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천하의 명당’을 볼 수 있는 데가 두 곳 있다. 여기서 말하는 ‘명당’이란 풍수에서 말하는 객관적 요건을 갖춘 좋은 땅으로, 그곳에 무덤을 쓰거나 살면 복을 받는 땅을 말한다. 서울 도심 한복판 어디에 그러한 명당이 있을까? 하나는 동작동 국립묘지이고, 다른 하나는 효창운동장 부근의 효창원이다. 동작동 국립묘지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승만, 박정희)과 국무총리, 장관, 장군 등 수많은 고위 공직자를 비롯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일반 장병들의 영혼이 안장된 곳이다. 동작동 국립묘지가 해방 이후 정부인사들의 무덤이라면, 효창원은 김구 선생을 비롯한 해방 이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안장된 곳이다. 규모에 차이가 있지만 두 군데 모두 ‘국립묘지’인 셈이다.
원래 이 두 곳은 왕릉이었다. 조선시대 왕릉 입지 선정에 가장 중요한 사항이 풍수지리였다. 대개 왕릉 터를 잡을 때에는 풍수에 능한 조정대신, 풍수전문 관료인 지관, 그리고 왕실을 대표하는 종친들이 현장을 직접 몇 번씩 가보고 결정하기 때문에 백성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땅이 대부분이다.
흔히 동작동 국립묘지를 이승만 대통령의 명으로 1950년대 초에 터 잡기가 이루어진 곳이라고 소개하지만, 이곳에는 이미 450년 전 ‘동작릉’이 있었다. 동작릉의 원래 주인은 TV 사극 ‘여인천하’에도 등장한 창빈 안씨(昌嬪安氏, 1499~1549)다.
창빈은 조선 11대 임금 중종의 후궁으로 중종과의 사이에 2남1녀를 두었다. 둘째 아들이 덕흥군이고, 덕흥군의 막내아들 하성군(河城君)이 훗날 선조 임금이다.
이와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1549년 10월 창빈이 죽자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 장흥 땅에 모셨다. 그러나 터가 좋지 않아 이듬해에 서울 동작동으로 이장하고 능의 이름을 동작릉(銅雀陵)이라 불렀다. 이곳 동작릉에 창빈을 안장한 뒤 덕흥군은 막내아들 하성군을 얻었다(1552년). 당시 임금은 문정왕후 소생인 명종. 아들이 없었던 명종은 조카들 가운데 하성군을 특히 총애해 궁궐에 자주 불렀다. 명종이 붕어하자 하성군이 그 뒤를 잇게 되는데 바로 선조 임금이다(1567년). 이렇게 후궁의 막내 손자가 임금이 되자, 동작릉의 명당발복 때문이라는 소문이 난 것이다.
실제 창빈이 묻힌 동작릉은 풍수적으로 좋은 땅일까?
동작릉을 찾아가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국립묘지 정문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 묘소로 가면 왼쪽에 비교적 넓은 주차공간이 나오는데, 그곳에 ‘창빈 안씨’ 묘소를 알리는 안내표지와 창빈 안씨의 신도비가 보인다. 신도비에서 20m쯤 올라가면 곡장(曲牆)이 둘러처진 창빈 안씨의 무덤이 단아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동작동 국립묘지의 가운데에 위치한 창빈 안씨의 무덤은 풍수에서 말하는 혈처(穴處)다. 정문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주변을 감싸고 있는 산들이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펼친 모습이다. 동작릉은 바로 그 날개 속에 감싸인 알의 형상이다. 동작(銅雀)이란 위나라 조조가 구리로 만든 봉황새를 옥상에 올려두었다는 동작대(銅雀臺)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동작이란 곧 봉황을 의미한다. 지형지세를 사물의 형세에 비유해 표현하는 것을 물형론(형국론)이라고 한다. 이곳을 물형론에 대입해보면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의 땅이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정문에서 바라본 동작릉 전경
창빈 안씨 무덤 뒤로 이어지는 산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내각 수반, 장관, 유명인사, 장군들이 안장된 작은 산봉우리가 하나 있다. 동작동 국립묘역에서 창빈 안씨 무덤 다음으로 좋은 지기가 뭉쳐 있는 곳이다. 동작릉과 이곳을 중심으로 좌우와 앞쪽으로 수많은 애국자들의 무덤들이 늘어서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의 왕릉과 대한민국의 국립묘지가 서로 갈등 없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곳말고도 서울 근교에는 많은 왕릉들이 있다. 이중에서 몇 군데는 이와 같이 국가를 위해 살다간 애국자의 묘역으로 활용해보는건 어떨까?
서울 동작구 동작동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 영령들이 묻혀 있는 장소다. 6.25전쟁 때 수많은 장병들이 전사하자 이들을 안장할 데가 없었다. 이에 1952년 11월 군묘지설치위원회를 구성하여 11개월 동안 10개 지역을 답사한 결과 현재의 자리를 국군묘지 후보지로 선정하였다. 1953년 9월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측량과 정지작업에 착수하여 연차적으로 묘역이 조성되었다. 국립서울현충원은 국가원수묘역, 임시정부요인묘역, 애국지사묘역, 무후선열제단, 국가유공자묘역, 장군묘역, 장병묘역, 경찰묘역, 외국인묘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곳은 조선 11대 왕인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할머니인 창빈안씨(1499∼1549) 묘가 있어 동작릉이라 불린다. 동작구와 동작동의 지명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본래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은 세자와 세자비 그리고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궁의 무덤이다. 후궁의 무덤은 그냥 묘라고 한다. 그런데 창빈안씨 묘는 동작릉이라고 높여 불렀다. 그 이유는 손자인 선조(1552∼1608)가 14대 왕에 오른 후 마지막 왕인 27대 순종(1874∼1926)까지 그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창빈안씨는 본관이 안산이며 시흥에서 태어나 9살에 궁녀로 들어갔다. 생김새가 단정하고 행동이 정숙했다고 한다. 중종의 모후인 정현대비의 눈에 들어 중종의 후궁이 되었고 종3품인 숙용에 이르렀다. 그녀는 중종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낳았다. 큰아들 영양군은 장가를 들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둘째는 덕흥군 초로 3남 1녀를 두었다. 그중 셋째가 하성군 균으로 임금이 되자 아버지 덕흥군은 덕흥대원군으로 할머니는 정1품인 빈(창빈)으로 추존되었다. 참고로 왕비는 품계가 없지만 후궁들은 종4품부터 정1품까지 품계가 있었다. 정1품(빈), 종1품(귀인), 정2품(소의), 종2품(숙의), 정3품(소용), 종3품(숙용), 정4품(소원), 종4품(숙원)이다. 그 이하 정5품 상궁부터는 궁중내의 일을 도맡아하는 나인들이다.
창빈안씨는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궁궐을 떠나 중이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특명으로 궁중에 머물다가 명종 4년(1549) 세상을 떠났다. 처음은 경기도 양주군 장흥에 장사 지냈다가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이듬해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그 뒤 발복이 시작되었다. 중종은 9명의 부인(왕비3, 후궁6)에게서 9남 11녀의 자녀를 낳았다. 이중 창빈안씨는 6번째이고 그녀가 낳은 덕흥군은 중종의 아홉 번째 아들이다. 선조는 할머니와 아버지 서열로는 왕위를 물려받을 입장이 아니었다. 그런데 기회가 주어졌다.
중종의 장남 인종(장경왕후 윤씨 소생)은 왕위에 오른 지 9개월 만에 자녀를 남기지 않고 죽었다. 그 후임으로 중종의 차남 명종(문정왕후 윤씨 소생)이 즉위하여 22년 동안 통치하였다. 그는 인순왕후 심씨 사이에서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13세 어린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이 어질었던 명종은 비록 배는 다르지만 조카들을 좋아하였다. 그중 하성군을 각별히 좋아하여 자주 곁으로 불렀다고 한다.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인순왕후는 하성군을 양자로 받아들여 왕위를 물려주었다. 후궁 소생으로는 처음 왕이 된 것이다.
이곳의 산세는 관악산(632m)에서 비롯되었다. 최고봉인 연주봉에서 북쪽으로 갈라져 나온 맥이 남현동 고개를 지나 까치산공원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사당아파트와 상도중학교, 상현중학교가 있는 능선을 따라 국립서울현충원의 주산인 동작봉(174.8m)으로 이어진다. 동작이란 산세가 공작이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이고, 이 일대의 돌 색깔이 구리 빛을 띤 것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작봉에서 좌우로 뻗은 능선은 병풍을 치듯 묘역 전체를 감싸고 있다. 앞에는 한강이 흐르고 있어 배산임수의 지형을 이루었다.
창빈안씨 묘의 주룡은 동작봉에서 우측 두 번째 봉우리에서 내려왔다. 첫 번째 봉우리 아래에는 박정희 대통령 묘가 있으며 이곳 주룡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주룡의 맥은 크게 과협 한 다음 장군제1묘역이 있는 봉우리를 세웠다. 귀인처럼 단정하게 생겼으며 현무봉이다. 이 중심 맥은 북쪽으로 내려가는데 그 끝자락에 창빈안씨 묘가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내청룡 자락에는 이승만 대통령 묘가 있고, 우백호에는 김대중 대통령 묘가 있다. 김영삼 대통령 묘는 외청룡에 해당되는 곳에 있다. 그러므로 동작릉이 정혈이고 나머지 묘의 능선들은 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의 명당] 심재학당과 함께 하는 풍수답사 (1) "장흥 묘지는 풍수상 좋은 땅이 아니오" 그녀가 죽은지 1년 만에 이장을 한 뒤 손자부터 줄줄이 임금에 오르는데 대통령들 묘보다 명당인 이곳은 ..
그림=안충기,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서울 동작구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 보통 시민들에겐 ‘동작동 국립묘지’라는 표현으로 더 익숙한 곳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국가유공자들이 잠들어 있다. 1955년 7월 국군묘지로 조성되었다가,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되어 군인이 아닌 유공자들도 안장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등 대통령들과 각계 저명인사들도 묻혀 있다. 현충원은 그런 남다른 의미를 가진 만큼 국가에 충성을 약속하는 정치인들이 선거 당선 등 특별한 날에 찾아가 마음을 다잡거나 정치적인 메시지를 알리기도 한다. 벚꽃 명소로도 유명해 요즘 같은 봄날엔 참배객뿐 아니라 상춘객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동작대교 남단 노을카페에서 본 현충원 전경. 왼쪽 멀리 관악산이 보인다.
관악산에서 이어지는 산줄기가 한강과 만나는 곳에 있는 현충원은 인근 동작대교 위에서 보면 그 전경이 한 폭의 그림같이 눈에 들어온다. 안으로 들어가면 순국 영령들의 올곧음을 상징하듯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전개된 끝도 없는 묘지 행렬이 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셀 수 없이 많은 묘지 중 ‘국가유공자’라는 원래 취지와는 전혀 다른 묘지가 하나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오래된 묘지다. 바로 창빈 안씨(昌嬪 安氏) 묘. 무슨 사연이 있을까.
동작동 현충원에서 최고 명당으로 알려진 창빈 안씨 묘.
경내 한가운데쯤 이승만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 사이에 있는 주차장에 ‘창빈 안씨 묘역’이란 안내표지가 있다. 여기서 30m쯤 올라가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무덤 하나가 단아하게 자리 잡고 있다. 묘지로 가는 오솔길에 서 있는 신도비(神道碑)는 1550년경에 이 묘가 조성됐음을 알려준다. 현충원보다 400년이 더 됐다는 얘기다. 창빈 안씨가 사실상 이 구역의 본토박이 터줏대감임을 말해주는 셈이다.
창빈 안씨는 누구일까. 창빈은 조선 선조 임금의 할머니다. 연산군 5년(1499년)에 태어나 아홉 살 때인 중종 2년(1507년) 궁녀로 뽑혔다. 스무 살 때 중종의 총애를 입어 영양군, 덕흥군, 정신 옹주 등 2남 1녀를 낳았고, 1549년 5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하던 시기였다. 중종이 죽고(1544년) 다음 임금인 인종이 즉위 1년도 안 된 31세의 나이에 죽자(1545년), 인종의 이복동생인 명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그도 34세에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이 죽는다(1567년). 누가 왕이 될지 모르는 어수선한 정국에서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선조)이 바로 창빈 안씨가 낳은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다. 창빈 안씨의 입장에서는 손자가 임금이 된 것이다. 후궁의 손자가 임금이 되기는 조선 건국 이래 처음이었다. 이후 임금은 모두 창빈의 후손이다. 어떻게 보면 이때부터의 조선은 ‘창빈의 조선’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풍수적으로 봤을 때 창빈 안씨의 묘소가 현충원 안에서 가장 좋다는, 이른바 ‘혈(穴) 자리’에 해당하는, 그야말로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점이다. 창빈 묘에 얽힌 풍수적인 스토리는 이렇다. 1549년 10월 창빈이 죽자 아들 덕흥군은 경기도 장흥에 시신을 모셨다. 그런데 그곳이 풍수상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1년 만에 이장을 결심한다. 지금도 이장이 쉽지 않지만, 당시엔 이장한다는 것은 새로 장례를 치르는 것과 같았다. 많은 돈과 시간이 들어가는 까닭에 왕가에서도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덕흥군의 속마음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이장을 결심한 그는 실력 있는 풍수 지관들을 동원해서 명당자리를 찾았고, 그곳이 바로 지금 창빈 묘역이다. 이장한 지 3년 만인 1552년 하성군이 태어났다. 그리고 1567년에 하성군은 선조 임금이 되었다.
하성군이 임금이 되자 창빈 묘역은 그야말로 ‘임금이 난 명당 터’가 됐다. ‘할머니 묘의 발복으로 임금이 됐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그렇지 않아도 선비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풍수설에 기름을 끼얹었다. 조선의 선비들이 낮에는 유교, 밤에는 풍수를 공부하고 토론했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던 것 같다.
겸재 정선이 그린〈동작진〉. 동작대교 북쪽에서 지금의 현충원 쪽을 보고 그렸다.
당시 사회 분위기가 이러한데, 감각 있는 화가들의 눈에 이런 절묘한 스토리가 그냥 지나쳤을 리 없다.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18세기 중엽에 그린 '동작진(銅雀津)'은 바로 지금의 현충원 일대가 배경이다. 좌우의 산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그 앞으로 한강이 흐른다. 멀리 보이는 관악산이 든든하다. 명당의 조건을 두루 갖춘 곳으로, 당시 선비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터임을 보여준다.
풍수적으로 설명하면 관악산(祖山)의 기운을 이어받은 서달산(主山)이 좌우로 두 팔을 벌려 현충원을 감싸면서 흑석동 쪽의 산이 좌청룡(左靑龍), 사당동 쪽이 우백호(右白虎)가 된다. 서달산 능선 하나가 박정희 묘역을 살짝 비켜 내려오다가 다시 고개를 쳐들어 봉우리 하나를 만든다. 장군봉이다. 장군봉은 풍수상 현무(玄武)정이라 부른다. 주산의 강한 기운을 잠시 머물게 하였다가 다시 조금씩 흘려 보내주는 역할을 한다. 그 기운은 장군봉에서 다시 중심 산줄기(來龍)로 내려와 창빈 묘역에서 멈춘다. 땅 기운이 오롯이 뭉친 곳인데 이런 자리를 ‘혈(穴)’이라고 부른다.
능선의 오른쪽 산이 서달산. 왼쪽 산 아래가 박정희 대통령 묘소.
또한 기운이 좋은 터는 양쪽에서 물길이 흐르다 혈 자리 앞에서 하나로 합쳐(水口) 흘러나간다. 지금은 도로포장 등으로 금세 눈에 띄지는 않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창빈 묘역 양쪽으로 물길이 흐르다 묘역 앞에서 합쳐져 한강으로 흘러나가는 모양새를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기운의 흐름이 조산(관악산) → 주산(서달산) → 현무정(장군봉) → 내룡(국가유공자 묘역) → 혈(창빈 묘) → 명당(일반 사병 묘역) → 수구(현충원 정문) → 객수(한강)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풍수에서는 ‘산은 인물을 키우고, 물은 재물을 창출한다(山主人 水主財)’고 얘기한다. 풍수의 핵심 화두 중 하나다. 그런 측면에서도 창빈 묘역은 좋은 산(인물)과 생기 넘치는 물(재물)을 다 품어 안고 있는 명당인 셈이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창빈 묘역 왼쪽 100m 지점에 이승만 묘역이 있고, 오른쪽 뒤편 10m 거리에는 김대중 묘역이 있다. 그 뒤로는 정일형·이태영 부부, 시인 이은상, 광복군 출신 이범석,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 한글 학자 주시경, 민족지도자 조만식 등 쟁쟁한 인물들이 안장된 국가유공자 묘역과 장군묘역이 이어지고, 장군봉을 내려다보는 자리에 박정희 묘역이 있다. 김영삼 묘역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창빈 안씨 묘에서 앞을 볼 때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묘.
창빈 안씨 묘에서 앞을 볼 때 오른쪽에 자리잡은 김대중 대통령 묘.
창빈 안씨 묘 뒤편에 자리잡은 박정희 대통령 묘.
창빈 안씨 묘역에서 앞을 볼 때 왼쪽 건너편 산자락에 있는 김영삼 대통령 묘.
풍수적 관점에서 보면 역대 대통령들과 국가 유공자들이 혈 자리에 있는 창빈 안씨를 호위하고 있는 형국이다. 왕을 낳고, 왕(대통령)들이 쉬는 곳. 바로 현충원이다.
동작동 현충원. 관악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한강을 만나는 지점에 아늑하게 펼쳐져 있다. 그림=안충기
■ 심재학당은 풍수학자 심재(心齋) 김두규 교수와 함께 영역이 다른 전문가들이 모여 공부한다. 고서 강독과 답사를 하며 풍수의 현대적 의미를 찾는다. 글=심재학당, 그림·사진=안충기 기자·화가 Copyrightⓒ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