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18명 만이 대위업…이 가운데 한국인이 3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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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히말라야 8000m급 14개 봉우리를 모두 정복한 사람은 18명이 전부다.
처음으로 14좌 완등에 성공한 이는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 1986년 로체 등정을 마지막으로 대업을 완성할 때까지 17년간 히말라야 골짜기를 누볐다.
그 후 2008년까지 22년간 14명이 이 위대한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지난해 앤드류 록(호주) 등 네 명이 속속 죽음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들 중 10명은 무산소 등정이라는 점에서 또 차원을 달리한다.
완등자 18명을 국가별로 살펴보면 한국과 이탈리아가 3명, 폴란드와 스페인이 2명이고 스위스, 멕시코, 미국, 에콰도르, 카자흐스탄, 독일, 핀란드, 호주가 1명씩이다. 대한국인의 위대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이 그 자랑스러운 주인공이다. 엄홍길이 2000년 7월 31일 K2를 정복하면서 아시아 최초, 인류 8번째로 14좌 완등에 성공했다. 이듬해 박영석이 14좌를 발아래 뒀고, 2003년 한왕용이 11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그것도 모자라 엄홍길은 얄룽캉(8505m)과 로체샤르(8400m) 등 독립 봉우리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8000m급 위성 봉우리까지 밟아 사상 첫 '16좌 완등'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93년 아시아 최초의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을 시작으로 세계 최단기간(8년 2개월) 14좌 완등, 세계 최초 1년간 8000m급 6개봉 등정 등의 대기록들을 수립한 박영석은 2004년 무보급 세계 최단기간 남극점 도달(44일)에 이어 2005년 북극점을 밟으며 인류 최초의 산악 그랜드슬램(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 등정, 지구 3극점 정복)을 달성했다. 게다가 작년에는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코리안루트를 개척하는 쾌거도 올렸다.
엄홍길의 14좌는 지옥의 여정이었다. 85년 에베레스트에 처음 도전했다가 실패했고, 이듬해 재도전에서도 고배를 마셨다. 순탄치 않은 출발이었다. 그러나 88년 9월 26일 마침내 정상을 밟으며 14좌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5년간 벽등반에 몰두하다가 93년에 다시 14좌로 방향을 틀었고, 초오유와 시샤팡마 정복으로 속도를 내 97년까지 9개 봉우리를 넘어섰다. 그 과정에서 유독 진을 뺀 봉우리가 현재 오은선이 오르고 있는 8091m의 안나푸르나였다. 1950년 프랑스의 모리스 엘조그와 루이 라슈날에 의해 인류 최초로 정복된 8000m급 봉우리지만, 20년이 지난 1970년에야 두 번째 등정이 이뤄졌을 만큼 까다로운 산이기도 했다.
엄홍길은 에베레스트에 오르자마자 안나푸르나를 다음 목표로 잡았다. 그러나 89년 첫 도전과 96년 두 번째 도전에서 거푸 기상악화로 물러났고, 97년 봄에는 셰르파 나티가 크레바스에 빠져 사망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98년 봄에는 등반 도중 추락하는 대원을 구하려다 정강이뼈가 세 동강 나는 중상을 입었고, 다섯 번째 도전에 나선 99년에야 간신히 정상을 밟을 수 있었다.
그의 14좌 완등에는 셰르파 4명, 대원 3명, 기자 1명 등 총 8명이 희생이 따랐다는 점에서 가슴 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박영석의 14좌는 단기간에 완성됐다. 초인의 체력을 앞세운 몰아치기 성향이 강했다.
93년 에베레스트를 오른 후 3년의 공백이 생겼지만, 96년 안나푸르나 등정을 시작으로 무섭게 가속도가 붙었다. 97년 다울라기리, 가셔브룸1, 가셔브룸2, 초오유 등 4개 봉우리를 정복했고, 이후 매년 2~3개씩 넘어선 끝에 2001년 7월 22일 K2 정복으로 14좌 행군을 마감했다.
한왕용은 94년 초오유 정복을 시작으로 때로는 엄홍길과, 때로는 박영석과 호흡을 맞추며 봉우리 하나씩을 취한 끝에 10년 만에 목표를 달성했다.
한국 여성의 히말라야 도전은 80년대 들어서야 본격화됐고, 84년 김영자가 안나푸르나에 오르면서 8000m급 고봉 등반의 길을 열었다. 최고봉 에베레스트는 93년 대한산악연맹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지현옥 김순주 최오순 대원에 의해 처음으로 정복됐다.
지구에서 가장 높은 8848m의 에베레스트는 1921년 영국 산악인들에 의해 첫 도전을 받았으나 32년이 흐른 1953년 5월 29일에야 존 헌터가 이끄는 영국원정대의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에게 처음으로 정상을 내줬다. 한국은 1977년 대한산악연맹 원정대(김영도 대장)의 고상돈 대원이 남동릉을 통해 정상을 밟아 세계 여덟 번째 등정국으로 등록됐다. 그러나 히말라야 원정 초창기인 60년대 초부터 10여년 간은 고난의 연속이었고, 대원과 셰르파 15명이 한꺼번에 눈사태로 죽음을 맞는 최악의 사고도 겪었다.
그 후 허영호가 87년 국내 처음으로 동절기 등정에 성공했고, 93년에는 북릉~남동릉 횡단 등반을 하기도 했다. 박영석은 93년 무산소 등정의 쾌거를 올렸고, 박정헌은 95년 국내 처음으로 남서벽을 통해 올랐다.
그 중간 중간에도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90년 함상헌 대원이 남봉에서 추락사했고, 2008년 박영석 대장과 함께 남서벽에 신루트를 개척하던 오희준 이현조 대원은 눈사태로 추락사했다.
< 최재성 기자>
히말라야 14좌 도전사...한국인 4명 포함 완등자 세계 총 1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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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히말라야 8000m급 14개 봉우리를 모두 정복한 사람은 오은선을 포함한 19명이 전부다. 처음으로 14좌 완등에 성공한 이는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 1986년 로체 등정을 마지막으로 대업을 완성할 때까지 17년간 히말라야 골짜기를 누볐다.
그 후 2008년 이반 바예호(에콰도르)가 성공할 때까지 22년간 14명이 이 위대한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지난해 데니스 우루브코(카자흐스탄) 등 네 명이 속속 죽음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들 중 10명은 무산소 등정이라는 점에서 또 차원을 달리한다. 완등자 19명을 국가별로 살펴보면 한국이 4명, 이탈리아가 3명, 폴란드와 스페인이 2명이고 스위스, 멕시코, 미국, 에콰도르, 카자흐스탄, 독일, 핀란드, 호주가 1명씩이다. 대한국인의 위대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이 그 자랑스러운 주인공이다. 엄홍길이 2000년 7월 31일 K2를 정복하면서 아시아 최초, 인류 8번째로 14좌 완등에 성공했다. 이듬해 박영석이 14좌를 발아래 뒀고, 2003년 한왕용이 11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그것도 모자라 엄홍길은 얄룽캉(8505m)과 로체샤르(8400m) 등 독립 봉우리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8000m급 위성 봉우리까지 밟아 사상 첫 '16좌 완등'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그의 14좌 완등에는 셰르파 4명, 대원 3명, 기자 1명 등 총 8명의 희생이 따랐다. 박영석의 14좌는 단기간에 완성됐다. 93년 에베레스트를 오른 후 3년의 공백이 생겼지만, 96년 안나푸르나 등정을 시작으로 무섭게 가속도가 붙었다. 97년 다울라기리, 가셔브룸1, 가셔브룸2, 초오유 등 4개 봉우리를 정복했고, 이후 매년 2~3개씩 넘어선 끝에 2001년 7월 22일 K2 정복으로 14좌 행군을 마감했다.
물론 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90년 함상헌 대원이 남봉에서 추락사했고, 2008년 박영석 대장과 함께 남서벽에 신루트를 개척하던 오희준 이현조 대원은 눈사태로 추락사했다.
< 최재성 기자 kkachi@sportschosun.com> |
- [유럽 트레킹] 몽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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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프스 최고봉에서 자연의 위대함에 빠져들다
클린마운틴 회원들 16일간의 몽블랑 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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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장비 점검이 있겠습니다.” 수년간 나와 함께 히말라야를 누비며 청소를 했던 최정예 대원들은 벽안의 아가씨들에게 무장해제를 당했다. 거의 20년 만에 받아보는 장비 점검. 그 옛날 좋아했던 영화 ‘셸부르의 우산’의 여주인공 주느비에브(까뜨린느 드뇌브)를 닮은 푸른 눈의 프랑스 가이드는 꽤나 친절했지만 엄격했다. 대원 중 두 명이 목이 짧은 등산화밖에 없다는 이유로 프랑스의 샤모니에서 새 등산화를 구입해야만 했다. 모두 발목까지 올라오는 등산화를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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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샤모니 보자 고개로 향하는 대원들. 몽블랑 노멀루트인 구테 산장으로 가는 길이다.
- “몽블랑 일주를 단순 트레킹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표고차 1,500m를 오르내려야 하고 빙하를 건너야 하기 때문에 목 긴 등산화는 필수예요. 빙하를 가로지를 수도 있고 도중에 눈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우리 15명 대원은 비 내리는 샤모니 계곡을 오르며 몽블랑 라운드 트레킹(Tour de Mont Blanc·TMB·트루 드 몽블랑)을 시작했다.
‘아…이래서 사람들이 알프스 알프스 하는구나.’
작년 히말라야 8,000m봉 클린마운틴 운동을 마칠 무렵 나는 미국 보스턴으로 날아가 미국의 대표적인 환경운동인 LNT(Leave No Trace·흔적 남기지 않기) 과정을 이수했고, LNT의 체계를 빌려 국내에서 클린마운틴 운동을 전개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배운 지식을 가지고 지난 2월부터 광교산, 모악산, 조령산, 오대산, 대둔산 등지에서 클린마운틴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몽블랑 일주를 하는 건 어떨까요? 시간도 보름 남짓이면 되고, 저는 유럽 알프스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거든요.”
클린마운틴 운동을 하며 지친 대원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제안을 했다. 그 동안 히말라야를 쏘다니며 불편한 먹거리와 잠자리에 고생이 많았는데, 몽블랑 일주는 멋진 경치와 맛있는 먹거리가 풍부하기 때문이었다. 클린마운틴 회원들은 찬성했고, 그것에 의기투합한 회원들과 함께 신발끈여행사(www.shoestring.kr)의 도움을 받아 지난 6월 20일 스위스 제네바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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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탈리아(몽블랑산군) 그랑드조라스 세느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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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 점검을 마치니 샤모니 계곡엔 구름이 낮게 깔려 있고 잔잔하게 빗발이 내렸다. 몽블랑이 한눈에 건너보이는 최고의 전망대인 브레방(Brevent)까지 걸어 올랐다. 이곳에서 우리는 몽블랑 산군의 대파노라마를 실컷 감상했다. 트레킹 도중 웬만한 능선에 오르면 대자연의 장관을 맘껏 감상할 수 있지만 처음 맞는 광경에 우리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내려오는 길에 잠시 벨 라샤 대피소(Refuge de Bel Lachat·2,136m)에 들렀다. 목조 건물로 30명 정도 수용하는 작은 산장인데 구간 중 유일하게 물을 보충할 수 있는 곳이다. 산장에서 내려와 한 시간 정도 걸으니 아스팔트 도로가 나왔고 그곳에 레 우시 로지로 가는 미니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TMB의 특징 중 하나는 이 미니버스다. 이 버스는 15명 기준으로 1인당 300만 원 정도 하는 TMB 패키지에 포함되는데 우리나라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 지원조 시스템과 비슷하다. 대원들을 위한 점심식사, 산행 후의 숙소 이동을 모두 도맡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벼운 당일 산행 장비와 식수만 챙겨 마음 놓고 산행을 할 수 있었다. 어찌나 시간을 잘 맞추는지 점심 먹을 장소에 항상 대기하고 있고,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다 보면 언제나 먼저 와 있었다.
둘째 날 아침 우리는 뻐근한 몸을 이끌고 그림 같은 알프스의 구릉을 걸었다. 가이드가 피곤하면 케이블카를 이용하자고 했지만 전날 장비 점검 등에 자존심이 상했던 터라 우리의 저력을 보여주기 위해 케이블카를 이용하지 않았다. 20여 년 전 프랑스 국립스키등산학교를 졸업한 남상익 대원은 케이블카를 이용해야 몽블랑을 더 잘 볼 수 있다고 했지만 우리는 걷는 게 더 좋았다. 꼴데보라에 도착하니 또 다른 절경이 펼쳐졌다.
‘아…, 사람들이 이래서 알프스 알프스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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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레킹 이틀째 히말라야 다리를 건너 레 콩타멩 봉쥬와로 향하는 트레킹단.
- 나는 지난 20여 년간 히말라야만 바라보며 60회 정도 찾았는데 아무리 히말라야가 좋다고 해도 역시 시야를 좀 넓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밥을 주로 먹지만 때로는 빵도 먹고, 회도 먹고 하는 것처럼 또 다른 인생의 뉘앙스를 즐길 수 있는 것 같다.
트리코트 고개(Col de Tricot·2,120m)로 가야 했지만 절경을 감상하느라 트리코트를 거치지 않는 지름길을 선택했다. 이윽고 도착한 레 콩타멩 몽쥬와(Les Contamines Montjoie·알프스 휴양과 리조트의 중심)에서 숙박했다. 이곳은 마을이라기보다는 꽤 규모가 큰 산악도시인데 시골 장터가 있어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마음 편히 마을길을 걸으며 상점 나들이를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와 다른 치즈 가게, 음료수 가게, 채소 가게 등 색다른 삶의 현장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다음날 레 콩타멩 몽쥬와에서 미니버스로 이동한 후 몽쥬아(Montjoie)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멀리 산 아래로 레 콩타멩 몽쥬와 마을을 한참이나 시야에서 버릴 수 없도록 일정한 고도와 평탄한 길을 따라가면서 건너편에 커다랗게 자리한 에귀 뒤 크로쉐(Aiguille de Croche)와 몽 졸리(Mont Joly·모두 콩타민 마을 앞에 있는 거대한 검은 흙산군)를 보는 재미로 걸음을 옮겼다. 이 지역은 특히 수림지대가 많아 순간순간 알프스의 시원함과 따뜻함을 동시에 느끼며 트레킹할 수 있었다.
클로디우 베르나르(Claudius Bernard)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길목을 따라 1,970m 높이의 트레 라 떼뜨 대피소(refuge de Tre^l a Te^te) 에 도착하니 점심을 가득 실은 미니버스가 대기 중이었다.
이번 트레킹에서는 모든 대원이 가져온 간식이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이유인즉 가이드들이 준비해주는 점심식사가 너무 훌륭했던 것이다. 그들이 준비해주는 빵과 과일, 햄, 치즈 그리고 생선조림 등은 그 맛은 물론이고 양도 충분했다. 준비된 음식 모두가 그 지역 농산물일 뿐만 아니라 100% 유기농으로 재배된 것들이었다.
점심 식사 후 웅장하기로 소문난 트레 라 떼뜨 빙하(Glacier de Tre^ la Te^te)를 보러 갔다. 마침 믹스등반을 하러 온 클라이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빙하에서 등반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니 훈련 환경이 좋은 이 지역 클라이머들이 부러웠다. 우리가 히말라야에 가기 위해 겨울 한철 설악산이나 한라산에서 훈련하는 것과 너무 비교되었다. 이 날 우리는 낭 보랑 산장(Chalet de Nant Borrand)에서 여장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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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레 계곡 건너로 거대한 몽블랑과 악마의 발톱이라 불리는 랑뒤제앙·그랑드조라스이 한줄기 능선으로 바라보인다. 이탈리아 몽드 라 삭스 능선.
- 3개국 국경과 2차 대전 당시 군초소도 거쳐
다음날 시설 좋은 발므(la Balme·1,706m) 산장을 거쳐 본옴므 고개(Col du Bonhomme·2,329m)까지 올랐다.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이곳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과거 로마가 세계를 제패할 때 이 길을 통해 프랑스를 침략했던 로만로드(Roman Road)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르막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노폭이 넓고 평탄한 길이었다.
식사를 하고 부드러운 암석판 사이를 지나 2,665m 높이의 푸르 고개(Col des Fours)를 지나 2,756m의 떼뜨 노르 드 푸르(Tete Nord des Fours)에서 알프스의 황홀한 풍광은 물론 몽블랑의 장엄한 옆모습을 볼 수 있었다. 김인식(76·전 서울시산악연맹 회장) 대원은 15년 전 회갑기념으로 이곳을 통해 몽블랑에 오른 적이 있었는데 감회가 새롭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 [유럽 트레킹] 몽블랑
- 알프스 최고봉에서 자연의 위대함에 빠져들다
클린마운틴 회원들 16일간의 몽블랑 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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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드 라 삭스 능선에서 바라본 그랑드조라스 남면.
- 어느덧 트레킹을 시작한 지 5일이 지났다. 우리 일행은 목초지에서 풀을 먹고 있는 한 무리의 당나귀가 앞으로 보이는 모떼 산장(Chalet ref. des Mottets)을 지나 표고차 600m를 오르며 2,516m 높이의 세뉴 고개(col de la Seigne)로 올랐다. 이곳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으로 고개에 서면 멀리 몽블랑이 겨우 보인다. 조그마한 경계비 하나가 국경임을 알려주었다. 우리나라는 같은 나라인데도 남북 사이에 간담이 매우 서늘한데 이곳은 다른 나라인데도 이렇게 쉽게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게 정말 부러웠다.
우리는 세뉴 고개에서 좌측으로 돌아 쌍둥이처럼 서 있는 라임스톤(화석) 피라미드를 거쳐 빙퇴석의 에스뗄레뜨(Estelette) 빙하 쪽으로 길을 잡았다. 이곳은 계곡과 고개를 함께 감시할 수 있는 천혜의 장소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이 사용하던 초소 건물 흔적이 남아 있고 건너편에는 대포진지와 철조망들이 아직도 남아 있어 색다른 느낌을 갖게 했다.
좌측으로 거대한 드 라 렉스 블랑슈(Glacier de la lex Blanche) 빙하와 그 뒤로 트레 라 떼뜨 침봉(Aig.du de Tre^ la Te^te)이 크게 솟아 있다. 우리는 엘리자베타 산장(Ref. Elisabetta Soldini)에서 그날의 여장을 풀었다. 이곳의 정식명칭은 ‘엘리자베타 솔디니’로 산에서 동료를 구하고 죽은 솔디니 여사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80명을 수용할 수 있고, 오래된 산장이지만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 등 유명 인사들이 방문할 정도로 유서가 깊은 곳이다.
다음날 아침 2,420m 높이의 비에이(Arp Vieille)로 향했다. 중간에 오른쪽으로 그랑드조라스(Grandes Jorasses·4,208m)가, 왼쪽에는 몽블랑(Mont Blanc·4,810m)이 그림같이 펼쳐졌다. 몽블랑은 브루이야르(Brouillard)와 프레니 빙하 그리고 이노미나타(Innominata)와 에귀 뒤 뻬뜨레(Aiguilles de Peuterey) 등 광범위한 알프스 지대를 아우르며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작은 쉐크루이 호수(lac Checroui)와 인공 스키장을 지나 쉐크루이 고개(Col checroui)에 있는 메종 비에이(Refuge Maison Vieille·‘낡은 집’이라는 뜻)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이날은 이탈리아의 대표적 음식인 파스타를 먹었다. 식사를 하면서 산장 주인이 아주 젊은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매력적인 외모와는 달리 이곳 TMB 산악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철인이란다.
프랑스 지역 TMB가 산세가 완만하고 부드러워 여성적이라면 이탈리아 쪽의 TMB는 아주 급격하고 웅장하며 남성적이라 할 수 있다. 주변 집구조만 보더라도 프랑스는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라면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지붕까지도 돌로 만들어져 있는 등 그 모양새가 사뭇 다르다. 음식도 마찬가지이다. 부드러운 빵과 유제품 위주였던 프랑스 지역과 달리 이곳은 일정 내내 파스타 코스 요리가 나와 와인과 곁들이는 재미가 쏠쏠했다. 여러 나라의 음식을 먹는 즐거움도 산행하면서 느끼는 감동 못지않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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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MB 마지막 숙소인 트렐레상에서 완증증을 받고 기념촬영한 클린마운틴 TMB 대원들.
- 다음날 우리는 그림 같은 숲이 우거진 베르토네 산장(Rifugio Bertonne·1,889m)을 지나 몽 드 라 삭스(Mont de la Saxe) 능선을 따라 해발고도 500m 이상을 오르며 떼뜨 베르나다(Tete Bernada·2,534m)로 향했다. 전체 TMB 일정 중 가장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구간이었다.
페레 계곡(Val Ferret)을 사이로 거대한 몽블랑(Mont Blanc·4,810m)과 악마의 발톱이라 불리는 당뒤제앙(Dent du Geant·거인의 이빨·4,013m), 그랑드조라스가 한눈에 들어왔다. 모두 바로 눈앞에 펼쳐진 절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몽블랑 트레킹이 가치가 있는 것은 바로 자연의 위대함 속에 사람이 빠져 있고, 마치 같이 걷는 것처럼 가까이에서 감동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감동에 젖어 10여 분 걸으니 숙소인 라 바쉐(La vachey·1,640m)가 강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피켈과 아이젠으로 유명한 그리벨 가문이 운영하는 로지라고 한다.
그리벨의 영혼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하룻밤을 보내고 우리는 아르누바(Arnuva)로 갔다. 여기서부터 그랑드조라스를 품에 안을 수 있는 엘레나 산장(Ref. Elena)을 지나 이탈리아와 스위스의 접경인 페레 큰고개(Grand col Ferret)에 도착했다. 이곳은 몽돌랑(Mont Dolent·3,823m)과 아름다운 프레 드 바 빙하(Glacier de pre de Bar)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이탈리아와 스위스의 국경으로 1931년에 세운 경계비가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임을 알리고 있다. 스위스 쪽으로 보면 오른쪽 멀리에 그랑 꽁벵(Grand Combin·4,314m)의 웅장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음날 페레계곡을 따라 형성된 스위스의 전통 가옥 마을을 보면서 그림 같은 호수로 유명한 샹뻬(Champex)로 이동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달력의 사진보다 훨씬 멋진 모습으로 알프스를 대표하는 곳이란다. 우리는 발걸음을 재촉해 아르뻬뜨 대피소(Rif. Arpette)에서 여장을 풀었다. 다음날은 론 계곡과 마르띠니(Martigny) 마을을 감상한 후 포르클라 고개(Col de Forclaz)를 거쳐 샹뻬 당바(Champex d'en Bas·1,359m) 근처의 전망 좋은 집 ‘아르뻬뜨(Arpette·1,277m)’ 찻집에서 멀리 론 계곡(Val Rhone)을 보면서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휴식을 취했다. 일정 내내 맛있는 커피와 와인, 치즈, 신선한 빵과 우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빵과 우유만으로 식사를 못 한다 하더라도 이곳의 빵은 느낌이 한국의 그것과는 사뭇 달라 생활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전망 좋은 보벵 산장(Rifuge Bovine·1,987m)에 도착, 스위스의 도시 마르띠니를 충분히 감상하고, 멀리 인터라켄 방향과 이탈리아 방향으로 뻗어난 산맥들도 볼 수 있었다. 힘겨운 언덕을 올라 포르끌라 고개(Col de la Forclaz) 아래에 있는 트리앙(Trient)에서 1박했다.
- TMB처럼 정신·문화적인 면 강조한 길 탄생하기를
다음날 트리앙에서 포클라르 고개를 지나 낭 누아르 계곡(Nant Noir)을 지나 에르바제르(Les Herbageres)를 넘어서면 시야가 크게 열린다. 멀리 2,131m의 발므 고개가 보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샤모니 계곡 상단으로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을 이루는 발므 고개가 있다. 또한 이곳은 알프스에서 가장 눈과 비가 많이 내리는 곳 중 하나다. 그래서 목장이 많다. 샤모니 계곡을 타고 오르는 구름이 이 고개를 넘으면서 눈과 비를 뿌리고 몸을 가볍게 한 후 이 국경 고개를 넘는 것.
오랜만에 프랑스 샤모니와 재회한 발므 고개에서 잠깐 휴식을 취한 후 뽀제뜨(Posettes) 산등성이를 따라 1,417m 높이의 트렐레샹(Trelechamp)으로 향했다. 트렐레샹 숙소에서 1박한 후 마지막 TMB 출발점인 몽떼 고개(Col de Montets)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빙하들과 아르장띠에르 빙하(Glacier d' Argentiere)와 메르 데 글라스(Mer de Glace), 드루(Drus), 에귀 베르뜨(Aiguille Verte) 등 몽블랑의 경이롭고 아름다운 풍광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쉐즈리 호수까지 뚜르 드 몽블랑 코스의 일부다. 플레제르에서 투어 일정을 마무리하고, 오후에 케이블카를 타고 샤모니로 귀환함으로써 우리의 일정을 마감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도 지리산이나 한라산을 중심으로 라운드 트레킹 붐이 일고 있다. 산 정상만을 바라보며 오르는 식의 산행이 아니라 산을 보고 즐기는 방법인 것이다. 우리나라도 단순 걷기만을 강조할 게 아니라 TMB처럼 가는 곳의 문화와 음식, 건축, 역사 등 문화 전반을 재구성하여 육체적인 면보다는 정신적인 면을 좀 더 강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 한왕용 에델바이스 홍보부장·클린마운틴 리더 사진 정명용 대문 대표
우리나라에서는 세번째, 세계에서는 열한번째 히말라야 8천미터 이상 14좌를 완등한
산악인 한왕용 (44, 에델바이스 홍보부장) , 그 과정에서 동료의 생명을 여러번 구한 그는
히말라야 휴머니스트로 불린다. 그래서일까 그의 원정대에서는 희생자가 한명도 없다.
2003년 브로드피크(8047m) 등정을 마지막으로 그의 기록은 끝이 났다.
다른 산악인들이 더 많은 기록에 도전할 때 그는 " 정상 너머의 세상을 위해 살지" 라고 결심하며
피켈과 로프를 내려놓았다. 대신 커다란 자루를 들고 자신이 밟았던 히말라야를 청소하는
클린마운틴 켐페인을 시작했다.
- 다시 산에 도전하고 싶지 않으세요 ?
" 히말라야 8000m이상 14좌를 완등한 뒤 두려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겁이 많은지도 모르죠. 그제야 제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것보다
저를 위해 희생한 가족을 위해 시간을 보내야겠다 싶었어요.
마음에 있는 산, 내게 편안함을 주는 산,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산이 있는데
더 높은 산을 아직도 찾아야 하나요 ?
그리고 1등 만이 계속 1등을 하는 건 아니다 싶어요.
다음 세대가 1등 할수 있게 자리를 내줘야지요 "
- 체력을 타고 나신거예요 ?
" 체력이나 기술은 다른 동료들 보다 떨어져요.
단지 고산 적응이 다른 사람보다 빠르고 회복도 빨라요.
사실 저는 정상에 오를 능력이 반밖에 없는데, 동료들이 자그만 힘을 십시일반
저한테 보태 줘서 정상에 갔어요. 그런데 희생된 동료가 한 명도 없었어요.
아주 운이 좋았죠. 저는 산에 다닐때 기업체 후원을 못 받았어요.
동료대원들과 백만원, 이백만원 걷어서 마음 편하게 갔기 때문에 사상자가 없었던 것 같아요.
후원을 받으면 정상 등반을 해서 그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부담이 있잖아요.
산은 늘 여기 있으니까 우리 마음만 변하지 않으면 또 올수 있지 않느냐.
그런 마음이다 보니 정상을 100m 남겨놓고도 하산할 수 있었어요. "
- 기업 후원을 안 받았으면 원정 때마다 힘드셨겠어요 ?
"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을 누군가에게 도와 달라는 건 염치없잖아요.
지리산 뱀사골 산장에서 3년 넘게 살았어요. 훈련도 함 겸 돈을 벌었죠.
지게로 50kg씩 물건을 져 나르고 3만원을 받았어요. 그돈으로 좋아하는 산도 가고,
장비도 사니 힘들지 않았죠. 저는 14좌를 스물한번째 도전 만에 성공했어요.
실패가 적은 편이죠. 제 뒷바라지하며 제일 많이 도와준 사람이 아내예요.
아내는 간호사로 네팔에서 의료 봉사를 하다가 귀국하려던 참에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까지
같이 등반했어요. 그 인연으로 결혼까지 했는데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싶어요. "
- 클린 마운틴 캠페인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어요 ?
" 2002년 브로드 피크 원정 때였어요. 일본 원정대가 깻잎 통조림, 마늘절임, 캔 김치 등을
먹고 있었어요. 한국 원정대가 버리고 간 것들인데 별식이 필요할 때까지 가져다 먹는데요.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했어요. 지난번 K2 원정 때 날씨가 좋지 않아 급히 철수하면서
내가 버린 것들이 아닐까. 산악인으로서 너무 부끄러웠어요. 그날 이후 당시 목표였던
8000m 14좌 등정을 모두 마친 뒤 내 인생 목표를 히말라야 청소하기로 다시 짰습니다.
1년에 봄 가을 두번 자원 봉사자를 모집해서 히말라야를 찾았어요.
경비는 자비 부담이라고 했는데도 대학생부터 70대 할아버지까지 많이 모였지요.
베이스 캠프 혹은 가장 마지막 캠프까지 올라가며 청소했는데 녹슨 캔, 신발, 가스통,
약 더미 등 쓰레기가 어마어마 하더군요 "
- 살면서 산에 감사한 일이 많으시겠어요 ?
" 정상을 향해 갈 때 내가 동료한테 배려를 많이 하면 할수록 거꾸로 내게 다 돌아오더라고요.
제일 앞서 길을 낼 때는 눈길에 무릎, 허벅지까지 빠져 10m만 가도 체력이 다 떨어져요.
뒷 사람이 계속 선두를 바꿔 주며 길을 내지요. 그때 몸 상태가 안 좋다고 제일 앞에
안 서려는 사람이 있어요. 또 로프, 텐트, 식량 같은 짐도 져야 하는데, 체력 떨어진다고 안져요.
그런데 결국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요. 7,400m정도에서 마지막으로 하룻밤 자고 정상에 가는데
꾀부린 사람은 고소 적응이 안 되는 거예요. 오히려 길을 내고 짐을 더 진 사람이 체력은
떨어지지만 움직인 만큼 고소 적응이 잘 돼서 정상까지 가요. 배려가 그걸 가능하게 한 거죠.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 좋은 생각 4월 호 중에서 >
내 힘으로 내가 벌어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멋진 사나이 한왕용 !
정상을 100m 앞두고도 하산할 줄 아는 텅빈 마음의 소유자 !
히말라야 14좌를 21번 만에 성공한 도전과 집념의 사나이 !
짐을 더 진 사람이 체력은 떨어지지만 고소 적응이 잘되는 것을 보며
세상에 공짜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 !
히말라야 뿐 만 아니라 국내 산 청소에 발 벗고 나선 그의 클린 마운틴 정신에
존경과 경의를 표하며, 저도 아들 놈과 동참하겠습니다.
내일모레 백두대간 가는데 빈병하나 쓰레기 한개라도 주워서 내려오겠습니다.
산 사나이 한왕용이 다른 사람보다 위대해 보이는 것은 내 힘으로 내가 벌어서
산도 다니고 가족을 돌볼줄 아는 생활인으로 조용하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대한만국 최초...세계 1등 타이틀리스트가 되어야 각광받는 요즘세상...
묵묵히 본인 목표 달성후 또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山사나이 "한왕용"....
엄홍길氏, 박영석氏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산악인이지만
나는 山사나이 한왕용氏가 1등, 2등 산악인들 보다 더 찐~하게 가까이 다가온다.
[Why] "올랐다" "못 올랐다" 저 아래 세상은 시끄러운데,
진실을 아는 山은 말이 없고…
입력 : 2010.09.04 03:03 / 수정 : 2010.09.04 13:15
등정 의혹도 첩첩산중
●'인증샷'이 없어서 - 1984년 안나푸르나 간 김영자 카메라 가진 셰르파가 추락사
●그 산이 아니었다 - 1988년 브로드피크 원정대 알고보니 다른 봉우리 올라
●다시 오르면 되지 - 로체 등정 의혹 시달린 박영석 4년 뒤 보란듯이 재등정 성공
대한산악연맹(회장 이인정)이 26일 오은선(44)씨의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을 부정하는 입장을 밝혔다. 연맹은 이날 오은선씨의 지난해 5월 칸첸중가(8586m) 등정 의혹과 관련된 회의를 열고 "자료를 심도 있게 검토한 결과 정상에 올랐다고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8월 27일 본지
한국이 처음으로 히말라야 원정에 나선 것은 1962년 다울라기리2봉(7751m) 원정이었다. 이후 수많은 등정이 시도되면서 원정 의혹 시비도 점점 늘어났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얘기다.
한국 최초로 등정 의혹을 받은 건, 1970년 추렌히말(7371m·최고봉 동봉)에 도전한 한국산악회 원정대였다. 이들은 4월 28일 최정상인 동봉 세계 첫 등정을 발표했으나 6개월 뒤 같은 산을 등반한 일본 산악인들이 '그렇게 험한 길로는 갈 수 없다'며 한국 팀의 등정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의혹은 1988년 중동(고교)산악회 원정대가 풀어줬다. 중동산악회는 정상을 등정하고 나서, 한국산악회가 오른 봉이 동봉 아래 무명봉일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을 내렸다.
1984년 안나푸르나(8091m)에서는 세계 산악계를 놀라게 한 등반이 이뤄졌다. 은벽산악회 원정대 김영자(여·당시 31세) 대원의 여성 최초, 겨울철 최초의 등반이었다. 그러나 김 대원은 하산길에 동행한 셰르파 4명 중 2명이 추락사하면서 그들의 배낭 속에 있던 카메라를 회수하지 못해 등정 사진을 내놓지 못했다. 이후 명확한 해명이나 항의 없이 시간을 넘겨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됐고, 3년 뒤인 1987년 2월 2일 폴란드팀의 예지 쿠쿠츠카가 정상에 올라 동계 첫 등정으로 공식기록됐다.
정상을 제대로 찾지 못해 일어난 등정시비도 있었다. 1988년 파키스탄의 브로드피크(8047m)에 도전한 악우회 원정대는 8월 20일 오후 2시 35분경 정상에 올라 한국 초등을 공포했다. 그러나 일본 팀이 이의를 제기했고, 그들이 올랐던 곳이 전위봉(8030m)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등정 대원의 폭로로 진실이 밝혀진 등반도 있었다. 1990년 봄 대구경북산악연맹팀의 초오유(8201m) 원정 당시 대원 두 명은 등정을 발표했으나 5년 뒤인 1995년 말 대원 중 한 명이 진실을 털어놓았다. 등정자들이 짙은 안갯속에서 오른 곳은 정상에서 약 1시간 못 미친 무명봉이었다.
1989년 한국 에베레스트 서릉 원정대의 성공은 여러 기록을 깨는 등반이었다. 이들은 에베레스트에서도 험하기로 이름난 서릉(西稜) 루트를 통해, 10월 23일 오후 2시 30분 정상을 밟고 다시 서릉을 따라 하산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진은 눈에 익은 에베레스트 정상이 아니었고, 루트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해 지금까지도 등정 의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91년 한국-홍콩 합동 낭가파르바트 원정도 당시 대장이 고소적응을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2차 공격에 나선 점, 굳이 야간등반을 택해 확실한 정상 사진을 만들지 않았다는 점 등의 이유로 의혹이 제기됐다.
2007년 에베레스트 실버원정에서도 등정시비가 일어났다. 당시 원정대는 대원 두 명이 정상을 밟았다고 발표했으나 그 1년 후 뒤, 대원 중 하나가 정상에서 한참 못 미친 지점에서 되돌아선 것으로 확인됐다.
유명 산악인들도 등정의혹에 휩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 최초로 8000m급 14개 거봉 완등자인 엄홍길은 1993년과 1994년 시샤팡마 주봉(8027m)과 중앙봉(8008m)을 올랐다고 발표했으나 두 차례 모두 중앙봉 등정으로만 인정됐다. 엄홍길은 2000년 봄, K2 원정을 앞두고 동반한 대원의 증언을 통해 앞선 등정 의혹을 풀려고 했으나 해외의 히말라야 관련 웹사이트에는 2001년 가을 재등정한 시샤팡마 등정을 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박영석도 로체(8516m)를 1997년과 2001년 두 차례 등반했다. 첫 번째 등반 당시, 네팔의 영웅 대접을 받는 가지 셰르파는 정상에서 무전기를 통해 네팔 국영라디오방송과 인터뷰를 하면서 등정을 발표했다. 가지는 "박영석도 함께 올라왔다" 했다. 그러나 당시 발가락 동상에 걸렸던 박영석은 약 50m 아래 지점에 있었고, 무전기를 통해 그 얘기를 듣고 그대로 하산했다. 이후 의혹에 시달린 박영석은 사실을 시인하고 2001년 봄 재등반에 나서 정상에 올라섰다.
등정 의혹이 극적으로 해소된 경우도 있다. 세계 두 번째로 14좌 완등에 성공한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는 마칼루 등정에 성공했으나 어떤 증거물도 내놓지 못해 의혹을 받았다. 이걸 풀어준 게 한국 산악인 허영호였다. 허영호는 1982년 마칼루 정상에 올라 눈이 녹으면서 모습을 드러낸 무당벌레 인형을 들고 하산했다. 그 인형은 쿠쿠츠카가 정상에 묻어두었던 증거물이었다.
등정을 주장하다 끝내 산악계를 떠나고 만 사람도 있다. 세계적인 등반가인 슬로베니아의 토모 체센은 히말라야에서 가장 험난한 거벽으로 꼽히는 로체 남벽 세계 초등을 발표했다가 각종 의혹을 받았고, 이에 대응하지 못했다. 이후 토모 체센은 히말라야 등반에서 모습을 감췄다.
히말라야 고봉 등정이 특히 시비에 휘말리는 것은 등반 루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한 채 등반에 나서거나, 셰르파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여기에 셰르파들의 거짓말, 후원사에 대한 부담이 거짓을 부르기도 한다. 성공만을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외국 산악계는 우리와 달리 일단 '등정 의혹'이란 딱지가 붙으면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기 전에는 딱지를 떼어주지 않는다. 국내에서 '국내 최초의 14좌 완등자'로 알려진 엄홍길씨의 경우, 외국 유명 히말라야 등반 웹사이트에는 대부분 엄씨(세계 9번째)보다 박영석(8번째)씨가 먼저인 것으로 기록됐다. 오은선이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최초의 14좌 여성 등정자'는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이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그래서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