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야마도 왕국의 쇠망(衰亡) - 왕조의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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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야마도 왕국의 귀족 씨족들과 거대한 사찰들은 장원(莊園)을 만들기 시작했고, 10세기에 와서는 국가 토지소유제와 함께 중앙정부의 권위 자체가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농민들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을 했고, 주변의 영향력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뭉쳤다. 농민들은 귀족 부재지주보다는, 귀족 출신을 자처하는 지방 토착의 실력자를 선호하였다. 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도태 과정을 거쳐 전문 싸움꾼으로 진화하여, 사무라이라고 불리는 전문적 무사계급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사무라이는 중세 일본의 새 지배자가 될 운명이었다. 왕족 후손인 미나모도(源) 씨족과 다이라(平) 씨족은 농민 무사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 두 개의 집결지가 되었다. 왕족출신 지도자들은 농민출신 싸움꾼들의 무력을 합법화시켜 주었다. 일본 열도를 점령하여 야요이-고분 시대의 쌀농사 농민들 위에 지배층을 형성했던 백제 사람들은, 농민출신의 무사계급에게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천황이란 존재가 지금까지도 상징적으로나마 지배자로 군림 할 수 있다는 기적 같은 사실에 만족을 해야 할 것이다. 신라와 야마도 왕국의 쇠망은, 800년경을 전후로 전세계적 한발의 시작과 일치한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신라와 야마도 왕국의 쇠망(衰亡) - 왕조의 멸망
홍원탁 (서울대 교수)
새로운 지배 계급의 등장: 사무라이
소가 씨족이 제거되고, 645년의 다이카 가이신(大化改新)이 얼마 지나지 않아, 663년에 백제가 멸망하자, 야마도 조정은 예상되는 당나라의 침입 통로를 황급히 요새화하는데 전력을 기울였고, 전국적인 군사적 동원체제를 갖추기 위해 율령제를 강화하였다. 1 701년에 다이호(大寶) 율령이 포고되면서, 모든 국민은 중앙집권화된 관료적 정부와 당나라 식의 국가 율령(律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모든 토지는 국가에 귀속 되고, 농민은 토지를 분배 받아 세금을 내고 부역을 바치게 되었다.
가바네(姓)를 가진 우지(氏) 지도자들이 관장하던 베민(部民)들은 자유인(公民)이 되어 국가의 직접적인 지배와 통제를 받게 되었다. 지배 씨족들은, 군대를 보유하면서 야마도 군주를 호위하거나 전쟁에 나가던 전통적인 권리를 빼앗겼지만, 고위 관직 혹은 지방정부의 관리로서의 새로운 신분을 얻었다. 2 (國造와 같은) 하급 지배층은 지방관청의 관리가 되었다. 정부 관료들은 신분과 지위, 공적에 따라 식읍을 받았다. 야마도 조정은 당나라 식의 과거제도를 채택해 본적이 없으며, 세습적인 귀족사회를 유지했다.
하지만 수입을 해 온 율령제는 씨족제도에 바탕을 둔 일본 사회에 맞지가 않았다. 특히 안록산의 난(755-63)의 여파로 당나라 팽창정책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자, 야마도 지배자들은 율령제를 집행할 열의를 잃었다. 기울어가는 당나라 조정과의 외교적인 접촉도 838년 이후에는 단절되었다.3
헤이안 시대(794-1192) 기간 중, 일찍이 대화개신을 실행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후지와라 (이전의 나카토미) 씨족은, 왕실과의 외척관계를 강화시키고, 858년에는 왕족이 아닌 신분으로 최초로 섭정에 올라 사실상의 왕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으며, 중앙정부의 고위직을 독점하였다. 중앙의 중하위와 지방정부의 직위는 다른 중소 귀족들이 세습적으로 차지하였다.
9세기 중, 수도와 지방에서 귀족 씨족들과 거대한 사찰들은 장원(莊園)을 만들기 시작했고, 10세기에 와서는 국가 토지소유제와 함께 중앙정부의 권위 자체가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4 장원의 소유자와 강력한 귀족 및 중요한 사찰의 승려들은 지방의 유력한 가문의 사람들과 농민들을 지방의 관리로 임명하였다. 5
사유토지의 확산은 국가의 세수를 격감시켜, 왕실은 직할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에만 의존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전국적인 법질서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혼란과 폭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백성들이 자위를 위해 무장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10세기 초가 되면, 중소 규모의 농민들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을 하기 시작하고, 그들 주변의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뭉쳤다. 7
농민들은 귀족 부재지주보다는, 귀족 출신을 자처하는 지방 토착의 실력자를 선호하였다. 한편, 거대한 장원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사병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Friday(1992: 174-5, 139)에 의하면, “9세기 말에는 정부의 이름을 빙자한 사적인 세력들의 지휘를 받은 사병(私兵)들에 의해서 국가의 병역의무 대부분이 수행되었고, 또 914년경에 와서는, 게이비시(지방 경찰관)의 직책도 모두 지방의 농민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Sansom (1963: 239)은 “특히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는, 거의 모든 농부 하나하나가 무사 노릇을 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라고 말한다.
싸움에 동원된 농민들은 일단 싸움이 끝나면 그들의 농토로 돌아왔었다. 8 그러나 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도태 과정을 거쳐 전문 싸움꾼으로 진화하여, 사무라이라고 불리는 전문적 무사계급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사무라이는 중세 일본의 지배자가 될 운명이었다. 유교적인 과거제도 대신에, 무술에 바탕을 둔 능력주의 사회로 진화된 것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은 비천한 계층의 출신이거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이 출신이 애매모호한 사람도, (개개인의 두뇌와 칼 솜씨 앞에 평등한) 싸움꾼이라는 똑같은 위치에서 출발을 했다. 불가사의 하다면, 이 농민 출신 무사들이 자신의 절대적 힘을 인식하는데 왜 그리도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하는 점뿐이다
중앙정부에서 고위직을 얻지 못하고 지방으로 내려와 정착을 하게 된 지방의 강력한 씨족들은 농민 무사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마병력을 유지했고, 농민들을 칼잡이와 활잡이로 썼다. 왕족 후손인 미나모도(源) 씨족과 다이라(平) 씨족은 농민 무사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 두 개의 집결지가 되었다. 9 왕족 출신 지도자들은 농민출신 싸움꾼들의 무력을 합법화시켜 주었다. 그래도 12세기 말까지는, 무사들이 국가와 조정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사무라이(侍)”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武士가 아니라) “받들어 모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농민 무사들의 우두머리들은 정치적으로 순진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권력구조 밖에 있었다. Farris(1992: 176)에 의하면, 조정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저택을 사병을 가지고 지켰을 뿐만 아니라, “지방의 무사들을 이간질해 서로 적대시하도록 만드는 방법으로 조종을 하였다.
처음엔 다이라 씨족이 정권을 장악하고 (1156-60) 중앙정부의 고위직을 모두 독점하였으나, 곧이어 1185년에 미나모도 씨족에 의해 축출되었다. 미나모도 요리토모는 동쪽 해안가에 가마쿠라 막부(1192-1333)를 창설했다. 하지만 조정에서도 계속 지방관리를 임명하고, 장원의 소유자들도 그 지역 관리들을 임명하고, 쇼군(將軍)도 자신의 가신들은 지방의 관리로 임명을 했기 때문에, 아주 복잡하지 짝이 없는 봉건제도가 출현한 것이다. 10
왕족 출신이라는 사무라이 지도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무로마치 막부(1333-1573)를 세우고, 봉건 다이묘(大名)들로 하여금 각 지방을 독립적으로 다스리게 했다. 사무라이와 농민들은 자치적 지방조직을 만들었고, 다이묘들은 이들 다양한 자치 조직들을 자신들의 정치체제에 흡수하고, 지역 무사들을 주군-봉신(封臣) 관계에 기초한 군대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11
일본 열도를 점령하여 야요이-고분 시대의 쌀농사 농민들 위에 지배층을 형성했던 백제 사람들은 마침내 농민 출신의 무사계급에게 지배력을 상실한 것이다.
신라 왕조의 멸망
한반도의 3국은 초기의 다원적 조직체로부터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귀족 국가로 진화했다. 이전의 부족 혹은 씨족의 우두머리들은 계급적인 관료체제 내에서 적절한 직위를 얻게 되었다. 군대는 최고 사령관인 왕의 지휘 아래로 이전되었고, 왕이 손수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가 직접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 중대사의 대부분은 고위 귀족들의 협의회에서 결정되었다. 각 지방에 성채를 세웠으며, 성주들은 지방장관인 동시에 군 지휘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정부 관직과 군 지휘권을 보유하는 귀족들은 많은 토지와 포로-노예들을 보상으로 받았다.
신라는 당나라 식의 과거제도를 채택한 적이 없었고, 시종 세습적인 귀족사회였다. 성골과 진골이 왕위와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다. 12 각 지역에는 (옷깃의 색깔로 식별하는) 정(停) 혹은 당(幢)이라는 명칭의 군 부대가 조직되어, 진골 장수의 지휘를 받았다. 지방에는 자신들 지휘관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서당(誓幢)도 있었다.
8세기 중엽, 통일신라의 문화와 예술은 그 절정기에 달한 것 같이 보였다. 하지만 바로 그 이면에서는 지배 귀족과 왕족들 사이의 권력투쟁이 심화되어 왕국은 쇠락과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한반도가 몇 개의 왕국으로 갈라져 끊임없이 정복이나 생존을 위해 서로 싸울 때에는, 각 나라의 지배자들은 즉각적인 전국적 동원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전제적 권력을 유지해야 할 뿐 아니라, 농민들의 애국적 충성심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합리적이고 공정한 제도적인 장치를 유지해야만 했다. 하지만 일단 통일이 달성되자, 중앙집권적 귀족체제는 바로 농민을 착취하는 잔혹한 수단으로 퇴화하기 시작했다.
야심적인 귀족들은 노예를 무장시키고 유랑 농민을 모아 들여, 자기 개인의 군대를 만들었다. 공개적 왕위 쟁탈전이 일어났고, 신라의 마지막 155년(780-935) 기간 중에는 무려 20명의 왕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왕위 경쟁자들은 종종 지역의 우두머리들과 연합을 했다. 지방 성주들 일부는 중앙의 귀족 출신이었으나, 신라 말기에 와서는 지방 토착의 우두머리들이 수도에서 파견한 지방 관리의 자리를 빼앗아 스스로 성주가 되었다. 13
최초의 대규모 농민반란은 889년에 일어났으며, 전국적으로 반란이 이어졌다. 가난한 농민 출신의 지도자 한 명과, 왕궁에서 쫓겨난 왕자 한 명이 마침내 농민 반란 세력들을 규합하여 892년에는 후백제를, 901년에는 후고구려를 각각 세웠다. 한반도의 후삼국 시대(892-936)는 중국 본토에서의 5대10국 시대(907-60)와 대충 일치한다.
왕건은 개성지역에서 광범위하게 해상무역에 종사해왔던 강력한 토착세력 출신이었다. 왕건은 후고구려의 장수로 시작을 해서, 주변 장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고려 왕조(918-1392)를 창건했다. 935년에는 신라왕의 항복을 받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14 고려는 젊고 강건한 농민들을 선별하여 세습적인 병호(兵戶)를 구성하고, 농지뿐 아니라, 2개의 가구를 부속시켜 주어 병호의 토지를 경작하게 하였다.
왕건은 골품제도를 해체하고, 다양한 씨족들로부터 세습적 귀족계급을 구성했다. 15 고려 왕조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관리들을 선발하기 위해 중국식의 과거제도를 도입했으며, 정교한 중국식 정부조직을 제도화하였다. 하지만 귀족 혈통이 계속 정치권력을 결정했다. 그들은 정부의 고위관직을 독점하였고, 그들의 딸들을 왕과 결혼시켰으며, 거대한 부를 축적하였고, 교육기관을 지배하였다. 비록 과거제도를 통해 선발된 관리들이 고려 왕조 말기에 와서 전통적 귀족계급을 견제하는 적극적 역할을 하게 되지만, 고려 역시 본질적으로는 세습적 귀족 사회였다.
왕건은 자기 자신을 고구려 왕조의 후계자라고 생각하여, 발해가 926년에 거란(916-1125)에게 망하자, 발해의 마지막 태자와 지배계층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5만 명 이상의 발해 귀족들이 고려로 피신하였으며, 왕건은 발해 태자를 공식적으로 고려 왕족에 포함시켰다. 관리, 기술자, 농민들을 포함하는 발해 피난민들의 물결은 10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발해의 지배를 받아왔던 대부분의 여진족은 발해가 거란에게 망하자 고려를 그들의 종주국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16
동아시아 역사 강의: 2-15 (2005. 7. 16.)
정리: 강현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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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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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645년, 나카노 오오에(천지, r.661-71) 왕자가 나카토미 가마다리(中臣鎌足, 614-69)의 도움을 받아 소가 씨족을 제거하였다. 가마다리의 아들 후지와라 후비토(659-720)는 다이카 가이신을 실행하고자 노력했으며, 날로 늘어가는 관료 조직을 수용하기 위해 개국이래 최초로 영구적 수도를 세울 생각을 했다. 지토오(持統, r.686-97)는 694년에 후지와라교(藤原京)로 옮길 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영구적 수도”로 옮긴지 불과 16년 만에, 후비토는 다시 수도를 후지와라교에서 북쪽으로 16킬로 떨어진 헤이죠교(平城京)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710년 이전까지 야마도 왕국은 영구적인 성격의 수도가 없이, 새로 왕이 즉위 할 때 마다, 마치 유목민들이 천막을 접고 이동하듯, 아스카 지역 내 다른 장소에 왕궁을 새로 짓고 도읍을 옮겼다. 이런 식으로 옮겨 다니니, 왕궁이나 도읍의 규모가 클 수가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야마도 왕국 고유의 특징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 해 보아야 할 것이다.
2. 농민들은 국가에 의해 바로 징집되어 (3년간) 자기 고향 땅에서 지방 관리의 지휘를 받거나, 수도, 전방, 혹은 (조정에서 일시적으로 군사적 임무를 부여 받은 귀족들의 지휘를 받으며) 주요 전쟁에 참여하였다. 예컨대, 전에는 모노노베와 오오토모 씨족이 왕의 군대를 직접 지휘했으나, 군사적인 권력과 비군사적인 권력은 마침내 지방행정 단위에서부터 분리가 되었다.
3. 784년에는 헤이죠교에서 나가오카교(長岡京)로 수도를 옮겼고, 794년에 다시 헤이안교(平安京)로 수도를 옮겼는데, 이 천도들은 800년경을 전후하여 전 세계적으로 한발이 시작되는 시점과 일치한다.
4. 조정의 귀족들은 지방의 토지 소유자들에게, 자신들의 이름을 빌어 면세혜택을 받도록 해 주고, 그 대가로 생산물의 일부를 받아들였다. 후지와라 씨족은 가장 큰 규모로 장원 소유 권한을 보유했었다. 결과적으로, 호구의 등록과 농지의 배분이 중단되고, 국유지는 모두 개인 소유지로 흡수되었다.
5. Tsunoda (1958: 109)에 의하면, “중앙에 의한 지방의 통제라는 것은 애초부터 미약했던 것이었지만, 9세기와 10세기에 이르러서는 당나라에서 수입한 토지-조세 제도를 조롱거리로 만든 호족들에게 통제권을 완전히 빼앗겼다” 중세 (12-16세기) 일본의 봉건적 특징은 헤이안 시대(794-1192)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6. Sansom (1963: 236) 참조. 일찍이 792년에 야마도 조정은 이미 전국적으로 농민을 징집하는 정책을 포기하였고, 지방단위의 관리가 민병대를 조직하여 각 지방의 치안을 유지하는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고통 받는 백성들은 종교에서 위안을 찾으려 했다. 10세기경, 비참의 정도가 극에 달한 백성들 마음에 안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불교 지도자들은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7. Friday (1992: 4) 참조.
8. Farris (1992: 150-2, 375)에 의하면, “10세기 일본의 농민들은 너무나 자유롭게 움직였기 때문에 농민 우두머리의 경제적 사회적 역할에 별로 의존하지 않았으며, 무사들은 제 좋은 대로 오고 갈 자유가 있었다” 농민 병사들은 약간의 땅을 경작하였으나, 근본적으로는 도둑질과 약탈에 의존하여 삶을 유지하였다.
9. 5-6세대가 지나면서도 왕을 배출하지 못한 왕족의 후손들은 왕실로부터 분가되어 다른 귀족들처럼 성(姓)을 하사 받았다. 왕실은 성이 없었다. 814년, 사가(嵯峨, 809-23)왕은 자식들 50명 중 33명을 분가(分家)시켜 미나모도(源)라는 성을 내려주었다. 본래의 사가겐지(源氏)이외에도 세이와(淸和, 858-76), 우다(宇多, 887-97)왕 등을 원조로 하는 미나모도 씨족들이 있다. 가마쿠라(鎌倉) 막부를 세운 미나모도 요리토모(源賴朝)와 무로마치(室町)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도 세이와 겐지의 분파(分派)이다. 825년, 간무(桓武)왕은 손자에게 다이라(平)라는 성을 하사해 분가 시켰다. 그 후, 왕실로부터 분가한 왕족들의 성씨는 모두 미나모도 아니면 다이라 이었다 간무의 증손자도 다이라 성을 하사 받았으며, 그의 후손들은 무사로서의 명성을 날렸다. 미나모도 요리토모 사후에 막부(幕府)를 장악했던 호조 가문도 다이라 출신이라고 주장하였다. 도쿠가와 가문은 그들의 선조를 미나모도 계열로 만들려고 애를 썼다
10. 비록 조정의 귀족들은 계속 사무라이들과 권력과 영향력을 놓고 경쟁을 했지만, 가마쿠라에 군사정권 수립으로 야마도 조정에 의한 실질적 통치는 사실상 끝이 난 것이었다. 세습 귀족적 야마도 조정의 몰락으로 새로운 지배층이 무대에 등장하였으며, 국가 운영에 지방민의 참여가 한층 커졌다. 군사정권은 그 형태만 약간씩 바뀌면서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Tsunoda, et al. (1958: 181) 참조.
11. 봉건 영주인 오다 노부나가는 1572년에 무로마치 막부를 축출했으나, 그 자신도 1582년에 부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살해당하였다. 1590년의 일본열도의 통일은 조선 침략(1592-8)으로 이어졌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가 도입한 사회 조직을 기반으로, 에도(江戶)에 근거지를 둔 다이묘가 세운 도쿠가와 막부(1603-1868)는, 일본 열도에 264년에 걸친 (무사계급이 농민, 수공업자, 상인들을 지배하는) 안정적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12. 진골 왕족의 바로 아래 위치한 6두품(頭品)은 왕족들에 의해 관직에서의 승진을 제한 받았다. 6품에서 4품까지의 귀족은 하위직만을 차지할 수 있었다. 3품에서 1품은 평민을 가리킨다. 골품제도는 사용할 수 있는 의복, 수레, 일상 집기의 종류와 식솔의 숫자까지 규제를 하였다. 진골 협의회는 왕위 계승과 전쟁선포 등을 결정하였다.
13. 그들은 지방 백성들과 농토가 없어 떠도는 유랑자들을 모집하여 자신들 개인의 군대를 만들어 지휘를 하고, 농민들로부터 세금과 노역을 징수했다. 결국에 가서는 왕족이 아닌 귀족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혼란기의 시작은, 800년경을 전후로 하는 전세계적 한발의 시작과 일치한다.
14. 왕건과 그의 뒤를 바로 이은 후계자들은, 사회 전체를 제도적으로 재조직하여, 보다 공평한 토지-조세 제도를 도입하고, 많은 수의 노예를 해방시켜, 평민들의 비참한 처지를 개선시켜 주었다.
15. 왕건은 강력한 성주들에게 왕의 성(王姓)을 하사해 주고, 수많은 지방 씨족의 지도자들과 혼인을 통한 연맹을 형성 해, 6명의 왕비와 23명의 처를 두었다. 그는 신라 마지막 왕과도 각자의 딸과 서로 혼인을 함으로서 겹사돈 관계를 맺었다.
16. Henthorn (1971: 96) 참조. 발해의 말갈-여진족의 일부는 한반도 동북쪽의 함흥 평원으로 이주하였고, 일부는 압록강 주변으로 이주하였다. 이기백(1984: 126)에 의하면, “말과 모피를 받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곡식, 의복, 철제농구, 철제무기 등을 제공한 것은 고려였다. 그들 일부는 고려 영토 안으로 이주를 했지만, 원래 거주하던 곳에 남아 있던 많은 여진족도 고려를 신뢰했다. 고려로 이주한 사람들에게는 농지와 주택을 주고, 그들이 생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제공해 주었다”
Decline and Fall of the Silla
and the Yamato Kingdom
fall of the dynasties
Wontack Hong
Professor, Seoul University
Appearance of the New Ruling Class: Samurai
The overthrow of the Soga clan and the Taika Reforms in 645 were soon followed by the fall of Paekche in 663, the frantic efforts of the Yamato court to fortify the possible Tang invasion route on the Japanese islands, and the reinforcement of the Ritsuryō system for nation-wide military mobilization.1 By issuing the Taihō law codes in 701, the entire populace came under the rule of Tang-style national statute law with a centralized bureaucratic government. on the basis of state ownership of land, peasants were allotted parcels of land, paying taxes and providing corvèe service.
The Be people that had been controlled by the Kabane bearing Uji leaders were transformed into freemen (kōmin) under direct state control. Ruling clans were deprived of their traditional privileges, such as holding troops to be used by the Yamato sovereign as guards or in battle, but acquired a new status as high-ranking bureaucrats or local officials.2 The lower strada of the old elite (such as the Kuni-no-miyatsuko) obtained positions as local district officials. Government officials received fief according to their rank, post, and merits. The Yamato kingdom had never adopted the Tang-style examination system. It was a hereditary aristocratic society.
The imported Ritsuryō system, however, did not fit the clan-based Japanese society. Especially when the Tang’s expansionist threat disappeared in the aftermath of the An Lu-shan rebellion (755-63), the Yamato rulers lost their zeal to enforce the Ritsuryō system. The diplomatic contact with the declining Tang dynasty was discontinued after 838.3
During the Heian period (794-1192), the Fujiwara clan, which had been prominent in the implementation of Taika Reforms, established close marital ties with the imperial family, established regency in 858 effectively exercising the powers of emperor, and occupied most of the high offices in the central government. Middle and lower level positions in the central and provincial government, on the other hand, became the hereditary monopoly of a small number of other aristocratic clans.
During the ninth century, the aristocratic clans (in the capital and in the provinces) and large temples started to create private manors (shōen), and by the tenth century, the public land-holding system as well as the authority of the central government collapsed completely.4 As owners of the private estates, powerful aristocrats and the monks of important temples had appointed major local families and peasants to function as local administrators.5
The spread of private estates reduced the state revenues, forcing the imperial family to rely on income from its own estates, and leading to a nation-wide breakdown of law and order. Contemporary accounts give a picture of chaos and violence so widespread that the commoners had to arm in self-defense.6 By the early tenth century, small- and medium-sized farmers began to arm themselves for self-protection and gather around the wealthiest and most influential of their own standing.7
Farmers preferred a local magnate who claimed noble descent than an aristocratic absentee landlord. Those who owned or administered the great estates, on the other hand, were forced to maintain private warriors to protect their lives and property. Friday (1992: 174-5, 139) notes that “By the end of the ninth century, most of the state’s military dirty work was being done by private forces directed by private warriors operating in the name of the government,” and also that by 914 the occupants of Kebiishi (provincial police officers) posts were “all peasants of the province in which they hold office.” Sansom (1963: 239) observes: “It may be taken for granted that, especially in the provinces remote from the capital, almost every farmer was a warrior.”
After being mobilized for fighting, the peasant soldiers used to return to their lands.8 As time passed, however, there evolved military specialists by natural selection who started to form a professional full-time warrior class called samurai. The samurai were destined to become the rulers of medieval Japan. There evolved a sort of meritocracy based on martial skills instead of the Confucian examination system. Whether of humble origin like Toyotomi Hideyoshi or of obscure origin like Tokugawa Ieyasu, every swordsman was placed on an equal footing. The only wonder is why it took such a long time for the peasant warriors to recognize their absolute power.
Powerful provincial clans that were unable to acquire high positions in the central government went out to the provinces, assuming leadership over the peasant warriors. They maintained their own cavalry, and enrolled peasants as their swordsmen and archers. The Minamoto clan (Genji) and the Taira clan (Heishi), both descended from the imperial family, came to serve as the two largest rallying points of peasant warriors.9 The leaders of the imperial line could legitimize the power of peasant warriors. Until the end of the twelfth century, however, the warriors were still the servants of the court and the state. “Samurai” literally means “one who serves.” The leaders of peasant warriors were politically naïve and remained outside the power structure for a long time. According to Farris (1992: 176), court nobles had own warriors to guard their mansions, and were “able to keep [provincial] warriors at heel by setting them against themselves.”
The Taira clan captured political power first (1156-60) and occupied the higher official positions of the central government, but was soon overthrown by the Minamoto clan in 1185. Minamoto Yoritomo commenced the Kamakura shogunate (1192-1333) at a seaside village in the east. There emerged a complicated feudal system with an imperial court still appointing provincial officials, owners of private estates appointing own administrators, and the shogun appointing his own vassals as provincial protectors and stewards.10
A samurai leader named Ashikaga Takauji, who could also claim the imperial line, established the Muromachi shogunate (1333-1573) and let feudal daimyos rule over independent provincial areas. Samurai and peasants organized autonomous local organizations, and the regional leaders called daimyos tried to incorporate these various autonomous entities into their own political system, and to organize local warriors into armies on the basis of lord-vassal relationship.11
The Paekche people who had conquered the Japanese islands and set themselves up as a layer of overlords above the rice-growing Yayoi-Kofun period peasants lost power to the samurai class of peasant origin.
Fall of the Silla Dynasty
The Three Kingdoms in the Korean peninsula had evolved from pluralistic systems into centralized aristocratic states centered upon the kingship, giving former tribal or clan chieftains appropriate ranks in the hierarchic bureaucracy. Military forces were put under the authority of the king as commander-in-chief, who often led troops in person and fought in battle. The council of the high aristocracy made decisions on the most important matters of state. Fortresses were built in the regions, and the castle lords served both as governors and military commanders. Aristocratic holders of government office and military command were rewarded with large amounts of land and prisoner-slaves.
Silla had never adopted the Tang-style examination system. It was a hereditary aristocratic society. Members of the holy-bone and the true-bone classes monopolized the throne and occupied the high-ranking positions.12 Garrisons called Jeong or Bannermen 停/幢 (differentiated with the color of the sleeves) were established in each province, commanded by true-bone generals. There were also Oath Bannermen 誓幢 who pledged their loyalty to their commanders.
By the mid-eighth century, the culture and arts of the Unified Silla society seemed at the height of their glory. Beneath the surface, however, power struggles between the leading aristocratic clans and ruling royal families set in motion the process of the nation’s decline and fall.
When the Korea proper was divided into several kingdoms, ceaselessly fighting each other for conquest or mere survival, the rulers of each state had to maintain not only a strong autocratic rule for instant nation-wide mobilizations, but also a rational and fair institutional arrangement to consolidate the patriotic loyalty of peasants. When the unification was achieved, however, the centralized aristocratic system soon began to degenerate into a ruthless means to exploit peasants.
Ambitious nobles created private military forces, arming their slaves and recruiting the roaming peasants. There occurred open contests for the throne, producing twenty kings during Silla’s last 155 years (780-935). A contender for the throne often had to ally himself with local chiefs. In the countryside, the castle lords, some of them with a capital aristocratic background but most of them being indigenous local headmen in the final days, usurped the positions of the provincial magistrates who had been dispatched from the capital.13
The first large scale peasant revolt broke out in 889, and then a succession of rebellions erupted all over the country. Two leaders, one from poor peasant stock and the other an outcast royal prince, eventually consolidated the peasant rebel forces (called the armed Grass Brigands), and established the Later Paekche in 892 and Later Koguryeo in 901, respectively. The Later Three Kingdom period in the Korean peninsula (892-936) roughly matches the Five Dynasties and Ten Kingdom period (907-60) in mainland China.
Wang Keon had emerged from a powerful local clan in the Kae-seong area that had been engaged in extensive maritime commercial activities. He had at first served as a commander of the Later Koguryeo army, and then put forward by the generals for the kingship. He established the Koryeo dynasty (918-1392), winning surrender of the last ruler of Silla in 935 and destroying the Later Paekche in 936. 14 The Koryeo created hereditary military households from among the young and vigorous peasants, granting land to soldiers and assigning two supporting households to cultivate the land of each military household.
Wang Keon broke the bone-rank order, and drew on hereditary aristocrats from many different clans.15 Koryeo adopted the Confucian state examination system to select civil officials of varied backgrounds, and institutionalized an elaborate Chinese style government apparatus. Aristocratic lineages, however, still determined political power. They monopolized the highest offices in the government, married their daughters off to the monarchs, controlled extensive wealth, and dominated the educational institutions. It was essentially a hereditary society, though the officials recruited through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became an active check on the entrenched power of the aristocratic establishment in the latter half of the dynasty.
Wang Keon regarded himself as the successor of the Koguryeo dynasty, and welcomed the ruling class and the last crown prince of the Parhae dynasty that was destroyed by the Qidan Liao (916-1125) in 926. More than fifty thousand Parhae aristocrats took refuge in Koryeo, and the crown prince was officially included in the Koryeo royal clan. The influx of Parhae refugees, including officials, artisans, and peasants, continued throughout the tenth century. Most Ruzhen tribes had been under Parhae rule, but when Parhae was destroyed by the Qidan, they looked upon Koryeo as the suzerain power. 16
[각주]
1 In 645, prince Naka no Ōe (Tenji, r.661-71), assisted by Nakatomi Kamatari (614-69), eliminated the Soga clan. Kamatari’s son, Fujiwara Fubito (659-720), tried to implement the Taika Reform, and also to establish the first permanent capital to accommodate the growing bureaucracy.
Jitō (r.686-97) made the final decision of the transfer to Fujiwara-kyō in 694. After a mere 16 years, however, Fubito decided to relocate the capital yet again to Heijō-kyō (Nara), about 16 km north of Fujiwara-kyō.
Yamato court used to change the location of its capital within the Asuka area each time a new king came to the throne.
2 Peasants came to be conscripted directly by the state to serve (for three years) either in their own provinces (led by provincial officials), in the capital, on the frontier or for major military campaigns (led by court nobles with temporary military commissions). The Mononobe and Ōtomo clans, for instance, formerly commanded the King’s army, but the military and civil powers eventually separated at the level of local administration.
3 The relocation of capital from Heijō-kyō to Nagaoka-kyō in 784 and to Heian-kyō (Kyōto) in 794 coincides with the beginning of global drought around 800.
4 A court noble could give a local land-holder immunity from taxation and thereby receive a portion of the estate’s produce in return for his protective service. The Fujiwara clan owned the most extensive manorial rights. Family registers and the allocation of farming land were discontinued, and state-owned land was integrated into the private estates.
5 According to Tsunoda, et al. (1958: 109), “control of the so-called ‘provinces,’ tenuous even at the start, was in the ninth and tenth centuries almost entirely lost to great families who made a mockery of the land and tax system imported from Tang China.” The characteristic feudal institutions of medieval Japan (embracing the twelfth through sixteenth centuries) had their roots in the Heian Period (794-1192).
6 See Sansom (1963: 236).
As early as 792, the Yamato court abandoned its policy of countrywide conscription of peasants and made district-level officials responsible for keeping peace in the provinces through the organization of local militia. The distressed people turned to religions for solace. The Buddhist leaders did their best to offer people consolation for the miseries of the age that peaked by the tenth century.
7 Friday (1992: 4)
8 According to Farris (1992: 150-2, 375), “Japanese peasants of the tenth century moved too freely” to be reliant on the leaders’ economic and social functions and “warriors were free to come and go as they pleased.” While the peasant soldiers farmed a bit of land, they basically relied on robbing and pillaging to sustain themselves.
9 Imperial offspring five or six generations removed from the ruler were cut off from the dynasty and given surnames like other nobles. The royal house had no surname. In 814, Saga (809-23) created, as dynastic shedding 分家, the surname Minamoto (Gen) for 33 of his 50 children. In addition to the original Saga Genji, there were Minamoto lineages tracing their origins to Seiwa (858-76), Uda (887-97), etc. Minamoto Yoritomo, who established the Kamakura shogunate, and Ashikaga Takauji, who established the Muromachi shogunate, both could trace their descent from Seiwa Genji. In 825, Kanmu awarded the surname Taira (Hei) to his grandson. Thereafter, all members cut off from the imperial line were surnamed either Minamoto or Taira.
Kanmu’s great grandson was also made Taira, and his descendants achieved notable reputations as warriors. The Hōjō family, who controlled the shogunate after the death of Minamoto Yoritomo, also claimed descent from the Taira. Tokugawa family tried to trace their ancestry to the Minamoto line.
10 Although the court nobles were still able to compete for power and influence with warriors, the establishment of military government in Kamakura effectively terminated the rule by the Yamato court. The collapse of the aristocratic Yamato court brought new leaders on the scene, and a greater participation by the locals in the national life. The military government, in one form or another, endured into the nineteenth century.
See Tsunoda, et al. (1958: 181).
11 The Muromachi shogunate was destroyed in 1572 by a feudal lord, Oda Nobunaga, who was killed in 1582 by one of his vassals, Toyotomi Hideyoshi. The unification of the Japanese islands in 1590 was followed by the invasion of Chosun (1592-8). Building on the social system introduced by Nobunaga and Hideyoshi, the Tokugawa shogunate (1603-1868), established by a daimyo based in Edo, was able to maintain a stable social order (of the ruling samurai above the farmer, the artisan, and the merchant) on the Japanese islands for 264 years.
12 Head-rank six were just below the true-bone royal clans, and their advancement in public office was restricted by the members of the royal lineage. Aristocrats of the head-rank six through head-rank four lineages could occupy the lower positions. Head-ranks from one to three designated the common people. The bone rank system dictated what kind of clothes, carriages, daily utensils, and houses members could have. The Council of True-Bone Nobles made decisions on succession to the throne and the declaration of war.
13 They commanded their own private soldiery recruited from the local populace and landless wanderers, and exacted taxes and corvée labor service from the peasant. The non-royal aristocracy eventually seized political power. The beginning of this turbulent period coincided with the beginning of global drought around 800. Maya civilization reached a zenith around 750. Then their society imploded because of severe droughts between 760-910.
See Peterson & Haug (2005: 322-7).
14 He and his immediate successors restructured the entire society and relieved the misery of common people by establishing a more equitable land-tax system and emancipating a large number of slaves.
15 Wang Keon bestowed the royal surname on powerful castle lords, and formed matrimonial alliances with local clan leaders, taking six queens and 23 wives. He had concluded a marriage arrangement with the last Silla king, each marrying one of the other’s daughters.
16 See Henthorn (1971: 96).
Some Mohe-Ruzhen tribes of Parhae moved into the Ham-heung plain in the Korean northeast and also into the Yalu River area. According to Lee (1984: 126), “It was Koryeo that supplied their needs of grain, cloth, iron agricultural implements, and iron weapons, for which they exchanged horses and furs. There were many Ruzhen who remained in their original places of abode and yet put their trust in Koryeo, while still others migrated into the Koryeo domain. To these Koryeo gave land and dwellings, thus furnishing them with the means to maintain their livelih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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