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사 시내의 포탈라 궁
포탈라궁 사원 (달라이 라마)
중국 서장(西藏)자치구 티벳의 첫도시 라싸는 ‘태양의 도시’라고 한다. 해발 3,700m의 고지이다. 세계 10대 건축물로 13층에 높이 117m,폭은 110m,동· 서의 길이가 360m나 된다. 포탈라궁 건물 정상은 황금을 입힌 전통양식의 구리기와 지붕 5개로 이루어졌다. 넓이가 36만㎡에 이르는 궁은 남쪽 출입구를 제외하고 성벽과 담으로 둘러싸여 바깥세상과 차단 되어있다. 포탈라궁은 우리나라 신라시대인 7세기에 건설됐다. 티벳의 역사와 티벳인들의 기원을 담은 성전이자 궁궐이다. 인도불교가 티벳에 들어온 것은 5세기무렵이다. 인도불교는 티벳 토속의 원시무속 종교인 본교(本敎)와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인 후 라마불교로 자리잡았다. 라마불교의 일인자는 달라이 라마이다. 포탈라궁 역시 달라이 라마의 거처이자 라마불교의 사원이 됐다. 포탈라란 이름은 본래 ‘관음의 성지’란 뜻이다. 이 궁은 티벳 각부족과 지역을 통일한 강력한 티벳왕국(吐蕃)을 세운 송첸캄보가 631년에 지었다. 처음 1천간 규모로 지었는데 당시 당나라 황실의 문성공주를 아내로 맞기 위해 이 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곧 포탈라궁은 세속의 티벳왕궁이었다. 그러나 각 부족과 지방 분열로 왕권의 공백이 생기면서 세속권력까지 장악 한 라마불교의 지도자가 궁을 접수했다. 그뒤 왕궁이란 기능말고도 사원 기능 을 추가하고 산속 드레풍사원(철봉사)에 살던 달라이 라마가 1645년에 들어왔다. 오랜 분열과 내전 등으로 폐허화한 포탈라를 접수한 달라이 라마 5세는 궁의 성벽과 성루등 을 재건했다. 달라이 라마 5세가 궁을 재개한 것은 정교합일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신권(神權) 뿐아니라 세속권력마저도 장악한 달라이 라마는 1690년 오늘날 사원 으로 쓰는 홍궁을 따로 착공 1693년 완성했다. 그리고 오늘날 라마교의 상징 인 5개의 금정을 추가로 세웠다. 궁의 외벽은 흰색과 붉은색을 칠해 백궁과 홍궁을 구분한다. 백궁은 달라이 라마가 사람을 만나고 정무를 돌보고 생활하는 공간으로 쓰이고 홍궁은 지금까지 사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궁에는 대불만도 1천구가 봉안됐다. 작은 불상까지 합하면 수만점이 넘 을 것이란 추산이다. 포탈라궁의 부처상은 화려하다. 달라이 라마의 소상을 모신 각(閣)이 불상을 모신 불전(佛殿)에 비해 훨씬 많다. 이는 라마 불교의 특색이기도 하다. 부처가 달라이 라마로 환생한 것이라고 믿는 환생설(還生說)을 바탕으로 달라이 라마를 생불(生佛)로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홍궁사원의 중카바와 역대 달라이 라마 소상들은 한결같이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있다. 중카바는 역대 달라이 라마의 뿌리로 달라이 라마 2세가 그의 직계 제자다. 지금 미국에 망명중인 달라이 라마 14세를 비롯한 모든 달라이 라마들이 그의 법통을 이은 후계자이다. 중카바는 14세기에 라마교를 개혁하고 이른바 격로파(格魯派)를 창시한 인물이다. 라마교를 오늘의 모습으로 완성한 사람이다. 중카바가 이끈 격로파의 승려들은 노란색 고깔모자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 황모파(黃帽派)또는 황교파라고 하는 이들은 라마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이들 중카바와 역대 달라이 라마들의 지위가 부처에 버금갈정도로 신격화한것도 격로파 세력이다. 포탈라는 산자와 죽은자가 함께하는 궁전이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는 죽어서도 생전에 살던 포탈라를 떠나지 않았다. 이들 산자와 죽은자를 같이 경배하기 위한 순례객의 발길이 이어진다. 티벳은 물론 사천성과 네팔,스리랑카 등에서 온 라마불교 신도들로 붐비는 포탈라궁에서 달라이 라마가 앉았던 의자에 입맞추는 순례객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달라이 라마가 살아서 쓰는 궁전은 백궁이다. 백궁은 ‘최상의 행복궁’이 나 ‘영원한 생명의 궁’ 따위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백궁 가장 높은 층인 ‘영원한 생명의 궁’에서만 잠을 잤다. 포탈라에는 다른 불교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영탑전(靈塔殿)이 있다. 영탑은 달라이 라마의 시신을 모신 탑인데 전각(殿閣)안에 봉안되었다. 화장한뒤 뼈만 모아 넣어두거나 약품처리한 시신을 그대로 넣어두는 경우도 있다. 홍궁 맨 뒤쪽 아래층의 영탑전에는 5세와 7∼9세, 13세 등 다섯 달라이 라마의 영탑이 자리하고 있다. 그중에 5세와 13세의 영탑은 화려하다. 5세 달라이 라마의 영탑은 죽은지 5년뒤인 1690년에 조성되었다. 영탑은 기단에 호리병을 올려놓은 것 같은 모양이다. 14.85m에 이르는 탑신은 동과 은으로 만들고 황금칠을 올렸다. 주옥과 산호 따위의 보석을 군데군데 박아놓았다. 은이 1만량 황금이 11만9천량이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다. 13세의 영탑은 1934년에 완성되었다. 영탑전은 홍궁 다른 공간에도 하나가 더 있다. 홍궁 후문 서편 강당 뒤쪽이다. 달라이 라마 5세와 10세, 11세와 12세의 영탑이 두 방에 봉안 되었다. 그런데 영탑전과 이웃한 서편 강당에서는 1959년 까지만해도 달라이 라마의 음성이 들렸다. 그 음성은 바로 포탈라에 사는 수백명 승려들에게 들려 준 달라이 라마 14세의 설법이다. 59년 이후 어떤 행사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는 없지만 라마승과 순례자들이 켜놓은 촛불은 그냥 타고 있다. 달라이 라마 14세가 망명한 1959년 이후 변화한 공간은 또 있다. 백궁의 동쪽 정원이다. 이 정원에는 절기가 바뀔 때마다 승려와 티벳 사람들이 천여명씩이나 몰려들었다. 달라이 라마가 의례히 백궁 발코니로 모습을 드러냈다. 종교의식을 베풀고나서 민속놀이를 즐기는 군중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그 정원이 지금은 빈뜰로 남아있다. 백궁과 홍궁을 합뜨려 포탈라는 1천개가 넘는 방을 갖추었다. 이 가운데 일반에게 공개하는 방은 30여개 뿐이다. 동쪽 정원에서 3층 정도의 계단을 올라가면 달라이 라마 집무실이 있는데 비공개 공간이다. 달라이 라마가 정무(政務)와 종무(宗務)를 본 집무실은 명상의 공간이기도 했다. 백궁의 복도와 회랑에는 티벳사와 티벳불교사,역대 달라이 라마의 일생을 담은 벽화들이 가득하다. 방마다에는 달라이 라마들이 앉았던 자리를 보존한 가운데 달라이 라마들의 소상을 세워두었다. 한쪽 벽에는 닫 집을 만들어 불상을 모셨다. 또 다른 벽에는 경전함을 덧대어 천정 꼭대기 까지를 불경으로 채웠다. 이들 경전은 티벳어, 몽골어, 만주어 등 소수민족 언어 로 되어있다. 어마어마한 장서들은 라마불교권 학승(學僧)들을 포탈라로 불러들인다. 포탈라를 세계적 불상박물관 또는 세계적 불교박물관이라 부른다. 그것은 티벳불교가 정치를 손에 쥔 종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홍궁에는 여러 부처 이름을 딴 방도 곳곳에 널려있다. 미륵 보살전이나 천수관음보살전, 관음보살전과 만다라전이 그것이다. 이들 불전(佛殿)에서는 야크기름을 태우는 순례자들의 참배가 계속된다. 그 많은 부처의 상(像)중에서도 티벳불교의 핵심은 관세음보살상이다. 관세음보살이 티벳인들 신심속에 자리잡은 연유는 상게 감쵸(1653∼170 5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달라이 라마 5세의 제자인 그는 당시 생존한 달라이 라마의 원수라는 정당성을 부여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문수리근본의궤(文洙利根本儀軌)’의 예언을 믿었다.티벳은 본래 관음보살 교화(敎化)의 땅이 라는 그 예언에 따라 관음보살은 티벳불교를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관음보살전 규모는 의외로 적다. 3구의 관음보살상 가운데 한구는 키가 1m 남짓한데 7세기쯤에 만들었다. 금물을 입힌 단향목(檀香木)불상이다. 티벳인들은 이 보살상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저절로 관세음 보살 모양을 하게 된것으로 믿고 있다.
티벳불교 (라마교)
흔히 라마교(Lamaism) 라고한다. 티벳불교의 역사는 7세기때, 손첸캄포(?-649) 라는 뛰어난 왕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당(唐)과 네팔 출신의 칩주엔프(Chif-Zuenf)와 당나라 출신의 웬정(Wencheng) 왕비가 처음 들여온 중국계와 인도계 불교를 수용해 주술(呪術)을 중시하는 티벳고유의 신앙인 뵌(Boen)교와 혼합한 형태의 불교를 주창해, 티벳불교를 창시했다. 또한, 손첸캄포 왕은 티벳불교의 중심인 라싸를 창설했고 수많은 불경번역과 티벳의 공식문자를 창제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8세기 중엽 인도의 샨티락시타 (Santi-raksita)와 파드마 삼바바가 밀교(密敎)를 전해, 이후 티벳불교의 근본은 밀교(密敎)가 됐다. 842년, 란마르다 왕은 티벳불교를 폐교시키고 민족의 종교인 본교를 부흥시켜 수난을 겪게 되지만 티벳불교는 2백년뒤인 1042년, 인도에서 초빙된 아티샤(Atisa)에 의해 다시 개혁돼, 이 때부터 밀교의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 그후 중원의 패자(覇者), 원(元)나라에 전파돼 국교가 됐고, 이후 몽고와 명(明), 청(淸)나라에서 융성했는데, 그 영향으로 티벳불교는 몽고, 만주와 중국, 러시아, 북인도에 퍼졌고, 한국 불교에도 라마교의 영향을 적지 않게 미쳤다. 이 오랜 발전속에서 Nyingma파, Sa-kya파 등 많은 분파를 형성해왔었다. 14세기 말 까지 티벳불교는 권력과 결탁해 극도로 퇴폐해져 타락한 밀교행위와 주술만을 하게 되는데, 총카파(Tsong-ka-pa, 宗喀巴)가 엄격한 계율을 도입하고 대승교학을 기초로하는 일대 개혁을 벌였다. 이때 Tsong-ka-pa는 노란모자(Dge-lugs, 黃帽) 파를 만들어 이전의 붉은모자(赤帽) 파와 구분했는데, Tsong-ka-pa의 제자 가운데 겐둔그룹(Ge'dun-grub; 1391-1495)이 초대 딜라이 라마 (Dalai Lama)가 돼 현재까지 14대에 이르고 있다. 딜라이라마는 티베트불교의 가장 대표적 종파인 겔루크파[黃帽派]의 수장(首長)인 법왕(法王)의 호칭이다. 라마(Lama)는 덕이 높은 스승을 의미한다. 라마는 환생에 의한 계승을 원칙으로하기 때문에 어느 마을이나 환생 라마가 있다는 것은 중요하게 여겨져왔고, 그런 이유로 환생라마는 수가 많이 늘어났다. 라마앞에 붙는 접두어는 큰 라마에 대한 존칭인데, 최고 지위인 '딜라이 라마'의 딜라이(Dalai)는 몽고어로 바다를 뜻한다. 티벳 사람은 자신의 나라를 관음(觀音)의 정토(淨土)라고 생각하는데, 그 통치자인 딜라이 라마를 관음의 화신(化身)으로 믿고 있다. 티벳불교는 인도 대승불교에서 고도로 발달한 교리와 밀교수행의 최종단계를 계승한 것으로 인도의 불교가 멸망한 뒤에도 독자적인 발전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방대한 '티벳 대장경'과 티벳인이 남긴 저작에 있어서 티벳불교는 불교의 막대한 보고(寶庫)일 뿐만 아니라 엄청난 티벳불교 유적과 미술품 그리고 음악이 어우러져 인류 최대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랏사(티벳)=李錫遇특파원]중국 서장(西藏)자치구 티벳의 첫도시 라싸를 ‘태양의 도시’라 했다.만년설이 뒤덮인 히말라야산맥의 산자락에 둘러싸인 해발 3천700m의 고지라 태양이 가가워서 그랬을까.사천(四川)분지와 티벳고 원을 지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나무 한 그루,풀 한 포기 없는 척박한 산맥과 히말라야의 설산이 펼쳐졌다.랏사는 그런 산자락에 둘러싸인 작은 평 지 위에 있다.평지 가운데 작은 산 위에서는 포탈라의 황금빛 지붕이 번쩍였 다. 티벳 공까공항서 랏사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40여분이 걸렸다.산 허리를 깍 아 어렵게 닦아놓은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길가 바위에는 불상들을 새겼다. 그리고 5색의 타르초 깃발 너머로 티벳불교의 상징물인 코르텐(鐘塔)들이 시 야로 들어왔다.포탈라는 멀리서 보면 거대한 설산에 안겨 있다.그러나 랏사 로 들어오면 포탈라는 모든 것을 압도했다.과연 세계 10대 건축물다운 포탈 라는 마포르산(紅山)언덕 위에 솟아 있다.13층에 높이 117m,폭은 110m,동· 서의 길이가 360m나 된다. 포탈라궁 건물 정상은 황금을 입힌 전통양식의 구리기와 지붕 5개로 이루 어졌다.그리고 건물 앞에 평평한 공간을 배치했다.순금으로 도금한 번쩍이는 지붕 금정(金頂)을 늘상 이고 있는 포탈리궁에서는 랏사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지난 1천여년동안 티벳인들의 정신과 육체,삶과 영혼을 지배 하던 권위와 신비가 담긴 영력의 장소이기도 했다.전체 넓이가 36만㎡에 이 르는 궁은 남쪽 출입구를 제외하고 성벽과 담으로 둘러싸여 바깥세상과 차단 됐다.남쪽문을 나서면 곧바로 연결되는 계단이나 서쪽의 가파른 비탈길로 오 를 수 있다. 궁궐이 있는 마포르산 밑으로는 티벳군 총사령부의 벙커다.그리고 한변이 10여m를 넘는 대형 걸개그림 탱화(탱畵)를 보관해 두는 거대한 창고도 마포 르산 밑에 마련했다.뒷 정원격인 용왕담(龍王潭)에는 물결이 잔잔하다. 포탈라궁은 우리 신라시대인 7세기에 건설됐다.티벳의 역사와 티벳인들의 기원을 담은 성전이자 궁궐이다.인도불교가 티벳에 들어온 것은 5세기무렵이 다.그 인도불교는 티벳 토속의 원시무속 종교인 본교(本敎)와의 피비린내 나 는 싸움을 벌였다.그리고 나서 티벳 특유의 종교로 자리매김한 라마불교의 역사도 이 궁에 서려 있다.그런 곡절 속에 포탈라의 주인은 세속 권력의 챔 피언인 황제에서 라마불교의 일인자인 달라이 라마로 바뀌었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의 거처이자 라마불교의 사원이 됐다.포탈라란 이름은 본래 ‘관음의 성지’란 뜻이다.이 궁은 티벳 각부족과 지역을 통일,강력한 티벳왕국(吐蕃)을 세운 송첸캄보가 631년에 지었다.처음 1천간 규모로 지었 는데,당시 당나라 황실의 문성공주를 아내로 맞기 위해 이 궁을 지었다는 이 야기가 전해오고 있다.그러니까 포탈라궁은 세속의 티벳왕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각 부족과 지방 분열로 왕권의 공백이 생기면서 세속권력까지 장악 한 라마불교의 지도자가 궁을 접수했다.그뒤 왕궁이란 기능말고도 사원 기능 을 추가하고 랏사 중심지에서 떨어진 산속 드레풍사원(철봉사)에 살던 달라 이 라마가 들어왔다.달라이라마 5세때인 1645년 일이다.오랜 분열과 내전,벼 락등으로 폐허화한 포탈라를 접수한 달라이 라마 5세는 궁의 성벽과 성루등 을 재건했다. 달라이 라마 5세가 궁을 재개한 것은 정교합일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신 권(神權)뿐아니라 세속권력마저도 장악한 달라이 라마는 1690년 오늘날 사원 으로 쓰는 홍궁을 따로 착공,1693년 완성했다.그리고 오늘날 라마교의 상징 인 5개의 금정을 추가로 세웠다.궁의 외벽은 흰색과 붉은색을 칠해 백궁과 홍궁을 구분했다.그래서 백궁은 달라이 라마가 사람을 만나고 정무를 돌보고 생활하는 공간으로 쓰게 됐다.또 홍궁은 지금까지 사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궁에는 대불만도 1천구가 봉안됐다.작은 불상까지 합하면 수만점이 넘 을 것이란 추산이다.여느 부처상과 달리 포탈라궁의 부처상은 화려했다.흥미 로운 현상은 역대 달라이 라마의 소상이 더 눈에 띄거니와 달라이 라마의 소 상을 모신 각(閣)이 불상을 모신 불전(佛殿)에 비해 훨씬 많다는 점이다.이 는 라마 불교의 특색이기도 하다.부처가 달라이 라마로 환생한 것이라고 믿 는 환생설(還生說)을 바탕으로 달라이 라마를 생불(生佛)로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홍궁사원의 중카바와 역대 달라이 라마 소상들은 한결같이 끝이 뾰족한 모 자를 쓰고있다.중카바는 역대 달라이 라마의 뿌리로 달라이 라마 2세가 그의 직계 제자다.지금 미국에 망명중인 달라이 라마 14세를 비롯한 모든 달라이 라마들이 그의 법통을 이은 후계자인것이다.중카바는 14세기에 라마교를 개 혁하고 이른바 격로파(格魯派)를 창시한 인물이다.그러니까 아마교를 오늘의 모습으로 완성한 이가 그다. 중카바가 이끈 격로파의 승려들은 노란색 고깔모자를 썼다고 한다.그래서 황모파(黃帽派)또는 황교파라고 하는 이들은 라마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 지하고 있다.이들 중카바와 역대 달라이 라마들의 지위가 부처에 버금갈정도 로 신격화한것도 결로파 세력이다.포탈라 홍궁에서 만난 중카바와 달라이 라 마 소상들은 라마교가 어떤 유형의 종교인가를 한번 더 확인했다.
[라싸(티벳)=李錫遇특파원]포탈라는 산자와 죽은자가 함께하는 궁전이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는 죽어서도 생전에 살던 포탈라를 떠나지 않았다.이들 산자와 죽은자를 같이 경배하기 위한 순례객의 발길이 늘 포탈라로 이어졌다. 티벳은 물론 사천성과 네팔,스리랑카 등에서 온 라마불교 신도들로 붐비는 포탈라.달라이 라마가 앉았던 의자에 입맞추는 순례객들을 쉽게 만날 수 있 다. 달라이 라마가 살아서 쓰는 궁전은 백궁이다.백궁은 ‘최상의 행복궁’이 나 ‘영원한 생명의 궁’ 따위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달라이 라마는 백궁 가 장 높은 층인 ‘영원한 생명의 궁’에서만 잠을 잤다.백궁의 금정에 올라 바 라보는 히말라야는 신비로웠다.투명한 코발트 색깔과 어울린 만년설 산자락 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종교적 심성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포탈라에는 다른 불교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영탑전(靈塔殿)이 있다.영탑은 달라이 라마의 시신을 모신 탑인데,전각(殿閣)안에 봉안되었다. 화장한뒤 뼈 만 모아 넣어두거나 약품처리한 시신을 그대로 넣어두는 경우도 있다.홍궁 맨 뒤쪽 아래층의 영탑전에는 5세와 7∼9세,13세 등 다섯 달라이 라마의 영 탑이 자리했다.그중에 5세와 13세의 영탑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 화려한 5세 달라이 라마의 영탑은 죽은지 5년뒤인 1690년에 조성되었다. 영탑은 기단에 호리병을 올려놓은 것 같은 모양이다.14.85m에 이르는 탑신 은 동과 은으로 만들고 황금칠을 올렸다.주옥과 산호 따위의 보석을 군데군 데 박아놓아 야크기름이 타는 불빛을 찬란하게 반사했다.은이 1만량,황금이 11만9천량이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다.13세의 영탑은 1934년에 완성되었으나 역시 찬란했다. 영탑전은 홍궁 다른 공간에도 하나가 더 있다.그 자라는 홍궁 후문께 서편 강당 뒤쪽이다.달라이 라마 5세와 10세,11세와 12세의 영탑이 두 방에 봉안 되었다.그런데 영탑전과 이웃한 서편강당에서는 1959년까지만해도 달라이 라 마의 음성이 들렸다.그 음성은 바로 포탈라에 사는 수백명 승려들에게 들려 준 달라이 라마 14세의 설법이었던 것이다. 포탈라에서 만난 젊은 라마승은 영어로 이런 말을 했다.“이 강당에서는 5 9년 이후 어떤 행사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정지돼있는 장소다”라고….그래도 포탈라에는 방마다 촛불이 꺼지지 않았다.달라이 라 마는 없지만 라마승과 순례자들이 켜놓은 촛불은 그냥 타고 있었다.그렇듯 몸을 불 사르는 촛불에서 오늘의 라마불교를 다시 보았다. 달라이 라마 14세가 망명한 1959년 이후 변화한 공간은 또 있다.백궁의 동 쪽 정원이다.운동장처럼 넓은 이 정원에는 절기가 바뀔 때마다 승려와 티벳 사람들이 천여명씩이나 몰려들었다.그러면 달라이 라마가 의례히 백궁 발코 니로 모습을 드러냈다.종교의식을 베풀고나서 민속놀이를 즐기는 군중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그 정원이 지금은 빈뜰로 남아있다. 백궁과 홍궁을 합뜨려 포탈라는 1천개가 넘는 방을 갖추었다.이 가운데 일 반에게 공개하는 방은 30여개 뿐이었다.동쪽 정원에서 3층 정도의 계단을 올 라가서 만난 달라이 라마 집무실도 그런 비공개 공간의 하나다.달라이 라마 가 정무(政務)와 종무(宗務)를 본 집무실은 명상의 공간이기도 했다. 백궁의 여러방은 ‘영원한 덕의 장소’니 하는 따위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 여러방을 잇는 복도와 회랑에는 티벳사와 티벳불교사,역대 달라이 라마의 일생을 담은 벽화들이 가득했다.그리고 방마다에는 달라이 라마들이 앉았던 자리를 보존한 가운데 달라이 라마들의 소상을 세워두었다.한쪽 벽에는 닫 집을 만들어 불상을 모셨다.또 다른 벽에는 경전함을 덧대어 천정 꼭대기 까 지를 불경으로 채웠다.이들 경전은 티벳어,몽골어,만주어 등 소수민족 언어 로 되어있다. 그 어마어마한 장서들은 라마불교권 학승(學僧)들을 포탈라로 불러들였다. 포탈라로 와서 먼지를 털어가며 경전을 넘기는 학승 모두가 불심에 흠뻑 젖 은채 삼매경에 빠져있다.포탈라를 가리켜 흔히 세계적 불상박물관,또는 세계 적 불교박물관이라 하는 까닭을 알만 했다.그것은 티벳불교가 정치를 손에 쥔 종교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어떻든 포탈라 홍궁에는 여러 부처 이름을 딴 방도 곳곳에 널려있다.미륵 보살전이나 천수관음보살전,관음보살전과 만다라전이 그것이다.이들 불전(佛殿)에서는 야크기름을 태우는 불빛속에 순례자들의 참배가 계속되었다.그 많 은 부처의 상(像)중에서도 티벳불교의 핵심은 관세음보살상이다. 그 관세음보살이 티벳인들 신심속에 자리잡은 연유는 상게 감쵸(1653∼170 5년)로 거슬러 올라간다.달라이 라마 5세의 제자인 그는 당시 생존한 달라이 라마의 원수라는 정당성을 부여받았던 인물이다.그는 ‘문수리근본의궤(文洙利根本儀軌)’의 예언을 믿었다.티벳은 본래 관음보살 교화(敎化)의 땅이 라는 그 예언에 따라 관음보살은 티벳불교를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관음보살전 규모는 의외로 적었다.3구의 관음보살상 가운데 한구는 키가 1m 남짓했는데 7세기쯤에 만들었다고 한다. 금물을 입힌 단향목(檀香木)불상이다.티벳인들은 이 보살상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저절로 관세음 보살 모양을 하게 된것으로 믿고 있다.
달라이라마 [DalaiLama]
이름 : 달라이 라마 (Tenzin Gyatso)
출생 : 1935년 7월 6일
출신지 : 티베트
직업 : 승려
경력 : 전국 인민대표대회 티베트 대표
1959년 인도 티베트 망명정부 설립
수상 : 1994년 루스벨트 자유상
1994년 세계안보 평화상
[출생] 1935년 티벳고원 탁처 마을 출생
[본명]잠펠 가왕 롭상 예쉬 텐진 갸초
[특이사항]티벳의 종교적인 지도자, 1989년 노벨평화상 수상
[경력]1940년 득도식 14대 달라이 라마로 공식 취임,
1951년 17세의 나이로 친정(親政),
1959년 인도 망명
[저서]달라이 라마의 행복론(2001), 마음을 비우면 세상이 보인다(2002) 등-
달라이 라마의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중에서-
★유연한 마음은 부드러움에서 옵니다. 부드럽다는 것은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눈, 생각, 마음이 열려 있으면 보는 시각도 바뀝니다. 시각을 바꾼다는 것은 보는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자기 자리에서 남의 자리로 옮겨 보는 것이고, 자기 눈으로가 아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달라이라마(Dalai-Lama)
티베트불교(라마교)의 가장 대표적 종파인 겔루크파[黃帽派]의 수장(首長)인 법왕(法王)의 호칭.
1642년 이후 티베트 원수가 된 역대의 전생활불(轉生活佛)에 대한 속칭이다.
초대 원수를 다라이 라마 5세라 하고, 1세까지 거슬러올라가며 이 칭호를 붙인다.
이 칭호는 제3세로 꼽을 수 있는 소남 �초(1543∼1588)가 몽골 토메토의 알탄 칸의 초청을 받고
1578년 칭하이[靑海] 지방에 갔을 때 받은 것이다.
그이름의 뒷부분 ‘�초’에 해당하는 몽골어가 ‘다라이’로서 ‘바다’를,‘라마’는 티베트어로 ‘스승’을 뜻한다.제3세는 원래 데푼 대승원(大僧院)의 관주(貫主)인 활불이었는데, 선대인 겐둔 �초(1475?∼1542)가 겔루크파의 정치적 지도자로서 대립하는 카르마파(특히 紅帽派)와 다투었기 때문에 같은 행동이 기대되어, 스스로 몽골 부족 사이를 유세하며 신자를 얻어야 했다.
그가 죽은 뒤 새로운 활불로 알탄 칸의 증손 윤텐 �초(1589∼1616)가 선출되자, 외국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노골적인 위협정책이라 하여 카르마파의 증오심이 확대, 군사적인 대결만을 남겼다.제5세 가완 로잔 �초(1617∼1682) 때에는 몽골정권에 큰 변동이 생겨서 겔루크파는 흔들리고, 소남 라프텐을 중심으로한 정치세력은 새로 카르무크와 동맹하여, 결국 구시 칸의 군대를 티베트에 끌어들여 신샤크파 정권을 전복, 사실상 티베트의 정치 ·종교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리하여 1642년 다라이라마 정권이 수립된 후, 데푼 활불은 티베트 국왕의 신분과 간덴 좌수(座首) 위에 올라앉는 황모파 법왕의 지위를 얻었다.
제5세의 제자이자 섭정이던 상게 �초(1653∼1705)는 다라이라마의 국가 원수로서의 정당성을 《문수리근본의궤경(文殊利根本儀軌經)》의 예언을 인용 증언하며, 티베트는 원래 관음보살의 교화의 땅으로 정해져 있고, 다라이라마는 관음보살의 화신이라고 하면서, 그 제1세를 총카파의 제자 겐둔 두파(1391∼1472)까지 거슬러올라간다는 주장도 추가 확인하였다.
연애시인인 제6세 찬얀 �초(1683∼1706)가 청(淸)나라의 간섭으로 폐위되어 베이징[北京]으로 연행되려 할 때, 일반 승려와 민중은 이에 저항하여 다라이라마에 대한 강렬한 신앙을 나타내 보였다.1750년 이후 청의 지배 아래서는 다라이라마의 선출방법이 흐트러져, 제9세부터 12세까지는 어렸기 때문에 권력투쟁의 희생이 되었다.
제10세는 난을 피해서 정권을 잡고 독립과 근대화를 꾀했으나 실패하였다.제14세는 중국군의 진주로 한때는 새체제에 복종하였으나, 그러나, 중국으로부터의 티벳의 독립을 위해 1959년 측근과 함께 인도로 탈출, 망명정권을 수립하여 티벳 독립운동의 선봉에 있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국 공산군의 점령이후 14대 달라이 라마는 UN의 티베트 문제 개입을 호소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중국의 종주권과 티베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17개 조항의 협정안'이 중국 당국의 강요에 의해 강제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중국군의 동부 티베트 지역 탄압과 달라이 라마의 신변문제를 계기로 1959년 수도 라사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자 달라이 라마와 그를 따르는 티베트인들이 인도로의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티베트는 중국의 자치 구역으로서 중국과 동일한 체제로 가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사유재산이 몰수되거나 아주 소수의 사원만을 남겨 둔 채 대부분의 사원이 파괴되었으며 대부분의 승려들은 투옥되거나 강제로 환속당했다.
이처럼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하자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는 16세의 나이로 14대 달라이 라마에 즉위하고 UN에 티베트 문제를 호소했으나 엘살바도로만이 UN 총회에 티베트 문제를 의제로 상정하는데 지지했고 나머지 국가들은 받아들이지 않아 UN 총회에서 다뤄지지 못했다.
이에 달라이 라마는 베이징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협상하고자 하였지만 중국의 강압에의해 오히려 라사에 중국군 진주를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17개 조항"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1954년에는 중국을 방문하여 모택동, 주은래 등 중국의 지도자들과 티베트 문제를 협상하고자 노력하였지만 그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아편이라고 믿는 당시 중국 지도자들의 시각하에서 또한 "티베트는 불교라는 독약에 물들어 있고, 중국은 이 티베트를 해방하기 위한 어머니 나라"임을 강조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의 티베트 점령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1950년 중국의 티베트 침공이후부터 지방에서 티베트 독립을 요구하는 민중봉기가 계속되었고 1959년에 티베트에 유례없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티베트인들은 중국군이 달라이 라마를 납치해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캄과 암도지방의 주요 라마승과 지역 지도자들이 중국 문화공연과 행사에 초대되었다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고통스러운 경험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군이 3월 10일 달라이 라마를 경극에 초대하면서 티베트인들은 달라이 라마의 안전을 더욱 염려하게 되었다.
티베트인들은 중국군이 경호원도 없이 오라고 한 점을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1959년 3월 10일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수천명의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가 중국 경극에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블링카 궁을 둘러쌌다.
그후 며칠동안 중국이 티베트를 단념하고 완전한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대중집회를 열었다.
이에 달라이 라마는 이 대규모 집회의 폭발적인 결과를 염려하면서 노블링카 궁 앞에 있는 수많은 티베트 군중들에게 해산할 것과 중국군의 노여움을 삭이고 폭력을 막기 위한 일환으로 중국군 장군에게 편지를 써 티베트인들의 희생을 막고자 하였다.
이때 상황을 달라이 라마는 자서전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양측의 화를 식히기 위해 그리고 라사의 시민들에게 절제하도록 요구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장군의 모든 편지들에 답장을 했다. 당시 나의 가장 시급한 임무는 비무장한 나의 국민들과 중국군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충돌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라사에서 전투가 일어났다. 전면적인 대치와 유혈사태를 막기 위한 모든 노력이 실패하고 중국군의 진압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자, 달라이 라마는 그의 국민을 보호하는데 국제적 지원을 얻기 위해 인도로 망명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공식적인 통계자료를 통해서 볼 때 당시 1959년 3월 10일 하루동안 시위에 참석한 티베트인들 중에 1만 5천여명의 티베트인들이 사살되었으며, 티베트인들의 민중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중국은 6,000여개의 불교사원 파괴와 12만명의 티베트인들을 학살하였다.
현재 티벳트의 망명정부는 인도 북부 히말라야 기슭 다람살라에는 '작은 라사'로 일컬어지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다람살라에는 망명한 10만 여명의 티베트인들이 살고 있으며 3만 여명의 티베트인들이 네팔과 부탄의 티베트 정착촌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다람살라에 망명정부가 수립된 이후로 지금까지 죽음을 무릅쓴 티베트인들의 망명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 중에는 중국에서는 티베트 교육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부모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어린 자식을 다람살라로 보낸 경우가 많다.
현재 다람살라의 티베트 망명정부는 티베트 언어, 역사, 종교, 문화 전반에 걸친 티베트 교육체계가 수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현지의 티베트 전통문화가 중국인들에 의해 사라져가고 있다고 판단하고 티베트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1959년에 티베트 공연예술기관을 설립했고 한편으로 중앙고등티베트학연구소를 설립해 인도에 있는 티베트인들을 위한 대학으로 만들었다.
또한 티베트인들의 생활방식의 핵심인 티베트불교의 방대한 자료를 보존하기 위해 200여개 이상의 사원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티베트 망명정부에는 14대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종교, 문화, 내무, 재정, 교육, 방위, 보건, 정보, 국제관계 등을 관할하는 행정부와 사법부로서 티베트 최고사법위원회가 있고, 입법부로서 티베트 국민대표의회는 지역과 종파를 대표하는 46명의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뉴델리, 뉴욕, 런던, 파리, 제네바, 부다페스트, 모스크바, 카트만두, 캔버라, 도쿄, 타이페이 등에 티베트 망명정부 대표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실정이다.
알탄 칸(俺答汗, 1507년 ~ 1582년)은 투메드 몽골 부족의 군주이다. 북원의 칸인 다얀 칸의 손자이며, 바르스 볼트 저넌 칸의 차남이다. 1547년 보디 알라크 칸을 계승한 다라이손 구덴 칸의 치세에 알탄 칸이 대칸보다 강력하게 되어 동쪽으로 달아나야 했다. 오르도스지방에 분봉된 다얀 칸의 손자 알탄 칸은 16세기 중기부터 빈번하게 중국에 침입하여 1550년에는 북경을 포위하는 경술의 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1551년 다라이손 구덴 칸은 알탄 칸에게 투메드 몽골 부족의 게게엔 칸이라는 직위를 주어 타협하였다. 결과적으로 다라이손 구덴 칸은 만주 근처에 그의 황궁을 건설하였다. 대칸의 권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알탄 칸은 1582년 죽었다. 그의 아들 셍게 뒤렝이 그의 뒤를 계승되었다.
알탄 칸은 군사적으로 명나라를 지속적으로 위협했다. 1529년, 1530년, 1542년에 명으로의 원정을 단행하여 전리품을 약탈해 돌아왔다. 1550년에는 만리장성을 넘어서 북경을 포위하고 교외에 불을 지르는 경술의 변을 일으켰다. 1552년에는 옛 몽골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을 지배에 두었다. 1570년 손자인 바간나기가 명에 투항한 것을 계기로 명나라는 1571년 평화조약을 맺었다. 명에 의해 순의왕에 봉해져서 거성을 귀화성이라 부르고 명과 교역했다. 말과 비단 등이 무역의 대상으로, 이후 이로 인해 투메드는 경제적으로 크게 신장된다. 재위기간 동안 반란을 일으킨 오이라트와 카자흐, 키르기스 등의 지역에 수차례 원정을 진행해 성공적으로 제압했다.
알탄 칸은 칭기즈칸의 17대손이며 몽골족을 재통일한 다얀 칸(다얀은 쿠빌라이가 세운 ‘元’왕조를 부흥한다는 의미인 ‘大元’의 음역이다. 다얀의 본명은 ‘바트 멍크’이며 16세 때 26살 연상인 42살의 만도룬 칸의 미망인 만도하이와 결혼하여 7명의 아들을 낳는다. 칭기즈칸 동생인 조치 하사르 자손의 구혼을 거절하고 칭기즈칸의 정통 핏줄인 황금가 후손인 26살 연하남 바트 멍크와 결혼한 만도하이는, 이후 어린 남편을 잘 보필하여 몽골족을 재통일시키는데 일조한 정치 감각이 뛰어난 여걸이었다. 이곳 내몽고대학에 접하고 있는 공원의 이름도 만도하이 공원이다)의 손자이다. 이 다얀 칸의 2째 아들인 우루스·보라트는 황하가 휘돌아 흐르는 오르도스(‘오르도’는 칸의 궁전막사를 뜻하는데, 마치 동춘 써커스단의 거대한 천막과 주변에 수백여 개의 겔(천막집)로 이루어졌다고 연상하면 된다. 오르도스는 오르도의 복수이며, 현 위치는 내몽고지도를 보면 ‘허흐호트(일명: 호호트)’시의 한 행정구역인 ‘투메트좌기’와 접하고 있는 지역이다. 지금의 이곳은 천연가스와 지하자원으로 일인당 국민소득이 홍콩(香港)보다 높다고 한다)부족(部族)의 사위로 들어가며 그의 2째 아들이 후에 투메트 부족장이 되는 알탄이다. 즉 알탄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다얀 칸과 만도하이이다.
혼란했던 16세기 몽골고원의 諸세력을 평정하고 실력으로 실권을 장악한 뛰어난 투메트 부족장 알탄 칸은 35년간의 치세 동안, 이후 몽골 민족의 생활과 문화의 방향을 결정짓는 몇 가지의 대개혁을 단행한다. 그 첫 번째는 오이라트(서부몽골)를 압도하여 오늘날 몽골민족이 살고 있는 지역의 대부분, 즉 몽골국 영토의 대부분으로부터 청해(靑海) 지방까지를 회복하였고, 두 번째는 누차에 걸쳐서 명(明)에 침입하여 다수의 한인을 포로로 잡아온 것 외에 명의 도망병, 생활이 어려운 농민(당시 명 왕조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견디지 못한 한족들이 대거 내몽골 투메트쪽으로 이주해 왔다. 예나 지금이나 일반 백성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세금이다. 당시 유목지대에는 거의 세금이랄 것이 없었다), 백련교도 등이 몽골의 유목지로 들어온 자들을 받아들여 고원의 각지에 집단 이주시켜 농경에 종사시킨 것이다. 이러한 여러 이유로 몽골 지역으로 들어온 한인의 수가 수십만에 달했는데 이들은 풍요로운 황하의 수자원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이들에 의해 생산된 농작물은 이후 몽골 유목민들에게도 현지에서 생산된 곡물을 싼 값으로 유목민들에게 공급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 한인들이 모여 살게 된 중심지는 자연히 정주형의 한식(漢式) 건물들이 늘어서면서 도시로 성장해 갔으며, 시장도 열려 도처의 대상들이 모여들어 다양하고 번성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도시를 ‘바이씽(百姓)’이라 불렀는데 그 중에서도 최대의 것이 바로 이곳 ‘허흐호트’이다. 오늘날 중국 내몽골자치구의 정부소재지인 허흐호트(푸른 성)는 이들 망명 중국 한인들이 알탄 칸에 의해서 1565년에 지은 중국식의 가옥인「판승(板升)」을 기원으로 한다. 판승(바이씽)이라는 것은 장막(겔)이 아닌 고정 가옥이지만, 실제로 이 단어의 내원은「백성(百姓:바이씽)」으로, 한인 농민을 가리키는 것이 그들의 가옥을 부르는 것으로 된 것이다.
1572년 알탄 칸은 중대 결심을 하여 투메(트)천(土黙川: 여기에서의 ‘川’도 ‘내, 강’이 아니라 평원을 의미)에 과거 원(元)왕조의 쿠빌라이가 건설한 대도(大都: 북경의 원대 명칭은 ‘대도’이며 원대의 대도는 지금 북경성의 원형이다)를 본떠 성시(城市) 건설을 결정한다. 이리하여 내지로부터 수공업자들을 소집하였으며, 명조(明朝)에서도 우호의 표시로 기술자들과 건축자재를 대량 원조하였다. 3년여의 노력 끝에 마침내 1575년 ‘허흐호트(庫庫和屯)-푸른 성’이 완공되었으며, 명(明) 정부에서는 ‘귀화성(歸化城)’이라는 명칭을 주었다. 막 완성된 이 ‘허흐호트’의 규모는 한 변이 200m의 방형이며 남과 북에만 각각 1개의 성문만 있는 그리 큰 규모의 성은 아니었다. 이 성을 ‘대판승(大板升)’이라 한다.
이후 이 성은 1581년 봄, 알탄이 말년에 얻은 젊은 미모의 부인인 삼랑자(三郞子: ‘鐘金哈屯’이라고도 쓰는데 ‘哈屯(하톤)’은 몽골어로 ‘부인(夫人)’의 의미)에 의해 대규모로 개축되는데 삼랑자가 친히 설계와 시공을 지휘하여 공정을 완성하였다한다. 알탄 칸이 죽은 후에도 삼랑자는 자신이 개축한 이 성안에서 백성들과 함께 수십 년을 살아 이 성을 ‘삼랑자성’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이 ‘허흐호트’의 유래이다. 이미 430여 년 전에 세워진 성으로 지금은 도시개발로 인해 거의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이후 18세기 청대(淸代)에는 이 성에서 동북쪽 5리(里)지역에 새로운 규모의 성인 수원성(綏遠城)을 쌓음으로써 허흐호트의 규모는 더욱 확대되기에 이른다.
[라싸로 가는 순례자]
[카일라스산]
[여행의 향기] 순례의 길 티베트 카일라스..'전설의 수미산'을 만나다
서부 티베트 성산 카일라스 불교·힌두교의 최고 성산.
주변 산이 연꽃잎처럼 감싸 카일라스 인근 유일한 마을 타르첸
티베트·네팔·인도 등서 순례자 몰려 100km 이상 걸어서 찾아오기도
성산 한 바퀴 도는 데 55km 코스 티베트 순례자는 하루 만에 끝내
'삼보일배' 오체투지 행하는 이들도 5650m 높이 돌마라 고갯길 넘으면
물줄기 따라 끝없는 내리막길 이어져 모든 고통 사라진 평화가 찾아든다
한국경제 티베트=박하선 입력 2016.07.24 17:19 수정 2016.07.24 17:21
[ 티베트=박하선 기자 ]
역경을 이기고 떠나는 순례길
티베트자치구 수도인 라싸에서 1600㎞ 떨어진 카일라스산으로 가려면 많은 난관을 거쳐야 한다. 우선 중국 정부 허가가 필요하고, 교통 문제도 만만치 않다. 라싸에서 카일라스산까지 2000㎞ 정도의 험로를 달려야 한다. 요즘은 버스로도 갈 수 있지만 외국인은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식량 문제도 있다. 가는 길 초반에는 가끔 마을이 나온다. 비록 입에 맞지 않더라도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갈수록 사람 구경하기 힘든 험악한 오지로 들어선다. 여행 도중 밥을 굶는 일도 흔하다. 비상식량을 준비해도 한계가 있다. 유일한 해결 방법은 배가 고프더라도 참는 것이다. 가장 염려되는 것은 고산병이다. 서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높아지는데 해발 4500m 정도를 오르내린다. 고산병에 걸리면 심한 두통과 구토 증세를 일으키고 심하면 죽는다. 치료 방법은 고도가 낮은 곳으로 하루빨리 내려가는 것뿐. 그러나 카일라스산 순례길에선 방법이 없다. 더 아래로 내려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온갖 역경을 헤치고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렸다. 기어올랐다는 표현이 맞겠다. 야생화가 그림처럼 깔린 대초원을 지나 수천 길 낭떠러지를 바라보며 만년설 고갯마루를 넘기도 했다. 험준한 산맥을 끼고 돌면서 용용한 흐름으로 이어가는 강들을 건너고, 드넓은 자갈길을 만나기도 했다. 그림 같은 호수 옆을 지나가다 광활한 사막 속으로 빨려드는 일을 반복했다. 라싸를 떠난 지 2주 만에 카일라스 산자락에 도착했다. 차량이나 도로 사정이 많이 좋아져 예전보다 시간이 훨씬 단축됐다고 하지만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산자락의 유일한 마을 타르첸에는 수많은 순례자가 진을 치고 있다. 티베트인은 물론 네팔이나 인도에서 찾아온 사람들이다. 많은 순례자가 끊이지 않고 몰려드는 것은 카일라스산이 티베트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 자이나스교의 성산(聖山)이기 때문이다. 힌두교도는 ‘시바’와 그의 부인이 이 산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현지에서 ‘성산(聖山)’, 또는 ‘신산(神山)’이라고도 부르는 까닭이다.
108번 돌면 열반을 한다는 믿음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는 척박한 주변 산 틈새로 카일라스산 정상부가 살며시 얼굴을 내밀었다. 거무튀튀한 모습이 거대한 투구를 연상케 한다. 거대한 투구 위에 쌓여 새하얗게 빛나는 만년설은 그야말로 눈의 보석과 같다. 남쪽 사면에 나 있는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보는 이를 유혹한다. 주변의 나지막한 산들이 삥 둘러서 연꽃잎처럼 산을 떠받들고 있는 모습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지금까지 본 많은 산에서 느끼지 못한 고상한 멋이 풍겨온다.
어둠이 채 가시기 전인 이른 새벽부터 순례자의 행렬이 이어졌다. 순례자 사이에 끼어 첫 번째 가파른 언덕을 오르니 광활하게 펼쳐진 황무지 너머 멀리 ‘구르라 만하타(Gurla Mandhata·7728m)’가 웅대한 자태를 뽐낸다. 그 밑에 ‘마나사로바’ 호수가 검푸른 색으로 가물거리고 있었다.
카일라스산 주위를 도는 것을 ‘코라’ 또는 ‘파리카라마’라고 한다. 보통 시계 방향으로 시작하지만 반대 방향으로 도는 이들도 있다. 순례자 대부분은 멀리에서부터 걸어온 사람이다. 네팔이나 인도에서 온 순례자는 이곳에서 100㎞ 정도 떨어진 국경도시 ‘부랑’에서 걸어온다. 더 먼 거리를 걸어온 자들도 있을 것이다. 성산을 한 바퀴 도는 데 보통 2~3일이 걸린다.
하지만 티베트 순례자들은 대부분 이른 새벽에 시작해 하루 동안에 끝낸다. 55㎞의 코라 전 일정을 오체투지(五體投地)로 행하는 사람도 있다. 순례자들은 코라를 108번 마치면 열반한다고 믿는다. 한 손에 법륜, 또 한 손에는 염주를 돌려가며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순례자들.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세상과는 거리가 먼 풍경처럼 느껴진다.
이상하지만 카일라스산이 피라미드라는 설이 있다. 2000년 7월 러시아 고대유적 발굴조사단이 티베트 서부지역을 탐사하던 중 카일라스산과 그 주변에서 피라미드 군을 발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특히 카일라스산 정상에 해당하는 180m 높이의 삼각형 봉우리가 계단식 피라미드라는 기사였다. 이 놀라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왜 카일라스산이 여러 종교의 성산이 됐는지 곰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구상 최초 문명이 이곳에서 꽃피웠다는 설이 있다. 이에 따르면 갑작스러운 지각변동이 일어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서쪽으로 옮겨간 이들은 ‘수메르(Sumer) 문명’을 탄생시켰다. 수메르는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다. 북쪽으로 이동한 일부는 알타이, 바이칼, 만주를 거쳐 한반도까지 갔다. 가설에 따르면 우리 역시 카일라스산에서 온 것이다. 황당무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카일라스산 순례를 하면서 들은 이야기는 오래도록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내세(來世)를 기다리는 사람들
점점 발걸음이 무겁고 숨이 가빠진다. 변변치 못한 끼니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해발 5000m 이상 지역을 걷다 보니 온몸이 파김치가 됐다. 쓰러지듯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앞을 바라보니 카일라스산 정상이 보인다. 하늘의 솜털 같은 흰 구름도 사랑스럽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가는 물줄기도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이곳 카일라스산의 만년설이 녹아내린 물줄기는 아시아 주요 4대강의 근원이 된다. ‘인더스’와 ‘갠지스’, 네팔로 흘러들어가는 ‘카르나리’, 티베트 고원을 가로지르는 ‘브라마푸트라’ 등은 모두 카일라스산에서 발원한 것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물줄기는 마나사로바 호수로 흘러들지만 결국 인더스강의 최상류가 되는 셈이다.
순례길을 걷다가 가파른 언덕길에 쓰러진 사람을 발견했다. 죽은 사람인가 하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그는 힌두교도였다. 이곳을 순례하는 사람들은 성산에서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그래서 죽을 때가 되면 스스로 또는 가족의 부축을 받아가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카일라스산으로 마지막 순례를 온다. 그러다가 북동쪽에 있는 5650m 높이의 ‘돌마라’ 고갯길을 넘기 전 나오는 ‘죽음의 보금자리’라는 곳에서 카일라스산을 바라보며 다음 생으로 향한다. 여기 쓰러진 힌두교도도 그렇게 내세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떠나간 사람들의 흔적이 ‘죽음의 보금자리’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어찌된 것인지 몰라도 유골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옷가지, 신발, 머리카락 등이 들꽃 사이에서 스쳐가는 바람에 가볍게 떨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죽은 자들의 상의를 주변 바위에 입혀 카일라스산을 향하도록 세워놨다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 정말 사람이 서 있는 것 같다. 카일라스산이 죽어서도 성산이요, 신산이라는 굳은 신앙심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만년설을 배경으로 한 ‘돌마라’ 고개 위의 수많은 탈초(경전을 옮겨 적은 기도 깃발)를 뒤로 하니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여태 지나온 곳과 너무 다른 풍경이다. 계곡 사이의 초원지대를 흘러가는 물줄기를 따라가자 지금까지 힘들었던 모든 것이 잊히고 평화로워졌다. 마치 복받은 내세를 보는 듯하다. 딱 한 번 카일라스산 순례를 마쳤을 뿐인데 평화가 찾아왔다. 108번을 돌고 나면 정말 열반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티베트=글·사진 박하선 여행작가 hotsunny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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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로 가려면 중국 비자가 필요하다. 네팔에서 출발해 들어가는 방법과 라싸에서 출발하는 방법이 있다. 어느 곳에서 출발하든 중국 정부의 까다로운 특별허가를 받아야 한다. 돌발사고에 대비해 단독으로 여행하는 것은 피하고 팀을 이뤄 행동하는 게 좋다. 고도가 높아 고산병에 걸릴 수 있다. 예방을 위해 여행 내내 물을 많이 마시는 것이 좋다. 고산병에 걸렸을 때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적응하길 기다려야 한다.
여름철이라 해도 일교차가 심하고 눈이 내리는 경우도 있으니 방한복과 침낭을 꼭 준비해야 한다.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 휴대폰을 가져갈 경우 여분의 배터리를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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