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206

<최애리> 새

​ 새 - 최애리(崔愛里) - 흩어져 날아 내리며 우리는 비로소 모이고 있었을까.​ 저마다 내리어 잠들 데를 찾아, 종일 헤어지던 날개소리-​ 날개소리를 젖은 날개 아래 잠잠히 들으며, 잠들어​ 잠시 모일 데를 찾아, 그러나 흐르는 어느 물가에? ​ 불빛 하나로, 오 황폐히 드러나는 밤​ 휘청휘청 꿈 속으로 미리​ 우리는 오래 걸어 들어 갔다. ​ 들리지 않을 때까지 들리는 물소리. 강물은 흘러 훌훌-​ 밤을 벗어나고, 제 꿈에 발이 묶여 내리지 못했을까.-​ 그칠 수 없이 날개를 치며, 다시 떠나가는 우리들.-​ 땅이 되고 싶다. 어디쯤일까? 물길을 거슬러 스스로를 거슬러,-​ 흐르는 샘이 되어 서로 부르며, 또 무엇을 거슬러-​ 어디쯤에서, 우리는 서로의 땅이 되어 있을까?-​ ​ 새. 새.​ 허공에..

<송수권> 부두로 가는 길목에서

부두로 가는 길목에서 - 송수권(宋秀權) - 꽃게같은 잔등을 내리어 오늘도 나는 부두로 간다 밟으면 독사 등어리처럼 꾸물거리는 뱀장어처럼 꼬리는 바다로 묻혀있는 簡易店鋪 유리窓마다 비릿한 바람이 떨어지는 귀틀집 窓을 넘어다보는 人形의 눈꺼풀 속으로도 물결은 들어와 길게 찰랑이는 그 눈썹 위에서도 갈매기가 원을 긋는 부두로 가는 길 그 길 위에서 나는 오늘도 너를 생각한다 빨간 여권을 펼쳐 든 外港에는 캐나다의 船舶이 우리들의 항구를 압박하고 있다 트로이의 木馬같은 입을 벌린 기중기가 原木을 토해내고 있다 통나무들은 항구의 길을 넘치고 어깨가 좁아 돌아서는 행인들 그 발길에 까지 통나무들은 더 길을 메워서 우리들의 항구는 더욱 비탈지고 더욱 어두워져서 바다로 기울어진다 통나무를 보면 조국이여 너의 팔다리가..

<송수권> 山門에 기대어

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宋秀權) - 누이야 가을 山 그리매에 빠진 눈썹 두오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江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 깊이 가라앉은 苦腦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 같이​ 살아서 오던 것을​ 그리고 山茶花 한 가지 꺽어 스스럼 없이​ 건네이던 것을, ​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 山 그리매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盞은 마시고 한 盞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 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 누이야 아는가 가을 山 그리매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낱이​ 지금 이 못불 속에 비쳐옴을. /..

<파스칼> 인간은 한 개의 갈대

인간은 한 개의 갈대 -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팡세』에서... - 인간은 한개의 갈대 밖에 되지 않는다. 자연 중에서 가장 약한 자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분쇄하는 데는 전우주를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 줄기의 증기, 한 방울의 물을 가지고도 넉넉히 그를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분쇄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자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과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주는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사고 속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자기를 높여야 한다. 자기를 높이는 것은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이나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잘..

<이하(李賀)> 詩 단편과 生涯

이하(李賀)의 시 - 이병주(李炳注, 1921~1992)作 『바람과 구름과 비』에서... - 危邦不居위방불거라 했지만 이미 몸은 危邦위방에 있다. 亂邦不入란방불입이라 했지만 이미 몸은 亂邦란방에 들어왔다.​ 성현의 지혜도 땅과 때에 어긋나면​ 철벽 앞의 筍矢순시와 다를 바가 없으니​ 차라리 魂혼이나마 銀河은하를 날게 해서​ 언젠가 流星유성과 더불어 몰락했으면 한다. 神絃曲(신현곡) - 이하(李賀, 당나라 790년~816년) - 西山日沒東山昏 (서산일몰동산혼) 서산에 해 지고 동산에 어둠 깔리자 旋風吹馬馬踏雲 (선풍취마마답운) 회오리바람 말에 불어 말이 구름밝고 날아온다. 畵絃素管聲淺繁 (화현소관성천번) 그림 속 비파와 퉁소소리 얕은 듯 깔리다가 뒤섞이고 花裙綷綵步秋塵 (화군최채보추진) 꽃 치마 오색 비단..

<김영애> 詩란? / 창(窓) / 가을 / 겨울 숲 / 수색(搜索) / 삼림욕

詩, 그 이름 앞에서 - 2002.10.28 / 김영애 - 발칙한 아름다움이여! 그대의 마음을 재고있는 이 어리석음을 보아다오. 참혹의 시간을 달려 그대 앞에 당도 하였음을. ​ 詩, 그 이름 앞에서. ​ 詩에게 2 - 2002.10.28 / 김영애 - 너무 익어서 농익은 것들 그래서 썩는 것들 뼈와 살을 파고 드는 것들 지식을 불모로 우뚝 솟은 자들이 열매맺은 것들 세상쪽으로 그 몫 돌려 주기 못내 아쉽고 두려워 은폐하는 것들, 썩는구나. 썩어. 지독한 욕심과 위선들이 썩는구나 詩라는 명분을 끌어와 애써 발효라고 이름지으며 하얗게 먼발치에서 웃는 그들의 심장 쪽에서 오랫동안 삭혀온 곰팡내가 풍겨 온다 이왕 썩어 문드러질 모양이면 거름이나 되어 지상의 가장 낮은 자, 마소의 목줄기나 축여줄 요량이지 까치..

<윤성의> 대숲에 서면 / 백제의 눈빛 / 개꿈 / 탐욕 / 몸무게를 달며

대숲에 서면 - 2004.01.06 / 윤성의 - 객적은 뱃살이 시덥잖아 보이던가​ 무에 그다지 채울 게 많더냐 고​ 가볍게 되도록 가볍게 비워보라 귀띔하네. ​ ​ 백제의 눈빛 1 - 2003.04.13 / 윤성의 - - 금동용봉봉래산향로 천 몇 백년 그 긴 잠 함묵의 굴속에서 망국 한 곰 삭혀온 금동 용봉봉래산향로 역사를 뛰어 넘어서 어둠 씻고 눈뜬다. ​ 누가 백제를 죽었다 말하는가​ 몸 비록 흩었어도 혼 불은 이었거니 긴 세월 잊혔던 불빛 오늘 다시 비치나니. ​ 왕조는 묻혔건만 그 얼은 되살아서​ 뜸직한 얼굴로 역사 앞에 나앉으며​ 억지에 눈감긴 세월 벗으라 눈짓한다. ​ ​​ 개꿈 - 2003.01.12 / 윤성의 - 나른한 오후 달디단 낮잠에 들다 ​ 한적한 시골 마을, 초가 지붕 위에 박이..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생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김종삼(金宗三) -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 서울역 앞을 걸었다. ​ 저물 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 그런 사람들이 ​ 엄청난 고생되어도 ​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 그런 사람들이 ​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 고귀한 인류이고 ​ 영원한 광명이고 ​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 生日생일 - 김종삼(金宗三) - 꿈에서 본 몇 집 밖에 안되는 화사한 小邑소읍을 지나면서 ​ 아름드리 나무보다도 큰 독수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 來日내일에 나를 만날 수 없는 ​ 未來미래를 갔다. ​ ​ 소리없이 출렁이는 ..

<이수익> 우울한 샹송

우울한 샹송 - 이수익(李秀翼) -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되어 젖어있는 悲哀비애를 지금은 昏迷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衣裳의상으로 돌아올까 ​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 사람들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愛情애정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 幸福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질 못하고, ​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 하면, 그때 나는 어떤 미..

<한정찬> 시를어떻게쓰느냐고묻는다면...

시를 어떻게 쓰느냐고 묻는다면 - 1991. 6. 20. 한정찬 제2시집 불꿈(도서출판 민훈당) 자서에서 - 시를 어떻게 쓰느냐고 묻는다면 ​ 삶으로 얻어진 체험과 감정을 옮겨놓는 일이라고 ​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 흩어져 있는 눈먼 말들을 모아 ​ 졸작 시집을 내게 되는 일을 시도해 보지만 ​ 기쁨 보다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