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sr]그림,詩畵

조선시대 최고의 걸작품 / 단원 김홍도 풍속화 /혜원 신윤복

이름없는풀뿌리 2015. 9. 22. 15:24
조선시대 최고의 걸작품
 
 
 
 
국보 180호/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 산수화, 조선 헌종

 
 
국보 217호/ 금강전도金剛全圖, 산수화, 조선 영조, 호암미술관

 
 
국보 239호/ 송시열상, 조선 효종, 초상화,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40호/ 윤두서상尹斗緖像, 조선 숙종, 초상화

 
 
국보 249호/ 동궐도, 조선 순조, 고려대박물관/동아대박물관

 
 
국보 300호/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화, 조선 현종, 불화

 
 
보물 547-5호/ 김정희영정金正喜影幀, 조선 정조, 견본설채絹本設彩,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744호/ 정조대왕필국화도正祖大王筆菊花圖, 정조, 조선시대, 동국대학교

 
 
보물 782호/ 단원화첩檀園畵帖 중 산수도, 김홍도, 조선 정조, 호암미술관

 
 
명 칭 : 보물 782호/ 단원화첩檀園畵帖 중 산수 부분도-2첩帖

 
 
중요민속자료 17호/ 국사당의 무신도國師堂의巫神圖, 조선시대

 
 
보물 527호/ 단원풍속도첩 25폭檀園風俗圖帖二十五幅, 김홍도, 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527호/ 단원풍속도첩 25폭檀園風俗圖帖二十五幅, 김홍도, 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부채 너머 훔쳐보는 선비의 시선..김홍도가 끄집어낸 일상

박정규 입력 2020.05.17. 06:00
               
[서울=뉴시스] 노중 풍경.(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5.15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노중 풍경.(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5.15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박정규 기자 = 풍속화의 대가 단원(壇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의 그림 '노중풍경'에는 말을 탄 젊은 선비의 야릇한 시선이 담겨져 있다. 이 선비는 맞은편의 앳된 아낙을 부채 너머로 은근슬쩍 훔쳐보고 있고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아낙은 부끄러운 듯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이들 사이의 미묘한 심리와는 아랑곳없이 중년의 가장은 아이와 닭이 든 짐을 메고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한다.

 

이 같은 모습은 그가 나귀를 타고 다니면서 직접 본 조선의 풍정을 8폭 병풍에 담은 '행려풍속도병'(1778)에도 유사하게 담겨있다. 다만 섬세하게 산수와 인물을 그린 병풍 그림과는 달리 화첩 그림에서는 배경 없이 주요 장면만을 간결하게 묘사했다. 이처럼 길거리에서 부딪친 일행을 묘사한 '노중풍경'은 매우 드문 소재를 다룬 작품이며 김홍도의 눈썰미가 잘 드러나있는 그림이다. 김홍도는 마치 스냅사진을 찍듯 현장의 순간을 포착하면서 인물간의 심리를 놓치지 않았다.

[[서울=뉴시스] 행려풍속도병 중 노중 풍경.(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5.15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행려풍속도병 중 노중 풍경.(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5.15 photo@newsis.com

'활쏘기'에서도 인물 간의 흥미로운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침착한 표정의 교관은 활쏘는 인물의 자세를 교정해주고 있고 활시위를 당기는 이는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이들의 훈련과는 관계없이 오른편의 인물들은 화살과 활시위를 각각 점검하며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다.

[서울=뉴시스] 활쏘기.(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5.15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활쏘기.(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5.15 photo@newsis.com

김홍도는 도화서 화원으로 활약하면서 산수화, 화조화, 도석인물화 등 다양한 화목(畫目)의 그림을 제작했다. 그는 대부분의 장르에서 뛰어난 그림 실력을 보였으며 특히 서민의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풍속화로 널리 알려졌다. 스승인 강세황(姜世晃·1713∼1791)은 "김홍도는 사람들이 날마다 하는 수천 가지의 일을 옮겨 그리길 잘했으니, 한번 붓을 대면 사람들이 다들 손뼉을 치면서 신기하다고 외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서울=뉴시스] 씨름.(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5.15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씨름.(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5.15 photo@newsis.com

김홍도는 서민의 생업 현장이나 놀이, 휴식, 길거리의 모습 등 평범한 일상사를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냈다. 배경을 생략하고 주제에 집중한 구도를 사용했으며 간결하고 힘 있는 필선과 맑은 담채로 풍속 장면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지난 6일 재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이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을 전시한다. 단원풍속도첩은 김홍도의 대표작이지만 국내외 주요 전시 출품 요청이 끊이지 않는데다 작품의 보존 문제 때문에 한 번에 여러 점을 감상하기 어려웠다. 이번 전시에서는 '씨름', '무동', '논갈이', '활쏘기', '노상 풍경', '베짜기', '그림 감상' 등 7점의 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서울=뉴시스] 논갈이.(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5.15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논갈이.(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5.15 photo@newsis.com

이 가운데 서민들의 놀이문화를 그린 '씨름'과 '무동'은 명작으로 꼽힌다. 김홍도는 '씨름'에서 원형구도를 사용해 중앙에 씨름꾼을 그리고 주변에 구경꾼을 그려 넣었다. 바닥에 편안하게 앉아 관전하는 인물들의 배치와 저마다의 생생한 표정 덕분에 마치 씨름을 직접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무동'에서는 악사들의 연주에 맞춰 춤을 주는 어린 아이의 춤사위에 저절로 어깨가 들썩인다. '논갈이'에서는 두 명의 농부가 밝은 표정으로 겨우내 언 논바닥을 갈아엎는 모습에서 힘든 농사일 속에서도 묻어나는 활기를 느낄 수 있게 한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내년 5월까지 상설관 2층 서화실에서 감상할 수 있다. 1년간 두 차례의 교체전시를 통해 총 19점의 그림을 볼 수 있으며 단원풍속도첩의 매력을 정리한 영상도 제공된다. ☞공감언론 뉴시스 pjk76@newsis.com

 

 

[단독]단원 김홍도 큰도장 찍힌 그림, 마침내 발굴

뉴시스 | 신동립 | 입력 2016.02.05. 08:03  
 
 

서예가 위창(葦滄) 오세창(1864~1953)은 고서화 감식과 전각(篆刻)에서도 당대의 권위다. 위창이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친 서화가와 문인학자들의 날인(捺印)을 집대성한 것이 ‘근역인수(槿域印藪)’다. 이 책 내용 중 ‘김홍도 인장’편에는 근역인수에 수록된 인장들 모두를 압도하는 가로·세로 각 12㎝ 크기의 대형 인장이 실려 있다. ‘其人 姓金氏 名弘道 字士能 號丹邱 古加耶縣人也’(그 사람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홍도, 자는 사능, 호는 단구이며 옛 가야현 사람입니다)라고 새겨진 도장이다.

이 인장의 실물은 물론, 인장이 찍힌 작품도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일부 미술사학자는 김홍도(1745~1806?)의 본관인 김해의 옛 지명을 굳이 쓴 점에 주목했다. ‘김해 사람’이라고 표기해야 마땅한데 ‘옛 가야현 사람’이라고 했다. 김해보다는 가야라는 지명에 더 익숙했던 당시 중국이나 일본 등지로 보낸 작품에 단원이 일부러 사용한 인장일 개연성이 크다. 김홍도는 단원(檀園) 말고도 단구 등 5개의 호를 썼다. 간송미술관 연구위원과 호암미술관 학예연구원을 역임한 미술사가 고 오주석은 “압도하는 크기에 장중한 각법(刻法)을 갖춘 이 도서(인장)에는 성명과 자(字), 호(號), 본관까지 격식이 다 갖춰져 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글자 ‘야(也)’라는 어조사를 써서 ‘~입니다’라는 공손한 문체로 돼있다. 규모, 형식, 내용 어느 모로 보나 국왕에게 올리는 초대작(超大作)에 사용됐던 도서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되나, 이 도서에 찍힌 작품은 현재 한 점도 전하지 않는다. 또한 도서 자체의 소재 역시 알지 못한다”고 기록했다. 작품의 망실은 화가 김홍도의 비극이자 후손인 우리 모두의 비극이라며 매우 안타까워했다. 서울대박물관 진준현 학예연구관도 이 인장을 언급하면서 이 인장이 사용된 작품의 예는 없다고 밝혔다.

 

그런데, 가로 170·세로 130㎝ 화면 상단 중앙에 바로 이 인장을 찍은 그림이 거짓말처럼 남아있었다. 조선에서 청나라로 갔다가 19년 전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1997년 9월 베이징 구완청(古玩城) 개막식 행사로 열린 베이징·상하이·톈진과 32개 성시(省市)의 고미술 전시회에 문제의 그림이 나왔다. 지린성 자료관(檔案館)이 출품했다. 마침 베이징대에 유학 중이던 한국인의 노력으로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됐다. 지난해 이 그림을 유형문화재로 지정해달라고 문화재청에 신청했다는 소장자는 “최소 30억원의 가치가 있는 국보급”이라고 귀띔했다. 화가 황원철 명예교수(국립창원대 미술학)의 판단도 같다. 경남도립미술관장과 경상남도 문화재전문위원을 지낸 황 교수는 “김홍도다운, 참으로 절묘한 묘사력”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특히 “이 작품에서 좌측 하단의 노 젓는 사공이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입은 점으로 봐 비가 내리는 강가의 풍경을 운치있게 표현하고자 했는데, 멀리 있는 좌우측 봉우리가 보일 듯 말 듯 안개가 휘감고 있는 부분”을 주목했다. “중앙에는 기암괴석과 소나무, 늘어진 수양버들, 그리고 2층 누각이 안정감 있게 자리잡고 있는데 ‘소상야우’라는 제목으로 (중국 후난성) 소상강의 풍경을 그린 겸재 정선이나 김홍도의 화풍을 계승한 긍재 김득신 그리고 16세기에 그린 작가미상의 그림에서도 2층 누각이 항상 존재하며 풍광들도 이 작품과 유사하다. 이런 점으로 비춰 볼 때 이 작품도 소상강의 풍경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단원 김홍도 풍속화

 

무동-김홍도, 풍속화첩 지본담채 27×22.7 cm, 국립중앙박물관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들어있는 "무동"은 단원의 최고의 작품으로 손꼼고 있다. 이 작품의 '무동' 추무는 소년은, 화면구성, 필력, 풍속화적 성격, 음악적 요소 등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걸작이다.

 

김홍도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풍속화는 거의 대부분 그가 30대에 그린 것이다. 그의 풍속화는 그가 34세인 1778년 그린 8폭의 〈행려풍속도〉 병풍과 30대 중후반에 그린 25점의 〈풍속화첩〉(모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으로 전해지고 있다. 〈행려풍속도〉는 김홍도가 풍속화에 눈뜨고 관심을 가지게 된 초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행려풍속도〉병풍은 강세황이 각 폭마다 그림을 설명한 평을 써넣었고, 비단 위에 연한 담채와 수묵으로 섬세하게 농어촌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행려풍속도〉는 필력과 화면의 짜임새가 미숙한 대로 흑립을 쓴 선비와 관료, 머습과 농어부들의 생활상 등 일상 속에서 흔한 소재로 현장감 있는 배경처리와 함께 회화적으로 이끌어내려한 김홍도의 의욕이 배어있다.

〈행려풍속도〉보다 더 완성된 형태의 인물 소묘력이 보이는 작품으로 〈풍속화첩〉이 있다. 한 폭의 크기는 27.0X22.7cm이고 전체 25점으로 꾸며진 이 화첩은 정확한 연대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물들의 묘사기법과 필치로 볼 때 30대 후반 작품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풍속화첩〉는 배경을 생략하고 소묘풍에 약간의 담채를 가해 종이에 그린 것으로 본격적인 풍속 그림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풍속화 스케치북 형태이다. <출처 : 위키백과>

 

 

 

 

 

 

 

 

 

 

 

 

 

 

 

 

 

 

 

 

 

 

 

 

 

 

 

 

 

 

 

 

 

 

<단원 김홍도 풍속화>



출처: https://photopajang.tistory.com/69 [Photo PaJang]

 

 

 

 

 

 

혜원 신윤복 풍속화

 

<혜원 신윤복 풍속화>

 

신윤복(申潤福, 1758년 ~ ?)은 조선 후기의 관료이자 화가로서 산수화와 풍속화를 잘 그렸다. 또한 양반 관료들과 여성들의 이중성과 위선을 풍자한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화공 가문 출신으로 화원 신한평의 아들이며, 그 역시 도화서 화원으로 종삼품 서반 무관(武官)인 첨절제사를 지냈다. 본관은 고령, 자는 입부(笠父), 덕여(德如)이고, 본명은 가권(可權), 호는 혜원(蕙園)이다. 대표작은 미인도(美人圖)·단오도(端午圖) 등이 있다. 조선전기의 문신, 학자 신숙주의 후손이고, 일제 강점기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의 8대 방조가 된다

단원 김홍도, 긍재 김득신, 오원 장승업과 더불어 조선 4대 풍속화가로 손꼽힌다. 주로 풍속화를 그렸으며, 산수화와 영모화(翎毛畵, 새나 짐승을 그린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춘화 작품도 남아 있다. 신윤복의 풍속화 등은 소재 선정부터, 구성, 인물들의 표현 방법과 설채법 등에서 김홍도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신윤복은 남녀간의 정취와 낭만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섬세하고 유려한 필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즐겨 사용하여 그의 풍속화들은 매우 세련된 감각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인물화에 있어서는 사람의 머리카락 하나까지 세밀하게 그려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중국과 서양 상인을 통해 들어온 안료들을 이용하여 붉은 색, 파란 색, 노란 색 등 그림에 다양한 색채를 입히기도 했다. 다양한 색체의 컬러를 사용하던 첫 화가들 중의 한사람으로 기억된다.

시정 촌락의 풍속도 중에서도 기녀(妓女)·무속(巫俗)·주점의 색정적인 면을 많이 그린 풍속화가로서 현실 묘사에 치중하고 있다. 이는 유교주의 사회에 대한 예술 면에서의 항의였고, 인간주의의 표방이라는 평가도 있다.

신윤복의 풍속화들은 배경을 통해서 당시의 살림과 복식 등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등,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신윤복의 대부분의 작품들에는 짧은 찬문과 함께 관지와 도인이 곁들여 있지만, 한결같이 연대와 시기를 밝히고 있지 않아 그의 화풍의 변천 과정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의 작품 중 최후의 작품이 전하는 연대는 1813년으로, 다만 그가 이 시기까지 그림을 그렸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다.

 

<출처 : 위키백과>

 

 

 

 

 

 

 

 

 

 

 

 

 

 

 

 

 

 

 

 

 

 

 

 

 

 

 

 

 

 

 

 

 

 

 

 

 

 

 

 

 

 

 

 

 

 



출처: https://photopajang.tistory.com/entry/혜원-신윤복-풍속화?category=446199 [Photo Pa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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