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돌과 초가집 | ||||||||||||||||||||||||||||||||||||||||||||||||||||||||||||||||||||||||||||||||||||||||||
5만년전 회령 구석기 유적에서 온돌 흔적 발견돼 | ||||||||||||||||||||||||||||||||||||||||||||||||||||||||||||||||||||||||||||||||||||||||||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고 작은 편이지만 기후 변화가 심한 편이다. 이렇게 기온의 연교차가 큰 기후는 해양보다 비열이 작은 대륙의 영향을 많이 받으므로 대륙성 기후라고 한다. 그리고 계절풍의 영향으로 우기인 여름에는 건기인 겨울보다 강수량이 지역에 따라 다섯 배에서 열 배가 더 많다. 여름은 덮고 비가 많으며, 겨울은 몹시 춥고 건조하다. 소위 고온다습, 저온저습의 기후이다. 여름에는 불쾌지수가 있으며 겨울에는 살을 에일듯이 춥다는 표현이 딱 알맞다. 이런 대륙성 기후가 한국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와 위도가 같은 대륙의 동부 지역에서는 대륙성 기후가 나타난다. 일본, 중국의 황해 연안, 미국 동부의 뉴욕 일대 등이다. 그러나 이 지역의 기후도 우리 기후와 상당한 차이를 보임은 물론이다. 한반도에서는 약 100만 년 전부터 구석기인들이 이 땅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시 상원군 흑우리에서 발견된 검은모루 유적은 29종의 짐승 뼈 화석과 함께 거칠게 깨뜨려서 만든 석기들이 발견되었는데 연대 측정 결과 약 100만 년 전, 원인 단계의 사람들이 남긴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인공적인 주거는 대체로 기원전 5,000년경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초기에는 땅을 파서 움을 만들고 나무로 지붕틀을 짜서 덮은 구조였지만 점차 주상 주거로 발전한다. 움집에서는 움의 내부에 화덕 자리를 두어 난방을 했지만 주상 주거로 발전하자 당연히 난방 방식이 달라졌다. 이때 나타난 것이 온돌(구들로도 표현)이다. 온돌(Ondol)은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구들 고래를 만들고 고래 위에 구들장을 놓아 아궁이를 통하여 받아들인 열을 구들장에 저장했다가 서서히 복사열을 방출하여 방바닥이 따뜻해지도록 고안된 난방구조를 말하는데 ‘개정판 옥스퍼드 사전’에 김치(Kimchi)와 함께 실려 있을 정도로 국제어로 인정받고 있다. 이 사전은 온돌에 대하여 ‘아궁이에서 방바닥 밑으로 난 통로를 통해 방을 덮이는 난방’이라고 적고 있다.
네델란드의 위트센은 1690년에 발간한 『북과 동 타르타리아(북아시아)지』에서 온돌에 대하여 ‘방을 만들 때는 마루 밑으로 15센티미터 정도의 구멍을 뚫고, 그곳으로 문 밖에 설치한 아궁이에서 연기를 피워 넣어서 방안을 따뜻하게 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라고 기록하였다. 1883년 미국의 보스턴 출신 과학자인 퍼시벌 로웰은 조선 최초 견미(遣美)사절단의 안내역을 맡아 미국을 방문한 후 그들과 함께 조선을 방문, 그 해 겨울 조선에서 지냈다. 그 후 로웰은 미국에 돌아가 1885년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 속에는 당시 조선의 사회·문화·풍물이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온돌이라는 신기한 난방법에 대한 기록도 있다. '온돌은 겨울철 방안을 따뜻하게 하는 일종의 화로(火爐) 역할을 한다. 방 밖엔 난로용 구멍이 있는데 이것을 아궁이라 부른다. 불을 때면 열기가 마치 벌집처럼 돼 있는 미로(迷路)를 따라 방바닥에 넓게 퍼진다. 아이디어가 뛰어나며 통풍 장치를 보충하면 훌륭한 난방 장치가 될 것이다.' <고조선시대부터 온돌 사용> 한국인이 온돌을 사용한 것은 매우 오래 전부터였다. 북한에서는 영변군 세죽리, 시중군 로남리, 요령성 무순시(撫順市) 연화보 유적 등에서 고조선 시기의 온돌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세죽리 5개의 집터 중 2개의 집터에서 발굴된 온돌은 'ㄱ'자형 외고래 온돌이었다. 온돌 고래는 납작하고 길쭉한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얇은 판돌을 덮어 만든 것이다. 고래의 맨 앞부분에는 고래보다 깊은 아궁이가 있으며, 온돌 고래의 길이는 3∼4미터였다. 이 같은 온돌 유적은 중국 동북부의 무순시에서도 발견됐다. 이 지역 역시 고조선의 영역으로 이는 초기 온돌의 기원을 고구려로 보았던 기존 학설보다 앞선 것이다. 그러나 온돌에 대한 최초의 문헌은 중국의 옛 지리서인 『수경주』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500∼513년 북위의 역도원이 저술한 것인데 '방바닥 밑에 여러 가닥으로 돌을 괴고, 위에 진흙을 발라서 불을 피워 여러 갈래로 열이 흘러 들어가게 해 방바닥을 따뜻하게 한다'는 온돌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그러나 온돌의 시기는 이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추정이다. 지금부터 5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회령 오동의 구석기시대 주거지 유적에서 구들로 추정되는 형태의 바닥과 벽이 발굴됨으로써 그 시기가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약 1백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황하 유역의 주구점 두개골 화석 유적에서 발굴된 바닥에 깔려있는 화원석 등으로 미뤄보아 구석기시대 혹한 지역인 중국 북부나 만주지역에서 유동하던 원시인들에 의해 초기 온돌이 발생됐으리라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여하튼 고구려 초기의 온돌은 자강도 증강군 토성리 유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유적의 제4구에서는 4개의 온돌이 발견되었는데 온돌 구조는 납작한 강돌을 두 줄로 세워놓고 그 밑을 진흙으로 다져 만든 외고래 온돌이다. 구들 고래의 넓이는 20센티미터, 높이는 20∼25센티미터이다. 구들 고래는 남북으로 3.6미터로 놓였고 남쪽에서 서쪽으로 직각으로 구부러져 있다. 안악고분 3호와 약수리 무덤벽화에는 한 여인이 부뚜막에 시루를 올려놓고 음식을 만들고 있고, 다른 여인은 부뚜막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그림이 보인다. 아궁이에서 지핀 불길이 긴 고래 구들을 따라 굴뚝으로 빠지고 있다. 중국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의 「동이전」에는 고구려인들의 주거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거처는 반드시 골짜기를 의지하여 지었고, 지붕은 띠나 풀로써 이엉을 지었으나 불사(佛寺)나 신묘, 왕궁, 관아만은 기와 지붕을 하였다. 그 풍속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 긴 갱(坑)을 만들어 따뜻하게 난방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불사’라는 구절을 보아 고구려에 불교가 도입된 소수림왕 2년(372년) 이후의 기록으로 보인다. 여기서 갱은 중국 사람들이 캉이라 부르는 난방시설이다. 캉과 온돌은 기원이 같은데 온돌이 바닥 전부를 데우는 반면에 캉은 실내의 한 쪽에 벽돌을 쌓아 일부분만 데우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겨울을 보내기 위해 장갱(長坑)을 만들어 따뜻하게 난방 한다’는 말은 상류 계층에서는 온돌이 아닌 난방법을 사용했다는 뜻이다. 상류 계층에서는 철제 화로나 부뚜막 같은 별도의 설비를 방안에 두어 난방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 벽화는 주인공들이 의자에 앉아 있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고구려시대에 이미 의자에 앉는 입식문화와 책상다리로 앉는 온돌문화가 혼재하였다고 추측한다. 〈온돌과 대청의 타협〉 온돌에 대한 기록이나 증거는 백제나 신라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데 이들은 북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따뜻하므로 겨울을 나기 위해 화덕을 집안에 설치하거나 화로를 설치하는 정도로 만족했으리라 추측된다. 『삼국사기』의 헌강왕(875∼886년) 편에는 서라벌에 기와집이 줄줄이 있고 숯으로 밥을 해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온돌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다는 증거로도 인용된다. 온돌은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전기에 들어와 비로소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하였다. 온돌이라는 용어도 조선 초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구들을 놓은 방 전체를 온돌방이라 불렀다. 온돌의 발달은 온돌방의 마감, 특히 장판의 발달을 초래하여 영조 때에는 장판 마감에 여러 가지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한반도의 남쪽은 상대적으로 온난하므로 대청이 발달하였다. 대청은 우리나라 중부 이남의 집에 발달되어 있다. 이것은 바닥 밑이 비어 있는 마루방이다. 필자가 어린 시절에 숨바꼭질을 하면서 마루 밑을 자주 이용하였는데 술래가 사람을 찾으러 들어와서는 마루 밑이 시원한 것을 알고 숨바꼭질을 그만 두었던 기억이 난다. 여름에 무더울 때는 잠자는 공간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요즈음 신세대 사람들은 컴컴한데다가 거미줄도 많은 그곳에서 어떻게 잠잘 수 있느냐고 의아심을 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있는 집에서 마루 밑은 항상 깨끗하므로 거미줄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어린아이들에게 가장 소중한 공간은 바로 마루 밑이었기 때문이다.
남쪽에서 발달한 대청은 계속 북상을 시도하고 온돌도 ‘호시탐탐’ 남하를 시도해서 마침내 서울·경기 지역에서 대 타협을 한다. 마루와 온돌이 한 집에서 공존하는 이중 구조가 나타나는 것이다. 즉 여름을 나기 위한 시원한 대청과 겨울의 생활 공간인 온돌방이 그것이다. 이런 만남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인로(李仁老: 1152∼1220년)의 『공주동정기(公州東亭記)』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공주에 동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이 정자는 지세에 따라 건축되었고 크기는 모두 14칸이며 겨울에 쓸 욱실과 여름에 쓸 양청이 건축되었다.” 여기에서 욱실이라는 온돌 구조와 양청이라는 마루 구조가 하나의 건물에 시설되었음을 보여준다. 일부 학자는 욱실이 온돌 구조라는 확증이 없으므로 온돌과 마루가 고려 시대에 결합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단지 한국의 특징인 하나의 건물 안에서 여름과 겨울을 동시에 대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설명도 있다. 여하튼 온돌과 마루가 하나의 주택으로 결합되었다는 것은 사계절이 분명한 한국적 기후에서 태어난 특별한 거주의 개념으로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거의 없다. 〈과학성을 가진 온돌 난방 방식〉 온돌의 원리는 열의 전도를 이용한 복사 난방 방식의 일종이다. 방고래를 통해 화기(火氣)를 보내 달궈진 구들이 방출한 열로 난방을 하는 것이다. 방바닥을 고루 덮여주기 때문에 습기가 차지 않고 화재에도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재래식 온돌은 실내 기후는 비교적 쾌적하게 유지할 수 있으나 아궁이와 굴뚝 등을 통해 손실되는 열량이 많기 때문에 실제 열효율은 30%에 불과하여 에너지 면에서는 매우 불리한 방식이다. 그러므로 난방만을 하였을 때의 비효율적인 면을 보완하기 위하여 취사도 함께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에너지 효율적인 면도 고려하여 이중 효과를 얻도록 한 것이야말로 선인들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온돌이 오랫동안 온기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구들장의 재료인 돌의 선정이다. 우리 선조들은 주위의 여러 돌 중에서 특별히 운모를 골랐다. 운모는 화성암과 변성암에서 흔히 발견되는 광물로 층상구조로, 백운모, 소다운모, 흑운무, 진발다이트 등으로 나뉜다. 이중 특히 백운모는 열이나 전기가 잘통하지 않는 절연체다. 이런 이유로 다리미 바닥 안에는 백운모가 들어있다고 정순신은 설명했다. 절연체인 백운모 구들장은 아래의 뜨거운 열기를 한꺼번에 방 안으로 내뱉지 않게 해준다. 또한 구들장은 아랫목과 윗목의 두께가 다르다. 이는 아랫목의 경우 불을 지피는 아궁이와 가깝기 때문에 너무 뜨거워질 수 있어 두꺼운 돌을 쓰고 여기에 진흙도 두껍게 바른다. 이 때문에 아랫목의 구들장은 많은 양의 열을 저장할 수 있다. 한편 윗목의 구들장은 얇게 해 빨리 가열되도록 했다. 아랫목과 윗목의 온도차를 가능한 한 줄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방이 식을 때도 마찬가지다. 아궁이에서의 열 공급이 중단된 후에 아랫목에 저장된 얼이 점점 방출되면서 고래에서의 대류로 인해 윗목의 구들장도 급속히 냉각되지 않는다. 이처럼 온돌은 과학적인 지식의 산물이다.
온돌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문화적 요소다. 온돌 아랫목은 오랫동안 한민족 생활 문화의 필수 공간이다. 온 가족이 아랫목에 모여 앉아 정을 나누는 것은 화목한 집안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 필수 요소였다. 아랫목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는 화로 속에서 고구마를 구워 손자들에게 주고, 손자들은 옛날 이야기가 끝나면 다른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다가 살며시 잠이 든다는 것은 동화책에 자주 나오는 이야기이다. 온돌의 발달은 온돌방의 마감, 특히 장판의 발달을 초래하여 영조 때에는 장판 마감에 여러 가지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다. 보통 민가의 온돌은 사오 년에 한 번씩은 새 벽을 하고 새 장판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우선 새 벽이 마른 후에 피지나 백지로 초배를 한 다음 튼튼한 대접을 엎어놓고 방바닥을 고르게 문지른다. 그 위에 다시 창호지를 발라 바탕을 희게 한 다음 들기름을 먹인 두터운 유삼지 각장을 붙여서 장판을 한다. 이 장판 위에 콩댐(물에 불린 탈 콩을 맷돌에 갈아서 자루에 넣은 후 방바닥을 문지르는 것)을 하고 이것이 마르면 마른 걸레질을 수없이 되풀이한다. 여자의 정성이 깃든 장판은 이에 보답하듯 차차 밀화빛으로 변하면서 종래는 마치 거울처럼 된다고 최순우는 설명했다. 장판이 오래되면 웃묵과 아래묵이 온도의 영향을 받아 변하는 것도 방안의 운치를 높여준다. 요사이 장판은 말만 장판방이지 울긋불긋한 꽃장판은 물론 비닐로 된 벽지 무늬를 사용하기도 한다. 현대화의 물결을 무작정 나무랄 수만은 없는 일이지만 한국인의 특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쉽다고 전통 장판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위안을 받는다. 〈현대화 물결에 빼앗긴 온돌〉 현대화의 물결은 우리에게서 아랫목을 빼앗았다. 온돌은 구들 대신 온수 파이프가 깔린 개량 온돌로 변했기 때문이다. 공간에 따라 실내에도 방열기를 설치하여 증기나 온수를 순환시키거나 스토브나 베치카 등을 설치하여 난방한다. 전자를 복사 난방이라 하고 후자를 대류 난방이라고 한다. 대류 난방은 가열된 공기가 천장에 머물다가 옥외로 열기를 빼앗기므로 외기의 찬공기를 덮혀야 한다. 더구나 국부적으로 방열 부위의 공기는 고온이므로 급속히 상승함으로써 천장밑은 가장 높은 온도가 되고 바닥은 낮은 온도가 된다. 사람이 서 있는 자세에서 머리부분은 고온이고 발부분은 낮은 온도가 되는 두열족냉(頭熱足冷)이 되는데 이것은 건강상 좋지 않다고 의학자들은 지적한다. 고온의 공기는 공기 중의 산소 분자의 운동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고 팽창되어 분자간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므로 결국 고온의 공기를 호흡하면 심폐내 산소 분자의 숫자가 작아지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인체에 지장을 초래한다. 실제로 세계적으로 장수하는 지역은 추운 곳에서 다수의 산소를 공급받을 수 있는 지역이며 열대 지방 사람들의 수명이 짧다는 것으로도 증명이 된다. 대류난방과 온돌난방의 열적 특성을 『조선기술발전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가열면의 온도를 낮게 취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류난방인 경우 방열면 표면의 온도가 보통 50도 정도인데 온돌난방인 경우 표면온도가 30∼35도로도 충분하다. 둘째, 온돌 표면온도가 30도일 때 열교환은 총열교환량의 절반 정도이므로 방안의 쾌감온도를 만드는데 유리하다. 셋째, 온돌안방은 복사열교환으로 방 안의 온도를 높이므로 사람의 몸으로부터 나오는 복사에 의한 열방출량을 줄여준다. 위생학적으로 좋다는 뜻이다. 넷째, 온돌난방에서는 바닥 면과 천장 면을 제외하면 실내 상하 온도차가 거의 없는 균등한 실온이 형성된다. 또한 온돌은 발바닥을 포함한 신체가 직접 온돌에 접촉하므로 쾌감을 얻는 동시에 혈액 순환을 촉진시키므로 과학적이고도 이상적인 난방 방식이다. 실험에 의하면 방안의 쾌적온도를 21도로 설정하는데 온돌난방의 경우 바닥높이 50센티미터 정도에서 22도가 유지된다. 그러나 대류 난방 방식은 복사 난방에 비하여 시공이 간편하고 가격이 저렴하며 난방시 예열 시간이 짧다는 유리한 점이 있어 주택에서도 안방 등 침실 공간이 아닌 곳은 거의 전부 방열기가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에너지 파동이 불어닥쳐 건물에서의 난방용 소비 에너지 절감이 주 이슈가 되었을 때 마침 전통 온돌이 사라지고 개량 온돌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에너지 절감 정책을 펴서 주거 건물의 단열성과 기밀성이 향상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각실의 난방 부하를 비교적 적은 에너지로 감당할 수 있게 되었지만 온돌이라면 당연히 생각되는 온돌 바닥의 따스함이라는 개념은 오히려 사라지게 된다. 더구나 패널 히팅을 하면서도 침대를 들여놓는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라는 광고까지 내보내고 있다. 온돌 문화가 지닌 복합적인 장점을 포기하고 침대가 선진 생활인 듯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의 주거 생활은 국적 없는 형태로 변한 셈이다. 그러나 외국의 입식 생활과는 달리 좌식 생활에 익숙한 우리들은 대체로 따뜻한 바닥에 의한 접촉성 온열감에 친숙해 있기 때문에 비록 실내 온도는 쾌적한 범위에 있더라도 바닥 표면의 온도가 낮을 경우에는 만족감을 얻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방 바닥은 가능하면 온도 차이가 있는 부분을 만드는 것이 건강상에 매우 좋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요즈음의 아이들이 잔병에 자주 시달리는 것도 온도 차이가 거의 없는 아파트와 같은 중앙집중식 난방 생활을 많이 하기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이와 같은 단점의 보완책으로 장기간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잠열 저장재를 채택하는 방법도 있다. 필자는 상변화 온도가 29.7도인 염화칼슘 6수화물(CaCl2·6H2O)을 온돌 파넬과 온수 온돌에 골고루 설치한 후 방열 효과를 비교 검토하였다. 실험 결과에 의하면 잠열 저장재를 넣지 않은 경우는 과열 상태를 나타내지만 잠열 저장재를 넣은 경우 과열을 방지할 수 있음은 물론 자연 방열에 의해 장시간 동안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더구나 이 경우 난방 비율도 약 15% 감소시킬 수 있다. 반면에 온돌 바닥 전체를 일정한 온도로 가열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높여 우리의 관습에 적응한 ‘따뜻한 바닥’ 난방을 하는 부분 난방 방법도 있다. 이 방식은 방열 면의 면적을 조정함으로써 거주자가 요구하는 바닥 온도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소위 파이프 온돌임에도 윗목과 아랫목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한양대학교 손장열 교수의 실험에 의하면 부분 난방의 경우 실내 온열 환경이 전체 난방에 비해 상이함을 파악할 수 있다. 인체의 쾌적 바닥 온도 범위는 약 31∼35도이나, 전체 난방을 실시할 경우 약 28도로서 인체가 느끼는 쾌적 바닥 온도보다 온도가 낮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닥 온도를 쾌적 난방 온도로 유지시키기 위하여는 전체 난방 대신 부분 난방을 실시하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이다. 이럴 경우 난방 비율을 10% 감소시켜도 약 3도의 바닥 온도 상승이 가능하므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는다. 미국의 백화점에서 ‘미니 온돌’이라는 이름으로 소형 전기 담요가 판매되고 있다. 대 메이커인 제너럴일렉트릭 제품으로 소위 히트 상품이란다. 프랑스의 CNRS(국립과학기술연구소)에서도 에너지 절약의 일환으로 온돌을 연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온돌을 사용할 경우 입식 생활에 사용되는 강제 환기식 난방 방법보다 약 20% 이상의 에너지가 절약되기 때문이다. <첨단 에너지 절약 개념이 도입된 초가집> 주상 주거 중 우리나라의 기후와 자연 환경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바로 초가집이다. 과거 대표적인 서민 주택인 초가집은 추수를 마친 벼의 짚을 이용해 지붕을 만들고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진흙으로 두텁게 벽을 만들었으며 창호지 문을 설치했다. 바로 이 초가집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인 에너지 절약형 주택이다.
초가집은 짚과 소나무와 흙 등의 세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다. 짚으로 만든 지붕은 가벼워서 기둥에 거의 압력을 주지 않으며 비가 오거나 눈이 녹아도 짚의 결을 따라 흘러내려 잘 새지 않는다. 또 지붕 위에 얹힌 볏짚은 단열재 역할을 한다. 단열재란 열을 전달하지 않는 재료로서 그 원리는 재료가 비어 있는 공간을 많이 갖도록 한 것이다. 양철지붕이나 돌지붕보다 초가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것도 짚의 단열재 역할 때문이다. 짚을 받쳐주는 소나무의 역할도 만만치 않다. 소나무의 겉은 연질(軟質)이지만 그 속심에는 송진이라는 썩지 않는 성분이 있어 겉은 썩더라도 속심은 멀쩡하다. 오래된 집을 보면 지붕이 기우뚱해도 넘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게다가 진흙으로 된 두꺼운 벽도 초가집의 중요한 요소이다. 일반적으로 흙을 갤 때 짚을 넣거나 수수깡, 대나무를 심재로 넣어 흙이 무너지는 것을 막는데, 두터운 벽은 낮에 비추는 태양열을 흠뻑 받아들여 차가운 저녁에 실내로 열을 방출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 기후는 여름에는 고온다습(高溫多濕)이고 겨울에는 저온저습(低溫低濕)이므로 여름에는 습기로 인해 불쾌지수가 높고 겨울에는 살을 에듯 춥다. 이런 기후에는 열기와 냉기를 차단해주는 단열 효과가 큰 자재가 가장 적합한데 그것이 또한 흙이다. 더구나 초가집은 두터운 흙이 저절로 습도를 조절해주기 때문에 가습기가 필요없다. 사람이 가장 쾌적하게 느끼는 습도는 평균 60퍼센트이지만 한국의 여름 기후는 종종 습도가 90퍼센트를 넘어간다. 그러나 초가집은 한지를 사용한 창호지 문과 흙벽이 습도를 조절함으로써 불쾌지수를 낮추어주어 습기가 차지 않아 결로 현상이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 같은 기후에 가장 좋은 주택은 바로 초가집이다. 아울러 초가집은 도시형 주택보다 30퍼센트 정도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 이러한 초가집을 황토로 지으면 금상첨화이다. 황토는 아주 가는 모래가 모여 만들어진 흙으로 다양한 광물 입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황토 1그램에는 약 2억 마리의 각종 미생물이 살고 있다. 이런 미생물들이 숨쉬고 있는 황토는 식물의 영양 공급원이 되는 동시에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약품으로도 활용된다. 옛날에 배탈이 나면 황톳물을 마셨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민간요법이다. 독충에 물린 자리에도 황토를 발라 독을 뺐고 장이 약한 사람에게는 황토 찜질을 권했다. 이런 민간요법이 효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인체에서 나오는 독성을 중화시키는 황토의 성질 때문이다. 흙은 성분과 색깔에 따라 적토, 황토, 흙토, 백토 등으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황토가 인체의 생리작용과 가장 잘 맞는다는 주장도 있다. 황토에는 카탈라아제, 프로테아제, 디페놀 옥시다아제, 사카라아제 등 인체에 유익한 효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카탈라아제는 흙이 갖고 있는 효소 중에서 가장 높은 활성을 보이면서 노화 현상을 불러오는 과산화지질이라는 체내 독소를 중화 내지 희석시킴으로써 노화를 억제하고 젊음을 유지시켜주는 효능을 갖고 있다. 초가집이 건강에 좋은 이유는 볏짚이 갖고 있는 아스파라기라스오리제와 황토 속에 있는 카탈라아제라는 효소가 결합하면서 체내 과산화지질의 분해를 돕기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또 사람들이 초가집의 단점으로 지적하는 것이 알고 보면 장점 가운데 하나가 된다. 한 예로 초가집은 생태계가 그대로 유지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초가집에는 굼벵이나 참새 등이 기생하면서 지네나 모기와 같은 해충을 잡아먹는다. 그런가 하면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구렁이가 참새나 지네 등을 견제한다. 구렁이는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은 채 집을 보호함으로써 선조들은 구렁이를 주요한 집지킴이로 받들었다. 이러한 짚문화는 벼농사를 짓는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외국에는 짚문화가 없다. 물론 외국에도 밀짚이 있지만 보리짚이나 밀짚은 재질이 딱딱해서 지붕은 물론 일상용품도 만들 수 없고 그저 땔감으로만 사용될 뿐이다. 반면 많은 장점이 있는 초가집은 지붕을 정기적으로 교체해주어야 하는 단점 때문에, 그리고 과거 <새마을운동>이라는 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거의 사라지고 이제는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노동력이 부족한 현대 생활에서 초가집이 사라지는 현상을 옛날 향수로만 되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초가집이 인간의 건강과 에너지 절약에 절대적으로 유용하다면 앞으로 초가집을 짓는 사람이 점차 늘어날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실제로 최근 들어 황토집이나 초가집을 짓는 붐이 일고 있다니 그들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기를 바란다. 04/11/20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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