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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잊혀진 왕국’ 대가야를 만나다

이름없는풀뿌리 2016. 11. 16. 08:47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한 무덤에 30여 명 최다(最多) 순장…

‘잊혀진 왕국’ 대가야를 만나다

김상운 기자

입력 2016-11-16 03:00:00 수정 2016-11-16 03:00:00


<20> 고령 지산동 고분 발굴한 김세기 대구한의대 명예교수

발굴한 지 39년 만에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 앞에 선 김세기 대구한의대 명예교수.
그의 등 뒤로 산 능선을 따라 대가야 고분들이 죽 늘어서 있다.
이 산에는 고분 700여 기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고령=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0일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 마치 낙타 혹처럼 능선을 따라 거대한 봉분들이 주산(主山) 곳곳에 들어서 있었다. 수백 개의 고분이 빽빽이 들어선 이곳은 하나의 거대한 선산(先山)이나 다름없었다. 백제 왕릉이 모여 있는 공주 송산리나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규모를 모두 능가했다. 약 15분을 올라 정상에 가까운 44호분 초입에 이르자 탁 트인 평지가 펼쳐졌다.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 가야인들이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경사면을 깎아내고 땅을 고른 흔적이었다. 함께 답사에 나선 김세기 대구한의대 명예교수(66·고고학)는 “44호분 옆 공터에 베니어판으로 지은 가건물을 짓고 거기서 먹고 자면서 발굴을 했다”며 “1977년 겨울은 유독 추웠다”고 회고했다. 



○ 가야사 연구 암흑기 시절
 

 가야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 끼여 고난을 겪은 역사를 반영하듯 오랫동안 조명을 받지 못했다. 1970년대 초반 천마총 등 신라 적석목곽분과 백제 무령왕릉이 학계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가야사 연구는 상대적으로 방치됐다. 여기에는 가야 고분 연구가 자칫 일본의 식민사학에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한몫했다. 앞서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가야 고분을 파헤쳤다. 이들은 일본계 유물이 가야 고분에 많이 남아있을 거라고 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서기의 가야 점령 기록은 광복 이후 우리 학계의 가야 고분 연구에 걸림돌이 됐다. 

 김세기가 계명대 학부생으로 참여한 1977∼1978년 고령 지산동 고분 발굴은 순장곽 같은 가야 특유의 고분 양식을 확인함으로써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왜곡과 편견을 깨뜨릴 수 있었다. 언론인이자 사학자였던 천관우(1925∼1991)가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 기록의 주체를 왜가 아닌 백제로 해석한 것도 가야사 연구에 돌파구를 마련했다.


○ 한반도 최다(最多) 순장묘 발굴
 


 1977년 11월 시작된 44호분과 45호분 발굴은 경북대와 계명대가 각각 맡았다. 윤용진 경북대 교수와 김종철 계명대 교수가 발굴단장으로, 주보돈 조교(현 경북대 교수)와 김세기 등이 현장조사원으로 참여했다. 그해 가장 눈길을 끈 발굴 성과는 단연 순장자의 묘실인 ‘순장(殉葬) 석곽’의 존재였다. 이것은 대가야 고유의 묘제로 44호분에서만 무려 32기의 순장 석곽이 발견됐다. 44호분의 주인과 함께 최소 32명이 한꺼번에 순장된 셈이다. 김세기는 “주인공이 묻힌 석실 등에도 4명이 추가로 묻힌 45호분의 사례를 감안하면 총 36명이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단일 무덤에 30여 명이 순장된 것은 삼국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인원이다. 중국에서는 최대 200여 명이 묻힌 순장묘가 발견됐으며 일본은 순장풍습이 있었다고 사료에 전해지지만 아직 순장묘가 발굴되진 않았다.

 순장곽이 여러 개인, 이른바 다곽(多槨)순장묘는 오직 고령 지산동에서만 나온다. 대가야의 영역이던 경남 합천과 함양, 전북 남원과 장수, 전남 순천 등에서는 단곽(單槨)순장묘만 발견된다. 이것은 고령이 대가야의 중심지로 지산동에 왕릉을 세운 사실을 보여준다. 김세기는 “지산동 발굴은 황남대총 등 신라 적석목곽분의 순장 풍습을 재확인한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 첫 대가야 금동관 출토

 1978년 9월 초순 지산동 32호분 발굴 현장. 도굴로 벽이 무너진 석실 안에서 김세기의 눈이 순간 번쩍였다. 발치 쪽 토기를 붓으로 살살 훑다가 아래에서 푸르스름한 게 언뜻 비쳤다. ‘혹 청동기인가….’ 김종철이 돋보기로 자세히 관찰해 보니 청동 녹 사이로 금박이 보였다. 대가야 무덤에서 발굴된 첫 금동관이었다. 먼저 토기를 실측하고 수습한 뒤 금동관을 조심스레 꺼냈다. 32호분 출토 금동관은 고대국가 단계로 나아가던 대가야의 위상을 보여준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금관(국보 제138호)과 32호분 금동관의 장식이 꽃이나 풀을 묘사한 이른바 ‘초화형(草花形) 입식’으로 서로 닮은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김세기는 “학계에 이견이 있지만 고고학 자료와 더불어 479년 남제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 등을 종합할 때 가야가 고대국가 단계까지 발전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령=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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