란(고원)(이스라엘)
6-2. 고 : 고르, 고을, 고리(알파벹 발음 코리, 꼬레, 코리아)(한국, 중국, 유럽)
개마고원(해마루)(한국, 중국). 개사원(해사원, 해나벌)(한국)
(古離, 高利, 高離, 璃, 高 , 高里, 高麗, 藁驪, 高黎, -----)
6-3. 구 : 구리(九利, 九離, 九璃, 句利, 拘利, 九麗, 九黎, 句麗---)(중국, 한국)
※ 구려(九黎), 구려(九麗), 구려(句麗), 고려(高麗)등의 "려"의 원래발음은 "리"이다.
6-4. 굴 : 구르(알파벹 발음 쿠르 : 언덕, 산) (수메르) "지구랏"도 "지구르"에서 파생된 이름일 것이다.
7. 나무(木: NAMU);
나무는 천지창조나 성인의 탄생설화 또는 제사의식, 왕권 등의 설화에 전세계적으로 등장하는데 태양의 영기(靈氣) 또는 정령(精靈)을 말하는 하늘기둥, 영생수, 생명나무를 말하고 해뜨는 동쪽, 태양, 광명, 성인의 뜻을 나타낸다.
한국, 중앙아시아, 수메르, 아메리카 대륙 등 전 세계의 신화에 등장한다.
한웅의 태백산 신단수가 그 신화의 원조이다.
아카드왕 나람씬(BC.2,254-2,218)이 자그로스 산맥의 룰루비족을 정복한 기념비에는 꼭대기에 해가 그려져 있는데 태양신을 숭배하는 뜻이다.
또 신들만이 쓰는 두 뿔 달린 모자를 쓴 나람씬의 모습은 치우한웅(BC.2,700) 이후의 갑옷과 투구가 수메르에 전달되었음을 나타내 준다.
소머리 민족이 소머리 모양의 투구를 쓰는 것은 우리민족만이 가지고있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수메르의 전통을 이어받은 바빌론의 함무라비 대왕(BC.1,792-1,750)은 태양신을 예배하였다.
우르-남무(BC.2,112-2,095)가 달신 난나로부터 왕권을 받는 의식을 그린 석비에는 난나가 손에 들고있는 왕권의 상징물인 측량자와 줄자를 우르-남무에게 준다. 그 가운데에 생명나무가 있다.
남무(NAMU)는 우리말 나무이며 알파벹 발음으로 나무 또는 남무이다.
측량자와 줄자는 홍수를 다스리는 권위의 상징으로서 BC.2,267 아사달의 1세한검의 태자 부루가 중국 안휘성 도산에가서 요임금(BC.2,357∼2,258)의 신하인 우사공에게 오행치수법을 전수해 주고 측량자와 줄자와 물깊이를 재는 추를 주었다. 그런데 200년 후에 수메르에서 똑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문명이 전달될 수 있는 민족의 이동이나 긴밀한 교류가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북서 메소포타미아 성읍국가 마리의 찜리림왕(BC.1,779∼1,757)의 왕궁에서 발견된 벽화에는 윗칸에 사자위에 전쟁과 사랑의 여신 이쉬타르에게서 왕권을 받는 모습이 있고 , 아래칸에는 풍요의 상징인 물줄기가 단지에서 네 방향으로 흘러나오는데 네 강을 뜻한다고 한다. 옆에 생명나무와 열매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그 사이에는 날개 달린 수호신이 정원을 지키고 서있다.
날개 달린 수호신은 전통에 의하여 해석하면 태양신의 정령인 까마귀이다.
한웅의 신단수(BC.4,000년)- 성경의 에덴동산 생명나무(BC.4,000)-수메르의 우르-남무(BC.2060) - 인도 불교의 나무(BC.500).
8. 알 :
알은 주로 태양, 태양신, 태양의 정기(陽氣), 한님, 씨 등을 뜻하는 말인데 우주란 뜻도 있다.
알다이(알파벹 발음 알타이)는 태양신인 환인(桓仁), 또는 태양신의 아들인 환웅(桓雄)이 인간으로 태어난 곳으로서 알다이산(金山)과 바이칼호 사이의 지역을 말한다. 태양신 햇님(桓任)이 직접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70,000년 전- 6,5000년 전 사이에 처음오신 분을 말한다. 그 이후의 환인들은 태양의 여러 신들이 내려와 사람으로 태어나 햇님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태양신 햇님으로 비유한 인물, 또는 햇님을 나타내는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는 주로 한국, 몽골, 중국에서 나타나고, 태양의 정령 즉 성령새인 가마귀나 가마귀의 변형인 기러기, 오리, 늑대, 사자, 비둘기 등이 나오는 것은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다.
가마귀란 검(神)새-고마새-가마새- 가마귀(神貴)로서 하늘새, 성령새, 천둥새란 뜻이다.
8-1. 햇님을 직접 나타내는 이야기들;
① 환인(한국, 인도), 빛의 신 인드라(인도)
② 밝달나라 18명의 한웅들
※ 바람신 풍백, 구름신 운사, 비의 신 우사를 거느렸으니 태양에 비유한 천왕이란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태양신 햇님의 아들로서 사람으로 태어난 분은 시조한웅 한 분뿐이다. 후에 약 5,000년 전에 7회제신(七祭神)의 풍습으로 발전되어 해신(태양), 달신(달), 불신(화성), 물신(수성), 나무신(생명나무, 진리도덕, 목성), 대지신(지구)의 일곱신에게 제사드리는 풍습이 되었는데 이것은 수메르에 전달되어 해신 우투, 바람신 엔릴, 물신 엔키, 달신 난나, 천둥신(불신) 아다드, 금성신 인안나, 등이 유물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일주일의 기원이 되었다.
③ 중국의 태호복희, 염제신농, 소호김천씨, 요임금, 순임금을 해에 비유했다.
(상고시대 중국의 제왕들은 모두 우리민족들이다.)
④ 부여시조 동명, 백제시조 구대, 북위 도무황제 척발규, 금나라 시조 아골타, 징기스칸의 선조는 알처럼 둥근 빛으로 임신하였다.
8-2. 햇님을 상징하는 알에서 탄생한 이야기들.
① 중국 은나라 시조 설과 진시황의 시조 대업은 현조(玄鳥: 가마귀: 중국인 은 가마귀를 싫어해서 제비라고 해석한다.)알에서 탄생.
② 신라시조 박혁거세, 가락국시조 김수로왕은 알에서 탄생.
8-3. 태양의 정령 즉 성령새인 가마귀 이야기들.
① 7만년 전의 인류조상 나반과 아만 즉 견우와 직녀이야기(오작교 : 가마귀와 까치가 만든 다리)
② 수메르족, 바빌론, 몽골족, 성경의 홍수설화에 가마귀 등장.
③ 고구려 시조 주몽은 오이(烏伊)를, 백제시조 온조는 오간(烏干)을 대동했다.
④ 일본에 가서 왕과 왕비가 된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
⑤ 북유럽의 스웨덴, 네델란드, 아이슬란드 창조설화에 가마귀 등장.
⑥ 왜국 초대임금 신무천황(가마귀가 길 안내).
⑦ 중앙아시아 오손국왕(가마귀와 늑대가 아기를 키우다).
⑧ 캄차카 반도 코락족, 축치족, 알래스카, 그린랜드, 카나다 북부(가마귀가 창조자, 첫조상, 햇님, 햇님 후손으로 등장)
⑨ 한국, 일본, 몽골, 아메리카 인디언의 솟대 위의 가마귀.
⑩ 가마귀의 변형인 제비(중국), 기러기(중앙아시아 달단족), 오리(북유럽의 핀족, 시베리아), 흉노의 일파인 중앙아시아 고차족(高車族)은 늑대와 공주가 결혼하여 고차족의 시조를 낳았다는 신화가 있다.
8-4. 수메르의 알(al) :
너, 나, 그 사람, 모두에게 붙이는 "존칭"이며 "말씀"이란 뜻이다. 영어의 아라(ala)는 "날개, 날개모양의 부분"을 가리키는 말로서 (날개 달린)수호신을 뜻한다.
수메르의 최고신 안(an), 안나(anna), 아누(anu)는 하늘, 꼭대기, 천국, 하늘신(천주)인데 씨를 의미한다. 우리말의 "씨, 알"과 같다.
수메르의 엘(el)은 맑고 밝은 햇빛을 말하는데 태양신을 나타내는 말이다.
예수가 죽으면서 "엘라! 엘라! 사박타니---" 하고 기도한 것은 빛의 아버지인 태양신 햇님에게 기도한 것이다. 엘은 이스라엘민족의 최고신이라고 하는데 바로 태양신을 말한다. 수메르어 "알"이 발음이 변해서 된 말이다. 바이칼호수의 이름도 밝알- 백알- 배갈- 바이갈- 바이칼(영어발음)로 "알"이 "갈"로 변했다.
8-5. 아리 : 흰, 큰, 위대한, 하늘, 하늘나라, 신의나라의 뜻.
아리수(한국), 아리안족, 아라리(alari: 수메르에서는 지하, 저승이란 뜻으로 바뀌었음.)
8-6. 오리 : 오리, 압록강(鴨祿江.)
8-7. 울 : 울(우주, 울타리, 태양의 보좌신, 수호신 이름)
우리(집, 가족, 동족)
제 9절 : 문자의 역사
이 부분은 전문 어학자가 연구하여 자세하게 설명할 부분이나 역사를 공부하던 중 발견한 몇 가지를 간단히 소개하고 저 한다.
오늘날 모든 학문이 서양의 증거주의를 채택하여 유물유적이 나와야만 인정하는 풍조를 가지고 있어서 서양학자들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하여 인류문명의 뿌리가 수메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이런 서양적인 고고학적 학문을 존중은 하지만 그것이 기록문화나 정서문화보다 우선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서로 보완적 관계에 있고 다같이 중요한데 유물유적 우선을 내세우는 것이 옳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역사기록에서 나타난 문자창조와 발달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밝달나라 시조한웅은 신지 혁덕에게 문자를 만들게 하였는데 사냥나가 사슴발자국을 보고 만물의 모양을 관찰하여 마침내 문자를 만드니 태고문자(그림문자)의 시작이다.(BC.4,000년).
※ 시조한웅은 밝검(환인)으로부터 천부경(天符經: 천지창조경)과 삼일신고(三一神誥: 천지창조의 근원과 사람과 만물의 교화서)를 구두로 전수 받고 왕권을 물려받았는데 신지씨가 녹도문을 만든 뒤 이것을 문자로 기록하였다.
세상에서 맨 처음 지은 책이고 경서이다.(검불본기)
2. 태호복희는 팔괘부호를 만들고 용서(龍書)를 만들었다.(검불본기)
※ 복희와 여호와족이 수메르로 이동한 후 팔괘부호(주로 직선으로 된 부호)와 용서(용의 움직임을 본 딴 그림문자)가 수메르에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BC.3,500년경)
3. 주양은 옛 문자에 의하여 처음으로 육서(六書: 여섯 가지 글자체)를 만들었다.(검불본기)
4. 자부선생(BC.2800년경)이 우서(雨書)를 만들어 칠회제신의 책력(음양오행력)을 만들고 삼황내문(三皇內文: 천황, 지황, 인황의 진리경서)을 지었는데 후세의 은나라는 칠회제신력을 기초로 하여 일주일 내내 해, 달, 물(수성), 불(화성), 목성(나무), 금성, 땅에 차례로 제사를 지내는 풍속을 가졌다. 이것이 일주일의 원형이다.
중국의 황제헌원은 치우한웅을 배알하고 가는 도중 산동성의 자부선생에게 들려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아 공부하여 신들을 부리는 능력을 얻고 군사를 모아 신농국을 멸하여 임금이 되고 마침내 치우한웅과 70여회의 전쟁을 한 중국의 시조다.
후에 삼황내문의 한권을 정리하여 음부경을 지었는데 중국 주(周)나라 초(BC.1,100년경)에 여상 강태공이 주(注)를 달아 자부선생의 뜻을 조술하였다.
치우한웅, 황제헌원과 같은시대의 인물들인 북경서쪽에 위치한 황제헌원 북쪽에 있던 대요(大堯)는 간지의 술(十干十二支의 사용법)을 배웠고, 북경동쪽에 있던 창힐(倉 )은 부도(符圖:천부경이 쓰여진 녹도문: 그림문자)의 글을 배웠다.( 삼성기전하편, 검불본기)
5. 치우한웅 이전에는 산목(계산법을 적는 숫자)이 있고(BC.4,000∼BC.2,700) 치우때는 화서(花書: 투전목: 세계의 카드와 화투의 시초)(BC.2,700)와 산목이 있었고, 부여때는 서산(書算: 계산법)이 있었다.(태백일사)(그림참조).
6. 아사달 시조한검(아사달검) 원년(BC.2,333) 신지(행정장관)에게 글자를 만들게 하다. 신전(神篆)은 은나라 갑골문의 원형이며 부여시대의 왕문이란 사람이 전문이 복잡하여 약간 생략하여 부예(符隸: 예서)를 만들고 진(秦)나라 때 (약 BC.200년경)정막이 숙신(고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왕문(王文)의 예서를 바꾸어 팔분(八分)을 만들고 진(晉)나라 때 왕차중(왕문의 후손)이 해서(楷書)로 발전시킨 것이 한문(漢文)이다.
문자의 시원은 모두 밝달의 녹도문이고 한문과 한글 모두 우리민족이 만든 것이다.
인류역사에서 두 가지의 문자를 만들어 오랫동안 사용한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
아사달검 67년(BC.2,267) 태자 부루를 (중국 안휘성) 도산에 보내 순임금의 치수관 우사공(나중의 夏나라 禹임금)에게 험난한 곳을 다녀도 해를 입지 않는 천부왕인(天符王印), 물의 깊이를 측정할 수 있는 신침(神針), 황거종(皇鉅宗 : 우주진리, 음양오행, 오행치수법 등을 적은 여러권의 책으로서 표지는 금간옥첩金簡玉牒이라고도 한다.)의 세가지 보물(黃帝中經 : 황제중경은 금간옥첩중의 한권일 것임)을 전해주니 그로부터 중국의 치산치수가 잘 되었고 이 공로로 우사공은 순임금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고 나라이름을 하(夏)로 하여 하나라의 시조가 된다.
(검불본기, 한검세기)
※ 약 200년 후에 수메르에서 왕권의 상징으로 측량자가 나타난다.
7. 아사달 3세 가륵한검 2년(BC.2181) 삼랑 을보륵에게 글자를 만들게 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가림토라 하였다.(한검세기)
※ 이 문자는 한글과 똑같으며 지금도 인도의 구자라트 지역에서 사용하고 있다.
한국, 인도, 수메르가 서로 교류하였으니 이때 이후에 가림토가 전해졌을 것인데 인도에서 쓰는 가림토가 언제 전해졌는지, 또 일본의 아히루 신대문자에는 어떻게 영향 되었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깊이 연구도 하지 않고 외래문명이 한국에 들어왔다고 만 생각하고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인도는 우리민족이 6,500년 전부터 이동하여 살았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파동적으로 이동한 역사적 사실(몽골족의 무갈제국 등)들이 있으므로 불교의 석가모니가 사용했던 산스크리트어(범어)가 바로 우리의 방언에 속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를 것이나 석가모니를 믿는 불교인들이 지난 2,000년 동안 한문으로 번역한 불교경서만 달달 외우는 앵무새들이어서 또 하나의 사대주의에 빠지게된 원인이 되었다. 도대체 종교인들이 언어연구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으니 그 한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다. 그러면서 석가모니 이전의 우리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소극적이니 조상님들께서 보시기에 중들은 모두 역적들이다.
기독교인들도 똑같다.
수메루가 인류문명의 시원이라고 주장하고 자기들이 마치 이스라엘민족의 후예인 것처럼 착각하고 단군상의 목을 거침없이 자르는 역적행위들은 종교와 조상을 구분하여 다같이 존경할 수 있는 포용력을 길러주지 못한 지도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
지금 한국인들은 일본의 역사왜곡을 말할 수 있는 자격조차 없는 속빈 강정들이다.
그 동안 한국의 교육정책과 종교교육이 얼마나 엉터리였는가를 증명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먼저 자성하고 자기를 먼저 찾아야 한다.
세종대왕의 한글은 몽골족에 의하여 인도로부터 중앙아시아에 전해진 가림토를 본 따서 만든 것이다. 세종실록 25년 12월조에 "---其字倣古篆"이라고 하여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했다"라고 하였으나 "전자(篆字)에서는 한글원형을 모두 찾기가 어렵다.
8. 아사달 5세 구을한검 4년(BC.2,096) 육십갑자를 이용하여 책력을 만들었다.
※ 십간십이지는 옛부터 있었는데 책력을 만든 것은 처음이란 뜻이다.
중국 서량지의 "중국사 전사화"에 "중국의 책력법은 동이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犧和子)이다.
그의 계통은 은나라 동이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임승국의 한단고기)
9. 아사달 12세 아한한검 2년(BC.1,833) 나라를 순수하다 요하 남쪽(하북성)에 순수관경비를 세워 역대 제왕들의 이름을 새겼다.(문자사용 증거)
10. 아사달 20세 고흘한검 40년(BC.1,341) 공공인 공홀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했다.(문자사용 증거).
11. 아사달 22세 (조선 시조) 색부루왕검 원년(BC.1,285) 금8법 제정(문자사용 증거)
● 여기에서 한국과 수메르의 문자사용 연대를 비교해 보자.
① 수메르는 BC.4,500년∼3,500년까지는 여러 가지 모양의 조약돌 같은 물표를 사용하다가 BC.3,500경에 갑자기 고도문명이 나타나고 물표에 선을 이리저리 그어서 사용했는데 이 시기는 복희-여호와족이 중국에서 밀려난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선들은 복희가 만든 선들로 이루어진 팔괘부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이것을 주장하는 일본학자도 있다.
② 수메르는 BC.33세기경 생활이 발전하고 거래하는 물품이 많아지니 점토판에 수효나 문양을 그려 상형문자를 사용했다. 상형문자의 원형은 이미 밝달나라에서 녹도문으로 사용한지가 오래되었고 또 복희가 상형문자의 일종인 용서(龍書)를 만들었는데 이때부터 선과 그림문자를 병행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BC. 30세기경에는 선을 여러 가지 형태로 복잡하게 조합하여 쓰는 쐐기문자로 발전하고 BC. 1,200년경에 알파벹 원형이 나타난다.
특이한 것은 수메르의 상형문자는 점차 발전한 것이 아니고 갑자기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외부영향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수메르는 한국, 중국과 꾸준히 교류하고 있었다고 판단되는데 여호와족과 신농족, 그리고 소호족은 모두 중국에서 밀려난 사람들이므로 한국보다는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문자는 중국의 문자발전과정과 일치하고 말은 우리민족이니 고대한국과 중국의 말이 모두 나타나지만 한국과 같은 교착어로서 한국의 말에 더 친근하다.
수메르는 BC.2,700년경부터는 교육을 시행할 정도로 문화가 발달했고 BC.2,600년경에 우르 제1왕조를 세우면서 급속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는 중국에서 신농족과 소호족이 쫒겨난 시기로 일치하는데 수메르에서 인구이동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형태가 나타나고 점차 전쟁이 많아지는 시기다.
따라서 역사상에 나타나는 수메르의 뛰어난 조상은 여호아이며 뒤를 이어 소호김천씨인 엔릴(우르 제1왕조)이고 그 다음이 우르남무(우르3왕조)이고 그 다음이 아브라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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