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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가수서 디벨로퍼로 변신 구창모 아티스글로벌회장

이름없는풀뿌리 2015. 9. 30. 10:40

 

인기 가수서 디벨로퍼로 변신 구창모 아티스글로벌회장

"키르기스스탄 한국형 아파트단지 제 작품입니다"
해외서 車딜러등 성공ㆍ실패 맛봐…키르기스스탄서 주택사업 꽃피워
사업궤도 오르면 가수활동 하고파

 

30대 중반을 넘긴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그를 '가수 구창모'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그의 노래 한 두곡쯤은 어렵지 않게 따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창모 아티스글로벌 회장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수'가 아닌 '부동산 사업가'로 이름을 높이고 있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에 2500억원의 투자가 이뤄진 최대 규모 한국형 아파트 단지 건설이 그의 작품이다.

"사업을 시작하던 2005년 당시 비슈케크는 한국의 70년대 같았습니다. 한번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있었지요."

부동산 붐이 일고 있다는 현지 지인의 연락을 받고 2005년 초 카자흐스탄을 찾았을 때 그는 곧바로 현지의 부동산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지인이 3~4년 전 사뒀다는 2만5000달러짜리 집은 35만달러가 돼 있었고 100배까지 값이 오른 토지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지인은 카자흐스탄에서 부동산 개발업을 해보자고 제의했으나 구 회장의 눈에 비친 카자흐스탄 부동산 시장은 불안하기만 했다. 자칫 막차를 탈 수도 있겠다고 판단한 그는 카자흐스탄에 비해 부동산 가격이 오르지 않은 키르기스스탄으로 눈을 돌렸고 비슈케크에 1400여 가구 규모 아파트 건설 사업을 따냈다.

지난해 11월 모델하우스 오픈 때는 대통령과 장관들이 참석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아티스 타운'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주기도 했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 '희나리'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내놓으며 잘나가던 그는 1990년 돌연 가수 생활을 접었고 1991년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그가 처음 택한 일은 자동차 딜러. 사업 아이템을 찾던 구 회장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팬이었던 당시 현대종합상사 자동차 본부장을 만났고 그것이 인연이 돼 자동차 딜러 길로 접어들었다. 당시 그는 카자흐스탄의 유일한 외제차 딜러였고 95년까지 줄잡아 40억원을 벌어들였다. 한마디로 대박이었다. 그러나 수중에 돈이 넘치자 녹용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6개월 만에 그동안 번 돈을 몽땅 날렸다. 다시 자동차 판매를 시작해 돈을 모았지만 한류 바람을 타고 중국에 드라마와 연예 프로그램을 수출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다시 한번 실패를 맛봤다.

부동산 개발업에 눈을 돌린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2004년 부산 덕천동 복합상가 개발을 시작했다가 이번에도 사업을 완료하지 못하고 개발권을 시공사에 넘겨주는 아픔을 겪었다. 구 회장은 "몇 번의 실패를 통해 많은 것을 잃었지만 또 많은 것은 얻었다"며 "당시 톡톡히 치른 수업료 덕분에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가수로만 살아왔던 그는 '관리'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때문에 조직 관리, 자금 관리가 허술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사업 실패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구 회장의 말대로 실패 경험이 좋은 자산이 됐고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에도 그의 사업무대는 중앙아시아였다. 그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자리를 잡았고 현재 현지 직원 70여 명을 거느리고 있다.

그의 목표는 키르기스스탄을 넘어서 중앙아시아 5개국, 나아가 CIS 국가 전체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다. '아티스글로벌'이라는 브랜드를 확실히 남기고 싶은 것이다. 구 회장은 "현지 직원들에게 한국인의 근면성과 한국의 빠른 경제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준다"고 말했다. 이유는 그들에게 꿈을 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 자신 역시 '꿈은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구 회장은 "언젠가 신문에서 읽었던 기업인의 인터뷰 기사를 스크랩해 두고 늘 마음에 새긴다"고 말했다. 바로 강덕수 STX 회장 이야기다. 그가 마음에 새기는 강 회장의 조언은 "고생스럽더라도 한국 기업들이 오지개발에 나서야 한다"는 것. 구 회장은 "구미국가들이 오지를 개발해 황금알을 줍고 나면 한국 기업들은 뒤늦게 뛰어들어 이삭줍기 정도에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아직은 자금과 조직력이 부족한 만큼 힘들더라도 남들이 가지 않은 곳에 가야겠다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카자흐스탄만 해도 이미 현지 건설업체가 부동산 호황의 과실을 따먹은 뒤라고 판단해 선택한 곳이 키르기스스탄이었고 구 회장의 생각은 지금까지는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고도라는 해발 800m의 비슈케크는 한국과 비슷한 점도 많아 사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그리고 구 회장은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키르기스스탄의 오아시스로 불리며 대통령들 휴양지로 유명한 이식쿨 호수에 각종 해양시설과 호텔, 골프장 등 리조트 건설을 추진 중이며 병원 투자도 계획 중이다. 리조트 건설을 위해 400㏊ 정도 땅도 확보했고 사업계획도 완성 단계다.

또 하나의 대형사업은 신도시 건설과 자원개발권 확보.

그는 지난 2월 우리은행과 컨소시엄으로 비슈케크시와 187㏊의 신도시 건설, 쓰레기 처리장 건설, 공공운송사업 등 총사업비 4500억원 규모 3대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한 SOC사업 약정도 맺었다. 비슈케크에 각종 시설을 지어주는 대가로 자원개발권을 갖기로 한 이번 사업은 고유가 시대를 맞아 자원개발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트렌드를 반영한 것으로 국내 다른 건설업체에도 시사하는 바가 클 것으로 보인다. 구 회장은 "사업은 본인 의지가 참 중요하다. 경주마처럼 씩씩하게 밀어붙여야만 성공할 수 있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현재 그의 머릿속은 사업 생각만으로 가득차 있다. 인터뷰 도중에도 끊임없이 전화벨이 울렸고, 그의 손엔 중앙아시아행 비행기 티켓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인기가수로 살었던 그에게 음악을 중단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을까. 구 회장은 "개인적으로 음악을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180도 다른 세상을 경험한 것은 행운이었다"며 "사업을 안정권에 올려놓기까지는 가수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가수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그의 음악동료이자 인생의 동반자인 배철수 씨와도 자주 그런 이야기를 나눈다. "가수로 15년, 사업가로 17년을 살았습니다. 이번 사업이 성공해 회사가 궤도에 오르면 훌륭한 전문경영인을 영입한 후 가수로 돌아가는 게 꿈입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앞으로 몇 년간은 치열하게 일에 매달려야겠죠. 그래도 꿈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꿈' 덕분인지 공항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에는 힘이 넘쳤다.

■ 모든 건설공정 한국식…주거문화 수출 자부심
= 아티스글로벌이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 추진하는 사업은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는 것이다.

키르기스스탄 정부가 제공한 7.6㏊의 땅에 지하 1층~지상 18층 규모로 아파트 1392가구를 짓는 사업이다. 이 가운데 992가구는 일반에 분양되며, 400가구는 임대아파트로 정부에 기부채납하는 방식이다. 땅을 제공한 것은 물론 철근, 시멘트 등 건축자재 공급 등에 대해서도 현지 정부의 지원은 전폭적이다. 당연히 사업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다. 아티스글로벌은 49년간 토지사용권을 가지며 우리은행이 토지담보 등기를 설정한 상태다. 분양 방식은 선 시공, 후 분양으로 골조 공사가 90% 이상 끝나는 올 10월쯤이면 본격적으로 분양될 것으로 보인다. 모델하우스는 지난해 11월 문을 열었다.

이 사업은 건축의 모든 단계가 한국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한국형 아파트 시범단지로 짓고 있는 데다 건축 관련 규정이 허술한 현지 사정 때문에 모든 건축 규정을 한국 건축 규정에 맞춰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벽식 공법을 도입한 것도, 강도 8의 지진을 견딜 수 있는 내진설계를 한 것도, 한국식 온돌로 난방시설을 한 것도 이 나라에서는 처음이다. 단지 개념의 아파트를 도입해 근린시설과 주차장, 스포츠센터를 갖춘 것 역시 현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발상이었다. 공급자 위주의 건설 관행도 소비자 위주로 바꿔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

또 장학금 지원, 복지시설 지원, 의료봉사 등 이익금을 사회에 환원하는 데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오래 사업을 하려면 현지인을 위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 구 회장 생각이기 때문이다. 구 회장은 "이번 사업은 한국인으로서의 명예가 걸린 일이어서 더욱 잘해내고 싶다"며 "외국기업이 과실만 따먹고 나간다는 인상을 주면 현지에서 오래 사업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은아 기자 / 사진 = 박상선 기자]
 
 

 

사업가로 변한 구창모 "내가 가요계를 떠난 이

유는…"

 

70~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가수 구창모. 80년대 국내가요계를 평정했던 `송골매`의 리드보컬이자 인기 솔로 가수로 활동했던 구창모는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두 다 사랑하리` `처음 본 순간` 등의 히트곡들을 발표해 당대 독보적인 그룹사운드로 우뚝 섰으며, `희나리` `방황`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로 솔로가수로서도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1991년 돌연 가요계를 떠나 많은 팬들을 안타깝게 했던 구창모가 사업가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17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 그는 중앙아시아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이름을 드높이고 있다. 최근에는 키르기스스탄에 2500억 원의 투자가 이루어진 최대 규모의 한국형 아파트 단지 건설을 추진 중이다. MBC `네버엔딩스토리`를 통해 최근 근황을 밝힌 구창모는 그의 돌연 은퇴에 대해 당시 가요계에 일어났던 `PD사건`을 이유로 밝혔다. PD 사건은 가수들을 프로그램에 출연시켜주거나 노래를 방송해주고 매니저들로부터 돈을 받은 쇼 프로그램 담당 PD가 검찰에 구속된 사건이다. 당시 구창모는 검찰에 참고인 신분으로 한 번 소환되어서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굉장히 큰 상처를 받아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내 인생에 음악은 전부다` 라고 말할 만큼 음악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송골매 시절부터 솔로가수로 활동한 시절까지 `자신이 뽑은 가장 좋아하는 노래 BEST 5` 를 뽑아주었는데 가요계를 정식으로 데뷔한 후 첫 번째 히트곡이자 자작곡이었던 ‘어쩌다 마주친 그대’, ‘처음 본 순간’, ‘모두 다 사랑하리’,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솔로 데뷔 타이틀곡이었던 ‘희나리’를 꼽았다. [디지털뉴스부 digital@mk.co.kr]

 

 

 

 

네버엔딩스토리, 사업가로 변한 구창모를 만난다

 

70~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가수 구창모.

80년대 국내가요계를 평정했던 `송골매`의 리드보컬이자 인기 솔로 가수로 활동했던 구창모는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두 다 사랑하리` `처음 본 순간` 등의 히트곡들을 발표해 당대 독보적인 그룹사운드로 우뚝 섰으며, `희나리` `방황`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로 솔로가수로서도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1991년 돌연 가요계를 떠나 많은 팬들을 안타깝게 했던 구창모가 사업가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17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 그는 중앙아시아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이름을 드높이고 있다. 최근에는 키르기스스탄에 2500억 원의 투자가 이루어진 최대 규모의 한국형 아파트 단지 건설을 추진 중이다. MBC `네버엔딩스토리`를 통해 최근 근황을 밝힌 구창모는 그의 돌연 은퇴에 대해 당시 가요계에 일어났던 `PD사건`을 이유로 밝혔다. PD 사건은 가수들을 프로그램에 출연시켜주거나 노래를 방송해주고 매니저들로부터 돈을 받은 쇼 프로그램 담당 PD가 검찰에 구속된 사건이다. 당시 구창모는 검찰에 참고인 신분으로 한 번 소환되어서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굉장히 큰 상처를 받아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내 인생에 음악은 전부다` 라고 말할 만큼 음악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송골매 시절부터 솔로가수로 활동한 시절까지 `자신이 뽑은 가장 좋아하는 노래 BEST 5` 를 뽑아주었는데 가요계를 정식으로 데뷔한 후 첫 번째 히트곡이자 자작곡이었던 ‘어쩌다 마주친 그대’, ‘처음 본 순간’, ‘모두 다 사랑하리’,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솔로 데뷔 타이틀곡이었던 ‘희나리’를 꼽았다. [디지털뉴스부 digital@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