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과학적인韓國史

(41)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소리 내는 에밀레종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2. 12:38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소리 내는 에밀레종
내부 쇠찌꺼기가 비대칭 확대 맥놀이 증폭
용머리 뒤쪽 대통모양의 관이 잡음 없애
신라 혜공왕은 봉덕사의 신종 주조를 위해 스님들로 하여금 온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재물을 거둬들이게 하였다. 불심에 가득 차 있는 백성들은 나라에서 큰 종을 만든다는 말에 자기의 힘이 닿는대로 재물을 바쳤다. 그리나 종이 완성되었지만 종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모두들 종이 울리지 않는 이유를 찾아내려고 노력하였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던 어느 날, 봉덕사의 주지 스님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백발 노인이 꿈속에 나타나 말했다.

“그대들이 시주 다닐 때 어떤 부인이 ‘우리 집은 가난해서 아무 것도 바칠 것이 없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도 가져가십시오’라고 말했는데 어째서 그 아이를 데려오지 않았느냐?”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만.”
“그 어린아이는 몸에 화성(火姓)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아이와 함께 쇠를 녹여서 만들면 좋은 소리를 낼 것이다.”

백발 노인의 말이 너무나 신기해서 주지 스님이 이튿날 봉덕사 스님들을 모아놓고 꿈 이야기를 했다.

“제가 그런 부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한 스님이 마침내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주지 스님은 그 아이를 데려오도록 명했다. 명령을 받은 스님을 곧 길을 떠났지만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주지 스님의 명령대로 아이를 데려 간다면 그 아이는 종을 만들기 위해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린아이를 시주하겠다는 부인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스님은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에서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부인을 다시 만났다. 백발 노인이 말한 아이가 틀림없었다.

에밀레종(국립경주박물관).


“저번 소승이 댁에 찾아왔을 때, 부인께서는 바칠 것이 없으니, 이 아이라도 시주하시겠다고 하신 일이 생각나십니까?”
“예.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만….”
“그때 하신 말씀대로 그 아이를 시주해 주십시오.”
“뭐라고요?”
“저번에 말씀하신 대로 그 아이를 시주해 달라는 뜻입니다.”
“안 됩니다. 그때는 제가 닿는 대로 빈소리를 한 것입니다.”

부인이 이렇게 딱 잘라 말하는데는 스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봉덕사의 신종을 반드시 울려야 할 임무를 갖고 있는 스님으로서는 그냥 돌아서서 나올 수도 없었다. 스님은 그 아이만이 종을 울릴 힘을 갖고 있다고 부인을 설득했다. 귀여운 딸이 지금은 죽는다고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밝게 하는 종소리가 된다면 만 백성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라며 간청하였다. 부인은 사람의 힘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큰 힘이 사랑하는 딸을 데리고 가려는 것을 깨닫고 스님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어린아이를 내밀었다.

종은 부처님의 큰 뜻에 따르려는 신앙심, 한 어머니의 피눈물, 어린 여자아이의 생명과 쇳물이 함께 녹여져서 다시 만들어졌다. 이번에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었다. 종은 넓은 경주 땅은 물론이고 온 나라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졌다. 종소리를 들은 왕은 매우 흡족하였고 지켜보던 많은 백성들도 환성을 질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종소리는 마치 어린 딸이 어머니를 부르는 듯 ‘에밀레, 에밀레, 에밀레’하고 울었다. 즉 ‘에미 때문에, 에미 때문에’라고 운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가엾은 어린이를 동정하였다. 이것이 봉덕사의 신종이 에밀레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전설의 내용이다.

사실 종소리는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 있다. 웅장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고, 같은 소리라도 처량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봉덕사 신종이 ‘에밀레종’이라는 속명으로 부르게 된 전설의 유래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이 종에 새겨 있는 명문 내용으로도 유추할 수 있다.

'효성이 지극하신 경덕왕은 부모에 대한 추원(追遠)의 정이 골수에 사무치심에, 동 12만 근을 희사하여 아버지인 성덕대왕을 위하여 대종(大鐘)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경덕왕의 아들인 혜공왕은 경덕왕의 유언을 받들어 유사(有司)에게 분부하여 종을 만들게 하였다.'

이 명문에 의할 경우 이 종을 완성하기까지 약 20년이 걸린 셈인데 이것은 종이 만들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의 실패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종소리가 나오기 전까지 수많은 실패가 이어졌으며 실패할 때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던 중에 어린아이가 희생되었다는 슬픈 전설도 생겼다고 추정할 수 있다.  

에밀레종 표면의 문양.


<어린아이의 희생>

어린아이가 종소리를 좋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쇳물과 함께 녹여졌다는 이야기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어 진다.

첫째는 전설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아기가 진짜로 희생됐다는 주장은 에밀레종 속에 인(燐, P)의 성분이 소량이나마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증명된다. 사람의 뼈나 동물의 뼛속에 있는 인의 성분은 물질의 합성이나 합금을 만들 때 신기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도 우리나라의 무쇠와 청동불상에는 인이 소량 들어있으므로 에밀레종 속에서 인이 발견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불교가 매우 성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봉덕사의 신종에 포함된 인은 동물의 뼈라기보다는 인신공양(사람의 몸을 바치는 일)으로 사람의 뼈가 녹아들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1970년대의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정밀 조사(<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1970년대에 에밀레종을 복제하여 미국에 선물로 보냈는데(우정의 종) 이 종은 현재 미국의 로스앤젤러스(LA) 항구에 있다)에 의하면 에밀레종에서 한 어린아이의 유체(시체)에 해당하는 인이 검출되었다고 발표되었다.

두 번째는 어린아이의 희생으로 종을 만들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사람의 목숨은 물론 짐승의 생명조차 존중하여 살생을 금하는 불교에서 인신공양과 같은 전설이 실제로 일어났다고는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포항산업과학연구원>은 국립경주박물관의 의뢰로 1998년 8월, 에밀레종을 분석하였더니 뼈의 주성분인 인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고 발표하였다. 에밀레종 12군데서 샘플을 채취, 분석 시료 안에 1천만 분의 1% 이상 들어가 있는 성분은 모두 검출할 수 있는 ‘극미량원소분석기’로 분석한 결과 인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똑같은 에밀레종의 검사를 두고 시험 결과가 엇갈리지만 <포항산업과학연구원>에서도 자신들의 분석 때문에 전설이 무조건 근거가 없다는 얘기를 해서는 곤란하다는 단서를 달았다. 사람의 비중이 구리보다 가벼우므로 전설처럼 어린아이를 넣었다면 위로 떠서 타기 때문에 ‘쇠찌꺼기’처럼 남게 된다. 만약에 에밀레종 제작 당시에 이것을 ‘불순물’로 생각하여 제거했다면 인이 검출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견해였다.

1913년 에밀레종을 봉황대에서 구 경주박물관으로 옮기는 장면.


결국 에밀레종에 대한 전설은 인의 발견과 관계없이 과학으로도 풀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을 계속 지니게 된다는 뜻이다. 에밀레종의 주조에 신라의 모든 염원이 쏟아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현대인의 감각만으로 어린아이의 인신공양에 대한 진위 여부를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필자가 잘 알고 있는 외국인에게 에밀레종에 대한 전설을 이야기하자 매우 애절한 이야기이지만 그러한 예는 전 세계의 고대 사회에서 자주 있었던 일이라고 긍정적인 의사 표시를 하여 오히려 필자를 놀라게 했다. 더욱이 그런 전설이 담겨있는 에밀레종이 현재도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는 한국인은 문화유산에 대한 정열이 남다르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고 매우 부러워하는 것 아닌가?

<에밀레종의 특이성>

에밀레종의 명문(銘文)에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라 새겨져 있다. 몸체 높이는 2.91미터이고 종걸이의 높이는 0.65미터이며 전체 높이는 3.7미터이다. 바닥 면의 직경은 2.2미터이고 종신(鐘身)의 두께는 밑쪽이 21.5센티미터이며 위로 올라감에 따라 10센티미터 정도로 얇아지며 전체의 부피는 약 3세제곱미터 정도가 된다. 에밀레종은 그 동안 구리 12만 근으로 만들어졌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대략 20톤으로 무게를 추정해왔으나 1997년의 정밀측정에 의해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에밀레종의 역사적인 발자취도 자못 극적이다. 이 종은 서기 771년에 완성된 후 봉덕사에 봉납되었으나 봉덕사 전체가 수해로 유실된다. 그러나 무거운 종만은 떠내려가지 않은 채 땅속에 묻혀서 약 700년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었다. 그후 조선 시대 세조 5년(1460년)에 영묘사로 옮겨졌으나 종각이 소실되는 사고가 일어난다. 종각이 소실되자 또 다시 노천에 버려져 있던 것을 중종 초년(1506년)에 경주 성문종(城門鐘)으로 옮겨 1915년까지 아침, 정오, 저녁과 삼경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1915년 구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다가 1973년에 현 경주박물관 구내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뉴.


종의 꼭대기에 있는 용뉴(龍鄙)의 용은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어깨와 구연부에는 보상당초무늬가 장식된 문양대가 돌려졌고, 구연부의 끝부분이 모서리로 이루어졌는데 각 모서리마다 연꽃 한 송이씩을 배치하여 변화를 주었다. 어깨 밑에는 보상당초문양대가 장식된 유곽(乳廓)이 4곳에 배치되어 있고 그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乳頭)가 9개씩 조각되어 있다. 유곽 아래로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4구의 비천상과 연화 당좌(幢座) 2개를 교대로 배치했다. 비천상은 연화좌 위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두 손을 모아 향로를 받들고 공양을 드리고 있으며 그것을 휘감아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보상화무늬가 구름처럼 표현되어 있다.

흔히들 동양의 범종은 그 형식과 특징으로 보아 중국종, 한국종(주로 신라 및 고려 시대의 범종 형식) 및 일본종으로 구별하는데 한국 범종은 다른 나라의 범종이 갖지 못한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8세기의 한국 범종은 동아시아 어느 나라 종보다 훌륭한데 그것은 범종 재료의 배합비가 다르기 때문이다. 보통의 청동 제품은 구리, 주석, 납을 섞어 만들지만 용도에 따라 비율이 달라지는데 한국의 청동에는 유난히 아연의 함량이 많다. 아연이 포함된 청동은 중국에서는 한(韓)나라 이전에는 없고 송(宋)나라 때 드물게 나타난다. 아연은 섭씨 900도에서 끓기 때문에 아연이 많이 들어 있는 청동을 합금으로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한국의 청동이 기술적으로 중국이나 일본보다 우수한 것은 자유자재로 우수한 합금을 만들 수 있었다는 뜻이다.

신라의 종에 대한 명성은 세계적으로 매우 높았는데 16세기의 명나라 이시진이 쓴 『본초강목』에는 신라종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고 전상운은 적었다. 본초학이라고는 하지만 박물학에 가까운 책인데 이 책은 그 당시 중국의 박물학을 집대성한 세계적인 명저로 꼽히는 과학의 고전이다.

‘페르시아동은 거울을 만드는 데 좋고, 신라동은 종을 만드는데 좋다.’

그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질이 좋은 동합금들을 소개한 것인데 페르시아의 황금빛 나는 황동과 신라에서 만든 아연-청동이 최고라는 것이다. 성종 19년(1488)에 우리 나라에 사신으로 왔다가 조선의 풍토를 읊어 쓴 명나라 동월의 『조선부』에도 고려동은 질이 우수하다는 글이 있음을 볼 때 신라와 고려의 동이 얼마나 유명했는지를 알 수 있다.

두 번째, 범종을 청동으로 만드는 데는 회전법과 납형법이 있는데 서울대학교의 남천우 교수에 의하면 한국의 범종은 최고급 기술인 납형법을 주로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회전법은 만형법(挽型法) 또는 총형법(總型法)이라고 부르며 간단히 말하면 밥솥과 같이 원형의 단면을 가지는 기물을 주조하는 방법이다. 주형의 내형과 외형은 각각 따로 만든다. 내형을 만들 때는 내형의 외면과 같은 단면 곡선을 가진 외판을 만들어서 그것을 회전시켜 가며 그 안쪽에 진흙을 쌓아 올려 만들고, 외형을 만들 때에는 외형의 내면과 같은 단면 곡선을 가진 내판을 만들어서 그것을 회전시켜 가며 진흙을 쌓아올려 외형을 완성시킨다. 그러나 외형은 원형보다 크게 만들어야 하는데다가 무겁기 때문에 여러 단으로 나누어 쌓아 올릴 수 있게 만든다. 당연히 종에 주형선(鑄型線)이 생기게 된다. 또한 문양을 조각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것은 외형을 일단 완성한 다음에 그 외형에 또다시 조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납형법은 만들고자 하는 물체의 모양을 밀초로 미리 만들어 놓은 다음에 진흙을 발라 두텁게 씌워서 주형을 만든다. 그 후 밀초에 열을 가하여 모두 녹여 빼낸 다음 주형에 쇳물을 부어 종을 완성하는 방법이다. 이와 같은 방법은 밀초로 종을 조각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종의 표면에 부드러우면서도 우아하고 정교한 문양을 표현하는데 적격이다.

현재 불상이나 동종의 거푸집을 만들기 위한 밀랍의 원틀을 만드는 방법을 노태천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선 점토에 만들려는 물체의 모양을 조각한 원형을 토대로 석고의 음형을 제작하고, 석고의 음형에서 다시 석고의 원형을 만들고, 또다시 석고의 원형으로 제라틴 음형을 만든 후에 밀랍의 원틀을 만든다. 합성밀랍을 구성하는 밀랍과 수나무 수지의 배합비율은 기후에 따라 다르다. 여름에는 형태가 변하지 않을 정도의 단단함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겨울에는 반대로 너무 단단하지 않아야 한다. 여름에는 대략 30퍼센트, 겨울에는 20퍼센트의 소나무 수지를 배합시켜서 합성밀랍을 만든다.

물론 납형법이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중국종도 처음에는 회전형법이 사용되다가 납형법으로 이행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754년에 이미 49만 근의 황룡사종을 만들었으며 755년에는 30만 근의 약사여래동상을 만들었다. 그런데 49만 근 짜리 거대한 황룡사종을 거뜬히 만든 신라에서 불과 12만 근의 봉덕사종을 만드는데 많은 실패와 오랜 제조 시간이 걸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황룡사의 종은 주형법으로 만들어졌지만 봉덕사 신종은 납형법으로 제조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재료의 확보도 수월한 일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벌통 하나에서 1년에 생산되는 밀초의 양은 1∼2리터밖에 되지 않는다. 봉덕사종의 부피를 약 3세제곱미터로 추정할 경우 이 정도의 밀초를 준비하려면 손실량을 감안할 때 적어도 4,000∼5,000개의 벌통이 있어야 한다. 당시의 여건으로 보아 단기간에 확보할 수 있는 밀초의 양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봉덕사종의 완성도를 위한 신라인들의 노력을 인정해 주어야만 할 것이다.

〈세계 종소리 콘테스트에서 단연 으뜸〉

에밀레종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으로 판명되기에는 우선 한국종만이 갖고 있는 특수한 구조 때문이다.

한중일 범종의 비교.


종소리는 크고 오래 지속되어야 하지만 이외에도 ‘울림’이 있어야 한다. 종소리의 울림이란 종을 한 번만 쳐도 ‘웅, 웅, 웅’하고 종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계속 되풀이해서 울리는 현상을 말하며 물리학에서는 ‘맥놀이(beats)’라 부른다. 종소리의 울림, 즉 ‘맥놀이’는 진동수가 거의 동일한 두 개의 음파가 동시에 발생될 때 생기는 일종의 간섭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종의 음색은 종을 칠 때 생기는 수많은 부분음으로 구성되는 복합음이다. 종소리는 시간에 따라 3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째 부분은 종을 친 후 약 1초 동안에 나는 소리인 ‘타음’으로 수많은 부분음이 포함되며 그 음색은 부분음의 강약과 진동수의 배열과 관계된다. 둘째 부분은 종을 친 후 약 10초 동안 계속되는 비교적 높은 소리로서 매우 멀리까지 들리므로 ‘원음’이라고 하며 셋째 부분이 약 1분 이상 계속되는 맥놀이인데 매우 정확한 지수 함수적인 감소와 억양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맥놀이 회수는 1∼3초에 1회 정도가 적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맥놀이 횟수가 1초당 6회 정도까지는 귀에 좋은 느낌을 주지만 30∼40회는 불쾌감을 준다.

학자들은 에밀레종의 경우 맥놀이를 유발하는 두 개의 진동원이 어디에 있는지 규명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우선 맥놀이 현상은 종을 만들 때 재질이나 종 두께가 균일하지 않고 완전한 대칭을 이루지 않은 결과 진동수가 미세하게 차이나는 소리가 나오기 때문에 발생한다. 서양종은 이 같은 ‘비대칭성’ ‘비균일성’을 가능한 한 제거하기 때문에 맥놀이 현상이 제대로 발생하지 않는다.

반면에 에밀레종 내부에는 쇠찌꺼기 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주조를 잘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국과학기술원>의 김양한 박사는 ‘쇠찌꺼기로 종의 비대칭성의 폭을 퐉대해 맥놀이 현상을 발생시켰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둘째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에밀레종 상단부를 구성하는 특이한 구조이다.

에밀레종 용머리 뒤쪽에는 대통 모양의 관이 솟아 있는데 이 관은 높이 96센티미터, 안쪽이 14.8센티미터, 위쪽이 8.2센티미터로 속이 비어 있다. 음관으로 불리는 이 부분이 무엇 때문에 있는지는 확실한 결론은 없지만 대체로 종의 음질(音質)과 음색(音色)을 좋게 하는 음향학적 설계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관통된 음관을 주조하는 것은 대단히 번거로움에도 이 음관은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는 한국종에만 있고 중국종, 일본종에는 없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의 엄영하 교수는 종을 칠 때 외부 진동은 멀리 잘 전파되지만, 종 내부에서 일어나는 진동은 안에서 서로 충돌하거나 반사하여 잡음이 나게 되는데 종상부의 음관이 이러한 잡음을 뽑아내는 음향 필터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동국대학교 명예교수인 황수영 박사는 이 음관이 신라의 삼보인 만파식적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황 박사가 이 대통을 만파식적으로 보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 기본형이 원형이며 둘째, 대를 형상화하였으므로 마디가 있고 셋째, 대이기 때문에 내공(內空)이어서 종신(鐘身)에 이르기까지 관통되어 있다는 것이다.

진동양식. 이상적인 진동양식은 좌측과 같으나 실제 진동 양식은 우측과 같다. 점선은 높은 쪽 진동수의 마디선이고 실선은 낮은 쪽 진동수의 마디선이다('조선기술발전사').


또 하나의 구조적인 특징은 명동(鳴洞)이다. 신라종은 종각(鐘閣)에 높이 매달고 치는 것이 아니라 지상보다 조금 위에 종을 달고 치는데, 종구(鐘口)바로 밑의 바닥이 우묵히 패어 있어 공명동(共鳴洞)의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이 명동 시스템은 세계 다른 나라 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라 특유의 시스템으로, 음관으로는 종 내부의 잡음을 빨아내고 명동은 공명진동을 일으켜, 종을 쳤을 때 긴 여운이 남게 만드는 것이다.

모형 실험에 의할 경우 명동이 좋은 종소리를 내게 할 뿐만 아니라 은은한 여음을 내는데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한국과학기술원>의 이병호 교수는 이 명동의 적정 깊이는 현재 종구(鐘口)와 지면 사이의 공간을 45센티미터라고 했을 때, 94센티미터라고 계산하였다. 현재 경주박물관에 시공된 명동의 구조보다 더 깊어야 한다는 뜻이다. 신라 시대의 우리 조상들이 음향학, 진동학 등의 설계와 주조 및 타종 방식을 최적화하는 시스템을 채택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종의 타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장무 교수는 ‘에밀레종의 타점 위치(撞座)가 종의 안전이나 수명에도 유리하며, 종소리의 여운도 길어지도록 절묘하게 제작돼 있다’고 지적했다. 계산에 의할 경우 종을 매단 지점에서 당좌 중심가지의 이상적인 거리는 260센티미터인데 실제 당좌 중심까지의 거리는 238센티미터로 불과 22센티미터 차이였다.

이병호 교수는 또한 후리퀀시 스펙트럼 어낼리시스(Frequency spectrum analysis)를 이용해서 화음상의 평점을 계산하여 종소리를 비교 평가하였다. 음질 평가치를 정의하여 그 수치를 계산하는 것인데 한국의 유명한 종을 100점 만점을 기준으로 평가했을 때 다음과 같았다.

1) 에밀레종 : 86.6
2) 상원사종 : 71.5
3) 보신각종 : 58.2

각 종의 음질평가치에 의하면, 에밀레종이 제일 좋은 종소리를 낸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연구 결과가 아니더라도 에밀레종 소리는 명실공히 세계 제일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츠보이 료헤이에 의하면 일찍이 일본의 NHK방송국에서 세계적인 명종들의 종소리를 모두 녹음하여 일종의 종소리 경연대회를 연 일이 있었는데 에밀레종의 종소리가 단연 으뜸이었다고 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종은 주파수가 160헤르츠 정도인데 에밀레종은 무려 477헤르츠에 달한다고 한다.

에밀레종의 몸체에 새겨져 있는 1,000여 자의 명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무릇 심오한 진리는 가시적인 형상 이외의 것도 포함한다. 눈으로 보면서도 알지 못하며, 진리의 소리가 천지 간에 진동하여도 그 메아리의 근본을 알지 못한다. 부처님께서는 때와 사람에 따라 적절히 비유하여 진리를 알게 하듯이 신종을 달아 진리의 소리를 듣게 하셨다.”  04/11/1 이종호(
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