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의 차이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은 경락과 경혈 개념이다.
동양의학에서 핵심적인 개념인 경락은 전신(全身)을 달리면서 인체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주관하는 통로라고 알려져 왔다.
인체에 질병이 생길 때 그 증상이 최초로 나타나는 곳이 경락이고, 또 질병 치료도 그 경락을 조절함으로써 가능하다.
경락을 조절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침구(針灸)법이다. 김봉한? 봉한학설? 많은 이들은 아마도 김봉한이라는 이름과 봉한학설이라는 이론에 대해 생소할 것이다.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봉한학설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김봉한은 동양의학의 근간이 되는 경락의 실체를 밝혀낸 북한의 의사이자 과학자이고 봉한학설은 경락론을 입증하고 발전방향을 제시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김봉한, 그는 누구인가?
김봉한,『북한인명사전』에 나와 있는 간단한 그의 이력이다.
1941년 |
경성제대 의학부 졸업 |
1950년 |
한국전쟁 당시 월북 |
53년 1월 |
평양의학대학 생물학 부교수 |
61년 8월 |
논문 「경락 실태와 그 관계」발표 |
62년 1월 |
학위-학직 수여위원회 제4차 상무위원회에서 의학박사 학위, 평양의학대학 생물학 강좌장 |
63년 11월 |
경락 연구의 새 성과에 대한 학술 논문 발표> |
64년 3월 |
내각 직속 「경락연구원」 창설에 따라 경락연구원장 |
64년 4월 |
생명 유기체의 자기 갱신에 관한 신학설 제창 |
김봉한,『북한인명사전』에 나와 있는 간단한 그의 이력이다.
김봉한은 의학 뿐만 아니라 물리학, 화학, 수학등에도 뛰어난 식견을 갖춘 과학자였다. 일제 대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해 북한에서 교수생활을 계속했다. 김봉한은 당시로서는 첨단 분야였던 원자물리학에 관심이 깊었다. 그가 대학에서 공부하던 1930년대 말은 아직 최초의 원자폭탄도 만들어지기 이전이어서 원자물리학 개념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서 공부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분야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원자물리학을 열심히 해둔 덕분에 나중에 경락체계를 발견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얻는다. 그는 방사성 동위원소의 방사선 방출 성질을 이용한 방사선추적법을 이용해 경락의 존재를 증명했던 것이다.
김봉한은 1960년대,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과학기술을 총동원해 경락을 추적해 나간다. 전자현미경, 분광분석기, 오토라디오그래프, 특수색소도포, 전기적 분석 등으로 당시 선진국의 과학자들도 접근하기 만만치 않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김봉한이 그런 기계들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독특한 실험연구방법을 창안하여 경락의 실태를 파악하였는바, 동물 및 인간 유기체 내에는 조직학적 및 실험생리학적 성질에 있어서 신경계통, 혈관 및 임파 계통과는 명확히 구별되며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해부조직학적 계통으로써 경락 계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해명하였다』
1962년 북한에서 발행하는 『조선중앙연감』에서 김봉한이 경락의 실체를 발견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경락상의 중요 지점인 경혈(經穴)은 침을 놓고 뜸을 뜨는 자리이므로 경락론은 한의학의 토대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경락과 경혈의 해부학적 실체가 밝혀지지 않아 서양의학에서는 그 존재를 무시하고 있었다. 나아가서는 경락을 토대로 전개되는 동양의학 전체를 과학적 근거가 없는 의학이라고 멸시하고 있었다. 심지어 영국의 한 출판사에서 발행된 『세계미신사전』에는 동양의학이 미신의 하나로 등재돼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경락의 과학적 객관적 실체를 구명했다고 하니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1964년의 『북한중앙연감』에는 김봉한팀의 계속적인 놀라운 연구 성과가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김봉한 교수를 비롯한 경락 연구집단들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1961년 경락실태를 발견한 후 그에 관한 연구를 독창적 방법으로 더욱 심화 발전시켜 경락계통의 형태와 그 기능의 전 면모를 기본적으로 확정하였으며 특히 핵산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을 세상에 내놓았다.(중략) 경락계통에 관한 연구 성과는 경락 계통의 엄격한 객관적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생체의 조절기전을 포함한 생명 현상의 근본문제를 일면적으로 설명하여 온 기존 학설들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업적은 세포의 분화, 물질대사, 유전, 유기체의 반응현상, 질병의 발생과 그 발전 등 현대 생물학과 의학 부문 앞에 제기되고 있는 당면한 근본 문제들을 연구 해명함에 있어서 광명한 전망을 열어주며 또한 인간의 건강과 장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새로운 서광을 비춰준다. 이 위대한 발견은 현대 생물학과 현대 의학 발전의 새로운 단계를 개척한 혁명적 사변이며 세계과학사에 금자탑을 이루어 놓았다』
김봉한팀은 1961년 「경락에 관한 제1논문」을 발표하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63년 「제2논문」을 발표했다. 제2논문은 경락의 실체가 분명히 존재할 뿐만 아니라 경락의 기능이 동양의학 고전에 기록되어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생물학적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유사 이래 축적된 서양의 모든 과학업적에 가해진 한 방의 케이오(KO) 펀치 같은 것이었고 가히 혁명적인 사변의 뜻을 띠고 있었다. 북한 당국의 대대적인 선전에 힘입어 김봉한팀의 연구성과는 전세계를 경악케 했다. 세계 유수의 학자들이 북한을 방문했고 김봉한팀에 대한 초청장이 쇄도했다.
이 연구 성과는 동양의학 이론에 확고한 과학적 및 물질적 근거를 부여하며 현대 생물학과 의학의 각종 이론들은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필요성을 제기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1년 3개월만인 1965년 4월 제3논문 「경락학설」과 제4논문 「산알학설」이 발표되고, 6개월 후 1965년 10월 제5논문 「경락의 객관적 실체 구명」이 마지막으로 발표되기에 이른다.
김봉한 연구팀의 성과는 마침내 『봉한학설』이라는 독특한 체계를 갖추게 된다.
서양의학을 전공했지만 폭넓은 기초과학 지식을 갖고 있던 김봉한은 연구에 착수한 지 5년 후부터 경락과 기의 객관적 실체를 내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경락은 고전 경락학설의 설명을 훨씬 뛰어넘는 엄청난 것이었다. 경락은 생명의 발생과 유지를 원천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조직이라는 것이다.
봉한학설에서 침구술 같은 경락 조절 의술에 의한 질병 치유 효과를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연구 중의 하나는 태아 수태시의 경락에 대한 관찰이다. 놀랍게도 수정란으로부터 태아가 수태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생기는 것이 경락 조직이었던 것이다. 경락이 가장 먼저 발생해 다른 조직의 형성을 유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락이 생기지 않고는 다른 어떠한 조직이나 기관도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말하면, 경락에 이상이 생기면 해당 기관에 이상이 생겨 질병을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질병과 건강을 관리할 때, 생명 유지의 원천적 책임 조직인 경락을 조절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김봉한팀은 계속해서 서구의 의학과 생물학에서의 설명들을 뒤집어엎는 결과들을 발표한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1965년에 발표한 「산알학설」이었다. 산알학설의 골자는 세포 이전의 형태로 산알이란 것이 존재하고, 그것이 경락을 순환하면서 세포의 생성과 사멸을 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포가 세포분열에 의해서만 생긴다는 종래의 세포이론을 뒤엎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고전 경락이론을 하나의 거대한 학문 체계로 완성한 김봉한팀의 독보적 업적이었다.
봉한학설은 1960년대 초반 북한에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고, 북한 당국은 그것을 국내외에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북한이 「세계과학사에 금자탑을 이룬 업적」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김봉한의 봉한학설. 한의학의 핵심개념인 경락과 경혈의 실체를 밝혔다고 알려진 봉한학설은 하루아침에 폐기되고 김봉한은 숙청당한다.
북한에서 1987년 일가족을 데리고 월남한 김만철씨의 증언에 따르면 봉한학설은 학문외적인 이유, 바로 정치적인 권력싸움에서 희생되었다고 한다. 김봉한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북한의 권력서열 제 4위인 박금철이 숙청되면서 김봉한도 지지기반을 잃어서 봉한학설이 유폐되었다는 얘기이다. 봉한학설의 탄생과 소멸이 박금철의 권력층 재임시절인 1956∼1967년 사이에 이루어졌다가 1967년 이후 돌연 사라지게 된 것을 보면 김만철씨의 증언과 부합된다.
북한 당국이 김봉한의 공로를 치하하고, 급기야 그를 위한 별도의 연구소인 경락연구원을 설립하게 만들었던 『봉한학설』이 폐기된 배경에는 정치적 이유 외에도 훨씬 복잡한 요인들이 겹쳐 있었다.
김봉한이 연구 결과를 발표한 1960년대 초반만 해도 서양은 동양의학을 도무지 과학적 의학이라고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해부학 교과서에는 물론 경락이란 것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 김봉한이 경락의 실체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경락이 생명의 발생과 영위에 결정적이고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구명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경락이 엄연히 존재하고 또한 생명 현상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2천년의 전통을 가진 서양의학이 경락의 존재와 기능을 전혀 모르는 「반쪽 의학」이 되기 때문이다. 생명 현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모른 채, 어떻게 사람의 질병을 제대로 진료하고 또 어떻게 생명을 논할 수 있겠는가? 세계의학계는 긴장했다.
김봉한의 발표가 사실이라면 소련과 동구권은 물론이고 세계의 모든 의사와 관련 학자들은 경락의 개념을 기본으로 하는 동의학을 학습해야 될 판이었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발표했던 모든 논문이 우습게 될 것이고 또 의학과 생물학에 관련된 각급 학교의 모든 교과서들을 고쳐 써야만 했다. 한글로 쓰인 의학 서적과 교과서를 수입해서 공부해야 만 할 형편이었다. 그들에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67년 소련 의학계에서 『경락에 대한 실태 발견은 과학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소련의 불인정 발표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한의학 경시 태도 이외에도 소련 의학자들의 능력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방대한 분야의 학문과 기술에 통달한 위대한 천재과학자 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할 능력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봉한학설이 궁지에 몰리게 된 데에는 중국의 한의학계나 북한 내 동의학계의 지지 부족과 반발도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양 전통의학계에서 공식적인 반박이나 불인정 발표는 없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의 한(漢)의학계나 북한의 동의학계에서 적극적인 지지가 부족했거나 다소간 반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높이 평가받던 봉한학설이 소련 의학계의 간단한 발표 하나로 하루 아침에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소련의 발표가 있은 1967년 이후에도 북한 내에서 봉한학설의 진위 여부에 대해 한동안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적극적인 지지가 불가능했던
첫째 이유는 봉한학설이 전개하고 있는 경락 계통이 동의사들의 상상력을 뛰어넘을 만큼 거대하고 역동적인 체계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처음에 환영의 뜻을 나타냈던 봉한학설의 경락 계통이 동의사들의 능력을 훨씬 벗어난 것이었기 때문에 뭐라고 논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내심으로는 봉한학설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둘째 이유는 김봉한이 구사한 연구 방법론이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기초과학에다 전자현미경, 방사선 추적장치, 분광분석기 등 첨단 장비로 무장돼 동의사들의 접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셋째 이유는 기득권을 갖고 있던 기존 동의사들의 불만을 들 수 있다. 북한 정권 창립 후 줄곧 실시한 동의학 중흥 정책 덕분에 김봉한의 연구 발표가 시작된 1960년대에는 동의학계에 일정한 질서와 체계가 잡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능력이 있고 경험이 많은 동의사들은 동의학계의 지도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서양의학을 전공한 김봉한이 동의학계의 최고 실력자로 등장한 것이다. 이에 기존 동의학계 원로들의 반발이 컸을 것임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앞에 말한 세 가지 이유 외에도 동양 전통의학계의 반발을 유발시킬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동양 전통의학에서 수천년 동안 경락이란 명칭으로 불리던 것을 김봉한의 이름을 따서 「봉한관」이라고 다시 명명한 점이었다. 그리고 경혈은 「봉한소체(小體)」라 명명했던 것이다.
수천년 동안 한국 중국 일본의 전통의학계에서 공히 경락이라 부르던 것을 하루 아침에, 별로 들어보지도 못했던 사람의 이름을 붙여 부른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름을 바꾸는 것은 전통의학의 개조(開祖)로 알려진 황제(黃帝)나 신농(神農)과 함께 많은 의인(醫人)들이 추앙하던 역사상의 명의들에 대한 불경 행위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봉한 연구팀이 경락을 다시 명명하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경락을 추적하다 보니까 경락 계통이 고전 전통의학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방대하면서도 조직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 체계적으로 접근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북한에서는 어떤 작품이나 업적에 창설자나 공로자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김일성종합대학, 김책제철소 등이 그 예다.
북한당국이 김봉한을 정치적으로 숙청해야 했던 절박한 이유가 바로 생체실험 여부에 대한 논란 때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1956년대 후반 경락을 연구하던 김봉한팀은 생체실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경락이 생물의 죽음과 동시에 사라져 버리기에 오직 살아 있는 생물에서만 관찰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동물실험을 통해서 경락을 확인했다. 그러나 인체에서 경락을 확인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수술시에는 살아 있는 인체 내부를 관찰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술이 목적이기 때문에 충분한 관찰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멀쩡한 사람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마침 「특별한 경우」의 조건이 조성되었다. 동의학 과학화 작업 추진을 결정한 1956년 8월 당대회에서는 「8월 종파사건」이라는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은 소위「연안파」를 중심으로 한 반(反)김일성 세력이 조직적으로 김일성에게 저항했다 실패한 사건이었다. 유례 없는 조직적인 저항에 혼이 난 김일성은 「8월 종파사건」 관련자들에 대해서 『인간 취급을 하지 말고, 씨를 말리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말로 믿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김봉한으로부터 인체 생체실험 필요성을 보고 받고 있었던 당국자들이 숙청된 종파분자들을 생체실험용으로 쓸 것을 김봉한팀에게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김봉한팀은 할 수 없이 생체실험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봉한학설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외국 학자들은 봉한학설의 진위 여부에 관계없이 생체실험 부분을 물고 늘어졌다. 봉한학설에서 생체실험 문제는 치명적인 위험 요소였다. 생체실험을 했어도 문제가 되지만 하지 않았어도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생체실험을 하지 않았다면, 『경락이 살아 있는 생물체에만 존재한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동물실험만으로 인체에 무리하게 적용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된다. 했어도 문제가 되고, 하지 않았어도 문제가 되는 심각한 사안임을 깨달은 북한 당국은 서둘러 봉한학설을 폐기하고 김봉한을 숙청하는 것으로 문제를 덮으려 했을 것이다.
이상의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 결국 김일성은 김봉한의 발견을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북한에서는 김봉한이란 이름은 사라지게 된다. 그와 그의 학설은 아예 없었던 것으로 돼버렸다.
『조선중앙연감』에는 1962∼1965년 판까지는 김봉한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부터는 그 어디에도 김봉한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북한 동의학 관련 자료와 인물을 집대성한 『동의학사전』에도 다른 동의학자들은 많이 소개돼 있지만 김봉한은 없다. 철저히 폐기시켜버린 것이다. 「조선의 망신」이라는 비난이 쏟아져 견디지 못한 김봉한은 몇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다고 한다. 연구원 건물 고층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고, 혹자에 의하면 아오지 탄광으로 유폐되어 거기서 자살했다는 말도 있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김봉한이란 이름은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로 되어 있다고 한다.
미국의 한 의학박사가 의학의 정통 이론에서 벗어난 여러 가지 대안적 의술을 소개한 베스트셀러(1988년 발행)는 침술 편에서 김봉한을 다루고 있다.「김봉한」이라는 한국인 이름의 영문 표기「Kim Bong Han」「North Korean Scientist」, 즉 「북한의 과학자」라는 대목이 있는데, 책에는 김봉한팀이 서양 의학과 과학이 빠뜨리고 있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는 내용이다. 아울러 『김봉한팀이 동양의학의 핵심적 개념인 경락의 실체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경락이 진단과 치료의 핵심체이며 아울러 생명 현상의 근원이라는 것을 구명했다』고 적고 있다. 경락이란 것이 대단히 중요하고 신비스러운 개념이기는 하지만 그 실체를 구명할 수가 없어서 현대 과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는데, 그 실체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서양의학을 전공하는 일본의 의학자들은 「동양의학의 과학적 접근과 임상」(서원당 1991)에서 '봉한소체와 봉한관은 이론이 대단히 정연하게 기재되어 있어서 이것이 고전적인 경혈과 경락을 해명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나, 그 후의 추론적 실험들이 실체가 불명인 채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봉한학설은 그 연구가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많아 앞으로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봉한학설의 가치를 조심스럽게 평가하고 있다.
봉한학설에서 경락관, 다시 말해 봉한관은 생명체의 가장 근본적인 조직이다. 생명현상을 논할 때 봉한관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조직을 왜 현대의 의학자들은 적극적으로 확인하려 들지 않는 것일까? 한의학을 객관화하고 현대화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봉한학설을 어째서 이토록 방치하고 있는 것일까? 전통의학은 그 세가 서양의학에 밀리기는 했지만, 동부아시아 지역에서 그 맥이 유지돼 왔다. 그러다가 1970년대 이후 전통의학이 서양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중국을 방문한 서양 인사들이 침술의 놀라운 효능을 경험하고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널리 알렸던 것이다. 이후 서양의 많은 학자들이 침술을 연구했다. 오랜 연구와 실험 끝에 그들은 『경락과 경혈의 존재 여부야 어떻든간에, 분명한 것은 침술이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서양의학의 대세는 경락의 존재와 침술을 공인하지 않는 쪽이다. 경락의 존재와 침술의 공인은 곧 서양의학의 자존심의 엄청난 실추와 의학계의 일대 개편을 의미하는 것이다.
봉한학설은 전통적 침구법의 효능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외에도, 최근 대중에게 널리 보급되어 각광을 받고 있는 대안적 건강법들, 즉 기공(氣功), 단전호흡, 도인(導引) 법 같은 것들이 서양의학을 대체할 수 있는 훌륭한 기법임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이 기법들은 모두 경락과 기(氣)의 개념에 그 이론적 토대를 두 고 있는 것이다. 봉한학설은 또한 인류에게 노화와 죽음의 문제에 도전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인체의 주요한 기관은 모두 경락 계통을 순환하는 산알에 의하여 끊임없이 갱신 되고 있다. 이러한 경락과 산알의 기능이 곧 그 개체의 노화와 죽음도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산알을 순환시키는 경락 계통의 기능이 쇠퇴하면 노화가 일어나고, 기능이 정지 하면 그 개체에 죽음이 닥쳐오는 것이다. 경락의 기능이 쇠퇴하지 않으면 노화 현상이 생기지 않고, 또 경락의 기능이 정지하지 않는 한 죽음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봉한학설의 출현과 그 후속 연구 성과는 전세계 인류의 질병을 백발백중으로 치료하고 노화를 억제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것은 경제적·산업적 측면에서도 대단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백발백중의 의술은 근대에 있어서 서구 과학 기술을 압도하는 최초의 거대한 원천기술이기 때문이다. 치료 기술의 판매에 의해 엄청난 부(富)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전세계 인류가 쓰는 의료비용을 어림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의료비용을 전세계 GNP의 1%로만 잡아도 수천억달러에 이른다. 전세계 경제력의 판도를 바꿀 만한 엄청난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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