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5.02 03:00
겸재 정선의 작품 속 서울을 찾아서
"한 폭의 동양화 같네!" 지난 달 28일 서울 종로구 옥인동 수성동(水聲洞) 계곡. 봄빛 완연한 인왕산 아래 듬직한 바위와 자그마한 돌다리가 어우러졌다. 등산복 차림의 관광객들이 계곡을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계곡 앞에 세워진 팻말에는 조선 후기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 ~1759)의 그림 '수성동(水聲洞)'이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과 똑같은데!" 관광객들이 감탄했다. 겸재는 조선 후기를 풍미했던 진경(眞景) 산수화의 대가다. 중국 풍경을 그렸던 이전 화가들과는 달리, 우리 산수(山水)를 화폭에 담아 한국 회화사에 큰 획을 그었다. 겸재가 그린 18세기 한양은 현재의 서울과 얼마나 닮아 있을까? 그 의문을 갖고 겸재 그림 속 서울을 찾아나섰다.
북악산·인왕산 일대 꿰고 있었던 겸재 겸재는 현재 경복고등학교 자리인 서울 종로구 청운동 89번지 일대에서 태어났다. 51세 때 종로구 옥인동 20번지 인근의 인왕곡(仁王谷)으로 이사해 세상을 뜰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북악산과 인왕산 아래 동네를 이르는 장동(壯洞)을 훤하게 꿰뚫고 있었고, 그곳 풍경을 여러번 화폭에 담았다. 지난 달 28일 가장 먼저 찾아나선 곳은 간송미술관 소장 '백악산(白岳山)'속 풍경. '백악산'은 '북악산(北岳山)'의 옛 이름이다. 겸재 그림 속 백악산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건 동쪽 기슭에 자리한 거북이 머리처럼 생긴 바위. 백악산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비둘기 바위'다. 청와대 맞은편에서 백악산을 보니 겸재 그림 속 백악산과 비슷한 위치에서 비둘기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청와대의 푸른 지붕이 산 아래 들어섰고, 그 앞에서 중국인 관광객 한 무리가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겸재는 현재 서울 종로구 세종로, 청운동과 옥인동 일대의 여덟 가지 아름다운 풍경을 '장동팔경(壯洞八景)'이라는 이름으로 즐겨 그렸다. '장동팔경'은 간송미술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등이 전한다. 두 번째 목적지는 간송미술관 소장본 '장동팔경' 속 '청송당(聽松堂)' 터. '솔바람 소리를 듣는 집'이라는 뜻의 청송당은 조선 중기에 큰 선비로 이름났던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1493~1564)의 독서당 이름이다. 이 청송당이 있던 곳은 지금 종로구 청운동 경기상고 자리. 경기상고 전산관 건물 뒷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뒤뜰에 커다란 바위가 있고, 그 바위에 '청송당유지(聽松堂遺址·청송당 터)'라고 새겨져 있었다. 북악산 능선의 형태만 그림과 비슷하게 남아있을 뿐 그림 속 독서당도, 소나무숲도 간 곳이 없다. 30여년간 경기상고에서 근무해온 이윤성 경기상고 행정실 팀장은 "지금 청송당 터에서 학교 담 너머로 바라보이는 풍경 속에 예전에는 폭포가 있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세 번째로 찾아간 '청풍계(淸風溪)'는 인왕산 동쪽 기슭의 북쪽 골짜기로 현재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지키다 순국한 우의정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 ~1637)이 선조 41년(1608년) 이곳을 별장으로 꾸미면서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이란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장동팔경첩' 간송미술관 소장본의 '청풍계' 전경에 띠로 지붕을 인 작은 정자가 있다. 김상용의 저택 안에 있었던 '태고정(太古亭)'이다. 현재 이 일대는 주택가다. 청운초등학교 오른쪽 골목을 죽 따라 들어가면 아스팔트로 포장된 가파른 비탈길이 나온다. 비탈길 중턱 오른쪽 벽을 감싼 울타리 안에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 새겨진 바위만이 옛날의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眞景'은 마음속 풍경 이날 수성동 계곡을 포함해 백악산, 청송당, 청풍계 등 겸재가 그림의 소재로 삼은 곳 중 현위치를 대략 짐작할 수 있는 네 군데를 답사했다. 그중 가장 겸재 그림과 유사한 곳은 '수성동 계곡'. 이곳은 1971년부터 옥인시범아파트가 있던 곳으로 서울시가 2010년 아파트를 철거하고 1060억원을 들여 새로 단장했다. 지금의 수성동 계곡이 겸재 그림과 유사한 것은 계곡 복원 당시 겸재 그림 속 풍경을 참고로 했기 때문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녹지를 조성하려고 옥인시범아파트를 철거했더니 계곡에서 두 쪽짜리 돌다리가 발견됐다. 문화재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받았더니 바로 겸재 그림에 나오는 '기린교(麒麟橋)'라더라. 그래서 그림과 유사하게 복원하려고 석축을 쌓고, 그림처럼 계곡에 소나무를 심었다"고 했다.
관광객들은 "그림과 똑같다"며 감탄했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수성동 풍경이 그림 속 풍경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건 아니다. 동행한 사진 기자는 그림과 똑 같은 구도로 계곡의 풍광을 카메라에 담으려다 고개를 내저었다. "화가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림을 그렸다. 지금 우리처럼 아래에서 산을 올려다보면 그림과 같은 구도의 풍경이 나올 수 없다." 사진 기자의 설명이다. 세월이 흘러도 강산(江山)은 변함이 없을 텐데 '백악산'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산봉우리와 비둘기 바위의 형상이 그림과 딱 들어맞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겸재의 '진경(眞景)'이란 대체 무슨 의미일까? 전문가들은 겸재의 '진경 산수'를 서양의 풍경화와 혼동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많은 사람이 '진경산수'를 '사진처럼 그린 것'이라 생각하는데 '진경'이란 진짜 경치를 참다운 경지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했다. 겸재는 실제 경치를 그림의 대상으로 하되 자신의 마음속에서 재구성해 화폭에 담았다. 마음속의 이상적인 풍경을 그리는 것은 동양 산수화의 오랜 전통인데 겸재는 이 전통을 지키되 그 대상을 중국 산수가 아닌 우리 산수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백인산 연구실장은 "서양 풍경화에선 대상을 고정시키지만 동양 산수화는 걸음을 옮겨 가며 여러 면을 두루 섭렵해 한 화면에 그린다. 겸재 그림 속 시점이 서양의 투시도법과 다른 것은 그 때문"이라고 했다.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겸재의 '진경'에 '선경(仙境)', 즉 이상향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고 해석했다. 이태호 교수는 "우리가 겪는 현실은 동양철학의 개념으로 보면 참된 현실이 아니다. 겸재는 성리학적 이상을 그리려 했기 때문에 '눈'으로 그리기보다는 '기억'으로 그렸다"고 했다. 그렇다면 수성동 계곡을 보고 "그림과 꼭 닮았네!"라고 탄성을 내지르던 관광객들은 그림 보는 안목이 없는 걸까? 전문가들은 겸재의 탁월함이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해석한다. 백인산 연구실장은 이렇게 말했다. "있는 그대로 그리자고 치면 사진을 못 따라간다. 그런데 사람이 어떤 장소에서 감명을 받을 때 카메라의 눈으로 그 장소를 보는 건 아니다. 겸재는 장소가 주는 느낌과 감정, 즉 사람들 마음속 경치를 생생하게 화폭에 그려냈다. 보는 사람들이 '그림과 똑같네!' 하는 건 바로 그 '느낌' 때문이다." 그래도 겸재 정선은 그렸다. 경복궁의 폐허를..김석 입력 2021. 03. 18. 09:00 댓글 2개
얼마 전 미술사학자 최열이 쓴 《옛 그림으로 본 서울》(혜화1117, 2020)이란 책을 읽으면서 겸재가 얼마나 대단한 화가였는지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조선 시대 한양의 모습은 겸재를 빼놓고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아니, 겸재의 그림을 빼면 한양을 소재로 한 옛 그림의 역사가 대단히 빈약해지고 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겁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을 구석구석 그리도 많이 그려 남긴 화가는 겸재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습니다. 책에 소개된 겸재의 그림만 자그마치 41점입니다. 왜 겸재, 겸재, 하는지 알 수 있겠더군요. 당연히 궁금증이 생깁니다. 서울을 그렇게 많이 그린 겸재가 설마 경복궁을 안 그렸을까? [연관기사] 왜 조선 화가들은 경복궁을 안 그렸을까? 이 기사에서 저는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 근정전과 임진왜란 이후의 근정전 터를 보여주는 그림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경복궁 자체가 주인공이 된 경우가 조선 시대 그림에는 없다고. 다시 말해 조선의 화가들은 경복궁을 그리지 않았다고.
화면 왼쪽 가운데 삐죽삐죽 서 있는 건 경회루의 돌기둥,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근정전 석축 기단의 흔적입니다. 그나마 나무 사이에 멀쩡한 건물이 보이죠. 궁궐 역사학자 홍순민 교수에 따르면, 당시 경복궁을 지키던 군사들의 막사입니다. 경복궁의 서쪽 출입구인 영추문(迎秋門)은 돌로 막혔고, 인적 끊어진 경복궁 경내엔 소나무가 빽빽한 숲을 이뤘습니다. 참 쓸쓸한 정경이죠. 사대문 안 토박이인 작가 김훈은 산문집 《연필로 쓰다》(문학동네, 2019)에 실은 <귀향>이라는 글에서 경복궁에 얽힌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경복궁,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 삼청동 숲과 한양도성 언저리는 내 고향의 중요한 놀이터였다. 경복궁은 담장이 허술해서 아무데로나 드나들었다. 경복궁 마당에서 나는 또래들과 닭싸움, 말타기, 자치기, 깡통차기를 하며 놀았다. (중략) 그때 경복궁은 일제 때 헐리고 전쟁 때 그을린 모습 그대로의 폐허였다. 전각이 있던 자리에 주춧돌만 남았고, 흩어진 석재 사이에 풀이 돋아나서 메뚜기들이 뛰었다. 남아 있는 전각의 아궁이 속은 어둡고 축축했다. 거기에 찬바람이 드나들었고 오래전에 식은 재 냄새가 났다." 1950, 60년대까지도 경복궁은 그랬습니다. 한양성곽이 무너진 자리에 널려 있었다던 베개만 한 크기의 돌들을 보며 어린 김훈은 "그 돌들이 너무나 작아서 나는 나라를 슬퍼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좋은 것, 아름다운 것, 행복을 주는 것만 그려도 주어진 시간이 모자랄 판에 나라 백성을 기죽이고 쓸쓸함만 자아내는 폐허를 뭐에 쓰자고 그리겠어요. 번듯한 경복궁이라면 또 모를까. 그래도 겸재는 그렸습니다. 경복궁의 폐허를 그리겠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말이죠. 이 장면을 화폭에 옮기는 화가의 마음자리를 저는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습니다. 분명한 건 한평생 겸재가 본 경복궁은 변함없이 저런 모습이었다는 점이겠죠. 김훈 작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겸재의 화폭 속에서 무너진 것들은 아주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고, 그 비극을 쓰다듬는 시간과 자연의 힘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명망 있는 작가의 표현은 역시 다르군요. 그런데 경복궁의 폐허를 보여주는 겸재의 그림은 이것 말고도 한 점 더 있습니다.
이제 시선을 가운데 담장으로 옮겨봅니다. 경복궁 북쪽 담장입니다. 자세히 보면 두 군데가 허물어져 있죠. 화가가 눈으로 본 그대로 그린 겁니다. 임진왜란 이후 150여 년이 지난 뒤에도 경복궁 북쪽은 저런 모습이었습니다. 겸재가 그리지 않았다면 볼 수 없는 퇴락한 경복궁의 모습이죠. 수백 년 동안 경복궁의 주인은 무성하게 자란 소나무들이었습니다.
화성(畵聖)으로까지 불린 겸재의 예술 세계는 참 넓고도 깊습니다. 물론 겸재 그림의 예술성을 평가할 만한 능력이나 안목이 제게는 없습니다. 다만, 겸재가 그림에 담은 장면 장면들이 지금에 와서야 얼마나 소중한지 매번 감탄하게 됩니다. 폐허였을 망정 겸재가 남긴 작은 그림 두 폭에서 경복궁의 한 시절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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