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과학적인東亞史

(35)거란족의 요(遼)를 여진족 금(金)이 대체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2. 10:46
 
거란족의 요(遼)를 여진족 금(金)이 대체
[홍원탁의 동아시아역사 바로보기]

 

동부 만주 삼림 속에서 살던 여진족은, 서 만주 선비족의 후예인 거란족 요 왕조가 운영하던 2원 통치조직의 효용성을 일찍이 체득했고, 1126년에는 북중국 전체를 정복했다. 중국 역사상 1126년이란 한족이 만주족 왕조에 의해 두 번째로 중원으로부터 쫓겨난 사건을 상징한다. 고려와 금 나라의 창건자들은 모두 옛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천명했다. 왕건은 신생왕국을 고구려를 본 따 고려라 불렀고, 금 나라는 실제로 만주 전체를 점거했다. 금사(金史) 기록을 보면, 완안부 시조 자신이 본래 고려(혹은 고구려)에서 왔고, 여진과 발해는 한 가족이라고 말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고려를 신라의 후계자로 상정하여, 같은 시대의 발해 (689-926) 237년 역사를 제외한 채, 통일신라 (677-935) 258년의 역사만을 삼국사기에 첨부했다. 一然, 李奎報, 李承休, 柳得恭 등의 글은 요동을 포함하는 고구려의 만주 전 강역에 대한 법통을 역사적 근거로 뒷받침 하려는 노력이라 볼 수 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동부 만주 삼림족이 서부 만주 유목민을 대체:
거란족의 요(遼)를 여진족 금(金)이 대체

서울대 교수 홍원탁


   
▲ Jin and Southern Song
Blunden and Elvin (1998: 98)
금사(金史): 완안부 시조는 본래 고려(혹은 고구려)에서 왔다

1034-44년이 되자 북동 변방지역에서 발해 유민, 생 여진족, 고려인 등이 합세하여 거사를 한다는 보고가 계속 들어오고, 거란족의 요 조정은 토벌 원정군을 계속 보내야만 했다. 1 거란족은 (발해 주민을 구성했던) 말갈-여진 사람들을 요 나라의 구성원으로 흡수했었다. 그래서 요의 통제를 받게 된 여진족은 '길들여진' 여진족이라 불렀고, 그 밖의 여진족은 '생' 여진족이라 불렀다. 2 동북방에서의 끊임없는 반란과 진압 전쟁은 요 나라의 국력을 고갈시켰다. 1125년, 동부 만주의 여진족이 요나라를 접수했다.

금 나라(1115-1234)를 세운 아골타(阿骨打)는 고려와 접경한 산악지대의 완안 부족(完顔部) 지도자였다. 아골타는 이미 11세기에 다른 생 여진족들을 복속시키며 지배 영역을 확장시켰다. 금사 본기 제1권을 보면, 금의 시조(900년 경의 인물인 완안부의 시조 函普를 의미)는 본래 고려에서 왔다(혹은 고구려 출신이다)고 말한다. 또 태조 아골타가 일찍이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가족이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3

대금국지(大金國志)는 금 나라의 시조(완안부의 시조를 의미)가 본래 신라에서 왔고 성씨가 완안이었다고 말한다. 만주원류고는 금사가 금 시조를 고구려 출신이라고 기록을 했지만, 요사와 금사는 종종 신라와 고구려를 혼동했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이 된 것이며, 김(金)이라는 신라 왕들의 성은 이미 수 십대를 걸쳐 전해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나라를 세우면서 신라 왕성을 본따 국명을 금이라 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4

동 만주의 삼림족

목초지의 유목민과는 달리 여진족은 사냥과 고기잡이에 못지않게 농업에 의존했다. 여진족은 소규모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고,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는 등의(반 유목, 반 농경) 혼합 경제를 영위했다. 그들은 삼림족이면서도 훌륭한 기병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 고유의 부족 조직과 사냥을 통해 숙달된 활 쏘기 말 타기 등은 주변의 유목민에 전혀 손색없는 군사적 전통을 만들어 냈다. 부족 가구들은 세습적 지도자의 휘하에 모여 무리를 지었다.  여진족들은 변변치 않은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들에 나가 힘들게 일을 해야 했지만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전리품을 얻기 위해 마치 가족 내 일인 듯 싸움에 총력을 집중했다. 

여진족은, 항복한 한족이나 거란족까지 포함해, 정복한 부족들을 자신들 본래의 부족장의 지휘 하에 새로운 군대 단위조직을 만들어 흡수했다. 일찍이 (349-410 기간 중 전연, 후연, 서연, 남연 등 명칭으로 등장했던) 선비족 연 왕조는 북중국을 통일한 또 다른 선비족인 탁발족 북위(386-534)에게 망한 것이다. 700여 년 후, 거란족의 요 나라는 (북송으로부터 중원을 빼앗아) 북중국 전체를 차지한 또 다른 만주족인 여진족에게 망한 것이다.

2원 통치제도의 답습
 
여진족 금 나라는 (선비족의 후예인) 거란족 요 왕조의 2원 통치조직을 답습했다. Twitchett and Tietze는 금 나라의 "정부 행정 조직의 기본적 체제는 여진족 고유의 전통과 요 나라로부터 물려 받은 제도와 한족 송 나라 영향 등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이며 "여진족 금 나라의 사회-군사 조직은 만주족 [청 나라] 팔기군 조직의 선구자였다"고 말한다. 5

여진족은 1126년에 송의 수도 개봉을 포함해 북중국 전체를 정복했다. 중국 역사상 1126년이란 한족이 만주족 왕조에 의해 두 번째로 중원으로부터 쫓겨난 사건을 상징한다. 양자강 남쪽 항주에 송 나라의 새 수도가 세워졌다. 1141년, 송 조정은 화이강(淮河) 이북의 전 지역을 정식으로 떼어주고 금 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신속(臣屬)하기로 약속했다. 6 북중국을 모두 상실하기 이전의 송을 북송(960-1126)이라 부르고, 남으로 쫓겨난 후의 송을 남송(1127-1279)라고 부른다.

선비족 정복 왕조의 지배 귀족 씨족 출신인 수와 당 왕조의 창건자들은 팽창정책과 대국의 위세를 천하에 과시할 수 있었다. 당 왕조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송 나라는 당의 잔해를 거두어 나라를 세웠으나, 317년에 진 나라 지배자들이 남쪽으로 달아났듯이, 여진족 금에 의해 중원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남송은 달리(大理), 월남 등을 포함한 수많은 남방 영토를, 몽골에게 멸망되기 오래 전에, 상실했다. 7

여진족 조정은 1153년에 수도를 하얼빈에서 북경으로 옮겼고, 1161년에는 개봉으로 옮겼다. 금 나라 지배자들은 많은 여진족들을 북중국 정복지로 이주시켜 수비대 임무를 수행토록 했다. 하지만 많은 수의 여진족들은, 금 나라 시대 내내, 만주에 그대로 남아 옛 전통적 생활을 계속했다.

여진족 금나라는 유목민 고유의 기병대에 손색없는 기병을 보유하는 전방 수비대들을 유지했다. 세습적인 여진족 군호(軍戶)들은 한족 농민들로부터 빼앗은 농토와 노예들을 배정 받았고, 한족들과는 분리되어 정착시켰다. 하지만 여진족 병사들이 영농-수비대 생활방식에 완전히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8

금의 정복을 피해 달아난 일단의 거란 귀족들은 서방으로 계속 이동을 하여 서요 왕조(흑거란, 1124-1211)를 수립했다. 9 다분히 몽골적인 이들 거란족이 몰려와 돌궐 유목민들을 복속시킨 것은, 100여 년 후, 징기스칸의 진짜 몽골족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거란족과 마찬가지로 여진족도 자신들 고유의 문자를 사용하고 수도 개봉에 여진 언어 학교를 만들어 자신들의 종족적 정체성을 보존하려고 노력했다. 10 금의 세종(世宗, 1161-89)은 여진족 지배층에게 전쟁과 사냥 훈련을 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귀족들은 정기적으로 수도 개봉을 떠나 내몽골 혹은 만주 땅에 천막을 치고 혹독한 생활로 단련을 하면서 말 타고 활 쏘는 기술을 연마토록 강요되었다. Crossley(1997: 23)에 의하면, "세종의 실험은 성공적은 아니었지만, 후에 중국대륙을 통치하게 되는 만주족 황제들에게는 본보기가 되는 동시에 경고도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족에 파묻혀 버린 여진족 이주민들의 중국화 추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는 없었다.

고려와 금이 모두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천명

요와 북송(960-1127)을 정복한 후, 금 나라 지배자들은 고려 조정에 신하-주군 (臣屬) 관계를 요구했다. 고려는 영토 보전의 대가로 금의 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Ledyard(1983: 324)에 의하면, "고려는 본래의 영토를 보전하는 동시에 압록강 아래 땅을 추가할 수 있었다. 송 나라가 여진족에게 북중국 전체를 빼앗긴 반면, 고려는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여진족의 침략을 회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송 왕조는 (북송, 960-1127, 남송, 1127-1279) 계속 남쪽으로 쫓기어 내려가다가 마침내는 완전히 멸망했는데, 놀랍게도 고려 왕조(918-1392)는 거란의 요(916-1125), 여진의 금(1125-1234), 몽골의 원(1206-1368) 등을 모조리 겪으면서 이들 모두보다 더 긴 수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려와 금 나라의 창건자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추적하면서, 모두 다 옛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천명했다. 왕건은, 비록 영토는 압록강까지 밖에 이르지 못했지만, 자신의 신생왕국 명칭을 고구려를 본 따 고려라 불렀고, 금 나라 창건자는, 왕건 보다는 한 발 늦었지만, 실제로 그 넓은 만주 전 강역을 점령했고, 금사에 기록된 바와 같이, (완안부) 시조 자신이 본래 고려에서 왔다고 (혹은 고구려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일찍이 발해는 일본열도의 야마도 왕국과의 공식 외교문서에서 자신을 고려라 불렀다. 11 금 나라를 세운 완안 씨족의 국가수립 이념은 생 여진족을, 고구려 사람을 선조로 하는, 발해의 유민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12

1136년, 고려 조정에서는, (묘청의 故土수복 이념-요즘의 평양인 西京이념-으로 대변되는) 고구려 법통을 신봉하는 파가(한반도 지배만으로 만족하는 신라 귀족 후손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신라 후계자임을 신봉하는 유학(儒學)파와의 싸움에서 패했다.13 이 싸움에서 유학파의 승리는 1170년에 무신의 난이 일어날 때까지, 문신 지배체제를 확립했다. 1145년에 완성된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김부식은 사대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고려를 한반도에 한정된 신라의 후계자로 상정하여 같은 시대의 발해 (689-926) 237년 역사를 제외한 채 통일 신라 (677-935) 258년 역사만을 삼국사기에 첨부했다.

발해와 신라를 북조와 남조로 설정

일연(一然), 이규보(李奎報), 이승휴(李承休), 유득공(柳得恭) 등의 글은, 고구려의 정신적 후계자들이 김부식의 왜곡을 교정하고 요동을 포함하는 옛 고구려의 만주 강역에 대한 법통을 역사적 근거로 뒷받침 하려는 노력이라 볼 수 있다. 14 유득공은 고려 조정이 발해와 신라의 역사를 "북조와 남조의 역사"라는 구도로 편찬을 하지 못한 사실을 개탄했다.

유득공은 발해고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웅거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웅거하여 백제라 하였으며, 박-석-김씨가 동남쪽에 웅거하여 신라라 하였다. 이들이 삼국을 이루어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들이 남북국을 이루었으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란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의 땅으로, 발해가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물리치고 이전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한 뒤에 왕씨가 이를 통합하여 고려라 하였는데, 남쪽 김씨의 땅은 전부 거두었지만, 북쪽 대씨의 땅은 모두 거두지 못했다. 일부는 여진족 땅에 편입되기도 하고, 일부는 거란족 땅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 발해가 요 나라에 멸망되었어도 … 발해 수도 홀한성이 함락되었을 때 고려로 도망해 온 사람들이 세자 이하 10여 만 명이나 되었다. … 장건상은 당나라 사람이었으면서도 오히려 발해국기를 편찬 했는데, 고려 사람은 어찌 발해 역사를 편찬 할 수 없었단 말인가?"

동아시아 역사 강의: 3-3 (2005. 8. 6.)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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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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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Barfield (1989: 176-8) 참조.

2. 당 나라 때에는 “야만”의 생 여진족을 흑수 말갈이라 불렀다.

3. 金史 卷一 本紀 第一 世紀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 兄…留高麗不肯從…始祖居完顔部僕幹水之 涯 … 招諭渤海人曰 女直渤海本同一家 蓋其初皆勿吉之七部也      
금사는 고구려를 고려라 쓰기 때문에 이 기록의 고려도 고구려로 간주할 수 있지만, 函普가 900년경 전후의 인물인 것으로 보면 이 기록의 고려는 고구려가 아니라 신생 고려(918-1392)라고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주원류고에서는 금사 기록의 고려를 분명히 고구려로 간주한다.

4. 欽定滿洲源流考 卷七 部族 完顔 五代 金史世紀
金之先出靺鞨氏古肅愼地也…金之始祖 初從高麗來  按通考及大金國志云 本自新羅來 姓完顔氏 考新羅 與高麗舊地相錯 遼金史中往往 二國互稱不爲分別 以史傳按之 新羅王金姓 相傳數十世 則金之自新羅來 無疑建國之名 亦應取此 金史 地理誌 乃云以國有金水源爲名 史家附會之詞未足憑耳  居完顔部
卷七 部族 完顔 遼 祥符三年 契丹征高麗道由女眞 女眞復與高麗合兵拒之 契丹大敗而還 自天聖後屬契丹世襲節度使兄弟相傳 其帥本新羅人 號完顔氏 女眞服其練事以首領推之自哈富…哈富生… 生…次太祖次太宗 …國號大金
卷七 部族 元  … 金始祖 本從 新羅來 號完顔氏 所部稱完顔部 新羅王金姓則金之遠派出

금사 지리지를 보면 금이라는 국가 명칭은 송화강 하류로 흘러 드는 “아시”라는 강의 여진 명칭에서 유래한다고 말한다. 금 조정은 이 외지고 작은 강 유역에 상경을 설치했었다. Janhunen (1996: 155) 참조. 만주원류고를 편찬한 청 나라 황제들은 명백히 금 나라 시조가 자신들의 직계 선조라고 믿었다.

欽定滿洲源流考 卷首諭旨 上諭頃閱金史世紀云 金始祖居 完顔部 其地有白山黑水…本朝肇興 .. 與大金正同 史又稱金之先出靺鞨部古肅愼地…我朝得姓曰愛新覺羅氏 國語爲金曰愛新 可爲金源同派之證

5. Franke and Twitchett (1994: 265 and 273) 참조. Twitchett and Tietze는 여진족이 “요 나라와 접촉을 하면서 좀더 조직화되고 제도화된 정부 형태를 인지하게 되자 전통적인 부족 조직 만으로는 거란족과 겨루어 볼 수가 없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Franke and Twitchett (1994: 220). Fairbank and Goldman(1992: 115)은 “요 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한족과 유목민을 포괄하는 금 제국은 초원의 말과 북중국의 곡물을 통합 하고 송을 공격해 남쪽으로 쫓아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6. Jagchid and Symons(1989: 134-5)은 “25만 량의 은과 25만 필의 비단을 매년 바치고, 남송 스스로가 금의 제후라 선언했다”고 말한다. 남송 황제는 여진족 금 나라의 지배자를 숙부 황제라고 불렀다.

金史 卷六 本紀 第六 世宗上 五年正月 宋…以國書來… 稱『姪宋皇帝』 稱名『再拜奉書于叔大金皇帝』

7. Hsiao (1978: 6-7)에 의하면, “8세기가 시작되면서 징집된 병사들을 대체하기 시작한 용병들은 송 대에 와서 절정에 달했다.” 100만이 넘는 용병들은 북송, 남송 양 대에 걸쳐 정부 재정의 80% 이상을 이상을 소모시켰으나, 용병의 구성내용을 보면 대부분 굶주린 부랑자, 무위도식 꾼들, 그리고 범죄자들로 채워졌었다.

8. Hsiao(1978: 29)에 의하면, “여진족 병사들은 농경을 하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받은 농토를 한족에게 소작을 주다가 마침내는 모두 팔아버렸다.” Hsiao(1978: 9)에 의하면, 1187년 호구조사에 등록된 450만 인구 중 45%가 세습 여진족 군호에 속했다. Fairbank and Goldman(1992: 115)에 의하면, 금 나라 때, [노예를 포함해] 여진족은 600만, 요 나라로부터 존속하는 거란족이 400만, 그리고 정복된 북중국의 한족이 3천500만으로 추계되었다.

9. Grousset (1970: 186) 참조. 서요(西遼) 왕조는 발카쉬 호수 남쪽 무슬림 투르케스탄에 위치 했으며, 영토가 하미로부터 아랄 해에 달하여, 카쉬가르, 탈라스, 타쉬켄트 등을 포함했다. 서요는 트랜스-옥시아나와 이란을 지배하고 있던 무슬림 돌궐족의 호와리즘 제국과 서쪽 국경을 이루었다. 몇몇 거란 부족들은 계속 서방으로 이동을 하여, 11세기 중엽, 우랄과 볼가강 지역에 이르러, 당시 러시아 초원을 지배하던 킵챡 돌궐족 지배층에 합류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10. Fairbank and Goldman (1992: 115) 참조. Crossley(1997: 21)는 여진족이 거란 문자를 약간 변형시켜 자신들의 말을 기록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11.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고구려를 단순히 고려라고 기록한다.

12. Rogers (1983: 159) 참조.

13. Ledyard (1983: 152)는, 신생 고려 왕국의 군 출신 지도자들은, 멸망한 신라의 귀족들이 오랜 기간 체득한 전문적인 국가 경영 기술을 간절하게 필요로 했고, 결과적으로 신라인의 정서가 수도 개성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14. 대략 1281-3년 기간 중에 편찬된 삼국유사, 이규보가 1193년에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동명왕(東明王) 편, 이승휴(1224-1300)가 저술한 제왕운기(帝王韻紀), 유득공(1748-1807)이 1784년에 완성한 발해고(渤海考) 등을 참조.

15. 柳得恭  渤海考
高麗不修渤海史 知高麗之不振也 昔者高氏居于北曰高句麗 夫餘氏居于西南曰百濟 朴昔金氏居于東南曰新羅 是爲三國 宜其有三國史 而高麗修之 是矣 及夫餘氏亡高氏亡 金氏有其南 大氏有其北 曰渤海 是爲南北國 宜其有南北國史 而高麗不修之非矣 夫大氏者何人也 乃高句麗之人也 其所有之地何地也 乃高句麗之地也 而斥其東斥其西斥 其北而大之耳 及夫金氏亡大氏亡 王氏統而有之 曰高麗 其南有金氏之地則全 而其北有大氏 之地則不全 或入於女眞 或入於契丹 ... 渤海爲遼所滅 ... 其忽汗城之破也  世子以下奔高麗者十餘萬人 無其官則必其書矣 ... 建章唐人也 尙著渤海國記 以高麗之人 而獨不可修渤海之史乎


The
Eastern Manchurian Woodsmen Replacing
the Western Manchurian Nomads

The Qidan Liao replaced by the ruzhen jin

Wontack Hong
Professor, Seoul University


the ancestor of the Wan-yen clan had originally come from koryeo (or Koguryeo)

By 1034-44, the northeastern frontier kept reporting alliances among the Parhae, wild Ruzhen tribes, and Koreans, necessitating the Qidan Liao punitive expeditions.1 The Qidans had incorporated some Ruzhen tribes (likely those Mohe-Ruzhen people that constituted the Parhae population) into the Liao state, who were called “tame” Ruzhen. Those who were not under Liao control were known as “wild” Ruzhen. 2 The frequent revolts and wars along its northeastern flank drained the Liao dynasty. The Liao state was taken over in 1125 by the wild Ruzhen tribes from eastern Manchuria.

Aguda, the founder of the Jin or “Golden” dynasty (1115-1234), was a leader of the Wan-yen tribe from the mountainous Korean borderland. He was able to expand his dominance over the other wild Ruzhens during the eleventh century. The History of Jin states, at the very beginning, that the founder of the Jin (implying the ancestor of the Wan-yen clan, by the name of Han-pu who lived sometime around the year 900) had originally come from Koryeo (or Koguryeo). Aguda is recorded to have stated that “the Ruzhen and the Parhae were originally the one and the same family.” 3

The Chronicle of Great Jin states that the founder of the Jin dynasty (implying the ancestor of the Wan-yen clan), though recorded to have come from Koguryeo in the History of Jin, had originally come from Silla with the clan name of Wan-yen. Since the Silla royal surname of Kim has been transmitted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over many dozens of generations, the Chronicle continues, the royal surname of Silla without doubt became its dynastic name. 4

the woodsmen of eastern manchuria

Unlike the steppe nomads, the Ruzhens relied upon farming as much as upon hunting and fishing. The Ruzhens had a mixed (say, semi-nomadic or semi-sedentary) economy that combined patchy farming with stock-raising, hunting, and fishing. They were forest tribes and yet had a fine cavalry. Their tribal organization and their archery and horsemanship perfected by hunting had produced a military tradition similar to their nomadic neighbors. The tribal families were grouped together under their hereditary commanders. The Ruzhens worked hard in the fields to earn a meager living but, once in war, they devoted themselves to fighting, as if it were a family affair, in order to capture booty.

The Ruzhens absorbed the conquered tribes, even including the surrendered Chinese and the Qidan tribes, as new military units under the command of their own native tribal leaders. The early Yan dynasties (designated either as the Former, Later, Western or Southern Yan, 349-410) had fallen victim to another Xianbei tribe, the Touba Wei (386-534), that went on to unify North China. Seven hundred years later, the Qidan Liao also fell victim to another Manchurian tribe, the Ruzhens, who went on to conquer North China, seizing the whole Central Plain from Song.

Maintaining the dual administrative structure

The Ruzhens Jin had inherited the dual administrative structure of the Qidan Liao dynasty. Twitchett and Tietze states that “the basic feature of their government and administrative system was the complex interplay between native Ruzhen traditions, features inherited from the Liao state and the Chinese (Song) influence,” and that the socio-military organization of the Ruzhen Jin was “a precursor of the Manchu banner system” (see Franke and Twitchett, 1994, pp. 265 and 273). 5

The Ruzhens occupied all of North China by 1126, including the Song capital of Kaifeng. In Chinese history, the year 1126 marks the second time the Han Chinese were driven out of the Central Plain by a Manchurian conquest dynasty. A new Song capital was established at Hang-zhou south of the Yangzi River. In 1141 the Song court formally ceded the whole area north of the Huai River and agreed to vassalage and payment of tributes to the Jin.6  The Song dynasty prior to the loss of North China is called the Northern Song (960-1126), and after its loss, the Southern Song (1127-1279).

The founders of the Sui and Tang dynasties, who were born of the ruling aristocratic clans of the Xianbei conquest dynasties, could demonstrate expansionism and assertiveness. The Song, the self-claimed heir to the Tang dynasty, had picked up the pieces of the shattered Tang state, but was completely pushed out of the Central Plain by the Ruzhen Jin, as did the (Eastern) Jin court with its flight southward in 317. The Southern Song lost control over many regions in the south including Ta-li and Vietnam long before it was annihilated by the Mongols. 7

The Ruzhen court had moved its capital from Ha’erbin to Beijing in 1153, and then to Kaifeng in 1161. The Jin rulers resettled many of the Ruzhen people into the conquered land of North China to perform garrison duties. Many Ruzhens had still remained in Manchuria during the Jin period, and continued to live in the old traditional manner.

The Ruzhen Jin maintained border garrisons equipped with a cavalry equal to the nomads’ own. The hereditary Ruzhen military families were allocated slaves and farmland confiscated from the Han Chinese farmers, and they were kept separate from the Chinese population. It was, however, difficult for the Ruzhen soldiers to adjust fully to the settled farming-garrison life.8

A group of Qidan nobility who escaped the Jin conquest of the Liao moved westwards, and established the Western Liao dynasty (Black Qidan, 1124-1211). 9 The arrival of these rather Mongolic Qidan tribes to subjugate Turkic nomads presaged, by a hundred years, the arrival of the pure blooded Chenggis Khanite Mongols themselves.

Like the Qidan, the Ruzhens also tried to maintain their ethnic identity, using its own script and setting up Ruzhen language schools at Keifeng.10 The Jin emperor Shi-zong (r.1161-89) instituted a program to train Ruzhen elites in warfare and hunting. Aristocrats were compelled to leave Kaifeng and set up camp in Inner Mongolia or Manchuria to toughen them up by experiencing a harsher life and to develop their skills in riding and shooting. Crossley (1997: 23) notes that the Shi-zong’s “experiment, which was not a success, was considered both a model and a warning by the Manchu emperors who later ruled China.” Being immersed in the Chinese population, the resettled Ruzhens could not effectively resist sinification.

Koryeo and Jin claiming the successor to Koguryeo

After conquering the Qidan Liao and Northern Song (960-1127), the Jin rulers demanded the Koryeo court to enter into a suzerain-subject relationship. The Koryeo had no alternative but to assent to Jin’s demand as the price of its territorial integrity. Ledyard (1983: 324) notes: “Koryeo managed to hold on to what it had and still add the cis-Yalu area. And while Song lost all of northern China to the Ruzhens, Koryeo managed to settle its affairs diplomatically and thus warded off a Ruzhen invasion.”

Amazingly enough, the Koryeo dynasty (918-1392) survived and outlived the Qidan Liao (916-1125), the Ruizhen Jin (1125-1234) and the Mongol Yuan (1206-1368), while the Song dynasty (960-1127-1279) was pushed further and further down to south only to be completely wiped out.

The founders of both the Koryeo and Jin dynasties, in quest for their origins, claimed the successor to ancient Koguryeo: the former by naming his new state Koreyo, a shortened form of Koguryeo, though its rule barely extended to the Yalu River, and the latter, having occupied vast Manchurian domains but, facing Wang Keon’s prior claim, by asserting that the founder originally came from Koryeo (or Koguryeo).11 Parhae had referred to itself as Koryeo in official communications with the Yamato kingdom, and the state-founding ideology of the ruling Wan-yen clan was to perceive the wild Ruzhens as the remnant people of Parhae with Koguryeo ancestry.12

In Koryeo, the faction adhering to the legacy of Koguryeo, represented by the irredentist ideology (or the ideology of Western Capital, the modern Pyung-yang) of the monk Myo-cheong, lost their battle in 1136 against the Silla-successionist Confucian faction represented by Kim Busik of royal Silla descent who were satisfied with the peninsular status.13 The triumph of the Confucianist faction inaugurated dominance by the civil officialdom until the military coup in 1170. In compiling Samguk-sagi (completed in 1145), Kim Busik accepted the Serve-the-Greater ideology, postulated Koryeo as the heir of Silla with peninsular setting, and added the 258-year history of “Unified” Silla (677-935) ignoring the history of its contemporary, Parhae (689-926).

Parhae and Silla as the Northern Dynasty and the Southern Dynasty

The writings by Il-Yeon, Yi Kyubo, Yi Seung-hiu, and Yu Deuk-gong represent the efforts of the spiritual heirs of Koguryeo to redress the Kim Busik’s distortions and give a historical foundation for a de jure claim to Koguryeo’s Manchurian domains including the Liao-dong area.14 Yu Deuk-gong deplored the Koryeo’s failure to compile “the History of Northern Dynasty and the History of Southern Dynasty” dealing, respectively, with Parhae and Silla.

Yu Deuk-gong wrote the preface for his study on the Parhae History as follows.15 The Koryeo did not compile the History of Parhae, and so we understand the limited growth of its national power. In old days, the Ko clan resided in the north calling their nation Koguryeo, the Puyeo clan resided in the southwest calling their nation Paekche, and the Pak-Seok-Kim clans resided in southeast calling their nation Silla. These were the Three States whose histories should be duly compiled, and the Koryeo rightly obliged with their compilation. With the fall of the Puyeo clan and the Ko clan, the Kim clan occupied the south, and the Tae clan occupied the north calling their nation Parhae. Silla and Parhae should, respectively, be called the southern and northern states with the southern and northern dynastic histories, and yet the Koryeo compiled only the history of (unified) Silla. This was wrong. After all, who were the Tae clan? They were precisely the Koguryeo people. Whose territory did the Tae clan occupy? It was precisely the Koguryeo territory, and they could expand it further to the east, west and north. With the fall of the Kim clan and the Tae clan, the Wang clan unified the nation and called their nation Koryeo. They could occupy the whole of the Kim clan’s territory in the south, but could not occupy the whole of the Tae clan’s territory in the north. A portion of the northern territory was lost to the Ruzhen, and a portion of it to the Qidan. … Even though the Parhae was destroyed by the Liao, … when its capital was captured, the Crown Prince and 100 thousand Parhae people escaped to Koryeo. … Zhang Keon-zang (806-66) was a Tang person, and yet he had compiled the History of the Parhae State. How come, the Koryeo people could not compile the history of Parhae?


BIBLIOGRAPHY


[각주]


1 See Barfield (1989: 176-8).

2 During the Tang dynasty, the Savage Ruzhen had been called the Black-Water (Hei-shui) Mohe.

3 金史 卷一 本紀第一 世紀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 … 兄…留高麗不肯從…始祖居完顔 部僕幹水之涯… 招諭渤海人曰 女直渤海本同一家 蓋其初皆勿 吉之七部也 See also Twitchett and Tietze, p. 219, in Franke and Twitchett (1994).
 
4 欽定滿洲源流考
卷七 部族 完顔 五代 金史世紀
金之先出靺鞨氏古肅愼地也…金之始祖 初從高麗來 按通考及大 金國志云 本自新羅來 姓完顔氏 考 新羅與高麗舊地相錯 遼金史中往往 二國互稱不爲分別 以史傳按之 新 羅王金姓 相傳數十世 則金之自新 羅來 無疑建國之名 亦應取此 金史 地理誌 乃云以國有金水源爲名 史 家附會之詞未足憑耳  居完顔部

卷七 部族 完顔 遼 祥符三年 契丹征高麗道由女眞女眞復與高麗合兵拒之 契丹大敗而還 自天聖後屬契丹世襲節度使兄弟相傳
其帥本新羅人 號完顔氏 女眞服其練事以首領推之自哈富…哈富生… 生…次太祖次太宗 …國號大金

卷七 部族 元  … 金始祖 本從 新羅來 號完顔氏 所部稱完顔部 新羅王金姓則金之遠派出

The Geography Section of the History of Jin, however, states that the dynastic name Jin (implying Golden in Chinese and Alchun in Tungusic) might have been based on the Ruzhen name of the river Ashi, a southern tributary of the Lower Song-hua. on this minor local river, the Ruzhen established their Supreme Capital. See Janhunen (1996: 155).

The Qing emperors clearly believed that the founders of the Jin dynasty were their direct ancestors.

欽定滿洲源流考 卷首諭旨 上諭頃閱金史世紀云 金始祖居完顔部 其地有白山黑水…本朝肇興 .. 與大金正同 史又稱金之先出靺鞨部古肅愼地…我朝得姓曰愛新覺羅氏 國語爲金曰愛新 可爲金源同派之證
5 Twitchett and Tietze note that “the contacts with the Liao state and the resulting acquaintance with the ways of a more organized and structured type of government led to a growing awareness that the traditional tribal organization would be insufficient if the Ruzhens wanted to match the Qidans.” See Franke and Twitchett (1994: 220).
Fairbank and Goldman (1992: 115) note: “Like the Liao, the Sino-nomadic Jin empire could combine the horses of the grasslands and the grain of North China to mount military assaults and force the Song southward.”
 
6 Jagchid and Symons (1989: 134-5) note that: “two hundred and fifty thousand taels of silver and two hundred fifty thousand rolls of silk were to be presented annually,” and “the Southern Song were also to declare themselves vassals of the Jin.” The Song emperor called the Ruzhen ruler as “Uncle Emperor.”

金史 卷六 本紀第六 世宗上 五年正月 宋…以國書來… 稱姪宋皇帝 稱名 再拜奉書于叔 大金皇帝

7 According to Hsiao (1978: 6-7), “the mercenary army that had begun to replace the conscript army since around the turn of the eighth century became full-fledged under the Song.” The ranks of the mercenary army, numbering over one million soldiers and costing more than 80 percent of government revenues throughout most of the two Song dynasties, were mainly filled with starving vagabonds, idlers, and criminals.

8 According to Hsiao (1978: 29), “the Ruzhen soldiers of the Jin were reluctant to cultivate land; first they leased the land allocated to them by the government to Chinese tenants, and eventually they sold it in toto.” According to Hsiao (1978: 9), about one-seventh of the 45 million people registered in the 1187 census were members of these hereditary Ruzhen military families. According to Fairbank and Goldman (1992: 115), the Ruzhens of the Jin dynasty totaled about 6 million [including slaves], the Qidans remaining from the Liao dynasty about 4 million, and the Han Chinese subjects in North China about 35 million.

9 Grousset (1970: 186)
It was located in Muslim Turkestan south of the Lake Balkhash, extending from Hami to the Aral Sea and including Kashigar, Talas, and Tashkent. It shared a common boundary with the Muslim Turkic empire of Khwarizm in the west that ruled Transoxiana and Iran. Several Qidan clans are believed to have made a further westward migration to the Ural and Volga regions, joining the ruling class of Kipchak Turks, the masters of the Russian steppe, by the middle of the eleventh century.

10 See Fairbank and Goldman (1992: 115). Crossley (1997: 21) notes that the Ruzhens had adapted Qidan script for the writing of their own language.

11 In Kojiki and Nihongi as well as in the History of Jin, Koguryeo is written simply as Koryeo.

12 See Rogers (1983: 159).

13 Ledyard (1983: 152) notes that the military leaders of the new state badly needed the expertise in administrative affairs which the aristocracy of the defunct Silla state could offer, and the Silla ethos quickly gained the ascendancy in Kae-seong.

14 See Samguk-Yusa written by the Monk Il-Yeon in ca. 1281-3, “Ode to King Tong-myung” in Dong-guk Yi-sang-guk Jip written by Yi Kyu-bo in 1193, Zhe-wang Ungi (Rhymed Record of Theocrats and Kings) by Yi Seoung-hiu (1224-1300), and Parhae-Ko completed in 1784 by Yu Deuk-gong (1748-1807).

15 柳得恭  渤海考
高麗不修渤海史 知高麗之不振 也 昔者高氏居于北 曰高句麗 夫餘氏居于西南 曰百濟 朴昔金 氏居于東南 曰新羅 是爲三國 宜其有三國史 而高麗修之 是矣 及夫餘氏亡高氏亡 金氏有其南 大氏有其北 曰渤海 是爲南北國 宜其有南北國史 而高麗不修之 非矣 夫大氏者何人也 乃高句麗 之人也 其所有之地何地也 乃高 句麗之地也 而斥其東斥其西斥 其北而大之耳 及夫金氏亡大氏 亡 王氏統而有之 曰高麗 其南 有金氏之地則全 而其北有大氏 之地則不全 或入於女眞 或入於 契丹 ... 渤海爲遼所滅 ... 其忽 汗城之破也  世子以下奔高麗者 十餘萬人 無其官則必其書矣 ... 張建章唐人也 尙著渤海國記 以 高麗之人 而獨不可修渤海之史 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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