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sr]그림,詩畵

세한도 / 김정희

이름없는풀뿌리 2015. 9. 22. 17:03

   

 

            

紙本 墨書  23.3 * 108.3센티,국보 제180호

          

 

 

 

세한도 발문 부분

藕船是賞 阮堂

藕船에게 그려 줌. 완당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上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지난 해에 두 가지 晩學,大雲 책을 부쳐왔고, 금년에는 藕耕文編이라는 책을 부쳐왔는데,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 아니요. 머나먼 천리 밖에서 구한 것이며, 여러 해를 거쳐 얻은 것이요, 일시적인 일이 아니다.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稿之人 如世之趨權利者

더구나, 세상은 물밀듯이 권력만을 따르는데, 이와 같이 心力을 써서 구한 것을 권력 있는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밖의 한 초췌하고 메마른 사람에게 주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권력자에게 추세하는 것과 같구나.

<세상사람이 권력자를 추구하듯 나를 따라주는구나>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 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태사공이 이르기를, 권력으로 합한 자는 권력이 떨어지면 교분이 성글어진다고 하였는데, 군도 역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일 텐데, 권력에 추세하는 테두리를 초연이 떠나서 권리를 좆아 들어가지 않으니, 나를 권력으로 대하지 않는단 말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이 잘못된 것인가?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 이후라야 소나무, 잣나무는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 고 하였다. 송백은 사철을 통하여 시들지 않는 것으로서, 세한 이전에도 하나의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하나의 송백이다. 성인이 특히 세한을 당한 이후를 칭찬하였는데, 지금 군은 전이라고 더한 것이 없고, 후라고 덜한 것이 없구나.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세한 이전의 군을 칭찬할 것 없거니와, 세한 이후의 군은 또한 성인에게 칭찬받을 만한 것 아닌가? 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한갓 시들지 않음의 정조와 근절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또한 세한의 시절에 느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비<丕+邑>榜門 迫切之極矣悲夫 阮堂老人書

 

! 서한의 순박한 세상에 급암, 정당시 같은 어진 이에게도 빈객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하곤 하였으며, 하비의 방문같은 것은 박절이 너무 심하였으니 슬픈 일이다.  완당노인 쓰다

 

 

<참고 : 추사고택에서 배포하는 자료를 참고로 한 풀이문 >

! 서한의 순박한 세상에 급암, 정당시 같은 어진 이에게도 빈객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하곤 하였고, 이는 하규(下규)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방을 붙여 "一死一生에 사귀는 정을 알겠고, 一貧一富에 사귀는 모습을 알겠으며, 一貴一賤ㅡ으로도 곧 사귀는 정을 알 수 있겠노라" 고 하였던 고사에서도 같은 것이었으니, 이렇듯 세상 인심의 절박함이 극에 도달한 것은 참  슬픈 일이로구나.  완당노인 쓰다. 

 

 

세한도 ( 歲寒圖 )

 

추사가 제주도에서 유배 중이던 1844년(헌종 10),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변함없이 지극함에 감동하여 그려준 그림이다.

 

이러한 사연은 그림의 왼편에 쓰여있는 추사의 발문(跋文)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추사는 발문에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논어(論語)」자한편(子罕篇)의 글귀를 인용하여 권력과 이익에 좌우되는 세상인심과, 그 가운데서도 스승을 잊지 않고 중국에서 구한 귀한 서책을 멀리 귀양간 스승에게 보낸 이상적의 마음 씀씀이를 칭찬하였다. 또한 논어의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라는 구절은 특히‘세한(歲寒)’이라는 시기를 강조한 것으로 해석하면서, 고적하고 어려운 자신의 유배생활을 세한(歲寒)에 비유하고, 송백(松柏)과 같은 기상을 잃지 않으려는 자신의 굳센 의지도 은연중에 표현하고 있다.

 

그림을 보면 넓은 공간에 자그마한 집과 아름드리 송백만이 매우 간략하게 그려져 있어 추운 시절의 황량한 느낌이 잘 나타나 있다. 삼각형의 안정된 구도 속에 꼿꼿하고 굳센 필치와 메마르고 차가운 먹색이 어우러져 고고(孤高)한 문기(文氣)를 강렬하게 발산하고 있다.

 

이상적은 중국어 역관(譯官)으로 십 여차례 중국을 드나들며, 스승의 소개로 중국의 명망있는 문사(文士)들과 깊이 교유하였다. 추사에게서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은 이듬해 다시 중국 북경에 가게 되었고 옛 친구인 오찬(吳贊)의 잔치에서 세한도를 내보였다. 이 때 자리를 함께 했던 청나라 문사 16인은 이 그림을 감상하고는 세한도의 높은 품격과 사제간의 깊은 정에 감격하여 저마다 이를 기리는 시문(詩文)을 남겼다.

 

현재 세한도의 두루마리에는 그림 뒤쪽에 이들의 시문이 모두 붙어 있으며, 이외에도 김준학(金準學),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정인보(鄭寅普, 1892∼?)의 찬문(讚文)도 포함되어 있다.  

 

원문: http://www.meok.org/dataroom/4_data_28.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