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한 지 39년 만에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 앞에 선 김세기 대구한의대 명예교수.
그의 등 뒤로 산 능선을 따라 대가야 고분들이 죽 늘어서 있다.
이 산에는 고분 700여 기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고령=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가야사 연구 암흑기 시절
가야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 끼여 고난을 겪은 역사를 반영하듯 오랫동안 조명을 받지 못했다. 1970년대 초반 천마총 등 신라 적석목곽분과 백제 무령왕릉이 학계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가야사 연구는 상대적으로 방치됐다. 여기에는 가야 고분 연구가 자칫 일본의 식민사학에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한몫했다. 앞서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가야 고분을 파헤쳤다. 이들은 일본계 유물이 가야 고분에 많이 남아있을 거라고 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서기의 가야 점령 기록은 광복 이후 우리 학계의 가야 고분 연구에 걸림돌이 됐다.
김세기가 계명대 학부생으로 참여한 1977∼1978년 고령 지산동 고분 발굴은 순장곽 같은 가야 특유의 고분 양식을 확인함으로써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왜곡과 편견을 깨뜨릴 수 있었다. 언론인이자 사학자였던 천관우(1925∼1991)가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 기록의 주체를 왜가 아닌 백제로 해석한 것도 가야사 연구에 돌파구를 마련했다.
○ 한반도 최다(最多) 순장묘 발굴
순장곽이 여러 개인, 이른바 다곽(多槨)순장묘는 오직 고령 지산동에서만 나온다. 대가야의 영역이던 경남 합천과 함양, 전북 남원과 장수, 전남 순천 등에서는 단곽(單槨)순장묘만 발견된다. 이것은 고령이 대가야의 중심지로 지산동에 왕릉을 세운 사실을 보여준다. 김세기는 “지산동 발굴은 황남대총 등 신라 적석목곽분의 순장 풍습을 재확인한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 첫 대가야 금동관 출토
1978년 9월 초순 지산동 32호분 발굴 현장. 도굴로 벽이 무너진 석실 안에서 김세기의 눈이 순간 번쩍였다. 발치 쪽 토기를 붓으로 살살 훑다가 아래에서 푸르스름한 게 언뜻 비쳤다. ‘혹 청동기인가….’ 김종철이 돋보기로 자세히 관찰해 보니 청동 녹 사이로 금박이 보였다. 대가야 무덤에서 발굴된 첫 금동관이었다. 먼저 토기를 실측하고 수습한 뒤 금동관을 조심스레 꺼냈다. 32호분 출토 금동관은 고대국가 단계로 나아가던 대가야의 위상을 보여준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금관(국보 제138호)과 32호분 금동관의 장식이 꽃이나 풀을 묘사한 이른바 ‘초화형(草花形) 입식’으로 서로 닮은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김세기는 “학계에 이견이 있지만 고고학 자료와 더불어 479년 남제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 등을 종합할 때 가야가 고대국가 단계까지 발전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령=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978년 9월 초순 지산동 32호분 발굴 현장. 도굴로 벽이 무너진 석실 안에서 김세기의 눈이 순간 번쩍였다. 발치 쪽 토기를 붓으로 살살 훑다가 아래에서 푸르스름한 게 언뜻 비쳤다. ‘혹 청동기인가….’ 김종철이 돋보기로 자세히 관찰해 보니 청동 녹 사이로 금박이 보였다. 대가야 무덤에서 발굴된 첫 금동관이었다. 먼저 토기를 실측하고 수습한 뒤 금동관을 조심스레 꺼냈다. 32호분 출토 금동관은 고대국가 단계로 나아가던 대가야의 위상을 보여준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금관(국보 제138호)과 32호분 금동관의 장식이 꽃이나 풀을 묘사한 이른바 ‘초화형(草花形) 입식’으로 서로 닮은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김세기는 “학계에 이견이 있지만 고고학 자료와 더불어 479년 남제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 등을 종합할 때 가야가 고대국가 단계까지 발전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령=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