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206

<윤동주> 자화상 / 또다른고향 / 참회록 / 십자가 / 길 / 간(肝)

자화상 - 윤동주 / (1948) -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 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 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며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또 다른 고향 - 윤동주 / (1948) -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

<윤동주> 별헤는밤 / 서시 / 쉽게씌여진시 / 병원 / 아우의인상화

별 헤는 밤 - 윤동주 / (1948) -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소녀(異國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김규동> 나비와광장 / 보일러사건의진상 / 고향 / 무등산

나비와 광장 - 김규동 / (1952) - 현기증 나는 활주로의 최후의 절정에서 흰나비는 돌진의 방향을 잊어 버리고 피 묻은 육체의 파편들을 굽어본다. 기계처럼 작열한 작은 심장을 축일 한 모금 샘물도 없는 허망한 광장에서 어린 나비의 안막을 차단하는 건 투명한 광선의 바다뿐이었기에 진공의 해안에서처럼 과묵(寡默)한 묘지 사이사이 숨가쁜 Z기의 백선과 이동하는 계절 속 불길처럼 일어나는 인광(燐光)의 조수에 밀려 이제 흰나비는 말없이 이지러진 날개를 파닥거린다. 하얀 미래의 어느 지점에 아름다운 영토는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푸르른 활주로의 어느 지표에 화려한 희망은 피고 있는 것일까. 신도 기적도 이미 승천하여 버린 지 오랜 유역 그 어느 마지막 종점을 향하여 흰나비는 또 한 번 스스로의 신화와 더불어 ..

<이용악> 오랑캐꽃 / 낡은 집

오랑캐꽃 - 이용악 / (1947) - 오랑캐꽃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 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졸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 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오랑캐꽃 : 제비꽃을 다른 말로 일컫는 말 * 도래샘 : 도랑가에 저절로 샘이 솟아 빙 돌아서 흘러..

<김남조> 겨울바다 / 설일 / 정념의기 / 목숨 / 그대있음에

겨울 바다 - 김남조 / 시집 (1967) -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海風)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 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설일(雪日) - 김남조 / (1967) -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

<김광규> 희미한옛사랑의그림자 / 대장간의유혹 / 나뭇잎하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 시집(1979) - 4 · 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

<김광림> 산山 / 쥐

산 - 김광림 / (1970) - 한여름에 들린 가야산(伽倻山) 독경(讀經) 소리 오늘은 철 늦은 서설(瑞雪)이 내려 비로소 벙그는 매화 봉오리. 눈 맞는 해인사(海印寺) 열두 암자(庵子)를 오늘은 두루 한겨울 면벽(面壁)한 노승(老僧) 눈매에 미소가 돌아. * 작품해설 : 이 시는 눈 내리는 가야산의 선적(禪的) 고요와 종교적 깊이를 노래한 것으로, 그것을 그려내는 수법 또한 불교적 성격을 띠게 되어, 한 편의 절묘한 조화를 일구어낸 작품이라 하겠다. 이 시에서는 선적(禪的)인 세계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선의 세계는 점진적 논리 구조나 인과관계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설명되는 세계가 아니라, 느닷없는 깨달음이라는 사유의 비약이 그 본 질이다. 선의 세계에 있어서 시작과 그 끝인 깨달음까지..

<김광섭> 성북동비둘기 / 생의감각 / 마음 / 저녁에

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 (1968)창간호 -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직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

<이동주> 강강술래

강강술래 - 이동주 / 시집 (1955) - 여울에 몰린 은어(銀魚)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 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 래에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 백장미(白薔薇) 밭에 공작(孔雀)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뇌누리에 테이프가 감긴다. 열두 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旗幅)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 뇌두리 : 물살, 소용돌이의 옛말 * 상모: 벙거지의 꼭지에다 참대와 구슬로 장식하고 그 끝에 해오라기의 털이나 긴 백지오리를 붙인 것. 털 상모와 열두 발 상모가 있다. * 이동주(1920~1979) 전남 해남 출신, 시인. 남성고교 교사. 전북대학교 원광대학교 강사. 호남신문 문화부장 1920..

<신경림> 갈대 / 농무 / 목계장터 / 파장 / 가난한사랑노래

갈대 - 신경림 / (1956) -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농무(農舞) - 신경림 / 가을호3호 1971 -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