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문화재단은 2003년 1월 과학기술인들에게는 명예와 자긍심을 심어주고, 과학기술을 존중하는 사회 문화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을 마련했다.
명예의 전당에 초대 헌정된 과학기술인 15인은 △최무선 △이천 △장영실 △이순지 △허준 △홍대용 △김정호 △지석영(추후에 제외됨) △이원철 △우장춘 △이태규 △안동혁 △현신규 △최형섭 △이호왕이다.
과학은 늘 미래를 향해 전진해 왔다. 우리의 과학기술 선현들 또한 그들이 살았던 시대적 요구에 충실하면서 한 발 앞서 미래를 열어갔던 선구자이자 개척자였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분들의 면면을 보면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빛나는 과학전통이 있었노라고 자랑스럽게 외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청소년들의 이공계 기피현상으로 우리 과학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고 말하는 이즈음 과학기술 선현들의 생애와 업적을 바라본다는 것처럼 의미 있는 것은 없을 듯하다.
〈"그림도 그릴 줄 압니다"라고 말한 다빈치〉
인류 역사상 최고의 멀티플레이어 하면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도 불려지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꼽는다. 실제로 그는 미술뿐만 아니라 해부학, 물리학, 건축학, 수학, 지질학, 식물학, 심지어 도시계획, 디자인, 요리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재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폭넓은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발휘했다.
다 빈치가 이와 같이 전천후 천재로 자리매김하는 데는 어려서부터 자신이 보는 모든 일에 호기심을 보이는 등 특이한 성장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태어난 후 몇 년 동안 가장 왕성한 호기심을 보인다.
“엄마. 이건 어떻게 이렇게 되는 거야?”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요?” “아빠. 아기는 어디서 나오나요.” 등등
이런 질문을 하지 않고 자란 아이는 거의 없지만 유독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이 있다. 다 빈치가 죽은 후 30년이 지났을 때 다 빈치의 전기를 쓴 바사리는 ‘어린 다 빈치는 선생에게 끊임없이 궁금한 점과 어려운 문제를 질문했으며 때로는 선생을 곤혹스럽게 했다.’고 말했다. 부모들도 자식이 계속 ‘왜’, ‘어째서’라는 질문을 해대면 화내기 십상인데 다 빈치와 부딪치는 어른들은 먼 곳에서 그를 보기만 해도 길을 피해서 갈 정도였다.
인류사상 가장 유명한 천재 중의 한 명인 다 빈치의 이러한 어릴 적 행동을 심리학자들은 전형적인 ‘주의력 결핍 및 과잉행동장애(ADHD: Attention Deficit Hyperactvity Disorder)’를 갖고 있는 치료하기 어려운 문제아로 간주한다. 주로 학령 전기 또는 학령기에 흔히 관찰되는 장애로서 필수증상은 주의산만, 과잉행동, 충동조절의 어려움 등을 나타낸다. 남자 어린아이가 여아보다 3∼6배 더 흔히 발생한다.
오늘날 심리학자들은 ADHD 아동들이 정서불안으로 감정이 급변하지만 대단히 뛰어난 특수 능력을 가진 경우가 많다고 하며 이런 아이들을 주의 깊게 지도하라고 한다. 이런 아이들은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하면 아주 높은 집중력과 능력을 발휘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하튼 다 빈치가 주위의 어른들을 붙잡고 ‘왜?’라는 질문을 연발해서 납득할 수 있는 답이 얻어질 때까지 계속 질문하여 어른들을 골치 아프게 했지만 다 빈치가 일반 ADHD 어린아이와 다른 것은 어른들에게 질문을 하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자연을 면밀히 관할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실험을 했다. 다 빈치가 얼마나 많은 의문을 갖고 있었는지 그의 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인간이라는 한 종류가 형성하는 행위만 해도 얼마나 많으며 다양한가.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종류의 동물이 있으며 또 나무와 꽃이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다양한 언덕과 평지가 있으며, 샘과 강, 도시, 공공 건물과 개인 건물이 있는가. 또 인간이 쓰기에 적절한 도구는 얼마나 다양한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해답을 찾으면서 시골길을 거닐었다. 어째서 흔히 바다에서 발견되는 산호초와 식물과 해초의 흔적 그리고 조개 껍데기가 산꼭대기에서도 발견되는 걸까? 왜 천둥은 그것을 일으키는 시간보다 여운이 더 오래 지속될까. 그리고 번개가 치면 어째서 천둥이 그 뒤를 따라 이어지는 걸까. 돌이 떨어진 수면 위로 생기는 원은 얼마나 다양하며 새는 어떻게 공중에서 버티고 있을 수 있을까? 이런 이상한 현상들에 대한 질문이 평생토록 내 생각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케네스 클라크는 다 빈치를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 가운데 가장 호기심이 많은 사람’으로 평했다.
다 빈치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일 먼저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와 이탈리아의 로마에 있는 「최후의 만찬」을 떠올린다. 그런데 다 빈치가 얼마나 다재다능한 사람인가 하는 것은 그가 후에 밀라노공이 되는 루도비코 스포르차(일 모르의 본명)에게 자기 자신의 추천장을 보내면서 자신의 본업이 화가가 아니고 뛰어난 군사 기술자라며 10개조에 걸쳐서 그의 재주를 적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경량이면서도 강하고 분해할 수 있는 다리, 운반에 편리한 박격포, 성채 공격용 사다리, 소리내지 않고 터널을 뚫는 방법, 전차, 대포나 화약에도 견디는 힘이 강한 선박, 건물의 건설이나 수도공사,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만드는 조각 등을 자신이 훌륭하게 마무리할 수 있다고 적었다. 자신의 그림 실력에 대해서 단지 ‘그림도 그릴 줄 안다’라고 적었다.
당시에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보다는 건축가나 군사기술자가 우대를 받았기 때문이지만 「모나리자」 한 점 만으로도 세계인들를 경탄하게 만드는 것을 볼 때 그가 얼마나 놀라운 전천후 천재임을 알 수 있다(그는 「모나리자」 등 12점의 그림만 그렸다).
<한국의 멀티플레이어 이천>
갑자기 다빈치에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과학 분야에서도 다 빈치에 버금가는 멀티플레이어가 있는데 이천(李蓚, 1376∼1451)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더구나 다 빈치가 개인적인 관심과 취미 차원에서 다재다능함을 펼쳤다면, 이천은 그가 담당한 분야 하나 하나가 모두 당시의 주요 국가적 과제였으며 그 모두에서 놀라울 만한 성취를 낳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과학기술부와 한국문화재단에서 2003년 1월에 선정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공식 업적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다방면에 탁월한 재주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천은 세종시대에 이루어진 여러 과학기술의 업적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다. 뛰어난 무장으로서 대마도 정벌과 북방의 야인 정벌 등의 공을 세우고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긴 과학기술자이다. 그는 15세기에 세계 수준을 자랑하는 천문기구 제작의 책임자였고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전시켰으며 화약무기 개발과 악기 개량, 도량형 표준화 등에서도 실력을 크게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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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박물관에 전시된 잠수함 이천호(4분의1축소 모형). |
세종대왕의 재위기간인 1418∼1450년은 모든 과학기술 분야에서 황금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볼 때 국책사업으로 과학기술을 선도하여 천문학은 물론 활자인쇄, 도량형, 화약, 농업, 의약, 음악 분야 등 과학기술이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루었다. 물론 그 사업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 한글을 창제한 것임은 부연할 필요도 없다.
세종이 이와 같이 과학기술에 열성을 쏟은 것은 조선왕조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데 그 배경이 있다. 고려 시대의 갈등 요소를 끌어안고 새로 출발한 이씨 왕조는 태종 때까지 실력자들의 싸움과 왕자들 사이의 권력 투쟁을 겪었다. 세종은 조선왕조 제4대 임금으로 어떻게 해서든 새 왕조의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유교적 이념의 틀에 알맞게 제도를 정비하고 나라를 번듯한 반석 위에 올려놓아야 했다.
세종이 왕이 된 1418년은 아직 새왕조가 개창된지 겨우 20여년 밖에 안된 초창기이므로 잘못하다가는 구세력의 반작용이 새 왕조의 틀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집권세력은 모든 제도를 새롭게 정비함으로써 새왕조의 권위를 높이고 그 정통성을 국민들로부터 추인 받아야 했다. 이를 위해서 신정부는 당시 조선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중국의 선진문물을 도입하고 이를 개량하거나 개선하여 백성들을 계도시키는 것이 관건이라고 판단했다.
신정부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이를 뒷받침해준 것은 태종이었다. 태종은 이성계가 이씨조선을 세울 때의 위기와 음모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집권한 18년 동안 후대에 이씨조선에 해를 끼칠 수 있는 모든 문제점을 정리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태종은 몇 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단행했고 심지어 자신의 처남들과 세종의 장인까지도 처치했다. 어느 정도 새왕조에 반기를 들 후환을 없애자 태종은 여러 아들 중에서 다리를 저는 셋째 아들 세종을 후계자로 세운 후 4년 간 후견인 역할을 했다.
이 점이 세종 때 폭발적인 문화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된 동기라 볼 수 있다. 이 말은 세종은 태종의 배려 덕분에 권력 투쟁에 휘말리지도 않고 아무런 걱정 없이 새 왕조가 필요한 것들을 착실히 다지는 데만 신경을 쓰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세종이 해야 할 업무는 대내외적으로 국정에 몰두하되 남보다 새로운 것을 가능한 한 많이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다 모든 일에 열성인 세종의 개인적인 취향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구나 그는 역대 왕들과는 달리 무려 32년 동안이나 왕의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세종 개인의 능력과 열성만으로 발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종이 조선 시대의 여러 왕들 중에서 남다른 점은 재주가 있는 사람이 천거되면 아무리 신분이 낮아도 적의적소에 임명하여 그의 역량을 발휘토록 했다는 점이다. 또한 과학기술 분야를 보다 빨리 정착시키기 위해 소위 '과학기술 프로젝트'를 창안하여 국가의 모든 역량을 투입토록 했다. 이 중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사람이‘명예의 전당’에 봉헌된 이천, 이순지, 장영실이다.
이천은 무신 출신이지만 세종의 과학기술 프로젝트에서 지휘자이자 감독자로서, 이순지는 이론을 담당하는 과학자로서, 장영실은 실제 제작과 개발을 담당한 기술자로서 역할을 수행토록 했다. 세종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한 세 명의 과학자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분야를 전공분야로 갖고 있었다.
이천 : 천문의기 제작을 총괄 지휘한 감독자 이순지 : 이론 천문학자로서 천문의기의 이론적 뒷받침 장영실 : 천문의기를 실무적으로 제작하고 개발한 기술자
〈세종의 과학기술 프로젝트 추진〉
조선 초기의 무신이자 과학자인 불곡(佛谷) 이천은 무신 집안 출신으로 고려 우왕 2년(1376)에 경상도 예안(본관은 예안 이씨)에서 군부판서(軍簿判書) 이송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천의 어머니 염씨는 고려말 임금과 맞먹을 권력을 갖고 있던 염흥방의 누이동생이다. 외가는 고려말 최고의 권문세력가인 곡성 염씨 집안이었지만 염흥방의 세도가 너무 높아 비난이 많자 최영 및 이성계의 협조를 받아 염흥방을 제거한다.
염흥방의 제거로 이천 집안은 풍지박산이 되는데 염흥방에 관련된 사람은 어린아이일지라도 무참히 살해되었다(이천의 아버지 이송 포함). 마침 이천과 그의 동생 이온은 한 승려의 도움으로 산 속에 피신하여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년시절부터 뛰어난 무술로 그의 나이 18세 되던 해인 태조 2년(1393)에 정7품 벼슬인 별장(別將)에 임명되었고 태종 2년(1402)에 무과에 급제했으며 1410년에는 무과중시(武科重試)에 합격했다. 조선 초기에는 아직 문과와 무과가 심하게 나눠져 있지 않을 때여서 그의 동생은 1401년 문과에 급제하기도 했다.
세종 원년인 1419년 왜구들이 충청도 앞 바다로 침입했을 때 우군첨종제(右軍僉摠制)로 임명되었다가 곧 우군 부절제사가 되어 이종무가 대마도를 토벌할 때 참가했다. 이천은 우군을 거느린 이지실을 보좌했는데 이때의 공으로 좌군 동지총제에 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종2품 무관급인 충청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으며 세종 2년(1420)에는 현재로 치면 과학기술부의 차관인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임명된다.
이천의 과학적인 재질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그가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였다. 이천은 군선의 물에 잠기는 부분이 빨리 썩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갑조법(甲造法, 판자와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방법)의 시행을 주장하고 군함의 선체는 크고 속도가 빨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주장에 따라 제조된 군선이 왜구의 토벌에 크게 기여하자 그의 과학적인 재질을 인정한 세종은 야심에 찬 국책프로젝트 중에 하나인 금속활자를 만들도록 전격적으로 공조참판에 임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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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주조광경. 한국은 연활자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자치통감강목』을 인쇄했다. 우리나라는 금속활자뿐만 아니라 연활자의 발명국이다. |
태종 3년(1403)에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널리 책을 읽어 이치를 깨닫고 마음을 바로잡아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중국의 바다 건너에 있어 중국 서적이 잘 들어오지 않을 뿐더러 판목은 부서지기 쉽고 노동력이 많이 들며 많은 서적을 인쇄하는 것이 어렵다. 이제부터 동활자를 만들어 책을 인쇄하고 널리 보급시키면 그 이득이 많을 것이다.”라는 어명을 받들어 활자 제작 및 출판 인쇄 기관으로 주자소가 설치되었다. 주자소는 설치되자마자 수개월에 걸쳐 금속활자를 주조했는데 이 활자가 유명한 계미자(癸未字)이다.
계미자본과 『직지심경』을 비교해보면 활자 주조술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개선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활자로 인쇄할 때는 고정된 청동판에 밀랍(蜜蠟)을 녹여 붓고 거기에 활자를 꽂아서 밀랍이 말라붙은 뒤에 인쇄를 시작했다. 이는 활자의 크기가 고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미자 역시 글자체가 크고 거칠며 고르지 못한 단점을 갖고 있는데다가 밀랍이 원래 연약하므로 활자가 쉽게 흔들리므로 인쇄량이 하루에 불과 몇 장밖에 되지 않았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한 것이 세종 4년(1422) 이천에 의해 만들어진 경자자(庚子字)이다. 경자자는 계미자에 비해 글자가 작고 정교하며 조판용 동판과 활자를 평평하고 바르게 만든 것이다. 경자자에 이르러 인쇄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는데, 인쇄할 때 밀랍을 사용하지 않아 작업 능률도 크게 올랐다. 계미자는 하루 인출능력이 여러 장에 지나지 않았으나 경자자는 이십여 장으로 늘어났다.
세종4년(1422) 10월 29일, 경자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주자(鑄字)를 만든 것은 많은 서적을 인쇄(印刷)하여 길이 후세에 전하려 함이니, 진실로 무궁(無窮)한 이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처음 만든 글자는 모양이 다 잘 되지 못하여, 책을 박는 사람이 그 성공(成功)이 쉽지 않음을 병되게 여기더니, 영락 경자년 겨울 11월에 우리 전하께서 이를 신념(宸念)하사 공조 참판 이천에게 명하여 새로 글자 모양을 고쳐 만들게 하시니, 매우 정교(精巧)하고 치밀하였다. 지신사 김익정과 좌대언(左代言) 정초(鄭招)에게 명하여 그 일을 맡아 감독하게 하여 일곱 달 만에 일이 성공하니, 인쇄하는 사람들이 이를 편리하다고 하였고, 하루에 인쇄한 것이 20여 장에 이르렀다. (중략)이로 말미암아 글은 인쇄하지 못할 것이 없어, 배우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니, 문교(文敎)의 일어남이 마땅히 날로 앞서 나아갈 것이요, 세도(世道)의 높아감이 마땅히 더욱 성해질 것이다. (중략)실로 우리 조선(朝鮮) 만세(萬世)에 한이 없는 복이다.”
이천을 보다 유명하게 만든 것은 경자자보다 더 아름다운 갑인자(甲寅字)를 세종 16년(1434)에 개발했기 때문이다. 20여만개의 대소활자로 주조된 갑인자는 대나무로 조판하여 빈 데를 완전히 메우는 조립식을 채택했고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필요에 따라 섞어서 조판할 수 있었다. 먹물도 진하고 잘 묻게 만들어 한결 까맣고 윤이 나도록 했으며 하루에 40여장을 인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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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류선생 문집』 갑인자 인본. 갑인자는 대나무로 조판해 빈 데를 완전히 메우는 조립식을 채택했고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필요에 따라 섞어서 조판할 수 있으며 하루에 40여장을 인쇄할 수 있었다. | 또한 이때 처음으로 한글활자를 주조하여 병용했으며 갑인자의 인쇄로 조선의 활판인쇄기술은 일단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갑인자는 이천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이 아니라 김돈, 김빈, 장영실, 이세형, 정척, 이순지 등 당시 과학기술자들을 총동원하여 이루어 낸 결실이다.
조선시대에 인쇄가 얼마나 발전했는지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발행한 라틴어 성경과 비교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성경은 총 1천2백 페이지였다. 그런데 이보다 20년 앞서 조선은 갑인자로 『자치통감강목』 5∼6백 부를 인쇄했다. 이 책의 한 권은 76페이지로 1부가 294권이므로 모두 합하면 2만2천344페이지가 된다. 이것을 5∼6백 부나 인쇄했으니 5백 부로 계산하여도 총 1천117만 페이지가 넘는다. 이는 구텐베르크의 인쇄본에 비해 1만 배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다.
또 이 시기엔 유럽에서도 과학기술서적을 활자로 출판한 예가 없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사여전도통궤』 『수시력첩법립성』 『오성통궤』 『칠정산내편』 『태양통궤』 『태음통궤』 등의 천문서적들과 수학서적 『양휘산법』, 선박 관련 서적 『승선직지록』, 군사서적 『진선』, 의학서적 『태산요록』 등을 이미 출판하고 있었다.
〈도량형 표준화 사업〉
일단 경자자로 조선의 인쇄술을 최고의 수준으로 향상시킨 뒤 이천은 다음 작업으로 도량형의 표준화 사업에 착수했다. 세종4년(1422) 6월 20일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임금이 공청이나 사가에서 사용하는 저울이 정확하지 아니하므로, 공조참판 이천에게 명하여 개조하게 했다. 이 날에 이르러 1,500개를 만들어 올렸는데, 자못 정확하게 되었으므로 전국에 반포하고, 또 더 만들어져 백성들로 하여금 자유로이 사들이게 했다.”
도량형의 표준 작업은 그 후 자(尺)와 되, 말의 정비로 이어져 조선왕조의 도량형 제도 확립에 기초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에서는 한 잔(盞), 한 작(爵), 한 대야(鐥), 한 병(甁), 한 동이(東海)로 계량했는데 근래까지 이 양이 얼마를 의미하는 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세종 때에 편찬된 전순의의 『산가요록(山家要錄)』이 2001년에 발견되었는데 그 속에 각 량의 크기가 설명되어 있었다. 『산가요록(山家要錄)』에서는 두 홉(合)이 한 잔(盞)이 되고 두 잔이 한 작(爵)이 되고, 두 되(升)가 한 대야(鐥)가 되고 세 대야(鐥)가 한 병(甁)이 되고 다섯 대야(鐥)가 한 동이(東海)가 된다고 기록했다. 이로 미루어 한 동이는 한 말(一斗)과 같은 분량이고, 한 병(甁)은 6되(升)가 될 수 있어 막연히 알려진 동이, 대야, 병의 계량 단위가 밝혀진 것이다. 전순의는 세종부터 성종까지의 의관이다.
〈천문의기 프로젝트를 주도〉
세종 6년(1424)에 이천은 천추사(千秋使)로 중국에 파견되어 4개월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돌아왔다. 세종 7년(1425)에 이천은 병조참판으로 임명되고 1929년에는 중군총제가 되어 동과 철의 광산을 조사했다. 그는 동이 포함되어 있는 동석을 확인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각 광산에서 사용하도록 권장했고 전국 각지의 동철석을 찾아내 신고하면 양인(良人)에게는 직위를 주고 천인에게는 물건으로 상을 주어 격려하자고 주청했다.
세종 13년(1431)에 세종이 경복궁 근정전 화재에 대비하여 화재진압용 장치를 궁궐에 설치하도록 명령하자 그는 궁궐의 지붕에 쇠로 만든 걸이를 경복궁의 중요 건물에 설치했다. 또한 활의 개발과 병선의 개량을 위해 여러 가지 시험선을 제작하는 등 군기감의 무기 제작에 관여했고 12월에 우군도총제로 승진했다.
세종14년(1932)에 지충추원사가 되더니 상의원의 제조를 겸하면서 악공의 악기와 관복 등의 개선 작업을 담당했다..
이천이 군의 요직을 역임하면서 지중추원사로 임명되어 악기와 관복 등 개선 작업을 성공리에 마치고 있을 당시 세종은 신하들과 국사를 논하는 경연(經筵)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다.
“우리 나라(조선)는 멀리 바다 밖에 있는 까닭에 모든 것을 하나같이 중국의 제도를 따라 시행한다. 그러나 유독 천문을 관찰하는 기계만 빠졌다. 역산(曆算)에 관계되는 제조이니 예문관제학 정인지와 대제학 정초는 천문의기에 관한 과거의 내력과 출전을 연구하고 지중추원사 이천과 호군 장영실은 천문의기의 제작을 감독하라. 그러나 그 목적이 북극출지의 값을 결정하는 데 있으니 먼저 간의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
세종의 천문의기제작 프로젝트 즉 국책과학기술 프로젝트에 이천이 총괄 책임자로 임명되자 이천은 세종의 명에 따라 실무연구팀을 구성했다. 이 연구팀에는 장영실이 제작 실무 책임자가 되었고 당대의 천문학자인 이순지가 이론을 뒷받침하여 먼저 혼천의를 비롯한 목간의를 제작했으며 계속하여 대간의, 소간의, 혼의, 혼상, 현주일구, 쳔평일구, 정남일구,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자격루 등을 만들어 냈다.
국책 프로젝트에 의해 수많은 천문기기들이 만들어지자 세종은 천문기기들을 설치하기 위한 간의대를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세우도록 명령한다. 이천은 당시 호조판서인 안순(安純)과 함께 간의대(簡儀臺) 건설의 책임을 맡았는데 간의대란 한마디로 천문관측을 위한 천문대이다.
간의대는 높이가 9미터, 길이가 14미터, 넓이가 9.8미터인 현대식 천문대로 모두 돌로 쌓았고 위에는 돌난간을 둘렀는데 이 천문대는 원나라 곽수경(郭守敬, 1231∼1316)이 연경에 세운 관성대 이후 동양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간의대가 건설되자 각종 최첨단 천문관측기기들이 속속 들어선다. 간의대 중앙에 주망원경 격인 간의를 설치하고 간의의 남쪽에 간의의 방향을 잡는데 필요한 방위 지정표인 정방안(正方案)을 장치했다.
간의대의 서쪽에는 규표를 설치했는데 규표는 해가 머리 꼭대기 위에 떠있는 하지에는 그림자가 가장 짧고, 멀리 남족에서 비스듬히 비추는 동지때 가장 긴 것에 착안해서 만들어진 표준달력이다. 음력은 달이 12번 차고지는 것을 1년으로 삼았기 때문에 음력 1년은 354년이므로 태양력인 365일과는 큰 차이를 보여 계절과 맞지 않아 농사짓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같은 문제점은 기원전 24세기 요(堯)나라 때부터 제기된 것으로 해를 관찰해서 24절기를 적용한 태음태양력이 개발되었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규표이다.
세종의 학자들은 13세기 원나라 때 만든 규표를 기본으로 삼아 청동을 높이 8.28미터의 막대(表)를 세우고 땅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질 수 있도록 청석을 다듬어 길이가 26.8미터인 받침(圭)을 만들었다. 이것은 중국의 규표에 비해 5배에 이르는 것으로 정밀도가 매우 높았음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규면에는 장, 척, 춘, 푼, 단위의 눈금을 새겨 청동막대의 그림자 길이로 1년의 길이(365.2425)와 24절기를 재었는데 푼(分)은 현재의 척도로 2밀리미터이다.
조선 왕조의 왕립천문대라 볼 수 있는 간의대는 세종 19년(1437) 4월 15일 공식적으로 완결된다. 간의대 서쪽에 작은 집을 지어 혼천의와 혼상을 설치했다. 연못의 남쪽에는 기계식 자동물시계인 자격루, 동쪽으로는 임금의 시계인 흠경각루(옥루)가 세워졌으며 매일 밤마다 서운관원(書雲觀員) 5명이 입직하여 천문관측에 종사했다. 이와 같은 천문관측대와 기기들은 15세기 전 세계를 통틀어 그 규모와 정밀함에서 최고의 수준이었다.
간의대 설립으로 조선 왕조는 자주적인 역법을 세울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세종 24년(1442)에 완성된 이순지 등의 『칠정산내편』은 조선에서 관측을 바탕으로 만든 조선의 역법으로 간의대와 같은 천문대와 천문의기들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역작이다.
〈다시 무장으로 돌아가서도 과학기술 개발에 몰두〉
세종 18년(1436) 천문의기 제작사업이 마무리 단계로 들어가고 있을 무렵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야인(野人)들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세종은 이듬해에 이천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하고 야인정벌의 명을 내렸다.
당시에 조선군이 갖고 있는 대완구는 너무 무거워서 싣고 작동하기에 어려워서 실제로 쓸모가 없고, 중완구는 성을 공격하는 데 편리하지만 소에 실을 수 없으며 소완구는 너무 작아서 별 성과가 없자 중완구와 소완구의 중간 정도쯤 되는 화포 개발에 앞장섰다.
1437년 그가 제작한 대포가 위력을 발휘하여 야인을 크게 파하자 세종은 이천을 정헌호조판서(正憲戶曹判書)로 승진시켰다. 이때가 그의 나이 61세였다. 세종 20년(1438) 12월, 이천은 세종에게 다음과 같이 은퇴를 상언했다.
“신은 성질이 본래 용렬하고 어리석고 또한 특별한 재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상의 지우(知遇)를 입어 지위가 재상(宰相)에 이르렀사오니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이제 다시 외람되이 중대한 위임을 받으니, 밤낮으로 삼가고 두려워함으로 성상은 은덕을 갚고자 합니다. 그러나, 신의 어미가 나이 86세로 나이가 많고 병이 심하여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까닭에, 아침저녁으로 깊이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신이 오랫동안 혼정신성(昏定晨省)하지 못하여서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기에 부모를 그리는 정을 잊기 어렵습니다. 바라옵건데 신의 관직을 파면하시어 노모의 여생을 봉양하게 해주시옵소서.”
세종은 이천의 은퇴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질을 아껴 1443년에는 군사병기를 관장하는 군기감의 제조(총책임자)로 임명했다. 군기감으로 각종 칼, 창 등 소형무기류로부터 화포, 병선에 이르는 군사무기들을 개발하면서 특히 사용에 편리한 무기를 개발하고 표준화하는 일에 역점을 두었다.
그가 얼마나 과학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는지는 당시에 환도는 칼날이 곧고 짧은 것이 급할 때 쓰기가 편리한데 당시 생산되는 환도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아 불편하다는 건의가 있자 이천은 가장 적합한 환도의 길이와 너비를 연구했다. 그는 1척7촌3분과 너비 7푼짜리 및 길이 1척6촌 및 너비 7푼의 환도가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도출하여 생산하게 했고 창의 길이도 연구하여 생산했다.
공격 무기뿐만 아니라 방패처럼 수비용 무기에도 관심을 보여 방패의 길이와 넓이를 확정하여 공격과 수비에 편하도록 개량하는 등 가장 적절한 무기의 표준화에 공을 들였다.
특히 이천은 야인을 정벌하기 위해서는 성능이 좋은 야포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인식한 후 여진족에게서 얻은 중국의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수철(水鐵 : 무쇠)로 연철(軟鐵)로 만드는 기술을 익혀 구리 대신에 쇠로 된 대포를 만들었다.
1445년 3월 수군들을 이끌고 한강에서 수전을 연습하였다. 이천 등이 3군을 거느리는데 각 함선마다 사졸 30여 명씩 승선하고 다른 배 4척에 허수아비를 태워 적군으로 삼아 20보쯤 떨어진 거리에서 주화포와 질려포를 쏘면서 전투를 시연했다. 이천은 단지 병기나 의기 등의 제작 책임자에 머물지 않고 장수로도 큰 활약을 한 전천후 인물이었다.
이후에도 이천은 세종의 만류로 관직에 계속 머물면서 화포의 제조에 남은 생을 전념하던 중 어머니의 상(喪)을 당했으나 이때 세종이 승하하여 세종의 능에 관련된 업무를 관장한다. 이후 이천은 문종 원년(1451)에도 자신의 나이가 많음을 들어 사직하기를 청했으나 문종도 이천의 청을 거절하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임명한 후 궤장(지팡이)을 하사했다. 궤장은 국가에 공헌한 나이가 많은 공신에게 임금이 하사하는 영예로운 하사품이다. 그러나 궤장을 하사받은 지 얼마 안된 1451년 11월에 76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그의 장례는 정부에서 치루었으며 사후 익양공(翼襄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익양이란 매사에 사려가 깊고 모든 일에 매우 뛰어난 공로가 있다는 의미이다.
『문종실록』의 졸기(卒記, 국가에 공헌한 인물에 대해 그가 죽었을 때를 기념하기 위해 실록에 적는 글)에 그의 과학 기술적 업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시호(諡號)를 익양(翼襄)이라 하니, 사려(思慮)가 깊고 먼 것을 익(翼)이라 하고, 갑주(甲胄)의 공로가 있음을 양(襄)이라 한다. 천성이 정교(精巧)하여 화포(火砲)·종경(鍾磬)·규표(圭表)·간의(簡儀)·혼의(渾儀)·주자(鑄字)와 같은 따위를 모두 그가 감독하고 관장하였다.’
왜구의 토벌과 북쪽 오랑캐의 정벌, 인쇄술의 향상과 도량형의 표준화, 천문의기 제작 등 무인과 과학자로써 화려한 생을 펼쳤던 이천은 조선의 과학기술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올려놓는데 큰 역할을 한 조선초기의 대표적 과학자요 기술자로 볼 수 있다. ‘기술자 장군’이었던 그를 기념하기 위해 태능의 육군사관학교에는 1977년 이천의 시호를 따라 익양관(翼襄館)을 세웠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잠수함을 이천호로 명명했다. 04/9/24 이종호(과학저술가)
그 시대 최고의 이론천문학자 이순지(李純之) |
우리나라 천문학을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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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나라에서 국가 경영의 제1 순위로 삼는 것은 우수한 인재의 양성이다. 아무리 우수한 학자나 정치가, 경영인이라고 하더라도 나이가 들면 반드시 죽어야 하므로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 후배들을 길러 인적 공백을 메꾸는 동시에 보다 발전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함이다.
현대와 같은 기계문명 사회에서는 과학기술의 진보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과학기술이 계속적으로 진전되게 하기 위해서는 3박자가 맞아야 한다. 과학기술을 지속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터전,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우수 인력과 예산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수 인력이다. 세종대왕의 업적은 15세기 즉 지금부터 거의 600년 전의 사람임에도 신하들의 특성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소기의 성과를 얻도록 이끌었다는 점이다. ‘이천’ 장에서 설명했지만 이천은 감독자로서, 장영실은 기술자로서, 이순지는 이론학자로서 각자 자신의 임무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이들 세 분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론적인 뒷받침임은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거대하고 정교한 기계라 하더라도 이론적인 뒷받침이 없는 경우 비효율적이고 오류가 많게 된다. 세종의 과학기술 프로젝트는 이론학자인 이순지가 없었다면 결코 이룩되지 않거나 이름뿐인 졸작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전통사대부인 이순지를 이론학자로 발탁〉
이순지(李純之, 1406∼1465)는 본관이 양성(陽城)이고 그의 아버지 이맹상은 공조와 호조의 참의를 지냈고 원주 목사와 강원도 관찰사, 중추원부사를 지낸 고위 관료였으므로 당대의 전형적인 사대부출신 관료이다. 그는 세종 9년(1427)에 문과에 급제하여 동궁행수(東宮行首), 승문원 교리, 봉상시 판관, 서운관 판사, 좌부승지 등을 거쳤고 문종 때에는 첨지중추원사, 호조참의 그리고 단종 때에는 예조참판, 호조참판을 지냈고 세조 때에는 한성부윤(현 서울특별시장), 판중추원사에 올랐다.
그가 누구인지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공식 공적은 다음과 같다 :
'이순지는 전통시기 한국 천문학을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은 천문학자이다. 20대 후반에 세종에 의해 천문역법 사업의 책임자로 발탁되어 평생을 천문역법 연구에 바쳤다. 중국과 아라비아 천문학을 소화하여 편찬한 『칠정산』 내편과 외편은 그의 대표적 업적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관측과 계산을 통한 독자적인 역법을 갖게 되었다.'
이순지가 어떻게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엉뚱하게 과학자가 되었는지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그가 천문학자가 된 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25세인 1430년경에 세종이 선발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세종이 이순지를 신임한 이유의 하나로 『세조실록』 권 35(세조 12년 1465)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순지의 자는 성보(誠甫)이며 경기도 양성 사람이니, 처음에 동궁행수에 보직되었다가 정미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당시 세종은 역상이 정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문신을 가려서 산법을 익히게 했는데, 이순지는 우리나라가 북극에 나온 땅이 38도 강이라고 하니 세종이 의심하였다. 마침내 중국에서 온 자가 역서를 바치고는 말하기를 “고려는 북극에 나온 땅이 38도 강입니다”하므로 세종이 기뻐하시고 마침내 명하여 이순지에게 의상(儀象)을 교정하게 했다.’
이 말은 이순지는 서울의 북극고도(北極高度)가 38도 남짓이라고 계산했는데 세종은 그의 계산이 틀렸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온 천문학 책에서 그 값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이순지를 크게 신임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북극고도란 현재로 치면 북위(北緯)를 뜻하는데 현재의 서울은 38선 남쪽에 있다. 엄밀한 의미로 보면 이순지도 틀린 것처럼 보이지만 세종 때에는 도(度)의 뜻이 지금과는 약간 달랐다는 것을 이해하면 된다. 즉 원의 둘레가 당시에는 지금처럼 360도가 아니라 365.25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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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정산』내편(좌), 『칠정산』외편(우)(규장각 소장). |
태양이 지구를 한 번 도는데 365.25일이 걸리니까 태양이 하루에 돌아간 정도의 각도가 당시의 1도였던 셈이다. 그러니까 당시의 38도는 지금의 37도 40분과 딱 들어맞는 값이다. 천문학자들이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당시에 양반은 강도가 쫓아와도 갈짓자를 걸어야 한다고 했으며 상공업을 천대하던 때를 감안하면 양반신분으로 문과에 급제했던 이순지가 천문학에 대해 얼마나 조예가 깊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출범한지 몇 십 년 밖에 안된 조선왕조는 유교적 이념에 맞게 왕실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천문역법의 정비가 절실했다. 정확한 역법(曆法) 즉 천체 현상의 법칙성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하늘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세종은 천문역법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삼국시대부터 주로 중국의 천문계산법 즉 역법을 빌려다가 쓰고 있었는데 고려 때에는 그것을 개성(開城)기준으로 약간 수정해서 사용했고, 서울을 지금의 서울로 옮긴 다음에는 그것을 약간 더 수정하여 사용했지만 근본적으로 우리 나라 기준의 천체 운동 계산은 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세종은 조선에 맞는 역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이 독자적으로 천문역법을 세운다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니다. 우선 천체 관측과 정확한 계산 기술이 따라야 했다. 당연히 수준급의 천체 관측 기기가 확보되어야 하며 고도로 훈련된 천문학자들이 확보되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세종의 거대한 프로젝트는 천문의기 제작을 총괄 지휘한 감독자로서 이천, 천문의기의 이론적 뒷받침으로 이순지, 천문의기를 실무적으로 제작하고 개발하는 장영실을 투입하는 절묘한 용병술 덕분에 예상보다도 빨리 추진되었다.
1432년에 천문의기 제작 프로젝트를 발표한 후 다음해에 벌써 혼천의, 간의, 자격루가 만들어졌고 1434년에 간의대가 준공되었으며 앙부일구를 비롯한 천문의기 제작은 1437년에 끝나 전국 각지로 배포될 정도였다. 1438년에는 그 동안 만들어진 천문의기의 특징을 집약하여 한 눈에 계절의 변화와 하루의 시각을 알 수 있는 흠경각루(옥루)가 세종의 숙소(강녕전) 옆 흠경각에 세워짐으로써 세종의 프로젝트는 6년 만에 대미를 장식하고 종결되는데 학자들은 세종의 프로젝트가 예상보다 10년(일부학자는 20년 정도 빨랐다고 추정)정도 빨리 이뤄졌다고 추정한다.
〈우주를 한 눈에 본다, 혼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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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혼천의(여주 영릉, 세종대왕 유적관리소 황윤경의 호의로 촬영). | 세종시대에 제작된 천문의기는 『조선왕조실록』에 거명이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순지가 모두 관여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무리한 일은 아니다.
이순지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모든 천문의기의 기본이라고 볼 수 있는 혼천의(渾天儀, 渾儀라고도 함)의 제작이다. 지구상에서 위치를 결정하는데는 위도와 경도를 사용하지만 천구상의 천체의 위치를 표시하는데는 적경과 적위를 사용한다. 적경과 적위는 천구상에서의 경도와 위도인 셈이다.
동양에서는 적도좌표계를 천체의 위치를 표시하는 기본으로 사용했다. 적경과 적위를 측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보다 정밀하고 편리하게 전체의 적경과 적위를 측정할 수 있는 천체 관측의기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 제작된 것이 바로 혼천의이다. 혼천의는 선기옥형(璇璣玉衡) 또는 기형(璣衡)이라고도 불리는 일종의 측각기이다. 천구의(天球儀)인 혼상(渾象, 하늘의 별을 둥근 구형에 표시한 의기))과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해서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되어 천체의 운행에 맞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으므로 혼천시계(渾天時計)라고도 불린다.
원래 고대 중국의 우주관인 혼천설(渾天設, 대지를 중심으로 천구가 그 주변을 회전하는 것으로 천동설에 속함)에 기초를 두어 기원전 2세기경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졌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후기인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도 만들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세종 3년(1421)에 혼천의의 완성을 위해 장영실과 남양부사 윤사웅에게 ‘중국에 들어가 각종 천문기계의 모양을 모두 익혀 빨리 모방하여 만들라.’라는 특명을 받고 중국 유학에서 돌아왔다고 적었다.
기형의 기(璣)는 하늘을 공처럼 둥글다고 생각하고 그 표면에 일월성신의 운행을 설명할 수 있는 천구의(天球儀)를 뜻하고 형(衡)은 천구의를 통해 천체를 관측할 수 있는 관(管)을 뜻하며 혼천의의 혼(渾)은 둥근 공을 말하는 것으로 동심다중구(同心多重球)를 뜻한다. 크기는 『서경』에 따르면 둘레 25척, 기경(璣徑)은 8척, 형장(衡長)은 8척에 그 구경이 한치였다.
구조는 세 겹의 동심구면으로 되어 있는데 제일 바깥층에서 중심으로 지평환(地平環), 자오환(子五環), 적도환(赤道環) 등 세계의 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세 개의 환이 교착되어 천구를 알 수 있고 천구의 상하와 사방을 관찰할 수 있으므로 이 환들을 육합의(六合儀)라고도 한다. 가운데 층은 황도환(黃道環)과 백도환(白道環)으로 구성되어 해와 달 그리고 별을 관측할 수 있으며 삼진의(三振儀)라고도 한다. 혼천의는 아침 저녁 및 밤중의 남중성(南中星), 천체의 적도좌표 황도경도 및 지평좌표를 관측하고 일월성신의 운행을 추적하는데 쓰였는데 혼천의와 혼상을 연결하기도 했다. 혼천의와 혼상을 함께 보면 우주를 한눈 안에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혼천의는 관측용과 실내용이 있는데 세종 때 만들었던 것은 수격식 시계 장치로 움직이는 실내용(demonstrational armillary clock)으로 보인다. 세종 19년(1437) 4월 15일에 ‘규표의 서쪽에 작은 집을 세우고 혼의와 혼상을 놓았는데 혼의는 동쪽에 있고 혼상은 서쪽에 있다. 혼의는 물을 이용하여 기계가 움직이는 공교로움은 숨겨져서 보이지 않는다’라는 글이 적혀있다.
혼천의의 구조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지만 『증보문헌비고』에 현종 10년(1660) 이민철이 만든 혼천시계의 기계 장치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어 혼천의의 구조를 유추할 수 있다.
“혼의를 움직이는 동력은, 큰 궤를 만들고 물항아리를 널판의 뚜껑 위에 설치하고 물이 구멍을 통해 흘러내려 통 안에 있는 작은 항아리에 흘러 들어가 번갈아 채워져 바퀴를 쳐서 돌리게 된다. 여러 날에 걸쳐 물을 채워서 법식에 따라 시험하여 보면 혼천의의 환이 함께 일제히 움직인다. 또 그 옆에 톱니바퀴를 설치하고, 겸하여 방울이 굴러내리는 길을 만들어서 아울러 시간을 알리고 종을 치는 기관이 된다. 또한 이 장치가 움직이면서 나무 인형이 종을 치게 하고 시각의 패를 든 또 다른 인형이 번갈아 나타나 그때의 시각을 알려준다”
세종 시대의 과학자들이 문헌 자료의 연구만으로 1년 남짓한 기간 동안에 이토록 정밀한 천문의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세종 때의 과학 기술 수준이 세계 최정상급이었음을 말해준다.
혼천의의 문제는 혼천의를 구성하는 기둥(距)과 환(環)이 많아 구조가 복잡하여 관측에 불편하다는 점이다. 이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의기가 간의(簡儀)이다.
간의는 중국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이 만든 천문 의기다. 현대 천문학에서 적경에 해당하는 천체의 ‘적도수도(赤道宿度)’와 적위에 해당하는 ‘거극도(去極度)’를 측정하는 데 쓰인 관측기기로, 혼천의를 구성하는 부품 중 적도환, 백각환, 사유환만을 따로 떼어내 간략하게 만든 것이다. 혼천의가 천체의 위치뿐만 아니라 시각을 측정하고 태양이나 달의 운동을 측정할 수 있는 것에 반해, 간의는 주로 천체의 위치 측정에 쓰이도록 만든 것이다.
세종의 학자들은 혼천의를 간략하게 하는 간의를 만들기 위해 먼저 ‘목간의(木簡儀)’를 제작했다. 목간의란 관측의 기본이 되는 한양의 북극고도를 측정하여 청동으로 된 간의를 만들기 전에 미리 나무를 만든 것이다.
조선의 실정에 맞는 역법을 편찬하기 위해서는 한양에서 태양이 뜨고 지는 시각과 북극 고도를 중심으로 한 일월과 행성과 천체의 위치를 정확히 관측해야 했다. 관측한 자료는 행성의 위치표를 만든 후 역법이나 천문도 등의 편찬과 제작에 이용되는데, 간의는 단순하고 편리하여 이런 작업에 매우 유용한 기기였다.
대간의(大簡儀)는 중국 곽수경의 『원사』를 참고로 하여 만들어진 천체 관측을 위한 관측기기이다. 적도환은 주천(周天: 공전)을 365도 1/4로 나누어 동서로 운전하면서 칠정(일월과 5행성) 중 외관입수(外官入宿)의 도분(度分)을 쟀다. 백각환은 1일 중의 시각을 나타낼 수 있도록 눈금을 새긴 둥근 환으로 조선 초기에는 1일을 100각으로 했으나 시헌력 도입 이후에는 96각으로 했다. 사유환은 적도환과 직교하며 남북극을 축으로 하여 동서로 회전하게 되어 있고, 그 안에 규형이 있어 상하로 움직일 수 있다. 규형은 속이 비어 있는 통으로 이것을 통해 별을 관측한다. 소간의(小簡儀)는 이러한 대간의를 간단히 만들어 휴대용으로 한 것이다.
〈아랍 천문학보다 발전된 조선 천문학〉
이순지는 천문의기프로젝트가 끝나자 서운관원(천문대장)으로 근무했고 여기에서 유명한 『칠정산 내외편』이라는 책을 간행했다. 칠정산이란 ‘7개의 움직이는 별을 계산한다’란 뜻으로 해와 달, 5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위치를 계산하여 미리 예보하는 것이다(七政을 七曜라고도 쓴다).
세종은 1431년 우선 정흠지, 정초, 정인지 등에게 『七政算 內篇』을 만들게 했고 이순지와 김담에게는 『七政算 外篇』을 편찬케 했다. 편찬과정에서 이순지 등은 세종 13년(1431)에 명나라에 연수를 가기도 했다.
『칠정산』의 내편은 중국의 곽수경이 완성한 『수시력』을 서울 위도에 맞게 수정 보완한 것이다. 이 책은 1년의 길이를 365.2425일, 1달의 길이를 29.530593일로 정하는 등 매우 정확한 수치에 입각한 것으로 ‘세차(歲差)’의 값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수치들이 유효숫자 6자리까지 현재의 값과 일치한다.
내편의 중요성은 서울에서 관측한 자료를 기초로 해서 계산했다는 점이다. 그 전까지는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의 위도를 기준으로 계산하였으나 이를 서울을 기준으로 하여 바로 잡은 것이다. 이로서 세종 이후의 우리나라 천문학은 해와 달은 물론 모든 행성의 위치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게 되는데 가장 알기 쉽게 말하여 서울에서 일식과 월식이 언제 일어나는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한편 『칠정산 외편』은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로 넘어온 아랍 천문학(프톨레마이오스가 만든 알마게스트를 기본으로 하여 편찬한 것)보다 발전된 이론을 다루고 있다. 칠정산 외편은 태양, 태음, 교식, 오성, 태음오성능범의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태양에서는 태양의 운행, 태음에서는 달의 운행, 교식에서는 일식과 월식, 오성에서는 토성, 목성, 화성, 금성, 수성 등 5개 행성의 운행, 태음오성능범에서는 달과 오행성이 별을 가리는 현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칠정산 외편의 가장 큰 특징은 그 당시까지 중국적 전통에 따라 원주를 365.25도, 1도를 100분, 1분을 100초로 잡았던 것을 그리스 전통에 따라 원주를 360도, 1도를 60분, 1분을 60초로 변경하여 계산했다는 점이다. 이 외 칠정산 외편의 몇 가지 특징을 추려보면, 평년의 1년은 365일로 하되 128년에 31일의 윤달을 두었다는 것, 1태음력의 길이를 354일로 하고 30년에 윤일을 11일 더 넣었다는 것, 1년의 기점을 춘분점에 두었다(중국에서는 동지점을 그 기점으로 하였다)는 것, 황도를 30도씩 12등분하였다는 것, 태양은 7월 초에 원지점에, 1월초에 근지점에 있고 속도는 원지점 부근에서 더디고 근지점 부근에서 빠르다는 것 등이다.
『칠정산 내외편』은 세종 24년(1442)에 완성되었는데 동 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앞선 천문 계산술로 평가한다. 원나라 이후 명나라가 들어선 중국의 천문학은 오히려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고 아랍 천문학은 더욱 퇴조의 기미를 보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칠정산』에 해당하는 『정향력(貞享曆, 일본인이 만들어 일본에 맞는 역법)』은 조선보다 240년 후인 1682년에 등장한다. 이 역법을 만든 시부카와 하루미는 1643년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왔던 나산(螺山) 박안기(朴安期)가 수학적 해법을 알려주어 이를 바탕으로 『정향력』을 만들었다는 글이 있다.
‘1643년 조선의 손님 나산(螺山)이란 인물이 에도에 와서 역학에 관해 오카노이 겐테이와 토론했다는 말이 『춘해선생실기』에 보인다. 하루미는 바로 이 겐테이로부터 역학을 공부했던 것이다. 나산이 어떤 내용을 전해 준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조선에는 15세기 천문학의 최성기에 『七政算 內篇』을 낸 바 있는데 이는 수시력(授時曆) 연구의 뛰어난 텍스트로 꼽히고 있다. 명나라 말에는 중국의 역산학 전통이 어느 정도 쇠퇴한 다음이었으므로 당시 조선에서 역산학을 배우려던 태도는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보인다.’
이 글을 보아서도 『칠정산』이 얼마나 돋보이는 작품인지 알 수 있다.
〈평생을 천문역법 연구에 바친 조선 최고의 천문학자〉
이순지는 각자의 업무에 충실하게 봉사하면서 세종의 천문의기 프로젝트 등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후 천문대인 간의대에서 천문연구를 계속하면서 『칠정산 내외편』를 비롯하여 여러 권의 책을 정리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칠정산(七政山)』,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천문유초(天文類抄)』,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 등이 있다.
『제가역상집』 4권 3책은 세종 27년(1445) 그의 나이 40세 때 완성되었는데 임금의 명을 받아 천문 역법 의상(儀象) 구루 등 세종 때 만든 여러 천문기구들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모아 정리한 것으로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의상에 있어서는 이른바 대소간의(大小簡儀)·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혼의(渾儀) 및 혼상(渾象)이요, 구루(晷漏)에 있어서는 이른바 천평일구(天平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앙부일구(仰釜日晷)·대소 규표(大小圭表) 및 흠경각루(欽敬閣漏)·보루각루(報漏閣漏)와 행루(行漏)들인데, 천문에는 칠정(七政)에 법받아 중외(中外)의 관아에 별의 자리를 배열하여, 들어가는 별의 북극에 대한 몇 도(度) 몇 분(分)을 다 측정하게 하고, 또 고금(古今)의 천문도(天文圖)를 가지고 같고 다름을 참고하여서 측정하여 바른 것을 취하게 하고, 그 28수(宿)의 돗수(度數)·분수(分數)와 12차서의 별의 돗수를 일체로 『수시력(授時曆)』에 따라 수정해 고쳐서 석판(石版)으로 간행하고, 역법에는 『대명력(大明曆)』·『수시력(授時曆)』·『회회력(回回曆)』과 『통궤(通軌)』·『통경(通徑)』 여러 책에 본받아 모두 비교하여 교정하고, 또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編)』을 편찬하였는데, 그래도 오히려 미진해서 또 신에게 명하시어, 천문·역법·의상·구루에 관한 글이 여러 전기(傳記)에 섞여 나온 것들을 찾아내어서, 중복된 것은 깎고 긴요한 것을 취하여 부문을 나누어 한데 모아서 1질 되게 만들어서 열람하기에 편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이 책에 의하여 이치를 연구하여 보면 생각보다 얻음이 많을 것이다.’
『천문유초』는 중국의 천문학 이론을 소개한 책으로 상 하 두 권으로 각각 구성되었는데 동양 기본 별자리 28수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게 나오고 은하수도 설명되어 있다. 하권에는 천지, 해와 달, 5행성, 상서로운 별, 별똥별, 요성, 혜성, 객성 등의 순서로 설명이 나온다. 지금 천문학과는 달리 이상한 천문 현상에 대해서는 점성술적인 설명이 따른다. 특히 바람, 비, 눈, 이슬, 서리, 안개, 우박, 천둥, 번개 등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천문학으로 분류할 수 없는 기상 현상 등도 상세하게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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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지의 무덤.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면 차산리(경기도 지방문화제 54호) 소재. |
세조 3년(1457)에는 김석재와 함께 『교식추보법』 2권 1책을 완성했다. 이 책은 세종 때에 정리되었던 일월식(日月蝕) 계산법을 알기 쉽게 편찬하라는 세조의 왕명을 받고 그 법칙을 외우기 쉽게 산법가시(算法歌詩)를 짓고 사용법 등을 덧붙인 것이다. 시와 노래는 원래 세종이 만들었고, 이순지와 김석재는 가사와 시구에 포함된 뜻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 책은 뒤에 천문 분야 관리채용의 1차 시험인 음양과 초시의 시험 교재로 쓰일 만큼 일반화되었다.
그 외에도 『대통력일통궤』, 『태양통궤』, 『태음통궤』 등 명나라에서 전해진 『대통력법통궤』를 김담과 함께 교정했으며 특이한 것은 국가 중요행사를 위해 택일이나 길흉을 판별하는 방법을 모은 『선택요략』 3권을 편집했다. 상권에는 간지에 따른 길흉의 판별법을 적었고, 중권에는 길흉을 관장하는 신장(神將)에 대해, 하권에서는 결혼, 학업, 출행, 풍수, 장례 등 일상생활에서 살펴야 할 길흉의 판단법에 대해 다루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천문학자가 음양학과 풍수학에 관여한 것은 조선 전기에는 이들이 천문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순지는 풍수지리학 분야에서 대가로 알려져 그는 세종과 세조 시대에 왕실의 장지를 결정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는데 세조는 음양, 지리 따위의 일은 반드시 이순지와 논의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세종이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는 1436년 이순지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를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어머니가 죽자 이순지는 당시의 관습대로 3년 동안 관직을 떠났다. 이 동안 이순지를 대신할 사람으로 승정원은 젊고 유능한 천문학자인 김담(金淡 1416∼1464)을 추천했다. 김담은 당시 20여세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후 천문학자로서 이순지에 버금가는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하지만 세종은 20살의 김담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고 생각한 후 상중인 이순지를 정4품의 자리로 승진시키면서 1년 만에 억지로 다시 불러들여 근무하게 했다. 3년 상을 치르지 않고 관직에 있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조선시대의 가장 위대한 천문학자였던 이순지는 세조 11년(1465)에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 그의 과부 딸이 여장(女裝) 노비 사방지(舍方知)와의 추문에 휘말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비교적 행복한 삶을 산 과학자였다. 그는 아들 6명을 두었고 후에 정평군(靖平君)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그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면 차산리(경기도 지방문화제 54호)에 있다. 04/10/2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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