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神明의 땅에서 잡신의 신명터로 전락한 청와대
입력 : 2016.12.10 03:00
[김두규의 國運風水]
"너는 도읍지를 정할 때 태상왕(이성계)을 수행하였는데 물이 없는 곳에 도읍을 해서는 안 됨을 몰랐더냐? (…) 살고 죽은 것이 천명이지만 그 후로도 계속하여 재변이 일어나고 한 번도 좋은 일이 없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임금이 된 광해군은 불타버린 경복궁을 버렸다. 불길한 터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후 270년 동안 이곳은 잡초에 묻혔다. 1867년 흥선대원군은 이곳에 경복궁을 중창하였지만 그의 재정 낭비는 훗날 실각의 원인이 되었다. 30년이 채 안 된 1895년 명성왕후가 이곳에서 일본인에게 살해된다(을미사변). 이후 고종과 순종은 덕수궁·창덕궁 등을 정궁으로 쓰고 경복궁을 애써 외면하였다. 청와대 터는 이렇듯 '버려진 땅'이었다. 버려진 땅에다 일제는 총독부와 총독 관저를 지었다. 그들 입장에서 이만한 대체지가 없었다. 후세인들은 이를 두고 '일제의 풍수침략설'을 주장하나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조선왕실이 버린 땅을 그들이 '주워 먹은' 것이다.
정말로 청와대 터는 나쁜 것일까? 애당초 좋은 땅 나쁜 땅은 없다. "전능한 성인도 없고, 완벽한 길지도 없다(聖人無全能, 好地無全美)"는 풍수 격언이 정언명령(定言命令)처럼 내려온다. 땅을 두고 좋다 나쁘다고 말하는 자는 하수(下手)이다. 땅의 성격[地氣]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자가 고수(高手)이다. 청와대 터의 특징은 무엇일까? 태종 이방원은 이곳이 도읍지가 될 수 없는 까닭으로 "험한 바위산과 명당수가 없는 것(石山之險, 明堂水絶)"을 들었다. 그렇다면 이 땅의 용도는 무엇일까? 신명(神明)을 내는 땅이다. 무당들이 큰 바위 밑에 촛불 켜고 기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크게는 집단적 신명에서 작게는 개인적 신명을 낼 수 있는 곳이다. 노래와 춤으로써 신내림 받아 기뻐 날뛰는 것이 신명이다. 무당의 굿판이 개인적 신명이라면, 세종·세조·성종 임금이 경복궁에 재위하면서 조선의 문화를 창달시켰던 것은 집단적 신명이다. 광화문 앞 100만명 촛불의 거대한 흐름도 또한 집단적 신명이다.
얼마 전 홍성담 화백이 그림 한 점을 필자에게 보내왔다. 최순실이 북악산 정상에 똥을 싸고 있는 그림이다.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항문이 빨갛게 탈장된 채 똥을 싸고 있다. 그 똥이 청와대를 뒤덮고 있다. 국민이 한숨 쉬며 그 똥을 치우려고 삽을 들고 모여든다.
이 그림의 '화룡점정'은 무엇일까? 최순실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대나무 가지이다. 대나무는 접신의 도구로서 무당을 상징한다. 그림 북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북동쪽은 귀신이 들어오는 귀문(鬼門)이다. 풍수상 좋은 그림은 기가 드나드는 구멍[氣口]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운생동(氣韻生動)한 그림이 된다. 이 그림은 대나무 가지로 귀문과 기구(氣口)를 동시에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이 터의 성격을 절묘하게 표현하였다. 아쉽고도 화가 난다. 그 좋은 집단신명의 터를 최순실이라는 잡신의 신명터로 만들어버린 것이!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09/201612090168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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