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과학적인韓國史

(53)한민족·한국인은 누구인가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2. 12:46
한민족·한국인은 누구인가 ①
한민족은 누구인가 즉 한국인의 기원과 형성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인’과 ‘한민족’의 개념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규정해야 한다. 한국인은 한민족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entity)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한국인의 뿌리는 한국 민족형성 바로 전 단계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민족은 하나의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볼 수 있는데 한민족은 그런 의미에서 한국어와 한글을 공통의 문화요소로 사용하며 한반도에 집중되어 사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한민족이라는 단어에 함축된 뜻은 매우 많다. 같은 혈통에, 생김새가 비슷하고, 행동도 비슷하고, 같은 말을 쓰는 등 여러 공통점이 한민족이라는 말에 압축돼 있다. 한민족의 ‘뿌리찾기’란 결국 지금 한국이란 영토 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 유전자 풀은 어떤가 하는 것이다.

물론 어느 종족이 여러가지 이유로 어떤 특정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분리된 경우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들이 떠난 고향과 언어도 달라지고 풍습도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간에 뿌리가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 간에 떼어낼 수 없는 공통점을 다른 민족보다 많이 발견할 수 있을 때이다. 그 공통점이 무엇인가는 정의하는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데 한민족의 경우 한민족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특징을 보유하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한민족은 누구인가‘에 대해 3회에 걸쳐 설명한다.

<아프리카 가설>

인류의 기원에 대하여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는 학설이 아직은 없다. 다만 가설들만 제기되고 있을 뿐이다.

1987년, 세계를 경악케 만든 하나의 가설이 발표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대의 알란 윌슨이 세계 각지 147명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조사하여 계통수를 그린 결과, 현대 인류의 조상은 단 한 명이라는 것이다. 그는 각각 두개골 화석을 비교하는 방법과 분자유전학적 방법(분자시계)으로 현대 인류가 14만년에서 29만 년 전(이하 20만 년 전으로 적음)에 동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에서 돌연변이를 일으켜 발생한 후 이 후손들이 세계 각 지역으로 이주하여 모든 인류의 부모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아프리카 가설(Out of Africa theory)’이라 부른다.

아프리카 가설은 인류가 ‘이브’라 불리는 한 명의 여성 선조에게서 두 개의 계통수로 나뉘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가설에 따르면 한쪽 가지는 아프리카인들뿐이었으나 다른 한쪽 가지는 아프리카인을 비롯하여 모든 인종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것은 현 인류의 선조가 아프리카에서 진화한 뒤 세계 각지에 진출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영국의 인류유전학자 브라이안 사이크스는 『이브의 일곱 딸들』이란 책에서 전 세계의 미토콘드리아 DNA형을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L형에서 나뉘어 나온 33개로 분류하고, 동양인은 여섯 개의 집단으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아프리카 가설을 다룬 『뉴스위크』지 표지, 현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고작 20만 년 전에 살았던 한 여자 '이브'의 자손이라는 가설을 일반 사람들은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모든 인류의 선조가 겨우 2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 있었다는 가설은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먼저 이 가설이 받아들여질 경우 인류의 조상에 관한 지금까지의 모든 지식을 폐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유전자 분석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유전되는 생물체의 특성은 기본적으로 DNA 염기서열에 의하여 결정된다. 생명체의 종(種)이 다르면 당연히 이 염기서열도 달라진다. 염기서열에는 생명체의 청사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평균 1300염기서열에 하나의 비율로 차이가 난다. 생명체 사이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염기서열의 차이도 크다. 즉 ‘염기서열이 다른 정도’가 크면 클수록 생물간의 차이도 커진다. 생명체들이 원시적인 것에서 점차 진화해왔기 때문인데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변화하려면 유전자들의 복잡성도 커져야 하는 것이다.

이를 분자시계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하면 이해하기가 쉬워지는데 이홍규 박사의 논문에서 인용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진화에는 시간이 걸리고 환경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어떤 환경에 잘 적응한 생물은 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나 환경의 변화가 크면 그 지역에 살던 생물의 수는 줄어들고 새로운 형질을 가진 생물의 수가 증가할 기회가 부여된다. 이러한 현상을 뒤집어보면 새로운 형질을 가진 생명체가 많을수록, 즉 다양성이 증가할수록 그러한 진화가 진행된 시간이 길고 환경의 변화도 컸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즉 어떤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크면 클수록 진화가 일어난 시간이 오래된 것이다. 이렇게 돌연변이에 의해 나타나는 단백질의 변이(나아가 단백질을 만들도록 지령하는 DNA의 변이)를 조사하여 진화가 일어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 ‘분자시계’의 개념으로 DNA의 분석자료와 지질학적으로 얻어진 자료들을 대비함으로써 확립된다. 이러한 분자시계 개념은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을 통해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먼저 미토콘드리아를 살펴보자.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발전소와 같은 것으로 우리가 먹는 당분이나 지방질들을 태워서 화학 에너지인 ATP를 만들어낸다. 미토콘드리아는 독자적인 DNA를 가지고 세포 안에서 분열에 의해 증식한다. 또 항생 물질에 대한 내성(耐性)이 원핵 물질과 비슷한 점으로 보아 호기성 원핵생물이 원시 진핵 생물에 흡수되어 세포 공생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미토콘드리아를 획득한 생물 중에는 시아노박테리아를 흡수한 생물도 있다. 세포 공생을 한 시아노박테리아는 나중에 엽록체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다양한 유전자의 염기 배열의 비교를 통해서도 분명하다. 미토콘드리아도 엽록체도 게놈의 사이즈는 원핵생물에 비해 매우 적은데 이것은 세포 소기관으로서 정의되어 가는 과정에서 많은 유전자가 핵으로 이동하고 그 지배에 들어가게 된 것을 뜻한다.

미토콘드리아라는 고성능 에너지 변환 장치를 얻게 된 진핵 생물은 몇 가지 생물로 분화하면서 진화하고 마침내 폭발적으로 많은 생물로 변하게 된다. 즉 진핵 생물에게 빅뱅이 일어난 것과 같다. 이 결과 미토콘드리아를 가진 진핵 생물의 무리에서 현재 지구상에서 번성하고 있는 동물들이 태어난 것이다.

여하튼 한 지역에서 인류가 나타난 후 다른 지역으로 그 일부가 이주하게 되는 경우 인류의 원(原)발생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유전적 변이는 이주하여 사는 사람들의 유전적 변이보다 훨씬 다양하다. 가령 미국의 LA나 일본 오사카, 만주의 연변지역에 사는 우리 동포의 유전적 변이는 그 중심지인 서울의 유전적 다양성에 훨씬 못 미칠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이는 엄격한 의미에서 유전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한민족'의 특성을 기준으로 할 때 비유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연구한 결과 mtDNA의 변이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서 가장 다양하게 나타났고, 분자시계 개념으로 계산할 때 가장 오래된 변이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아프리카에서 이 mtDNA를 가진 여성이 먼저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프리카 가설에 따른 인류이동도(『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


루카 카발리-스포르차 교수는 1988년 언어의 차이와 유전자 풀의 차이를 통하여 전 세계인을 분류했다. 유전자 풀(gene pool)이란 한 종류의 생물 집단이 가진 유전자의 다양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재 풀’에서 쓰는 것과 같은 의미로, 가령 혈액형 A, B, AB, O를 가진 사람들의 분포는 각각 A란 유전자와 B란 유전자가 얼마나 그 집단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즉 A와 B 혈액형 유전자의 풀에 의해 결정된다. 실제로는 혈액형을 따지는 것이나 혈액형을 결정하는 유전자, 즉 DNA의 변이를 따지는 것은 같은 결과를 나타내는데, 후자 쪽이 훨씬 자세하게 실상을 파악하게 해준다.

아프리카 가설에 의한 세계인 분류도에 의하면 한국인과 일본인, 티베트인, 몽골인들은 에스키모,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유전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동일하다(북부 아시아인). 반면에 중국 남부인들은 캄보디아인, 태국인, 인도네시아인, 필리핀인들과 동일하다(남부 아시아인). 즉 남부 중국인과 북부 중국인‧한민족은 다른 갈래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북부아시아인과 남부아시아인들이 약 12만 년 전에 분지(分枝)된 것으로 본다. 이 자료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중국 사람들은 남북 아시아인으로 12만 년 전에 분지되었다가 다시 만난 한 핏줄의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은 아프리카에서 나온 우리의 선조가 택한 경로를 대체로 두 갈래로 추정한다. 첫 번째는 과거 인류학에서 '버마 경로'라고 부르던 것으로 인도양과 아시아의 해안을 따라 동으로 이동한 것을 말한다.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중국 땅에 현 인류가 정착한 것을 6만~7만 년 전의 일로 보는데 중국에 도달한 사람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한반도와 일본에도 정착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일본과 한국은 1만 2000년 전까지도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중국에 도달한 사람들이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정착한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니다.

메모리대의 윌레스 교수는 이들 중 일부가 약 3만 5000년 전에 아메리카로 건너갔다고 추정한다. 아마도 해안을 따라 북상하던 그룹이 빙하기에 얼음으로 연결된 베링해를 지나 아메리카로 건너갔을 것이다.

두 번째의 경로는 히말라야 산맥 북쪽을 택하여 실크로드를 거치거나 시베리아를 거쳐 내려오는 것이다. 한민족의 일반적인 특징은 추위를 이겨내기 쉽도록 실눈이 많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동그스름한 콧날, 속 쌍꺼풀, 검은머리, 단두형의 머리 등 체질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홍규 교수는 바이칼 호 근처에서 6만~7만 년 전부터 한국인의 특징을 갖고 있던 민족인 북부아시아인들이 약 1만 3000년 전에 빙하가 녹으면서 북부아시아인들이 몽골루트를 거쳐 남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빙하가 녹으면서 거대한 홍수가 자주 일어났고 바이칼 호의 저지대가 물에 잠기자 많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이동해갔다는 것이다. 바이칼 호는 길이 636킬로미터, 최대 너비 79킬로미터, 면적 3만1500제곱킬로미터이다. 둘레는 2200킬로미터이며 최대 심도 1742킬로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넓고 가장 깊은 호수이다.

한편 리처드 앨리 박사는 1만 1000년 전 지구의 기온이 화씨 9~18도로 급상승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오늘날 평균기온의 3분의 1에 해당하는데 그 같은 기온 상승이 불과 10년 동안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대기온도의 상승으로 빙하층이 녹아 해수면이 급격히 높아졌지만 아직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대체로 학자들은 빙하가 녹아 세계 각지에서 대홍수와 같은 지구의 격변이 일어난 시기를 11,000~13,000년 전으로 추정한다.

최근 일본 오사카의과대학의 마쓰모도 교수는 사람의 혈청(血淸) 중의 항체유전자를 연구하여 몽고인종의 기원과 이동의 경로를 추적했다. 마쓰모토는 몽고인종을 특징짓는 유전자 결합이 네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몽고인종의 혈청 중에 있는 Gmab3st 유전자를 주목했다.

바이칼호 북쪽에 있는 뷰리아트 족이 몽고인종 중에서 Gmab3st 유전자가 100명 중에서 52명으로 가장 많았고 한국인은 41명, 일본 본토인은 45명인데 반하여 중국인은 화북(華北)지방이 26명 화남(華南) 지역은 9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반면에 북극지방에 사는 에스키모 족은 44명이나 몽고인종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마쓰모도 교수의 혈청에 의한 연구 결과는 시베리아로부터 남쪽으로 멀어질수록 혈청 중에 Gmab3st 유전자를 가진 사람의 수도 적어지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몽고인종이 시베리아로부터 기원한 것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학자들은 여러 유전자 변이를 분석한 결과 최근 남자의 원형은 약 5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나타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mtDNA 분석 결과 시간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지만 분자시계법으로 얻는 수치의 오차가 상당히 크므로 수만 년 정도의 차이는 인정할 정도의 숫자임을 감안해야 한다.

바이칼호수, 바이칼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넓고 깊은 호수인데 약1만3000년 전에 빙하가 녹으면서 홍수가 일자 북부아시아인들이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추정한다(『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


<다지역기원설>

현 인류의 시조가 아프리카의 이브에서 시작되었다는 ‘아프리카가설’은 최첨단 유전자기법 사용이라는 이점을 갖고 있으므로 인류의 기원을 찾는 연구에서 점차 기선을 잡고 있는 감이 있다.

그러나 마술사의 마술봉과도 같은 유전자분석은 또 다른 인류기원의 가설인 ‘다지역기원설’이라는 벽을 넘어서지 못한 감이 있다. 과거에 비교적 현대 인류의 탄생을 조리 있게 설명해 준 다지역기원설은 약 100만 년 전까지 인류는 한 뿌리였지만 호모 에렉투스 이전에 여러 갈래로 나눠져 세계 곳곳에서 각자의 특성에 따라 발달했다는 것이다. 즉 현재의 인류가 지니고 있는 인종적 특징은 각 지역에서 오랜 세월동안 진화해 온 결과라는 뜻이다. 이것은 현생 인류가 유럽과 동시에 아프리카, 중동아시아에도 존재했다는 것으로 황인종의 조상은 황인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북경원인에는 몽골로이드계 인종에서만 보이는 형태학적 특징이 있다는 점에서 북경원인은 몽골로이드의 선조라는 것이다. 이를 한민족에 적용한다면 70만 년 전에도 한반도에 원시인이 살았는데(북한의 검은모루 동굴의 원인은 100만 년 전으로 추정), 이들은 유럽에 살던 사람들과는 조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아프리카가설 자체에 대해서도 반박한다.

일부 학자들은 윌슨의 계산법에 잘못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가정조건(假定條件)이 너무나 많아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아프리카 기원설은 어떠한 특수한 조건이 존재했기에, 그곳에서 인류가 시작됐는가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던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는지도 불분명하다.

특히 아프리카 가설은 성서의 이브처럼 여성 단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유전적으로 같은 성질을 갖고 있는 여성이 1만 명이 있다고 해도 시대를 거치는 사이 계통은 점차 줄어들게 된다. 또 여자아이를 낳지 못하면 미토콘드리아 DNA의 계통은 끊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계산에 의할 경우 평균 1만 세대 뒤에는 단 한 사람의 여성 계열을 제외하고는 다른 계열은 끊긴다.  

력포사람의 복원도(10만 년 전).
1세대를 20년에서 30년으로 잡으면 1만 세대는 20만 년에서 30만 년이 된다. 즉 여러 인류 공통의 조상인 미토콘드리아 이브가 20만 년 전에 살아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 단 한 명의 여성이 살아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도 1만 명의 다른 여성이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브’는 현생인류의 기초 유전자를 제공한 ‘특별한’ 여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핵 DNA는 부친과 모친 양쪽에서 유전되며 차세대에 전해지기 전에 다시 짜여 지는 과정을 거친다. 즉 미토콘드리아의 이브와 동시대에 산 많은 남녀의 DNA가 뒤섞인 형태로 우리 인류에게 남아있게 된다. 현 인류의 미토콘드리아DNA가 미토콘드리아의 이브에게서 유래하더라도 사람의 유전적 특징의 대부분을 결정하는 핵의 DNA 중 ‘이브’에서 유래하는 부분은 극히 적다는 뜻이다.

아프리카 가설에 대해 가장 큰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바로 화석인류학자들인데 그들은 소위 ‘샹델리아 모델’을 제시한다. 고고학적 증거도 제시했다. 그들은 최근 남부 중국에서 2백만 년 전 초기 인류의 석기를 발견했고 그 조상들이 원인(猿人)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다지역기원설을 지지해주는 자료로 제시한다.

2006년 7월, 일본의 〈국립과학박물관〉연구팀은 아시아인이 종전의 학설에 비해 45만 년 전인 180만 년 전경 아프리카에서 아시아로 진출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연구팀은 과거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과거 발견된 자바원인의 치아와 턱 화석 100여개의 특징을 아프리가 원인(原人)의 화석과 비교한 결과 이같이 분석됐다고 주장했다.

이번 분석에서 자바원인의 화석은 치아가 크고 턱이 단단해 180만 년 전 아프리카원인에서 나타난 특징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원인은 진화하면서 치아가 작아졌는데 연구팀은 180만 년 경 아프리카를 떠나 최초의 여행길에 오르면서 이때 벌써 아시아 동부지역에 당도했다는 것으로 또 한 번 다지역기원설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또한 동부아시아와 북부, 북미의 복합적인 석기 제작 기술 등을 분석해볼 때, 수만 또는 수십만 년 동안 복합적인 기술이 고대 베링해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베링기아(Beringia) 인류발생설’도 제시되었다. 즉 가장 오래된 인류 공동체가 베링해를 사이에 두고 아메리카와 아시아 대륙을 하나로 묶는 문화공동체로 이루었다는 가설이다.

또 다른 증거는 알타이 지역 여러 곳에서 28만~20만 년 전 유럽의 중기 구석기 석기 제작 기법인 르발루아 기법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 기술은 새로운 기술의 유입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석기 문화가 기술적 변화를 갖고 온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고고학적으로 한 지역의 석기문화가 지속적으로 발달 전개되었다는 증거가 제시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기 구석기시대에 석영을 석재로 사용한 자갈 돌석기 전통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 자갈 돌석기 전통은 하나의 계통성을 가지고 후기 구석기시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베링해 문화권, 알타이 지역, 우리나라의 문화권적 계통성을 통해서 볼 때 다지역기원론도 힘을 받는다.

승리산사람의 복원도(4~5만 년 전).
이 가설에 의하면 어느 지역에 새로운 다른 집단이 이동해 들어와 기존 문화를 다 몰아내고 새로운 문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집단이 주변 지역에 상존하고 있던 문화와 접변을 이루며 새로운 환경에 적절한 또 다른 문화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또한 단일기원설에 따라 인류가 이동해 간 자리를 따라 추적해 보아도 어떤 일관되고 동일한 성격의 문화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있는 것을 찾을 수 없다는 것도 다지역기원설을 뒷받침해주는 자료로 제시된다.

다지역기원설을 강력히 지지하는 측은 중국과 북한측 학자들인데 1989년과 1990년 중국의 운현 청곡에서 운현인이라 불리는 100만 년 전의 고인이 발견되자 더욱 기세를 올린다. 이들 고인이 발견된 것도 매우 극적이다.

중국의 십언시 박물관장 왕정화가 1989년 길을 가는데 두 농부가 밭에서 한 개의 돌조각을 놓고 싸우고 있었다.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있던 왕정화가 무슨 일이냐고 질문하면서 돌을 보니 그것은 동물의 뼈였다. 그는 곧바로 두 사람에게 땅을 파달라고 했는데 50센티미터를 파자 치아를 포함한 인간의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100만 년 전 홍적세시대의 운현인으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였다. 학자들을 흥분시킨 것은 북경원인보다 무려 40만 년을 더 올라간다는 점이다. 1990년에 또 다른 완전한 두개골이 발견되자 영국의 『더 타임스』지는 ‘현대 인간의 조상이 근래에 아프리카에서 출발했다는 아프리카가설의 이론이 위태로워졌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중국에서의 유물은 계속 발견되었는데 2002년 12월 중국의 삼협(三陜)댐 건설 현장 인근인 쓰촨(四川)성 펑제(奉節)현에서 세계 최고의 악기가 발견되었는데 이 악기는 무려 약 14만 년 전 인류가 사용한 것이 틀림없다고 발표되었다. 중국의 황완보(黃萬波) 교수는 펑제런(奉節人)으로 불리는 싱룽둥 고인(古人)은 약 12만~25만 년 전의 인류로서 이들이 악기를 사용했다는 것은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는 '아프리카 기원설'이 재고되어야 한다고 다지역기원설을 강력히 주장했다.

특히 미국 유타 대학의 클레이턴 교수는 호모 에렉투스가 100만 년 전에 아프리카를 떠나 40만 년 전에 멸종됐으며, 호모 사피엔스가 20만 년 전에 아프리카를 떠났을 것이라는 주장에 반대하여 현생 인류는 원시 인류를 만났다는 증거를 찾았다고 발표했다.

현재 전 세계에서 2종류의 머릿니가 발견되고 있는데 머릿니는 인간의 모발에서만 서식하며 인간의 피 없이는 하루 이상 생존할 수 없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한 종류의 머릿니는 현생 인류와 다른 원시인을 통해 진화했다는 것이다.

만달사람의 복원도(2만 년 전).
클레이턴 박사는 이제까지 확인된 머릿니는 전 세계에 고루 분포하는 것과 미국 인디언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있는데 이 중 전 세계에서 발견되는 머릿니는 호모사피엔스에 기생하면서 진화했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서로 다른 유전적 특징을 감안할 때 100만 년 이상 서로 고립돼 있었을 이 2종류의 머릿니가 현생 인류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가 공존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며, 아시아에서 발견된 화석은 호모 에렉투스가 5만 년 전까지 생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현생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더 복잡하고 새로운 학설들이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과거 어머니 계열의 유전자 전달 체계(미토콘드리아 DNA)만 알려졌다가 부계유전(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만 전달)되는 Y염색체 DNA와 모계유전(어머니로부터 아들과 딸에게 전달)되는 미토콘드리아 DNA가 드러났고, 이것은 다시 일곱 개의 유전적 갈래로 나뉜다는 것이 최근에 알려졌다(‘아프리카 가설’이 나올 때는 부계 유전되는 DNA에 대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계유전만을 전제로 해서 ‘아프리카 가설’이 명명된 것임).

아프리카가설은 최근 유전학의 연구 결과에 의해 보다 설득력 있는 자료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다지역기원설도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 아프리카가설이 갖고 있는 모순점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학문적 차이는 앞으로 유전학과 고고학의 접목으로 그 격차가 점차 좁아질 것으로 생각된다. 인류의 기원을 명쾌하게 밝힐 수 있는 연구는 이제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인의 특징>

한국인이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머리 길이가 짧고 그 높이가 매우 높다’는 점이다. 특히 머리뼈의 높이가 높은 것은 구석기 시대 사람부터 현대 사람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알려져 있으며 다른 집단의 사람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이용되고 있다. 여기서 머리의 길이는 이마에서 뒤통수까지의 거리를 말하며, 높이는 아래턱뼈 윗부분의 ‘으뜸 점’에서 정수리까지의 거리를 말한다.

머리뼈 길이를 비교해 볼 때 한반도에서 출토된 머리뼈는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에 오면서 길이가 매우 짧아진다. 신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까지 머리뼈는 현대 한국남자보다는 약간 긴머리로 나타나며 신석기시대에 짧아진 머리뼈는 청동기시대에 변화가 없다. 반면에 초기 철기부터 7세기에 걸쳐 발굴된 머리뼈들은 머리뼈 길이가 다시 늘어나다가 현대 한국남자에 오면 길이가 다시 줄어든다. 이렇게 시대에 따라 나타나는 커다란 변화는 새로운 유전자의 유입인지 아니면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일반적으로 진행된 환경의 변화로 인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특히 북한은 앞에서 설명한 ‘아프리카 가설’을 강력히 반대하며 한민족의 경우 ‘다지역 기원설’의 전형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이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우선 1966~1968년, 평양 상원군 흑우리 검은모루 동굴에서 원시인들이 쓰던 타제석기와 함께 29종의 짐승뼈 화석이 발견됐다. 북한은 이 석기들이 원시적이긴 하지만 갓 형성된 사람들의 목적의식에 따라 창조된 유물로 절대 연한을 대략 70만 년 전(북한은 새로운 측정 장치에 의한 측정법으로 재측정한 후 100만 년 전으로 소급하고 있음)으로 추정했다.  

2002년 4월에 발견된 함북 화대군 석성리의 화산용암 속에서 인류화석도 중요한 증거로 제시했다. 이 화석을 열형광법으로 절대 연도를 측정한 결과 화석의 주인공은 거의 30만 년 전의 것이였다. 세계적으로 화산 용암 속에서 인류화석이 발견된 것은 세계 최초라며 북한측은 이 발견으로 한반도에서 인류 진화 발전과정이 꾸준히 진행되었음을 증명한다고 기염을 토했다. 북한은 이 인류화석에 ‘화대사람’이란 학명을 부여했다.

1972~1973년에는 평남 덕천 승리산 동굴의 아래층, 1977년 9월에는 평양 력포구역 대현동 동굴(7~8세의 어린이)에서 각각 구석기 중기에 해당하는 인류화석을 발굴했다. 북한은 이를 각각 ‘덕천사람’과 ‘력포사람’으로 명명했으며 원인 다음 단계의 사람이라 하여 고인(古人)으로 부르며 10만 년 전으로 추정했다.

승리산 유적의 구석기층 아래층에서 덕천사람의 치아와 어깨뼈가 발견되더니 위층에서도 신인(新人)의 아래턱뼈가 발견됐다. 위층에서 발견된 아래턱뼈 주인은 약 4~5만 년 전의 사람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승리산사람(35세 정도의 중년남자)'이라 부른다. 1979~1980년 평양 승호구역 만달리 동굴에서 거의 완전한 형태의 골격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만달사람(25~30세 정도의 남자)’이라 명명했으며 체질 구조로 볼 때 약 2만 년 전의 사람으로 추정했다.

북한측은 만달사람들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원인‧고인‧신인을 거쳐 더 발전된 형태를 신석기 시대의 ‘조선옛유형 사람’이라고 명명하는데 만달사람들이 이런 조선 옛 유형 사람들의 징표를 모두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달동굴에서 인골로 발견된 사람을 우리 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한 번 상세하게 다룬다.

검은모루동굴 전경, 북한은 검은모루동굴에서 발견된 유물의 절대년한을 70~100만 년 전으로 추정했다.


북한이 한민족은 한반도에서 발생해 진화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명쾌하다. 70~100만 년 전 검은모루 유적을 남긴 원인이 력포사람과 덕천사람을 거쳐 승리산사람으로 발전하였고 조선옛유형 사람을 거쳐 현대 한국인으로서의 특징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한민족의 혈청학적 특징도 제시한다. 사람들의 혈액형과 유전자형들은 인종을 식별하고 각 민족들의 친연관계나 차이들을 확증해주는 중요한 지표로 인정된다. 그런데 북한의 장우진은 한민족의 경우 적혈구혈액형들인 레주스식 혈액형에서 나타나는 항원들의 양성인자 중 D항원이 세계적으로 가장 높다고 발표했다. D항원의 양성인자는 아시아 인종에서는 99~99.5퍼센트, 유럽인종에서는 85%, 아프리카 인종에서는 91% 정도인데 한민족은 D항원의 양성자가 99.71%에 달한다.

특히 유전자 조성에 있어서도 한민족과 중국인들은 흑룡강 성의 중국인을 포함하여 완전히 다르다. 한민족의 레주스식 혈액형의 유전자는 CDe>cDe>cDE>CDE>cdE의 순위로 작아지는데 반해 흑룡강성 지역의 중국인에서는 CDe>cDE>cDe>CDE의 관계로 나타나며 귀주성 지역의 중국 사람에서는 CDe>cDE>cde>cDe>CDE의 순위로 나타난다. 이것은 한민족이 중국 사람과 혈연적 갈래가 서로 다른 집단임을 알려준다.

또한 켈식 혈액형의 K+ 인자는 유럽인들에게 특징적인 항원의 하나인데 한민족의 켈식혈액형에서 K항원의 양성인자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데 반해 유럽인들은 7~9%나 나타난다. 특히 다피식혈액형의 지리적 분포는 인종적 차이를 잘 반영하는데 한민족은 다피식혈액형의 양성인자가 92%이고 음성인자는 7.83%이다. 반면에 중국 사람의 다피식혈액형의 음성인자는 화북지역의 중국 사람에서는 4.35%, 상해지역의 중국 사람에서는 1.82%, 베이징 지역의 중국 사람에서는 0.44%이다. 따라서 한민족은 다피식혈액형의 음성비율이 화북지역의 중국 사람보다는 1.8배, 상해지역의 중국 사람보다는 4.3배, 베이징 지역의 중국 사람보다는 18.1배나 더 많다.

이러한 혈청학적 연구에 근거하여 북한은 한민족은 한반도에서 형성된 이래 고유한 혈청학적유형을 이루고 혈연적 공통성을 발전시킨 민족이므로 20만 년 전에 이브의 후손이 아프리카에서 출발하여 한반도까지 도착했다는 ‘아프리카 가설’을 전적으로 부정한다.  

이를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북한의 주장은 한국인은 우리 조국강토에서 독자적으로 형성된 본토기원의 주민집단으로 파악하면서 구석기시대부터 외부의 영향 없이 독자적으로 형성되어 순수하게 혈통이 이어져왔다는 것이다.

남쪽의 많은 학자들이 북측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수긍하지 않는 것은 우리 민족의 기원에서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는 중석기와 신석기시대에 속하는 인골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연구논문에서 신석기시대의 인골자료가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지 못하며, 간혹 인용되는 신석기시대의 인골자료도 실제로 신석기시대 말기 또는 청동기시대의 인골자료이기 때문에 대표성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 부분도 뒤에서 다시 한 번 설명한다.

그러나 안승모 박사는 북한 학계의 한민족 자체형성설은 지나친 순수 혈통을 강조하고 통계학적 결론을 왜곡하는 단점은 있지만 그래도 고인골의 체질학적 연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후기구석기-중석기-신석기시대 주민의 계승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북한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도 그러하다고 지적했다.

단기간에 정리될 성질이 아닌 한민족의 원류에 대한 연구는 이제 본격적인 화두로 등장한 만큼 근간 우리들에게 보다 명쾌한 답변을 주리라 믿는다.
04/2/14 이종호(
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한민족·한국인은 누구인가 ②
북방 아시아인 주류…남방계도 상당수
한민족이 다른 민족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한민족 즉 ‘우리들이 어디에서부터 왔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체로 세 가지 기원설로 집약된다.

첫째는 북방기원설이다. 이 설은 20세기 전반 서구에서 불기 시작한 문화 단일기원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민족의 문화요소들 중 이른바 북방문화 요소들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에 기원을 둔다. 강원대학교의 주채혁 박사는 여기에서 의미하는 북방이란 동시베리아나 만주지역을 가리키며 현재 중국의 서쪽 즉 만리장성 연선(沿線)을 포함하는데 기본적으로 유목생활을 하던 민족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쉽게 말해 중국 북쪽에서 왔다는 견해가 포함되는데 이는 주로 문헌학자들 사이에서도 제기되던 학설이다.

북방기원설의 주된 내용은 한민족은 언어·체질·문화면에서 북방민족의 요소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이러한 특징은 알타이어족에서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알타이어족은 역사적으로 민무늬 질그릇을 쓴 청동기 사람이다.

주채혁 박사는 시베리아 생태환경으로 보아 시원적인 유목은 순록유목이고 ‘조선’이나 '고려' 또는 '구르간'이라는 이름 자체가 또한 순록유목과 직결된다고 설명했다.

조선이 순록유목에 기원이 있다는 것은 수렵이나 어로 또는 채집을 통해 식량문제를 해결하던 단계에서 식량을 생산하는 단계로 나아갈 때 그 주된 생업이 농업과 목축업이 되든가 둘 중에 하나가 부업이 되는 가운데 목축을 주업으로 하는 식량생산자들 중에서도 특히 타이가와 툰드라나 스텝 등의 고원 건조지대를 목축생산의 주무대로 삼는 순록유목생산자 출신계열들이 우리 민족의 고대 정복국가를 세우는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채혁은 조선과 고려가 순록, 맥(고구려)이 너구리, 부여가 부이르(숫수달), 몽골이 엘벵키-너구리, 발해가 늑대 또는 이리, 단(檀)과 타타르가 수달, 솔롱고스가 '무지개'가 아닌 족제비과에 속하는 솔롱고(黃鼠狼)와 관계가 있다고 추정했다.  

또한 퉁그스족의 기원지로 추정되는 알타이∼바이칼 사이의 사얀 산맥 소욘족에 대해서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선 주 박사는 소욘족은 산 이름에서, 퉁구스 족은 그 산에서 흘러나오는 강 이름에서 비롯된 종족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바이칼 호 지대라는 개활지로 진출하려면 상당한 힘의 축적이 전제되는데 알타이 산의 많은 부분이 해발 4천여 미터가 넘는 고산들로 형성되어 있어 외부침략으로 보호받을 수 있었다. 당연히 비옥한 땅들을 기반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었으며, 여기서 인구가 증가되어 축적된 힘이 생기자 바이칼 지역으로의 진출이 가능했고 이들이 동쪽으로 ‘이끼의 길’을 찾아 이주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미토콘드리아 DNA분석에 따른 이동로.


유홍준은 기원전 1000년부터 빗살무늬토기에서 민무늬토기로 불리는 무문토기 시대로 넘어가는 것에 주목했다. 무문토기는 지역에 따라서 상당히 다른 편차를 보이는데 빗살무늬토기 시대에는 빗살무늬토기 한 가지만 대종을 이루었던 것에 비해, 민무늬토기 시대에는 민무늬토기 외에 붉은 간토기(홍도)와 구멍무늬토기(공열문토기), 검은 간토기(흑도), 가지무늬토기(채문토기) 등 다양화돼있다.

민무늬토기를 사용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죽음의 장식으로 고인돌을 만들었고 청동기를 사용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는 퉁구스 계통의 예족과 맥족이라고 추정했다.

유홍준은 민무늬토기를 사용하던 이들이 한반도에서 장구한 세월동안 거의 매너리즘에 빠진 듯이 살아왔던 고아시아족 빗살무늬토기인들을 섬멸시키고 이 땅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한민족은 한 번도 남을 침범한 일이 없는 것을 자랑처럼 얘기하지만 “우리는 한반도에서 살고 있던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한 고아시아족을 섬멸시키고 이 땅에 민무늬토기와 고인돌, 청동기를 갖고 들어온 위대한 퉁구스 예맥족이다”라고 쓰는 게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고고학적인 해석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만든 나라가 바로 고조선과 부여이다.

둘째는 '남북혼합설'로 우리나라 남쪽에서 보이는 남방 해양문화권의 문화요소들을 그 주된 증거로 삼고 있다. 이것은 고고학적 조사보다 인류학적 측면에서 제기된 주장으로 구체적으로 한반도 도처에 산재해 있는 고인돌, 솟대 등을 남방에서 전해진 문화 요소로 보는 것이다. 또한 우리 민족의 주식인 쌀농사를 지을 때 사용한 어깨삽 등도 남방기원설의 큰 근거로 설명한다. 즉 우리 문화는 북방에서 전파해 온 문화 요소와 남방에서 유래한 문화 요소들이 결합해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청동기 문화의 특징은 구릉지대에 만들어진 원형 움집과 장방형 움집, 석관묘와 고인돌(支石墓)이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석관묘를 만든 사람들은 유목민족 계통이고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은 벼 농경인들이다. 고인돌의 분포지역은 중국의 요령성, 산동성, 절강성 등 중국의 황해 연안에서, 한반도에서는 전남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제주도까지 분포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한반도에 가까운 규슈(九州)지방, 남쪽으로는 대만, 인도차이나 전역, 인도네시아 전역, 말레시아 그리고 인도 남부에서 발견되는 것을 볼 때 고인돌은 남방으로부터 도입되었다는 주장이다.

한반도에서 경작되는 벼농사도 남방 문화가 유입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된다. 벼농사의 고향은 열대 지방이라는 것이다. 김병모 박사는 한반도는 벼농사의 적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한반도에서 벼농사는 1년에 한 번 이상은 불가능하지만 열대 지방에서는 1년에 4모작도 가능하다) 한반도의 청동기인들이 벼농사를 한 이유는 벼의 뛰어난 경제성 때문으로 추정했다.

유라시아 초원지대 북방유목민 추정 이동로, 한민족의 근간이 북방민족이라는 북방기원설은 한민족이 언어‧체질‧문화면에서 북방민족의 요소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월간중앙』〈역사탐험〉 2003년 7월).


김병모 박사가 강조하는 것은 문화전통이 다른 북방 계열과 남방 계열의 주민이 한반도에 살게 되면서 사유세계의 혼선이 관찰된다고 주장했다. 유목민들의 신화 체계는 천손신화이고 농경인들의 신화는 난생신화인데 이 두 가지의 신화 요소가 한국 고대 국가 성립 과정에서 모두 나타난다는 것이다. 고조선과 부여는 천손신화, 고구려‧신라‧가야의 난생신화이다.

천손신화는 수직하강 구조이고 난생신화는 내부에서 외부로 나오는 구조다. 기마민족의 천손신화의 주인공들인 박혁거세나 김알지·김수로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수직하강 구조이면서도 정작 알이나 동자로 태어나는 기술은 두 가지 신화의 요소가 혼합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국 출신의 허황옥이 해로로 가락국에 도착하여 김수로의 왕비가 된다. 아유타국은 갠지스 강에 있던 인도 전국시대의 도시국가이고 현대의 이름은 아요디아(Ayodhia)이라는 것도 남북혼합을 지지하는 증거로 제시했다.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27호로 지정된 파사석탑은 허왕옥이 인도에서 올 때 갖고 왔다고 알려진 약간 붉은빛의 반문이 있는 돌탑이다. 멀리 이국으로 시집간 딸이 도중에 풍랑을 만나 되돌아오자 아버지가 풍랑을 가라앉게 해준다는 신비의 석탑을 배에 실어주어 무사히 김해까지 오게 되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허명철 박사는 석탑의 재료가 우리나라에는 없는 인도의 아유타 지방에서만 나는 파사석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탑을 분해하여 원형대로 석고를 복원하였더니 놀랍게도 그 모양이 삼각형이 안정형이 아닌 역삼각형으로 아래층이 좁고 위로 갈수록 넓고 큰 돌로 쌓이는 것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형태의 탑은 우리나라에는 발견되지 않고 인도의 동굴사원인 아잔타 엘로아나식에서 볼 수 있는 축소형 스투파 즉, 불탑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허박사는 형태, 크기, 문양, 사리보관소, 석질, 탑명 등을 고려하여 이 탑이 인도에서 만들어 가져온 축소형 불탑임을 결론지었다. 허왕후가 인도에서 불교를 직접 김해로 전파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물적 자료인 것은 물론 남방계의 사람들이 한반도에 거주했다는 것도 증빙한다는 것이다.2) 물론 허황후를 중국, 또는 한반도 서남해의 해양세력이라는 주장도 있다.

결론적으로 남방계와 북방계의 사람들이 한반도로 들어와 함께 혼합되어 살게 되었다는 것이 남북혼합설의 주안점이다.

셋째는 본토기원설 즉 자생설이다. 한민족의 문화는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선조들이 대대로 문화를 일궈 오면서 형성시킨 결과물이라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즉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로 문화 단계를 거치면서 자체 발전해왔다는 견해로 최근의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주로 북한학자들이 주장하던 가설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북방식 장리2호 고인돌,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제일 큰 것으로 알려진 안악군 노암리 고인돌보다 70cm나 더 크다. 남방문화가 유입된 대표적 증거로 고인돌을 제시하고 있으나 일부학자들은 한국에서 역으로 남방으로 전파됐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한반도에서 70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충북 단양의 금굴과 평양시 상원의 검은모루동굴에서 70만 년 전(북한은 새로운 측정 장치에 의한 측정법으로 재측정한 후 100만 년 전으로 소급하고 있음)의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되었고 계속하여 신석기시대 및 청동기시대 유적이 한반도와 만주 곳곳에서 출토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반도와 만주의 각지에서 70∼100만 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계속하여 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석기 시대부터 비로소 현대인들의 선조가 정착생활을 시작하는데 신석기시대 주민은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후손이므로 구석기시대의 사람들도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윤내현 박사는 두개골에 대한 연구 결과도 본토기원설에 무게를 실어준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것과 주변 것의 평균관계편차는 중국 황하 유역 사람은 0.81, 일본 쯔구모 사람은 2.51, 연바이칼 사람은 1.65, 자바이칼 사람은 0.79인데 평균관계편차가 0.4보타 클 때는 통계학적으로 본질적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처음부터 한반도와 만주에서 독자적 특성을 지니고 형성된 민족이라는 것이다.

본토기원설은 북방이나 남방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이주한 사람이나 전파된 문화가 있었다하더라도 그들이 우리 민족과 문화의 주류를 이루지는 않았다는 견해이다. 특히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문화와 같거나 비슷한 문화 요소들이 외부에서 발견된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 문화가 한반도로 유입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외부지역으로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몽골 문화 가운데 우리 것과 유사한 것이 많으며 외모나 체격 등도 한민족으로 혼동할 정도로 많이 닮았다. 이를 두고 우리 조상들이 몽골 지역에서 이주해 왔기 때문이라고 통설적으로 설명하는데 단국대학교의 윤내현 박사는 이를 역으로 설명한다.

몽골 지역은 역사시대 이래로 흉노가 거주했는데 이들은 중국과의 치열한 패권 장악을 위해 싸우다가 중심부에서 세력을 떨친 보르치긴족으로 칭기스칸을 배출한 종족이다. 현재 몽골의 주력 주민들도 보르치긴족이다.

그런데 보르치긴족은 몽골로 이주해 가기 전 북만주 어르구나하 유역에 거주했던 종족으로 고대 북만주 지역은 고조선의 영토였으며 고조선이 붕괴된 후에 동부여 영토가 되었다. 따라서 지금 몽골에 거주하는 주류 종족인 보르치긴족은 한민족의 한 갈래이거나 우리 조상들과 아주 가까운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로 한민족에서 분지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본토기원설은 고인돌과 벼농사가 남방에서 들어왔다는 주장에도 모순점을 지적한다. 남방에서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우리나라의 고인돌의 연대를 너무 낮게 추정하고 다른 나라의 고인돌보다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벼농사도 매우 늦게 시작된 것으로 인식했는데 구석기시대의 야생볍씨와 신석기시대의 재배볍씨가 출토되었고 고조선시대에 이미 벼농사가 널리 행해졌던 것으로 볼 때 설사 고인돌과 벼농사가 남방에서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그것만 갖고 우리 민족이나 문화의 주류가 남방에서 왔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설명도 있다.

황석리 고인돌에서 발견된 인골, 황석리 인골은 한국인의 단두형에 비해 초장두형으로 유럽인의 특징을 갖고 있다.


안승모 박사는 벼농사가 한반도에서 처음 출현하는 곳은 대동강유역, 한강유역, 금강유역으로 이어지는 서해안 지역이지만 한반도에는 야생벼가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한반도의 도작이 중국 쪽에서 서해안으로 건너온 것은 분명하다는 주장했다. 중국의 경우 도작은 장강유역(長江流域)에서는 기원전 7~5천년 이전, 회하유역(淮河流域)과 황화중류(黃河中流) 기원전 5천 년과 4천 년, 산동반도(山東半島)는 기원전 3천 년에 출현하여 장강(長江)에서 시작하여 해안을 따라 북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왕웨이 교수는 한반도는 벼의 원산지가 아니며 중국으로부터 벼농사 기술이 전래되었다는 것이 농학자들의 비교적 일치된 견해라고 적었다. 그는 한반도로의 벼농사 기술 전파 경로를 다음 세 가지를 들었다.

① 서해를 사이로 한반도와 마주하고 있는 중국의 장강 하류에 위치한 장쑤, 상하이, 저장 일대에서 한반도로 전래

② 한반도와 접근해 있는 황하의 하류 산둥 반도와 발해에 접한 라오둥 반도의 남단에서 한반도의 서해안 지역으로 전래

③ 중국의 푸젠과 타이완 일대로부터 해류를 따라 한국으로 전래

중국 회하의 이북 지역에서는 ‘찰벼’를 재배하고 중국 화난 지역 및 동남아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재배하는 것은 ‘메벼’이다. 반면에 중국 장강 중하류 지역에서는 메벼와 찰벼 두 종류를 다 재배하고 있다.3)

그런데 국제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아왔던 중국 후난(湖南)성 출토 볍씨(약 1만500년 전)보다도 약 3천 년이나 더 오래된 세계 최고(最古)의 볍씨가 한국에서 발견됐다.

영국 BBC 방송의 인터넷판에도 이융조 교수가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발견한 59개의 고대 탄화(炭化) 볍씨는 탄소연대측정법에 의거 1만5천 년 전의 볍씨임이 증명되었다고 보도했는데 `소로리 볍씨(재배벼 이전의 순화벼)'의 유전자구조는 현재의 야생벼-재배벼와는 39.6퍼센트의 낮은 유전적 유사성을 갖고 있다. 소로리 볍씨에 대해 정수일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4)

‘지금까지의 통설에 따르면, 원조 벼에는 ‘오리사 글라베리아 에스’(Oryzq glaberrima S. 서아프리카벼)와 ‘오리사 사티바 엘’(Oryza sativa L. 아시아벼)이라는 두 종류가 있다. 전자는 서아프리카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나, 후자의 기원지에 관해는 이론이 분분한데, 인도의 서북부 아샘지대와 중국 남부 윈난(운남:雲南)지대를 아우르는 이른바 ‘아샘·윈난지대설’이 가장 유력하다.

아시아벼는 다시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와 중국 양쯔강 이남지역에서 재배하는 인디카(인도형 메벼)와 양쯔강 이북과 한국, 일본 등의 동북아시아 일원에서 재배하는 자포니카(일본형 찰벼)로 대별한다. 그밖에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재배하는 자바형이 있다. 형태상으로 인디카는 좀 길쭉하다고 하여 장립형(長粒形)이라 하고, 자포니카는 단립형(短粒形)이라고 한다.

소로리 볍씨.


그런데 이제 길고 짧은 형태가 섞여있는, 가장 오래된 소로리볍씨가 등장했으니, 이상의 통설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다. 행여 ‘소로리카(Sororica)'로 태어나 인디카와 자포니카의 계통상 뿌리가 아니될런지 두고 볼 일이다.’

원래 벼는 남북 위도 40도 이내에서 연중 서리 없는 날이 150일 이상인 고온다습한 고장(연강수량 1,000~1,200밀리미터)에서 재배되기 시작하였으나, 오랜 경작과정에서 변이(變異)가 생겨 지금은 그런 지리조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설명된다.

그렇지만 많은 학자들이 메벼와 찰벼가 서로 다른 분류 계통이고, 히말라야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는 두 지역의 지정학적인 요인을 감안하여 각각의 독립된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한다. 즉 벼는 인도와 중국, 두 곳에서 각각 기원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재배되는 벼는 중국에서 기원했다는데 무게를 실어주었으나 야생벼가 가장 많이 발견되는 윈난 지대의 문제점은 현재까지 발견된 것 중에 연대가 가장 오래 된 도작 문화가 고작 4천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화의 발달로 보았을 때 윈난 지방의 도작 문화는 같은 시기의 다른 문화보다 훨씬 뒤처져 있으므로 재배벼의 기원지라고는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였다.  

그러므로 현재 학자들은 원난 지방보다는 후난성에서 발견된 볍씨들을(위찬옌 유적지에서 출토된 4톨의 쌀알 중 2톨은 야생벼이고 나머지 2톨은 인공재배 흔적이 역력하므로 재배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의 벼로 추정) 근거로 재배벼는 장강 중류 지역에서 약 9천 년 전으로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이 부분도 많은 논쟁거리가 있는데 학자들이 메벼와 찰벼가 동일한 기원지에서 기원된 것인지에 대해서조차 아직 확정을 내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인류가 언제부터 벼를 재배하기 시작했는지도 정확하게 단정하지는 못한다. 그만큼 벼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남아있지만 정수일 박사의 지적과 같이 소로리 볍씨가 세계 최고의 연대를 갖고 있는 것 등을 감안할 때 한반도의 벼가 반드시 중국 등지에서 전래되었다고 볼 수 있느냐는 지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5)

지금까지의 견해는 문화가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는 견해이다. 그런데 이 역시 지극히 일방적인 견해라는 것이다. 문화의 내용이 유목생산문화냐 농경생산문화냐를 구별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유목문화의 군사-안보적 문화요소가 농경지대로 흘러 들어간 사례는 무수히 있다. 주채혁은 농경문화가 유목문화권에 일방적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오해는 역사가들이 주로 농경문화권에서 자랐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6)

중국도 문화의 전파에 대해 과거에는 한국과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다고 윤내현 박사는 적었다. 중국에서 고고학이 도입된 1920년대에는 중국의 선사문화가 외부에서 전래된 것으로 인식했으나 그후 연구가 계속되면서 그러한 인식이 잘못되었음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이른바 의고(疑古) 학파와 신고(信古) 학파 사이의 논쟁으로 결국 신고학파가 승리했다. 중국의 선사문화는 중국 내에서 기원하였으며 그것이 고대문화의 기초가 되었다는 결론으로 각 선사문화도 종래에 인식됐던 것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것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여하튼 한민족의 기원 즉 한민족의 뿌리에 대해서는 북방기원설, 남북혼합설, 본토기원설 등이 나름대로의 장단점을 갖고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단원에서 다시금 거론한다.

<구태의연한 민족이 필요한가>

21세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세계가 일일 생활권으로 변모한 현재 케케묵은 민족의 기원을 찾는 것이 왜 중요하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도 있다.

다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많은 학자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세계사에서 20세기 최대 사건 중의 하나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에서 공산정권인 소련이 등장한 것이다.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민중이 봉기하여 니콜라이 2세 황제의 봉건주의를 단숨에 무너뜨리고 등장한 소련은 이후 70여 년간 민주주의 진영과 함께 세계의 양대 축을 이루며 국제정치를 좌지우지했다.

그런데 1990년대 소련이 붕괴하면서 많은 독립 국가들이 탄생했는데 이들 독립국가의 모태가 바로 민족이었다. 수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잊지 않았고 더욱이 민족의 개념을 무시하거나 짓밟는 전체주의 하에서도 민족성을 잊지 않았다고 복기대 박사는 설명했다.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2천 년 전에 나라를 잃고 전 세계로 떠돌아다니며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들의 민족을 단결시킨 것도 유태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계속 대를 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자부심이 근간이 되어 몇 백만 명에 지나지 않는 소수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10억이 넘는 아랍과 당당히 맞서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민족은 중요하다. 우리가 민족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모른다. 중국 변방사를 따지더라도 수많은 민족의 흥망성쇠가 점철되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중국에 동화되었거나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였다. 유명한 만주족도 중국 본토를 장악하며 청나라를 건설하였지만 결국 중국에 동화되어 그 명목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민족이 한반도를 근거로 해서 꿋꿋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은 한민족이라는 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수많은 피를 흘려가면서 광복투쟁을 했던 것도 민족이라는 틀에서 움직이면서 한민족끼리 뭉쳐 살고자 했던 염원을 잊지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세계화를 추진함에 있어서도 우리 것을 제대로 알아야 힘을 얻는다고 많은 전문가들은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욱이 복기대 박사는 세계 4대 문명권이니 어떤 한 문화가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어 문화를 이루었다는 것 등은 구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4대 문명이 형성된 시기에 그와 동일한 문명 수준이 분명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도 존재했고 그 문화의 후예들이 숱한 변화를 겪으면서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복 박사는 결론적으로 우리 한민족은 원래부터 고립된 민족이 아님을 강조했다. 먼 옛날부터 이땅에 살면서 주변지역의 문화 요소들 중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만들었고 그것을 발전시켜 후대에 전하여 생활에 유용하게 전환시켰다. 또한 21세기는 국경이 없는 시대가 되어 국경이 사라져도 민족은 영원히 없어질 성질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김수로의 허 황후가 아유타국으로부터 갖고 왔다는 파사석탑, 석탑의 재료가 인도의 아유타에서 발견되는 파사석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한민족은 두 갈래>

한국인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우수한 한민족’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배운다.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을 정도의 단일민족국가로서‧‧‧.’

북한도 다음과 같이 한민족은 단일민족임을 강조한다.

‘한민족은 오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슬기로운 민족이다. 우리 민족은 먼 옛날부터 우리나라 땅에서 자기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단국대학교의 김욱 교수는 Y염색체를 이용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한민족의 뿌리는 크게 두 갈래로 70~80퍼센트는 북방계이고 20~30퍼센트는 남방계이며 기타 일부 유럽인과 다른 그룹이 섞여 있다고 발표하여 한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한민족은 인구 숫자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북방 아시아인이 주류이지만 남방계도 상당수로 무시할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고고학적 연구나 문화인류학적 연구 결과와도 합치한다는 지적이다. 김욱 교수가 발표한 한민족의 원류는 다음으로 요약된다.

‘동아시아인 집단 형성에 관한 과거 인류의 집단팽창 과정과 이동경로, 그 시기 등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인류유전학자들이 지지하는 아프리카 기원설에 의하면 아프리카에서 갈라져 나온 인류가 중동을 경유해 인도 또는 동남아시아에 정착한 경우와 중동을 거쳐 중앙아시아를 경유한 집단이 동남아시아 또는 한반도와 일본에 정착했을 경우 두 방향을 추정하지만 어느 곳에 먼저 정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미국 휴스턴대의 리 교수 등은 Y염색체 DNA 분석을 통해 약 6만 년 전에 동남아시아에 먼저 정착한 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는 무렵 동북아시아 및 시베리아로 이주했다고 주장했으며 중국 곤명대의 야오 교수도 mtDNA 분석에서 이와 비슷한 결과를 발표했다.

반면에 미국 애리조나 대학교의 해머 교수 등은 동아시아인의 집단형성은 더 복잡한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추정했다. 그는 Y염색체 DNA분석을 통해 중앙아시아의 유전자 풀이 동북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집단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설명했다.

Y염색체 DNA의 등장은 과거 인류의 진화과정과 이주경로, 부계혈족확인, 유전자감식 등에 획기적인 성과를 안겨주고 있다. Y염색체는 남자에만 존재하며 반드시 아버지를 통해 아들에게만 물려지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Y 염색체는 일부 말단부위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NRPY)이 X염색체와 교차되지 않기 때문에 과거에 일어났던 돌연변이의 정보가 연관 상태를 유지한다고 김욱 교수는 설명했다.

여하튼 우리나라 집단은 동아시아인 집단 가운데서도 중국인의 만주족과 가장 가까운 유전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중국의 일부 남부인(예 : 묘족 등)과 베트남인 등과도 가까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일본인 집단은 동아시아 내에서 한국인 및 만주족과 가장 가까운 유전적 유사성을 보였는데, 이는 약 2,300년 전 농경문화와 일본 언어를 전달한 야요이족이 한반도를 통해 일본 본토로 이주했다는 유전학적인 증거가 된다는 설명이다.

이것을 근거로 한국인집단은 적어도 두 가지 경로 이상의 다양한 민족 집단이 혼합과정을 겪으면서 형성되었으며 유전적으로 하나의 민족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고 김욱 교수는 지적했다.

민족은 어느 한 시기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무수한 시간적,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의 유전적 동질성과 동일한 언어, 문화적,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변한다. 지금까지 mtDNA의 분석결과로 볼 때, 한국인 집단에서는 동북아시아인 집단과 시베리아 집단에서 주로 관찰되는 하플로그룹(haplogroup, 같은 mtDNA 유전자 형을 가진 그룹) A, B, D, G, Y, Z를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인 집단에서 높은 빈도로 나타나는 하플로그룹 B, F가 모두 나타난다.

또한 Y 하플로 그룹의 빈도분포를 보면 한국인 집단은 동아시아 여러 민족 집단 중에서도 중국의 만주족과 가장 가까운 유전적 유사성을 보이며 중국의 일부 남부인(예 : 묘족 등)과 베트남인 등과도 가까운 특성을 지닌다고 발표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한국인집단이 동아시아의 남방과 북방의 유전적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민족이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는 사실은 단일민족이란 말에 어폐가 있음을 뜻한다. 더구나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 아님에도 다른 민족에 대해 대단히 배타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민족이 단일민족이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민족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한 단일민족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세계 문명의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난 오지에서 지금까지도 원시생활을 하고 있는 부족이 아닌 한 역사의 여명기에 살았던 민족들이 서로 혼합되고 동화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프랑스에서 1980년대 초에 누가 진짜 프랑스인인가를 호구 조사한 적이 있었다. 이 당시 정통 프랑스인은 적어도 부모와 조부모 모두 즉 3대가 프랑스인인 경우를 의미했다. 그런데 호구 조사는 전 유럽인들을 놀라게 했다. 프랑스 정부가 호구 조사를 통해 프랑스인을 가린 결과 이 기준에 맞는 프랑스인들은 겨우 2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지엥, 1980년대 조사에서 적어도 부모, 조부모 즉 3대가 프랑스인인 경우 정통 프랑스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설정했는데 이 기준에 맞는 프랑스인들은 겨우 2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프랑스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출생지주의(프랑스에서 태어난 사람은 프랑스 국적을 취득할 자격을 획득)’를 채택하여 부모가 외국 국적일지라도 프랑스 국토 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프랑스인이 된다(19세가 될 때 국적을 신청할 수 있음).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기준으로 보면 프랑스인이라고 볼 수 없는 80퍼센트에 달하는 사람들이 프랑스인이라고 콧대를 내세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만 보아도 단일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어야만 한 국가를 대표할 수 있다는 주장은 지구가 1일 생활권으로 들어 선 현대에서는 설득력이 없다는 주장도 억지만은 아니다. 미국이 합중국이라 부르면서 많은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도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외국의 많은 국가가 어느 민족의 나라라고 굳이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역으로 한민족의 구성원이 겨우 두 갈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세계적으로 보아 유례가 없는 일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수많은 종족으로 나뉘어 구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적인 생각을 합리화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하루가 달리 변하는 지구에서 지구적인 차원의 사고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금까지의 설명은 한민족의 경우 ‘다지역기원설’, ‘자생기원설’로만 풀기에는 약간의 문제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북한의 주장처럼 한반도에서 원인‧고인‧신인의 화석이 한반도에서 체계적으로 발견되었더라도 70〜100만년이라는 장구한 기간 동안에 한반도에서 인류 이동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설명한 한민족의 혈청학적 특징 등을 고려할 때 한민족이 다른 어떤 민족과도 다소 다른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일부 학자들은 어떠한 경로로든 새로운 유민이 한반도에 정착하였더라도 선주민과 유이민 간에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융합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모순점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한민족의 경우 ‘아프리카 가설’과 ‘한반도 자생기원설’이 절묘하게 융합한 증거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앞으로 많은 학자들이 도전할 것으로 보이므로 이곳에서는 더 이상 상술하지 않는다. (계속)
04/2/19 이종호(
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한민족·한국인은 누구인가 ③
앞에서 인류의 기원 및 전파에 대해서 설명하고 한국인은 북방계와 남방계의 두 부류가 섞여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70만 년 전 즉 전기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은 평양시 상원군 흑우리에서 발견된 검은모루유적(북한은 인골화석을 재측정한 결과 100만 년 전으로 설명)과 충북 단양 금굴의 유적을 비롯하여 계속적으로 인류의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을 원인이라고 부르는데 그렇다면 이들이 한민족과 어떤 관련이 있으며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루시 인골.
일반적으로 원인들은 인류 진화 발전 과정에 따라 고인으로 발전했는데 고인들은 대체로 제4기 중부 홍적세 후기(약 20만~30만 년 전)부터 중기구석기시대의 문화를 형성했다. 이들은 약 5만 년 전인 후기구석기시대에 신인으로 바뀌며 약 1만 년 전에 비로소 현대 인류의 선조들이 태어났다고 인식한다.

마법의 무기로까지 일컬어지는 유전자 분석의 등장으로 인종이라는 구분은 이제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백인종, 흑인종, 황인종이라는 외형적 특징은 분명히 존재하며 한국인은 황인종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몇 십만 또는 몇 만 년 전 적어도 현대 인류가 등장했다는 1만여 년 전에 한반도에 살았던 선조들도 우리와 같이 황인종일까, 황인종이라고 해도 수많은 지류가 있는데 과거에도 한민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고유한 특성은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가도 궁금한 사항이다.  

학자들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내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고 지적한다. 우선 증거를 찾는 것 자체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적어도 몇 만 년, 몇 십만 년 전에 살아있던 인골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시신을 매장하면 단 몇 년도 안 되어 모두 육탈되고 뼈만 남게 된다. 뼈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매장지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100년을 넘지 않는다. 400~500년 전의 미라가 발견되어도 언론 매체가 대서특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물며 1만 년, 10만 년, 100만 년 전의 뼈를 수습하여 연구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첨단과학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인골 화석을 발견하는 방법은 그야말로 유치하기 짝이 없다. 인골 화석이 어떤 연유로든 지표면에 나온 것을 발견하거나 인골 화석이 있다고 추정되는 곳을 예견하여 인내를 갖고 발굴하는 것이다.

그런데 화석은 일단 지각 변동 등으로 지표면으로 노출되더라도 2~3년 내에 발견되지 않으면 부식되거나 완전히 파손된다. 그러므로 고인류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화석이 발견될만한 곳을 잠시도 쉬지 않고 방문하여 관찰한다.

아프리카의 올드바이 계곡에 수많은 고인류학자들이 몰리는 이유는 그 지역이야말로 가장 많은 고인류화석이 존재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으며 또 학자들의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동안 단 하나의 인류화석도 발견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이다.

올드바이 계곡.


<석회암 지대에서 화석 발견>

1974년 미국의 고인류학자 도널드 요한슨이 대학원생인 조수 탐 그레이와 에티오피아 아파르 삼각지의 한 지점인 하다르에서 수십 개의 뼈 조각을 찾아냈다. 하다르는 아프리카 동부의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Great Rift Valley)에 속하는 곳이다.

고인류학자들은 대개 치아 하나, 뼈 한 조각만 찾아내도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두개골의 일부라도 발견하면 복권이 당첨된 것보다도 더 어려운 행운을 잡았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이 발견한 것은 완전한 골격의 거의 절반 가량이 되었다. 이는 가히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우선 골반 뼈로 보아 여자의 뼈였는데 키는 90센티 정도였고 나이는 20살 정도였다. 이 유골이 바로 약 300~320만 년 전에 살았던 원숭이와 인간 사이의 과도기적 생명체로 현대 인류의 조상으로 추정하는 ‘루시(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다. 고인류학자들이 루시의 발견에 그렇게도 환호한 것은 그렇게도 찾기를 바라마지 않았던 몇 백만 년이나 되는 인류 진화상의 잃어버린 연결고리(missing link)를 이어주었기 때문이다.

루시는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뇌가 작고 턱도 뾰족했다. 생김새는 원숭이와 비슷했지만, 치아는 인간과 거의 비슷하고 호수 근방에 살았다. 무릎 관절로 미뤄봐서 루시가 침팬지보다는 사람에 가까우며 뛰기보다는 걷기에 편했던 골반과 두개골구조를 갖췄던 것으로 짐작된다. 평균적으로 여자는 몸무게가 약 28~30킬로그램, 키가 100~120센티미터였고, 남자는 몸무게가 40~55킬로그램, 키가 120~135센티미터 정도였다.

루시 다음에는 약 150~250만 년 전에 ‘호모 하빌리스’가 출현하며 180만 년 전에 ‘호모 에렉투스’가 출현한다. 호모 에렉투스는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중국, 자바에서 발견되며 70만~100만 년 전에 검은모루동굴에서 살았던 것도 호모 에렉투스이다.

다음에는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의 특징을 가진 두개골이 발견되는데 네안데르탈인이 그들이다. 네안데르탈인은 유럽, 중동 지방에 특히 밀집하면서 구세계에 널리 분포되었는데 인구수도 몇 십 만 또는 몇 백 만에 달했다고 추정한다.

그 후 15만~20만 년 전에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인 크로마뇽인이 등장한다. 이와 같은 계통도를 그릴 수 있는 것은 계통도가 그려질 수 있는 화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네안데르탈인(좌)과 크로마뇽인(우).


루시를 비롯하여 몇 백 만 년, 몇 십 만 년 전에 살았던 생명체들이 화석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지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학자들이 구석기인들의 뼈를 찾아낸 장소는 모두가 석회암동굴이다.

석회암 지대에 침수된 지하수는 석회암 속의 가용성 물질을 용해시키기도 하고 결정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석회암으로 된 장소에 시체가 묻히게 되면 석회암이 녹으면서 형성된 광물질이 많은 지하수나 물기가 계속 유골에 작용하여 뼈세포 속에서 광물질이 석출되어 그곳에 채워지고 또 삭아 없어지는 빈자리에도 광물질이 들어가게 된다.

또 분자 수준에서 유골과 광물질 사이의 자리바꿈도 진행된다. 이 경우 유골은 돌과 같이 굳어지면서 본래의 형태를 유지하게 되며 부패작용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외력에 대해서도 저항력이 강해지므로 상황에 따라 장기간 보존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고인류 화석에 관한 한 세계적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질 좋은 석회암이 나온다는 것은 한국이 세계적인 시멘트 생산국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고대 인골이 발견된 곳은 무려 10여 군데나 된다. 앞에서도 약간 설명했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인골에 대해 설명한다.

<계통적으로 발견되는 인류 화석>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골은 2002년 4월에 함북 화대군 석성리의 5개의 화산용암 속에서 발견된 여자와 미성년, 어린이 등 3인의 머리ㆍ골반ㆍ대퇴ㆍ팔뼈이다. 이를 ‘화대사람’이라고 부르는데 열형광법으로 절대 연도를 측정한 결과 화석의 주인공은 거의 30만 년 전에 살던 인류라고 발표됐다. 이 화석은 한국이 세계적으로 최초의 고인이 출현한 발생지의 하나로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류화석으로는 스페인에서 발견된 30만 년 전의 아토푸에르카가 인정되었으며 중국의 경우 가장 오래된 고인은 13만~18만 년 전의 것이다. 특히 화대사람은 화산 용암 속에서 인류화석이 발견된 첫 번째 예로 주목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인류화석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인식한다.

1972~1973년, 평남 덕천 승리산 동굴의 아래층에서 ‘덕천사람’이 발견되었고 1977년 9월에는 평양 력포구역 대현동 동굴에서 ‘력포사람’이 발견되었다.

원래 우리나라에서 70만 년 전 즉 전기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는 평양시 상원군 흑우리에서 발견된 검은모루동굴유적과 충북 단양 금굴의 유적으로도 알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인골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다.

검은모루동굴은 인골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유적지이다. 검은모루유적은 상원읍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흑우리(黑隅里)의 낮은 산인 우문봉 남쪽 비탈에 있는데 1966년 석회석을 채광하다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29종의 동물화석과 구석기인의 타제석기(打製石器)가 발견됐는데 정밀조사는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동물화석 중에는 곰ㆍ멧돼지ㆍ승냥이 같은 수풀지대 짐승과 원숭이ㆍ물소ㆍ큰쌍코뿔이 등 열대지방 동물 뼈도 있었다. 이는 당시 기후가 아열대성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인데 더욱이 29종 중 17종은 이미 멸종된 것이다.

충북 청원군 두루봉동굴.


검은모루유적의 발견은 해방 후 북한을 포함하여 한국 고고학계의 최대 성과로 평가된다. 한반도에도 구석기시대가 있음을 확인한 획기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남한에서도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ㆍ충남 공주시 석장리 등 30여 곳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됐지만 당시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먼저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자 그들은 식민사관을 조장하기 위해 한국에는 구석기가 없다고까지 왜곡했다. 그런데 검은모루유적이 이를 통쾌하게 극복케 만든 장본인인데다가 한국의 역사를 무려 70만~100만 년 전으로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70만 년 전이라면 유명한 북경원인(北京猿人)보다도 더 이른 시기의 호모에렉투스 즉 직립원인이다. 검은모루유적이 남북한을 막론하고 한국 역사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이유이다.

여하튼 검은모루동굴에서 인골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없으므로 한국인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한참 후대로 내려가야 한다.

바로 력포사람이다. 력포사람은 한 개체분의 머리뼈(앞머리뼈, 윗머리뼈, 옆머리뼈)가 발견되었는데 7~8살 정도의 어린아이이다. 이마가 낮고 넓적하여 뒤로 제껴진 것은 원인이나 고인 단계의 인류 특징이다. 뇌수의 앞머리 부분이 잘 발달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마가 몹시 낮은데 북한은 력포사람을 상당이 앞선 시기의 고인이라고 추정한다.

력포사람보다 약간 일찍 발견된 덕천사람은 오른쪽과 왼쪽 어금니, 오른쪽 어깨뼈가 발견되었다. 이빨은 크지 않고 치관의 형태는 장방형으로 현대인에게는 자주 볼 수 없는 유형을 갖고 있는데 이는 고인들의 이빨에서 볼 수 있는 원시적인 특징이다. 반면에 어깨뼈는 고인임에도 현대 한국인들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덕천사람은 고인의 특성과 현대 한국인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다고 추정한다.

다음은 평남 덕천시 승리산 동굴에서 발굴된 ‘승리산사람’이다. 승리산사람은 아래턱뼈가 발견되었는데 같은 덕천에서 발견된 ‘덕천사람’보다 윗층에서 발견되어 년대가 많이 떨어지는데 약 4만〜5만 년 전으로 추정한다.

유골은 35살 정도의 중년 남자로 아래턱뼈가 원인이나 고인에 가까운 높이를 갖고 있다. 이것은 후기구석기시대의 신인 단계이지만 아직도 원시적인 특징이 채 가시지 않은 현상으로 분석되었다. 그러나 승리산 사람은 아래턱뼈가 높은데도 이음부의 높이가 턱구멍 부위의 높이보다 낮다. 이것은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씹는 기능의 약화와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매우 진보적인 형태의 특징으로 설명된다.  

북한은 아래턱뼈를 기본 자료로 신인의 얼굴을 복원했는데 학자들 손에 의해 다시 태어난 승리산 사람은 슬기슬기사람(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으로 주장된다. 이같은 주장은 승리산사람 얼굴 특징에 나타난 높은 머리와 넓은 하관부가 오늘날 한국인 특징의 일부로 남아있다는 데서 나왔다.

덕천시 승리산 유적지.


<장례의식에 따라 매장된 흥수아이>

남한의 충북 청원군 두루봉 동굴에서도 승리산과 거의 동시대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를 ‘흥수아이’라 부른다.

1983년 발견자인 김흥수 씨의 이름을 따서 붙였는데 흥수아이는 약 4만 년 전의 후기구석기시대에 살았던 신인이라고 추정한다.

흥수아이에 대한 체질인류학분석결과 5살 때 이 동굴에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아이의 머리 크기는 1200~1300㏄,키는 110~120센티미터 정도이다. 특히 뒤통수가 튀어나와 요즘의 말로 표현하면 짱구형이며 아래턱도 둔탁하게 보인다. 머리뼈를 잰 결과는 현대인과 선사인의 특징을 함께 지닌 것으로 드러났다.

흥수아이가 특별히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것은 흥수아이가 장례 풍습에 의해 매장되었기 때문이다. 1983년 발굴 당시 흥수아이는 편편한 석회암 낙반석 위에 누워 있었는데 일부러 시신을 바로 펴놓은 후 고운 흙을 뿌렸다는 사실이 관찰되었다. 주검을 아무렇게나 마구 버리지 않고 고이 장례를 치러 주었다는 뜻으로 더욱 놀라운 것은 흥수아이의 주검 곁에서는 여러 종류의 식물꽃가루가 채집되었다는 점이다.

이들 꽃가루 분석에서 국화꽃가루가 가장 많았는데 학자들은 흥수아이가 죽었을 당시 국화꽃이 주검 주변을 치장한 장의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상당히 높은 지대인 석회암동굴에 국화꽃이 자생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국화꽃은 장례를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곳에서 꺾어왔다는 추정이다.

흥수아이 청동상.
또한 동굴 입구 한쪽 모서리에서 많은 양의 진달래꽃가루가 채집되었다. 진달래는 본래 호산성식물인데 두루봉 일대는 알칼리성 토양으로 되어 있다. 학자들은 두루봉동굴에 살았던 구석기인들이 이당시 이미 아름다움을 식별하는 심미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장례용으로 꽃을 사용했다고 인식한다. 물론 국화꽃이 가을꽃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흥수아이가 사망한 시기도 가을로 추정했다.

고인류학계에서 네안데르탈인들을 중요시하는 것은 정신적인 면모도 발달하여 죽은 자의 장례를 치르는 풍습도 가졌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무스티에 유적지에는 10대 소년이 옆으로 누워서 머리를 팔위에 얹어 놓은 상태로 매장되어 있었다. 그의 손 옆에는 훌륭한 돌도끼 한 개가 놓여 있고 소의 뼈가 둥그렇게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것들은 소년의 사후에 있을 여로에 도움이 되도록 무덤에 놓여진 것이었다.

특히 이라크의 샤니달 동굴에서 발견된 인골은 40세 정도의 남자인데 다리가 접히고 구부러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인골 주위에서 접시꽃, 푸핀, 엉겅퀴, 무스카리 등을 비롯한 많은 꽃가루 화석이 발견되었다. 죽은 자에게 꽃을 바치는 마음을 간직했다는 사실은 시체를 정성스럽게 묻었다는 것으로 원시인의 이미지를 근본부터 뒤덮는 일이었다.

체코의 한 고분에서는 시체 위에 돌로 만든 보호층 아래 14개의 인골이 있었는데 이들 시신은 내세에서도 계속 가깝게 지내겠다는 뜻에서인지 서로 붙어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모라비아의 한 고분에서는 매머드의 거대한 견갑골 밑에서 여자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시신 위에 적색의 황토가 소량 뿌려져 있었다. 생명을 주는 혈액으로 추정했을지도 모르는 적색 황토는 유럽 지역의 여러 고분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주로 웅크리거나 자궁 속의 태아 모습으로 수습된 시신 위에 뿌려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남북한의 고고학자들이 흥수아이를 그토록 열광한 이유는 고고 인류학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네안데르탈인과 유사한 풍습이 한반도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뼈화석을 자료로 얼굴을 복원했는데 이 얼굴을 보면 매우 귀여운 동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에서 유럽인도 발견>

1979~1980년 평양 승호구역 만달리 동굴에서 약 2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이 발견되었다. 이를 ‘만달사람’이라 부르는데 보존 상태가 좋은 머리뼈와 아래턱뼈가 함께 발견되어 학자들을 기쁘게 했다.

앞머리뼈에는 현생 인류에게서만 찾아지는 화살융기도 들어있었고 턱구멍이 현대인처럼 낮은 위치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가공한 흔적이 뚜렷한 석기 13점과 함께 뼈나 뿔로 만든 골기가 발견되어 만달인은 후기구석기의 신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만달사람은 사망할 당시의 나이를 25~30살 정도로 추정하는데 북한은 건장한 용모의 청년으로 만달사람을 복원했다.

그런데 만달사람은 전형적인 장두형이다. 신인단계에서 장두형의 특징은 아시아지역의 신인인 산정동인에서도 발견되는데 그들과 다소 다른 점도 발견된다. 머리뼈의 너비가 매우 넓다는 점인데 머리뼈의 넓이가 넓다는 것은 한국인의 특징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장두형에 속하는 만달사람은 단두형의 특징을 지닌 고유한 한국인의 모습으로 정형화되기 시작하던 초기의 징표로 인식한다. 이러한 특징은 보다 후대로 추정되는 신인인 ‘룡곡사람’에서도 발견된다.

1980년, 평양시 상원군 룡곡리의 여러 석회암동굴에서 상당히 많은 신인의 화석이 나왔는데 이를 ‘룡곡사람’이라고 한다. 특히 룡곡1호 동굴에서 보관 상태가 매우 좋은 2개의 머리뼈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의 머리뼈는 그 높이가 매우 높은 반면에 얼굴뼈 높이는 중간정도이다. 이들 역시 장두형에 속한다. 룡곡사람 역시 만달사람처럼 한국인의 옛 모습이 형성되던 초기시대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학자들은 동아시아의 신인들을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동북아시아형으로 주로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발견된 인류 화석이다. 둘째는 황화와 장강유형으로 산정동인을 비롯하여 중국에서 발견된 신인화석이다. 산정동인에게는 태평양에서 발견되는 남부계열의 특징이 뚜렷하다. 마지막으로 동남아시아유형인데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에서 발견된 신인의 화석이 이 유형에 속하며 오스트레일리아 인종에 가까운 특징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한반도와 만주에서 발견되는 신인들이 동아시아의 다른 신인들과 구별되는 일련의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한국인의 선조들이 극동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유형을 이룰 수 있는 환경에서 진화되었다고도 추정하는 것이다.

시대를 건너뛰어 청동기시대의 인골로 간다. 1986년부터 1990년 함경북도 회령시 남산리 검은개봉에서 매우 빠른 시기의 청동기시대 6개체분의 머리뼈가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1930년대 말에 이미 4개의 머리뼈가 발견되어 모두 10개체분이 발견된 셈인데 그중 남자가 7개, 여자가 3개이다.

머리뼈지수에 의하면 남자는 좀 큰 편으로 중두형에 속하고 여자는 아주 큰 축으로 전형적인 단두형이다. 이것은 검은개봉의 주민들이 의심할바 없이 현대 한국인과 유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검은개봉유적을 남긴 주민들과 유사한 특징을 가진 사람들은 중국동북지방에서도 발견된다. 기원전 2000년~1000년에 해당하는 청동기시대의 인골로 요령성 심양 부근의 정가와자유적과 길림시 서단산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런데 정가와자와 서단산에서 발견된 머리뼈는 현대 북중국인이나 앙소문화인, 은대 안양부근의 서북강유적 주민들과도 뚜렷하게 구별되며 고대한국인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정가와자의 머리뼈는 짧고 높은데 이것은 검은개봉 유적을 비롯하여 현재 한국인에게 볼 수 있는 고유한 특징이다. 이들 지역은 현재 중국 영토이지만 고조선이 건국된 지역이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경으로 추정되는 황석리 13호 인골은 국내학자들을 괴롭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인골을 분석한 서울의대 나세진 박사는 인골의 신장이 약 174센티미터이며 두개골과 쇄골·상완골 등 모든 부위에서 현대 한국인보다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두개지수(頭蓋指數, Sephalic Index)가 66.3으로 현대 한국인이 단두형(短頭型)인데 반해 이 인골은 장두형이다.

이마·뒤통수의 길이와 귀와 귀 사이의 길이 비율을 나타내는 두개지수는 한국인의 경우 100대 80~82인데 반해 서양인은 100대 70~73 사이이다. 그러므로 황석리 인골의 두 개지수가 66.3이라는 것은 이 인골은 한반도로 이주한 초장두형 북유럽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김병모 박사는 기원전 1700년쯤 유럽의 아리아인들이 인도·이란 등으로 내려왔으며 이들이 기원전 1000년부터 벼농사 전래경로를 통해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반도로 이주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서대의 조용진 박사가 인골들의 두개골을 복원했는데 ‘서양인’의 얼굴형과 거의 똑같았다. 조 박사는 인골의 왼쪽 이마가 볼록하고 코가 높으며 얼굴이 좁고 길고, 이가 큰 북방계통의 사람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이 같은 인골의 특징은 현재 제천의 산간지역 사람들에게도 나타나는데 결론적으로 알타이 지방에서 내려온, 서양인의 형질을 포함한 사람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황석리의 인골만 갖고 서양인으로 확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유태용은 지금도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고 같은 인종에서도 빈부나 계급의 정도에 따라 골격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황석리 고인돌에서 발견된 뼈들은 대체로 충분한 영양공급을 받은 튼튼한 것들임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지배층은 평민들보다 여러 면에서 여건이 좋았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사실상 과도한 노동력을 하면 어깨뼈가 한쪽으로 기우는 등의 현상을 보인다. 황석리 고인돌에서 발견된 인골은 특별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장두형에서 단두형으로 변형된 한국인>

북한에서 30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화대사람, 10만 년 전의 력포사람, 덕천사람, 4만~5만 년 전의 승리산사람, 2만 년 전의 만달사람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들을 70만
~100만 년 전에 검은모루 동굴에서 살았던 원인(호모 엘렉투스)으로부터 일관하게 진화하여 나온 한국인의 조상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논지는 간단하다. 한국인은 우리나라에서 형성된 단일 민족으로 한국인의 원류가 잘 알려진 시베리아의 바이칼호로부터 유입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국인의 발상지는 우리나라로 소위 ‘다민족기원설’에 의거한 ‘본토기원설’을 주장한다.

한국인이 북방인과 남방인의 두 갈래로 섞여있으며 남방인이 20~30퍼센트에 달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북한측도 한국인의 본토기원설에 많은 반론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북한 측에서 본토기원설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는 매우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북한측은 두 가지 면에서 한국인의 본토기원설을 주장한다. 하나는 평양 유역에서 발견된 신인들이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고인과 연결되는 특징을 갖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한국인의 고유한 특징이 평양 유역에서 발굴된 신인들에게서 처음으로 발견된다는 것이다. 평양에서 발견된 신인들의 대뇌피질의 앞머리부가 고인과 유사성을 보이므로 고인이 력포사람의 직계선조라는 설명이다.

한국인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살든지 일반적으로 얼굴의 높이는 중간정도로 그다지 높지 않지만 머리뼈 높이는 상당히 높은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현대 한국인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특징이 용곡사람과 만달사람에서도 발견된다고 앞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북한의 본토기원설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현대 한국인의 특징이 단두형인데 신인단계의 유골에서 단두형이 아니라 장두형의 머리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 장두진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충북 단양 금굴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물.
‘화석인류단계의 머리뼈들은 예외 없이 장두형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시대가 오래될수록 원시적인 특징이 많기 때문이다. 눈확부와 뒤통수부의 뼈주름이 발달되어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머리뼈 길이가 길어지므로 자연히 장두형에 속한다. 평양 일대의 신인들도 장두형에 속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인의 단두형은 단두화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경우 과거로 올라갈수록 머리뼈 길이가 길어져서 장두형에 속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그와 반대로 현대로 내려오면서 단두형이 비율이 많아진다. 그런데 신인과 조선옛유형사람, 현대한국인의 머리뼈형태가 서로 구별되기는 하지만 머리뼈 형태를 규정하는 개별적인 요소에서는 유사한 점이 많이 발견된다.’

현대 한국인의 머리뼈 형태는 상당히 단두화되어 장두형은 고작 5~6퍼센트로 추정한다. 그런데 과거로 올라갈수록 장두형이나 중두형의 비율이 높아진다. 함경북도 회령시 검은개봉유적의 10개체 머리뼈도 단두형이 4개체이고 6개가 장두형과 중두형에 속한다. 송평동유적에서 발견된 4개체의 머리뼈도 단두형이 2개체, 중두형이 2개체였다. 이것은 과거 사람들이 현대인보다 머리뼈의 길이가 길었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장두진은 설명했다.

사실 상당히 후대로 볼 수 있는 유명한 안악 3호분, 자강도 시중군 로남리고분, 평안남도 대동군 덕화리고분, 강원도의 신라무덤 등에서 발견된 머리뼈는 모두 단두형에 속한다.

더욱이 한국인의 특징인 단두형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소하다는 점도 북한측은 강조한다. 아시아에서는 동북아시아 일대와 중앙아시아, 유럽에서는 스위스 일대의 알프스 지방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에서만 단두형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주위는 모두 장두형이다.

물론 고인인 력포사람, 덕천사람에서 신인인 승리산사람, 만달사람들을 오늘날 우리 민족의 직계로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뒤따른다는 지적도 있다. 구석기인들은 자연환경변화나 사냥거리에 따라 빈번히 이동했다. 비록 후기구석기인들이 전·중기구석기인들 보다는 좀 더 붙박이 정착생활 쪽을 택했을지라도 어디까지나 선주민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다지역기원설을 주장하는 중국 측은 이런 주장을 매우 공격적으로 반박하면서 북한측의 주장을 두둔한다. <중국사회과학원> 왕웨이의 글을 인용한다.

‘서양의 구석기 문화를 보면 약 10만여 년 전 어떤 곳에서 기하형의 세석기들, 예를 들면 삼각형기ㆍ신월형기ㆍ제형기 등이 출현하며, 2만 년 전에는 더욱 정밀한 기하형의 세석기가 출현했다. 그 당시에 이런 석기를 제작하려면 상당한 기술이 요구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구석기 문화 중에서는 이런 기하형의 세석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이런 세석기 제작 기술의 흔적도 없다. 이런 차이점은 중국의 구석기 문화와 서양의 구석기 문화가 서로 다른 문화 계통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왕 교수는 아프리카가설에 의하면 ‘아프리카 이브’의 후예들이 중국으로 옮겨왔을 때 분명히 그들이 갖고 있던 선진 석기 제작기술과 일상에서 사용하는 석기들을 가져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중국의 구석기 문화는 격변을 맞이해야 하는데도 중국에서 3만여 년 전 신인(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에게 어떠한 변화의 징조가 없으며 중국 구석기 문화가 중단된 적도 없다. 적어도 외래 문화에 의해 대체되는 현상도 없는 것을 볼 때 서양의 구석기 문화와 중국 구석기 문화는 각각 독립적으로 발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위의 설명은 북한에서 주장하는 한국인의 기원과 연계되지만 다소 다른 면도 있다. 중국에서는 북경원인이 현대 아시아인의 주류라고 주장하지만 북한은 큰 틀에서 ‘다지역기원설’을 지지하면서도 북경원인이 한국인의 원류라고는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신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민족이 형성 되었다는 가설을 감안한다면 매우 작은 양의 인골을 토대로 과거 한민족의 모습을 그려본다는 것이 과연 설득력이 있느냐는 지적도 있음을 첨언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일관성 있게 고대 인류의 화석이 발견된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특이한 예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보다 많은 인골이 발견되면 한민족에 대해 더 많은 정보가 축적될 것으로 생각된다. 04/2/27 이종호(
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