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 2010.06.26 02:59 / 수정 : 2010.06.27 07:51
詩人의눈물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교과서에, 대중가요에
누구나 하나쯤은 외우는
"아버지 작은 기념관 하나라도"
南으로 온 시인의 아들은
가난과 싸우다 쓸쓸히
꿈 못 이루고 하늘로
"아… 할아버지, 아버지"
시인의 손녀도 의지할 곳 없이
'가리비 팍팍 뿌리옵소서'
피자 회사에서 받은
단어 사용료 몇푼이
할아버지가 준 유일한 유산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교과서에서만, 노래로만
작은 기념관 하나 없는
- ▲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의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김소월‘먼 후일’) 서울 행당동 소월공원에 있는 김소월의 흉상. 소월의 오른쪽 뺨에 비둘기가 흘린 분비물이 눈물처럼 남아 있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나는 소월(素月)이다
나는 노래했다. 봄에는 고향 평북 정주의 야산에 흐드러진 '진달래꽃'을, 낙엽 떨어지는 겨울 밤엔 어머니와의 대화를 '부모'로 읊었다. 내 시(詩) 주머니는 말 그대로 '화수분'이었다.
조국은 아름다웠지만 시대는 엄혹(嚴酷)했다. 내 나이 두살 때 나귀에 먹을 것 실어오던 아버지는 일본인 철도노동자에게 맞아 정신을 놓고 말았다. 여덟살 때 겪은 국망(國亡)은 내 육신(肉身)이 스러질 때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곽산 남산보통학교 나와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교장으로 계신 오산중에 입학해선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한동안 일경(日警)을 피해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어느 불행한 시인이 말했던가, 우울(憂鬱)은 시를 꽃피우는 자양분이라고.
오산중 교사였던 스승 김억(金億)의 추천으로 나는 1920년 동인지 '창조' 5호에 첫 시를 냈다. 그 후 5년간 154편을 썼다. 내 생애 가장 화려했던 시기는 1922년이었을 것이다. 그 한 해에만 '먼 후일' 등 30편을 썼던 것이다.
생(生)의 화려한 날은 짧다. 1927년 동아일보 평북 구성(龜城)지국 경영에 실패한 뒤 난 술독에 빠져 지냈다. 1934년 12월 27일 이승과 하직했을 때 조선일보는 '청년 민요시인 소월 김정식 별세'라는 기사로 내 죽음을 알렸다.
'진달래꽃이라는 시집을 발행해 시단에 이채를 나타내이던, 재질이 비상튼 청년시인 김정식씨가 침묵으로 일관하던바 뇌일혈로 급작스레 별세해 유족들의 애통하는 모양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나는 세상에 아들 넷과 딸 둘을 남겼다. 그들의 소식이 북한의 주간 '문학신문'에 연재된 탐방기(探訪記)-'소월의 고향을 찾아서'에 전해진 바 있다. 2004년 '문학사상'에 소개된 글은 1966년 5월 10일부터 7월 20일 사이 쓴 것이다.
탐방기에 따르면 장남 준호(俊鎬)는 고향 정주 곽산에서 목수를 하고 있다고 한다. 둘째 아들 은호(殷鎬)는 평북 경공업총국의 상급지도원이라고 한다. 유복자였던 넷째아들 낙호(洛鎬)는 평양의 설계연구기관의 연구사라고 한다.
딸 구원(龜元)을 비롯해 영실, 정옥, 영철 등 손자들은 고향 인근 문장리에 산다고 했다. 이 글엔 내 호 '소월'이 고향 마을, 일명 진달래봉으로 불리는 소산(素山) 위에 걸린 달에서 유래했다는 주민들의 증언도 나오고 있다.
북한에서 난 처음엔 민족주의·애국주의 시인으로 추앙됐다. 그러더니 1967년에는 돌연 봉건·유교 사상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시대별로 변한 북한의 나에 대한 평가를 남에 있는 평론가 권영민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조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풍부한 시흥(詩興)과 고운 리듬과 절제있는 표현으로 사실주의적으로 노래했지만 그의 문학활동은 민족해방투쟁으로 연결되지 못했고 3·1운동 이후의 시대적 변천에 따라오지 못했다."(조선문학사·1956년)
"소월의 시가에 떠도는 애수(哀愁)는 잃어진 것에 대한 비애로서 극히 낭만적인 색조를 띠게 된 것이 사실이다. 사실주의적 시인인 김소월은 제한된 한계에서나마 당시 현실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해방전 조선문학·1958년)
"소월의 세계관은 협애해 현실에 혁명적으로 침투하지 못했고 그의 시 문학이 구현하는 애국주의, 인민성, 생활전망성도 그만큼 제한적이어서 비판적 사실주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조선문학사·1964년·주체사상이 등장한 뒤)
"깊은 비애의 정서를 노래함으로써 1920년대 시단에서 민요풍의 시를 개척하고 발전시켰지만 노동계급의 계급적 이념과 인민적 입장에서 출발하지 못해 1920년대의 시대적 높이에 이르지 못했다."(조선문학사·2000년 발간본)
#부모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되어서 알아보랴?
- ▲ 서울 정동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 소장중인‘진달래꽃’초 판본(1925).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나는 시인의 아들이다
소월의 삼남(三男) 정호는 소월이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인 1932년 태어났다. 위로 두 형과 두 누나가 있었고 나중에 유복자(遺腹子) 남동생이 있었다. 18세 때 6·25가 터졌다. 그에게 어머니(홍단실·洪丹實)가 이리 권유했다.
"너만이라도 남으로 가라…." 전쟁 때 그 길은 인민군이 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전쟁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인의 아들은 포로로 붙잡혔다. 인천형무소, 부산과 거제포로수용소를 거쳐 그는 반공(反共)포로로 풀려났다.
그는 그 후 국군에 자진 입대해 1955년 제대했다. 군 복무를 마쳤지만 갈 곳은 없었다. 철도청에 근무하던 친척의 주선으로 교통부에 임시직으로 취직했다. 월급이 쌀 한 가마니였지만 그때 그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날 수 있었다.
결혼은 했지만 시인의 아들은 반년이 채 안 돼 결혼반지까지 팔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곤궁한 처지에 빠진 그는 1958년 동아일보의 기자에게 자신이 '소월의 친자(親子)'임을 알렸다. 그래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홍익회에서 4년을 일한 뒤 나와 레코드 외판원을 할 때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를 찾아가 도움을 청해봤다. 미당은 그리 사는 소월의 아들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미당은 정호의 딱한 사정을 월탄 박종화, 시인 구상에게 전했다.
그들은 "소월의 하나뿐인 아들이 남에서 외판일 하는 걸 북이 알면 얼마나 악선전하겠느냐"며 당시 국회의장 이효상(李孝祥)에게 추천서를 써줬다. 그 덕에 정호는 국회에 취직했다. 하지만 가혹한 운명은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8년간 열심히 일했지만 이번엔 아내의 신부전증이 악화된 것이다. 치료비 마련을 위해 남편이 택할 길은 몇푼 안 되는 퇴직금에 기대는 것뿐이었다. 시인의 아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한 가지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고민했다.
서울 남산에 있는 것을 비롯해 소월 시비(詩碑)가 전국에만 13개나 되고 남산에 '소월로'라는 길이 만들어졌으며 1986년엔 문학상도 제정됐지만 정작 아버지의 문학을 기릴 조촐한 기념관 하나 없는 현실을 아들은 안타까워했다.
한때 라이온스클럽 회장을 지낸 이가 10억원을 모으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그이가 지병으로 쓰러지자 기탁금이 전부 반환된 것이다. 8년 전 소월 탄생 100주년 되던 해 각 예술단체가 떠들썩한 심포지엄을 열고 시 낭송회를 가졌다.
그렇지만 그것뿐이었다. 누구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의 아버지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시인의 아들은 4년 전 아버지 품으로 돌아갔다. 그가 못다 이룬 이승의 꿈은 다시 이승에 남은 아들과 딸에게로 이어졌다.
#초혼(招魂)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어!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어!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자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나가 앉은 산 우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 ▲ 소월의 손녀 김은숙은 식당 일을 하고 있다. / 문갑식 기자
나는 시인의 손녀다
2002년과 2007년, 소월은 한국 현대시 100년 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꼽혔다. 전문지 '시인세계'가 창간호를 냈을 때와 한국시인협회 조사 결과였다. 당시 두 단체의 설문에 국내의 내로라하는 시인과 평론가들이 대부분 참가했다.
2008년엔 KBS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시민 1만8298명이 답했는데 거기서도 '진달래꽃'이 애송시(愛誦詩) 1위였다. 그 뒤가 윤동주(尹東柱)의 '서시'(序詩)와 '별 헤는 밤', 김춘수(金春洙)의 '꽃', 천상병(千祥炳)의 '귀천'이었다.
김정호씨 사후, 소월의 혈육은 딸 김은숙(50)과 아들 김영돈(48)뿐이다. 아들은 인천시 부평에 사나 언론 접촉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충남 아산에 사는 김은숙은 시인에 대한 국민의 사랑을 말하자 "소용없는 얘기"라고 했다.
―서울에서 어떻게 충청도로 왔습니까.
"흘러흘러 왔어요. 남편이 무역회사, 운수업을 했었습니다. 사정이 어려워졌을 때 아는 분이 이곳에 땅이 있다길래…."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이 그리 어려웠나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 후 이사를 스무 번도 넘게 했대요. 생활은 늘 어려웠고 의지할 곳이라곤 없는 힘든 삶이었어요. 나중에 봉천동에서 독채 전세를 얻긴 했지만요."
―그런 부모가 원망스러웠습니까.
"아버진 정이 그리웠는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대단했어요.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저희들에겐 잘해주셨어요. 형편이 안 됐을 텐데 번듯한 옷도 사주셨고요. 본인들은 어려워도 자식들에겐 뭔가 해주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제 동생은 이런 얘기하는 걸 굉장히 싫어해요. 이상한 소문이 사실처럼 알려지는 것도 싫어하고."
―이상한 소문이 뭡니까.
"기자들이 '미당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는 식의 기사를 많이 썼어요. 학교 다닐 때 육성회비 정도 받았을 뿐인데, 자꾸 과장된 기사가 나니 동생이 화를 냈어요. '왜 자꾸 구질구질한 내용이 나가게 하느냐'고요. 저흰 미당 선생님이나 구상 선생님을 명절 때 찾아뵌 정도인데. 미당 선생님은 제 결혼식 때 주례를 서주셨어요."
―할아버지가 남긴 작품의 저작권이 있지 않나요.
"그건 이미 시효가 다 지나 소용없는 거고. 할아버지 때문에 돈 받아본 적은 딱 한 번 있어요. '미스터 피자'라는 회사에서 영화배우 문근영이 출연해 '가리비 팍팍 뿌리옵소서' 뭐 이런 광고를 했을 땝니다."
―가리비를 팍팍?
"그 회사 사장님이 할아버지 시를 좋아하신대요. 그래서 단어 사용료조로…."
―숙모라는 분이 소월의 모든 인세를 챙겨갔기 때문에 정작 소월의 가족들이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그 부분은…. 다 지나간 일인데요, 뭘."
―작고한 김정호 선생은 할아버지(소월)에 대해 무슨 말을 했습니까.
"평생 소원이 자그마한 할아버지 기념관 하나 짓는 거였어요.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요. 북에 있는 형제들도 만나고 싶어했어요. 소문으론 꽤 괜찮게 산다고 하는데 웬일인지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냈는데도 이뤄지지 않았어요. 탈북자들에게 물어보니 쉽게 만날 수도 있다는데, 반공포로여서 불허(不許)한다는 말도 있고, 하여간 아버지에겐 그게 한(恨)이 됐을 겁니다. 전 아니지만 아버진 예술 방면에 재주가 특별했어요."
―무슨….
"아코디언 연주, 그림, 서예, 글쓰기 등 못하는 게 없었어요. 언젠가 할아버지 육필(肉筆) 원고가 나왔다고 해서 봤는데 아버지 필체와 너무 닮아 깜짝 놀란 기억이 납니다."
―김 선생 묘소는 근처인가요.
"아버진 연세 드셔서 성당에 나갔어요. 지금 모신 곳은 경기도 김포의 납골당이고, 어머니 묘소는 아산시 송악면에 있어요. 그 옆에 아버지 묏자리도 마련해 놨었는데…. 앞으로 합장해드려야죠. 그 생각만 하면 속이 상해요."
―소월의 가족이란 사실이 부담이 됩니까.
"학교 다닐 때는 스트레스였지요. 소월의 손녀라는 이야기가 도니 글을 쓸 때마다 무척 신경이 쓰였어요. 아마 그런 게 없었다면 꽤 잘 썼다는 이야길 들었을 텐데 할아버지를 연상하고 보면 평범하기 짝이 없게 보였겠지요."
#왕십리
비가 온다
오누나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가도 왕십리 오네.
웬걸, 저 새야
올랴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이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리어 운다.
중학교 1학년 신입생에게 나눠주는 국어 교과서는 모두 23종 92권이다. 이들 교과서에 가장 많이 실린 것도 그의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이었다. 모두 19회다. 2위가 허균(許筠)의 '홍길동전', 3위가 박완서의 글이었다.
대중가요 가수들 역시 그를 사랑했다. '진달래꽃'(마야) '개여울'(정미조) '부모'(유주용) '산유화'(송민도)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라스트포인트)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활주로) '못 잊어'(장은숙) '초혼'(이은하) 등이다.
―소월의 자손인 걸 감추고 싶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요. 아버지도 할아버지 기념관 한번 마련해보겠다고 이북5도민회다 뭐다 하며 평생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소용이 없었거든요. 저희들도 마찬가지고."
―왜 기념관이 마련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까.
"아무래도 저희가 북에서 왔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남쪽에 터전이 있으면 동료나 제자들이 그래도 뭔가를 해주잖아요."
―국민들의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요.
"관심이 없던 건 아니에요. 오래전에 아버지와 어머니 스토리가 라디오 드라마로 방송된 적이 있어요. '절망은 없다'는 제목이었는데 굉장히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내용이었어요. 그때 많은 분들이 편지도 보내오고 어머니 관절염 치료제니 금침 같은 것도 보내주셨어요. 하지만 그것뿐이었어요. 기자들도 수없이 찾아왔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었고요."
―최근까지의 언론보도를 보면 아산에서 가든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 '송일정'이라고 닭백숙·닭볶음탕·보신탕·붕어찜 같은 걸 팔던 집이었어요. 아버지 돌아가시던 해에 접었습니다."
―영업이 안 됐나요.
"처음엔 괜찮게 됐지요. 개고기 맛이 좋기로 주변에선 꽤 소문이 났거든요. '소월의 손녀가 하는 집'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인근에 있는 학교 선생님들이 많이 오셨어요. 특히 국어 선생님들이요. 그런데 와서 보곤 전부 아무것도 없구나 하고 서운해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1981년 전두환(全斗煥) 정부 때 금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그 훈장증과 '김 선생'이란 분이 1977년 고물상에서 할아버지 육필 원고를 발견했는데 복사본을 받아 식당에 걸어놓았지요. 저희는 할아버지의 흔적이라 생각했지만 번듯한 문학관 있는 다른 시인들과 비교해 보면 초라해 보였을 겁니다."
―소월의 육필원고에 대해선 '진본(眞本)이다 아니다' 하는 설이 많습니다.
"할아버지가 동아일보 지국장 하시던 시절에 쓴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보니 예전에 신문사에서 쓰던 원고지에 쓴 글이었어요. 낙서 비슷한 것도 있었고. 이어령 선생님이 해석도 해주셨는걸요."
―그걸 왜 소월의 자손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저희가 그걸 구입할 사정이 됐으면 구입했을 텐데, 그럴 형편이 아니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송일정 접고 나서 훈장증과 훈장 2개, 육필원고 사본(寫本)은 모두 동생에게 줬어요."
―그럼 진짜 원고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김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줄로만 알지요. 연락은 자주 못 하지만요."
―그런데 하필이면 왜 보신탕집을….
"충청도에 왔을 때 빈땅에서 개를 길렀거든요. 많을 때는 700~800마리를 키웠습니다. 제 가든은 규모가 컸어요. 테이블이 14개에 방도 2개 있었거든요."
―'송일정'을 접은 진짜 이유는 뭔가요.
"남의 빚보증을 잘못해줘서…. 아쉬운 게 있어요. 전 송일정이 잘됐으면 그 한쪽에 자그마한 할아버지 기념관 하나 짓는 게 소원이었어요. 그걸 이루지 못했으니. 송일정을 그만둔 뒤에는 아산 시내에서 조그맣게 삼겹살집을 하다가 그것도 3년 전에 그만뒀습니다."
―그럼 지금은?
"남의 식당 일 돕고 있어요. 남들에겐 '알바'라고 말하지만 그냥."
―자제는.
"고3된 아들 하나 있어요. (혹시 문학적 재능이 있느냐고 묻자) 아니에요, 그 아이는 이공계입니다."
#산
산새도 오리나무
우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영(嶺) 넘어갈라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나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리
돌아서서 육십리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歸), 불귀, 다시 불귀.
삼수갑산에 다시 불귀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년 정분을 못잊겠네
소월 초상화<사진>는 1990년 제작됐다. 당시 문화부가 소월을 '9월의 문화인물'로 정해 한국역사인물화연구회에 초상화 제작을 의뢰했다.
지금까지 소월의 유일한 진영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여러 인물을 합성한 것인데 소재가 불분명하다.
소월의 진영(眞影)은 1934년 동아일보 게재 사진+남으로 내려온 셋째 아들 김정호(2006년 사망)+그의 손자 김영돈(48)의 사진을 참조해 만든 것이다.
포털 사이트 '한국학' 카테고리에 실려 있는데 그 다음이 해괴하다.
현재 문관부는 "누가 그렸는지 모른다"고 답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창고인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에도 이 자료가 없다. 소월 연구가인 서지학자 김종욱(72)씨에게 연락하자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1990년 당시 이어령(李御寧) 장관이 나를 불러 옥문성 화백과 소월 초상화를 만들어보자고 해 셋이 연구해 그렸다"는 것이다. 옥 화백(67)은 경남 거제 출신이라고 한다. 국민들이 애송하는 시인은 얼굴조차 미상(未詳)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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