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길8(광주향교길1 ④연자방아, 법화사지, A Festival In The Forest)
이름없는풀뿌리2020. 11. 24. 03:13
요즈음 – 산성길8(광주향교길1 ④연자방아, 법화사지) –- 연자방아 -
胡亂後 삼백년 만에 방앗간 지었다는
上樑文 살펴보니 깊은 뜻 알겠다만
開發의 광풍노도 속 살아남아 있을지
- 법화사지 -
광교산 전투에서 죽었다는 양고리가
벌봉의 산자락에 넋을 둔 미스터리
浮屠는 봉인된 채로 기울어져 있었다.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1/0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산성길8(광주향교길1)(3) 북문-연자방아-법화사지왕복-연자방아입구
(+140=183분(09:00-11:20), +4.8=6.3km)
북문에서 남문 구간은 여전히 공사로 인한 펜스 통제.
원두표 장군이 내려간 그 길,
광주목의 읍치가 춘궁동 일원에서 산성으로 옮겨 감에 따라
한강에서 운반되던 각종 세곡 물품 임시 보관소인 司倉이 있었다 해서
상사창리, 하사창리란 地名으로 남아 있다하며
그래서 춘궁동에서 북문까지의 길을 稅米길이라 한다고 한다.
한양으로 집결되던 6대로의 하나인 그 봉화로를 오가던
마방과 마패, 마차에 대한 알림글을 읽고 있노라니
꼬불꼬불한 산길을 등짐 가득지고 힘겹게 오르던
牛馬들의 워낭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였다.
산비탈길을 내려가니 긴 목제 계단 登路가 보였는데
계단의 하단부가 고골계곡의 반딧불서식지인 것 같은데
이정표에는 그 지명이 보였지만 막상 그 지점에는
어디에도 그에 대한 설명은 없고 수풀만 우거져 있다.
고골은 상사창동, 하사창동, 춘궁동, 항동, 교산동을 아우르는 지역명칭이라는데
광주읍치(관아)가 있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고읍(古邑)으로 불리다가
“고고을”을 거쳐 “고골”로 변천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광주부 혹은 광주목은 현재 광주시 만이 아니고 예전에는
서울 강남, 송파. 강동, 경기 하남, 성남을 포괄할 정도로 방대한 지역이었는데
1960년대에 서울 강남, 송파, 강동에 이어
1970년대에 경기 하남, 성남이 떨어져 나갔다하며
그 읍치는 현재의 이 곳 춘궁동, 송파 가락리 등에 있다가
산성내로 옮겼다하며 한 때는 경기 관찰사도 그 治所에 주재했다고 한다.
그러한 유래를 생각하면서 고골계곡을 지나니
앞에 덕풍천 한강합류점 8.5km란 표지판이 보인다.
덕풍천 호안을 잘 살펴보니 성벽돌 같은 네모난 돌들로 잘 쌓아 놓았다.
예전의 치수 사업의 흔적인 듯 돌 색깔이 고색창연한데
신도시 개발자들이 이런 호안벽은 잘 살렸으면 좋겠다.
이윽고 연자방아 입구를 지나
오른편 벌봉 가는 길목에 접어드니
단독주택이 들어선 상사창동 마을인데 집 앞의 채전을 만든
돌담 등이 오래된 성벽돌 같다.
춘궁동, 궁안마을 등 유래에서 보듯
이곳에 백제 궁궐터가 존재했다는 설화가 있고
실재 객산 중턱에서 성터를 발굴했다는데
발굴유물이 고려시대 것이어서 백제의 흔적은 아직 찾지 못해
백제의 연관성은 섣불리 단정하지 못한다는데
이는 이성산성도 마찬가지라 한다.
이성산성은 백제의 두 왕자가 지킨 성이라는 설화가 있는데
정작 발굴 유물은 신라시대의 유물이어서
신라의 성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잘 못이라고 본다.
발굴 유물의 정확성, 발굴지 이하의 층의 조사, 주변 설화조사, 사료조사등
모든 것을 종합하여 판단하여야 한다고 본다.
동네 골목을 돌고 돌아 들어가니 연자방아가
팔각지붕 아래에 시간을 멈추고 갇혀있다.
이런 연자방아가 얼마 남아 있지 않아 상당한 기대를 했는데 조금 실망.
상량문을 보니 병자년이라 했는데 1936년(병자년)에 방앗간집을 지은 듯...
따져보니 공교롭게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난 300주년에 지은 셈.
우연일까? 상사창리 주민들이 역사의식을 갖고 지은 걸까?
안내문에도 1930년대에 제작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1898년 인천에 우리나라 최초로 동력이용 정미소가 설치되고
1930년대 후반에 일제에 의해 수탈용으로
전국에 2,000여개의 도정공장 설치하였다고 하니
이러한 연자방아가 거의 우리나라 마지막 모습이 아닌가 생각.
연자방아를 보고 법화사지 이정목을 찾아보아도 보이질 않아
왼편 능선을 타면 될 거라 생각되어 동네 골목을 돌아가니
웬 전통한옥이 보이고 텃밭들이 즐비하다.
텃밭 사이 오솔길을 지나니 예상대로 법화사지 1.1km란 이정목 출현.
제대로 오긴 온 것 같은데 1.1km라면 거의 벌봉 근처일 것 같은데...
500여m의 표고를 치고 오르면 지치지는 않을까 생각되어
법화사지를 다음으로 미룰까 고민하다가
지금까지 산행하면서 계획을 미룬 적이 없기에
계획대로 법화사지를 보고 내려와
선법사, 동사지, 광주향교, 이성산성을 강행하기로 마음을 다잡다.
법화천을 끼고 오르는 길이 처음엔 밋밋했지만
예상대로 가팔라지며 다리 힘이 점점 빠지지만 1시간여 이를 악물고 오르니
그 유명한 법화사 부도 출현.
내가 여기를 기필코 오르려 했던 이유는
지난번 벌객샘 능선 종주시 벌봉 근처에서 이곳 법화사지가
『법화장군(法華將軍』이라 불린 청태종 홍타이지의 매부인 양고리(楊古利)가
조선의 원두표(元斗杓) 장군의 계략으로 이곳에서 전사하자 훗날 청 태종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법화사라는 절을 지었다』라는 안내문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백양고리는 청의 서열 11번째 장수로
수원 광교산 전투에서 김준룡 장군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각종 史書에 나오는데 왜 이곳에 양고리의 유적이 있는냐의 의문이 일었다.
또한 유래를 소개하면 전북 고창에서 전남 장성으로 넘어가는
방장산 아래 양고살재란 고개가 있는데
광교산 전투에서 전라병사 김준룡 장군 휘하에 복무한
고창 출신 박의(朴義) 장군이 적장 양고리(陽古利)를 사살하였는데
인조가 항복을 함에 따라 淸을 두려워하여 그런 사실을 숨기었으므로
박의장군은 낙향하여 살았다고 하며 그것을 기념하여 양고살재라 하였다고
박씨 종중에 전한다고 하는데 이는 다시 확인하여 볼 일이다.
2011년 발굴조사에서 법화사지의 유물이
고려 초에서 조선말까지 다양하게 발견되었고 중창과 폐사가 반복되었다는 설명.
양고리와 법화사지 관련성에 대한 필자의 추론은
1) 양고리가 광교산에서 박의인지, 무명의 조총병인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전라병사 김준룡 장군 병력에의해 1637/1/7 즈음에 피격된 것으로 보임
2) 청태종이 탄천에 진을 친 날 황산을 쓰고 망월봉(벌봉)에서 행궁을 내려다보았고
그곳에서 행궁과 사창을 향하여 홍이포를 발사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곳 법화골, 벌봉 근처는 청군이 진주한 것으로 보여져
3) 파격 당한 양고리가 다친 몸 혹은 주검으로 청군 진영인 벌봉 근처로 이동되어
4) 이곳에서 죽자 청 제국 서열 11위로 누르하찌의 사위이자 홍타이지의 매부인
그의 죽음에 대하여 청태종은 식음을 전폐하고 애도했다고 하며
5) 이곳에 고려초부터 존재했던 법화사에 양고리를 화장하고 안식처를 두었다고 짐작
6) 여기에 설명된 원두표장군에게 이 근처에서 사살되었다는 설명은 원두표 장군의
북문에서 남한산성 입성후 첫 승첩(1636/12/18)의 사실과 결합된 가설로 보임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온 길을 되짚어
늦가을 법화골 풍광을 즐기며 다시 연자방아를 들여다 보고
덕풍천까지 내려와 덕풍천 주차장을 지나 덕풍천을 따라 향교길을 걷다.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1/0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북문갈림목(09:08, 북문0.2k, 반딧불서식지1.1k, 고골계곡1.4k, 법화골2.0k 광주향교5.6k)
2) 하남마방집 식당이 전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마방 형태를 볼 수 있는 곳이라고?
3) 11/21 벌객샘 2차 종주후 마방집 방문
4) 마패와 마차 설명판(하단 마차는 11/21 하남 마방집에서 촬영)
5) 북문오름계단(09:24, 북문0.8k, 고골계곡0.8k, 반딧불서식처0.5k, 법화골1.4k, 광주향교5.0k)
6) 바로 이 길이 분주했던 세미길이자 법화골 전투가 벌어졌던 길
7) 조선의 6대로 중의 하나인 봉화로였지만 좁은 길
8) 산성 전성기에 1,000여 호라면 4천명이 거주?
9) 광주향교까지 덕풍천 주변이 고읍에서 유래한 고골
10) 덕풍천(한강합류점8.5k), 덕풍천옆벌봉갈림목(09:46, 북문1.6k, 법화골0.6k, 벌봉2.1k)
11) 교산신도시 개발이 진행중임을 실감(현수막으로 뒤덮힘)
12) 법화골연자방아입구(09:53, 북문1.4k, 법화골0.3k, 연자방아0.1k, 법화사지1.7k, 벌봉2.4k)
13) 백제의 성벽을 헐어다 쓴 듯한 담벽이 많이 보임
14) 연자방아(09:57) : 방앗간집은 1936(벙자년) 상량, 연자마는 그 보다는 오래된 듯...
15) 법화골한옥집(10:00, 법화골0.9k, 법화사지1.1k, 남한산성1.5k)
16) 벌객샘 능산상의 법화골 안내문
17) 법화사 부도(10:45) : 양고리의 부도가 아닌 매운당, 평원당 선백도사
이 부도전 30m상단에 법화사지가 있는데 11/7에는 모르고 여기서 내려감
18) 11/21 벌객샘 2차 종주시 법화사지 방문(법화골2.0k, 연자방아1.6k, 남한산성0.4k)
19) 법화천 원류 지점으로 다시 하산
20) 법화골연자방아입구(11:20)로 다시 돌아온 상세도
□ 인천에서 시작된 한국 최초의 정미소
개항 후 인천은 국내 최대의 미곡 집산지이면서 수출항으로 부상하였다.
근대식 정미소가 생겨나기 이전 초기 수출단계에서는 벼를 가마채로 배에 실어 보냈으나
부피가 크고 무게가 무거워 경제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벼의 겉겨를 벗겨 현미 상태로
수출하는 매갈잇간이 생겨났고, 백미도정이 가능한 정미소가 생겨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인천 최초의 기계식 정미소는 1889년 일본인 신토오(進藤鹿之助)가
중앙동 4가에 연 인천정미소였지만, 설비와 품질에 있어서는
타운센드 상회에서 운영하던 타운센드 정미소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정미소라 할 수 있다.
1892년 미국인 타운센드(W.D.Townsend)는 일본인 오쿠다(奧田直次郞)와 합작으로
한국 최초로 근대식 스팀 동력기를 도입한 정미소를 인천에 설립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타운센드를 우리식으로 ‘담손이’라고 발음하였기에
정미소 역시 ‘담손이 방앗간’이라고 불렀다.
담손이 방앗간에서는 1889년에 미국에서 발명된
최신식 스팀 동력 정미기를 4대 도입하였다. 하루에 정미기 한대당 쌀 16가마를
도정 할 수 있어 4대의 정미기로 64가마를 도정하였다고 한다.
당시 담손이 방앗간의 도정량은 획기적이었다. 이 정미기를 통하면
모래와 돌이 섞이지 않는 것은 물론 미곡의 표면이 깨끗하고 광택이 나는
최상급의 백미로 도정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담손이 방앗간에서 도정된 쌀이
마치 수정처럼 뽀얗다고 해서 ‘수정미’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정작 도정된 쌀은 일본으로 수출되어 조선 사람들은 맛보기조차 힘들었다.
개항 이후 미곡의 집산지이자 최대 수출항이었던 인천항은 정미업이 번성했고,
타운센드는 미국에서 개발된 최신식 스팀 동력정미기를 한국 최초로 도입하여
정미업의 발달을 가속화시켰다. 이를 계기로 인천에 대형 정미소를 비롯하여
소형 정미소가 여러 곳에 설립되어 운영되는 등
인천 공업에서 정미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하였다.
□ 법화사지
경기도문화재자료 제86호로 지정된 법화사지는
벌봉 아래에 남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절터다. 문헌에 따르면
“병자호란 때 중국 '법화장군(法華將軍)'이라 불린 양고리(楊古利)가
조선의 원두표(元斗杓) 장군의 계략으로 이곳에서 전사하자
훗날 청 태종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법화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절터에는 와편들이 산재해 있고 돌무더기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절터 근처에 제법 커 보이는 연돌바위가 있다. 연돌바위의 역할은
연을 날려 적의 동정을 알려주는 기능을 했다고 한다.
또한 절터 아래쪽 30m 지점에는 스님들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3기의 부도가 남아 있다. 3기의 부도 중 가운데에 있는 부도는
머리 부분을 염주로 장식한 종형(石鐘型)으로 높이가 1.4m나 되고
부도의 탑신(塔身)에는 '평원당 선백대사(平源堂善佰大師)'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왼쪽에는 편마화강암으로 된 높이 약 93㎝의 부도가 있고,
오른쪽에는 편마화강암으로 된 높이 1.15m 정도의 부도가 나란히 있다.
□ 전북과 전남 경계의 방장산 양고살재
전북 고창군 고창읍 석정리에서 전남 장성군 북이면 죽청리로 넘어가는 고개.
고창 출신 박의(朴義) 장군이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청나라 누루하치 장군의 사위인 적장 양고리(陽古利)를 사살한 것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
박의 장군은 1599년(선조 32) 고수면 초내리 산양동에서
관찰사 양오공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말을 잘 타고 총을 잘 쏘아 박포수로 불릴 정도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고창 출신 박의(朴義) 장군이 누루하치의 사위이자 청의 개국공신인
적장 양고리(陽古利)를 사살한 것을 기념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설화에 의하면 박의장군이 양고살재에서 총을 쏘아 사살하였다고 하나
기록에 의하면 근왕군 소집에 의하여 1637년 1월 4일부터 6일까지
전라도 병사 김준용이 근왕군을 거느리고 경기도 용인근교 광교산에서
치열한 교전 끝에 청군 장수 2명과 양고리를 사살하는 병자호란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양고리를 사살한 이가 박의 장군으로 보여 지나
남한산성의 인조와 합류하지 못하였다. 종중의 기록에 의하면
박의와 아우 인순이 함께 근왕군으로 참전하여 양고리를 사살하였으나,
인조가 항복 화약을 함에 따라 이를 숨기고 낙향하여 살았다고 한다.
다른 유래로는 큰 재[峙]와 작은 재[峙] 두 개가 있다 하여 양고령이라 불렸으며,
양고령 발음이 변화함으로 인해 ‘양고살재’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 길공구님 홈페이지에서
청실록, 내국사원당, 만문노당, 이조실록, 승정원일기, 병자록. 산성일기, 심양장계 망라
https://blog.naver.com/gil092003/221167712845
□ 바다루님의 부흥네이버대표 역사까페 “양고리 열전”
https://cafe.naver.com/booheong/159031
1) 14세부터 청태조와 전쟁 수행, 개국공신 서열11위, 사르후전투 1등공신, 양고리 전사 기록
2) 황족들을 제치고 청제국 서열 11위였던 양고리의 위상
3) 양고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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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Festival In The Forest 숲속의 축제 / Ralf B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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