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야(雪夜)
- 김광균 / <조선일보>(1938) -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처마 : 지붕이 도리 밖으로 내민 부분
* 추회 : 지나간 일을 후회함.
* 작품해설 : 이 시는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김광균은 1920년 후반부터 이미 여
러비면을 통하여 시를 발표한 바 있으며, 1937년 이육사, 신석초 등과 함께 『자오선』 동인으로 활
동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시는 김광균의 이른바 ‘기성의 새 출발’을 보인 작품이다. 절실한 정
서보다 기법이 앞서는 그의 작품은 비로소 이 「설야」를 분기점으로 하여 기교 일변도의 측면이 다
소 완화되는 대신 서정성이 보다 짙게 드리워지게 된다.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으로 은유된
눈이 ‘소리없이 흩날림’으로써 농도 짙은 그리움의 정을 자아낸다. ‘서글픈 옛 자취’로 인해 화
자는 그리움을 서글픔으로, 다시 가슴이 메어짐으로 느끼게 된다. 화자는 견딜 수 없는 외로움으로
인하여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눈 내리는 뜰에 내려선다. 화자는 ‘눈’이 그리워하던 여인으
로 변해 옷을 벗고 다가와 자신에게 안기는 환상에 빠져든다. 결코 들리지 않는 눈 내리는 소리이지
만, 시인의 뛰어난 상상력 속에서 그것은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변모한다. 관능적이며 자극적인
표현이지만, 지속함을 벗어나 도리어 참신함을 느끼게 하는 시인의 감각이 놀랍다. 한편, ‘마음 허
공에 등불을 켠’다는 것은 화자가 슬픈 감정을 스스로 차단함으로써 어둠과 추위에서 벗어나고자 하
는 소망을 반영한 것이다. 그로 인해 화자는 뜰에 내려설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획득하게 되며, 이
것이 다시 화자로 하여금 서글픔의 눈으러부터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발견하도록 한 것이다. 그
러나 그러한 열락(悅樂)의 순간이 지나가면 눈은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 된다. 이제 여인은 다만
기억 속의 ‘싸늘한 추회’로 ‘빛도 향기도 없이’ ‘차디찬 의상을 한’ ‘눈’일 뿐이다. 화자의
슬픔은 ‘내려 내려서’ 쌓이는 눈 ‘위에 고이 서리’어 있을 뿐이다. 이처럼 이 시는 ‘호롱불 여
위어 가는’ 깊은 밤, 소리 없이 내리는 흰 눈을 바라보며 옛 추억에 잠기는 화자의 소회(所懷)가 절
실히 배어난 명품이 아닐 수 없다.
추일서정
- 김광균 / <인문평론>(1940) -
낙엽(落葉)은 폴란드 망명정부(亡命政府)의 지폐(紙幣)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瀑布)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 도룬 : 폴란드 도시 이름, 플이센에 속해 있다가 1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에 병합됨.
* 근골 : 근육과 뼈대
* 작품해설 : 이 시는 사실적 서경의 표현보다는 일상적 관념을 깨뜨리는 낯선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
점에서 상상력의 비약과 지적인 인식을 요구한다.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구겨진 넥타이', '담
배연기'와 같은 비유는 근대화된 서구 도시 문명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며, '나무'와 '공장'을 '근골'
'흰이빨'과 같은 기계적, 물질적 이미지로 비유한 것은 사회의 근대적 변화에 대한 감수성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가을의 황량함이 앞부분에 나타나 있는데 낙엽과 길, 나목 사이의 공장
굴뚝과 구름 등이 묘사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가치하며 적막하거나 쓸쓸한 모습으
로 등장하는데 이러한 성격은 가을을 바라보는 서정적 자아의 심정과 무관하지 않는 것 같다. 황량한
가을 풍경 속에서 후반부에 이르게 되면 자아의 무기력하고 무료한 모습이 묘사된다. 허공에 돌팔매
를 던지며 황량한 상황을 벗어나려 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자신, 그래서 저무는 가을 속으로 잠기어
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는 어떤 정경을 단순히 회화적으로 포착한 것이라기보다는, 화자
의 의식과 대상이 특수한 관계로 만나고 있는, 그 접촉의 순간이 회화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한마디로 이미지즘 계열의 시다. 모더니즘, 이미지즘, 주지주의 등은 서로 교차
하면서 동질의 의미를 갖기도 하는 사조로, 시각 이미지의 부각, 회화성, 관념의 배제, 도시 문명적
소재 등은 이들 유파의 시 정신과 관련된 것이다. 1930년대 새로운 사조로 국내에 소개된 이 유파는
김광균에 의해 대표적으로 실천되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서구의 이미지즘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의 시에 나직하게 깔려 있는 애수의 정서는 특히 서구 이미지즘과는 거리가 멀어
주지적인 성격에서 멀어져 있음은 분명하다. 김광균의 시는 서구의 이미지즘의 본질을 받아들였다기
보다는 표현의 기법을 받아들였다고 하는 편이 훨씬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성호부근(星湖附近)
- 김광균 / <조선일보>(1937) -
Ⅰ
양철로 만든 달이 하나 수면(水面) 위에 떨어지고
부서지는 얼음 소래가
날카로운 호적(呼笛)같이 옷소매에 스며든다.
해맑은 밤바람이 이마에 나리는
여울가 모래밭에 홀로 거닐면
노을에 빛나는 은모래같이
호수는 한 포기 화려한 꽃밭이 되고
여윈 추억(追憶)의 가지가지엔
조각난 빙설(氷雪)이 눈부신 빛을 발하다.
Ⅱ
낡은 고향의 허리띠같이
강물은 길―게 얼어붙고
차창(車窓)에 서리는 황혼 저 머얼리
노을은
나어린 향수(鄕愁)처럼 희미한 날개를 펴고 있다.
Ⅲ
앙상한 잡목림(雜木林) 사이로
한낮이 겨운 하늘이 투명한 기폭(旗幅)을 떨어뜨리고
푸른 옷을 입은 송아지가 한 마리
조그만 그림자를 바람에 나부끼며
서글픈 얼굴을 하고 논둑 위에 서 있다.
와사등
- 김광균 / <조선일보>(1938) -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델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여름 해 황망히 날애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크러진 채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래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느린 그림자 이다지 어두어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외인촌
- 김광균 / <와사등>(1939) -
하이얀 모색(暮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아란 역등(驛燈)을 달은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뭍힌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치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단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은수저
- 김광균 / <문학>(1946) -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은수저
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밤 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 속을 들여다 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데생
- 김광균 / <조선일보>(1939) -
1
향료(香料)를 뿌린 듯 곱단한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먼 ― 고가선(高架線)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라빛 색지(色紙)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薔薇)
목장(牧場)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 김광균(金光均, 1914-1993)
1914년 경기도 개성 출생, 송도상업고등학교 졸업
1926년 『중외일보』에 시 「가는 누님」 발표
1936년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가
1937년 『자오선』 동인으로 참가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설야」 당선
1950년 이후실업계에 투신
1990년 제2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1993년 사망
경기도 개성 출생. 송도상업학교(松都商業學校)를 졸업하고 고무공장 사원으로 군산(群山)과 용산(龍
山) 등지에 근무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불과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발표한
「가신 누님」(中外日報, 1926)을 비롯하여 「야경차(夜警車)」(동아일보, 1930) 등이 그의 습작품에
해당된다면, 『시인부락(詩人部落)』(1936), 『자오선(子午線)』(1937) 동인으로 가담한 이후의 활동
은 본격적인 시단 활동이라 할 수 있다. 특히, 1938년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응모하여 당선된 「설
야(雪夜)」는 그로 하여금 시단에서 확고한 위상을 확보하게 한 것이다. 이후 그는 『와사등(瓦斯
燈)』(남만서점, 1939)·『기항지(寄港地)』(정음사, 1947)·『황혼가(黃昏歌)』(산호장, 1959) 등 3
권의 시집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실질적인 시작 활동은 1952년 죽은 동생의 사업을 맡아 경영하
면서 중단되고 실업가로 변신하여 국제상사중재위원회 한국위원회 감사, 무역협회 부회장, 한일경제
협력특별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말년 가까이 떠났던 시단 복귀의 신호이듯 이전에
간행한 시집을 정리하여 『와사등』(근역서재, 1977)을 출간하더니, 1982년 「야반(夜半)」 등 5편의
시작을 『현대문학』에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 뒤 문집 『와우산(臥牛山)』(범양사,
1985)과 제4시집 『추풍귀우(秋風鬼雨)』(범양사, 1986) 등을 간행하였다. 김광균은 정지용(鄭芝
溶)·김기림(金起林) 등과 함께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을 선도한 시인으로 도시적 감수성을 세련된 감
각으로 노래한 기교파를 대표하고 있다. 그는 암담했던 30년대의 사회현실로서 도시적 비애의 내면공
간을 제시하여 인간성 상실을 극복하고자 한 휴머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는 지적이고 이지적이라기보
다는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시인으로 고독과 슬픔 속에서 실존의 중요성을 확보하고 생의 의미를 긍정
하고 있다. 그의 시에는 감각적 이미지와 신선한 비유가 낭만적 정조와 융화되어 서정의 극치를 보이
고 있다.
시집 : 『와사등(瓦斯燈)』(1939), 『기항지(寄港地)』(1947), 『황혼가(黃昏歌)』(1969), 『추풍귀
우』(1986)
설야(雪夜) / 소프라노 형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