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백제의 멸망 그리고 백강구 전투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8. 14:09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東아시아 世界의 질서는

新羅의 이니셔티브로 형성되었다

 
663년 百濟부흥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강하구에 도착한 400척 3만의 왜군은 羅唐연합군에 대패하고 韓半島문제에서 손을 뗀다. 이후 東아시아 세계는 다소간의 우여곡절은 겪었지만, 결국 新羅의 構想대로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열어 나간다단 한 번의 決戰으로 兵力 3만을 상실한 倭國의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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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하구. 이곳이 663년 羅唐연합군과 백제 부흥군·왜국 원정군 연합이 白村江 전투를 벌였던 현장이다. 현재, 왼쪽이 전북 군산이고 오른쪽이 충남 장항.>

 

白村江 전투에 대한 기록은 「三國史記」·「舊唐書(구당서)」보다 「日本書紀(일본서기)」의 天智 2년(663) 條의 관련 記事가 가장 리얼하다. 그럴만도 하다. 전쟁을 밥 먹듯이 해 온 한반도나 중국대륙과 달리 일본열도에선 그런 대규모의 海戰, 그것도 국제전으로 치러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그런 참패를 경험한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倭國(왜국)에게 有史 이래 최악의 충격이며 비극이었다. 왜국은 百濟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전후 두 차례에 걸쳐 3만2000명 이상의 대군을 한반도에 밀어넣지만,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왜병 중에는 포로로 唐에 끌려가 노예로 전락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왜국의 인구가 500만 명이라고 추산했을 때 3만 명의 원정군이란 숫자는 참으로 傾國之兵(경국지병)이라고 할 수 있다. 다소 무리한 對比일는지 모르지만, 인구 1억3000명에 이른 오늘의 日本에 그것을 代入시킨다면 해외파견군 80여만 명을 단 한 번의 決戰으로 상실한 셈이 된다.
 
  다음은 「日本書紀」 天智 2년(663) 條에 기록된 「白村江의 전투」 상보이다.
 
  <秋 8월13일, 신라는 百濟王(백제왕)이 자기의 良將(양장: 福信)을 목 베어 죽인 것을 듣고 곧바로 百濟로 공격해 들어가 먼저 州柔(주유: 周留城)를 빼앗으려고 모의하였다. 이에 百濟王이 신라의 침공계획을 알고서 여러 장수들에게 『지금 들은 바에 의하면 大日本國의 구원군의 장군 廬原君臣(여원군신: 이오하라노 키미오미)이 용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오고 있다고 한다. 여러 장군들은 신라군의 공격에 대비하기를 바란다. 나는 스스로 白村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日本의 장군들을 접대하리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百濟王」은 義慈王(의자왕)의 아들로서 660년 百濟의 패망 당시 왜국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百濟부흥군의 군사지도자 福信의 요청에 의해 662년 5월 왜군 5000명의 호위를 받으며 옛 百濟땅으로 돌아와 王으로 옹립된 扶餘豊(부여풍)이다. 日本書紀엔 그의 이름이 「扶餘豊璋(부여풍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위의 인용문 중 「大日本」 또는 「日本」은 「倭國(왜국)」으로 표기되어야 정확하다. 왜냐하면 「日本」 이란 국호는 그로부터 7년 후인 670년부터 제정·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天皇」이란 칭호도 670년 이후에 사용된 日本 임금의 칭호이다. 다만 이 글에선 혼란을 피하기 위해 通例에 따라 670년 이전의 日本 임금에 대해서도 天皇號(천황호)를 사용하기로 한다.
 
 
  빅뉴스―福信의 誅殺
  
 

  
  福信이 扶餘豊에게 참살당했다―이건 빅 뉴스였다. 扶餘豊이 百濟부흥군의 정신적 지주였다면 福信은 최고의 군사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적국 지도부의 자기분열과 유혈숙청, 이런 千載一遇(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바보는 없다. 羅唐 양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표는 百濟부흥군의 사령탑인 周留城(주류성)이었다. 周留城만 떨어지면 百濟의 옛땅 곳곳에서 봉기하여 여러 城에 할거하고 있던 부흥군들이 제풀에 꺾일 것으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신라 文武王(문무왕)은 친히 金庾信(김유신)을 비롯한 28將과 대군을 이끌고 周留城으로 향발했다. 唐高宗(당고종)도 좌위장군 孫仁師(손인사)에게 大兵을 주어 옛 百濟땅으로 급파했다. 손인사의 부대는 웅진성에 주둔 중이던 劉仁願(유인원)의 부대와 합류했다.
 
  그렇다면 扶餘豊은 왜 이런 결정적 시기에 약간의 호위병만 거느리고 周留城을 빠져 나온 것일까?
 
  『왜국의 장군들을 마중하여, 향응을 베풀겠다』는 그의 말은 出城의 정당한 이유가 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가 나가면 周留城에 농성 중인 부흥군의 장수 및 병사들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또한 구원에 나선 왜군으로서도 扶餘豊이 없는 周留城의 전략적 가치는 낮아지게 마련이었다.
 
  이때 扶餘豊의 심경이 어떠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 다만 그의 沒전략적 행보가 白村江 전투의 승패를 가름한 분기점이 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다음은 이어지는 「日本書紀」의 기록이다.
 
  <8월17일, 신라군이 이르러 州柔城을 에워쌌다. 한편 당군의 여러 장수는 병선 170척을 이끌고 白村江에 진을 쳤다>
 
  周留城과 白村江이 어디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說이 분분하다. 충남의 홍성 說, 연기 說, 그리고 전북 부안 說 등이 제기되어 확정하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일단 학계의 多數說에 따라 周留城을 충남 서천군 한산면 건지산성으로 比定(비정)한다. 周留城을 지금의 건지산성이라고 한다면 관련 史書들의 지형 묘사로 보아 白村江(중국 측 기록에선 白江)은 지금의 금강하구일 수밖에 없다.
 
 
  敵 깔보고 戰功 서둘러
 
  羅唐연합군의 작전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신라 文武王과 唐將 손인사·劉仁願은 羅唐의 육군을 이끌고 周留城을 포위했다. 劉仁軌(유인궤)·杜爽(두상)이 이끄는 唐의 수군은 금강 하구에 포진했다. 수군의 임무는 周留城을 구원하러 오는 왜국 수군의 금강 진입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唐의 수군을 육상으로부터 援護(원호)하기 위해 신라의 기병부대가 금강하구 방면으로 달려갔다.
 
  <8월27일, 일본의 水軍 중 처음에 온 부대가 大唐의 水軍과 대전하였다. 일본이 이롭지 못해 물러났다. 唐 수군은 견고하게 陣形을 갖추었다>
 
  금강하구에 먼저 진출한 왜군의 병선이 후속군의 도착도 기다리지도 않고 唐의 수군을 먼저 공격했다는 것은 상대의 戰力을 깔보았고 그런 안일한 판단하에 戰功을 서둘렀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한 왜국 수군의 통제가 느슨했음을 엿보이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탐색전으로 일본 수군이 받은 데미지는 별로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첫날의 서전에서 패배한 일본 수군은 후속부대가 금강하구에 도착하여 戰力을 증강시키자 다시 敵을 얕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양국 수군의 戰力은 어떠했을까.
 
  「日本書紀」는 唐 수군의 전함수를 170척이라고 明記한 반면 왜군 함대의 규모는 생략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기록상의 失手일 수도 있겠지만, 倭軍이 唐軍보다 더 많은 兵船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참패했던 만큼 고의적 누락일 수도 있다.
 
  「三國史記」 新羅本紀엔 『왜국 수군 병선의 척수가 1000척에 이르러 白沙에 정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측 기록인 「舊唐書」 유인궤 傳에는 『왜국 수군의 함대 규모가 「400척」으로 되어 있다. 어느 기록이 정확한지는 속단할 수 없다. 삼국사기는 百濟부흥군을 지원했던 왜국 수군의 全함대, 舊唐書는 白村江 전투에 참여한 왜국 수군 함대의 규모만 한정하여 기록한 것인지도 모른다.
 
  8월28일, 드디어 이틀째 전투가 개시되었다. 唐 함대 170척 對 왜국 함대 400척의 결전이었다. 兵船의 수에서 보면 당시의 슈퍼파워인 唐 수군의 규모가 오히려 열세였다. 唐의 戰船이 큰 데 비해 왜국의 戰船은 작았는지는 모른다. 당시, 왜국의 造船기술은 매우 낮은 수준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바닷물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日本書紀」는 이날의 전투경과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8월28일, 일본의 여러 장군과 百濟의 王이 氣象(기상)을 보지 않고, 『우리가 先手를 쳐서 싸우면, 저쪽은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다시 日本은, 대오가 난잡한 中軍의 병졸을 이끌고, 陣을 굳건히 한 大唐의 군사를 나아가 쳤다. 大唐은 좌우에서 수군을 내어 협격하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官軍(관군:왜군)이 패전했다. 水中에 떨어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이물(뱃머리)과 고물(船尾)을 돌릴 수 없었다. 朴市田來津은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고, 이를 갈면서 수십 인을 죽인 다음 마침내 전사했다. 이때 백제왕 豊璋(풍장: 부여풍)은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高句麗로 도망갔다>
 
  그렇다면 중국 측 기록은 어떤가. 다음은 「舊唐書」 유인궤 傳에 묘사된 白江(白村江)에서의 전투장면이다.
 
  <仁軌는 왜국 수군과 백강의 하구에서 조우했다. 4번 싸워 4번 모두 이겼다. 왜국 수군의 배 400척을 불태웠다. 그 연기는 하늘을 덮고 바닷물은 (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왜국 수군은 궤멸하고 부여풍은 몸을 빼어 도주했다. 당·신라 연합군은 豊이 소지하던 보검을 손에 넣었다. 가짜 왕자 扶餘忠勝과 忠志 등은 士女 및 왜국군 병사, 耽羅國(탐라국: 지금의 제주도)의 使者를 이끌고 일제히 투항했다>
 
  전투 결과는 위의 인용문와 같이 왜국 수군의 참패였다. 왜군의 패인은 「氣象」을 무시한 先制공격으로 지목되었다.
 
  그렇다면 氣象이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氣象이라고 하면 潮流(조류)·海流(해류) 등을 포함한 天候(천후), 즉 하늘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諸(제)현상을 지칭한다. 날씨는 현대의 걸프전쟁에서도 실증되었듯이 승패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날씨가 전쟁의 승패를 가른 역사의 사례도 얼마든지 있다. 특히 帆船(범선)시대의 해전에서 氣象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로마제국의 地中海 지배권을 확립시킨 악티움 해전은 북동풍이 승패를 갈랐고, 麗蒙연합군의 제1·2차 日本 침공은 태풍으로 실패했고, 스페인의 無敵艦隊(무적함대)도 바람과 해류를 이용한 영국 함대에게 궤멸당했다. 임진왜란 때 元均(원균)은 기상을 무시하고 부산포로 진격하다 풍랑 때문에 실패한 다음 회군 중 칠천량에서 궤멸당했고, 李舜臣(이순신)은 명량해전 때 함선수 13척 對 300척의 절대열세에서도 潮流를 이용하여 왜군에 승리했다.
 
  최근, 일본의 학계 일부에서는 왜군의 패전 이유로 기록된 「氣象」은 단지 天候를 의미하는 것이라고만 단정할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 논리는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氣象의 의미를 해독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 軍이 先攻을 하면 적군은 물러난다」라고 하는, 보기에 따라서는 無謀(무모)한 各個(각개) 돌격작전을 채택 또는 채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명확히 해야 「氣象」의 정확한 의미를 해독할 수 있다. 개별적 돌파를 감행하더라도 敵의 全軍을 붕괴시킬 수 있다는 豫斷(예단)은 전날 전투 때처럼 왜국 수군의 지휘계통이 통합되어 있지 않았음을 엿보게 한다.
 
  白村江 전투 당시, 왜국 수군은 여러 연안·도서 지방 豪族(호족)들의 兵船들을 끌어모은 연합함대였다. 당연히 전투의지가 넘치는 지휘관이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지휘관도 있었을 터이다. 지휘계통이 확립되지 않았던 만큼 전투의 의지의 분열은 불가피한 결과인지 모른다.
 
  따라서 「氣象을 보지 않았다」는 것은 수군지휘관들의 분열된 견해를 사전에 전혀 조절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원래 「氣象」이라는 말에는 인간의 심리 및 감정, 즉 氣質·氣性·心氣라고 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왜국은 해군·造船(조선) 부문의 3류국이었다. 해전의 경험이라고는 소규모 함대를 동원하여 東北지방의 「에조」라는 미개민족을 정벌했던 정도였다.
 
  더구나 한반도 서해안에의 원정은 애당초 무리였다. 서해안의 밀물과 썰물은 12시간 주기(하루 두 번 높고 두 번 낮은)를 보이는 착잡한 해역이다. 간만의 차가 커서 어정거리다가는 배 밑바닥이 갯벌 위로 올라가 버린다. 이런 조건에서 왜국 수군은 전술적으로 통합적인 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국 수군의 분열은 언제, 무엇을 계기로 생긴 것일까. 白村江 전투 前後에서 그 해답을 구하려 한다면 百濟부흥군의 왕 扶餘豊이 周留城을 빠져나온 사실이 주목된다.
 
  왜국 수군은 금강 하류 연안에 위치한 周留城을 구원하기 위해 금강하구에 집결했다.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 한시라도 바삐 周留城을 구원해야 했다. 그 이유는 周留城이 부흥군의 핵심적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무모한 敵中 돌격을 감행했던 까닭
 
  그러나 扶餘豊은 오랜 농성생활에 권태를 느꼈을까, 아무튼 周留城을 이탈해 있었다. 扶餘豊이 없는 周留城에서 농성 중인 城兵의 전투의지는 감퇴될 수밖에 없다.
 
  왜국 수군도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그들에게 扶餘豊이 없는 周留城은 전략적 가치가 반감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왜국 수군은 唐의 수군에 의해 진로인 금강하구를 차단당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왜국 수군은 선택의 기로에 섰을 것이다. 그것은 唐 수군에 총공격을 걸어 그 일각을 돌파하여 周留城을 구원할 것인가, 아니면 唐 수군과의 결전을 회피하고 일시철퇴할 것인가, 두 가지 방안 중 하나를 채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통합 지휘체계가 미비했던 데다 敵前이었던 만큼 충분한 토론이나 정밀한 작전 수립은 어려웠을 터이다. 그렇다면 지휘관들의 의견은 통일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모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돌격론이 채용되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2일째 전투 직전, 후속부대가 來着함으로써 왜국 쪽이 함대의 수에서 당군보다 우세하다는 倭將들의 교만 때문이 아니었을까. 周留城이 포위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豊王과 왜장들은 조급했을 것이다. 周留城이 함락되기 전에 승부를 결정지어야 한다고 판단했을 터이다.
 
  왜국 수군은 戰船 400여 척에 병력 2만7000명의 규모였다. 白村江의 언덕 위에는 百濟부흥군의 기병이 진을 쳤다. 水戰보다 육상전투가 먼저 전개되었다. 왜국 수군을 원호하던 百濟부흥군의 기병부대와 신라의 기병부대가 격돌했다.
 
  양군의 정예를 투입한 기병전에서 신라군이 이겼다. 문무왕의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에는 『백제부흥군의 기병이 강가에서 왜선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신라의 정예 기병부대가 선봉이 되어 강가의 적 진지를 격파하니, 주류성이 힘을 잃고 마침내 항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장들은 함대를 唐의 함대로 돌진시켰다. 唐 수군의 陣形(진형)은 전날의 전투 후 더욱 강화되어 있었다. 唐 수군은 돌격해 오는 왜선을 좌우로부터 협격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唐 수군은 왜선에 불화살을 날렸다. 왜병들은 전투보다 진화작업에 매달렸지만, 맞바람을 맞은 倭船들은 곧 화염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것은 唐의 수군이 바람을 등지고 왜군에게 火攻을 벌였다는 뜻이다.
 
  왜국 수군으로서는 周留城으로 가려면 좁은 포인트인 금강하구를 불리한 風向 속에서 돌파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패전의 가장 큰 요인이었던 것 같다. 兵船에 붙이 붙자 왜병들은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唐兵들이 쏜 화살의 좋은 표적이 되든가, 익사하고 말았다. 이로써 白村江하구에서 4國의 육·해군이 뒤엉킨 국제전은 羅唐 연합군의 압승으로 막을 내렸다.
 
  <9월24일, 일본의 수군 및 좌평 余自信, 달솔 木素貴子, 谷那晉首, 憶禮福留, 아울러 國民들이 테레城에 이르렀다. 이튿날(25일), 배가 일본을 향해 출항했다>
 
  일본인 학자 요다(依田豊)씨는 『백제 멸망 후 그 유민이 와서 일본의 文運에 기여, 일대 새 모습을 나타냈음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어 『테레城에서 일본으로 출항한 인원은 잘 모르지만, 전후 합하여 전체 망명자 수는 5500명이 되며, 역사에서 누락된 사람들을 가산한다면 더 많았던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日本 역사지리 16권 6호).
 
 
  『조상님들의 묘소를 어이 또다시 와 볼 수 있겠느냐』
 
 
 
  왜국이 3년의 세월 동안 국력을 기울여 준비한 원정군은 白村江에서 물거품이 되었다. 白村江 전투의 패배는 사실상 百濟부흥군의 종말을 의미했다. 고구려로 달아난 扶餘豊의 그후 행적은 역사의 기록에서 누락되었다.
 
  비록 周留城이 羅唐연합군과 맞서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9월7일, 百濟의 州柔城이 마침내 唐에 항복하였다. 이때에 나라사람(國人)이 서로 『州柔가 항복하였다. 일을 어떻게 할 수가 없도다. 百濟라는 이름도 오늘로 끝났구나. 조상님의 묘소를 어이 또다시 와 볼 수 있겠는가. 오직 테레城에 가서 일본의 장군들을 만나, 중요한 일들을 상의하여 볼 수 있을 뿐이로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전부터 枕服岐城(침복기성)에 있는 처자들에게 나라를 떠날 것임을 알렸다. 11일, 무테로 떠났다. 13일 테레에 도착했다 >
 
  周留城 함락 후의 결말에 대해 이와나미出版 「일본고전문학대계의 日本書紀의 註解」는 침복기城, 테레城, 무테에 관하여 모두 『자세히 모르겠다』고 했다. 周留城의 위치가 뚜렷하지 못한 사정인 만큼 그곳들의 위치가 확실하지 않은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다만 「무테의 테레城」까지 가면 일본 장군과 軍船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했던 만큼 이곳은 일본 구원군의 안전한 중간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百濟부흥전쟁의 사령탑 周留城이 함락되었지만 아직도 任存城(임존성)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왜국의 구원군까지 참패한 상황에서 百濟의 부활은 불가능했다.
 
  잔존 백제부흥군 지도자들도 이런 절망적 상황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沙♥相如(사타상여)와 함께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여 저항하던 黑齒常之(흑치상지)도 이미 福信이 주살당하고 百濟-왜국 연합군마저 참패하자 戰意를 상실하고 있었다.
 
  이런 흑치상지에게 唐 고종이 직접 사신을 보내 회유했다. 대세를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흑치상지는 劉仁軌에게 나아가 항복했다. 唐將 유인궤는 흑치상지를 앞세워 遲受信(지수신)이 버티는 任存城(충남 예산군 大興面 봉수산)을 함락시켰다. 지수신 또한 고구려로 망명했다.
 
 
  百濟부흥군이 봉기할 수 있었던 배경
 
  이제는 百濟 패망 이후 白村江 패전 직전까지의 과정을 살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것은 百濟부흥운동이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교훈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660년 7월, 金庾信이 이끄는 신라군 5만 명과 蘇定方(소정방)이 이끄는 唐軍 13만 명이 百濟의 왕도(사비성)를 일거에 공략하여 義慈王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의자왕의 항복 후 唐은 百濟의 故土에 5개의 도독부를 설치했다. 648년 金春秋(후일의 태종무열왕)-唐太宗 李世民의 「비밀협약」을 어기고 百濟를 唐의 직할 식민지로 삼았던 것이다. 戰後 百濟는 우리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신라에겐 통한의 배신행위였다.
 
  그러나 百濟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었다. 羅唐연합군의 기습적이며 압도적인 병력집중으로 王都는 함락당하고 말았지만, 百濟의 지방군은 건재했다. 이것은 羅唐연합군이 百濟군의 主力을 포착 섬멸하기보다는 都城 함락을 우선시하는 전략을 채택했기 때문이었다.
 
  勝戰軍의 행포에 분노한 百濟 王家 출신의 福信, 西部 출신의 黑齒常之가 任存城에서 깃발을 들자 10여 일 사이에 3만여 명의 軍勢가 이루어졌다. 任存城과 인접한 고마노리성(홍성군 홍성읍 고모리)에서는 달솔 餘自進이 궐기했다.
 
  百濟부흥군의 응집력은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도 소정방의 唐軍은 본국으로 개선했다. 이때 義慈王을 비롯하여 태자 扶餘孝(부여효)·왕자 扶餘隆(부여융)과 관료 등 1만2000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그렇다면 百濟의 全영토가 평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소정방이 그렇게 철수를 서두른 까닭은 무엇일까. 고구려 공략을 위한 준비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정략적인 냄새도 풍긴다.
 
  소정방은 조국을 되찾겠다고 필사적으로 버티는 百濟부흥군과 싸워 보았자 珠算이 맞지 않다고 판단했을 터이다. 병력의 손실만 초래할 뿐이지 그 자신의 戰功이 드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심사가 아니었을까. 소모전이 불가피한 전투는 신라 쪽에 떠넘긴 셈이다.
 
  사비성-웅진성 지구에는 劉仁願의 당병 1만 명과 태종무열왕의 왕자 金仁泰의 7000 병력이 주둔했다.
 
  10월9일, 무열왕은 태자 金法敏(김법민)과 함께 군사들을 거느리고 부흥군의 거점 중 하나인 爾禮城(이례성: 충남 논산시 연산면)을 공략했다. 이례성은 아흐레만에 떨어졌다. 이례성 함락의 소식을 들은 부흥군의 城 20여 개가 대거 항복해 전세는 다시 신라군의 우세로 돌아섰다.
 
  10월30일, 무열왕은 사비성 남쪽에 목책을 친 百濟부흥군을 공격했다. 사비성의 鎭將(진장) 劉仁願도 부흥군을 협공했다. 1주일 만에 百濟부흥군은 2200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퇴각했다.
 
  사비성 공략에 실패한 福信은 흑치상지가 지키던 任存城으로 들어갔다. 부흥군의 諸將들은 낙담하지는 않았다. 왜국의 구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日本書紀」 濟明 6년(660)의 기록이다.
 
  <冬10월, 百濟의 좌평 鬼室福信(귀실복신)이 좌평 貴智(귀지)를 보내 唐兵 포로 100여 명을 바쳤다. …또 군사를 빌고 구원을 청하였다>
 
 
  齊明천황의 百濟 구원 決意
 
  福信은 한 달 전인 9월에도 沙彌覺宗(사미각종) 등을 왜국에 급파하여 구원군을 요청한 바 있다. 아스카(飛鳥)의 이타부키(板蓋)宮에서 貴智를 접견한 齊明(제명: 사이메이)천황은 구원군 파병의 뜻을 명확하게 표명했다.
 
  <兵을 빌고 구원을 청하는 것은 예전에 들었다. 위태로움을 돕고 끊어진 것을 잇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百濟國이 궁하여 나에게 온 것은, 本邦이 망하여 의지할 곳이 없고 호소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창을 베개로 하고 쓸개를 맛보고 있다. 꼭 구원해 줄 것을 멀리 와서 말하였다. 뜻을 빼앗기 어렵다. 장군에 명하여 여러 길로 나아갈 것이다. 구름처럼 만나고, 번개처럼 움직여, 같이 百濟 땅에 모여 그 원수를 참하고, 긴박한 고통을 덜어 주어라. 有司는 (사신에게) 넉넉히 주어서 禮로써 보내어라>
 
  우선, 齊明천황이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는 여성이며 각종 역사적 기록의 보유자이다.
 
  그녀는 두 번 결혼을 하고, 두 번 천황에 오르고, 그녀의 아들 둘이 천황이 된 매우 특이한 여성이다. 그녀는 원래 用命천황의 손자 高向王에게 출가해 漢왕자를 낳았지만, 그녀를 연모한 舒明(서명: 죠메이)천황과 再婚하여 황후가 되었다. 상당한 미모였던 것 같다.
 
  舒明천황과의 사이에 2남1녀를 낳았는데, 장남이 中大兄(중대형: 나카노오에·후일의 天智천황)이고 차남이 大海人(오아마: 후일의 天武천황), 딸은 후일의 孝德천황과 결혼하여 間人황후가 되었다. 642년 舒明천황이 재위 13년에 죽자 그녀는 皇極(황극: 고교쿠)천황으로 즉위했다.
 
  당시 왜국의 최고 실력자는 百濟系 도래인 가문 출신인 蘇我蝦夷(소아하이:소가 에미시)-入鹿(입록: 이루카) 父子였다. 특히 에미시는 643년 자신의 사촌인 古人大兄 왕자를 차기 천황으로 옹립하기 위해 聖德태자의 아들로서 유력한 황위계승자였던 山背大兄을 습격, 族滅(족멸)시켰다. 조정 내부에 蘇我씨에 대한 반감이 점증했다.
 
  舒明천황과 齊明 사이의 장남인 中大兄과 그의 동지 中臣鎌足(중신겸족: 나카도미노 가마다리)은 발호하는 蘇我씨를 타도하기로 모의했다. 외국사신들을 접견하던 645년 6월12일, 太極殿(태극전)에서 中大兄 황자 등은 이루카를 기습·암살했다. 中大兄은 그가 동원했던 무사가 결행을 머뭇거리자 스스로 창을 들고 달려들어 맨 먼저 이루카를 찌를 만큼 과감한 인물이었다.
 
 
  大化改新으로 중앙집권체제 추진
 
  大勢가 기울자 이루카의 아비 에미시도 자기 집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 이로써 蘇我씨의 宗家는 멸망했다. 이것을 일본史에서 「乙巳의 變」 또는 「太極殿의 變」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 직후 皇極천황은 물러났다. 퇴위의 이유는 蘇我家가 그녀의 친정 쪽이고, 그런 친정가를 그의 아들 中大兄이 族滅해 버린 데 대한 悔恨(회한) 때문이라고 하지만 확실한 내막은 알 수 없다. 만약 물러나지 않았다면 아들과 짜고 大臣을 살해했다는 세상의 의심을 받는 것을 꺼려했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皇極에 이어 그녀의 시동생 輕(경: 가루)황자가 즉위했는데, 그가 곧 孝德(효덕: 고토쿠)천황이다. 中大兄은 황태자가 되어 그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체제가 수립되었다. 이후 왜국의 체제 변화는 663년 白村江 전투 때 병력 및 함대의 동원과 관련되는 것인 만큼 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즉위 직후, 孝德은 중국의 본을 받아 처음으로 「大化」라는 연호를 제정했다. 대화 2년(646) 정월 초하루 孝德천황은 새로 천도한 難波(난파: 나니와)宮에서 4개조로 된 「改新의 詔(조)」를 내렸다.
 
  이것은 귀족·호족의 세력을 삭감하고 국왕의 권한을 확대하여 중앙집권국가를 만들기 위한 개혁조치였다. 이는 中大兄과 中臣鎌足이 주도한 것으로, 일본史에서는 「大化改新」이라고 한다. 그 핵심사항은 『지금으로부터 모든 토지와 인민은 국가 소유로서 천황이 지배한다』는 公地·公民의 원칙이었다.
 
  물론 이로써 왜국의 중앙집권화가 단번에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각 지역 호족들이 자의로 다스리던 단계를 지나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단일 정치체제가 다스리는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런 改新정치의 추진에 의한 중앙집권화의 강화로 훗날 百濟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한 대규모 해외파병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改新정치의 모순도 잇달아 빚어졌다.
 
  무엇보다 천황과 황태자가 대립했다. 실권을 장악한 中大兄은 653년 孝德천황의 반대를 무시, 백관을 이끌고 舊都 아스카로 돌아와버렸다. 孝德천황은 외톨이로 難波(나니와: 지금의 오사카)에 남아 거기서 병사했다.
 
  655년 1월, 孝德천황에 이어 즉위한 인물은 뜻밖에도 齊明천황이었다. 그녀는 645년 「太極殿의 변」 직후에 퇴위했던 皇極천황이었다. 이같은 重祚(중조: 한 사람의 두 차례 등극)는 일본사상 唯一無二(유일무이)한 사례이다. 그녀가 다시 즉위하자 백제 義慈王은 150명에 달하는 대규모 사절을 보내 이를 축하했다.
 
  어떻든 百濟 구원에 대한 齊明천황의 열성은 대단했다. 그녀는 12월에 직접 難波(나니와)宮으로 행차했다. 이어 女帝는 세토 內海를 통해 南下하면서 여러 연안지역에 들러 원정에 참가할 병력을 모았고, 규슈의 筑紫(쓰쿠시)에 도착한 이후에는 병사·무기 등을 직접 점검했다. 또 駿河國(준하국: 자금의 시즈오카 지방)에 대해선 軍船 건조를 명했다.
 
  軍船 건조가 거의 마무리된 661년 5월, 齊明은 규슈의 朝倉(조창: 아사쿠라)宮으로 행차했다. 百濟구원군을 진두지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두 달 후인 661년 7월, 百濟 원정군의 출발을 눈앞에 두고 갑자기 사망했다. 그녀의 나이 68세였다.
 
  661년 정초가 되면서 百濟부흥군의 세력은 더욱 불어나 웅진도독부가 설치된 공주와 옛 王都 부여를 계속 압박했다. 唐將 劉仁願이 서라벌에 急使를 날리자 신라는 구원군을 급파했다. 3월5일 이찬 품일의 부대가 豆陵山城(두릉산성)의 남쪽 기슭에 진을 치려 하다가 百濟부흥군의 급습을 받고 참패했다. 두릉산성은 지금의 충남 정산면 백곡리 계봉산이다.
 
  3월12일, 무열왕의 제3왕자 文旺(문왕), 대아찬 良圖(양도)의 후속부대가 달려가 두릉산성을 36일 동안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때 신라의 병참부대가 百濟부흥군의 습격을 받아 막대한 군수품을 탈취당했다.
 
 
  「神武」로 찬양받은 福信
 
  두릉산성의 승리 후 福信의 부흥군은 지금의 대전 부근까지 진출하여 서라벌-웅진 간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무열왕은 몸소 百濟부흥군을 진압하고 웅진성의 포위를 풀어야 했다. 이때의 무리한 親征(친정)이 무열왕의 건강을 해친 것 같다.
 
  661년 6월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59세의 나이로 金馬渚(금마저: 지금의 전북 익산)에서 병사하고 태자 金法敏(文武王)이 7월에 왕위에 올랐다. 이때가 신라로선 위기였다. 신라까지 먹으려는 唐의 속셈은 이미 드러났고, 百濟부흥군의 저항, 그리고 왜국의 동향도 심상치 않았다.
 
  百濟부흥전쟁을 지도한 중심인물은 福信이었다. 그의 權謀는 「神武」로 찬양되었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그는 武王의 從子이다. 從子란 어머니 姉妹의 아들 혹은 형제의 아들, 즉 생질과 조카를 의미한다.
 
  「日本書紀」에는 福信을 「鬼室福信」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국립부여박물관 뜰안에 서 있는 唐將 劉仁願의 紀功碑(기공비)에도 「鬼室福信」이라고 새겨져 있다. 福信의 성씨가 鬼室인 만큼 扶餘씨인 百濟 왕가의 친족은 아니다. 따라서 武王의 맏아들인 의자왕과 이종사촌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福信은 왜국에 대해 구원군의 급파와 아울러 왜국에 체류 중인 義慈王의 아들 扶餘豊의 조속한 귀국을 요청했다. 齊明천황이 세상을 뜨자 황태자 中大兄이 素服(소복) 차림으로 稱制(칭제)를 했다. 칭제란 즉위하지 않고 정무를 보는 방식을 말한다.
 
  中大兄은 齊明천황의 시신을 규슈의 行宮(행궁)에서 수도 아스카로 운구하여 장례를 치른 다음 百濟 구원문제를 처리하기로 했다. 그러나 百濟부흥군의 다급한 구원 요청이 쇄도했다. 中大兄은 그 해(661) 8월, 大花下 阿曇(아담)과 小花下 河邊(하변) 등에게 일부 병력을 붙여 百濟로 급파했다.
 
  이어 이듬해(662) 5월 왜국에 체류 중이던 扶餘豊이 百濟로 귀국했다. 황태자 中大兄은 大錦中 阿曇比邏夫連 등이 병사 5000명과 막대한 군수품을 실은 병선 170척을 지휘, 귀국하는 扶餘豊을 호위하도록 했다. 扶餘豊이 귀국하자 福信은 절하며 그를 맞았다. 그 모습을 본 『(百濟)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다.
 
 
  扶餘豊과 일본귀족 여성의 政略결혼
 
  「日本書紀」에 보이는 豊璋(풍장: 扶餘豊)에 관한 기사는 약간의 혼란을 보이고 있다. 즉, 天智천황 즉위 前紀 9월 條에 따르면 豊璋은 661년 9월에 中大兄(天智천황) 황태자에 의해 百濟왕으로 「책봉」되고 狹井檳♥(협정빈랑)과 朴市田來津이 이끄는 병사 5000명에 호위되어 본국의 땅을 밟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글만으로는 부여풍이 織冠(직관: 19단계의 관위 중 제1위)을 받고 백제왕으로 책봉된 날과 병사 5000명을 이끌고 百濟로 건너간 것이 같은 날의 일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日本書紀」 天智 원년 5월 條에 의하면 부여풍이 阿曇比邏夫連(아담비라부련) 등에 호위되어 고국에 돌아간 것은 662년 5월에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이를 「日本書紀」의 편찬 착오로 돌릴 수는 없다. 이것은 扶餘豊이 661년 9월에 쓰쿠시까지 내려가 中大兄 황태자를 만나고 바다를 건너 귀국하려 했지만, 왜국의 국내 사정으로 대기하다가 662년 5월에 귀국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扶餘豊의 귀국에 앞서 왜국은 그에게 倭人 출신의 여자를 처로 맞게 했다. 신부는 神官인 多蔣敷(다장부)의 누이동생이었다. 이는 百濟왕이 된 扶餘豊과 왜국을 좀더 강하게 맺어 두려는 정략결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多씨의 여성이 扶餘豊의 처로 뽑혔던 것일까? 물론 그녀는 당시 소문난 미인이었겠지만, 미모의 여성이라면 그밖에도 많았을 터이다. 또한 扶餘豊을 왜국과 엮어 놓으려면 王族 출신 신부가 더 적합했을 터인데, 당시 大王家(天皇家)에는 扶餘豊과 짝을 지을 만한 적령의 여성이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여기서 잠시 백제·왜국 왕실 간의 혼인 사례를 좀 짚어보기로 한다.
 
  「日本書紀」에 의하면 百濟의 直支王(직지왕)이 여동생 新齊都媛(신제도원)을 應神(응신)천황에게 시집보낸 바 있다. 개로왕도 왕녀 池津媛(지진원)을 雄略(웅략)천황에게 시집 보냈는데, 그녀가 다른 남자와 몰래 정분을 트는 바람에 雄略이 대로하여 두 남녀를 불에 태워 죽이는 사건까지 빚어졌다.
 
  이 사건 이후 왜국 大王家의 혼인은 왕가 내부의 近親婚(근친혼)을 중심으로 하는, 극히 폐쇄적인 형태가 되었다. 그것은 大王(天皇)을 再생산하는 폐쇄적 혈연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다면 多씨 가문의 여성이 扶餘豊의 처로 선발된 이유는 무엇일까.
 
  多씨라고 하면 「古事記(고사기)」 편찬을 주도한 百濟系 도래인 安萬侶(안마려)가 유명한데, 大和(대화: 야마토)를 본거로 하는 在地호족 중 名家이다. 또한 多씨는 王家의 제사를 담당한다는 점에서 왕권과의 관계에 있어서 특별한 씨족이다.
 
  왜국의 大王家는 그 存立을 유지하기 위해 외국 왕가와의 혼인을 기피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多씨처럼 祭祀(제사)라고 하는 특수부문을 관장하여 大王家와 至近거리에 있는 名族 중에서 代役을 고를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多씨 출신의 그녀는 大王家의 王女에 準하는 존재로서 扶餘豊에게 시집을 온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이국땅에서 외국인 남편과 어떤 결혼생활을 했던 것일까, 또한 白村江의 전투 후에 어떤 운명에 처해졌던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그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扶餘豊을 王으로 세운 百濟부흥군은 다시 세력을 만회했다. 부흥군은 선제공격을 감행, 劉仁願이 지키고 있던 熊津城(웅진성: 지금의 공주)을 포위했다. 鎭將 劉仁願은 본국에 급보를 날려 구원군을 요청했다. 唐 고종은 劉仁軌(유인궤)에게 병력을 붙여 웅진성으로 급파했다.
 
  福信이 지휘하는 부흥군은 웅진성을 포위하는 한편 웅진 어귀에 큰 목책을 세워 유인궤의 증원군을 저지했다. 그러나 웅진성 안팎의 唐兵에게 협공을 받은 부흥군은 1만여 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런 패전에도 불구하고 百濟부흥군의 세력은 증강되고 있었다. 승려 출신으로 百濟 유민들에게 영향력이 강했던 道琛(도침)이 가세했기 때문이었다. 662년 7월, 百濟부흥군은 금강 동쪽으로 진출했다. 웅진도독부와 사비성의 통로를 차단하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 전략은 羅唐연합군의 반격을 받고 실패로 끝났다.
 
  이런 가운데 唐 고종은 百濟부흥군의 숨통을 끊기 위해 대규모의 원정군을 보내기로 결단했다. 「三國史記」는 이때 唐 고종이 손인사에게 준 병력이 40만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래도 「0」 하나가 더 붙은 誤記이거나 軍勢의 웅장함을 과시하기 위한 이른바 「號曰(호왈)」인지도 모른다. 그야 아무튼 唐의 증원군에는 義慈王의 아들 扶餘隆(부여융)도 종군했다. 이제 扶餘隆·扶餘豊 형제는 서로를 敵으로 삼아 맞겨룰 수밖에 없는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扶餘豊과 福信의 암투
 
  신라의 文武王도 휘하의 金庾信 등 28將을 거느리고 百濟부흥군 정벌에 올랐다. 이것은 신라가 동원 가능한 병력의 거의 대부분을 투입했다는 얘기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百濟부흥군의 지도부에서 고질적인 적전분열이 발생했다. 내분은 결국 상잠장군 福信이 영군장군 도침을 죽이기에 이르렀다. 이어 扶餘豊과 福信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扶餘豊은 왜국이 파견한 狹井檳♥과 朴市田來津에게 周留城을 버리고 남쪽 避城(피성: 전북 김제)으로 옮기는 문제를 상의했다. 두 왜장은 왜국의 집권자 中大兄의 의사를 扶餘豊에게 전달하는 통로역할을 하면서 호위역·감시역·자문역도 담당했던 것 같다. 두 倭將, 특히 朴市田來津은 강력하게 본거지 이동을 만류했다.
 
  부흥군의 본거지를 避城으로 옮기려 했던 것은 「식량의 확보」라는 점 때문이었다. 周留城은 방어에는 적합했지만, 농성이 장기간 계속될 경우 많은 병사 및 非전투원에게 배급할 식량의 확보가 곤란했다. 그러나 羅唐軍의 공세가 가중되던 시점이었던 만큼 본거지 이동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日本書紀」에 따르면 避城으로의 이동은 扶餘豊과 福信의 공동제안이었다. 적어도 이 단계까지 扶餘豊과 福信의 견해차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후의 전개상황을 살펴보면 근거지 이동을 처음 발의한 사람은 扶餘豊인 것으로 판단된다.
 
  20여 년의 왜국 체류 중 천황에게 불려가 자문역도 하는 등 상당한 우대를 받으면서 궁정생활에 익숙했던 扶餘豊으로서는 周留城이란 험한 山城에서의 陣中생활이 체질상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처음부터 周留城에 대한 느낌이 좋지 않았을 그는 山城생활이 6개월간 지속되자 넌더리가 났을 터였다.
 
  扶餘豊은 朴市田來津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避城으로의 이동을 강행했다. 그러나 겨우 2개월 만에 周留城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663년 2월. 「三國史記」에는 신라의 장군 欽純(흠순: 김유신의 동생)과 天存이 옛 百濟 땅에 진군하여 居列城(경남 거창)을 공격하여 참수 700여 급의 전과를 올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어 居勿(거물: 전북 장수)·沙平(사평: 충남 당진)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德安城(충남 논산 은진면)을 공격하여 참수 1700급을 거두었다고 한다. 「日本書紀」에도 이때 신라가 百濟 舊領(구령)의 남부에 대해 대규모의 공세를 벌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德安城이 있었던 충남 論山은 百濟의 舊都 사비성 동방에 위치, 이곳을 신라군에게 제압당하면 부흥군이 舊都 사비성을 탈환하기가 극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신라군에 의해 방어진지가 허약한 避城까지 습격을 받아 점령될 위험도 있었다.
 
  扶餘豊 등이 周留城으로 되돌아온 것은 「日本書紀」가 기록한 대로 신라군이 避城에 접근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扶餘豊 등의 결단은 군사적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것이 扶餘豊과 福信의 협조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한다.
 
 
  『썩은 개! 미친 종놈!』
 
  扶餘豊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비록 福信과 왜국의 힘으로 百濟왕으로 옹립되었다고 하지만, 자기는 王이라는 긍지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옛 百濟 왕실에 있어서 扶餘豊의 지위, 즉 왕위계승 자격은 낮았던 만큼 원래라면 그는 왕위를 바라볼 수 없었을 터이다.
 
  그 때문에 扶餘豊은 福信의 대수롭지 않는 언동에도 『그늘에 있던 너를 百濟王으로 끌어올린 것은 다름아닌 바로 나』라고 하는 無言의 위압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위압감은 扶餘豊으로선 왕으로서의 프라이드에 상처를 주었을 것 같다. 더구나 福信은 도침을 제멋대로 주살한 위험인물이었다.
 
  福信의 입장에서 보면 그에게는 百濟부흥운동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자부심이 있었을 터이다. 그런 그로선 百濟부흥운동의 중심이 마치 자기에게 있는 듯이 행세하는 扶餘豊을 대할 때마다 불쾌감을 느꼈을 것으로 추측된다.
 
  百濟부흥운동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면 두 사람 간의 적대의식은 표면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왜군 장군들의 맹반대를 누르고 근거지 이동을 감행했다가 되돌아온 사실이 두 사람의 관계를 빠르게 악화시켰다.
 
  避城으로의 본거지 이동은 扶餘豊의 발의와 福信이 동의 아래 倭將들의 반대를 억눌러 버리는 형태로 실행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참한 실패로 끝났던 만큼 전투지휘관으로서 강렬한 프라이드를 가졌던 福信으로서는 자신의 위신이 크게 훼손되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福信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그 과오와 책임을 扶餘豊에게 전가하고 싶은 심리상태가 되었는지 모른다. 한편 扶餘豊으로서도 福信의 언동에 내포된 자신에 대한 불신감·경멸감 등을 민감하게 느끼고 福信을 적대시했던 것 같다.
 
  扶餘豊의 福信에 대한 감정은 그가 石城(석성: 충남 부여군 석성면)에서 고구려에 使者로 다녀온 한 倭將을 만나, 그에게 「福信의 전횡」을 성토한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드디어 福信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이런 낌새를 눈치챈 福信도 扶餘豊을 주살하기로 결심했다. 百濟를 멸망에 이르게 한 지도부의 고질적 분열이 부흥군 내부에서 재연된 것이다. 福信은 扶餘豊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병을 칭탁하여 窟室(굴실)에 누웠다. 扶餘豊이 문병 올 것을 미리 타산했던 것이었다.
 
  扶餘豊은 짐짓 福信의 음모를 모르는 체하고 문병을 갔다. 그러나 先手를 친 것은 扶餘豊이었다. 扶餘豊의 심복들은 순식간에 福信을 덮쳐 福信의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다. 그러나 福信은 대내외적으로 名望(명망)이 높은 장수였다. 扶餘豊으로서도 福信을 베려면 요식절차가 필요했다. 그는 신하를 모아놓고 말했다.
 
  『福信의 죄는 여러 신하들이 잘 아는 바이다. 더 이상 논할 것은 없다. 福信을 참할 것인가, 아닌가만 논의하라』
 
  달솔 德執得(덕집득)이 입을 열었다.
 
  『이 악한 역적을 방면할 수 없습니다』
 
  福信은 덕집득의 얼굴에 침을 뱉고 매도했다.
 
  『썩은 개! 미친 종놈!』
 
  福信에 대한 扶餘豊의 증오심은 지독했다. 「日本書紀」에는 『목을 베고, 그 머리로 젓을 담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羅唐 7년전쟁의 승리
 
  白村江 전투의 이듬해인 664년 2월. 唐 고종의 명에 의해 신라 文武王과 唐에 의해 웅진도독으로 기용된 扶餘隆은 웅진의 就利山(취리산)에서 백마의 피를 입술에 바르며 회맹을 하고 양국의 평화를 맹세했다. 唐將 劉仁願이 여기에 입회했다. 신라로선 불만스럽고 억울했지만 對고구려戰을 위한 전열의 정비라는 차원에서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665년 10월. 고구려의 최고 실력자 淵蓋蘇文(연개소문)이 병사했다. 그에게 집중되어 있던 절대권력의 계승을 둘러싸고 그의 세 아들, 南生·南建·南産이 다투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羅唐 연합군은 침공을 개시, 드디어 고구려가 멸망했다. 668년 9월의 일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이번에는 한반도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신라와 唐이 충돌했다. 670년 4월에는 고구려의 유신들이 唐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8월, 신라는 이들을 지원하면서 고구려의 왕족 安勝(안승)을 報德國(보덕국: 小고구려국)의 왕으로 冊封(책봉)했다.
 
  671년 신라와 唐은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갔다. 신라는 買肖城(매소성) 전투와 해전 기벌포전투에서 당군을 격파했다. 특히 기벌포 전투는 7년전쟁 최후의 결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東아시아의 制海權(제해권)의 向方을 결정지었다. 이 해전에서 신라의 수군은 22전 22승을 거두었다. 그 직후 唐은 평양에 설치했던 식민통치기관인 安東도호부를 遼東(요동)으로 후퇴시켰다. 이로써 신라의 한반도 통일이 실현되었다.
 
 
  日本과 군사동맹을 맺어 新羅를 치려했던 唐
 
  白村江 전투 이듬해인 664년 5월, 唐의 百濟 鎭將(진장) 劉仁願은 朝散大夫 郭務悰(곽무종)을 쓰쿠시(筑紫)로 파견했다. 이어 665년 9월에는 沂州司馬(기주사마) 劉德高와 곽무종이 다시 쓰쿠시로 갔다. 이들은 다음달인 10월 京都로 올라갔다. 667년 11월에는 劉仁願의 使者 司馬法聰(사마법총)이 쓰쿠시를 또다시 방문했다. 이때까지 唐의 對왜국 외교는 고구려 공격을 위한 국제적 포위망 형성하는 데 그 목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唐의 對왜국 외교는 고구려(668년) 멸망 이후에도 계속된다. 671년 1월, 劉仁願의 使者 李守鎭(이수진)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6월, 일본국은 이수진에게 「요청한 바의 軍事」에 대해서 某種의 선언을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요청한 바의 軍事」라는 것은 唐使(당사)부터 日本에 대해서 무엇인가의 군사적 요청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수진은 7월에 귀국했다.
 
  그렇다면 당시의 東아시아 정세는 어떠했는가. 670년 신라는 말갈과 연합한 唐軍을 격파한 데 이어 百濟의 옛땅 80여 성을 장악했다. 羅唐 7년전쟁의 개전이었다. 또한 신라는 고구려 유민들의 反唐 군사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이에 발끈한 唐은 長安을 방문한 신라의 사신을 감금했는데, 良圖는 옥사하고 金庾信의 동생 欽純만 석방되었다. 왜국이 국호를 바꾼 것도 670년이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年號와 「天皇」의 號를 채택했다. 일본史에 있어서 天智天皇 9년이었다.
 
  이어 671년, 신라군은 부여 石城에서 唐軍을 대파했다. 이 시기에 唐使의 日本에 대한 「요청한 바의 軍事」라면 신라를 적국으로 삼는 唐과 일본의 군사동맹일 수밖에 없다. 唐은 신라와 연합하여 百濟와 고구려를 차례로 먹고 이제는 일본과 연합하여 신라를 먹으려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드디어 671년 11월, 곽무종이 대선단을 이끌고 일본에 이르렀다는 보고가 對馬島에서 일본조정으로 올라 왔다. 이것은 2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사절단이었다. 이 唐使는 白村江 등에서 포로가 된 왜국병 1400명을 인솔했다. 이들을 송환하는 것을 조건으로 왜국에 뭔가를 요구했다. 그것은 신라를 치기 위한 군사동맹이었을터이다.
 
  그러나 唐-日 군사동맹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그해 12월3일, 천지천황이 죽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술할 것이다.
 
 
  新羅의 외교적 이니셔티브
 
  신라의 어깨 너머로 전개되는 唐-일본(왜국) 간의 교류에 대해 신라는 결코 방관하지 않았다. 「日本書記」 天智 7년(668)조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金庾信의 對왜국 외교를 기록하고 있다.
 
  이 해 9월12일, 신라는 급찬 金東嚴(김동엄)을 파견하여 일본에 調物(조물)을 보냈다. 9월12일이라면 평양성이 함락되기 직전이었던 만큼 文武王은 친정 중이었다. 국왕 친정 중 王京을 지키며 김동엄의 왜국 파견을 주도한 인물은 金庾信이었을 것이다. 9월26일, 왜국의 內大臣 나카도미노 가마다리(中臣鎌足)는 表敬(표경) 사절로 승려 호오벤(法弁)과 신히쓰(秦筆)를 파견하여 金庾信에게 배 한 척 분의 回謝品(회사품)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마다리가 누구인가. 나카노오에-가마다리의 관계는 일본판 金春秋-金庾信 동맹이었다. 645년에 皇極천황의 왕자 나카노오에(中大兄)가 집권자 소가 이루카(蘇我入鹿)를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했을 때(太極殿의 정변) 가마다리는 나카노오에의 「오른팔」이었다. 나카노오에가 661년 齊明천황의 뒤를 이어 즉위한 天智천황이다.
 
  金庾信이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구사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신라와 왜국은 해묵은 원수관계였다. 신라는 고구려에 대한 최후의 병력을 대거 북상시키면서 왜국의 동향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왜국은 663년 白村江 전투에서 패배한 후 羅唐 양군의 보복전을 겁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金庾信의 메시지는 그런 왜국의 위기의식을 해소시키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물론 신라가 왜국과 국교를 튼 것은 對고구려 전쟁 기간 중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려는 의도뿐만은 아니었을 터이다.
 
  신라 수뇌부는 百濟가 멸망하던 660년 7월에 이미 對唐전쟁이 불가피한 것으로 예견하고 있었다. 文武王은 663년 白村江 전투 직전, 百濟부흥군을 지원했던 왜군 포로를 「인도주의적 명분」을 표방하면서 대거 석방시켜 준 일도 있다. 따라서 신라의 對왜국 외교는 향후 對唐 전쟁에 대비한 주변외교였다.
 
  天智천황은 이 해 11월 초순, 文武王에게 비단 50필, 풀솜(綿) 500근, 가죽 100장을 보냈다. 이런 교류는 신라-왜국 양국이 임금은 임금끼리, 重臣은 重臣끼리 격에 어울리는 인사를 차렸다는 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것은 唐의 팽창정책을 견제하는 신라-왜국 간의 관계개선이었다.
 
  참으로 『외교에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으며 오직 국가이익만 있을 뿐』이라는 명언을 실감케 하는 신라의 현란한 이니셔티브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신라는 東아시아 세계를 움직이는 핵심적 존재였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신라가 구상한 東아시아世界의 질서가 1200여 년이란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거의 그대로 관류하고 있는 것이다.
 
 
  新羅로부터 배워 日本 국가 완성
 
  白村江 전투의 패전을 계기로 왜국은 한반도에 대한 개입을 완전히 포기했다. 그 무렵 왜국은 대화개신(645) 이후에 발생한 갖가지 모순에다 패전까지 겹쳐 사회적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齊明천황의 뒤를 이어 稱制(즉위하지 않고 素服으로 통치)하던 나카노오에(中大兄)로서는 국내문제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은 신라와 唐의 정벌에 대비하여 해안의 방위에 주력했다. 664년 對馬島(대마도)·壹岐島(일기도) 筑紫(축자: 쓰쿠시)에 防人(방인: 수비병)·烽火(봉화)를 배치하고 大宰府(대재부)를 방어하기 위해 水城(미즈키)·大野城·키이城을 쌓았다. 또 667년에는 讚岐(사누키: 四國의 세토 內海 쪽)에 야시마城, 대마도에 金田城, 오사카에 高安城 등 百濟식 山城을 축조했다. 667년에는 수도를 아스카(飛鳥)에서 琵琶湖(비파호) 부근의 내륙 오쓰(大津)로 옮겼다. 이같은 遷都(천도)는 아스카에 뿌리를 내린 舊세력과의 연결을 끊고, 改新정치를 추진함과 아울러 신라와 唐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670년 국호를 일본, 종래의 왕호를 天皇으로 높였다. 天智천황은 百濟로부터 건너온 지식인, 관료, 귀족들을 우대하여 그들로부터 선진 문화·행정·기술 등을 배워 국내 개혁에 활용했다.
 
  671년, 天智천황이 죽고 그의 아들 오토모(大友: 明治維新 후 弘文천황으로 추존) 황자가 즉위했다. 그러나 이런 천황위 계승에 불만을 품은 삼촌 오아마(大海人) 황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오아마 쪽에는 신라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 붙었고, 오토모 쪽에는 百濟系 도래인들이 가담했다. 한반도 통일전쟁의 축소판이었던 셈이다. 2개월 동안 전개된 싸움에서 신라계 도래인들이 밀었던 오아마가 이겨 오토모를 자살로 몰아넣은 다음에 즉위하니 그가 天武천황이다. 이것이 일본사에서 말하는 「壬申의 亂」이다. 이런 정세의 日本으로서는 신라와 唐 사이에 전개된 7년전쟁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을 터이다.
 
  天武천황은 재위 14년간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2∼3년에 한 번씩 대규모 사절단을 신라에 보내 신라의 선진 제도와 문화를 배우게 했다.
 
  일본 역사학계의 거두인 이노우에 기요시(井上淸) 박사는 『天武천황이 신라로부터 통일국가 만들기에 대한 노하우를 열심히 배워 律令을 정비하고 古代일본 국가를 완성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天武천황의 재위 시기에 신라는 唐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670∼676년 사이에 벌어진 羅唐 전쟁 때 일본은 오히려 신라에 우호적이었다. 신라가 잘 버텨 주어야 일본이 안전하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天武 정권은 신라의 눈치를 보면서 唐과 通交를 중단했다가 신라-唐의 국교가 회복된 27년 후에야 遣唐使(견당사)를 파견했다.
 
  701년 天武천황을 이은 文武천황은 신라를 모델로 삼은 大寶律令(대보율령)을 완성했다. 律은 형법이며, 令은 행정법이다. 大寶律令의 제정에 의해 일본은 律令에 기초한 국가적 통일 지배체제를 完成했던 것이다.
 
  신라의 文武王은 羅唐 전쟁이 끝난 지 5년 후인 681년에 죽었는데, 유언에 따라 火葬(화장)되었다. 일본의 文武천황도 죽은 후 화장되었는데, 이것도 신라의 영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의 불화가 시작된 聖武朝 이후 일본 황실에서는 화장을 하지 않게 된다.
 
  한반도가 신라에 의해 통일됨으로써 唐도 宿敵 고구려의 위협을 제거하여 세계사에 있어서의 팍스-시니카를 이룩했다. 신라의 한반도 통일은 韓民族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평화 정착과 번영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동국大 李基東 교수는 지난 3월12일 「7세기 東아시아 국제정세와 신라의 삼국통일 전략」을 주제로 한 세미나의 주제강연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金春秋와 文武王 부자는 당시 東아시아 세계의 도도한 흐름을 역류시킬 만한 힘은 없었지만, 시대의 潮流를 自國에 유리하게 이용해 분열된 민족의 힘을 신라의 깃발 아래 결속시키고 장기간 평화를 누리게 한 功業은 찬양할 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接點(접점)인 한반도가 분열되어 있거나 약화되어 있을 때는 주변 강대국의 개입을 자초하여 國際戰場(국제전장)이 된다. 신라는 그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었다. 白村江 전투와 그에 이은 新羅의 삼국통일은 1300년 전에 이미 東아시아 世界의 기본틀을 마련, 그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




나당연합군에 패한뒤 정권 흔들… 백제와 운명 같이한 倭

주성하 기자 , 허문명 기자

입력 2015-07-02 03:00:00 수정 2015-07-02 04:22:00

 
[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11>백강(白江)전투

금강은 말없이… 탁 트인 금강(백강) 하구의 모습. 1300여 년 전 이곳에서는 신라-당 연합군과 백제-왜 연합군 총 22만여 명이 맞붙은 대전인 ‘백강 전투’가 벌어졌다. 동아시아 최대 해전으로 기록된 이 전투에서 숨진 병사들이 흘린 피로 바다가 핏빛으로 물들었을 정도였다고 문헌들은 기록하고 있다. 지원군으로 파병된 왜군 4만여 명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이후 정권의 존립 기반까지 흔들리게 된다. 동아일보DB

수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김용운 전 한양대 교수는 최근 펴낸 ‘풍수화(風水火)-원형사관(原型史觀)으로 본 한중일 갈등의 돌파구’라는 책에서 663년 백강(白江·지금의 금강 하구)에서 신라-당(唐) 연합군과 백제-왜(倭) 연합군이 맞붙은 ‘백강 전투’가 오늘날 한중일 관계의 틀을 만든 핵심적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소한 데다 우리 역사교과서에서조차 거의 언급되지 않는 전투를 그는 왜 이렇게까지 주목한 것일까. 여기에는 그럴 만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전투에 참여한 백제군(5000명) 왜군(4만2000명) 신라군(5만 명) 당군(13만 명)의 수만 해도 총 22만7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였다. 김현구 선생은 ‘백강 전투는 당시 가장 많은 국가와 군사가 참전해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동북아 최초의 대전이었다’고 평한다.


백제는 이 전투를 계기로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신라는 당과 더욱 가까워지고 왜와는 멀어진다. 한반도와 왜는 각자 통일국가를 형성하면서 독자적인 정치체제와 문화를 갖게 된다. 중국은 백강구(白江口), 일본은 백촌강(白村江) 전투로 기록하고 있는 백강 전투가 일어났던 1300여 년 전 한반도로 가 보자. 

○ 백제의 항전(抗戰)  
우리는 흔히 의자왕 하면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삼천궁녀에 둘러싸여 나라를 망친 망국의 대표 인물로 생각한다. 하지만 백제는 멸망 직전까지 융성했고 막강한 국력도 갖췄었다. 의자왕은 즉위 이듬해인 642년부터 659년까지 총 8차례 신라를 공격했고 대부분 승리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는 “백제를 치자”고 건의하는 김유신에게 진덕여왕이 “큰 나라를 침범했다가 위험하게 되면 어찌 하려는가”라고 말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만 해도 백제가 큰 나라, 신라는 작은 나라였던 것이다.  

655년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하자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신라 북부를 침공해 30여 개 성(城)을 무너뜨린다. 659년 4월 백제가 다시 신라를 침입해 2개 성을 함락하자 신라는 당에 구원을 요청한다. 당 소정방은 이듬해인 660년 6월 13만 대군을 이끌고 내려온다. 당군(唐軍)은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병사 5만 명과 함께 백제 도성인 사비성을 공격한다. 계백 장군이 5000여 병사와 황산벌에서 결사항전했지만 결국 사비성은 함락된다. 의자왕은 왕자와 장군 88명, 백성 1만2807명과 함께 당의 수도 장안으로 끌려간다.

이 사비성의 함락 시점을 백제의 멸망 연도로 보지만 사실 백제의 저항은 이후 3년이나 이어질 정도로 끈질겼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 ‘백제부흥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백제 유민들은 사비성 함락 4개월 만인 660년 10월 주류성(周留城·용어 설명)을 임시 왕성으로 삼는 한편 왜에 긴급지원군을 요청한다. 20년 넘게 왜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왕자 풍(豊)을 급거 귀국시켜 달라는 청도 함께였다. 

이후 왜가 보여준 대응은 마치 혈육을 대하는 듯 헌신적인 것이었다. 당시 왜왕은 사이메이 여왕(齊明天皇·재위 655∼661년)이었는데 여왕은 백제와 가까운 후쿠오카로 직접 가서 구원군을 준비시키고 오사카로 가서는 무기를 준비시킨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 동분서주하니 몸에 무리가 올 수밖에 없었다. 여왕은 661년 1월 6일 오사카 항을 출발해 여러 곳을 돌며 군사를 모으다 7월 24일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 혈맹이었던 백제와 왜 
출병은 아들 덴지 왕 대(代)에서 이뤄진다. 덴지(天智) 왕은 어머니의 시신을 당시의 수도였던 아스카로 옮긴 다음 11월에 상을 치르자마자 출병 준비를 한다. 그리고 2년 뒤인 663년 총 4만2000명이나 되는 왜군을 주류성으로 파견한다. 육로는 신라군이 지키고 있어 부득이 바다로 갈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 수군은 663년 8월 27일 주류성과 가까운 금강 하구(백강)에서 백제와 왜군 연합군을 맞닥뜨린다. 일본서기는 당시 왜군의 전투 과정을 이렇게 전한다.

“당나라 장군이 전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백강)에 진을 쳤다. 일본의 수군 중 먼저 온 군사들과 당 수군이 대전했다. 일본이 패해 물러났다. 당은 진을 굳게 해 지켰다.…다시 일본이 대오가 난잡한 병졸을 이끌고 진을 굳건히 한 당의 군사를 나아가 쳤다. 당은 좌우에서 군사를 내어 협격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관군(왜군)이 적에게 패했다. 물에 떨어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 없었다.”(김용운 책에서 재인용)

당시 동원된 왜 수군의 배는 무려 1000여 척에 이르렀다고 한다. 중국의 ‘구당서(舊唐書·당나라 왕조의 정사를 기록한 책)’는 ‘왜국 수군의 배 400척을 불태웠는데 그 연기가 하늘을 덮었고 바닷물이 왜군의 시체들로 핏빛이었다’고 적고 있다. 막대한 희생을 치른 덴지 왕은 정권 자체가 흔들린다. 그가 죽자 아들 고분(弘文) 왕이 이어받지만 곧 작은아버지 덴무(天武)에게 살해당한다. 덴무는 백강 전투를 치른 지 9년 만인 672년 왕위에 올랐다.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한국판 세조가 된 것이다. 일본 역사학계는 이를 ‘진신(壬申)의 난’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백제인들의 집단 이주 
나라를 잃은 백제인들은 너도 나도 배를 타고 일본 열도로 건너간다. 3년 전 사비성이 함락되었을 때에도 왜로 건너간 백제인이 많았지만 대거 집단 이주가 시작된 것은 백강 전투가 결정적 계기였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주장이다. 일본 고고학회 회장을 지낸 니시타니 다다시(西谷正) 규슈대 명예교수는 “백제 멸망과 유민의 대규모 이주는 일본 역사를 새롭게 쓰는 계기가 됐다”며 “백강 전투를 치른 7년 뒤인 670년에 왜는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바꾸고 새롭게 태어난다”고 전했다.

김용운 선생도 왜로 망명한 백제인 중에는 왕족은 물론이고 귀족들과 지식인이 많았는데 이들의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왜가 통일국가 수립에 박차를 가한다고 전한다. 그는 앞서 언급한 책에서 “전투 이후 한반도(통일신라)와 일본 열도가 각각 통일정권을 이룬 것까지는 공통적이었지만 신라는 당 눈치를 살피느라 군사력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은 개척과 확대의 노선을 택하게 돼 한일 민족 간의 원형은 크게 갈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반도와 열도라는 지형적 차이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국과 일본은 백강 전투 후 각각 율령제와 봉건제, 문(文)과 무(武), 중국으로의 질서 편입과 이탈이라는 정반대의 국가 체제로 갈라진다는 것이다. 

다시 그의 말이다.  

“백강 전투 후 한국인들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을 거의 잊었으나 일본인들의 집단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멸망한 백제에 대한 한과 복수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663년 일본서기는 ‘오늘로서 백제의 이름은 끝났다. 고향땅 곰나루(웅진)에 있는 조상의 묘를 언제 다시 찾을까’라는 비통한 글로 ‘백제의 한’을 기록하고 그 좌절감을 일본신국론으로 조작해 억지스러운 우월의식으로 전환한다. 이는 조선과 중국(신라와 당) 땅을 뺏어야 한다는 정한론으로 이어진다.” 

백강은 오늘날 금강이 서해와 만나는 군산 앞바다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 주변은 가을이 되면 은빛 갈대밭이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국과 일본 고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던 주변에 표지판이라도 하나 세워 한일 관계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는 장소로 만든다면 이것이야말로 미래의 신(新)한일관계를 만드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주류성 ::
백제의 마지막 거점. 위치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지금의 충남 서천군 한산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지만 충남 청양군 정산이라는 주장, 전북 부안군 위금산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허문명 angelhuh@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 다자이후=주성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