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아이다(AIDA) –
역사를 가두어 둔 유물에 담긴 비련(悲戀)
아는지 모르는지 서성이는 청춘남녀
먼 옛날 이야기 아닌 그들이 곧 주인공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02/09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뮤지컬 아이다
큰 얘의 큰 아기 덕에
감동의 뮤지컬 “아이다” 관람.
1871년 수에즈 운하 개통기념으로
주세페 베르디에 의뢰하여
카이로 극장에서 초연(初演)된 아이다는
지금까지 많은 나라에서 수없이 공연되고 있지만
포로가 된 누비아 공주 아이다(소프라노)와
이집트 장군 라데메스(테너),
이집트 공주 암네리스(메조소프라노)의
국경없는 비련의 사랑을 주제로
1막 ∼ 4막의 원곡에
현대의 안무와 미술과 CG를 가미한 감동적인 스토리였다.
- 작품 줄거리 -
고대 이집트 유물 박물관에서
관람객이 된 모던한 라다메스와 아이다가 기웃거리는데...
미라가 된 제사장의 아리아의 선율로
1장의 막이 내려오고...
이집트의 젊은 장군 라다메스는
실은 지금은 이집트 공주의 노예로 있지만
누비아(에티오피아)의 공주인 아이다와 사랑하는 사이이다.
이집트 공주인 암네리스는 라다메스를 짝사랑하지만
자신에게 냉담하기만 한 라다메스와 아이다의 사이를 의심.
에티오피아가 이집트를 침공하자
라다메스는 대장군으로 선발되어 전장으로 가는데...
라다메스가 아이다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는 아리아 ‘정결한 아이다(Celeste Aida)’
아이다는 자신의 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라다메스를 격려하지만
조국과 사랑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거대한 신상과 기둥에 둘러싸인 신전에서
승전을 기원하는 의식이 진행.
아이다의 아리아 ‘이기고 돌아오라(Ritorna vincitor)’
라다메스는 전쟁에서 이겨 포로들을 이끌고 화려하게 개선.
2막, 합창곡 ‘개선행진곡(Vieni, guerriero vindice)’
아이다는 이끌려온 포로들 사이에서
변장한 에티오피아의 왕인 아버지 아모나스로를 발견.
아모나스로는 이집트 국왕에게 에티오피아 국왕이
전사하였다고 전하며 포로들에게 관용을 베풀 것을 청.
그러나 람피스(제사장)의 반대로 국왕은
아이다의 아버지인 아모나스로를 남겨두고 다른 포로들만 방면.
이어서 국왕은 라다메스의 공을 치하하고 공주 암네리스와의 결혼을 명.
암네리스는 기뻐하고 라다메스와 아이다는 비통.
이지스의 신전 부근 나일 강의 해변,
내일 라다메스와 결혼식을 올리는 암네리스가 람피스의 안내를 받아
기도를 올리기 위해 신전으로.
아이다는 이곳에서 라다메스와 몰래 만날 약속.
이때 갑자기 아모나스로가 나타나 아이다에게 애국심에 호소하면서
에티오피아군이 침공할 수 있도록 라다메스로부터 이집트군의 진로를 알아내라 함.
아이다는 뒤이어 나타난 라다메스에게 이 나라에서 함께 도망치자고 설득.
3막, 아이다의 아리아 ‘오 나의 조국이여(O patria mia)’
라다메스는 아이다의 유혹에 이집트군의 배치를 발설.
이때 신전에서 암네리스와 람피스가 병사들과 함께 등장.
라다메스는 아이다 부녀를 도망치게 하고 스스로 체포.
갇혀있는 라다메스를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암네리스.
결국, 라다메스는 피라미드 안에 갇혀 생매장되는 끔찍한 형벌.
라다메스가 아이다를 걱정하며 돌감방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뜻밖에도 무덤 한쪽 구석에서 그와 죽음을 함께하기 위해 숨어 있는 아이다를 발견.
4막, 라다메스의 아리아 ‘죽음은 아름다운 것(Morir! Si pura e bella)’
라다메스는 아이다를 달아나게 하려 하지만 돌문은 무거워 열리지 않고.
둘은 결국 함께 다음 세상을 기원하며 이승에 이별을 고하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신전에 나타난 암네리스의 기도와 명복을 비는 사람들의
엄숙한 합창 속에 오페라는 조용히 막을 내린다.
4막, 라다메스와 아이다의 2중창 ‘이 땅이여, 안녕(O terra, addio)’
그리고 다시 현대 이집트 고대 박물관 모습.
관람객이 된 모던한 라다메스와 아이다가 다시 기웃거리는데...
미라가 된 제사장은 다시 전시관으로
천천히 들어가는 가운데 막이 내린다.
- 출연진 전원 인사 -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02/09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오페라 아이다(Aida)
《아이다》(Aida)는 주세페 베르디가 작곡한 4막의 오페라이다.
(아이다는 오페라의 규모가 굉장히 크지만 4막으로 되어있고,
이탈리아어로 되어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그랜드 오페라가 아니다.)
프랑스 이집트 고고학자인 오귀스트 마리에트의 쓴 시나리오를 기초로,
카미유 뒤 로클이 프랑스로 대본을 작성하였고,
이것을 근거로 안토니오 기슬란초니가 이탈리아어 대본을 작성하였다.
1871년 12월 24일 카이로의 Khedivial Opera House에서 초연되었다.
유럽에서의 초연은 1872년 2월 8일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막이 올려졌다.
이집트의 국왕 이스마일 파샤가 수도 카이로에‘이탈리아 극장’이라는 극장을 세워,
운하의 개통식과 함께 극장에서 상연할 새로운 오페라를 찾았다.
베르디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해 두번이나 고사했지만, 대본을 읽고,
작곡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그 당시로서는 유래 없는 거액의 작곡료를 받았다.
제작시기 : 1870~1871년
작곡가 :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
초연 : 1871년 12월 24일, 카이로 극장
출판 : 1872년
등장인물
• 아이다(이집트의 노예가 되어 있는 에티오피아의 공주, 소프라노)
• 라다메스(이집트의 젊은 장군, 테너)
• 암네리스(이집트의 공주, 메조소프라노)
• 아모나스로(에티오피아의 왕이며 아이다의 아버지, 바리톤)
• 람피스(제사장, 베이스)
• 이집트 국왕(베이스)
배경 :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전성시대. 수도 멤피스와 테베 부근
대본(리브레토) : 안토니오 기슬란초니
구성 : 프롤로그가 있는 4막
요약 :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장군 라다메스와
에티오피아 공주 아이다와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작품으로,
장엄하고 화려한 음악과 장대한 무대장치가 돋보이는 대작 오페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65년 11월에 국립 오페라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이집트 유적에서 대작 오페라로
이국적인 분위기와 장엄한 음악이 어우러진 완벽한 드라마
다음 세상을 기원하며 이승에 이별을 고하다
주요 음악
1막 1장, 라다메스가 아이다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는 아리아 ‘정결한 아이다(Celeste Aida)’
1막, 아이다의 아리아 ‘이기고 돌아오라(Ritorna vincitor)’
2막, 합창곡 ‘개선행진곡(Vieni, guerriero vindice)’
3막, 아이다의 아리아 ‘오 나의 조국이여(O patria mia)’
4막, 라다메스의 아리아 ‘죽음은 아름다운 것(Morir! Si pura e bella)’
4막, 라다메스와 아이다의 2중창 ‘이 땅이여, 안녕(O terra, addio)’
등장인물
아이다(Aida), 에티오피아의 공주, (소프라노)
음역대가 넓고 음색이 다소 어둡고 거친 소프라노 드라마티코를 위한 배역이지만,
서정성과 파워가 적절한 완급 조절을 이뤄야하기 때문에
소프라노 리리코 스핀토나 리리코 뿌로들도 많이 맡는다.
대표적인 예가 리리코 스핀토 영역에 속했던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
서정적인 창법을 통해 새로운 아이다의 성격을 창조해냈다는 평을 듣는다.
이집트 왕(The King of Egypt), (베이스)
근엄한 왕의 이미지를 위해 베이스 바리톤이나 베이스 가수들이 주로 맡는다.
극중 출정식과 개선식 장면에만 등장한다.
암네리스(Amneris), 왕의 딸, (메조소프라노 / 콘트랄토)
메조소프라노 드라마티코에 적합한 배역이다.
극중 긴장감과 실질적인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며,
아이다보다도 더욱 폭넓은 감정(질투,후회,애증,분노,회한,기쁨 등)을 연기해야 하기 때문에
강한 중저음은 물론이고 전 음역에 걸친 고른 발성을 요구하는 고난이도 배역이다.
라다메스(Radames) , 호위병 장군, (테너)
역시 강한 음색과 성량의 테너 드라마티코들이 많이 맡는 배역이지만,
아이다와 마찬가지로 서정성도 겸비해야 효과적이기 때문에
리리코 스핀토나 리리코들도 많이 맡는다.
아모나스로(Amonasro) , 에티오피아의 왕,아이다의 아버지 (바리톤)
극중 비중은 그리 크지 않으나, 노래보다도
아이다에 대한 부성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연기력이 중요한 배역이다.
람피스(Ramfis), 제사장, (베이스)
라다메스와 암네리스의 극중 긴박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전 장면에 걸쳐 존재감 있게 등장하는 역할이다.
사자, (테너)
라다메스의 출정식 장면에 잠시 출연하는 이른바 전령 역할이며,
테너 리릭 레제로들에게 적합한 단역이다.
여사제의 목소리 (소프라노)
목소리만 출연하는 배역이다. 기도문을 외우는 듯한 연출과 창법이 특징.
승려들, 무녀들, 수상들, 장군들, 병사들, 관리들, 에티오피아인들,
노예와 죄수들, 이집트인들, 동물들 (합창과 엑스트라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왕의 전성 시대, 멤피스와 테베 시.
에티오피아의 공주인 아이다는 이집트에 끌려와 노예가 되었다.
장군 라다메스는 그녀를 향한 사랑과 파라오를 향한 충성 사이에서 갈등한다.
게다가 라다메스는 파라오의 딸인 암네리스의 사랑을 받는다.
전쟁에 패하고 이집트에 몰래 숨어있던 아이다의 아버지인
에티오피아의 왕을 도왔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체포된다.
그는 자신을 항변하지 않고, 결국 아이다와 함께 죽기로 결심한다.
주세페 베르디(1813~1901)
이집트 유적에서 대작 오페라로
1869년 이집트의 총독 이슈마일 파샤가 수에즈 운하의 개통을 계기로 세워진
카이로 오페라 하우스의 개관을 경축하기 위해 작품을 의뢰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이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총독은 이 오페라 극장을 위한
새로운 작품을 당시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였던 베르디에게 의뢰하고자 했고,
베르디는 계속 이 제의를 고사하고 있었는데
파리 오페라 극장 디렉터이자 대본가인 까미유 뒤 로클이 제안한,
이집트 역사의 한 장면을 바탕으로 쓰인 대본을 흥미롭게 읽고 작곡을 결심하게 된다.
제일 왼쪽에 앉아있는 사람이 오귀스트 마리에트이다. 1871년 말 이집트의 황제 무덤을
관광하던 중 브라질의 페드로 2세 황제의 무덤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대본은 프랑스의 이집트 학자 오귀스트 마리에트가
자신이 발굴한 유적들에 바탕하여 만든 시나리오를 기초로
카미유 뒤 로클이 각색한 것을 이후 이탈리아의 시인 안토니오 기슬란초니가
이탈리아어 오페라 리브레토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베르디는
철저하게 고대 이집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조사하였고,
보다 완성도 높은 작품을 위해 대본 작업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오페라 극장 측에서도 아낌없이 제작비를 지원하였고,
의상과 무대 세트는 프랑스로부터 주문하여 가져오기로 한 상황이었는데
1870년 7월 보불전쟁이 발발하자 공연 연기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여러 난항을 겪은 후, 마침내 187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카이로 극장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오귀스트 마리에트
초연 당시, 이미 수많은 걸작들을 통해 이름을 널리 알린
베르디의 새로운 오페라를 보기 위해 전 세계 각지에서 관객들이 카이로로 몰려들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고, 장대하고 호화로운 무대와 이국적인 분위기의 스펙터클한 효과는
관객을 압도하였다. 이듬해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베르디의 지휘로
유럽 초연이 이루어졌고, 뒤를 이어 뉴욕, 런던의 코벤트 가든까지 진출하며
다시 한 번 베르디의 명성이 재확인되었다.
1872년 라 스칼라 극장 유럽 초연에서 아이다 역을 맡은 소프라노 테레사 스톨츠
아이다 초연을 위핸 오귀스트 마리에트가 그린 스케치
이국적인 분위기와 장엄한 음악이 어우러진 완벽한 드라마
오페라 〈아이다〉는 이집트라는 타국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기본적인 무대 세팅이나 의상, 음악에서 이국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으며,
대규모의 합창이나 발레 장면들이 어우러진 장대한 스케일로 관객을 압도한다.
1막에서 승전을 기원하는 합창과 신전 의식에 등장하는 발레 장면,
특히 2막의 개선 행진 장면에서의 화려한 음악과 대규모 퍼포먼스는 익히 잘 알려져 있다.
더 없이 웅장한 이 개선 장면은 제국주의에 대한 풍자적 장면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1막과 2막이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면,
3막과 4막에서는 본격적으로 베르디 특유의 탄탄한 드라마가 박진감 있게 전개된다.
사랑과 애국심, 연인 라다메스와 아버지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 아이다의 고뇌와 죽음을 불사하는 용기는 드라마적 긴장감을 극대화시킨다.
여기에 이국적이고 신비스러운 분위기, 장엄한 합창과
충실한 관현악 음향이 조화를 이룬 〈아이다〉는 베르디 오페라의 또 하나의 걸작이다.
1908년 오하이오, 클리브랜드에서 공연시 아이다 포스터
다음 세상을 기원하며 이승에 이별을 고하다
이집트의 젊은 장군 라다메스는 제사장 람피스로부터
자신이 에티오피아 정벌군의 대장이 되는 신의 계시가 있었음을 듣게 된다.
라다메스는 실은 지금은 이집트 공주의 노예로 있지만
에티오피아의 공주인 아이다와 사랑하는 사이이다.
이집트 공주인 암네리스는 라다메스를 짝사랑하지만
자신에게 냉담하기만 한 라다메스와 아이다의 사이를 의심한다.
에티오피아가 이집트를 침공하자 라다메스는 대장군으로 선발되어 전장으로 나간다.
아이다는 자신의 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라다메스를 격려하는 아리아를 부르면서
조국과 사랑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거대한 신상과 기둥에 둘러싸인 신전에서
승전을 기원하는 의식이 진행되고 라다메스가 나타나
람피스로부터 신성한 갑옷을 받고, 전원이 기도의 합창으로 막이 내린다.
라다메스는 전쟁에서 이겨 포로들을 이끌고 화려하게 개선한다.
아이다는 이끌려온 포로들 사이에서
변장한 에티오피아의 왕인 아버지 아모나스로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아모나스로는 이집트 국왕에게 에티오피아 국왕이
전사하였다고 전하며 포로들에게 관용을 베풀 것을 청한다.
그러나 람피스(제사장)의 반대로 국왕은
아이다의 아버지인 아모나스로를 남겨두고 다른 포로들은 풀어주게 한다.
이어서 국왕은 라다메스의 공을 치하하고 공주 암네리스와의 결혼을 명한다.
암네리스는 기뻐하고 라다메스와 아이다는 비통해한다.
이지스의 신전 부근 나일 강의 해변,
내일 라다메스와 결혼식을 올리는 암네리스가 람피스의 안내를 받아
기도를 올리기 위해 신전으로 들어간다.
아이다는 이곳에서 라다메스와 몰래 만날 약속을 했다.
이때 갑자기 아모나스로가 나타나 애국심에 호소하면서
에티오피아군이 침공할 수 있도록 라다메스로부터 이집트군의 진로를 알아내라고 한다.
아이다는 뒤이어 나타난 라다메스에게 이 나라에서 함께 도망치자고 설득한다.
라다메스는 아이다의 유혹에 이집트군의 배치를 발설하고,
숨어 있던 아모나스로가 다시 나타나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함께 가자고 한다.
이때 신전에서 암네리스와 람피스가 병사들과 함께 등장하고,
라다메스는 아이다 부녀를 도망치게 하고 스스로 체포된다.
갇혀있는 라다메스를 생각하며 괴로워하던 암네리스는
조국을 배신한 죄를 지은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며,
아이다를 잊고 자신에게 돌아와 준다면 모든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해주겠다고 제안하지만, 라다메스는 거절한다.
결국, 라다메스는 피라미드 안에 갇혀 생매장되는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된다.
(4막 2장의 무대 장면은 베르디가 직접 창안했다는
2중 무대 장면으로 위는 신전의 내부, 아래는 라다메스가 갇혀 있는 돌감방이다.)
라다메스가 아이다를 걱정하며 무덤 안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뜻밖에도 무덤 한쪽 구석에서 그와 죽음을 함께하기 위해 숨어 있는 아이다를 발견한다.
라다메스는 아이다를 달아나게 하려 하지만 돌문은 무거워 열리지 않는다.
둘은 결국 함께 다음 세상을 기원하며 이승에 이별을 고하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신전에 나타난 암네리스의 기도와 명복을 비는 사람들의 엄숙한 합창 속에
오페라는 조용히 막을 내린다.
2007년 이탈리아 베로나 아레나(원형 극장)에서 열린 오페라 페스티벌 공연 장면
이곳에서는 1913년에 처음 야외 공연이 시작된 이래로 매년 여름
오페라 페스티벌이 개최된다. 1913년 첫 공연에서도 베르디의 〈아이다〉가 상연되었다.
2011년 이스라엘 Masada 공연
주요 음악
1막 1장, 라다메스가 아이다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는 아리아 ‘정결한 아이다(Celeste Aida)’
출정 명령을 받은 후,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와 아이다와 함께하기를 희망하는
라다메스의 심경을 담은 아리아이다. 고난도의 테너 아리아 중 하나이다.
1막, 아이다의 아리아 ‘이기고 돌아오라(Ritorna vincitor)’
적국의 장군이자 사랑하는 연인 라다메스와 조국의 국왕인 아버지의 싸움이라는
가혹한 운명에 놓인 아이다가 복잡하고 고뇌에 찬 심경을 토로하는 아리아이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극적인 표현이 어우러져 아리아의 정수로 손꼽히는 곡이다.
2막, 합창곡 ‘개선행진곡(Vieni, guerriero vindice)’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에서 이긴 이집트군이 전리품과 포로들을 이끌고 귀환하고,
백성들이 열렬한 환호로 맞이하는 장면이다. 웅장한 합창과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화려한 트럼펫 선율이 인상적인 이 행진곡은 오페라 〈아이다〉의 최고의 볼거리를 제공한다.
3막, 아이다의 아리아 ‘오 나의 조국이여(O patria mia)’
비밀리에 나일강변에서 라다메스를 만나기로 한 아이다는
그가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면 나일강에 몸을 던지겠다면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이루어지기 어려운 사랑에 대한 고통을 노래하는 유명한 아리아이다.
4막, 라다메스의 아리아 ‘죽음은 아름다운 것(Morir! Si pura e bella)’
라다메스가 연인 아이다를 걱정하면서 무덤 안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무덤에 숨어 있던 아이다를 발견하고 라다메스가 부르는 아리아이다.
곧이어 아이다가 두 사람이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음을 노래한다.
4막, 라다메스와 아이다의 2중창 ‘이 땅이여, 안녕(O terra, addio)’
생매장에 처해진 라다메스와 연인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피라미드에 숨어 든
아이다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함께 부르는 아리아이다. 평온히 잠들어가는
두 사람의 영혼을 묘사하는 듯한 고요하고 청아한 음악으로 오페라는 마무리된다.
1881년 〈아이다〉 파리 공연에서 지휘하고 있는 베르디
에티오피아의 역사(STORY of ETHIOPIA)
전설에 의하면, BC 10세기에 Sheba여왕과
Solomon 왕의 로맨스로 태어난 Menelik 1세에 의해
처음으로 에티오피아 왕국(Aksum)이 세워졌다고 한다.
(열왕가상 10:01 시바 여왕이 주의 이름에 관한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어려운 질문들을 가지고 그를 시험하러 오니라.)
하지만, 역사적 기록이나 발견되는 유물들로 봐서는,
Aksum 왕국은 AD 2세기 정도에시작했을 것이라 믿어진다.
하여간 AD 2세기에 세워진 에티오피아 왕국(Aksum)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로 인정받고 있다.
아라비안 반도(고 예멘왕국)의 영향력을 받으며 성장한
Aksum 왕국은 훗날 홍해 연안의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된다.
그리고 멀리 지중해의 그리스 왕국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그 명성을 날린다.
실제로 그리스와 이집트 역사에 기록된 에티오피아 왕국의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
4세기 King Ezana 통치기에 Aksum 왕국은
페니키아의 Frumentius에 의해 크리스챤 국가로 개종을 한다.
그리고 451년 칼케돈 종교회의(the Council of Chalcedon)를 통해
이집트 곱트(Copt)교와 유사한 독자적인 에티오피아 정교회를 창시하기까지 한다.
지금도 에티오피아는 국교가 '에티오피아 정교회'로 이 전통을 계속하고 있다.
7세기, 신흥 세력인 이슬람이 아라비아 반도에 출현한다.
이에 지역 패권을 쥐고 있던 비잔틴 제국은
이 신흥 세력을 견제코자 '홍해 무역'을 엄격히 통제한다.
이로 인해 홍해 무역을 나라의 기반으로 둔
Aksum 왕국은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 후 Aksum 왕국은 외부세계와는 거의 단절되고,
자연스레 관심을 에티오피아 고원지역 (지금의 Amhara 지역)으로 돌린다.
그리하여 Aksum 왕국은 에티오피아의 하나의 작은 정치세력으로 전락하고 만다.
1530년 Somali 지역의 강력한 무슬림 지도자인 Ahmad Gran의 정복활동으로 인해,
에티오피아의 전 지역이 위험에 처한다. 당시 에티오피아의 황제였던,
Lebna Dengel은 포르투갈 황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포르투갈과 긴밀한 정치적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후 2년 동안 에티오피아와 소말리는 치열한 전쟁을 치른다.
설상가상으로 소말리와의 전쟁 후 탈진한 에티오피아 황실은
남서부에서 올라오는 Oromo의 침입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2세기 동안, 에티오피아 왕국은 Oromo의 침입을 피해
에티오피아 북부 Gondar 지역으로 나라의 중심을 옮긴다.
하지만 그 후로도 에티오피아는 Amhara와 Tigray 사이의
치열한 왕권 분쟁(내전)을 겪으며, 결국은 여러 작은 세력으로 나눠지게 된다.
1855년 에티오피아는 Tewodros 2세에 의해 다시 한 번 통일을 이룬다.
Tewodros 황제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Amhara, Tigray, Shoa, Gojjam 등
현 에티오피아 영토의 북부와 중앙부를 통일한다.
그 후 Tewodros 황제는 중앙집권적 정치와 현대식 관리 체계로
강력한 개혁을 시도한다. 그리고 자국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대영제국의 영사를 포함 영국인 몇 명을 투옥한다(1867).
이 사건을 개기로 대영제국은 군대를 급파, 에티오피아와 전면전에 돌입한다.
Tewodros 황제는 Magdala에 요새를 쌓고 항전을 계속했지만,
결국은 전투에서 패배, 스스로 자결한다(1868).
1872년 Tigray 지역의 리더였던 Yohannes 4세는
중앙정부를 뒤집어엎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정권을 차지한 Yohannes 황제는 부국강병을 주창 하지만,
이집트의 침입 (1875-6), 수단의 침입 (1881),
유럽열강의 침입 (1869 ~ )을 계속해서 받으며 수난의 수난을 겪게 된다.
결국 1889년 Yohannes 황제는 이슬람 구세주파 Mahdsts에 의해 살해를 당한다.
이후 에티오피아는 친 이탈리아파인 Menelik 2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1889년 Menelik 황제는 이탈리아와 Friendship and Cooperation 협약을 맺는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1895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한다.
하지만 1896년 3월 1일 이탈리아는 Adwa 전투에서 Menelik 황제에게 패하게 된다.
황제는 승리를 기념하여 이 날을 'Adwa 승전기념일'로 공포
지금까지도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
전쟁의 패배로 이탈리아는 현 에리트리아 지역에 잔류하게 된다.
이탈리아와의 전쟁 후, Menelik 황제는 동쪽과 남쪽으로 정복 전쟁을 계속해
현 Harar 지역, Sidamo 지역 그리고 Kaffa 지역을 에티오피아 영토 내로 복속시킨다.
그리고 그는 현재의 수도인 Addis Ababa로 천도,
정치와 경제 그리고 군대의 현대화 등, 개혁의 물결을 늦추지 않는다.
1913년 Menelik 황제가 죽자, 그의 손자인 Lij Iyasu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그는 친 이슬람 정책을 펴며, 1차 세계 대전 당시
Central Power인 투르크제국을 지지한다.
그리하여 그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견제를 받게 되고
결국 1916년, 4년 만에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그 후, Menelik의 딸인 Judith와 그의 남편 Ras Tafari Makonnen에 의해
섭정 정치가 행해진다. 결국 1930년 Ras Tafari Makonnen은
Judith로 부터 모든 정권을 인수받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가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인 Haile Selassie이다.
Haile Selassie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곧 바로 에티오피아를 침공한다.
Haile Selassie는 당시 국제 연합인 The League of Nations(에티오피아 1923년 가입)에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The League of Nations는
이탈리아에 경제 제재를 가하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리하여 1936년 5월, 수도 아디스아바바는
이탈리아 수중에 들어가고 Haile Selassie는 폐위된다.
하지만 1941년 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가 패배하여 Haile Selassie는
다시금 황제의 자리로 복귀하게 된다.
Haile Selassie 황제는 한국전 당시 우리나라에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경제와 정치 전반에 걸친 개혁을 시도하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계속되는 가뭄과 내전 등으로 인해 결국은 황권 통치를 막을 내리게 된다.
1974년, 대령 Mengistu Haile Mariam이 이끄는 PMAC가 쿠데타에 성공한다.
(PMAC : Provisional Military Administrative Council. 임시 군부 행정 평의회).
그리하여 2000년이 넘게 계속 되어온 에티오피아의 군주정치는
황제 Haile Selassie(통치 1930-74)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 에티오피아는 PMAC에 의해 사회주의 국가로 변모하게 된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의 사회주의 체제도 계속되는 대(大)가뭄과 기근,
그리고 쿠데타와 대규모 난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1991년 Meles Zenawi가 이끄는 EPRDF에 의해 무너지게 된다.
(EPRDF: the Ethiopian People's Revolutionary Democratic Front.
에티오피아 인민 혁명 민주 전선)
Meles Zenawi는 에티오피아를 민족별로 나누고 에티오피아를 연방국가로 재편성 한다.
그리고 1995년 에티오피아 최초로 자유 경선을 통해
Negasso Gidada를 대통령으로 임명하고, 스스로는 PM(총리)의 자리에 앉는다.
그 후 그는 지금까지 PM의 자리에 앉아 막강한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대통령은 허수아비 대통령이다.
모든 실권은 PM인 Meles Zenawi가 가지고 있다.)
Eritrea는 무솔리니의 점령기 이후, 에티오피아에 편속돼 있었으나
지속적으로 독립, 저항 운동을 계속한다.
그 결과 드디어 1991년 독립된 정부를 세우게 된다.
그리고 2년 뒤인 1993년 정식 독립 국가가 된다.
하지만 이 후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 간 크고 작은 국경 분쟁은 계속된다.
그러다가 1998년 드디어 이 두 나라는 전면전에 이르게 된다.
이 에티오-에리트리아 전쟁은 2000년까지 계속되며 양측에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낳는다.
그리하여 국제사회인 UN과 AU(Africa Union)가 개입하게 되고,
이들의 중재로 양측은 평화협정에 서명한다.
(아직까지도 이 지역에는 UNMEE(UN Military Ethiopia Eritrea)라 불리는
평화 유지군이 주둔하고 있다.)
이 외에도 에티오피아는 2000년대 초반까지 소말리아와의 국경 분쟁,
소수민족 자치독립 운동, 반정부 시위 등 크고 작은 문제들이 많이 있었지만,
정부의 강력 대응과 UN, AU 등의 중재로 위태위태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의 에티오피아는 PM. Meles Zenawi의 강력 경제부흥 정책으로
눈에 보이는 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하지만 계속되는 가뭄과 정책 실패,
그리고 국경 분쟁과 부정부패 등의 문제를 안고 있어 살얼음판을 걷는 형상을 하고 있다.
O del mio dolce ardor(오~나의 감미로운 사랑) / Sop. Maureen O'Fly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