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훈민정음(訓民正音) 원리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8. 14:01


한글날 · 한글의 역사

세종대왕 | 우리글 이름변천사 | 御製訓民正音 | 훈민정음 원리 | 훈민정음 풀이 | 훈민정음 언해본


  한글날


1926년11월4일 조선어연구회(한글학회의 전신)가 주축이 되어 매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하여 행사를 거행했고 1928년에 명칭을 '한글날'로 바꾸었다.
1932, 1933년에는 음력을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여 양력 10월 29일에 행사를 치렀으며,
1934~45년에는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여 10월 28일에 행사를 치렀다. 그러나 지금의 한글날은 1940년 〈훈민정음〉 원본을 발견하여 그 말문(末文)에 적힌 "正統十一年九月上澣"에 근거한 것으로,
이를 양력으로 환산해보면 1446년(세종 28) 10월 9일이므로 1945년에 10월 9일로 확정했다.
 이 날에는 세종문화상을 시상하고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英陵)을 참배하며 전국에서 학술대회 및 각종 백일장을 거행한다.

(출처: 한국브리태니커회사, '브리태니커CD2000'의 "한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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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의 역사

한겨레에게는 둘도 없이 큰 자랑거리요, 세계 사람들은 알면 알수록 놀라는 문화재가 한글이다. 우리끼리는 처음에는 낯설어서 배척했고, 조금 알고 보니까 우습도록 쉬워서 멸시했고, 나중에는 굳은 버릇을 못 고쳐서 아녀자나 쓰라고 던져 버렸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 글자를 통한 지식의 대량 전달과 처리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야 비로소 그 참된 값어치를 인정하게 된 문화의 고속 도로가 한글이다.

이런 보배를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바로 알고 있는가?
그 내력과 실상을 알고 보면, 그 가치를 한결 확실하게 알게도 되고, 그 값을 지나치게 치는 잘못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는 한글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도 많지만 아주 잘 아노라 하는데 실은 치우치게 알고 지나치게 값을 매기는 사람도 많다. 한글은 천하의 보배이지만, 흙이 묻은 보배라서 우리는 더욱 갈고 닦아 빛을 내야 한다.

- 김정수(1990), [한글의 역사와 미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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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 세종대왕의 약사 ]

  세종대왕 조선 제4대 왕(재위 1418~50),휘, 도, 자 원정, 시호, 장헌 태종의 셋째 아들로 원경왕후 민씨 소생.비 는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 소헌왕후,1408년(태종 8)충녕군에 봉군, 13년(태종 13)에 대군이 되고 18년에 왕세자에 책봉, 동년 8월에 22세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 후 정치, 경제 ,문화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유교 정치의 기틀을 확립하고, 공업을 시행하는 등 각종 제도를 정비해 조선 왕조의 기반을 굳건히 하였다. 또한 한글 창제를 비롯하여 조선 시대 문화의 융성에 이바지하고 과학 기술을 크게 발전시키는 한편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국토를 넓혔다. 1420년에 설치된 집현전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육성하는 동시에 왕과 세자에 대한 학문적인 자문과 교육과 각종 학술 연구, 서적 편찬을 담당하는 기구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20년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황희, 맹사성, 허조, 등의 청백리를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에 노력하여 의정부의 독주를 견제했고, 왕립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변계량, 신숙주, 정인지, 성삼문, 최항 등 장년층의 학자를 등용하여 정치자문, 왕실 교육, 서적 편찬 등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그리고 궁내에 정음청을 설치, 성삼문, 신숙주, 최항 등으로 하여금 43년(세종 25)한글을 창제하게 하고 46년 이를 반포하였다. "훈민정음" 28자를 제정하여 반포하는 한편 정음청을 두어 유교 전적. 음운서 등의 국문 출간을 담당하게 했으며, 학문의 장려에 힘쓰면서 "효행록", "삼강행실", "오례의", "자치통감훈의", "치평요람", "용비어천가", "고려사", "역대 병요", "동국정운",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의방유취" 등 각종 서적을 편찬하게 했다. 또한 이천에게 명하여 경인자, 갑인자, 병진자 등을 제작하게 하였는데, 그 중에서 갑인자는 정교하기로 유명한 활자이다.

  초기에는 억불책을 써서 5교 양종을 선종과 교종의 2종으로 통합하여 각 18개 사찰만 인정하고 경행을 금지했으나, 말년에는 궁중에 내불당을 짓고 승과제도, 경해을 인정하는 등 왕실 불교로 장려하여 불교 발달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음악에도 관심을 기울여 25년 관습도감을 설치하고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하게 하여 음악을 장려하였다. 박연에게 명하여 아악기를 개조하여 고래의 아악, 당악, 향악의 모든 악기, 악곡, 악보 등을 종합 정리하게 했으며, "정대업", "보태평" 등 저명한 악곡을 제작하게 하였다.
또한 실록 보관을 위하여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에 4대 사고를 설치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다.

  과학기술에 대한 업적은 42년 이천 ,장영실로 하여금 우량을 분포 측정기인 측우기를 제작하게 했는데, 이는 1639년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발명한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그리고 궁중에 과학관인 흠경각을 설치하고 과학기구를 비치하도록 했고, 훈천의, 해시계, 물시계 등 각종 과학기구를 발명하였다.
김담, 이순지 등을 시켜 중국 원 나라의 수시력, 명나라의 대통력을 참작하고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빌어 역서인 칠정산내외편을 편찬했고, 천문, 역법, 의상등에 관한 지식을 종합한 <제가역상집>을 이순지가 펴냈다.

  경제, 사회 정책면은 36년 공법상정소를 설치하고 각 도의 토지를 비척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세율을 달리하는 안을 실시했으나 결함이 많았으므로 43년에 공법상정소의 안을 시정하기 위하여 전제상정소를 설치하고 풍흉에 따라 연분 9등법과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전분6등법에 의한 수등이척법으로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했으며, 전국의 토지를 20년 마다 측량하여 양안을 작성하도록 했다. 그리고 의창, 의료제도, 금부삼복법을 제정했고, 노비에 D대한 지위등을 개선, 사형을 금하도록 했다.

  대외정책면에서는 국가의 주권 확립과 영토확장에 진력한 치적을 들 수 있다. 명나라와의 관계를 보면, 처녀진헌을 폐지하는 한편, 당나라에 보내던 금, 은의 조공물을 폐지하고 마, 포로 대신하도록 했다. 그리고 여진과의 관계는 무력을 강경책을 쓰거나 회유하는 화존 양변책을 썼는데, 두만강 유역의 여진은 김종서로 하여금 구축하도록 하고 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압록강 유역의 여진은 최윤덕, 이천등으로 하여금 구축하게 하고, 4군을 설치하였다. 이 때의 국경선이 압록강으로부터 두만강까지 확보되어 이 곳에 사민정책을 실시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정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일보고는 19년(세종1) 이종무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을 정벌하게 했으며, 이후 쓰시마 도주소 사다모리가 사죄하고 통상을 간청해오자, 26년 삼포를 개항하였다. 이후 왜인의 출입이 증가하자 43년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하여 신숙주의 교섭으로 변효문과 소 사다모리 사이에 계해조약을 체결하게 하여 1년 동안에 입항할수 있는 세견선을 50척으로 제한했고, 세사미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한편, 반드시 수도서인에 한하여 왕래하도록 무역과 출입을 통제하였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영름인데 처음에는 광주에 있었으나, 69년(예종 1)에 이곳으로 옮겼다.

  세종조는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이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인재를 길렀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나아가 겨레 문화를 높이는 데에 기본이 된 훈민정음의 창제, 방대한 편찬 사업,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업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세종대왕]

세종의 성명은 `이도`이며 자는 원정(元正)이고,
시호는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1397년(1세) 4월 10일(양력 5월15일) 태종의 셋째 아들로 한양에서 탄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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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글 이름의 변천사

우리글 이름의 변천사 우리글은 창제된 이후에 훈민정음, 정음, 언문, 반절 등으로 불려오다 주시경 선생에 의해서 한글이라는 제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창제 이후부터 지금까지 우리글 이름의 변천 과정을 알아 봅시다.

가. 훈민정음(訓民正音)

-우리 글자를 창제할 때 붙인 이름(1443년)
-정음: 정인지 서문에서 사용
 보기> - 정인지 서문:
          癸亥冬,我殿下創製正音二十八字,略揭例義,以示之,名曰訓民正音
          - 세종실록(권102) 28년(1446) 丙寅 9월:
          是月訓民正音成,御製曰,國之語音異乎中國
          - 월인석보의 머리글에 있던 어제훈민정음:
          百姓을 가르치시논 正(졍)한 소리라

나. 諺文

-상스런 말을 적은 글이란 뜻.
 보기> - 세종실록 계해(세종 25년) 12월조:
          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其字倣古篆,分爲初中終聲,合之然後
          - 세종실록 병신(26년) 2월 20일 상소문: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今之諺文不亦便民乎
          - 세종 28년 새로운 문자의 보급과 실천을 위해서 諺文聽 설치

-한문과 언문의 쓰임 비교

중국말: 言語 중국글: 漢文, 眞書
우리말: 方言, 俚語, 俗語, 諺語 우리글: 諺文, 諺書, 諺字

다. 反切

-한글은 음소문자(낱소리 글자)라서 소리를 나타내는 방법이 반절과 비슷하다하여 생겨난 이름
 보기> 최세진의 訓蒙字會: 諺文字母,俗所謂反切二十七字

-반절: 한자의 음을 표시할 때, 쉬운 한자를 이용하여 성과 운으로 나타내는 법.
 보기> 天: 他前[ㅌ + ㅕㄴ > 텬] 東: 德紅[ㄷ + 옹 > 동]

라. 기타: 암클, 창살글자, 중글, 상말글

마. 근대의 우리글 이름

-갑오경장(1894) 이후: 國語, 國文
 보기> 주시경의 저서: 국문론(1897), 국어문법(1898), 국문문법(1905)
          주시경의 단체: 국문동식회(1896), 국어연구회(1907)

-한나라말(韓):한국어, 한나라글:한국문
 보기> {보중친목회보} 1호(1910)에 실린 주시경의 글

-경술국치(1910) 이후:조선어
 보기> 조선어문법(1911), 조선어전(1911), 조선어강습원(1911)

-한말
 보기> 국어연구회 강습소 제2회 수료 증서(1911.4.1)의 문구
          [한말익힘곳침]

-배달말
 보기> [국어연구회]를 '배달말글몯음(조선어문회)로 바꿈.(1911.9.17)

-한글: 주시경이 지은 우리글 이름으로 `한`은 `큰`이란 뜻이다.
 보기> [배달말글몯음](조선어문회)를 [한글모]로 개칭
          최남선 [아이들보이]지(1913.9)의 '한글풀이'
          [한글배곳](1914.4)(조선어강습원)
          김두봉의 [조선말본](1915) 머리말
             -> '한글모임자 한샘'이라는 말
          이규영: 한글모죽보기(1916~1919)
          1927년 2월 8일 [조선어연구회]에서 기관지 [한글] 간행
          훈민정음 반포일 [한글날(1928,가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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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국어


 고대 한반도 및 이에 연결된 대륙의 일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언어가 있었다. 7세기 후반에 백제와 고구려가 잇달아 멸망한 뒤에 백제와 고구려의 언어는 점차 신라어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한반도의 언어적 통일이 성취되어 갔다. 고구려나 백제에도 이두나 향찰과 비슷한 표기법이 있었겠지만, 이들은 주로 신라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두는 우리말이 된 한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순수한 한문에 능통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향찰은 신라의 향가 문학의 발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시기: - 10C(신라 멸망)
  의의: 언어적 통일 시기
  자료: 여러 역사책에 나오는 고유명사 표기(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린 인명, 지명, 관명 등), 이두 자료, 향찰-삼국유사에 실린 향가 14수, 균여전에 실린 보현시원가 11수, 신라어 어휘를 기록한 단편, 고대 일본어에 들어간 차용어 표기: 한문(석독, 음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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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중세국어

 중세국어의 시기는 10세기부터 16세기까지 7세기 동안에 걸친다. 그러나 전기·후기의 구분은 왕조의 변혁이나 훈민정음의 창제와는 관계가 없다. 조선이 건국되어 서울이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겨졌으나, 개성과 한양은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고려 중앙어가 그대로 조선 중앙어로 계승된 것이었다. 훈민정음 역시 어디까지나 국어를 표기하는 문자체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그 출현이 국어의 음운, 문법, 어휘에 어떤 영향을 미쳤던 것은 아니다.
 전기와 후기의 구분은 14세기에 그 음운체계에 현저한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시기: 고려건국 - 16C(고대국어의 중심어는 서라벌)   의의: 중심어가 이동했고 고려의 중심어는 조선으로 계승되었다.(개성과 한양은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다.)
  자료: 계림유사, 향악구급방
  표기: 중세국어에 와서 한자어가 격증하였다. 고려 광종 9년(958)에 과거제도를 실시한 것도 하나의 자극이 되어서 고려시대에 있어서는 완전히 문인 학자는 물론 일반 관리까지도 구어로서는 우리말을 사용하고 문어로서는 한문을 사용하는 기형적인 이중생활을 하였다. 이리하여 거의 모든 문화적 학술적 용어는 한자어에 의존함으로써 국어는 이들 엄청난 한자어에 압도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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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중세국어

 후기 중세국어 특히 15세기 중엽은 국어의 역사적 연구에서 각별한 주목을 받아 왔다. 그 주된 이유는 이 때에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이 문자로 많은 문헌이 간행된 데 있다.19세기와 20세기의 교체기에 훈민정음의 원리와 원형을 밝히려는 학자들의 노력에서 국어의 역사적 연구가 싹텄다.

  시기:14 - 16C
  의의: 이 시기부터 훈민정음으로 많은 문헌이 간행되었다.
  자료: 조선관역어, 훈민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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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국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회와 문화에서 점차 새로운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것은 안으로는 상업, 수공업의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 사회적인 변화가 현저했고, 밖으로는 서양 문물에 접하여 그 자극을 받은 결과였다. 이리하여 18세기에 들어 융성한 실학과 서민 문학이 발전했다.

  시기: 17 - 19C말
  정서법: 사성, ㆁ, ㅿ이 없어짐 어두합용병서에 혼란이 생겨 ㅄ계 낱말은 17C 소멸 종성의 ㅅ,ㄷ 혼란 어두가 된소리인 낱말이 증가 구개음화 생겨남 ㆍ소실 원순모음화가 일어남 모음조화의 파괴가 일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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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국어

 1945년 이후에 한글전용 운동이 전개되었다. 개화기부터 계속되었던 표준어와 정서법의 확립은 국문 정리 사업의 핵심이었다.

  시기: 20C -
  정서법: 모음체계에 혼란 ㅔ/ㅐ, ㅟ/ㅚ 음절구조는 `자음+(반모음)+모음+자음`의 형태가 됨 외국어의 영향 약어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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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위지동이전

 기원전후 부여(고구려, 부여, 예, 옥저), 한(마한, 변한, 진한), 숙신계(여진) 언어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三國志(삼국지, 289년)의 魏志(위지) 東夷傳(동이전)에 적힌 기록을 보면, 북쪽에는 夫餘(부여),高句麗(고구려),沃沮(옥저),濊(예)의 언어들이 있었다.
 고구려는 "東夷舊語 以爲夫餘別種 言語諸事 多與夫餘同"이라 하였고, 동옥저에 대해서는 "其言語與高句麗大同 時時小異"라 하였으며 예에 대해서는 "言語法俗 大抵與高句麗同"이라 하였다.
 이 기록을 믿는다면 이들 언어는 서로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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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서 백제전

 고구려와 백제는 언어가 비슷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백제의 지배층이 고구려의 유이민이므로 지배층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고 피지배층의 언어는 한계언어였을 것이다.
 梁書(양서, 629년) 百濟傳(백제전)을 보면, 백제어는 "今言語服章 略與高驪同"이라 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백제의 지배족의 언어에 관한 기술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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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언해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은 해례본 훈민정음과 언해본 훈민정음의 두 가지가 있다.
 이는 모두 새로 만든 우리 글인 `훈민정음`을 풀이한 책이다. 한문으로 되어 있는 해례본은 본문과 해례 및 정인지의 서문으로 되어 있고, 언해본은 예의편인 본문이 중심이며 이에 중국의 치두음과 정치음을 더하여 언해한 것이다.
 언해본의 판본은 몇 가지가 있는데 월인석보 첫째 권 머리에 실려 있는 것을 1586년(선조 6년)이라는 간기가 있는 희방사본이라고 부른다. 해례본은 정인지의 서문에 의하여 1446년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으나 언해본의 지어진 연대와 지은이는 알 수 없다.
 다만 중국의 치두음과 정치음을 구별한 점, 이영보래법을 규정하고 있는 점 등을 보아 <동국정운>이 이루어진 때부터 <월인석보> 간행에 이르는 동안에 집현전 학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희방사본 밖에 언해본의 이본으로는, 박승빈 소장 단행본, 일본 궁내성 소장본, 일본인 가나자와 소장본이 있다.

훈민정음 해례

 세종 25년 우리 글자인 훈민정음이 만들어지자 이에 대한 해례서가 세종 28년(1446년)에 한문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이름도 훈민정음이다. 이 한문본 훈민정음은 언해본 훈민정음과 구별하기 위해 한문본 훈민정음, 원본 훈민정음 또는 해례본 훈민정음이라 불린다.
 내용은, 세종 어제 서문과 새로 만든 글자의 음가와 그 운용법을 밝힌 예의가 본문으로 되어 있고, 이를 해설한 해례가 제자해,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 합자해, 용자례의 차례로 나뉘어져 있으며 끝에 정인지 서문이 붙어 있다. 해례에는 제자 원리, 음가, 글자의 운용법, 음운 체계 등이 상세하게 해설되어 있다.
 현존하는 판본은 전형필님 소장본으며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 김영송(1994), 우리옛글(1), 세종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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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정운

 동국정운은 훈민정음을 만드리 위해 중국 음운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세종 임금과 집현전 학사들이 당시 조선 한자음과 중국 음운이 많이 달라져 있음을 알고 소리 글자인 훈민정음을 써서 조선 한자음을 바로 잡으려고 만든 운서이다.
 세종 29년 9월에 만들어져 세종 30년 10월에 간행되었다. 엮은이는 신숙주, 최항, 성삼문, 박팽년, 이개, 강희안, 이현로, 조변안, 김증이며, 신숙주가 서문을 썼다.
 동국정운의 자모체계는 훈민정음과 같은 사성 23 자모체계이며 운은 모두 91운이다. 동국정운식 교정음은, 중국 한자음도 조선 한자음도 아닌 교정음이므로 오래가지 못하고, 만들어진지 약 40년 뒤인 성종 중기부터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한자음 실은 방식은, 이제까지 운서가 해오던 방식과는 달리 같은 운을 한데 묶은 다음 그 안에서 성조의 차례에 따라 글자를 벌여 놓은 것이다.
 판본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되어 전형필님이 소장하고 있는 권1, 권6(국보71보) 전씨본, 1972년 강릉 심교만님 집에서 발견되어 건국대학교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는 6권6책 전질(국보 142호)이 있다.

- 김영송(1994), 우리옛글(1), 세종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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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어천가

 용비어천가는 정인지의 서와 권제, 정인지, 안지 등의 진전을 따르면 새종 27년(1445년)에 완성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권 10뒤에 있는 최항의 발문에는 세종 29년(1447년) 2월에 완성되었다고 되어 있다. 편찬이 완성된 것은 이 해 10월이다. 원문인 노래는 정인지, 권제, 안지가 짓고, 주해는 박팽년, 강희안, 신숙주, 이현로, 성삼문, 이개, 신영손의 입곱 사람이 하고, 발문은 최항이 썼다. 짜임은 125장의 노래가 10권으로 되어 있는데, 정인지의 서문, 정인지, 권제, 안지의 진전, 노래 125장(한글 노래말, 한시, 한문주), 최항의 발문으로 되어 있다.
 이 노래는 조선조의 창업을 기린 것으로, 태조의 4대조인 목조의 터닦음으로부터 태종에까지 6대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의 왕업이 천명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이어 오는 임금들에게 왕업을 지킴에 있어 삼가야 할 것을 들어 가르침을 목적으로 한 것인데, 1장과 125장을 빼고는 대련 형식이다. 용비어천가는 새로 지은 훈민정음으로 제일 먼저 만든 노래이므로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우리말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반영해 주는 문헌으로 어학적 자료의 가치가 높은 반면, 악장체 문학으로서의 문학, 음악적 가치와 그 내용상 역사적 가치 또한 높은 자료이다.
 초간본은 서울대학교 가람문고에 권1,2가 전하고, 중간본은 규장각 문고에 4종이 전한다. 그 중 광해군 4년(1612년)의 중간본이, 완본으로 전해지는 최고의 것이다.

- 김영송(1994), 우리옛글(1), 세종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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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훈민정음(御製訓民正音)




  조선의 넷째 임금인 세종(1397-1450)-세종의 성명은 이도이며 자는 원정(元正)이고, 시호는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은 워낙 슬기롭고 능한 임금이라, 나라 안팎을 지키고 백성을 위하는 일을 많이 벌이면서, 무엇보다도 교육에 각별한 정성을 기울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세종 임금은 즉위한 뒤 4년(1422)부터 책을 박는데 기초가 되는 활자의 글씨체 개량을 직접 지휘할 만큼 글에 대한 관심과 재능이 많은 분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성과 뛰어난 자질은 세종 25년(1443) 음력 12월에 몸소 훈민정음 곧 한글을 만들어냄으로써 유감없이 빛을 내었다. 세종 임금은 왕립 연구소라 할 집현전에 모아 기른 인재들 가운데 일부-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강희안, 이개, 이선로, 성삼문 등-를 궁중의 언문청 또는 정음청에 따라 모아 보좌를 받으면서 한글 만들기를 주도했다.

  그때 집현전의 신하인 최만리가 대표가 되어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줄거리로 새 글자 만들기를 반대하는 상소(1444)를 했다. ( 최만리는‘역사의 죄인’인가?)

  첫째, 대대로 중국의 문물을 본받고 섬기며 사는 처지에 한자와는 이질적인 소리 글자를 만드는 것은 중국에 대해서 부끄러운 일이다.
  둘째, 한자와 다른 글자를 가진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티베트) 등은 하나 같이 오랑캐들뿐이니,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은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일이다.
  셋째, 새 글자는 이두보다도 더 비속하고 그저 쉽기만 한 것이라 어려운 한자로 된 중국의 높은 학문과 멀어 지게 만들어 우리네 문화수준을 떨어지게 할 것이다.
  넷째, 송사에 억울한 경우가 생기는 것은 한자를 잘 알고 쓰는 중국사회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며, 한자나 이두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관리의 자질에 따른 것이니 새 글자를 만들 이유가 되지 못한다.
  다섯째, 새 글자를 만드는 것은 풍속을 크게 바꾸는 일인만큼, 온 국민과 선조와 중국에 묻고 훗날 고침이 없도록 심사 숙고를 거듭해야 마땅한데, 그런 신중함이 전혀 없이 적은 수의 사람들만으로 졸속하게 추진하고 있고, 상감은 몸을 헤쳐 가며 지나친 정성을 쏟고 있다.
  여섯째, 학문과 수도에 정진해야 할 동궁(문종)이 인격 성장과 무관한 글자 만들기에 정력을 소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세종 임금은 이에 대해서 세세히 답변하지는 않고, 설총이 백성의 글자 생활을 돕기 위해 이두를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한글도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탐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만드는 중대한 나랏일임을 먼저 밝히고, 다만 넷째 의견에 대해서 사리를 모르는 속된 선비의 생각이라고 비판하고,
여섯째 의견에 대해서 한글의 중요함에 비추어 동궁이 관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변했다.


  세종 임금은 당신 나름으로 신중하게 다듬기를 계속하고 신하들과 함께 몇 가지 문헌을 한글로 만드는 실용의 시험을 거쳐 세 해사 지나서야 [훈민정음(1446)]을 통해 반포했다. 이 책의 머리에 실린 짧은 글을 통해서 세종 임금은 중국 것에 사로잡히지 않은 곧은 줏대와 백성들의 어려움을 벗겨 주고자 하는 어진 마음과 단지 삶의 편의를 위해 새로운 글자를 만든다는 실용주의 정신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우리 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에 어진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담아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놓으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깨우쳐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國之語音異乎中國 與文子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而 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便於日用耳

-발췌문(김정수(1994), 한글의 역사와 미래, 열화당 p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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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결국 인간들이 살아간 흔적이라고 한다면 인물사는 역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고 흥미로운 분야다. 그러나 인물에 대한 평가는 문중(門中)과 학파의 이해 관계, 시대적 상황에 의해 전혀 달라지는 경우도 많다. 특히 어떤 인물을 숭모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다른 인물을 깎아 내리는 비교사적 필법(筆法)은 인물사를 빗나가게 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우리 민족사를 되돌아보면, 영광에 못지 않게 오욕의 역사도 적지 않은데 그 중에서 가장 마음 아픈 것이 너무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중국의 문자를 빌려쓴 데서 비롯된다. 글자란 단순히 글을 쓰는 수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글을 쓰는 동안 우리는 중국의 문화까지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저들의 중화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역사를 살게 됐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칭송해도 지나치지 않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한문이 너무 어려워 백성들이 전하고자 하 는 바를 글로 풀어 쓸 수 없음을 측은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일찍이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명군(明君)이자, 현자(賢者)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한글의 역사를 얘기할 때 우리는 한 인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그 밑바닥에 깔고 이론을 전개한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최만리(崔萬理)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배운 역사에 의하면 그는 한글 창제에 반대했고, 이 사실로 인해 ‘역사의 죄인’으로 비난받고 있다. 과연 그럴 만한 인물일까?

최만리는 역사적으로 비난받은 사람이었던 탓에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 지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옛 문헌인‘국조방목(國朝榜目)’에 의하면 그는 해주(海州) 최씨의 시조인 해동공자 최충(海東孔子 崔沖)의 12대 후손으로 아버지의 이름은 최하(崔荷)였다고 한다. 그는 세종이 왕위에 등극한 1419년에 진사시 을과에 합격함으로써 벼슬길에 올랐다. 본시 학문이 높았던 최만리는 과거 합격과 더불어 벼슬이 올라 집현전에 들어가 박사(博士)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이 되었고, 1439년에는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잠시 임금의 곁을 떠났다가 이듬해 집현전 부제학이 되어 서울로 돌아와 세종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늙어서 고위직인 통정대부(通政大夫)에까지 올랐고 청백리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무능하거나 부덕했던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1443년이 저물어 갈 무렵, 세종은 오랜 노력 끝에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이듬해 연초가 되자 최만리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세종실록’ 갑자년(1444) 2월 20일(庚子)자에 실린 그의 상소문을 읽어보면 우리가 그의 진심을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어느 신하보다도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사업을 대단한 업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상소의 첫머리에서 ‘한글을 창제한 왕의 업적이 지극히 신묘해 사리를 밝히고 지혜를 나타내심이 천고에 뛰어난 업적’이라고 경하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상소를 이어가면서 몇 가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첫째, 한글을 쓰노라면 한문을 사용하지 않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장차 중국의 예법을 모르게 될 것이니 그 점이 걱정스럽다고 말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최만리에게 두 가지 잘못이 있음을 알게 된다. 우 선 한글을 쓰게 되면 한문을 쓰지 않게 되리라는 것은 생각이 지나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때로부터 560년이 지난 지금도 한문이 없어져서는 안 된다 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고, 또 그들의 주장이 잘못 됐다고만 볼 수 없다면, 당시 최만리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을 크게 나무랄 일만은 아니다.
또 한 가지, 그가 중국의 제도(예법)를 버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 부분은 비난을 받을 만하다.
한글의 창제가 중국의 제도를 버리는 것도 아니려니와 중국의 제도로부터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국가의 운명을 바꿔 놓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중국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걱정한 것은 그가 한때 총명을 잃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그런 식의 사고에 대해 최만리 혼자 책임질 일은 아니었다. 상소가 합소(合疏·여러 명이 연명한 상소)였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복룡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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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訓民正音) 원리


  한글 만들기는 우선 여덟 개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닿소리 글자 다섯(ㄱㄴㅁㅅㅇ)과 홀소리 글자 셋(ㆍㅡㅣ)이다. 글자 만들기에서 닿소리와 홀소리를 구별한 것은 이 두 가지 소리가 소리마디를 이룰 때 그 구실이 다르기 때문이다.
홀소리는 이름 그 대로 홀로 소리마디를 이룰 수 있는 독립적인 소리인데, 닿소리는 홀소리와 닿아야 내기가 쉬운 의존적인 소리이다.


  'ㄱ(기역)'이란 글자는 이 글자가 나타내는 소리를 낼 때 혀의 뒤쪽 곧 어금니에 닿는 혀의 부분이 곱사등처럼 굽어 목젖 가까이 붙는 옆 모양을 본뜬 것이다. 이 글자의 소리와 같은 입 모양으로 나는 소리가 'ㅋ,ㄲ' 글자의 소리들이라, 그 글자 모양도 서로 비슷하게 만들어 졌다. 'ㄱ'에 금이 하나 덧붙은 'ㅋ'은 그 소리가 ㄱ[그] 소리에는 없는 ㅎ[흐] 소리가 함께 나서 아주 거세어 지기 때문이다. 'ㄱ'을 겹쳐 'ㄲ'을 만든 것은 ㄲ[끄] 소리가 ㄱ[그] 소리보다 목과 입 전체에 힘을 많이 줘 내는 센소리이기 때문이다. 이 소리들을 모두 어금닛소리 또는 뒤혓소리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앞에 말한 대로 이런 소리들을 낼 때는 언제나 어금니에 닿는 뒤혀 부분이 굽어 오르기 때문이다.


  'ㄴ(니은)'이란 글자는 이 글자의 소리를 낼 때 혀의 앞쪽이 우묵하게 구부러지고 혀끝이 윗잇몸에 붙는 옆 모양을 본뜬 것이다. 이 글자의 소리와 같은 입 모양으로 나는 소리가 `ㄷ(디귿) ㅌ(티읕) ㄸ(쌍디귿) ㅥ(쌍니은)` 글자의 소리들이라, 이 글자 모양도 비슷하게 만들어 졌다. 이 소리들을 모두 혓소리 또는 앞혓소리라고 부른다. ㄴ[느]는 아주 부드러운 소리이고 ㄷ[드]는 그보다 굳은 소리이기 때문에 'ㄴ'에 금을 하나 더해서 'ㄷ'을 만들었다. 'ㄷ'에서 'ㅌ ㄸ'이 나온 이치는 앞의 'ㄱ'에서 'ㅋ ㄲ'이 나온 이치와 같다. 역시 'ㄴ'에서 번져 나온 것이 'ㄹ(리을)' 글자인데, 그 소리가 부드러움에도 불구하고 금이 많이 덧붙었다는 점에서 예외적이다. 그 소리는 혀끝이 ㄴ와 비슷한 자리에 닿되 혀의 모양이 많이 구부러지거나 떨게 되는 반혓소리다. 이 글자도 혀의 옆 모습을 본떴음을 짐작할 수 있다.


  'ㅁ(미음)'이란 글자는 이 글자의 소리를 낼 때 아래위의 두 입술이 붙기 때문에 입의 모양을 본뜨고 모나게 다듬은 것이다. 이 글자의 소리를 낼 때와 마찬가지로 두 입술을 붙이고 내는 소리가 'ㅂ(비읍), ㅍ(피읖), ㅃ(쌍비읍)' 글자의 소리들이라, 이들도 'ㅁ' 한 글자에서 번져 나간 것이다. ㅁ[므]는 아주 부드러운 소리이고 ㅂ[브]는 그보다 굳은 소리이기 때문에 'ㅁ'에 두 뿔을 더해서 'ㅂ'을 만들었다. 'ㅂ'글자에 아래로 두 발을 붙이고 옆으로 눕힌 것이 'ㅍ' 글자이고, 'ㅂ' 글자를 두 개 겹친 것이 'ㅃ' 글자이다. 이처럼 'ㅂ'에서 'ㅍ, ㅃ'이 나온 이치는 'ㄱ'에서 'ㅋ, ㄲ'이 나온 이치와 같다. 이 글자들의 소리를 모두 입술소리라고 부른다.



  'ㅅ(시옷)'이란 글자는 이 글자의 소리를 낼 때 혀끝과 윗니 사이를 좁히고 그 사이로 바람을 스쳐 내게 되기 때문에 이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이 글자의 소리보다 더 되게 나는 소리를 적기 위해서 겹쳐 만든 것이 'ㅆ(쌍시옷)' 글자이다. 또 이 글자의 소리보다 더 굳게 나는 소리를 적기 위해서 금을 더해 만든 것이 'ㅈ(지읒)'이고, 이 'ㅈ'보다 더 되게 나는 소리를 적기 위해서 다시 겹쳐 만든 것이 'ㅉ(쌍지읒)'이다. 이런 소리들을 묶어서 잇소리라고 부른다. 역시 'ㅅ'에서 번져 나온 것이 'ㅿ(반시옷)'인데, 그 소리가 더 부드러움에도 불구하고 금이 더해 졌다는 점에서 예외적이다. 그 소리는 혀끝이 ㅅ[스]와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 혀끝을 울려 내는 반잇소리이다.


  'ㅇ(이응)'이란 글자는 목청이 울리는 소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목구멍의 동그란 단면을 본뜬 것이다. 마찬가지로 목청에서 나되 그보다 더 굳은 소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 글자에 금을 얹어 'ㆆ(된이응)'을 만들었다. 이 'ㆆ'의 소리는 이를테면 "앗! 안됏!"라고 말할 때 'ㅅ'받침으로 적히는 소리와 같은 것이다. 이 말을 정확히 적자면 실은 "앟! 안됗!"로 적어야 된다는 말이다. 이 소리보다 더 거센 목청 소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금을 하나 더 그어 'ㅎ(히읗)'을 만들었다. 또 'ㅇ'의 소리보다 더 된 소리를 적기 위해서 'ㆀ(쌍이읗)'을 만들었고, 'ㅎ'의 소리보다 더 된 소리를 적기 위해서 'ㆅ(쌍이읗)'을 만들었다. 역시 'ㅇ'에서 번져 나온 것이 'ㆁ(옛이응)'이다. 이 글자의 소리를 낼 때 혀의 모양이 'ㄱ' 따위의 소리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ㄱ'을 본받지 않고 'ㅇ'을 본받아 만든 것은 또한 예외적인 일인데, 그것은 'ㆁ'의 소리가 'ㅇ'의 소리처럼 목청 울림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소리의 느낌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고, 또 'ㅇ'보다는 더 굳은 맛이 있기 때문에 금을 하나 더 그어 만든 것이다.

  이제 닿소리 글자들이 번져 나온 관계를 통틀어 보면, 밑 글자(기본 글자) 다섯이 적어도 서른 아홉으로 번진 셈이다. 이러한 닿소리 홑글자들을 둘씩 셋씩 겹쳐 적은 세종 당대의 닿소리 겹글자들까지 포함시킨다면 그 번진 수효는 예순일곱으로 늘어난다.

초성(11): ㅥ, ㅳ, ㅄ, ㅴ, ㅵ, ㅶ, ㅷ, ㅺ, ㅻ, ㅼ, ㅽ
종성(17): ㅦ, ㅧ, ㅨ, ㄺ, ㅩ, ㅪ, ㄻ, ㄼ, ㅫ, ㄽ, ㅬ, ㅭ, ㅮ, ㅯ, ㅰ, ㅄ, ㆂ

  다음으로 홀소리는 닿소리와 그 성격이 다른 만큼, 그 글자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만들었다. 점 'ㆍ(아래아)'와 직선 둘 'ㅡ, ㅣ' 이들이 홀소리 글자의 밑글자다. 점은 하늘의 둥근 모습을 본뜨노라 한 것이고, 수평선은 땅을 본뜨노라 한 것이고, 수직선은 사람을 본뜨노라 한 것이다. 이 세 글자가 나타내는 소리는 세 가지 종류의 홀소리들 가운데 각각 그 대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홀소리 글자들의 밑 글자가 된 것이다. 세 종류의 홀소리란, 첫째가 밝은홀소리이고 둘째가 어두운홀소리이며 셋째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가운데 홀소리이다.
이 세 글자가 다음과 같이 먼저 일곱 개로, 나중에는 다음과 같이 모두 서른 한 개나 되는 홀소리 글자로 번져 나갔다.

  밝은 홀소리 가운데 가장 중립적이며 대표적인 소리는 점 'ㆍ(아래아)'로 나타내는 소리이다. 이와 같은 밝은 홀소리로 우선 'ㅗ'와 'ㅏ'로 나타내는 소리가 있다. 'ㅗ'는 그 소리가 밝은 소리임을 나타내기 이해서 아래아 'ㆍ'를 'ㅡ'의 위에 올려 놓은 것이고, 'ㅏ'는 역시 그 소리가 밝은 소리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아래아 'ㆍ'를 'ㅣ'의 밖에 내어 놓은 것이다.

  'ㅗ' 소리는 'ㆍ'소리보다 입술을 오무려 내는 소리이고, 'ㅏ' 소리는 'ㆍ'소리보다 입술을 펴서 내는 소리이다.

  이들 세 글자 'ㅏ, ㅗ, ㆍ'의 소리에 'ㅣ' 가운데 홀소리가 앞에 포개어져 한 소리마디가 된 것을 나타내는 글자들이 'ㅑ, ㅛ,  '들이다. 이 가운데 다섯 글자 'ㅏ, ㅑ, ㅗ, ㅛ, ㆍ'의 소리에 'ㅣ' 가운데 홀소리가 뒤에 붙어 한 소리마디가 된 것을 나타내는 글자들이 'ㅐ, ㅒ, ㅚ, ㆉ, ㆎ'들이다. 이 가운데 다시 두 글자 'ㅏ, ㅐ'의 소리에 'ㅗ' 소리가 앞에 붙어 한 소리마디가 된 것을 나타내는 글자가 'ㅘ, ㅙ'들이며, 또한 이와 비슷하게 두 글자 'ㅑ, ㅒ'의 소리에 'ㅛ' 소리가 앞에 붙어 한 소리마디가 된 것을 나타내는 글자가 'ㆇ, ㆈ'들이다. 다만 이들 전체 가운데 세 글자 'ㆇ, ㆈ,  '들은 실제로 쓰인 일이 없는 만큼 이론적인 가능성을 보인 데 지나지 않는다. 아무튼 이들 밝은 홀소리 글자를 모두 합하면 열 다섯 자이다.

  어두운 홀소리 가운데 가장 중립적이며 대표적인 소리는 'ㅡ'로 나타내는 소리이다. 이와 같은 어두운 홀소리로 우선 'ㅜ'와 'ㅓ'로 나타내는 소리가 있다. 'ㅜ'는 그 소리가 어두운 소리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ㅡ'의 아래에 'ㆍ'를 내려 놓은 것이고, 'ㅓ'는 역시 그 소리가 어두운 소리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ㅣ'의 안에 'ㆍ'를 들여 놓은 것이다. 'ㅜ' 소리는 'ㅡ'소리보다 입술을 오무려 내는 소리이고, 'ㅓ'소리는 'ㅡ'소리보다 입술을 펴서 내는 소리이다.

  이들 세 글자 'ㅓ, ㅜ, ㅡ'의 소리에 'ㅣ' 가운데 홀소리가 앞에 포개어져 한 소리마디가 된 것을 나타내는 글자들이 'ㅕ, ㅠ,  '들이다. 이 가운데 다섯 글자 'ㅓ, ㅕ, ㅕ, ㅠ, ㅠ, ㅡ'의 소리에 'ㅣ' 가운데 홀소리가 뒤에 붙어 한 소리마디가 된 것을 나타내는 글자들이 'ㅔ, ㅖ, ㅟ, ㆌ, ㅢ'들이다. 이 가운데 다시 두 글자 'ㅓ, ㅔ'의 소리에 'ㅜ'소리가 앞에 붙어 한 소리마디가 된 것을 나타내는 글자가 'ㅝ, ㅞ'들이며, 또한 이와 비슷하게 두 글자 'ㅕ, ㅖ'의 소리에 'ㅠ' 소리가 앞에 붙어 한 소리마디가 된 것을 나타내는 글자가 'ㆊ, ㆋ'들이다. 이들 가운데 한 글자 ' '도 이론적인 가능성을 보인 데 지나지 않지만, 아무튼 어두운 홀소리 글자들은 모두 열 다섯 자이다.

  이와 같이 한글이 만들어 진 경위를 훑어 보면, 닿소리 글자 다섯이 예순일곱으로, 홀소리 글자 셋이 서른 하나로, 다시 말하면 밑 글자 여덟이 모두 아흔 여덟으로 곧 열 두 곱 넘게 불어난 셈이다. 그것도 치밀한 연결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글만들기의 이처럼 독창적이고도 정연한 조직성에 대해서 미국의 역사학사 레드야드(The Korean Reform od 1446: The Origin, backgroung and Early History of Korean Alphabet)는 다음과 같이 예찬하고 있다.

  "한글의 가장 특이하고 흥미로운 요소는 시각적인 모양과 시각적인 기능 사이에 치밀한 대응이 나타나 있는 점이다. 닿소리 글자와 모양은 홀소리 글자의 모양과 아예 유형이 다를 Q분만 아니라 이 두 갈래 안에서조차 세종 임금은 낱 글자의 모양을 통해서 또 다른 중요한 여러 관계가 드러나도록 했다. 닿소리 글자에서는 글자 모양이 닿소리의 종류와 관련되어 있고, 홀소리 글자에서는 뒤홀소리와 가운데 홀소리 부류가 조직적으로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다. 이처럼 멋과 뜻을 갖춘 합리적인 낱소리 글자는 다시 없다......모양과 기능의 관계라는 생각을 구현한 방식에 대해서는 참으로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소리 종류를 따라 글자 모양을 체계적으로 한다는 것만으로도 족히 그렇다 할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그 모양 자체가 그 소리와 관련된 발음 기관을 본떠 꾸민 것이라니......이것은 정녕 언어학적인 호사의 극치다! 조선의 음운학자들은 참으로 솜씨가 많았거니와, 창조적인 상상력도 모자람이 없었던 것이다."

-전문인용(김정수(1994), 한글의 역사와 미래, 열화당 p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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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訓民正音) 풀이


* 한글의 옛 이름

  훈민정음은 세종이 지은 이름이지만, 언문 반절은 한글을 두고 지은 고유한 이름은 아니다. 언문은 한자가 아닌 속된 글자를 이르는 것이며 반절은 한자의 소리기호라는 뜻으로 한글이 한자의 소리 기호로 쓰여짐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렇듯이 한글을 '바른소리' 곧 '소리'라고 이른 것은 한글은 뜻과 관계없는 소리의 기호이므로 소리 그 자체를 뜻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훈민정음은 우리나라의 말의 정음의 체계를 말하는 것이다.

체계
朝鮮
글자
한자
언문
소리체계
글자소리 소리체계
홍무정운
동국정운
말소리 소리체계
X
훈민정음
소리기호
반절
반절

  따라서, 한글의 이름으로 불려진 훈민정음, 반절, 언문은 어느 것이나 한글의 글자 이름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고 한글의 일함과 속됨의 성격에 따라 일컬어진 것이다.

* 御製訓民正音의 성격과 의도

  어제 훈민정음은 그 성격이 반포용 한글교재이다. 그 머리말에서 한글을 만든 까닭을 밝혔으며, 그 다음은 한글을 배울 수 있도록 설명한 교재이다.
  그러나 그 머리말의 내용과 전체 글의 실제 표현은 아주 다르다. 이것은 한문을 잘 아는 당시 양반 지식 계층을 위한 한글교재이다. 만약 그 머리말대로 백성들을 위한 반포용 교재였다면 한문이 아닌 향찰로 표기하였을 거시며, 특히 한자음에 필요한 초성의 전탁음의 글자를 설명하거나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초성의 글자와 글자 설명은 성운학적 자모체계를 이루고 있어 어떤 운서의 자모체계를 알리는 범례의 일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御製訓民正音은 당시의 양반 지식 계층에게 28자 한글체계를 알림과 동시에 23자모체계의 어떤 운서의 범례의 구실을 하는 이중 의도로 이루어진 것이며 내용상 28자 한글체계와 34성운체계를 복합시킨 것이다.

* 만든 연대

창제: 세종 25년(1443년) 음력 12월
반포: 세종 28년(1446년) 음력 9월 상한

훈민정음 창제일
- 세종실록(권 102) 25년(1443) 癸亥 12월:
○ 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 乃成字 .... 是訓民正音
- 정인지 서문:
○ 癸亥冬, 我殿下創製正音二十八字

훈민정음 반포일
○ 是月訓民正音成, 御製曰, 國之語音 異乎中國 (세종실록 권102 28년(1446) 丙寅 9월)
→ 1446년 음력 9월29일(양력 10월 28일)에 따라 조선어학회에서 1926년부터 한글날로 지정

○ 正統 十一年九月上澣, 資憲大夫禮曹判書集賢殿大提學知春秋館事 世子右賓客 臣鄭麟趾 拜手稽首謹書 (`훈민정음 해례본`의 `정인지 서문`)
→ 正統11년9월上澣(상순:10일)은 음력 9월10일(양력10월 9일)이므로 1940년부터 한글날을 10월 9일로 정함

* 창제목적

① 모든 백성들이 쉽게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 애민정신
② 우리 정신에 맞는 우리말을 가지도록 - 주체정신, 자주정신
③ 한자음의 정리와 통일된 표기를 위하여 - 실용정신

# 한자음의 정리는 우리말과 다른 중국말을 인식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한자는 우리말이 아니므로 외래어로서 본디 음에 충실하고자 한 것이다.(因俗歸正;동국정운)

* 훈민정음의 표기상의 특징(15C표기)

① ㅸ,ㆅ,ㅿ,ㆁ 등이 모두 사용됨.
② 방점 쓰임.(성조체계존재)
③ 모음 조화가 잘 지켜짐.
④ 이어적기 위주로 표기(연철중심;표음주의)
⑤ 8종성 가족용 표기
⑥ 동국정운식 한자표기(이상적 발음)

* 제자원리

1. 초성17자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먼저 五音의 기본글자를 만들고 여기에 획을 더하여 가획글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발음기관의 모양과는 관계없이 다른 글자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이체글자라 한다.

五音 /종류
상형
기본글자
가획글자
이체글자
엄쏘리[牙音]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형상
혀쏘리[舌音]
혀가 윗잇몸에 닿는 형상
ㄷ,ㅌ
입시울쏘리[脣音]
입술 모양의 형상
ㅂ,ㅍ
 
니쏘리[齒音]
이의 형상
ㅈ,ㅊ
목소리[喉音]
목구멍의 형상
ㆆ,ㅎ
 

초성 17자의 순서: ㄱ,ㅋ,ㆁ / ㄷ,ㅌ,ㄴ / ㅂ,ㅍ,ㅁ / ㅈ,ㅊ,ㅅ / ㆆ,ㅎ,ㅇ / ㄹ,ㅿ

2.중성 11자

  天, 地, 人의 三才를 본떠서 기본 글자를 만들고, 이것을 합하여 초출자와 재출자를 만들었다.

성질 /종류
상형
기본글자
初出字
再出字
양성무음
하늘의 둥근 모양
ㆍ(天)
ㅗ,ㅏ
ㅛ,ㅑ
음성모음
땅의 평평한 모양
ㅡ(地)
ㅜ,ㅓ
ㅠ,ㅕ
중성모음
사람이 서 있는 모양
ㅣ(人)
   

모음 11자의 순서: ㆍ,ㅡ,ㅣ / ㅗ,ㅏ,ㅜ,ㅓ / ㅛ,ㅑ,ㅠ,ㅕ

3.훈민정음 초성 23자의 체계

소리의 성질 五音
牙音
舌音
脣音
齒音
喉音
半舌音
半齒音
全淸(예사소리)
   
次淸(거센소리)
   
全濁(된소리)
   
不淸不濁(울림소리)
 
全淸
     
     
全濁
     
     
기본자음의 象形
          혀모양 `ㄴ`에서 이의 모양 `ㅅ`에서

 

* 자음과 모음의 운용

연서법(連書法 니ㅿㅓ 쓰기); 순경음을 만드는 법

- 훈민정음 예의에 나오는 규정
- 순음 'ㅁㅂㅍㅃ' 밑에 'ㅇ'을 붙여 씀
- 'ㅸ'은 국어에 ㅱ,ㆄ,ㅹ은 동국정운식 표기에 사용
- 성종 때 없어짐

병서법(竝書法 ㅸㅏ 쓰기); 자음을 나란히 붙여 쓰는 법

-훈민정음 예의에 나오는 규정
- 초성이나 종성에 자음을 옆으로 나란히 붙여 쓰는 법
各字竝書: 같은 자음을 옆으로 나란히 붙여서 쓰는 법 (ㄲ,ㄸ,ㅃ,ㅥ,ㆀ,ㆅ)
合用竝書: 서로 다른 글자를 병서하여 쓰는 법 (ㄳ,ㄶ,ㄺ,ㅦ,ㅨ,ㅫ,ㅭ,ㅵ)

부서법(附書法 브텨쓰기); 자음에 모음을 붙여 쓰는 법

-훈민정음 예의에 나오는 규정
右書: 자음의 오른쪽에 모음을 붙여 쓰는 법 (가)
下書: 자음의 아래쪽에 모음을 붙여 쓰는 법 (그)

성음법(成音法 ); 낱글자를 합하여 음절을 만드는 법

-훈민정음 예의에 나오는 규정
-凡字必合而成音; 무릇 낱글자(음운)는 반드시 합해져야 음절이 된다. 우리말의 음절 구성의 필수 요소는 중성인 모음이다. 초성, 종성 등 자음은 선택적이다.

* 사성점

-傍點이라고도 하며 훈민정음 예의에 나오는 규정이다.
- 15,16세기 문헌에 나타나며, 왼쪽에 점을 찍어서 성조를 나타냈다.
- 음의 고저가 현대어에서 음의 장단으로 바뀌었다.

四聲
성질
방점
훈민정음
소리의 높낮이
平聲
安而和
무점
맛 낫가 반 소리
처음과 끝이 한결같이 부드럽고 낮은 소리
上聲
和而擧
2점
처저미 낫갑고 내종이 노판 소리
처음은 낮으나 끝은 들려서 높아지는 소리
去聲
擧而壯
1점
맛 노판 소리
처음과 끝이 한결같이 높고 씩씩한 소리
入聲
促而急
 
ㅅ발리 긋닫는 소리
촉급하게 빨리 끝달리는 소리 (무성음 k,t,p로 끝난 소리)

平聲(_) 上聲(↗) 去聲(-) 入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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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訓民正音) 언해본





[풀이]

우리 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에 어진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담아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놓으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깨우쳐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 제목 : 한글날 | 세종대왕 | 훈민정음. 2002년 10월 02일 09시 07분. read: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