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sr]들꽃세계

[스크랩] 다시 보는 동구릉신도비 탁본(건원릉 편)

이름없는풀뿌리 2013. 7. 17. 10:12

 

다시 보는 동구릉신도비 탁본
 
송영한
구리시가 보유하고 있는 동구릉 등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으로 등재 됐습니다.
 
이에 본사는 20만 구리시민과 함께  축하하는 마음으로 지난해 구리문화원이 전시 했던 동구릉 신도비에 전시했던 신도비 탁본을 다시 살펴보는 시간을갖습니다. 
 
 
<수릉편>

▲능호:수릉 ▲묘호:문조익황제,신정익황후 조씨 ▲건립(1902년)▲ 규격:980mmX2185mm   © 구리넷

▲문조익황제 수릉
 문조익황제를 소자(고종)가 왕위에 오른지 27년째인 경인(1890,고종27)년에 존호를「치중달화계력협기」로 추상하고, 임진(1892,고종29)년에 존호「광수경목준혜연지」로 추상, 광무 3년 기해(1899)년 11월에 시호를『익황제』,묘호를『문조』로 추존하고 임인(1902,광무6)년에 존호를「광유신휘수서우복」이라고 추상하였다.
 신정익황후 조씨는 소자(고종)가 왕위에 오른지 27년째인 경인(1890,고종27)년에 존호를「의모」로 추상하고. 임진(1892,고종29)년에 존호를「예헌돈장」에 추상, 광무 3년 기해(1899)년 11월에 시호를『익황후』라고 받들어 올리고 임인(1902,광무6)년에 존호를「계지」라고 추상하였다.
 소자는 공손히 글을 짓고 써서 돌로 표시하고 세우고,지금 또 원표 아래에 앞면과 추기를 받들어 써서 돌을 세우고 소자의 작은 정성을 펼치노라.
 광무 6(1902,고종39)년  월  일(고종이 대한제국황제에 등극해 익종의 시호를 문조익황제로 추존해 올린 비문:편집자 주)   © 구리넷

▲능호:수릉 ▲묘호: 익종 ,  신정왕후 조씨  ▲건립:1890년 ▲규격 1075mmX2140mm  © 구리넷

▲익종대왕은 숭정 기원후 182년 기사(1809,순조9)년8월 9일에 탄생하시어 임신(1812,순조12)년 왕세자로 책봉되고, 정축(1817,순조17)년에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고, 정해(1827,순조27)년에 청정하다 경인(1830,순조30)년 5월 6일 승하하시어 8월 4일 양주 천장산 서쪽 언덕에 예장하였다. 동궁으로 19년을 계셨으며 춘추 22세였고, 시호를『효명』, 묘호를『문조』, 묘를『연경』이라 하였다. 갑오(1834)년 헌종이 즉위하여 왕으로 추존,「돈문현무인의」로 시호를 올리고 묘호를『익종』으로 높이고 능을『수릉』이라고 봉했다. 병오(1846,헌종12)년 윤5월 20일 양주 용마봉 아래 북동북쪽 언덕으로 천봉하고,무신(1848,헌종14)년에 존호를「채원찬화석극정명」으로 추상,철종 계축(1853,철종4)년에「성현영철예성연경」으로 존호를 추상하고, 을묘(1855,철종6)년 8월 26일 건원릉 왼쪽 북서북 방향 언덕으로 천봉하였다.    소자(고종)가 왕위에 오른지 3년째인 병인(1866,고종3)년에 존호를「융덕숭공독휴홍공」으로 추상하고,정묘(1867,고종4)년에「홍운성렬선광준상」,기사(1869,고종6)년에 존호를「요흠순공우근탕정」으로 추상, 을해(1875,고종12)년에 세실을 정하고 존호를「계천건통신훈숙모」라고 추상하였다. 정축(1877,고종14)년에「건대곤후광업영조」,기묘(1879,고종16)년에「장의창륜행건배녕」,계미(1883,고종20)년에「기태수유희범창희」,정해(1887,고종24)년에 존호를「입경형조성현소장」이라고 추상하였다.
 비 신정왕후 조씨는 숭정 기원후 181년 무진(1808,순조8)년 12월 6일 탄생하시어 기묘(1879,고종16)년에『세자빈』으로 책봉되고,갑오(1834)년에 헌종이 즉위하면서『왕대비』로 올려 지고 철종 정사(1857,철종8)년에『대왕대비』로 올려 불렀다. 계해(1863)년에 소자(고종)가 왕위에 오르니 수렴청정을 하다가 병인(1866,고종3)년에 특명으로 철회하였다. 경인(1890,고종27)년 4월 17일 승하하시니 8월 13일『수릉』의 같은 봉분에 부장하고 춘추 83세.
 오호라! 소자가 앞면과 음기를 피눈물을 흘리면서 받들어 지으며 쓰다.
 숭정기원후263(1890)년  월   일(흥선대원군의 들째 아들 고종은 익종(효명세자)의 양자로 입적해 철종의 보위를 이었다. 편집자 주)      © 구리넷


<경릉편>
▲ 묘호:헌종성황제▲ 효현성황후 김씨 ▲ 효정성황후 홍씨 ▲ 건립:융희 4(1908년) ▲ 규격:635mmX 1805mm  © 구리넷

▲헌종성황제는 1827(순조27)년 7월 18일 탄생하시어 1830(순조30)년 9월 왕세손으로 책봉되시고 1834년 11월 즉위하셨다. 1849년 6월6일 승하하여 같은 해 10월 28일 양주 건원릉 서강 서쪽 언덕에 장례를 치뤘다. 재위 15년이며 춘추 23세.융희2(1908)년 7월 성황제로 추존.
 후 효현성황후 김씨는 1828(순조28)년 3월 14일 탄생하시어 1837(헌종3)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1834(헌종9)년 8월 25일에 승하하시어 같은 해 12월 2일 왕과 같은 언덕에 다른 봉분(동원이봉)으로 장례.춘추16세.융희2(1908)년 7월 성황후로 추존.
 계후 효정성황후 홍씨는 1831(순조31)년 정월 22일 탄생하시어 1844(헌종10)년 왕비로 책봉되고 1849년 철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면서 대비로 올려지고 1857(철종8)년에 왕대비, 광무원(1897)년에 명헌태후로 올려 졌다가 1903(광무7)년 11월 15일 승하하시어 1904(광무8)년 정월 29일 왕과 같은 언덕에 다른 봉분(동원이봉)으로 장례. 춘추73세.융희2(1908)년 7월 성황후로 추존.     © 구리넷

 
<원릉편>
▲능호:원릉 ▲묘호:영조 ▲건립:1890년 ▲규격:670mmX1735mm      © 구리넷

▲「영조지행순덕열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효명순철걸건곤영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원릉표를 정조(어필)가 친히 써서 돌을 세웠다.
 1782(정조6)년 정조가 세실을 정하고, 1784(정조8)년에「배명수통경력홍휴」로 존호하고, 1890(고종27)년 묘호를 영조로 고쳐 올리고,시호도「정문선무희경현호」로 올리고, 또 다시「중화융도숙장창훈」이라 하고 원표석 옆에 받들어 오른편에 추가로 기록하였다. © 구리넷

▲능호:원릉▲ 묘호:정순왕후 김씨 ▲건립:1805년 ▲규격:635mmX1700mm     © 구리넷

▲정순왕후 김씨는 영종대왕의 계비로 영종21(1745)년 11월 10일 탄생하시어 영종35(1759)년 왕비로 책봉, 1776(정조즉위)년에 왕대비로 올려지고 1800(순조즉위)년에 대왕대비로 수렴청정을 3년간 하시다가 1803(순조3)년 특명으로 수렴을 철회하였다. 1805(순조5)년 정월 12일 승하하시어 같은 해 6월 20일 원릉 좌측 같은 언덕에 다른 봉분(동원이봉)으로 장례를 치뤘다. 춘추 61세. © 구리넷

 
▲능호:원릉 ▲묘호:영종 ▲건립 1776년 ▲규격:640mmX1660mm    © 구리넷

▲영종대왕은 숭정기원후 67(1694,숙종20)년 9월 13일 탄생하여 1699(숙종25)년 연잉군으로 봉했다가 다시 1721(경종1)년 왕세제로 책봉되고, 1724년 8월에 즉위하였다. 1776년 3월 초5일 승하하시어 같은 해 7월 22일 양주 건원릉 서쪽 제2강 북서향 언덕에 장례를 치뤘다. 재위 52년에 춘추 83세.     © 구리넷

 
<혜릉편>
 

▲능호:혜릉 ▲묘호:단의왕후심씨 ▲1747년 건립 ▲비신규격 615mmX1575mm        © 구리넷
▲혜릉(제20대 경종 원비 단의왕후 심씨) 단의왕후 심씨는 경종대왕의 원비(장희빈의 며느리)로서 1686(숙종12)년 5월 21일 탄생하시어 1696(숙종22)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718(숙종44)년 2월 7일에 승하하시어 같은 해 4월 19일 양주 숭릉 좌강 서향 언덕에 장례. 춘추 33세. 1720(경종즉위)년 왕비로 추봉.   © 구리넷
<현릉편>
 
▲능호:숭릉 ▲묘호:현종, 비 명성황후 김씨 ▲비신규격:600mmX1580mm   © 구리넷
▲숭릉(제18대 현종․비 명성왕후 김씨)
  현종대왕은 숭정14(1641,인조19)년 2월 4일 탄생하시어 1659년 즉위하셨다 1674년 8월 18일에 승하하시어 같은 해 12월 13일 양주 건원릉 서남쪽 별강 서향 언덕에 장례를 치르고, 재위 15년이며 춘추 34세.조선시대 왕 중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않은 왕으로 숙종의 아버지이다. 
▲비 명성왕후 김씨는 1642(인조20)년 5월 17일 탄생하시어 1651(효종2)년 세자빈으로 책봉하고, 1659(현종즉위)년 왕비로 진봉되었다. 1683(숙종9)년 12월 5일 승하하시어 이듬 해 4월 5일 장례. 춘추 42세. © 구리넷

 
<휘릉편>
▲능호:휘릉 ▲묘호:장렬왕후 조씨 ▲건립:1747년 ▲비신규격:600mmx1570mm   © 구리넷
▲휘릉(제16대 인조계비 장렬왕후)
  장렬왕후 조씨는 인조대왕의 계비로 천계4(1624,인조2)년 11월 7일 탄생하시어 숭정11(1638,인조16)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슬하에 손을 두지 못했다. 1688(숙종14)년 8월 26일에 승하하시어 같은 해 12월 16일 양주 건원릉 서강 서쪽 언덕에 장례를 치뤘다. 춘추 65세. © 구리넷

 
<목릉 편>

 
▲능호:목릉 ▲ 묘호 :선조, 의인왕후 박씨, 인목왕후 김씨 ▲ 건립년도: 1747년 ▲ 규격: 710mmX1,750 ▲ 선조대왕은 조선조에서 처음으로 방계승통을 한 임금이다. 학구적이고 진취적인 인품에도 불구하고 방계라는 컴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말년에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미련을 두다가 광해군 치세에 반정의 빌미를 제공해 조선 중기에 청나라와 두 번의 전쟁을 치르게 된 원인이 됐다.  또다른 율곡이나 충무공 등을 처음에 중용했다가 내친 것도 줏대 없는 임금이라는 평을 받는 대목이다. 7년전쟁(임진왜란)을 미리 막지 못해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한 편에서는 국난을 잘 그복하고 학문을 장려했다는 치세를 인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 송영한  

▲ 목릉(제14대 선조․비 의인왕후 박씨․계비 인목왕후 김씨) 
 선조대왕은 가정31(1552, 명종7)년 11월 11일 탄생하시어 융경원(1567, 명종 22)년에 즉위하셨다. 만력36(1608, 선조41)년 2월 삭일에 승하하시어 같은 해 6월 양주 건원릉 서강에 장례를 치르고, 숭정3(1630, 인조8)년에 건원릉 제2강 북쪽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재위41년에 춘추 57세. 시호는『소경』. 
▲ 비 의인왕후 박씨는 가정34(1555, 명종10)년 4월 15일 탄생하시어 융경3(1569, 선조3)년 왕비로 책봉. 만력28(1600, 선조33)년 6월 27일 승하하시어 같은 해 12월 22일 대왕릉 중강 북쪽 언덕에 장례. 춘추 46세. 
▲계비 인목왕후 김씨는 만력12(1584,선조17)년 11월 14일 탄생하시어 1602(선조35)년 왕비로 책봉. 숭정5(1632,인조10)년 6월 28일에 승하하시어 같은 해 10월 6일 대왕릉 좌강 동쪽 언덕에 장례.춘추 49세.      © 송영한

<현릉 편>
 
▲능호:현릉 ▲묘호:문종  현덕왕후 권씨 ▲건립:숭정기원 후128(1755년) ▲비신규격:570mm X1,280mm  ▲문종대왕은 세종대왕의 큰  아들로 비록 제위 기간은 짧았지만 일찍부터 아버지 세종을 도와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살펴보면  세종말기의 치적은 거의 대리청정했던 문종의 치적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성리학은 물론 과학기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장영실 등과 함께 여러가지 발명품을 제작하기도 했다고 전 한다.  문종의 아들 단종을 죽이고 보위에 오른 수양대군(세조)은 문종의 동생이다. © 송영한

 
▲ 현릉(제5대 문종․현덕왕후 권씨)
  명나라 영락12(1414,태종12)년 10월 3일 탄생하시어 1421(세종3)년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경태 원(1450)년 2월에 즉위하여 1452년 5월 14일에 승하하시어  같은 해 9월 삭일 양주 건원릉 동강 북동쪽 언덕에 장례를 치뤘다.    재위 2년에 춘추 39세.  명나라 황제가『공순』이란 시호를 내림.  
비 현덕왕후 권씨는 영락16(1418,세종즉위)년 3월 12일 탄생하시어 선덕6(1431,세종13)년에 초봉을「승휘」로 하였다가「양원」으로 진봉하고, 정통2(1437,세종19)년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441(세종23)년 7월 24일에 승하하시어 같은 해 9월 안산에 장례를 치르고. 경태 원(1450,문종즉위)년에 왕후로 추책하고 능호를『소』라 하였다. 정덕8(1513,중종8)년 4월 21일에 대왕릉 좌강 동북향 언덕으로 이장. 춘추 24세.  © 송영한

<건원릉 편>
 

▲ 신도비명 병서 (神道碑銘 幷序)


하늘이 덕이 있는 사람을 생각하여 다스리는 운수(運數)를 열어 주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특이한 징조(徵兆)를 나타내 그의 부명(符命 : 하늘에서 임금이 될 만한 사람에게 주는 상서로운 징조)을 보여 주는데, 하(夏)나라에서는 현규(玄圭)를 준 일이 있었고, 주(周)나라에서는 협복지몽(協卜之夢)이 있었다. 한(漢)나라를 거쳐서 그 이후로 어느 왕조(王朝)에서나 각각 다 이러한 징조가 있었는데,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준 것이지 사람의 모책(謀策)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태조대왕(太祖大王)은 용연(龍淵)에 계실 때부터 공훈(功勳)과 덕(德)이 이미 높았고, 부명(符命)도 또한 현저(顯著)하였다.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 ; 금으로 만든 자)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이를 대왕에게 주며 말하기를
“공(公)은 마땅히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로 잡으시오.”
하나라의 현규와 주나라의 꿈과 더불어 같은 부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이인(異人)이 문(門)에 와서 글을 올리며 말하였다.
“지리산(智異山)의 바위 사이에서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금척에 적힌 글에는 “나무 아들이 삼한(三韓)을 고쳐 바로 잡는다 [木子更正三韓]”라고 쓰여 있었고, 곧 바로 사람을 시켜 나가 맞이하려 했으나 글을 갖고 온 자는 이미 가고 없었다. 서운관(書雲觀)에는 예전부터 소장(所藏)하여 내려 오는 ≪비기≫ (秘記 : 예언서)의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 : 아홉번 변하는 진단의 그림]에 건목득자[建木得子 :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음]라는 말이 있다.
������조선������을 「震檀」 이라고 하는 설이 수 천년 동안 내려 왔는데 오늘에야 비로서 특별히 증험(證驗)되었다. 하늘이 유덕(有德)한 이를 믿고 생각하여 돕는다 함은 진실로 징험(徵驗)이 있는 것이다.
신(臣)이 삼가 ≪선원계보(璿源系譜)≫를 상고(詳考)하여 보건대, 이씨는 전주(全州)의 망족(望族)이다. 사공(司空)은 휘(諱)가 한(翰)인데 신라(新羅)에서 벼슬하였고, 신라 종성(宗姓 ; 王室의 姓)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6세손(世孫) 긍휴(兢休)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였고, 13세(世)까지 이르렀다.
태조대왕의 고조(高祖)인 목왕(穆王)은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을 하였고, 4세(世)까지 걸쳐 내려 오면서 벼슬을 하였는데 모두 다 능히 잘하였다.
원나라의 정치가 쇠퇴(衰退)하게 되자, 황고(皇考) 환왕(桓王)은 우리나라에 돌아와 고려 공민왕(恭愍王)을 섬겼다. 지정(至正) 신축(辛丑 ; 1361)년에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와 왕경(王京)을 함락(陷落)할 즈음, 공민왕이 남쪽으로 몽진(蒙塵)하고, 태조께서 군사를 보내어 싸워 이겨서 수복(收復)하고 맨 먼저 승첩(勝捷)의 보고를 올렸다.
다음 해 임인(壬寅 ; 1362) <高麗 恭愍王11> 년에는 오랑캐 나하추(納哈出)를 쳐서 달아나게 하였고, 또 그 다음 해 계묘(癸卯 ; 1363)년에는 위왕(僞王) 터치물(塔哈木)을 물리쳤다.
이에 공민왕이 더욱 믿고 의지(依支)함이 두터워지면서, 여러 번 벼슬이 올라가 장상(將相)에 이르러 조정의 안팎을 드나들었다.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보고 힘써 노력(努力)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세상을 구제(救濟)할 도량(度量)과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은 지성(至誠)에서 나왔다.
공민왕이 죽고 다른 성씨(姓氏)가 왕위(王位)를 절취(竊取)하고 권력(權力)있는 간신(姦臣)들이 국정(國政)을 멋대로 휘두르며 나라의 정치(政治)를 어지럽게 하는 와중에 바다의 도적(海寇)들이 나라안에 깊숙이 들어와 군․현(郡․縣)에 불지르고 약탈(掠奪)하였다.
홍무(洪武) 경신(庚申 ; 1380) <高麗 禑王6> 년에 우리 태조가 운봉(雲峰)에서 싸워 이김에 동남쪽 지방이 편안(便安)하게 되었다.
무진(戊辰 ; 1388)년에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권간(權奸)들의 목을 베며 지나치게 참혹(慘酷)하게 할 때, 우리 태조에게 의지하여 목숨을 보전(保全)한 사람이 많았다.
최영이 태조를 시중으로 하고, 이어서 우군도통(右軍都統)의 절월(節鉞)을 준 다음에 억지로 요(遼)나라를 공격(攻擊)하게 하였다. 군사(軍士)가 위화도(威化島)에 머무르고 있을 때, 앞장서서 여러 장수(將帥)들을 거느리고 바른 도리(道理)를 지켜 깃발을 되돌렸다.
군사들이 언덕에 올라감에 맞춰서 큰 물이 섬을 삼켜 버림으로 모두가 신기(神奇)하게 여겼다. 최영을 조정에서 물러나게 하고, 후임(後任)에 유명한 유학자(儒學者) 이색(李穡)을 좌시중(左侍中)으로 삼았다.
바로 이 때에 권간들은 국정을 탁란(濁亂)하게 하고, 광패(狂悖)한 자들이 서로 모함(謀陷)을 꾸며서 위망(危亡)의 형세(形勢)가 급급(急急)하여 화란(禍亂)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우리 태조의 전이(轉移)하는 힘이 아니면 온 나라가 위태(危殆)롭게 되었다.
이에 이색이 “이제 공(公)이 의로운 일을 거사(擧事)하여 중국(中國)을 높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집정자(執政者)가 친히 입조(入朝)하지 않고서는 안됩니다.” 라고 말했다.
이윽고 날짜를 정하여 명나라 서울에 갈 준비를 하였다.
태조는 여러 아들 중에서 우리 주상(主上 ; 太宗)전하를 이색과 함께 중국에 보내 고황제(高皇帝 ; 明洪武帝)에게 조알(朝謁)하자 고황제께서 칭찬(稱讚)하시고 나서 돌려보냈다.
기해(己亥 ; 1389)년 가을 황제가 우리나라에서 다른 성씨를 왕으로 삼은 것을 문책(問責)하였다. 태조가 여러 장군(將軍) 및 재상(宰相)들과 함께 왕씨(王氏)의 종친(宗親)인 정창군(定昌君 ; 瑤)을 임금으로 세우고 정성을 다해 정사(政事)를 보살피었다.
사전제도(私田制度)를 폐지하고 쓸데없는 관원들을 도태(淘汰)시키자 백성들은 매우 기뻐하는 마음이었으나, 태조의 공(功)이 높아짐에 따라 시기(猜忌)하는 무리가 생기며 참소(讒訴)와 간악(奸惡)한 모함(謀陷)과 무고(誣告)가 잇달아 꾸며짐에 정창군까지도 자못 의심(疑心)하였다.
태조는 벼슬도 성만(盛滿)하였으므로 노퇴(老退)하겠다고 임금에게 요청하였지만 허락(許諾)을 받지 못했다. 그 때 마침 태조가 서행(西行)하였다가 병으로 귀경(歸京)했는데, 모함(謀陷)하는 자들의 음모(陰謀)의 기세(氣勢)가 더했다.
그러나 임금께서 변고(變故)를 억제(抑制)하고 갖은 모함을 와해(瓦解)시키는 등 적절(適切)하게 처리(處理)하였다. 홍무(洪武) 임신(壬申 ; 1392)년 가을 7월 16일 왕이 대신(大臣)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등 52명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推戴)하자 신료(臣僚)와 부로(父老)들이 미리 의론(議論)함이 없었는데도 이에 뜻을 모두 같이 하였다.
태조께서 이 사실(事實)을 듣고 놀라 일어나 세 번을 굳이 사양(辭讓)하다가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왕위(王位)에 올랐는데, 마루의 섬돌조차 내려오지 않은 채 한 나라가 스스로 이루어졌다. 이는 하늘이 도운 바가 아니고서야 어느 누가 감히 이와 같이 할 수가 있겠는가?
즉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신(臣) 조반(趙胖)을 명(明)나라에 보내 황제에게 알리자 이에 조서(詔書)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이미 이씨(李氏)를 높히었으며, 병화(病禍)가 없고 사람마다 제각기 하늘이 주는 즐거움에 만족(滿足)하고 있음은 바로 상제(上帝)의 명(命)이라 보오” 하고, 또 “나라 이름을 무엇으로 하려 하오?” 하고 물었다.
이에 예문관 학사(藝文舘 學士) 신(臣) 한상질(韓尙質)을 즉시 보내서 주청(奏請)하자, 황제가 조서(詔書)내리기를,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이 아름다우니, 이에 근본(根本)하여서 이름을 지음이 좋겠소.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 길이 후대(後代) 자손(子孫)까지 창성(昌盛)하게 이르도록 하시오.”하였다.
태조의 위엄(威嚴)과 명성(名聲)과 의로움과 열렬(熱烈)함이 위에까지 들려 황제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청명(請命)하여 윤허(允許)를 얻게 되었으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태조3(甲戌 ; 1394)년 여름에 우리나라 백성 중에 중국 황제에게 무고(誣告)한 자가 있어 황제가 왕의 친아들을 입조(入朝)시키라 하였다.
태조는 지금의 우리 전하가《경서(經書)》에 능통(能通)하고 사리(事理)에 밝아 여러 아드님들 중에서 제일 현명(賢明)하다고 하여 즉시 보냈다.
도착(到着)하여 진술(陳述)하는 의견(意見)이 황제(皇帝)의 뜻에 맞으므로 예(禮)로써 우대(優待)를 받고 돌아와 그 해 겨울 11월 한양(漢陽)에 수도(首都)를 정하고, 궁궐(宮闕)을 짓고 종묘(宗廟)를 세웠다.
4대(四代)를 추존(追尊)하여 황고조(皇高祖)를 목왕(穆王)으로 배위(配位) 이(李)씨를 효비(孝妃)라 하고, 황증조(皇曾祖)를 익왕(翼王) 배위 최(崔)씨를 정비(貞妃)라고 하였으며, 황조(皇祖)를 탁왕(度王) 배위 박(朴)씨를 경비(敬妃)라 하고, 황고(皇考)를 환왕(桓王) 배위 최(崔)씨를 의비(懿妃)라고 하였다. 예악(禮樂)을 닦고, 제사(祭祀)를 삼가 받들며, 관복(官服)의 제도를 정하여 위의(威儀)의 등차(等差)를 구분하고, 배움(學校)을 일으켜 재주 있는 자를 육성(育成)하며, 봉록(俸祿)을 후(厚)하게 하여 선비들을 권장(勸獎)하였고, 소송(訴訟)을 밝게 분별(分別)하여 바르게 판결(判決)하며, 수령(守令)을 뽑는데 신중(愼重)하게 하고, 좋지 못한 정치(政治)는 모두 고치게 하는 등 여러 가지 공적(功績)이 밝게 빛났다.
바다의 도적(海寇)들이 와서 복종(服從)하고, 주변(周邊)을 비롯한 나라 안은 편안하게 되었다.
우리 태조의 높은 성덕(盛德)은 정말 하늘이 주신 용기(勇氣)와 지혜(智慧)이며, 총명하고 신무(神武)하고 영웅(英雄)스럽고 위대(偉大)한 임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간신(姦臣) 정도전(鄭道傳)이 표전(表箋)(表辭獲譴)때문에 황제의 조정에 견책(譴責)을 받게 되자,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려고 음모(陰謀)하여 무인(戊寅 ; 1398)년 가을 8월에 우리 태조가 병중인 틈을 타서 어린 얼자(孽子)와 함께 자기의 뜻을 제멋대로 펴보려고 하였다.
전하가 그 기미(機微)를 밝게 살피어 이들을 남김없이 제거하고, 적장자(嫡長子)인 지금의 상왕(上王)을 세자(世子)로 세울 것을 요청하였다.
9월 정축(丁丑)일에 태조가 병(病)이 낫지 아니하므로 지금의 상왕(上王 ; 定宗)에게 선위(禪位)하였다. 상왕은 후사(後嗣)가 없고, 또 나라를 열고 사직(社稷)을 정한 것은 모두 우리 전하의 공적(功績)이므로 전하를 세자(世子)로 책립(冊立)하였다.
경진(庚辰 ; 1400)년 가을 7월 기사(己巳)일에 「계운신무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 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렸다.
겨울 11월 계유(癸酉)일에는 상왕도 또한 질환(疾患) 때문에 우리 전하에게 선위하고 전하는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어 명(命)을 청하자, 영락(永樂) 원(1403)년 여름 4월에 황제가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어, 황제인(皇帝印)이 찍힌 조서를 받들고 와서 우리 전하를 책봉(冊封)하여 국왕(國王)으로 하였다.
이어 한림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 등이 우리나라에 와서 전하를 봉양하고, 양궁(兩宮 ; 上王과 太上王)에게 정성(精誠)과 공경(恭敬)함을 극진히 하였으나 영락(永樂) 무자(戊子 ; 1408)년 5월 24일(壬申)에 태조가 안가(晏駕 ; 昇遐)하셨다.
이 때 춘추가 74세였고, 재위 기간은 7년이고, 노쇠(老衰)하여 정사(政事)를 보지 아니한 지가 11년이었다. 활과 칼을 갑자기 버리시니[忽遺 : 갑자기 승하함] 아, 슬프다.
우리 전하께서는 애모(哀慕)함이 망극(罔極)하여, 거상(居喪)에 예(禮)를 극진(極盡)히 하였다.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태조에게 「지인계운신무대왕(至仁啓運神武大王)」 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이 해 9월 초9일 갑인(甲寅)에 도성(都城)동쪽 양주(楊州)고을에 속한 땅인 검암산(儉巖山)에 장례(葬禮)를 모셨는데, 능호(陵號)를 ������건원(健元)������ 이라 하였다.
부고(訃告)를 듣자, 명(明)나라 황제도 매우 슬퍼하여 정무(政務)를 중지하고, 즉시 예부낭중(禮部郎中) 임관(林觀) 등을 파견(派遣)하여 대뢰(大牢 : 나라의 제사에 소를 통채로 바치는 제사)로서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제문(祭文)은 대략 이러하다.
“왕은 밝고 통달(通達)하고 선(善)을 좋아하였는데, 이는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며, 공경(恭敬)하여 천도(天道)에 순종(順從)하고, 근신(謹愼)하는 마음으로 사대(事大)하였으며, 한 방면(方面)의 백성들을 보휼(補恤)함에 우리 황고[皇考 : 돌아가신 아버지]의 깊은 충성을 가상(嘉尙)하게 여기시어 다시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 이라고 내리셨다.
왕의 공덕(功德)이 드러남은 비록 고대 조선의 어진 임금일지라도 더 나을 수 없다.”
또 고명(誥命)을 내려 시호(諡號)를 「강헌(康獻)」 이라 하고, 전하에게 조칙(詔勅)을 내리고 부의(賻儀)를 내림에 있어 특별(特別)히 후(厚)하게 하니, 남달리 총애(寵愛)하는 은전(恩典)은 더할 수 없이 갖추어져서 유감(遺憾)됨이 없었다.
우리 태조가 하늘을 경외(敬畏)하는 정성과 전하의 뜻을 잇는 효도(孝道)가 전후(前後)를 서로 이어져서 하늘의 뜻을 잘 누렸으므로, 종시(終始 ; 麗末鮮初)의 즈음에 크게 하늘과 사람이 위와 아래에서 돕는 일이 이처럼 지극(至極)함을 얻었다.
오호성재(嗚呼盛哉)라! 
수비(首妃) 한씨(韓氏 ; 神懿王后)는 안변세가(安邊世家)인 증 영문하부사(贈 領門下府事)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휘(諱) 경(卿)의 딸로 태어나 왕보다 먼저 승하(昇遐)하시어 「절비(節妃)」 라고 시호(諡號)를 올리고, 나중에 「승인순성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 라고 다시 시호를 올렸다. 소생으로 6남 2녀를 두었다.
상왕(上王-定宗 ; 芳果-永安大君)께서는 둘째 아들이며, 전하(殿下-太宗 ; 芳遠-靖安大君)는 다섯째 아들이다. 첫째 아들 방우(芳雨 ; 鎭安君)는 먼저 돌아 가셨고, 셋째 아들 방의(芳毅 ; 益安大君)도 역시 먼저 돌아 갔으며, 넷째 아들 방간(芳幹 ; 懷安大君)과 여섯째 아들 방연(芳衍)은 등과(登科)는 했으나 녹(祿)을 받지 않고 증 원윤(贈 元尹)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첫째 딸은 경신궁주(慶愼宮主)로 상당군(上黨君 ; 李佇)에게 출가(出嫁)했는데 같은 이씨(李氏)가 아니고, 둘째 딸 경선궁주(慶善宮主)는 청원군(靑原君 ; 沈淙)에게 출가하였다.
둘째 왕비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윤성(允成)의 딸로서 초봉(初封)은 「현비(顯妃)」 로 왕보다 먼저 승하하였으며 「신덕왕후(神德王后)」 라고 시호를 올렸다.
소생으로 2남 1녀가 있는데 첫째 아들은 방번(芳蕃)으로 공순군(恭順君)에 증직(贈職)되고, 둘째 아들은 방석(芳碩)으로 소탁군(昭悼君)에 증직되었다.
딸 경순궁주(慶順宮主)는 흥안군(興安君 ; 李濟)에게 출가했는데 역시 같은 이씨가 아니며, 2남 1녀 모두 일찍 죽었다.
상왕비(上王妃 ; 定安王后) 김씨는 왕대비(王大妃)에 봉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 천서(天瑞)의 딸로서 후사(後嗣)가 없다.
중궁(中宮) 정비(靜妃) 민씨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문도공(文度公) 휘 제(霽)의 딸로 4남 4녀를 낳았는데, 큰 아들은 세자(世子) 시(禔) 양녕대군(讓寧大君), 다음은 호(祜 ; 初名) 효령대군(孝寧大君 ; 補), 다음은 세종어휘(世宗御諱) 충령대군(忠寧大君 ; 祹), 다음은 어리다. 큰 딸 정순궁주(貞順宮主)는 청평군(淸平君 ; 李伯剛)에게 출가했는데 역시 같은 이씨가 아니고, 둘째 딸 경정궁주(慶貞宮主)는 평양군(平壤君 ; 趙大臨)에게 출가하고, 셋째 딸 경안궁주(慶安宮主)는 길창군(吉昌君 ; 權跬)에게 출가하고, 넷째 딸은 아직 어리다.
진안(太祖의 장남 ; 芳雨)은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과 결혼하여 2남을 두었는데, 큰 아들 복근(福根)은 봉녕군(奉寧君)으로 하고, 다음 덕근(德根)은 원윤(元尹)으로 있었다.
익안(태조의 3남 ; 芳毅)은 증 문하찬성사(贈 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석근(石根 ; 益平君)을 낳았다. 회안(태조의 4남 ; 芳幹)은 증 문하찬성사 민선(閔璿)의 딸과 결혼하여 맹종(孟宗 ; 義寧君)을 낳았다.
신(臣)은 역대(歷代) 천명(天命)을 받아 창업(創業)한 임금을 우러러 봄에, 덕과 사업의 성대(盛大)함과 부명(符命)의 신기(神氣)함이 사기(史記)에 빛나서 그 광채(光彩)의 흐름이 끝없어 보인다.
이제 우리 조선이 탄생(誕生)하여 일어남에 성대한 덕(德)과 큰 부명이 옛보다도 광채가 난다. 이에 마땅히 이미 그 왕위를 얻고 또 그 장수(長壽)를 얻은 것이며, 넓은 터전을 높게 하여 큰 복조(福祚)를 흘려 보냈기로 하늘과 땅과 더불어 장구(長久)하리라. 신(臣) 근(近)이 외람되게 비석(碑石)에 새기는 글을 지으라는 명령(命令)을 받았음에 정성을 다하여 성대(盛大)한 덕을 펴서 기술(記述)하여 밝은 빛을 후세에 빛나게 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신의 글재주가 비졸(鄙拙)하여 크고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선양(宣揚)하며 밝은 뜻을 만족하게 칭송(稱頌)하기에 부족하므로 다만 삼가 사람들의 귀와 눈에 남아 있는 공훈(功勳)과 덕택(德澤)만을 찬술(撰述)하고, 감히 손모아 절하며 머리를 조아려 명(銘)을 받드는데 그 글은 이렇다.
“하늘이 백성을 낳으시고 사목(司牧 ; 임금)을 세우고 길러서 키우며 다스리게 하실 때, 하늘이 돕고 또 돕고 명령은 혁혁(赫赫)하게 나타나 있어라.
하우(夏禹)씨는 현규(玄圭)를 주고, 주(周)나라 꿈은 협복(協卜)일세.
조선의 우리 왕업(王業) 터전 닦으실 때, 신인(神人)이 꿈 속에 나타나서 금척(金尺)을 주셨다.” 부록[符籙 ; 미래기(未來記)]이 먼저 정하사, 하늘 뜻 분명(分明)하네.
고려(高麗)의 운수(運數) 이미 끝나게 되었기에, 임금은 혼암(昏闇)하고 재상(宰相)은 혹독(酷毒)하여, 농절(農節)에 출병(出兵)시켜 큰 나라에 싸움을 걸었어라.
우리 태조께서는 의(義)를 지켜 가던 깃발 되돌림에, 죄인(罪人)들은 죄를 알고 복죄(伏罪)하여 벌 받았고, 충성(忠誠)이 위에까지 닿아서 황제 마음 기뻐했네.
천운(天運)은 돌아오고 민정(民情)은 절박(切迫)하여, 위대(偉大)한 왕업(王業) 이미 이룩하심에 저자거리의 상인(商人)들도 점포(店鋪)를 안 바꿨네.
명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찬탄(讚嘆)하여 이르기를 ‘그대 나라의 백성들은 병화(兵禍)없고, 하늘이 주는 기쁨을 계속 즐기는구나’ 하였다.
이어서 ‘조선’이란 옛 국호(國號) 다시 내렸네.
땅을 살펴 도읍(都邑)함에 한강(漢江)의 북쪽인데, 범이 웅크린 듯, 용이 도사린 듯, 왕기(王氣)가 쌓인 자리로구나.
궁궐(宮闕)은 높고, 종묘(宗廟)는 의젓하구나.
어진 마음 매우 깊어 살리기 좋아하며, 정치(政治)는 아름답고 생각은 화순(和順)하여, 백가지 제도(制度)는 잘 갖추어 닦아지고, 만가지 왕화(王化)는 흡족(洽足)하게 되었네.
근정(謹政)하시기에 지치셔서 맏아들에게 전하시고, 또 다시 공적(功績)많은 세자(世子)에게 양위(讓位)하였네. 밝고 밝은 우리 임금 조그마한 조짐(兆朕)있어도 반드시 살피어서 두 번 화란(禍亂)을 평정(平定)함에, 그 경사(慶事) 지극히 돈독(敦篤)하네.
개국(開國)하고 종사(宗社)한 것 모두 나의 공적인가, 대명(大命)을 어찌 사양(辭讓)하겠는가. 신성(神聖)한 큰그릇이 제대로 의탁(依託)되었으니, 양궁(上王과 太上王)을 정성껏 봉양(奉養)함이 참되고 공경(恭敬)하여 지극(至極)하여라.
효도(孝道)와 우애심(友愛心)이 신(神)에게 감통(感通)되어, 황제(皇帝)의 돌보심이 더욱 두터우네. 태상왕(太上王)의 상(喪)을 만나 근심에 잠긴 마음, 슬퍼하며 사모(思慕)하여 몸부림쳐 통곡(痛哭)하셨네.
황제(皇帝)가 부고(訃告) 듣고 매우 슬퍼하시며, 사자(使者)를 보내 조곡(弔哭)하고 대뢰(大牢)를 써서 제사(祭祀)하며, “부의(賻儀)를 넉넉하게 하라”고 칙명(勅命)을 내리고 시호(諡號)를 주어 칭찬하고, 조상(弔喪)하는 예법도 완전하게 갖추었네.
하늘의 도우심이 시종(始終) 변함 없어, 큰 복조(福祚) 길이 이어지고 자손은 천 억만명, 받들어 종사(宗社)함이 유원(悠遠)하고 장구(長久)하여 하늘과 더불어 망극(罔極)하리라.
숭정대부 길창군 집현전 대제학 신 권근 봉 교찬
崇政大夫 吉昌君 集賢殿 大提學 臣 權近 奉 敎撰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창녕부원군 신 성석린 봉 교서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 昌寧府院君 臣 成石璘 奉 敎書
자헌대부 지의정부사 신 정구 봉 교전
資憲大夫 知議政府事 臣 鄭矩 奉 敎篆


영락(永樂)7년 4월 일  립(立)

    



▲ 비음기 (碑陰記: 비석 뒷면에 새긴 글))
공손(恭遜)히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太祖)께서는 지극히 높은 덕과 위대한 공로(功勞)로 나라를 창업(創業)하시고, 또 다스리기에 매일 매일 힘을 쓰시더니 뜻하지 않게 병환(病患)이 위독(危篤)하시어 아드님에게 왕위(王位)를 물려 주시고 오래도록 정양(靜養)하시었으나 영락(永樂)무자(戊子 ; 1408)년 봄 정월에 들어서 환후(患候)가 다시 위중(危重)해 지셨다.
우리 전하(殿下 ; 太宗)께서는 지극한 성심(誠心)과 공경함을 다하여 쾌차(快差)하시도록 하늘에 기원(祈願)하여 잠시 차도(差度)가 있었으나 다섯달이 지나면서 다시 위중하시더니 드디어 정침(正寢)에서 훙서(薨逝)하시어 양주(楊州) 검암산(儉巖山)에 예장(禮葬)하였으니 이는 한양(漢陽)으로부터 20여리의 거리다.
이 산은 장백산(長白山)으로부터 시작하여 2,000여리를 꾸불꾸불 내려와 철령(鐵嶺)에 이르러 서쪽으로 꺽여서 수백리를 내려오다 우뚝 멈춰 선 곳이 백운산(白雲山)이고, 다시 남쪽으로 100여리를 이어지다가 북향(北向)하면서 남향(南向)을 한 곳이 검암산이며, 능의 위치는 계좌정향(癸坐丁向)이다.
능에서 곧바로 병방(丙方 ; 南南東) 421자(尺) 거리에 비석(碑石)를 세웠으며, 여기에 우리 태조의 공덕(功德)과 시종(始終)의 성덕(聖德)을 상세히 기록하는 바이다.
우리 전하(殿下 ; 太宗)께서는 개국공신(開國功臣)의 이름을 비석(碑石) 뒷면에 차례대로 새기게 하시고, 또한 정사공신(定社功臣)․좌명공신(佐命功臣)들도 태조께서 나라를 창업(創業)하시는데 중요한 시기마다 계책(計策)을 올려 큰 공헌(貢獻)을 한 사람들이므로 모두를 기틀에 따라서 함께 새겨 넣어 오래 보존하도록 신(臣) 계량(季良)에게 명하심에 이를 기록한다.
신(臣)은 생각하건대 하늘이 큰 덕망(德望)있는 사람을 보내시어 백성을 다스리게 하려면 반드시 고굉(股肱)과 같이 보필(輔弼)하는 신하가 있어 부지런히 임금의 측근(側近)에서 또는 앞에서 열어 주고 뒤에서 튼튼하게 지켜 준 후에야 비로소 큰 공적이 합쳐 모이고 오래도록 대업(大業)을 이룩할 수 있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일으키신데는 문무대신(文武大臣)들이 하늘이 명하신 바를 똑바로 알아 좌우(左右)에서 힘써 깨우쳐 드림으로서 가능하였다.
무인년(戊寅年)에 정사(定社)를 이루고 경진년(庚辰年)에 좌명(佐命)이 있었음도 또한 훈척(勳戚)들과 양필(良弼)들이 서로 도와 큰 공을 이룩하여 길이 훌륭한 터전을 마련하였고, 이를 돌에 새겨 세움으로써 전하를 현양(顯揚)하고 훈신(勳臣)들의 포장(襃獎)을 아름답게 기려 여기에 다 함께 기록함으로써 영원히 후세(後世)에 남기도록 하셨다.
통정대부 예조좌참의 수문전 직제학 지제교 지문서 응봉사사 세자좌보덕 신 변계량
通政大夫 禮曹左參議 修文殿 直提學 知制敎 知文書 應奉司事 世子左輔德 臣 卞季良
삼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이를 기록한다.


개국공신(開國功臣) 51명
비문 원본(原本)에서 베꼈기 때문에 ������열성지상(列聖誌狀)������ 에 의한 개국(開國)․정사(定社)․좌명공신(佐命功臣)들의 명단(名單)이 비각(碑閣)의 것과 약간 차이(差異)가 있다.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배극렴(裵克廉)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조준(趙浚)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  안평부원군(安平府院君) 이서(李舒)  한성부원군(漢城府院君) 조영무(趙英茂)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  판삼사(判三司) 윤호(尹虎)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  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  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  한천군(漢川君) 조온(趙溫)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 남재(南在)  영성군(寧城君) 오사충(吳思忠)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희계(鄭熙啓)  호조판서(戶曹判書) 조박(趙璞)  흥령군(興寧君) 안경공(安景恭)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장사길(張思吉)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  예문관대학사(藝文舘大學士) 정총(鄭摠)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김로(金輅) 이성군(伊城君) 손흥종(孫興宗)  옥천군(玉川君) 유상(劉敞)  평성군(平城君) 조견(趙狷)  청성군(淸城君) 정탁(鄭擢)  서천군(西川君) 한상경(韓尙敬)  예문관대학사(藝文舘大學士) 심효생(沈孝生)  계림군(鷄林君) 김곤(金稇)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근(李懃)  부흥군(復興君) 조반(趙胖)  한산군(漢山君) 조인옥(趙仁沃)  평해군(平海君) 황희석(黃希碩)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기(趙琦)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김인찬(金仁贊)  장성군(長城君) 정용수(鄭龍壽)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장담(張湛)  보성군(寶城君) 오몽을(吳蒙乙)  남양군(南陽君) 홍길민(洪吉旼)  동원군(東原君) 함전림(咸傳林)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황거정(黃居正)  흥성군(興城君) 장지화(張至和)  흥원군(興原君) 이부(李敷)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민여익(閔汝翼)  화성군(花城君) 장사정(張思靖)  서성군(瑞城君) 유원정(柳爰廷)  완성군(完城君) 이백유(李伯由)  고성군(高城君) 고려(高呂)  상산군(商山君) 이민도(李敏道)  호조전서(戶曹典書) 조영규(趙英珪)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 임언충(任彦忠)  상장군(上將軍) 한충(韓忠)


정사공신(定社功臣) 23명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  영안군(寧安君) 양우(良佑)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  봉녕군(奉寧君) 복근(福根)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조준(趙浚)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륜(河崙)  의정부우정승(議政府右政丞) 이무(李茂)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  병조판서(兵曹判書) 천우(天祐)  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  한천군(漢川君) 조온(趙溫)  호조판서(戶曹判書) 조박(趙璞)  안성군(安城君) 이숙번(李叔蕃)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장사길(張思吉)  취산군(鷲山君) 신극례(辛克禮)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김로(金輅)  청성군(淸城君) 정탁(鄭擢)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장담(張湛)  화성군(花城君) 장사정(張思靖)  중추원부사(中樞院府事) 장철(張哲)




좌명공신(佐命功臣) 43명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  완천군(完川君) 숙(淑)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륜(河崙)  의정부좌정승(議政府左政丞) 성석린(成石璘)  의정부우정승(議政府右政丞) 이무(李茂)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  병조판서(兵曹判書) 천우(天祐)  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  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  한천군(漢川君) 조온(趙溫)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  칠원군(柒原君) 윤저(尹柢)  호조판서(戶曺判書) 조박(趙璞)  안성군(安城君) 이숙번(李叔蕃)  이조판서(吏曹判書) 유량(柳亮)  취산군(鷲山君) 신극례(辛克禮)  면성군(沔城君) 한규(韓珪)  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  계성군(鷄城君) 이래(李來)  한평군(漢平君) 조연(趙涓)  의성군(義城君) 김영열(金英烈)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박석명(朴錫命)  여산군(麗山君) 김승주(金承霔)  철성군(鐵城君) 이원(李原)  곡성군(谷城君) 연사종(延嗣宗)  반성군(潘城君) 박은(朴訔)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  파평군(坡平君) 윤곤(尹坤)  남성군(南城君) 홍서(洪恕)  풍천군(豊川君) 심구령(沈龜齡)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황거정(黃居正)  마성군(麻城君) 서익(徐益)  회령군(會寧君) 마천목(馬天牧)  칠원군(漆原君) 윤자당(尹子當)  이성군(利城君) 서유(徐愈)  서령군(瑞寧君) 유기(柳沂)  평강군(平江君) 조희민(趙希閔)  계림군(鷄林君) 이승상(李升商)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  영양군(永陽君) 이응(李膺)  원평군(原平君) 윤목(尹穆)  월천군(越川君) 문빈(文彬)  여량군(礪良君) 송거신(宋居信)


▲ 능호:건원릉  ▲묘호: 태조 고황제 ▲건립연도:광무 4(1900) ▲비신규격 945mm X  2,160mm (하얗게 된 부분은 한국전쟁 당시 총알을 맞아 생긴 탄흔이다)   
▲태조고황제 건원릉
 태조고황제는 원나라 지원 원(1335,고려 충숙왕 4)년 10월 11일에 탄생하여 명나라 홍무 25년(1392,태조 1)년 7월 16일 고려 좌시중 배극렴 등이 고려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서 의를 일으켜 추대함으로 송경(개성) 수창궁에서 보위에 오르셨다. 4왕(목조․익조․탁조․환조)을 추존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고치시고, 갑술(1394,태조4)년 춘추 60세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어 가시고,11월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종묘를 세웠다. 무인(1398,태조7)년 정종에게 왕위를 넘기시고 무자(1408,태종8)년 5월 24일에 승하하시니 왕으로 계신지 7년이며 상왕으로 10년간 재위하셨으며 춘추가 74세였다. 9월 9일 양주 검암산 북동북 언덕에 장례를 치르고 계해(1683,숙종9)년에 시호를「정의광덕」이라고 더 올렸다. 소자(고종)가 왕위에 오른지 9년으로 개국한 이래 8번째 임신(1872,고종9)년에 존호를「응천조통광훈영명」으로 추상하고, 광무 3년 기해(1899)년 11월에 시호를『고황제』,묘호를『태조』라 하고 원구에 배사하고,신도비 아래에 앞면과 음기를 받들어 써서 표석을 세우고 소자의 작은 정성을 펼치노라.
 광무4(1900,고종37)년  월  일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는 거다....
 
기사입력: 2008/07/04 [10:22]  최종편집: ⓒ 구리넷

출처 : 목련꽃이 질 때
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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