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와 숙녀
- 박인환 / <박인환 시선집>(1955) -
[1]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2]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3]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 작품해설 : 1950년대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것으로, 6.25전쟁이 가져다 준 전후의 폐허와 정신의 황
폐함, 비정한 분위기에서 도시의 서정성을 노래하였다. 전쟁 직후의 시적 정조는 자연히 감상적, 허
무적, 체념적인 분위기를 풍길 수밖에 없다. 시어의 선택에 있어서도 "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 목마,
별, 소녀, 늙은 여류작가, 등대, 페시미즘, 술병" 등을 동원해서 그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이 시에
서 느껴지는 삶에 대한 절망감이나 도시적 감상성은 퇴폐적이기보다는 오히려 감미로운 느낌을 주기
도 하는데, 이것은 박인환의 언어에 대한 탁월한 감수성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시는 시어나 시구가 지니는 각각의 의미를 분석하거나 그것들의 의미 상황을 추적하면 무엇을 뜻
하는지 선뜻 이해되지 않는데, 그것은 초현실주의적 방법인 우연성에 의한 시어의 자유 분방한 표현
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인환의 이러한 언어 감각이 이 작품을 '분위기'로 느끼게 하는 주된
요인이며, 허무적이고 감상적인 정조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전후문학은 6·25의 비극적 체험과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 가치의 전도(顚倒)와 혼란, 문명화, 도시화에 따른 비인간화 현상의 심화 등으로
인해 개인주의적, 감상적, 허무적 경향을 띠게 되는데, 이 작품에 나타난 허무 의식과 센티멘탈리즘
역시 전후의 정신적 황폐함과 불안 의식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 있다면
- 박인환 / <박인환 시선집>(1955) -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우리들의 죽음보다도
더한 냉혹하고 절실한
회상과 체험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여러 차례의 살륙(殺戮)에 복종한 생명보다도
더한 복수와 고독을 아는
고뇌와 저항일지도 모른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허물어지는 정적(靜寂)과 초연(硝煙)의 도시
그 암흑 속으로 …
명상과 또 다시 오지 않을 영원한 내일로 …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유형(流刑)의 애인처럼 손잡기 위하여
이미 소멸된 청춘의 반역(反逆)을 회상하면서
회의와 불안만이 다정스러운
모멸(侮蔑)의 오늘을 살아 나간다.
…아 최후로 성자(聖者)의 세계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속죄(贖罪)의 회화(繪畵) 속의 나녀(裸女)와
회상도 고뇌도 이제는 망령(亡靈)에게 팔은
철없는 시인(詩人)
나의 눈 감지 못한
단순한 상태의 시체(屍體)일 것이다 ….
검은 강
- 박인환 / <박인환 시선집>(1955) -
신(神)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최후의 노정(路程)을 찾아보았다.
어느 날 역전에서 들려오는
군대의 합창을 귀에 받으며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와는
반대 방향의 열차에 앉아
정욕(情欲)처럼 피폐한 소설에 눈을 흘겼다.
지금 바람처럼 교차하는 지대
거기엔 일체의 불순한 욕망이 반사되고
농부의 아들은 표정도 없이
폭음과 초연(硝煙)이 가득 찬
생(生)과 사(死)의 경지로 떠난다.
달은 정막(靜寞)보다도 더욱 처량하다.
멀리 우리의 시선을 집중한
인간의 피로 이룬
자유의 성채(城砦)
그것은 우리와 같이 퇴각하는 자와는 관련이 없었다.
신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저 달 속에
암담한 검은 강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 버지니아 울프 (1882~1941)
1882년 본명 애덜린 버지니아 스티븐, 영국 켄싱턴 출생
1895년 어머니의 죽음. 충격으로 정신 이상을 겪음
1905년 <타임>지 문예부록에 기고
1912년 레오나드 울프와 결혼
1919년 <밤과 낮> 간행
1923년 톨스토이의 <사랑의 편지>를 번역
1927년 <등대로> 간행
1937년 <세월> 간행
1939년 리버플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 수여, 그러나 울프는 거절함
1941년 산책중 자살.. 유작 <막간>간행
작품 : 댈러웨이 부인,항해,올랜도,제이콥의 방,의식의 흐름 등등
* 버지니아 울프[영국](1882-1941)
문학사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서술 기법을
발전시킨 20세기 초의 실험적인 작가로 손꼽힌다. 또, 1960년대 말부터는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로
재발견되면서 새로운 해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그러한 문학적 업적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전설적인 여운을 불러일으킨다. 생전에 이미 블룸즈베리 그룹의 중심 인물로서
숱한 화제를 뿌렸던 데다가, 비범한 성격과 용모, 만성적인 정신분열증, 결국 자살로 마감한 생애는
그녀를 하나의 전설로 만드는 것이다.
그녀는 학자이자 비평가였던 레슬리 스티븐과 아름답고 활동적인 어머니 줄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 모두 재혼으로, 레슬리에게는 정신박약인 딸이, 줄리아에게는 2남1녀가 있었다. 두 사람 사
이에서 다시 2남 2녀가 태어났으며 버지니아는 그 중 셋째였다. 그래서 그녀는 여덟 살부터 예순 살
까지 열한 명의 식구와 일곱 명의 하인들이 북적이는 가운데 자라났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유복한 환경이었다. 남자 아이들은 공립학교에 다녔고, 여자 아이들은 집에서 가정교사와 부모로부터
배웠다. 20세기가 되기 직전까지도 영국의 웬만한 가문에서는 여자아이들에게 학교 교육을 시키지 않
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방대한 서재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고, 아버지의 손님들인
당대 일류 문사들의 대화에서 지적인 자극을 받아 일찍부터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녀가 열세 살 때 어머니 줄리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로서 그녀는 최초의 신경쇠약을 겪었
다.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살림을 꾸려가던 어머니의 부재와 아내를 잃은 레슬리의 상심은 온 집안의
분위기를 암울하게 만들었다. 열세 살 위의 의붓언니 스텔라가 살림을 맡았지만 역시 2년 후에는 세
상을 떠났고, 그 후에는 불과 열여덟 살이던 바로 손위의 언니 바네사가 살림을 맡게 되었다. 레슬리
는 점점 더 완고하고 자기중심적이 되어갔고, 두 의붓 오빠들 역시 자매에게는 견뎌내기 힘든 존재였
다. "마치 야수와 함께 우리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았던 그 시절은 1904년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끝
이 났다. 그녀는 신경쇠약이 재발하여 자살을 기도했다.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달랐던 형제자매들은 제각기 흩어졌다. 바네사는 동생들을 데리고 블룸즈버리
지역으로 이사했다. 가난한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주로 사는 허름하고 조용한 동네였다. 비좁고 침
침했던 옛집과는 달리 집안을 환하게 꾸몄고,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던 남동생 토비의 친구들을 초
대했다. 클라이브 벨, 색슨 시드니-터너, 리튼 스트래치, 메이나드 케인즈, 레너드 울프 등이 드나들
었다. 어떤 규범이나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반항적인 정신들이 맞부딪치며 예술과 철학과
문학을 토론했고, 바네사와 버지니아는 안주인 노릇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룹에 동참할 수 있었다.
버지니아는 친구의 소개로 <가디언> 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하여 원고료를 벌기 시작했다.
1906년 사남매의 그리스 여행은 불행하게 끝났다. 여행에서 얻은 장티푸스로 토비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바네사는 클라이브 벨과 결혼했고, 블룸즈버리 그룹은 계속 번
창했지만 버지니아는 어느새 스물 아홉 살에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청혼도 거부하고, 아이도 없고 게
다가 정신병이 있었다. 1912년 그녀는 결국 레너드 울프와 결혼했다.
토비의 친구들 중 한 사람이었던 레너드 울프는 버지니아에게 둘도 없는 반려가 되어주었다. 병원에
서는 악화시킬 뿐인 정신병을 가진 아내를 위해 규칙적이고 안정된 생활 습관을 만들어주었고, 창작
을 격려해주었다. 그녀의 거부로 인해 처음부터 성생활이 배제된 백지 결혼이었지만, 결혼이 반드시
성관계 위에 기초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이상적인 결혼이었다.
그녀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09년이었다. 1913년 완성된 <출항>은 1915년에 발표되었고, 뒤이
어 <밤과 낮>(1919) <제이콥의 방>(1922)등이 발표되면서 차츰 인정받기 시작했다. 재미 삼아 사들인
수동식 인쇄기로 시작한 호가스 출판사 역시 차츰 궤도에 올랐고, <댈러웨이 부인>(1925) <등대로>(1927)
등으로 명성과 수입을 얻기에 이르렀다.
<자기만의 방>(1929)을 쓰게 된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다. 어째서 여성이 작가가 되기란 그토록 어려
운가를 역사적 사회적으로 규명한 이 에세이는 출간 당시부터 이미 적지않은 반향을 일으켰을 뿐 아
니라, 1960년대 말 이후로는 페미니즘의 지침서가 되다시피 하였다. "우리가 모두 일년에 500파운드
를 벌고 자기 방을 갖는다면"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자유는 오늘날까지
도 많은 여성들의 소망이 되고 있는 것이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울프 부부의 삶에는 점차 암운이 덮이기 시작했다. 독일군의 침
공은 유태인인 레너드에게 잠재적인 위협이었으며, 시골집으로 대피했지만 갈수록 심각해지는 전시의
불편과 고통은 버지니아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했다. 다시금 자신이 미쳐가고 있음을 감지한 그녀는
남편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나는 당신의 인생을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이슬이 아직도 촉촉한 초원을 씩씩한 걸음걸이로 가로질러 강으로 나가서 주머니
에 돌멩이들을 가득 집어넣고 강물로 들어갔다. 시체는 2주 후에야 발견되었다.
1941년 주머니에 돌을 가득 채워넣고 템즈강에 투신 자살하기까지 수 차례의 정신질환과 자살기도를
경험한 버지니어 울프. 동시에 버지니아는 20세기 문학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로서 뛰어난 작품 세계
를 일궈 놓은 선구적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다. 민족 상잔의 비극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살다 30세로 요
절한 동시대 최고의 모더니즘의 기수였든 박인환. 금세기의 천재적인 여류 작가이면서 불행한 어린시
절을 보낸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의 마지막 유서를 보며 ...
* 내 상처를 이해 해준 그대에게 / 버지니아 울프 유서(遺書)
흐르는 저 강물을 바라보며 당신의 이름을 목놓아 불러 봅니다.
레너드 울프. 제 처녀 때의 이름 버지니아 스티븐
당신과 결혼하면서 버지니아 울프가 된 것을 저는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나이 예순, 인생의 황혼기이긴 하지만 아직 더 많은 일을 할수 있는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할
생각입니다. 제 자살이 성공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 부부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 거라고 입방
아를 찧을지도 모르겠어요. 아이도 없는 터에 남편의 이해부족, 애정 결핍 등 이런저런 얘기가 나올
까 솔직히 두렵습니다.
이 유서는 당신이 엉뚱한 구설수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쓰는 것이랍니다.
1912년 결혼한 이래 30년 동안 제가 진정으로 사랑하였고, 저를 진정으로 아껴 주었던 레너드...
그 동안 차마 얘기하지 못했던 제 생애의 비밀을 이 유서에서 당신께 말하려 합니다.
저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첫 번째 아내가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죽자 변호사 허버트 덕워스의 미
망인 줄리아와 재혼을 합니다. 속된 말로 홀아비와 과부의 결혼이었던거지요.
제 어머니 줄리아는 이미 네 명의 자식이 있는 상태였고, 아버지는 전처 소생의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재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 오빠 토비와 언니 바네사, 저 그리고 동생 애드리안이 줄줄이 태어났지요.
그리 넓지도 않은 집에서 아홉 명 아이와 두 어른이 아옹다옹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봉사정신이 무척 강한 분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병구완하러 다니느라 정작 집에 있는 아이들은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셨지요.
큰애가 작은애를 알아서 잘 돌보겠지 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하셨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 생애의 불행은 여섯 살 때부터 시작됩니다.
큰 의붓오빠인 제럴드 덕워스가 어머니 없는 틈을 타 저한테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자기와는 신체 구조가 다른 저를 세밀히 관찰하고 만지고.
그 시절부터 저는 몸에 대한 혐오감과 수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성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조건 배격하는 마음도 갖게 되었지요.
불행은 설상가상으로 몰아 닥쳤죠.
어머니는 이웃사람을 간병하다 그만 전염이 되어 제가 열 세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를 잘 이해해 주던 이복언니 스텔라도 2년 뒤에 죽었는데
바로 그때 아버지마저 암에 걸려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저와 언니 바네사가 신경질이 나날이 심해지시는
아버지의 병간호를 맡아서 하는 것이야 뭐 그래도 힘든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춘기를 막 넘긴 작은 의붓오빠 조지 덕워스가 저한테 갖은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의지할 데 없어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저는
무방비 상태에서 그런 일을 수시로 당하고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집에 책이 없었더라면 전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버지의 전처처럼 죽지 않았을까요?
아버지는 총 65권에 달하는 대영전기사전의 책임 집필자여서 집에 책이 엄청나게 많았고,
저는 현실의 불행에서 도피하기 위해 책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저는 당신과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너무나 무서워했고,
사춘기 시절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당신이 청혼했을 때 저는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은 부부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작가의 길을 가려는 나를 위해 공무원 생활을 포기해 달라는 것.
세상에 이런 요구를 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성적 욕망을 버리고
사회적 지위를 팽개치고 오겠다는 사람은 레너드....
당신 이외엔 없을 거예요.
고통스런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하며 제가 작품을 쓰는 동안
당신은 출판사를 차려 묵묵히 제 후원자 노릇을 해 주셨지요.
저는 지난 30년 동안 남성중심의 이 사회와 부단히 싸웠습니다.
오로지 글로써. 유럽이 세계 대전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들 때 모든 남성이 전쟁을 옹호하였고,
당신마저도 참전론자가 되었죠.
저는 생명을 잉태해 본 적은 없지만 모성적 부드러움으로 이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지금 온 세계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제 작가로서의 역할은 여기서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체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김수영(왼쪽)과 박인환. 조병화문학관 제공
* 박인환(朴寅煥, 1926-1956)
출생 : 1926. 8. 15. 강원도 인제
사망 : 1956. 3. 20.
학력 :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데뷔 : 1946년 국제신보 등단
경력 : 1952 대한해운공사
1951 육군 종군 작가단 종군 기자
1948 자유신문사 문화부 기자, 작품 : 도서 72건
해방 이후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밤의 미매장」, 「목마와 숙녀」 등을 저술한 시인.
본관은 밀양(密陽). 강원도 인제 출신. 아버지 박광선(朴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의
4남 2녀 중 장남이다.
1939년 서울 덕수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41년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8·15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 뒤 상경하여 마리서사(茉莉書舍)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광균(金光均)·이한직(李漢稷)·
김수영(金洙暎)·김경린(金璟麟)·오장환(吳章煥) 등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1948년 서점을 그만두면서 이정숙(李丁淑)과 혼인하였다.
그 해에 자유신문사, 이듬해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48년에는 김병욱(金秉旭)·김경린 등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을 발간하였으며,
1950년에는 김차영(金次榮)·김규동(金奎東)·이봉래(李奉來) 등과 피난지 부산에서
동인 ‘후반기(後半紀)’를 결성하여 모더니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51년에는 육군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한 바 있고,
1955년에는 직장인 대한해운공사의 일 관계로 남해호(南海號) 사무장의 임무를 띠고
미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955년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낸 뒤 이듬해(1956년)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46년에 시 「거리」를 『국제신보(國際新報)』에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1947년에는 시 「남풍」, 영화평론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신천지(新天地)』에,
1948년에는 시 「지하실(地下室)」을 『민성(民聲)』에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시작 활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1949년 김수영·김경린·양병식(梁秉植)·임호권(林虎權) 등과 함께 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광복 후 본격적인 시인들의 등장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
1950년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밤의 미매장(未埋藏)」·「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하였는데,
이런 작품들은 도시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감상적인 시풍으로 노래하여 주목을 끌었다.
1955년에 발간된 『박인환선시집』에 그의 시작품이 망라되어 있으며 특히 「목마와 숙녀」는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서 우울과 고독 등 도시적 서정과 시대적 고뇌를 노래하고 있다.
1956년 작고 1주일 전에 쓰여진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기도 하였다.
1976년 그의 20주기를 맞아 장남 박세형(朴世馨)이 『목마와 숙녀』를 간행하였다.
<참고문헌>
『목마와 숙녀와 별과 사랑』(이동하 외,문학세계사,1986)
『현대한국시인연구』(김해성,대학문화사,1985)
『박인환평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윤석산,영학출판사,1983)
『시인박인환과 문학과 그 주변』(김광균 외,근역서재,1982)
『한국현대문학사탐방』(김용성,국민서관,1973)「박인환론」(박철석,『현대시학』,1981.2.)
「잊을 수 없는 시인의 회상」(안도섭,『자유신문』,1957.9.22.)
목마와 숙녀 / 시낭송 박인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