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버팀목 과거시험 | ||||||||||||||||||||||||||||||||||||||||||||||||||||||||||||||||||||||||||||||||||||||||||
능력 위주 발탁·교육열기, 민족의 언어·정신적 통일 유지 | ||||||||||||||||||||||||||||||||||||||||||||||||||||||||||||||||||||||||||||||||||||||||||
사람을 키우고 쓰는 문제는 나라의 장래와 직결된다. 그러므로 인재들을 키우는 일은 어느 나라에서나 국가의 중요 업무의 하나다. 우리나라 정부 직제에서 교육부가 부총리 급으로 격상되어 있는 이유도 교육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이성무 교수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인재를 선발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기준이 있다고 설명했다. ‘혈통’과 ‘능력’이다. 물론 이러한 기준이 적용되는 경우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르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혈통이 강조되고, 현대로 내려올수록 능력이 강조된다. 문명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능력을 강조하는 반면, 문명이 덜 발달한 나라일수록 혈통을 강조한다. 오늘날에도 인도에서는 크게 4개 신분으로 나뉜 카스트(Caste)제도가 모든 인도인들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기준은 어김없이 적용된다. 신라의 ‘골품제도(骨品制度)’가 대표적인 예다. 당시에는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혈통이 좋지 않으면 출세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성골(聖骨)‧진골(眞骨)‧6두품(六頭品)‧5두품(五頭品)‧4두품(四頭品) 등으로 혈통을 구분해 놓았기 때문에 개인이 올라갈 수 있는 관품(官品)의 상한이 정해져 있었다. 신라의 골품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혈통 위주의 인재 발탁제도는 고려 광종 9년(958)에 시행된 과거제도에 의해 비로소 무너지게 된다. 광종의 이름은 소(昭)이며 25세에 친형인 정종으로부터 949년 3월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광종은 비교적 오랜 기간인 26년 동안 왕위에 있었는데 과단성 있는 개혁정치를 추진하여 전제왕권을 수립하는 데 성공한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광종은 태조 왕건 사후에 벌어진 형제간의 왕위 상속 형태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친자식인 경종에게 대권을 물려 줄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 개인이 소유한 노비는 사유재산이기 때문에 납세는 물론 국방이나 부역에 나갈 의무가 없었다. 개인 소유의 노비가 증가하면 할수록 그만큼 국방력과 국가 재정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노비안검법은 공신이나 호족의 세력을 꺾고 왕권이 강화되는 일석이조의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공신세력들이 강력히 반대했고 심지어는 광종의 왕비인 대목황후까지 반대했으나 광종은 소신껏 밀어붙였다. 이 법의 배경에는 노비들을 해방시켜 지방 호족이나 중앙 공신들의 경제 군사적 기반을 축소시키려는 광종의 숨은 뜻이 있었다. 물론 광종은 신법에 의해 자유민이 된 백성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얻었기 때문에 기득권 세력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으로 구세력에 치명타를 안긴 후 자신의 주위를 신진 세력으로 교체할 묘안을 강구했다.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전공을 세운 군인이나 공신들의 자제 가운데서 우선적으로 관리를 등용하는 것이었다. 한편 광종 9년(958) 왕은 후주(後周)로부터 고려로 귀화한 쌍기(雙冀)를 등용했는데, 그는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과거제도의 시행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과거제도는 가문의 세력이나 부모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본인의 학문적인 능력에 따라 관리로 진출할 수 있는 능력 위주의 관리 등용제도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제도가 성공한 이유는 당시 실력을 갖춘 국학 출신자들이 다수 배출되어 있었다는 것과, 실력에 의한 사회 진출을 희망해 온 지식계층의 시대적인 요청에도 부응하는 정책이었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과거제의 실시로 여러 가지 모순점을 안고 있는 골품제의 잔재에서 완전히 벗어나 본인의 능력으로 발탁되었으므로 종래의 관리와 대별되는 지식인 출신의 관료 집단으로 자리매김한다. 물론 한 회에 선발한 급제자의 수는 10여 명 전후의 소수 인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이 국가의 주요 정책을 기획하고 시행할 수 있는 중요 핵심 부서에 포진함으로서 마침내 조정 내에서 신구 세력 간의 세대교체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고 최규성 박사는 설명했다. 과거시험은 국왕에 충성하는 과거 출신의 전문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관료체제를 구축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점차 혈통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로 변모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과거제도는 고려에서 시작되었지만 조선시대에 활성화되었고 확고한 자리를 잡는다. 과거시험이야말로 조선시대 500년을 지탱하는 근간이라고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을 정도이다. 이곳에서는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철밥통 아닌 능력있는 사람을 선호〉 과거제도가 도입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능력주의가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고려‧조선 사회 모두 양반과 귀족 사회였으므로 혈통과 능력을 동시에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제도와 ‘음서제도(蔭敍制度)’가 동시에 채택된 것이다. 음서란 조선의 3품 이상 관료의 자손에게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관품에 따라 7품 이하의 관직을 차등으로 주는 제도이다. 예컨대 1품 정승의 아들에게는 7품직을 주는 것으로 아들이 없으면 손자‧동생‧사위 등에게 부여하기도 했다.
음서제도도 나름대로 관리 발탁에 기여했지만 과거시험은 전제왕권을 강화하는데 유리하므로 조선 정부는 과거시험에 남다른 공을 들였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세 종류로 나뉘는데 문과(文科)‧무과(武科)‧잡과(雜科)이다. 문과는 문관을 뽑았고 무과는 무관을, 잡과는 기술자들을 뽑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한 것은 문과였다. 조선 사회가 중앙집권적 문치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시험 과목이다. 문과의 경우 고시 과목은 유교경전과 시문(詩文), 역사(歷史)였다. 이들 과목으로 과거 시험을 본 것은 당시에는 적어도 도덕적으로 수양이 되지 않은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의 도덕은 유교적 도덕을 의미한다. 유교적 도덕이 통치의 기본이었으므로 과거시험의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우선 중국에서 탄생한 유교가 정치의 이상이었으므로 중국 문화에 대한 의존성이 높아져 사대주의가 파생했다. 더구나 문과와 무과는 양반이 보고 잡과는 중인이 주로 보므로 신분의 차이가 고착화되었으며 과거시험 자체가 권력자나 집권 당파에 의해 주도되었으므로 불공정한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시험은 조선 시대 전체를 통해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갖고 왔다고 인식한다. 이성무의 글을 주로 인용한다. 첫째, 교육열을 높였다는 점이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놀라는 것은 높은 교육열이다. 서울 강남의 땅값이 강북보다 높은 것은 교육열 때문이라는 말을 아무리 설명해도 외국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교육에 관한 한국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육 지상주의라고까지 비아냥거림을 받고 있는 교육열은 결론적으로 능력 있는 사람이 출세한다는 대 전제를 바탕에 두고 있는데 학자들은 이와 같이 능력주의를 중시하는 교육열은 사실상 조선시대의 과거 제도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조선시대에 과거 급제는 개인뿐만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었다. 과거에 합격하면 일생이 보장되었다. 성적에 따라 관품을 많게는 6단계까지 올려 받았고 명문 집안과의 결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인들이 과거시험에 집착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게 여긴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신분사회였던 만큼 지금보다 철 밥통이 더욱 철저하게 지켜졌다. 그러므로 과거에 급제시키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교육을 시켰고 전 재산을 쏟아 부어서라도 자식을 가르치려고 했다. 현재도 지나친 교육열 때문에 교육제도가 수없이 바뀌는 등 부작용이 도출되고 있지만 교육열 자체가 천연 자원이 별로 없는 한국을 현재와 같은 중상위 국가 수준으로 올려놓았다는 데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둘째, 과거시험이 갖고 온 가장 중요한 결과로도 볼 수 있는데 과거 시험 덕분에 문자와 정신적 통일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비록 과거를 보는 사람은 전문 언어라고 볼 수 있는 한자를 사용했지만 문자가 통일되고 언어가 이질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인이라는 의식을 공통분모로 가질 수 있었다. 세계적으로 넓지 않은 국토를 갖고 있는 한국이지만 한국인이라는 끈끈한 배경을 갖고 세계 각지에 진출하여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이유로도 설명된다. 셋째, 과거제도는 조선이 세계적으로 고급 문화를 생산하는 고리가 되었다는 점이다. 당시는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으므로 과거 시험에 쓰이는 교과서나 참고서를 모두 중국에서 들여왔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서양보다 기술적인 면에서 떨어지기는 했지만, 중국은 수천 년 동안 세계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나라였다. 과거시험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선진문화를 습득하여 이를 바탕으로 보완 또는 새로운 것을 개발하였으므로 결국 한국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넷째, 조선시대의 장점도 되고 단점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문학을 중시하는 풍토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인문학은 간단하게 말해 인간의 본질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학문이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국가의 대사와 연결시켜 개인보다는 국가를 중요시하는 사고를 만들었기 때문에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등 혹독한 전란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국가가 망가질 대로 망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한민국으로 다시 태어나 현재와 같은 발전국가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것도 인문학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관과 새로운 사회상에 재빨리 적응하는데 문제가 없었다고 인식하는 학자들도 많이 있다. 물론 인문학을 너무 중시했기 때문에 과학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 문제는 이곳에서 설명하는 논제와 다소 거리가 있으므로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다. 3대 과거시험인 문과‧무과‧잡과로 나누어 설명한다. 〈과거시험의 꽃, 문과〉 문과가 과거시험의 꽃으로 불리는 것은 국가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의정부, 육조, 승정원, 언관 기능을 하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 그리고 교육기관인 성균관 등 요직은 문과 출신자들만이 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과는 태조 2년(1393)부터 과거가 폐지되는 고종 31년(1894)까지 총 804회가 시행돼 1만5,127명이 합격했다. 그런데 문과는 단순히 관직에 처음 진출할 사람을 선발하는 시험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한 문과 합격자의 성분을 보면 유학(幼學) 37%, 생원(진사) 36%, 원유계자(元有階者, 이미 관직이나 관품을 갖고 있는 자) 27%, 기타 0.3%로 전체의 27%가 전‧현직 관료나 관품 소유자들이었다. 이미 관직을 가진 사람들이 문과에 응시한 것은 승급은 물론 문과 출신만이 오를 수 있는 핵심관직으로 옮기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문과 시험은 정기 시험과 비정기 시험으로 구분되는데 3년마다 치러지는 식년시(式年試)는 식년에 해당하는 자(子)‧오(午)‧묘(卯)‧유(酉)년에 치러졌다. 그러므로 식년 전년 가을에 초시를 치룬 후, 식년 봄에 복시, 임금 앞에서 치르는 전시 등 3단계로 진행되었다. 합격자 정원은 초시 240명, 복시 33명이며, 전시는 복시를 통과한 33명 전원이 시험을 치렀는데 당락에 관계없이 최종 등위만 매긴다. 그러나 정기시험으로 발탁되는 사람만으로 모든 인재들을 발탁할 수 없으므로 비정기 시험이 자주 시행되었다. 비정기 시험은 증광시(增廣試)와 별시(別試)로 나뉘는데 증광시는 왕의 등극, 세자나 세손의 탄생 등 왕조의 경사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치룬 시험이며 별시는 학문 권장의 뜻에서 시행된 것으로 시험 시기나 합격 인원도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았다. 주로 서울 거주자들이 대상이었으며 시험절차도 간소해 대체로 1회의 시험으로 당락이 결정됐다. 조선 전 기간의 문과 합격자 명단에 의하면 식년시 합격자가 약 40%, 증광시 등 각종 별시 합격자가 60%였다. 식년시에는 지역할당제도 적용하여 각 지역의 인재들을 뽑았는데 서울이 가장 많고 경상도, 평안도, 전라도 순이다. 평안도 지역은 비교적 특별대우를 받았는데 이와 같이 평안도를 조선왕조에서 우대한 것은 국방상의 필요에 의해 평안도 인심을 수용하고 지역 강화를 위한 정책적 배려로 풀이된다고 원창애는 적었다. 〈하층민의 등용문, 무과〉 무과도 정기시험인 식년시와 부정기 시험인 각종 별시로 구분된다. 심승구의 글을 주로 설명한다. 식년 무과는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를 거쳐 총 28명을 선발했다. 초시는 서울의 훈련원시와 7도(경기도 제외)에서 보는 향시(鄕試)가 있었는데 훈련원시에서는 70명, 향시에서는 120명을 선발했다. 복시는 서울에서 190명을 상대로 28명을 최종적으로 선발했으므로 경쟁률이 약 7 대 1이었으며 왕이 참석한 전시에서는 갑과 3인, 을과 5인, 병과 20인으로 최종 석차를 정했다. 부정기 시험인 각종 별시는 원칙적으로 서울에서 보았으며 선발인원은 적게 10명에서 심지어는 2만여 명을 뽑기도 했다. 한 번에 수천 명을 뽑는 무과를 ‘만과(萬科)’라고 하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후 국방의 중요성이 커진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문과는 양반이 응시하고 무과는 천인이 아니라면 모두 응시할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지만 문과와 무과의 응시 자격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다만 무과는 문과와 달리 장기간의 교육이 필요하지 않았고 군역 종사자인 일반 평민도 비교적 쉽게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문과와는 다소 차별을 둔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임진왜란 이후 한꺼번에 많은 수를 뽑는 만과가 시행되자 서얼‧천민까지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후대에 천인의 무과 응시를 금지하는 규정까지 만들어졌다. 이는 역으로 무과에는 천인도 다수 진출했음을 방증하는 자료이다. 무과는 처음에 무예 6기(목전, 철전, 편전, 기사(마상 궁술), 기창(마상 창술), 격기)와 강서(講書) 등 모두 7기예를 겨루었는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간단하고도 실전적인 무예가 강조되었다. 특히 무기가 발달하면서 총을 쏘는 시험 등이 추가되었다. 무과는 무예와 강서를 함께 시험 보았으나 실질적으로 무예를 강조했고 강서 시험도 단순한 형식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임진왜란은 무과의 성격을 변화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전쟁 중에는 적의 머리를 베어 오면 급제시키는 ‘참급과’가 실시되는 등 엄격한 과거 제도를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했다. 평민이나 천인 출신 합격자가 늘어나자 이를 구별하기 위해 ‘상천출신(常賤出身)’이란 칭호까지 생겨났지만 무과의 대량 생산은 조선 후기 사회 변동과 함께 성장하는 하층민의 신분 상승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제도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조선왕조가 500년을 지탱하는 동안 커다란 반란이 없이 비교적 조용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과거제도 중에서도 무과의 신축성을 열거하는 학자들도 있다. 사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국난을 당할 때 조선 백성들의 참상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경우에 당연히 무능하고 썩은 정권을 뒤엎어야 한다는 반란의 분위기가 솟아오르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나라를 뒤엎을만한 반란이 거의 없다. 학자들은 이와 같은 현상을 조선시대의 근간인 과거제도의 정착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우선 유교 사상으로 국가와 부모를 앞세우는 철학이 배어 있기도 했고, 과거시험으로 신분상승을 노리려는 의식이 투철하므로 반란과 같은 생각은 엄두에도 두지 않았으며, 더구나 유효적절하게 무과의 인원을 늘려 뽑은 것도 큰 역할을 했다. 원래 국가를 전복시킬 정도의 계획을 세우려면 기본적으로 군사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 조선왕조가 매우 취약할 때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조선 왕조에서는 이런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혁명이 일어나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당대에 어떤 장수라도 조선왕조에 반란을 일으켰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그것은 어떤 장수가 조선왕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고 부하들을 선동해도 호응하지 않았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조선 왕조에서 과거시험이 신분 상승을 도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이미 설명했다. 문과의 경우 양반들의 독무대인데다가 어렵기 짝이 없는 한자를 익혀야 하므로 일반 백성들이 도전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니었다. 그런데 무과의 경우, 과거시험인데도 불구하고 정황에 따라 수천 명이 발탁될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았는데 굳이 성공의 가능성이 많지 않은 쿠데타 등에 합류하여 모든 기회를 잃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조선왕조가 외침으로 결정적인 위기를 여러 번 겪었음에도 쿠데타와 같은 돌발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이유로 무과의 인원수를 유효 적절히 조정하여 새로운 충성심을 유발시켰기 때문으로 보는 이유이다. 무과는 태종 2년(1402)부터 고종 31년(1894)까지 총 770회를 시행해 15만여 명을 선발했다. 문과가 양반의 신분 유지에 비교적 충실한 제도였다면 무과는 위로는 양반에서 아래로는 하층민까지 다양한 계층으로 하여금 관직 진출 꿈을 실현시켜 조선왕조를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인 기술자들의 등용문, 잡과〉 법조인‧의사‧외교관‧과학자들은 현대인들이 선망하는 전문 직종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에도 이들 직업은 전문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신분은 어디까지나 ‘중인’으로 양반과 천민 사이에 위치한 중간 신분층이었다.
잡과에 합격했다는 것은 기술자로서의 장래를 보장해줄 뿐만 아니라 고위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자격증도 되었다. 실제로 참상관(종6품 이상)으로 승급하려면 잡과에 합격해야 했으므로 중인으로서는 잡과에 합격하는 자체가 신분상승을 꾀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물론 잡과는 과거 시험이었지만 문과‧무과와는 여러 모로 달랐다. 가장 큰 차이점은 왕 앞에서 시험을 치르는 전시가 없었다는 점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원칙적으로 잡과에서 선발하는 인원은 총 46명이었다. 46명 중에서도 역과가 19명(중국어 13명, 몽골어‧일본어‧여진어(청어) 각 2명)으로 역과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잡과는 정종 1년(1399)부터 고종 31년(1894)까지 시행되었는데 총 233회가 실시되어 3년마다 실시된 식년시가 164회, 부정기 시험인 증광시가 69회였다. 이남희는 문과나 무과가 후대로 내려올수록 문란하게 되었지만 잡과는 고종 때 폐지될 때까지 비교적 규정에 의해 합격자들을 선발했다고 설명했다. 잡과가 임시 시험인 증광시보다 정기 시험인 식년시를 근간으로 운영한 것으로도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과거 시험의 스타 이율곡〉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C씨가 사법‧외무‧행정고시 등 3개 고시에 모두 합격하여 세인의 관심을 끈 적이 있었다. 한 개의 국가고시에서 합격하기도 힘든데 3관왕을 차지한다는 것 자체를 매우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제법 복잡했던 과거시험에서도 연달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여 주목을 받은 다관왕이 있었다. 문과 전 단계에 걸쳐 수석을 차지한 유일한 사람은 잘 알려진 이율곡으로 그는 무려 ‘9관왕’이었다. 이율곡의 9관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는 조선시대의 과거 시험 제도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박종주는 설명했다. 문과에 급제하려면 최초 응시에서부터 최종 합격까지 모두 9단계를 거쳐야 했다. 먼저 문과 응시 자격시험이라고 볼 수 있는 생원시(진사시)부터 치러야 하는데 생원시는 1차 시험인 초시와 2차 시험인 복시 두 단계로 나뉜다. 두 단계를 통해 생원시에 통과하면 성균관에서 공부할 자격이 주어지고 이곳에서 일정 기간 수업을 받은 후 비로소 문과 시험을 치를 수 있다. 문과시험은 또 다시 초시와 복시가 있는데 이들 모두 초장‧중장‧종장 등 세 단계로 나뉘어져 모두 6시험이 있으며 여기에 통과해야만 마지막으로 임금 앞에서 치르는 최종 시험인 전시에 참가할 수 있다. 전시는 당락이 아닌 순위를 정하는 절차였지만 모두 9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이 모든 시험을 장원으로 통과한 사람이 바로 율곡 이이(李珥)이다. 율곡은 명종 19년(1564) 생원시의 초시와 복시에서 장원을 차지했고 같은 해 식년 문과에서도 초시의 초‧중‧종장, 복시의 초‧중‧종장 모두를 수석으로 통과했다. 더불어 최종 시험인 전시에서도 장원을 차지함으로써 후세 사람들로부터 ‘9도장원(九度壯元)’이라 불렸다. 조선 왕조 500년을 통틀어 단 한 명인 9관왕의 기록을 세운 이이의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이다. 아버지는 증좌찬성 원수(元秀)이며 어머니는 유명한 사임당 신씨이다. 29세 때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역임했고 33세에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39세에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47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고 49세인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서울 대사동에서 사망했다.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풍덕의 구암서원, 황주의 백록동서원 등 20여 개의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조선시대 최고의 유학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부정 시험도 극심〉 전 세계를 통틀어 시험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따라다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부정시험이다. 조선시대의 과거 시험에도 부정시험이 없을 리가 없다. 과거시험은 조선시대에 출세의 관문이자 양반 신분을 유지하는 기반이었으므로 사람들이 과거를 ‘필생의 소원이자 목표’로 생각하고 도전했다. 고위직에 오르려면 반드시 과거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전‧현직 관리들까지 과거에 응시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과거시험은 원칙적으로 3년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식년시가 있었지만 거의 매년 서울에서 다양한 임시 과거를 실시한 것도 과거시험의 열풍을 몰아 온 계기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전국에서 올라온 수천, 수만 명의 과거 응시자들이 한꺼번에 서울로 몰려 한때는 10만 명이나 되는 수험생이 서울에서 시험 준비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심지어는 이때 서울의 쌀값이 폭등했다고도 한다. 수험생이 한꺼번에 몰려들자 자리싸움으로 다치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으며 심지어 시험장을 습격하고 시험 감독관을 구타하는 경우도 있는 등 과거 시험장이 아수라장이 되기도 했다고 심승구는 적었다. 응시자들이 하도 많아 시관이 시간에 쫓겨 다 읽어 채점을 하지 않고 반절 정도만을 채점하는 경우가 있자 시험지를 먼저 내려고 다투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정기 시험인 식년시의 경우 초시‧복시‧전시 등 3단계를 거치려면 시험 기간이 적어도 6개월 이상 걸렸으므로 많은 수험생 때문에 문제가 생기자 정부는 서울에 응시자들이 오래 머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능한 한 시험 당일 합격 여부를 결정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춘향전’의 이몽룡이 급제한 ‘알성문과(謁聖文科)’이다. 이것은 ‘알성시(謁聖試)’에서 비롯된 것으로 원래는 성균관 유생들의 학문을 권장하기 위한 시험이었지만 시험 당일 당락이 결정되기 때문에 실력보다는 운도 많이 작용했다. 수많은 응시자들이 몰린 탓에 시험 때마다 많은 낙방자들이 발생했지만 이들이 바로 귀향하지 않고 재수에 도전하기 위해 서울에 몇 년이고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들 지방 출신 선비들이 주로 묵으면서 과거 시험을 준비한 지역이 유명한 남산골로 남산골은 조선시대 고시촌으로 볼 수 있다. 이곳의 선비들을 '남산골샌님'이라고도 불렀는데 계속 과거에 떨어진 사람들이 늘어나고 불평이 높아지자 이들을 무마하기 위한 과거도 실시했다. 과거시험에는 연령 제한이 없었는데 최고령 합격자는 고종 27년(1890)에 문과에 합격한 85세의 정순교이다. 최연소 합격자는 암행어사로 유명한 이건창으로 그는 고종 3년(1866), 13세의 나이로 합격했다. 이건창을 기준으로 하면 정순교는 무려 70년간이나 과거시험을 준비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과거가 필생의 과업이므로 어떻게든 합격하고 보자는 심리가 부정시험을 부채질했다고 볼 수 있다. 부정행위의 갖가지 방법을 이이화의 글에서 살펴본다. 우선 단속이 느슨한 틈을 타서 수험생이 많은 수종을 데리고 수험장에 들어 간 후 시험지를 베껴주거나 외부와 연락해 시험답안지를 바꿔치기도 했다. 특히 권세가 있는 사람은 몇 사람의 글쟁이를 데리고 들어가 분담하여 시험지를 신속하게 작성해 내기도 했고, 종사자를 매수해 늦게 내고도 앞에 슬쩍 끼워 넣게도 했다. 차술(借述)과 대술(代述)하는 방법도 있었다. 시험장에 대여섯 명을 데리고 들어가 각기 답안지를 작성하고 그 가운데 제일 잘 쓴 답안지를 골라서 내는 것이다. 이것이 차술이다. 또 시험장 밖에 글 잘하는 선비를 대기시켜 놓고 종사원을 매수해서 시험 제목을 일러주면 대리 답안을 작성한다. 이 대리답안지를 다시 종사원이 응시생에게 전달하여 제출하는 것이 대술이다. 심지어 응시생이 시험장 안에서 일단 절차를 밟고 난 뒤 시험장을 빠져 나와 집이나 서당에 앉아 답안지를 작성한 뒤 다시 들어와 제출하는 방법도 있었다. 응시생과 시관이 짜고 부정으로 합격시키는 방법도 있었다. 시관이 시험문제를 미리 일러주어 집에서 답안지를 작성해 제출하는 방법, 응시생이 답안지에 점을 찍는 따위 암표(暗票)를 하여 누구의 답안지인지 알게 해서 시관이 합격시켜주는 방법도 동원되었다. 또 시관의 보조역할을 맡은 등록관을 매수해 답안지를 베낄 때 잘못 쓰인 글자나 엉터리 문맥을 바로잡아 고치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 이를 역서(易書)라 한다. 또 종사자를 매수해 다른 합격자의 이름을 답안지에 바꿔 붙이게 했다. 이를 절과(竊科)라고 했는데 다른 합격자를 도태시키는 가장 악질적 방법이라고 이이화는 적었다. 과거시험마다 부정시험이 심각해지자 응시자들의 부정행위를 방지하려는 방법도 고도로 발전했다. 과거 시험장을 1소(所) 2소로 나누어 부자나 형제 또는 가까운 친척이 한 곳에서 시험을 보지 못하게 했다. 또 시관도 가까운 친척이 응시할 경우에는 이를 피하게 했다. 이를 상피제(相避制)라 했다. 시험장의 입구에는 문지기인 수협관(搜挾官)을 세워두었다. 응시생들은 시험장 안에 종이, 붓, 먹, 벼루 이외에는 어떤 물건도 갖고 들어가지 못했다. 만일 책 따위를 숨기고 들어가다가 들키는 경우 몇 년씩 응시자격을 박탈하는 조치를 내렸다. 또 시험장에는 응시생과 종사자들 이외 어느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양반 자제들은 평소 나들이할 때 수종을 드는 종을 데리고 다녔다. 하지만 과거시험장에서는 수종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일 잡인이 시험장에 들어간 사실이 발각되면 누구든 즉시 체포해서 수군(水軍)으로 보내게 했다. 과거시험은 실외에서 치르는 것을 제외하고는 현대 시험과 다를 바 없다. 응시생의 입장이 끝나면 여섯 자 간격을 두고 앉힌다. 답을 쓸 동안 군데군데 감독관이 배치되어 부정행위를 감시했다. 규정을 어기거나 부정행위가 적발되면 두 번의 응시자격(6년)을 박탈했다. 부정행위가 심하다고 생각되면 곤장 100대를 치고 징역 3년의 처벌을 내리거나 유배를 보내기도 했다. 응시생은 시험지에 자신의 이름을 쓰고 종이를 붙여 가리게 했다. 수권관(收券官)은 시험지를 받아 살펴보고 등록관에게 넘겨준다. 등록관은 시험지의 맨 끝에 수험번호인 자호(字號, 천자문의 순서대로 써서 매긴 순번)를 쓰고 도장을 찍어 가운데를 자른다. 이름 부분이 잘려나간 시험지를 등록관이 다시 베껴서 시관에게 올린다. 시관이 시험지를 채점할 적에 누구의 답안인지 모르게 한 것이다. 초장 시험의 경우 『사서삼경』의 대문(大文, 주석이 아닌 본 글)을 외웠다. 초기에는 응시생이 시관과 등을 돌리고 외우게 했으나 후기에는 장막을 쳐서 시관의 얼굴을 가리고 시험을 보게 했다. 이런 갖가지 방지 장치와 엄한 처벌규정을 두었는데도 부정행위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영조는 수권관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답안지를 내지 못하게 하기도 했고 정조는 시험문제가 발표된 뒤 3시간 이후에 답안지를 제출케도 했다. 오늘날 시험부정도 현대화되었다. 수능시험을 위해 사전 모의시험을 하고 문명의 이기인 휴대전화까지 이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나 그 동기와 방법은 과거시험과 근원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시험이 있는 한 부정시험이 사라지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04/1/7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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