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of the Stanza della Segnatura, 1510 - 1511, Oil on wood <The School of Athens, 1509, Fresco 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라파엘로는 많은 스케치를 준비하고 시행착오를 거쳤다. 암브로지아나 미술관에 보관된 최종 밑그림을 보면 그가 피렌체파의 전통을 충실히 따랐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심리 묘사와 미켈란젤로의 육체 표현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은 베드로 성당과 비슷한 학당에 54명의 인물이 표현되어 있으며 대부분 철학자·천문학자·수학자들이다. <The School of Athens [detail: 1], Plato and Aristotle> :::플라톤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형이상학의 수립자. 소크라테스만이 진정한 철학자라고 생각하였다. 영원불변의 개념인 이데아(idea)를 통해 존재의 근원을 밝히고자 했다. 그의 작품은 1편을 제외하고 모두가 논제를 둘러싼 철학 논의이므로 《대화편(對話篇)》이라 불린다. 아테네 출생. 명문(名門) 출신으로 젊었을 때는 정치를 지망하였으나, 소크라테스가 사형되는 것을 보고 정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인간 존재의 참뜻이 될 수 있는 것을 추구, philosophia(愛知:철학)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BC 385년경 아테네의 근교에, 영웅 아카데모스를 모신 신역(神域)에 학원 아카데메이아(Akademeia)를 개설하고 각지에서 청년들을 모아 연구와 교육생활에 전념하는 사이 80에 이르렀다. 그 동안 두 번이나 시칠리아섬을 방문하여 시라쿠사의 참주(僭主) 디오니시오스 2세를 교육, 이상정치를 실현시키고자 했으나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그의 철학의 방향을 잘 말해준다. :::아라스토텔레스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제자이다. 플라톤이 초감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존중한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까운, 감각되는 자연물을 존중하고 이를 지배하는 원인들의 인식을 구하는 현실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BC 384년 스타게이로스에서 출생하였다. 17세 때 아테네에 진출, 플라톤의 학원(아카데미아)에 들어가, 스승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렀다. 그 후 여러 곳에서 연구와 교수를 거쳐(이 동안에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교육), BC 335년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에서 직접 학원을 열었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강의노트이다. 스승 플라톤이 초감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존중한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까운, 감각되는 자연물을 존중하고 이를 지배하는 원인들의 인식을 구하는 현실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 두 철학자가 대립되었다는 생각은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철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출발하였고, 뒤에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데도 플라톤의 철학적 범주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소여(所與)에서 출발하는 경험주의와 궁극적인 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근원성, 지식의 전부분에 걸친 종합성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앞의 계단 한복판에 보라색의 망토를 깔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사람은 명예와 부귀를 천시했던 견유학파 디오게네스(Diogenes)이다. :::디오게네스 : BC 5세기 중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라고도 한다. 옛 이오니아 자연학을 계승하였다. 아낙시메네스의 공기설을 부활시켜 자연의 모든 변화는 공기의 농밀화와 희박화 또는 냉화와 난화에 있다 하였다. 아폴로니아 출생. 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라고도 한다. 옛 이오니아 자연학을 계승하여 아낙사고라스와 레우키포스의 사상을 보충한 절충주의자이다. 프리기아의 아폴로니아에서 아테네로 와서, 당시 유행하던 과학적 이론을 전개, 아리스토파네스 등으로부터 풍자를 받았다.
공기를 신이라 하여, 공기는 만물을 다스리는 힘을 가지고 인간을 비롯하여 온갖 생물에 따스한 생명력으로서, 동시에 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지성으로서 고루 미친다고 하였다. 그 밖에 감각이나 쾌고, 수면과 죽음 등도 공기와 관련시켜서 설명하였다. 그의 생리학적 이론은 의학사상 중요한 것이며, 저작으로는 현재 단편만이 남아서 전하는 《자연에 대하여》와 그 밖에 몇 가지가 있다. * 왼쪽 화면의 앞에서, 약간 대머리에 쭈그려 앉아 :::아낙사고라스 [Anaxagoras, BC 500?~BC 428] : 이오니아 클라조메네 출생. 아테네에서 활약하였으며 거기에서 페리클레스와 친교를 맺은 것이 후에 소송의 와중에 휩쓸리는 원인이 되었다. 처음으로 아테네에 철학을 이식하여 엘레아학파의 출현에 의한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위기를 구하려고 하였다. 생성·소멸이란 것을 부정하고, 만물은 처음부터 있었고, 그 혼합과 분리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만물의 종자(spermata)에서는 만물 속에 만물이 포함되었고, 다만 지성(nous)만이 순수하고 가장 정미한 것이며, 태고의 종자는 혼돈인 채 있었는데, 이 지성의 작용으로 회전운동이 일어나고, 그것이 확대되어 여러 가지로 갈라져 나온다고 하였다. 또한 지성은 만물에 질서를 주어 모두에 대하여 모든 지식을 가진다고 하였다. 이른바 이원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아낙시만드로스 [Anaximandros, BC 610~BC 546] : 고대 그리스 소아시아 밀레투스 출생. 탈레스의 제자이다. 산문으로 자연에 대하여 언급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는 만물의 근원이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무한의 것(apeiron)이며 이 신적으로 불멸하는 아페이론으로부터 먼저 따뜻한 것, 차가운 것 등 서로 성질이 대립되는 것으로 갈라진다. 그리고 이 대립하는 것의 경쟁에서 땅·물·불·바람이 생기고, 다시 별과 생물이 생기지만, 이것이 법도를 지키고 따라서 결국 경쟁의 죄를 보상하고 나서 다시 아페이론으로 돌아간다"고 풀이하였다. 또한 천구의 중심에는 지주가 없고, 정지해 있는 원통형의 지구 주위를 해·달·별이 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 밖에도 다방면에 걸친 과학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 왼쪽의 희색 옷을 입은 사람은 여성 수학자인 히파티아이고, 오른쪽의 상체를 비틀고 서 있는 사람은 파르메니데스 이다.
:::히파티아 [370?~415.3] : 알렉산드리아 출생.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천문학자이던 테온의 딸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에 대한 강의를 하였다가 이교의 선포자라 하여 그리스도교도에게 참살당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교가 된 키레네의 쉬네시오스는 그녀의 가장 저명한 제자이다. 스이다스에 몇 가지 그녀의 수학·천문학적 저술의 표제가 있으나 책은 모두가 잔존하지 않는다. :::파르메니데스 [BC 515?~BC 445?] : 엘레아 출생. 철학시 《자연에 대하여》가 약 160행 남아 있으며, 그 사상의 중심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립하는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만이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는 근본사상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의 성질을 논리적으로 연역하였다. 그것은 불생불멸이고, 불가분인 것이며, 불변부동의 것으로서 완결된 둥근 구처럼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존재하는 것’을 나타내는 사유, 즉 이성)만이 진리이며, 이에 반하여 다수 ·생성 ·소멸 ·변화를 믿게 하는 감각은 모두가 오류의 근원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 감각의 세계는 ‘존재하는 것(빛)’과 ‘존재하지 않는 것(어둠)’을 병치하며, 이 두 요소로부터 모든 것을 합성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존재와 비존재, 존재와 사유라는 철학의 중대문제를 시사하고, 후에 대두하는 존재론 및 인식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존재의 철학자라 불린다. * 사색의 즐거움에 깊이 잠겨 있는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미켈란젤로의 모습)가 대리석 탁자에 기댄 채 한 손으로 얼굴을 괴고 종이 위에 글자를 적는다.
:::헤라클레이토스 [Herakleitos, BC 540?~BC 480?] : 에페소스 출생. 에페소스 왕가 출신으로 가독상속을 싫어하여 자기 집도 아우에게 줄 정도로 고매한 지조을 지닌 그는 때로는 오만불손하기도 하여 당시의 에페소스 시민들은 물론, 호메로스나 피타고라스 등 시인·철학자들까지도 통렬하게 비방하였다. 그가 '만물은 유전한다'고 말한 것은, 우주에는 서로 상반하는 것의 다툼이 있고, 만물은 이와 같은 다툼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싸움은 만물의 아버지요 만물의 왕'이다. 그러나 그러한 다툼 중에서도 그는 그 속에 숨겨진 조화를 발견하였고, 그것을 '반발조화'라 하였다. 이것이 세계를 지배하는 로고스라 하였으며 그는 그러한 이법의 상징으로서 불을 내세웠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불은 전화하여 물이 되고, 물은 흙이 된다. 흙은 물이 되고, 물은 또다시 불로 환원(上行의 길)되는데, "하행의 길이나 상행의 길은 모두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이 하나하나의 전화과정은 항쟁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조화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이와 같은 사상을 잠언풍의 문체로 기술하였는데, 너무 난해하였기 때문에 '스코티노스(어두운 사람)'라는 별명이 붙었다. * 왼쪽부터... :::아이스키네스 [Aischines, ?~?] : 소크라테스의 열성적인 제자로서 청년기에 스승의 재판과 임종에도 입회하였으며, 뒤에 한때 시라쿠사의 디오니시오스 왕을 섬기기도 하였다. 소크라테스를 상대로 하는 ‘대화편’을 만들어 스승의 참모습을 가장 잘 전하였다고 높이 평가되나, 그의 이름으로 전하는 14개의 ‘대화편’ 중 고대의 비평가들이 진작으로 간주하는 것은 《미르티아디스》 《카리아스》 《아크시오코스》 《아스파시아》 《알키비아데스》 《테라우게스》 《리논》 등 7편이다.
:::알키비아데스 [Alkibiades, BC 450 ?~BC 404] : 아테네 출생. 아버지 크레이니아스가 죽은 뒤 외숙이자 후견인인 페리클레스에 의하여 양육되었으며, 이따금 소크라테스의 가르침도 받았다. BC 421년 스파르타와 체결한 화약으로 니키아스평화가 찾아와 펠로폰네소스동맹에 분열의 징후가 나타나자, 스파르타의 고립화를 꾀한 적극공세를 주장하여 BC 420년 장군으로 선출되었다. 서방으로의 세력확장을 바라는 민중의 희망에 부응하여 시칠리아 원정을 결의하도록 하여, BC 415년 의견을 달리하는 니키아스와 함께 출전하였다. 그러나 테르메스상 파괴의 용의자로 소환령이 내려지자 스파르타로 망명하여 시라쿠사에 대한 원군파견과 아티카의 데켈레이아에 요새를 구축할 것을 진언하였다. 다시 소아시아로 건너가 페르시아와 스파르타의 동맹을 주선, 이 방면의 그리스인을 아테네로부터 이반시켜 모국을 괴롭혔다. 그러나 스파르타왕 아기스 2세는 그와 아내와의 사이를 알게 되어 사형 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페르시아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아테네의 과두파에게 페르시아의 지원을 대가로 귀환교섭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일변하여 민주정치에 충실한 사모스를 중심으로 하는 아테네 해군과 손을 잡고, 폰토스 방면의 스파르타군을 격파, 연승하여 헬레스폰트 해역의 제해권을 아테네에 안겨 주었다. BC 408년 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였으나, 페르시아의 원조를 받은 스파르타 해군이 세력을 만회하자 다시 실각하였고, BC 404년 아테네 해군의 패배 직후 프리지아에서 스파르타의 첩자에게 암살되었다. 정치 ·군사적 재능과 준수한 외모를 타고났으나 무절조와 사리에 치우쳐, 펠로포네소스전쟁에서는 고국 아테네를 패배로 이끄는 원인을 만들었다.
:::크세노폰 [BC 430 ?~BC 355 ?] : 아테네의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이 소크라테스 문하생이 되었으나, 스승이 가르치는 깊은 진리는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BC 401년에 페르시아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아우 키로스는 형에게 모반하는 군사를 일으켜 바빌론으로 쳐들어가려고 대군을 모집하고 있었다. 크세노폰은 스승의 충고를 뿌리치고 이 군대에 참가하였다. 바빌론 근처 전투에서 키로스가 전사하자, 1만 명의 그리스 용병대를 지휘하면서 눈이 쌓인 아르메니아로부터 흑해 연안을 지나 소아시아까지 온갖 고난을 겪은 뒤에 2년 만에 귀환하였다. 이 때의 사정을 산문형식으로 쓴 수기가 《아나바시스 Anabasis》이다. 그 후 BC 399년 소크라테스가 처형되고, 제자들은 아테네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그도 소아시아에서 스파르타왕 아게실라오스와 친교를 맺게 되고, 코로네아 전투에서는 스파르타군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조국을 배반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조국에서 추방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그에게 보상으로 올림피아에 가까운 스킬루스에 넓은 영지를 주었다. 여기서 그는 저술에 전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곳에서의 그의 생활은 《가정론》 《수렵론》 《마술(馬術)》 등의 소품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BC 370년 스킬루스가 반(反)스파르타의 에리스군에 점령되었기 때문에 코린토스로 옮겨 그 곳에서 죽었다. 크세노폰의 작품은 일찍부터 아티카 산문의 모범으로 존중되었기 때문에, 그의 전 작품이 남아 있다. 《아나바시스》 외의 중요한 것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추억》이 있다. 이 책은 스승의 추상기이지만, 그 속에는 자신의 생각이 상당히 곁들여져 있다. 그의 《그리스 역사》는 투키디데스의 저술의 뒤를 이은 BC 411∼BC 362년의 그리스 역사이다. 단 그의 필치는 선배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며 또한 종종 공정치 못하여 그의 마음은 스파르타측에 가담하고 있다. 《키루스의 교육》은 그 일생의 야심작으로서, 고대 페르시아 제국 건설자 키루스 2세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이다. 타락한 민주정치를 증오하는 그는 여기서 자기가 품고 있는 국가와 위정자에 대한 이념을 전개하고 있다. 평범한 덕목주의를 좋아하는 그의 면목이 여실히 나타난 작품이다. 그 옆에 파란 망토를 두른 사람은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
:::알렉산드로스대왕 [Alexandros the Great, BC 356~BC 323.6] : 필립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의 아들로서 알렉산더대왕, 알렉산드로스 3세라고도 한다.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대왕으로, 탄생에 관해서는 그리스의 작가 플루타르코스(영웅전 작가)가 “올림피아스가 벼락이 배에 떨어지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다” 또는 “필립포스가 아내의 곁에 있는 뱀을 보았다” 등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당시의 대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케도니아 수도인 펠라의 궁정에 초빙되어 3년 동안 그에게 윤리학 ·철학 ·문학 ·정치학 ·자연과학 ·의학 등을 가르쳤다. 그는 호메로스의 시를 애독하여 원정 때도 그 책을 지니고 다녔으며, 학자를 대동하여 각지의 탐험 ·측량 등을 시킨 일, 또는 변함없이 그리스 문화를 숭앙한 일 등은 스승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부왕으로부터는 전술 ·행정 등의 실제적인 일을 배웠고, BC 338년의 카이로네이아전투에 직접 참가하였다. 부왕이 암살되자 군대의 추대를 받아 20세의 젊은 나이로 왕이 되니, 그리스 도시의 대표자 회의를 열고 아버지와 같이 헬라스 연맹의 맹주로 뽑혔다. 때마침 마케도니아의 북방에 만족이 침입하고 서방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친정하였는데, 이 싸움에서 그가 전사하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온 그리스가 동요하고 테베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즉시 테베를 토벌하고 테베시의 전시민을 노예로 팔아버렸다. BC 323년 바빌론에 돌아와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3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그는 자기가 정복한 땅에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지은 도시를 70개나 건설하였다고 한다. 이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 동점(東漸)의 거점이 되었고, 헬레니즘 문화의 형성에 큰 구실을 하였다. 그의 문화사적 업적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데 있다. 그가 죽은 뒤 대제국 영토는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세 나라로 갈라졌다.
:::소크라테스 [Socrates, BC 469~BC 399] : 아테네 출생. 자기 자신의 ‘혼(魂:psychē)’을 소중히 여겨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자기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 거리의 사람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는 결국 고발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재판 모습과 옥중 및 임종장면은, 제자 플라톤이 쓴 철학적 희곡(플라톤의 대화편) 《에우티프론(Euthyphron)》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등 여러 작품에 자세히 그려졌다. 죽음 앞의 평정청랑한 그의 태도는 중대사에 직면한 철학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에 관하여 썼고, 우리들은 그 글을 통해서 그를 알 뿐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누구를 얼마만큼 믿어야 할지는 문제이며, 이것을 철학사상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제자 가운데 가장 걸출한 철학자인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상을 골자로 하고, 여기에 다른 것을 보충하는 경우가 많다. 소크라테스의 젊었을 때의 일에 관하여 확실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낯익은 것은, 늙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거리나 체육장에서 아름다운 청소년들을 상대로, 또는 마을의 유력한 사람들을 상대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묻고 있는 모습이다(이것을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라 함). 이와 같은 문답의 주제는 대부분 실천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문답은 항상 ‘아직도 그것은 모른다’라고 하는 무지의 고백을 문답자가 상호간에 인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때 상대방은 소크라테스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자기는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아(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 여기에서 자기의 무지를 폭로당한 사람들은 때로는 소크라테스의 음흉한 수법에 분노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참뜻은, 모든 사람이 자기의 존재 의미로 부여된 궁극의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 그것을 묻는 것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촉구하는 데 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이 근거를 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무지의 지), 그것에 대한 물음을 통하여 이 ‘막다른 벽’ 속에 머무는 데 소크라테스의 애지가 있다. 그것은 내 자신을 근원부터 질문당하는 곳에 놓아 두는 것이며, 이러한 방법으로 내 자신이 온통 근원에서부터 조명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두 눈이 튀어나왔으며, 코는 짜부러진 사자코로 그 용모는 추하였다. 그러나 그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그의 말에 매료되고 그의 내면에 사로잡혔다. 이렇듯 외면과 내면의 이율배반에 그의 존재의 본질이 있다. 그 때까지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우주의 원리를 묻곤 하였는데, 소크라테스에서 비로소 자신과 자기 근거에 대한 물음이 철학의 주제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내면(영혼의 차원) 철학의 시조라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에 대한 물음은 자기를 지탱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것(초월)에 대한 물음이라는 의미에서 그는 형이상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내면은 근거에 의해 질문당하는 데서 생기는 막다른 벽 안에 끝까지 머무는 애지의 동반자로서만 제시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외부와 내면의 틈을 통해 개시되는 근원의 문제를 철학적 관심을 중심으로 그 생과 사의 증거를 가지고 정착시킴으로써 서양철학의 무게를 한몸에 짊어지는 사람이 되었다.
:::크세노크라테스 [BC 396?~BC 314?] : 소아시아의 카르케돈 출생. BC 380년경에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의 제자가 되었으며, BC 339년부터 죽을 때까지 플라톤의 학원인 아카데메이아(Akadēmeia)의 제3대 학원장을 지냈다. 스승의 학설의 충실한 후계자였으며 존재론에 입각하여 이데아론을 파악하였고, 또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으로 지식과 감각의 중개를 수학적으로 나타내 보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요즈음 사람들에게는 수학이 철학이 되었다”라고 말한 것은 크세노크라테스와 스페우시포스(BC 395?∼BC 339)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 그의 윤리학은 본질적으로 플라톤적이며, 처음으로 철학을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의 3부분으로 구분하였다. * 화면 윗 쪽 상체를 벗은 사람은 디아고라스이고 :::고르기아스 [Gorgias, BC 483?~BC 376] : 시칠리아섬 출신. 대표적인 소피스트였다. BC 427년에 고향인 레온티노이의 외교사절로서 아테네로 갔으며, 그의 웅변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켜 그 외교정책을 전환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나 고국에 정변이 일어나 해외로 망명하여 변론술 교사로 생활하였다. 엠페도클레스의 제자가 되지만, 엘레아의 제논의 영향도 많이 받아 《비유에 관하여》라는 저서에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하여도 이해되지 않는다, 이해된다 하여도 남에게 전할 수가 없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하였다. 그 밖에 《헬레네송(頌):Helenēs enkōmion》 등의 저서가 있다.
* 초록색 모자의 할아버지는 엘레아의 제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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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논 [BC 335?~BC 263?] : 키프로스섬 키티온 출생. 페니키아인(人)의 혈통으로 추정된다. 30세경에 아테네로 가서, 각 학파의 여러 스승에게 배운 뒤에, 독자적인 학파를 열어 아고라(agora:집회장, 중앙 광장)에 있는 이른바 ‘채색 주랑’이라고 불리는 공회당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주랑을 스토아라 하므로 스토아학파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의 철학은 절욕과 견인을 가르치는 것이었으며, 사람이 자기 힘으로 살며, 다른 누구에게도, 어떤 일에도 빼앗기지 않는 행복을 얻는 힘을 부여하는 철학이었다. ‘자연과 일치된 삶’이 그 목표였다. 전통적인 여러 철학의 학설을 종합하여 풀이하였기 때문에 절충의 흠은 있지만, 그 설의 근본에는 동방의 요소가 있다고 믿었으며, 이 독자성 때문에 순수한 그리스인 이외의 제자들을 많이 모아, 새로운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그의 철학은 윤리학이 중심이며, 인생의 목표인 행복은 우주를 지배하는 신(神)의 이성 즉 로고스를 따르는 일이었고, 이로써 부동심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 ·수사학에 대해 많은 논문을 썼으나, 현재는 인용에 의해 그 단편이 알려질 뿐이다.
* 월계관을 쓰고 있는 사람은 에피쿠로스이다.
:::에피쿠로스 [Epikouros, BC 342?~BC 271] : 사모스섬[島] 출생. 35세 전후에 아테네에서 학원을 열었다. 그 학원은 '에피쿠로스 학원'이라 불렀고, 부녀자와 노예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었다고 한다. 제자들은 각자 형편에 맞는 기부금을 내고 학원에서 공부하고 함께 우정에 넘치는 공동생활을 영위하면서 문란하지 않은 생활(아타락시아) 실현에 노력하였다.
'에피쿠로스철학'의 기초를 이루는 원자론에 의하면 참된 실재는 원자(아토마)와 공허(케논)의 두 개뿐으로서, 원자는 불괴의 궁극적 실체이고 공허는 원자가 운동하는 장소이다. 원자는 부정한 방향으로 방황운동을 하는데, 이것에 의해 원자 상호간에 충돌이 일어나서 이 세계가 생성(生成)한다. 그러므로 세계에 있는 모든 것, 즉 인간이나 신들이나 모두 원자의 결합물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인식이란 감각적 지각에 지나지 않고 물체가 방사하는 원자와 감각기관과의 접촉에 의해 성립한다.
이 자연학에 의하여 그는 죽음과 신들에 대한 공포를 인류로부터 제거하려 하였다. 죽음이란 인체를 구성하는 원자의 산일이며, 죽음과 동시에 모든 인식(자기)도 소멸한다. 신들도 인간과 동질의 존재이며 인간에게 무관심하다. 인생의 목적은 쾌락의 추구에 있는데, 그것은 자연적인 욕망의 충족이며, 명예욕·금전욕·음욕(淫慾)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폈다. 그는 공공생활의 잡담을 피하여 숨어서 사는 것, 빵과 물만 마시는 질박한 식사에 만족하는 것, 헛된 미신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우애를 최고의 기쁨으로 삼는 것 등이 에피쿠로스가 주장하는 쾌락주의의 골자였다. 《자연에 대하여》 등 300여 권에 이르는 저서가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산일되고 단편만이 전한다.
* 오른쪽에 아래에는 허리를 굽혀 컴퍼스를 돌리고 있는 유클리드(Euclid)가 있으며 맨 앞의
소년은 허리를 숙여 스승과 머리를 맞대고 앉아 도면을 본다.(유클리디의 얼굴은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가였던 브라만테의 얼굴을 그렸다고 합니다.)
:::유클리드 [Euclid, BC 330?~BC 275?] : 그리스식 표기는 Eukleidēs. 그리스기하학, 즉 ‘유클리드기하학’의 대성자이다. 그의 일생에 관해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수학을 가르쳤다는 것 외에는 확실한 것이 없다. 그의 저서 《기하학원본(기하학원론 또는 단지 원론 ·원본으로 불리기도 한다) Stoikheia》(13권)은 플라톤의 수학론을 기초로 한 것으로, 그 이전의 수학(기하학)의 업적을 집성함과 동시에 계통을 부여하여 상당히 엄밀한 이론체계를 구성하였다. 기하학에 있어서의 경전적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유클리드라 하면 기하학과 동의어로 통용되는 정도에 이르고 있다. 그 밖에 현존하는 저서로는 《보조론》, 《도형의 분할에 대하여》가 있으며 응용수학서로는 《구면천문학》, 《광학과 반사광학》, 《음정의 구분과 화성학입문》이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른쪽에 몰려있는 사람들 중 노란색 옷을 입은 사람은
* 천구의를 들고 있으며 가장 왼쪽에 보이는 사람이 조로아스터이고
:::조로아스터 [Zoroaster, BC 630 ?~BC 553 ?] : 자라투스트라의 영어명이다. 그가 역사상의 인물이라는 것은 고전 작가도 인정하지만,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아베스타:Avesta》의 <야스나> 46의 14에서 생각할 수 있듯이, 그의 친구이며 후원자인 비쉬타스바로 불리는 왕이 유력한 단서인데, 그 역시 페르시아왕조의 어느 왕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BC 7세기 말에서 BC 6세기 초가 비교적 유력한 시기로 추정된다. 20세경에 종교생활에 들어가서 30세경에 아후라 마즈다신의 계시를 받고 새로운 종교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하였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Ptolemaeos, Klaudios, 85?~165?] : 영어명은 Ptolemy(톨레미). 127∼145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천체(天體)를 관측하면서, 대기에 의한 빛의 굴절작용을 발견하고, 달의 운동이 비등속운동임을 발견하였다. 천문학 지식을 모은 저서 《천문학 집대성 Megalē Syntaxis tēs Astoronomias》은 아랍어역본인 《알마게스트 Almagest》로서 더 유명한데, 코페르니쿠스 이전 시대의 최고의 천문학서로 인정되고 있다. 이 저서에서 BC 2세기 중엽 그리스의 천문학자 히파르코스의 학설을 이어받아 천동설에 의한 천체의 운동을 수학적으로 기술하였다. 천체가 비교적 간단한 기하학적 모델에 의거하여 움직인다고 가정하고, 히파르코스의 사인표를 사용하여 해 ·달 ·행성의 위치를 계산했으며, 그에 따른 일식 ·월식 현상을 예보하는 방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류(流)의 천동설과는 달리 완전한 수리천문서로서 가치가 있다. 유럽에서는 15세기에 이르러서야 《알마게스트》를 이해할 수 있는 천문학자가 나타났으며, 천문학의 수준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로 되돌아가, 그 기초 위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탄생될 수 있었다.
그 밖에 점성술책인 《테트라비블로스》가 아랍 세계에서 인기를 얻었고, 지리학의 명저 《지리학 Geographike Hyphegesis》도 지리학계에서 오랫동안 아낌을 받았다. 그 밖에도 광학과 음악에 관한 여러 저서가 있다.
:::소도마 [Il Sodoma, 1477~1549.2.14?] : 북이탈리아의 베르첼리 출생. 본명 Giovanni Antonio Bazzi. 소도마는 별명으로 ‘남색’이라는 뜻이다. 1490년경 밀라노에 나와, 당시 이 곳에서 활약하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1499년 밀라노의 스포르차가의 몰락으로 다 빈치가 밀라노를 떠나자 시에나로 나가 그 곳에서 한창이던 페루지노의 화풍을 흡수하여 《그리스도 강가》(시에나미술관 소장)를 그리고 시에나와 가까운 몬테 올리베트의 수도원에 일련의 벽화를 그렸다. 그 후 로마에서 바티칸궁의 교황 서명실 천장화를 그리기 시작하였으나, 1508년 이 일은 라파엘로가 계승하였다.
후배인 라파엘로의 영향도 받아 1514년 로마의 파르네지나장의 벽화 《알렉산더와 록사네의 혼례》를, 1518~1532년에는 시에나의 산 베르나르디노 기도소의 벽화를 그렸으며, 또 《성세바스찬의 순교》(1525∼1526, 파리미술관 소장) 《성카테리나의 성흔》(1526∼1528, 시에나의 산도미니크성당의 벽화)과 같은 청순 전아한 작품을 그려서, 다 빈치나 라파엘로에 뒤따르면서도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양식을 전개하여 정서적인 시에나파 벽화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라파엘로 [Raffaello Sanzio, 1483.4.6~1520.4.6] : 우르비노 출생.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천재 예술가의 한 사람이다. 궁정시인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11세 때 아버지마저 잃어 사제(司祭)인 숙부 밑에서 자랐다. 시인이며 화가였던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우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동향인인 T.비테에게서 배웠다.
1500년 P.페루지노가 완성한 페루지아 어음교환소의 벽화 중 우의상은 당시 17세였던 라파엘로가 조수로서 그린 것이다. 1500년경의 작품으로 알려진 콘데미술관(샹티유이)의 《삼미신》, 내셔널갤러리(런던)의 《기사의 꿈》은 청순한 색채와 감미로운 음악적 리듬이 보이며 격정이나 위대성을 강조하지 않고 부드러운 매력을 나타내려 하였다. 공간에 교차하는 화음의 물결을 민감하게 포착하는 음악적인 감각은 루브르미술관의 《성 미카엘》 《성 게오르기우스》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예술의 기조를 이룬다. 페루지아에 나온 후로는 페루지노풍의 최고의 기법을 급속히 익혔으며, 특히 《성모대관》(바티칸미술관) 《그리스도의 책형》(런던) 《스포잘리치오(성모의 결혼)》(밀라노) 등은 페루지노 작품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공간처리나 환상적인 표현에는 그의 스승에게서 볼 수 없는 신선미를 보이고 있다. 1504년 피렌체에서 예술적 전통에 고취되면서 F.바르톨로메오의 장대한 화면구성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암법을 배워 페루지노의 영향을 탈피하고 피렌체파의 화풍으로 발전하였다. 《도니 부처상》이나 기타 이 시기의 초상화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을 다분히 받았고, 이 시대에 가장 많이 그려진 성모자상에서도 성모의 자태나 피라미드형 구도에 있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이 뚜렷하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매장》(로마)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선의 움직임까지도 모방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인(先人)의 기법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여 화면구성에 있어서 선의 율동적인 조화라든지 인물 태도의 고요함이나 용모의 청순함 등에는 언제나 독자성을 나타내었다. 로마의 고대유적과 고전 연구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완성단계에 있던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성당 천장화에서 조형적 파악법을 배워 공교한 율동적 구도를 바탕으로 고전적인 격조 높은 걸작을 이룩하는 데 성공하였다.
베네치아파적인 색채효과는 《율리우스 2세상》을 위시하여 《베일을 쓴 여인》 《발타사르 카스티요네상》 《작은 의자의 성모》 등에 나타나 있다. 한편 건축에도 손을 대어 1514년 동향 선배인 B.L.브라만테의 뒤를 이어 성베드로대성당 건조에 관계하였고, 1514∼1517년 바티칸궁전의 스탄차델 인첸디오의 벽화장식에도 종사하였으며, 1515년부터는 고대유적 발굴의 감독관이 되었다. 《산시스토의 성모》(드레스덴)는 이 무렵의 걸작으로 아카데믹한 형식주의가 싹트고 있으며 《산타 체칠리아》(볼로냐)에서 그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그런데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화려한 궁정화가로서 일에 쫓기던 그의 예술은 종교개혁운동을 계기로 차차 쇠퇴하였고, 제자들과 함께 그린 파르네지나궁의 천장화 《프시케의 이야기》에서는 지난날의 감미로운 리듬은 사라지고 고대 조각의 영향을 조악하게 반영하여 채색한 조상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1518년의 《레오 10세의 초상》에서는 군상을 훌륭한 솜씨로 처리하여 뛰어난 초상화가임을 증명하였다. 만년에 명예회복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인 《그리스도의 변용》(바티칸)을 완성하지 못한 채 요절하였으나, 천상의 신비스러운 광휘와 지상의 소란을 대조시켜 S자형의 분방한 구도로 동적 표현을 시도한 이 작품은 이미 고전양식을 해체한 것으로 바로크양식의 싹이 엿보인다. 짧은 생애에 많은 걸작을 남긴 그가 미술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며, 19세기 전반까지 고전적 규범으로 받들어졌다. 그 후 근대회화사조에 의하여 경시된 적도 있다.
바티칸 박물관 / 라파엘로의 방 -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방
라파엘로의 방(Stanze of Raphael)으로 알려진 4개의 방들은, 교황궁(Pontifical Palace) 오른쪽 2층에 자리하고 있다.
교황 율리우스 2세(Pope Julius II 1503-1513)는 교황직에 선출되어 보르지아(Borgia)의 교황궁(Pontifical Palace) 2층에
1400년대 중엽에 마련된 4개의 방에 새로운 거처를 정한다. 이 방들에는 라파엘로(Raphaelo)의 스승인 페루지노
(Pietro Perugino, 1450-1523)와 피엘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라파엘로의 방(Stanze of Raphael)]
자신의 새로운 거처를 장식할 새로운 벽화를 그릴 화가로 당시 성 베드로 성당(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의 공사
총감독관이었던 브라만테(Bramante)는 당시 약관의 20세의 청년 라파엘로(Raphaelo)를 추천한다. 이에 반신반의 하던
교황 율리우스 2세(Pope Julius II)는 '서명의 방'을 이 젊은 라파엘로에게 의뢰를 한다. 그리고 이 결과에 매우 만족한 교황은
기존에 있던 라파엘로의 스승인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50-1523)와 피엘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등의
벽화를 다 지우고 새로이 벽화를 제작할 것을 주문한다.
[라파엘로의 방(Stanze of Raphael)]
이런 연유로 1508년에서 1512년에는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
1512년에서 1514년에는 엘리오도르의 방(Stanza d'Eliodoro)의 벽화를 제작하는데,
1514년에 바티칸 성당(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의 공사 총감독이었던 브라만테(Bramante)는 자신의 뒤를 이을
공사 총감독관으로 당시 31세이던 라파엘로(Raphaelo)를 임명하고 그 다음해인 1515년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다.
바로 이 시기에 라파엘로(Raphelo)는 바티칸 대성당의 신축 공사 총감독관을 하며 이 벽화들을 진행했던 것이다.
1514년에서 1517년까지는 보르고 화재의 방(Stanza dell'Incendio di Borgo), 그리고 마지막으로 1517년에서 1524년까지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벽화를 진행하게 된다. 그러던 중 1520년 4월 6일에는 라파엘로(Raffaello)가
37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만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벽화 작업은 당연히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라파엘로의 제자 쥴리오 로마노(Giulio Romano)와 지안 프란체스코 펜니(Gian Francesco Penni)에 의해
작업은 완성된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거처로 쓰여지기 위해 만들어진 이 방은 라파엘로 방( Stanz di Raffaello,)으로 불리운다.
이 4개의 방은 보르고 화재의 방(Stanza dell'Incendio di Borgo),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
엘리오도라의 방(Stanza d'Eliodoro),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방(Sala di Constantino)으로 나뉜다.
[라파엘의 방(Stanze of Raphael) 중 첫번째,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
입구에 들어서며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방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방(Sala di Constantino)이다.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 307년)으로 박해의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교회의 시대를 열게 한 콘스탄티누스 대제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2.2.27 - 337.5.2)의 중요 사건들을 묘사한 프레스코(Fresco)들이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방에는 입구 바로 오른쪽 벽에는 콘스탄티누스의 세례(Baptimism of Constantine)가 있고 창문 전면 벽에는
밀비오 다리의 전투, 십자가의 환시(Vision of Cross)가 있다. 천장에는 1585년에 토마스 라우레티(Tommaso Laureti)에 의해
그려진 그리스도교의 승리(Triupm of the Christan Region)라는 그림이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프레스코, 덕목(Virtue)을 주제로 표현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2.2.27-337.5.22)는 중기 로마 황제(재위 306 - 397)로 흔히
그리스도교 역사서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Great Emperor Constantinus)로 통칭하며,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여 '성 콘스탄티누스( St. Constantinus, Μέγας Κωνσταντίνος)'로 불린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도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여 성 콘스탄티노 대제(Sanctus Constantinus Magna)로 불린다.
396년 7월 25일 브리타니아(Brithania)의 요크(York)에서 병사들에 의해 군주로 추대되어 죽는 날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프레스코, 덕목(Virtue)을 주제로 표현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Great Emperor Constantinus)는 최초의 그리스도인 로마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치세는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여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끝내고 사실상 정식 종교로 공인했다.
또한 교회의 압류된 재산을 돌려 주고 이에 대한 국가의 보상을 정했다. 그는 또한 325년 제1차 니케아공의회
(1st Concilium Nicaenum Primum)를 소집하여 그리스도교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프레스코, 덕목(Virtue)을 주제로 표현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1)는 272년 또는 273년 2월 27일 로마제국의 다뉴브 강(River Danube)남쪽
모에시아 수페리오르(Moesia Superior) 속주, 현재의 세르비아(Serbia)와 불가리아(Bulgaria)의 나이수스((Naissus)에서
장군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와 그의 첫째 부인 성녀 헬레나(St. Helena)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성녀 헬레나(St. Helena)는 여관 주인의 딸로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1)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프레스코, 덕목(Virtue)을 주제로 표현하였다]
293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는 막시미아누스 황제(Emepror Maximianus)의
신임을 받게되어 승진을 거듭하며 로마 제국 서부의 총독으로 갈리아(Galria) 지역, 지금의 프랑스, 남독일, 스페인 등의 지역을
통치하게 된다. 이 임명에 앞서 황제는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가 새로 부임하는 조건으로 그의 부인 헬레나(Helena)와
이혼하고 막시미아누스 황제(Emepror Maximianus)의 딸 테오도라(Theodora)와 결혼해야 한다는 것과,
아들 콘스탄티노(Constantino)를 볼모로 소아시아 니코메디아((Nicomedia), 오늘날 터키 이즈미트(Izmit, Turkey)에 있는
리지니오(Riginio)의 저택에 남겨 둔다는 것을 제안한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프레스코, 덕목(Virtue)을 주제로 표현하였다]
이에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헬레나를 버리고 제국 서방 구역의 정제인 황제(Emepror Maximianus)의 딸 테오도라(Theodora)와
결혼을 한다.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가 사두정치 체제(테트라키아, Tetrarchia)에서 2명의 부제 중에
하나로 임명된 직후 젊은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는 동방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의 휘하로 들어가,
소아시아 니코메디아((Nicomedia), 오늘날 터키 이즈미트(Izmit, Turkey)에서 복무했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프레스코]
305년 2명의 정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와 막시미아누스(Maximianus)가 은퇴하고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가
막시미아누스(Maximianus)의 뒤를 이어 서방의 정제로 승격하게 되자, 콘스탄티누스는 즉각 니코메디아((Nicomedia)를 떠나
갈리아(Galria)에 있는 아버지의 휘하로 들어갔다.
정제의 바로 밑의 자리인 부제에는 세베루스(Seberus)와 막시밀리아누스 다이아(Maximianus Daia)가 추대되었는데
사실상 부제의 위치 즉, 정제의 아들에 있었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와 막시미아누스(Maximianus)의 아들인 막센티우스
(Maxentius)는 권력에서 소외된 셈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프레스코, 덕목(Virtue)를 주제로 표현하였다]
1년 후인 306년 7월, 브리타니아(Brithania) 원정에 나섰던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가 에보라쿰(Eboracum),
지금의 요크(York)에서 병사하자 그의 휘하의 장병들은 즉각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를 정제로 추대하였다.
병사들에 의한 콘스탄티누스의 정제 승계는 당시 사두정치 체제(테트라키아,Tetrarchia) 아래에서 적법성에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는 동방 정제인 갈레리우스(Gallerius)에게 자신의 권좌승계에 대해 확인을 요청하였고,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의 영토를 승계하도록 하되 부제로 인정하고 서방 정제로는 세베루스(Seberus)를 임명하였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프레스코, 덕목(Virtue)를 주제로 표현하였다]
제국 내에서 콘스탄티누스의 관할 구역은 이베리아(Iberia) 반도의 히스파니아((Hispania), 브리티아(Brithia), 갈리아(Galria),
그리고 게르마니아(Germania) 지방이었다. 이로써 그는 중요한 라인 강(River Rein) 방위선의 강력한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갈리아(Galria) 지방은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 중에 하나였으나 이른바 제3세기의 위기(3rd Century Crisis) 동안에
인구는 소실되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306년부터 316년까지 10년 동안 콘스탄티누스(Constantius)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라인 강 방위선을 굳건히 하고
갈리아(Galria) 지방을 재건하는데 힘썼다. 당시 그의 주요한 거주지는 트리어(Trier)였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프레스코, 덕목(Virtue)를 주제로 표현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지역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부족들의 반란이 일어나면 즉각적이고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붙잡힌 포로들은 원형경기장에서 모두 살육하는 무단정치를 과시했다. 이러한 그의 전략이 나름대로 효과를 나타내어서
그의 통치기간 동안 라인 강 방위선은 상대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한편 로마 국내정치는 사두정치(테트라키아,Tetrarchia)의
한계를 드러내며 복잡한 내전 상황으로 빠져들어 갔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프레스코, 덕목(Virtue)를 주제로 표현하였다]
307년 막센티우스(Maxentius)가 로마에서 사두체제(테트라키아,Tetrarchia)와는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면서 봉기하고
막시마아누스(Maximianus)도 은퇴 생활에서 복귀하여 아들을 도왔다. 서방의 정제인 세베루스(Seberus)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진격하지만 선제인 막시미아누스가 지휘하는 군대에 궤멸당하고 세베루스는 로마로 잡혀가 자살을 강요당해 죽는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
이후 동로마의 정제인 갈레리우스(Galerius)가 막센티우스(Maxentius)를 단죄하기 위해 군사행동에 들어갔지만 실패하고
결국 선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와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그리고 갈레리우스(Galerius) 세 사람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 서방의 정제에 리카니우스(Licinius)를 임명하기로 했다. 이에 막센티우스는 불만을 품게 되고 아버지인
막시미아누스(Maximianus)와 논쟁끝에 갈라서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세례(Baptimism of Constantine)]
입구 바로 오른쪽 벽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세례(Baptimism of Constantine)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는 337년 죽기 바로 직전에 니코메디아(Nicomedia), 오늘날 터키 이즈미트(Izmit, turkey)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260-340)에게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당시 그리스도교인들의 전례를 따른 것으로
죽기 직전까지 세례를 받는 것을 미루어서 현세의 죄를 씻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콘스탄티누스의 세례(Baptimism of Constantine)]
[콘스탄티누스의 세례(Baptimism of Constantine)]
아들과의 불화로 막시미아누스(Maximianus)는 트리어(Trier)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와서 자기의 딸파우스타(Fausta)와
혼인을 조건으로 합류했지만, 콘스탄티누스가 야만족을 격퇴하러간 틈을 타 쿠테타를 시도하다가 예상보다 빨리 돌아온
콘스탄티누스에게 공격당하고 310년 마실리아((Massalia), 현재의 마르세유( Marseille)에서 죽음을 맞았다.
311년 갈레리우스(Galerius)가 죽자 리키니우스(Licinius)가 동방의 정제로 취임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고 독자적인 황제의 권리를 주장하는 막센티우스(Maxentius)를 처단하기 위해 출정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세례(Baptimism of Constantine) 그림 중 오른쪽 일부]
312년 초 콘스탄티누스(Constantius)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했고 투린((Turin, 토리노, Torino)과 베로나(Berona)에서
막센티우스(Maxentius)군을 차례로 무찔렀다. 이후 벌어진 유명한 밀비우스 다리 전투(Battle of Milbius Bridge)로 결국
막센티우스(Maxentius) 군은 콘스탄티누스(Constantius)에게 대패하고 막센티우스(Maxentius)'는 전사한다.
이 전투로 인해 제국 서방에서 콘스탄티누스(Constantius)는 유일한 강자이자 정제로서 군림하게 된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멜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에서의 대승으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는 서로마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313년 동방의 정제 리키니우스(Licius)와 서방의 정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us)는 밀라노(Milano)에서 만나 '콘스탄티누스의
동생 콘스탄티아(Constantia)를 리키니우스(Licius)에게 결혼시켜 서로의 동맹관계를 확인하고 제국의 여러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그리스도교를 사실상 공인하게 되는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도 여기서 발표된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이 회담은 짧게 끝났지만 동방의 부제인 막시미아누스 다이아(Maximianus Dia)가 보스포루스 해협(Bosporus Strait)을 건너
리키니우스(Licius)의 영토를 침범하였다. 리키니우스는 막시미누스의 공격을 격퇴하고 동방에서 일인자의 지위를 굳혔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이로써 제국의 서방과 동방에 두 명의 황제만 남게 되었고 그들의 동맹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두 정제의 세력은 서로 충돌하였는데 315년 키발라에 전투(Battle of Kibalae), 317년 마르디아 전투(Battle of Mardia)에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가 승리하게 되고 두사람은 휴전협정을 맺었다.
이후 몇 년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는 아들 크리스푸스(Chrispus)의 도움으로 야만족과의 싸움에 전념한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324년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는 이제 로마의 패권을 놓고 일대 결전을 벌인다.
아드리아노폴리스(Adriapolis)에서 벌어진 육상전에서는 콘스탄티누스(Constantius)의 승리로 끝났고 이어 비잔티움
(Byzantium) 근처의 해전에서도 콘스탄티누스의 아들 크리스푸스(Chrispus)가 이끄는 콘스탄티누스의 해군이 승리했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이어 소아시아에서 벌어진 지상전에서도 리키니우스는 패하고 항복하여 강제로 테살로니카(Thessalonica)로 은퇴당했고
이듬해 반란을 꾀한다는 명목으로 재판도 없이 처형당했다. 이로써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로마 제국의 권력과 부와 문화 등의 중심지는 급격하게 동 로마제국(East Roman Empire)으로 이동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Constantius)는 비잔티움(Byzantium)을 자신의 도시로 대대적으로 개조하고 원로원과 로마와 같은 공공건물을 지어
새로운 로마(Nova Roma)로 불렀다.
그의 사후에 비잔티움(Byzantium)은 콘스탄티누스의 도시(City of constantinus)라는 뜻의
콘스탄니노폴(constantinopol)로 이름이 바뀌었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가 서로마 전체를 지배하게 된 계기가 된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326년 콘스탄티누스(Constantius)는 아들 크리스푸스(Chrispus)가 아내 파우스타(Fausta)와 간통했다는 죄목으로 체포하여
고문 끝에 처형했다. 크리스푸스(Chrispus)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지만 재판도 없이 29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아내 파우스타도 목욕을 하다가 죽은 것으로 위장하여 죽였다. 그의 시신은 비잔티움(Byzantium)으로 옮겨져서 매장되었다.
그의 권좌는 파우스타(Fausta)가 낳은 세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Constantine Ⅱ, 316-340)와 콘스탄니우스 2세
(ConstantiusⅡ)에게 이어졌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콘스탄티누스 대제(Great Emperor Constantinus)는 최초의 그리스도교인 로마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치세는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313년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여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끝내고 사실상 정식 종교로 공인했다. 또한 교회의 압류된 재산을 돌려 주고
이에 대한 국가의 보상을 정했다. 그는 또한 325년 제1차 니케아공의회(1st Concilium Nicaenum Primum)를 소집하여
그리스도교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비록 311년 선제 갈레리우스(Gallerius)가 이미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과 비슷한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였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1)의 적극적인 그리스도교 진흥책으로 로마에서 그리스도의 위상은 새로이 정립되었다.
학자들 사이에서 콘스탄티누스(Contantinus)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언제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어머니 성녀 헬레나(St, Helena)의 영향 아래서 자라 어린 시절에 이미 그리스도교에 귀의했다는 설과
인생의 여정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1)의 어머니인 헬레나(Helena)는 독실한 그리스도교 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제 자신은 40세가 되어서야 스스로를 크리스챤으로 불렀고 사망 직전에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다.
한편, 콘스탄티누스(Contantinus)는 오직 자신의 정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기독교를 이용하였을 뿐이라는 점과
권력을 위해 무고히 아들과 아내를 무참히 살해한 잔혹성으로 그의 행실이 그리스도의 정신과 거리가 멀다는 점 등에서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그는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서신에서 자신의 성공이 확실히 하느님의 도움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고
자신의 치세 동안 교회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을 하여 많은 교회를 세웠으며 그리스도인을 관료로 중용하고
선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시절의 그리슫도교 박해 때 몰수한 재산을 모두 되돌려 주었다.
특히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1)에 의하여 채택된 로마 황제의 표장(標章)인 그리스도(Xpioros)의 처음 두 자를
조합시킨 라바룸(Labarum)을 처음 사용한 것,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a di San Pietro)을 세운 것,
그와 그의 어머니 헬레나(Helena)에 대한 수많은 전설 등을 볼 때 그가 그리스도교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그의 그리스도교 진흥 정책은 다소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 수많은 내전을 거쳐 권력을 잡게 된 콘스탄티누스(Contantinus)에게
권좌를 위협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로마 황제는 교회의 권위 내지는 하느님의 권위에 의해 임명된다는 원칙을 세우고
따라서 그것은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이로써 그의 권위는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325년
제1 차 니케아 공의회(1st Concilium Nicaenum Primum)를 소집하여 그리스도교의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문에 동방정교회(East Othordox)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며 헬레나(St. Helena)와 함께 5월 21일을 축일로 지정하였다.
로마 가톨릭에서도 성인으로 공경한다. 그의 축일은 정교회(Othrdox Church)와 마찬가지로 5월 21일 이며
헬레나(St. Helena)의 축일은 8월 18일이다.
[십자가의 환시(Vision of Cross)]
312년 10월 28일 콘스탄티누스는 서로마 제국(West Roman Empire)의 패권을 놓고, 드디어 막센티우스(Maxentius)와의
최후의 결전이 이루어진다. 로마의 신학자 락탄티우스(Lactantius)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는 전투가 벌어지기
전 날 밤 꿈에 부하들의 방패에 그리스도가 그의 군대를 보호한다는 의미인 'X '자가 쓰여져 있는 꿈을 꾸었다 한다.
[십자가의 환시(Vision of Cross)]
또 다른 전승으로 유세비우스(Eusebius)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군대가 행진하고 있을 때, 콘스탄티누스는 한 낮에
천국에서 빛나는 승리의 십자가가 밝은 햇살을 내비추며 떠오르고, 뒤어아 '인 혹 빈센스(In Hoc Signo Vinces),
즉, '이 기호로 승리하리라 ( In this sign, You will conquer)"는 소리가 들렸다."고 쓰고 있다.
[십자가의 환시(Vision of Cross)]
또 다시 다움날 콘스탄티누스의 꿈에 그리스도가 다시 나타나 "천국의 기호를 그려 넣은 라바룸(Labarum) 휘장을 만들어라"
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 라바룸(Labarum)은 그리스어로 "Chis(Χ)"자에 "Rho(Ρ)'자가 결함된 "☧"로, 그리스어로 구세주
"그리스토스(Chrostos)"를 상징하는 치로(Chi-Rho), 혹은 크리스토그램(Chritosram)으로 해석되어, 콘스탄티누스 군대의 깃발,
방패, 병사들의 군모에 이 "천국의 기호"를 붙이고 붙이고 나가서, AD.312년 10월 28일, 밀비우스 다리 앞에서 벌어진 멜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는 콘스탄티누스의 대승으로 끝났으며, 이로써 그는 서로마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십자가의 환시(Vision of Cross)]
멜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에서의 대승으로 서로마 전체를 지배하게 된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us)는
이 떄 그가 하느님께 약속했었던 일, 즉 승리 후 모친 엘레나 왕후(Queen Elena)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공경해오던
사도 베드로(Apostles Peter)와 바오로(Apostles Paul)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세울 것을 공표한다.
[십자가의 환시(Vision of Cross)]
그리고 인류 최초의 교회인 일명 콘스탄티누스 기념 성당(Constantinian Basilica) 이라 부르는
초기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은 324년에 세워지게 된다. 그리하여 첫 공사를 시작하고
326년에는 교황 성 실베스트로(Pope St. Silvestro,314-335)가 축성하고, 그후 23년 후인 349년에 완공된다.
[교황 식스투스 5세(Pope Sixtus V, 1585-1590) , 프레스코(Fresco Sala di Constantino)]
정의를 의미하는 '유스티티아(Justitia)'와 가톨릭교회의 사랑의 행위를 의미하는 '카리타스(Cartitas)
[로마의 헌증(Donation of Rome)]
[로마의 헌증(Donation of Rome)]
콘스탄틴 황제(Emperor Constantine)가 교황 실베스터 1세(Pope Sylvester 1) 앞에서 무릎을 꿇고, 로마를 상징하는 황금상을
교황에게 바치고 있다. 교회국가의 설립과 교화의 현세적 권력의 정당화에 기반을 이 에피소드에 두었다.
교황 실베스터(Pope Sylvester)는 교황 클레멘트 7세(Pope Clement VII, 1523-1534)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는 옛날 성 베드로 성당(Bascilica di San Pietro)의 내부에 기록으로 남겨져있었으나 후에 없애버렸다.
[로마의 헌증(Donation of Rome)]
로마의 헌증(Donation of Rome) 또는 콘스탄틴의 헌증(Donatio of Constantine)으로 불리우는 이 작품은 라파엘로(Raphaelo)의
도움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그림의 대부분은 1520년에서 1524년 사이에 지안프란체스코 페니(Gianfrancesco Penni)와 줄리오
로마노(Guilio Romano)에 의해 그려졌다. 1520년 라파엘이 죽자 라파엘 공방의 제자들이 이 방의 나머지 프레스코를 완성하였다.
[로마의 헌증(Donation of Rome)]
이 그림은 교황의 지배권을 교황의 통치권을 소유 영토 너머까지 인정한다는 저 유명한 위조문서에 영감을 얻어 제작되었다.
그림은 가상적인 역사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콘스탄틴 황제(Emperor Constantine)가 교황 실베스터 1세
(Pope Sylvester 1) 앞에서 무릎을 꿇고, 교황과 그 후계자들이 로마를 비롯한 서로마 제국(Western Roman Empire)
전체를 통치하여달라고 청원하고 있다.
그림에는 시대 착오적인 장면들이 보이는데, 그림의 배경으로 원래의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의 실내장식이
보이는데, 이 그림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재건축되었다. 작가는 옛날의 건물을 상상해서 그려넣었다.
중앙의 배경에 있는 제단에 뒤틀린 기둥, 솔로몬의 기둥(Solomonic columns)은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e)로 부터 기증받은
것으로, 아마 유대사원(Jewish Temple)의 잔해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콘스탄티노 대제의 방(Sala di Constantino)]
그리고 이 성당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무너져 내려 1200년이 지난 1506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Pope Julius II)가
새로운 성당을 세우기 위해 시공을 하고 다시 120년이 지난, 1625년 11월 18일, 교황 우르바누스 8세(Pope Urbanus VIII)에 의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lica di San Pietro)'으로 새롭게 축성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Great Emperor Constantinus)가 최초로 세운 교회가 시작된지 1300여 년 만의 일이다.
[그리스도교의 승리(Triupm of the Christan Region), 토마소 라우레티(Tommaso Laureti) 작품]
[그리스도교의 승리(Triupm of the Christan Region), 토마소 라우레티(Tommaso Laureti) 작품]
땅에 떨어져 깨어져 있는 것은 이교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승리(Triupm of the Christan Region), 토마소 라우레티(Tommaso Laureti) 작품]
원래의 나무 기붕은 교황 레오 10세(Pope Leo X, 1513-1521)에 의해 만들어졌고,
이후 교황 그레고리 13세(Gregory XIII,1572-1585)에 의해 현대식 지붕으로 재건축되었다.
그리고 이를 장식하기 위하여 토마소 라우레티(Tommaso Laureti)에게 의뢰하여 지붕 중앙 패널에
그리스도교의 승리(Triupm of the Christan Region)를 제작한다.
이 작업은 교황 식스투스 5세(Pope Sixtus V, 1585-1590) 때인 1585년 말에 완성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승리(Triupm of the Christan Region), 토마소 라우레티(Tommaso Laureti)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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