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19일 금요일
인천국제공항→베트남 하노이의 노이바이 국제공항→호안 키엠 호수→바딘광장→한 기둥 사원→하롱베이로 이동(아베쎄 휴게소경유)→석식(하롱정)→숙소(HARONG PALACE HOTEL)
6월12일 발표에 의하면 전립선염을 가진 A씨(남)는 6월8일 밤11시30분경, 열이 심하게 나 외래격리진료소에서 진료. 9일 아침7시경, 국가지정병원으로 후송. 2차 검사 실시 후 메르스 확진. 폐암환자인 부인을 5월22일부터 29일까지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에서 간호해오던 중 29일 동 병원응급실에 있던 확진자로부터 전염되었다고. A씨는 지난3일 오후1시59분~2시2분 사우동의 김포수비뇨기과와 5일 오전8시30분~9시3분 연세내과의원을 방문.
확진자 B씨(여)는 5월27일 삼성서울병원응급실에 보호자로서 20분정도체류. 6월8일 오후 감기증상호소. 6월9일 ㈜이원의료재단에 검사결과 1차 양성인지. 검체를 질병관리본부에 보내 2차 검사 실시. 6월11일 확진. 6월 11일 00:30분 국가지정병원(국가 메르스 지정병원인 분당서울대병원)으로 이송조치.
“이계옥씨 핸드폰이죠?”
“네, 맞는데요?”
“여기는 김포시보건소입니다. 이계옥씨 본인이나 가족 중에 혹시 발열, 기침, 근육통 등의 메르스 증세 보이는 분 없나요?”
“없는데요?”
“언제든 증세가 나타나시면 김포시보건소로 연락주시구요, 격리까지 하실 필요는 없지만 되도록 외출을 삼가세요. 어쩔 수 없이 외출하시려면 꼭 마스크를 착용하시고, 가족의 식기소독도 자주 하시기 바랍니다.”
14일(일)오후5시쯤, 비상근무 한다는 보건소직원으로부터 받은 전화내용파악을 위해 영수증을 확인해보았다. 김포의 메르스 확진자 두 명 중 한 사람인 B씨가 6월3일 오후2시50분에 풍무동 N마트에서 계산. 남편혼자 3시2분에 계산하여 내 폰 번호로 적립.
“전후2시간대에 같이 있었던 사람들한테 전화하는 겁니다. 내일(15일)부터 오전오후로 확인전화할 거구요, 17일 밤12시 이후로는 자동해제 됩니다.”
전국을 시끄럽게 긴장시키면서 우리나라를 메르스 2위국이라는 불명예를 안겨준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작년(2014년)에는 세월호 사건으로 전국을 침통하게, 모든 경제활동을 스톱시키더니 올해는 5월 하순경 뜻하지 않게 발발한 메르스로 인해 한국을 여행하려는 예약최소 등 경제적 피해가 이만저만 아니다. 되도록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출입하지 말라는 각종매스컴주의로 아파도 병원을 마음대로 찾을 수 없고, 쇼핑도 자유롭게 할 수 없으니 길거리나 대중교통은 물론 주2회의 노래교실회원참석율도 반 이하로 푹 줄었다. 거리의 사람들마다 마스크를 착용하는 등 손 깨끗이 자주 씻기는 기본이었다. B씨가 5일에도 다녀갔다는 N마트는 19일까지 문을 닫아야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16일 오전, 강서구보건소라면서 남편주소를 묻는 전화를 받았다. 김포시보건소에 확인해보니 의심해볼만한 전화로 어떤 요구에도 절대 응하지 말란다.
“엄마, 이 상황에 어떻게 외국여행을 떠나려고 해? 가지 말아요.”
“이모부한테 전화했더니 오히려 요즘 같은 때에는 한국을 떠나야한다며 웃으시던 걸?”
“그렇다면 우리들도 함께 데려가줘야지, 엄마아빠만 떠나면 어떻게 해?”
“17일 밤12시까지 할머니, 아빠, 나한테 아무 증세 없으면 괜찮대. 너무 걱정하지 마.”
다행히 18일에도 시어머님이나 남편, 세 식구에게 아무런 중상이 없어 여행 가방하나에 주로 여름옷, 샌들, 선글라스, 모자, 선크림, 양산 겸 우산 등 필요한 준비물을 챙겼다.
친정여동생내외 집이 덕소이므로 우리 집에서 같이 자고, 6시 반쯤 인천국제공항 행 버스(308번)에 몸을 실었다. 2006년 11월초, 남편이 25년간 근무했던 제일화재직원들 부부동반으로 다녀왔던 베트남북부 하노이 쪽을 두 번째로 여행하게 된 것이다. 다른 점이라면 라오스여행도 겸한다는 것.
2011년 1월에 5박6일로 중국 곤명관광을 함께 했던 김정식세무사 겸 교수님내외를 인천국제공항3층 여행사테이블A카운터에서 만났다. 큰 가방을 부치고, 2층 가야금한식당에서 조식을 마쳤다. 출국수속을 밟고, 113번 게이트 앞으로 갔다.
“여유시간 있는데 우리 애들한테 ‘잘 갔다 올 테니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어!’ 사진으로 작별인사하자!”
가족단체 카톡에 사진을 올렸더니 빛나로부터 전화가 왔다.
“엄마, 엄마는 장이 안 좋으니까 식사조심하고, 사진 찍는다며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날씨가 무덥다니까 옷으로 체온조절 잘하고, 동남아일대에 뎅기열증세가 유행이라며? 피곤하지 않게 잠도 푹 잘 자고....... 엄마, 이모 옆에 있어?”
“그래, 알았어. 이모 바꿔줄게!”
이모한테도 한참 뭐를 그리 부탁하는지 길게 통화 후 끊었다.
VN417베트남 항공기는 찾을 때마다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인천국제공항을 10시10분쯤 가볍게 이륙했다. 비행시간이 약5시간30분 소요예정이니 손목시계로 오후3시40분쯤 베트남 하노이의 노이바이 국제공항에 도착하리라. 40D좌석을 찾으니 거의 뒤쪽으로 앞날개 끝이 보였다. 3. 4. 3인 좌석배치에 우리부부는 세무사님 내외와 4좌석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장시간여행이기에 이륙한지 10여분쯤 지나 신을 벗고, 신문지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가을학기부터 홍대에서 강의하신다는 세무사님은 계속 독서에 열중, 부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메르스 발병으로 인해 한국을 출국하는 여행객들에게 필수코스인 의료신고서를 남편이 작성했다. 고개를 깊숙이 숙인 채 잠자는 남자, 애인과 머리를 서로 맞대고 끊임없이 소곤거리는 연인, 화장을 고치는 젊은 여성, 우는 아기를 달래느라 애쓰는 한국인아빠와 베트남인엄마, 창밖 구름나라풍경에 매료되어 시간가는 줄 모르는 초등여학생....... 기내모습은 참으로 다양했다.
식사(중식)가 나오려는지 두 가지 음식명이 있는 메뉴판과 물수건이 나왔다. 남편은 생수와 와인을, 나는 오렌지주스로 목을 축였다.
“인천공항에서 순두부백반으로 늦은 아침식사를 했더니 밥 생각이 없네요.”
“그래도 닭고기로 받아놔. 나는 소고기를 신청할게. 기내식이라 양이 많지 않을 거야.”
와인 한 잔에 얼굴이 홍당무 된 남편은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괜히 싱글벙글, ‘몸은 60대지만 마음은 20대 청춘’이라며 폰으로 자화상 찍는데도 미소 짓는 여유를 잊지 않았다. 식사대를 미는 스튜어디스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메뉴를 묻지도 않고, 음식을 내려놓았다. 남편이 검지를 펴 보이며 ‘하나, 하나씩’이라 했더니 서툰 발음으로 소고기가 없다고 했다.
“뒤에 앉은 덕분에 선택권 없이 주는 대로 먹어야겠지요. 흐흐흐”
서비스는 역시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을 따를 수 없다. 승객이 원하지 않는 메뉴를 안기면서도 당연한 듯,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식후에 남편이 와인 한잔을 더 추가하는데도 세 번의 부탁이 필요했다. 안주추가도 허락되지 않았다.
‘식사를 마쳤으니 이젠 수면을 취하시오!’ 기내 등이 꺼졌다. 화장실에서 간단히 입가심하고, 눈을 감아 잠을 청했다. 폰 시각은 여전히 한국에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앞으로 어떤 새로운 일들이 펼쳐질까?’ 굉음으로 인해 깊은 수면대신 곧 만나게 될 동행인들과 여행의 묘미, 궁금증이 더 세게 밀려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기내전등이 켜지면서 ‘곧 하노이의 노이바이 국제공항에 도착할 것’이라는 방송이 나왔다. 안전벨트를 단단히 맨 후 사진기와 폰을 담아 가방정리를 했다.
드디어 안착. 손목시계는 오후2시15분을, 폰은 어느새 베트남시각인 12시15분으로 바뀌었다. 발달된 과학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였다.
“서두를 필요가 없죠. 천천히 내립시다.”
의자에 앉아 있는데 서있던 제부가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형님, 뒷문이 열렸어요.”
계단을 이용해 노이바이 국제공항에 발을 디뎠다. 뜨거운 아스팔트포장열기와 강하게 내리쬐는 베트남햇빛으로 전신에 닿는 느낌이 마치 가마니를 뒤집어쓰고 들어가야 하는 돔형의 한증막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몸을 실으니 빵빵하게 튼 에어컨능력에 금방 시원해졌다. 재빨리 사진기를 꺼내어 뒤따라 내리는 승객들 모습을 담았다.
“역시 언니는 기자답습니다. 기자로서의 순발력, 민첩함, 정신력이 대단해요. 어떻게 사진 찍을 생각을 그리 빨리 하셨는지요? 하하하”
“새로운 기사를 남보다 되도록 신속히 제보해야하니까요. 호호호”
제부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지루하지 않게 입국수속을 무난히 끝냈다.
12시50분쯤, 넥타이를 맨 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박문수베트남가이드와 만났다. 뒤에는 키가 큰 베트남현지가이드가 3박4일 동안 이끌 새 식구들의 얼굴을 익히고 있었다.
“오수창님, 이계선님.......”
24명의 동행인들 이름을 부르며 인원파악이 끝나자 전용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주차장으로 갔다. 그늘을 떠나 직사광선을 받으니 고온다습한 땀과 습기의 위력이 동시에 몰려왔다.
“와! 지금부터 이열치열! 더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어.”
버스 세 번째 좌석에 자리 잡았다. 에어컨이 시원했다. 좌석여유가 많아 남편이 뒤에 따로 앉았다. 동영상 찍을 카메라와 사진 찍을 카메라, 인물 찍을 폰, 여행수첩 등으로 무거운 어깨가방을 옆 좌석에 놓아 편히 앉았다.
“베트남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노이바이 국제공항(Noi Bai International Airport)은 한국의 김포공항규모로 작년까지 공사를 마치고, 올1월에 개장했습니다. 베트남수도 하노이(Hanoi)에 위치해있고, 시내중심부로부터 약45킬로미터 떨어져 있지요. 지금 우리는 일본이 공사한 새 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하노이시내로 들어가는 시간이 약간 짧아져 보통 30분~45분? 막힐 때는 한 시간반가량 걸립니다. 1902~1954년 전에는 프랑스령인도차이나의 수도였던 하노이가 1954~76년에는 북베트남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남중국해에서 내륙으로 약140㎞ 떨어진 홍 강 서쪽기슭의 베트남북부에 자리 잡고 있죠. 하노이주변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는데 중국인정복자들이 자주 정치중심지로 삼았던 곳입니다. 1010년 베트남 리[李]왕조(1009~1225)의 초대 통치자였던 리타이토[李太祖]에 의해 수도로 정해진 뒤 1802년 베트남마지막왕조인 구엔[院]왕조가 수도를 남쪽으로 옮길 때까지 주요수도가 되었습니다. 레[黎]왕조(1428~1787)말기에 동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나 유럽인들 사이에서 와전되어 통퀸으로 불러졌고, 프랑스식민지시기(1883~1945)에는 전 지역을 일컫는 이름으로 통킹이라 불렀습니다. 1831년에 구엔 왕조에 의해 하노이(두 강 사이에 있는 도시라는 뜻)로 바뀌었지요. 프랑스점령기에 다시 주요행정중심지가 되었는데 프랑스가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는 중국남부와 지리적으로 가깝고, 광물자원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점령기(1940~45)에도 행정중심지역할을 했다가 일본이 항복한 뒤 1945년 8월 호치민[胡志明]이 이끄는 베트남독립동맹이 권력을 잡고, 하노이 시를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수도로 정해졌으나 1946년부터 다시 프랑스지배를 받았습니다.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가 패배하자, 하노이는 다시 북베트남수도가 되었죠. 베트남전쟁이 계속되던 1965, 1968, 1972년에 미국폭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는데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이 무너지자 북베트남은 베트남 전 지역으로 세력을 넓혀 1976년 7월 2일,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선포되면서 하노이는 그 수도가 되었습니다. 수백 년 된 기념물과 궁전의 대다수가 침략과 내란으로 파괴되었지만 사적지와 명승지가 몇 군데 남아 있어요. 명승지로는 호안키엠 호(되찾은 검의 호수라는 뜻)가 있고, 사적지로는 BC3세기에 지은 코로아 성채, 공자의 유교서원(1070), 모트코트(한 개의 기둥이라는 뜻)탑(1049), 여 사제들의 사원(1142), 하노이대학교, 혁명박물관, 군사박물관, 국립박물관 등이 있습니다. 주요상업도시였으나 1954년 이후에 공업, 농업 중심지로 바뀌었고, 공구, 발전기, 발동기, 합판, 직물, 화학제품, 성냥 등이 제조되며 주변지역에서는 벼, 채소, 곡물 및 공업용농작물이 재배됩니다. 교통중심지로서 도로를 통해 하노이와 다른 주요도시들이 연결되며 철도를 통해 하노이의 하이퐁 항[海防港], 중국 윈난 성[雲南省]의 쿤밍[昆明], 호치민 시(옛 이름은 사이공)와 연결되었습니다. 홍 강을 통해 대양항해용 작은 배들이 하노이까지 오고, 많은 작은 강을 통해 배편으로 베트남북부대부분지역과 연결되며 공항이 2개 있습니다.”
말끔한 도로를 달려 새 공항청사와 톨게이트를 지났다. 버스냉장고의 시원한 물 한 병씩 받아 마시니 몸속까지 시원했다. 비행장부속건물인 듯 크고 깨끗한 건물들 앞 베트남깃발과 함께 주로 폰을 만든다는 삼성마크가 유난히 돋보였다. 따뜻한 곳을 좋아하는 야자수를 흔히 볼 수 있었다. 공항이 들어서면서 넓은 들판을 신도시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앞면이 좁고, 옆면이 넓은 베트남특유의 신축주택들이 보였다. 지붕위의 뾰족한 물체들이 무엇이며 어떤 역할을 하는지 궁금했다. 달릴수록 경계선 없이 옆집과 붙게 지은, 보통2~4층짜리 주택들이 늘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길가나 논밭가운데 자리 잡은 납골당도 특이했다.
“중국에서 흘러내려오는, 베트남북부를 흐르는 총길이1,200km의 홍강을 건너고 있는데 중국 남서부 윈난성 중심부에서 발원하여 남동쪽의 깊은 협곡을 지난 다음 통킹주를 가로지르며 하노이를 거쳐 통킹 만으로 흘러들어갑니다. 강유역상당부분이 부서지기 쉬운 토양으로 많은 양의 실트가 운반되는데 홍강이라는 명칭도 유역 중 실트가 대량 생성되는 홍토지대라는 데서 비롯되었죠. 주요지류인 로 강(맑은 강)과 다 강(검은 강)이 있어요. 운반토양은 내륙149km, 해안선을 따라 80km가량 펼쳐진 약7,000㎢의 평평한 삼각주에 퇴적됩니다. 베트남북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 삼각주는 인구밀도가 높고, 개간이 잘 되어 있는데 삼각주북쪽모서리에는 하노이외항인 하이퐁이 있습니다.”
홍 강의 황토색과 다양한 농작물로 푸른색을 띠고 있는 주변의 넓은 밭 색깔이 대조, 비교되었다. 섬이 된 삼각주들이 몇 개나 있는지.......
와, 드디어 구시가지로 입성! 예전에 들렀던 호안 키엠 호수와 주변풍경이 낯익었다. 하노이시내한가운데의 공원과 함께 자리 잡아 하노이시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휴식처역할을 톡톡히 한다던 호안 키엠 호수는 검을 돌려준다(還劍)는 뜻. 레 로이(LE LOI)라는 어부가 명나라침략 시 명나라 군을 물리쳐주기를 간절히 빌면서 고기를 잡던 중 신비로운 칼이 올라왔다고. 이를 주민들에게 알리고, 지지를 얻어 호수의 신인 거북이로부터 받은 검으로 명나라군사를 물리치고, 베트남을 승리로. 이에 15세기 여 왕조를 세운 왕이 되었고, 그 호수에서 제례를 올리며 승전 보고를 하던 중 호수 속에서 황금거북이 올라와 그 검을 물고 들어갔다는 전설이. 지금도 베트남인들은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때마다 거대한 거북이가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서 성스러운 동물로 여긴다고. 호수주위에는 크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늘어져 있어 시원한 나무그늘과 상쾌한 바람이 불고, 밤에는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는 공원으로 낭만을 더해주는 곳이다.
“하노이에서 가장 높은 72층 건물 레지던스, 칼리다스 랜드 마크 72, 런닝 맨 베트남편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 북쪽으로 동쑤언 시장이 형성돼있고, 남쪽에는 프랑스 식민시절에 지어졌던 프랑스식 아름다운 건물들이 들어찬 외교공관가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변여행지로 동쑤언, 타이호, 천궁동굴 등이 있는데 작은 목욕탕의자에 앉아 쌀국수나 베트남맥주 사이공, 생맥주인 비아 허이를 마실 수 있습니다.”
녹색의 진가를 보이는 아름다운 공원을 지나갈 때 ‘먼저 왔을 때는 호수부근식당에서 식사도 하고, 바람을 쏘이며 여유 시간을 가졌었는데.’ 버스 안에서 차창 밖 눈요기로 마쳐야하는 호안 키엠 호수구경이 매우 아쉬웠다.
버스에서 내려 걸었다. 한국날씨보다 더 무더웠지만 태어나 60번 넘게 여름을 지낸 경험이 있으므로 빨리 적응할 수 있어서 사계절이 있는 모국에 감사했다. 땀을 연신 닦는 가이드에게 ‘우리와 인사 나눴으니 넥타이를 풀어도 좋을 것’이라 권했더니 고맙다고 답했다. 베트남특유의 가옥에 대해 물었다.
“기둥 없이 건물 지을 수 있는 길이가 4미터래요. 앞면을 기둥 없이 좁게 짓는 대신 보통 18~24미터로 옆면을 길게 하여 중간 중간 기둥을 세우죠. 날씨가 더우니까 외부로부터 열 받는 면적을 줄이기 위해 붙여 짓는 겁니다.”
빨간 바탕에 노란별의 베트남국기가 많이 게양된 노란 건물을 지나자 광장이 보였다. ‘아! 외세로부터 국가를 구한 베트남영웅, 호치민 무덤이 있는 바딘광장이구나!’ 인터넷으로만 볼 수 있던 곳을 직접 밟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노이중심에 있는 바딘광장은 베트남독립과 남북통일에 일생을 바친 호치민이 1945년 9월 2일에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역사적인 곳입니다. 늘 많은 사람들이 찾지만 독립기념일과 호치민 생일인 5월 19일엔 참배하려는 많은 인파로 붐빕니다. 신전처럼 생긴 건물로 1975년 9월 2일, 건국기념일에 맞춰 바딘광장에 사각형기둥을 사용해 조성된 호치민 영묘는 근위병들이 접근을 막기 위해 항시근무하며 베트남어로 빨갛게 쓴 글씨는 ‘공산당만세!’라는 뜻입니다. 구 베트남민주공화국 초대대통령으로 1946~1969까지 재임한 호치민은 게친주 태생으로 영국, 프랑스근무 후 독립운동에 활약했습니다. 1920년에 코민테른에 참가, 1930년에 중국에서 베트남공산당결성,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에 독립전쟁전개, 1954년에 물리쳤지만 프랑스철수 후 남북으로 분단, 1959년 남 베트남해방을 목적으로 게릴라전 전개, 최종 승리했습니다. ‘죽으면 베트남 세 곳에 나눠 뿌려 달라!’고 유언했지만 오래오래 그 모습을 보면서 존경하고자 김일성처럼 생전모습그대로 특수방부 처리하여 유리관 안에 보관시켰습니다. 주변에는 호치민의 정신을 기억하라는 뜻에서 맞은편에 지었다는 국회의사당과 당이 하나밖에 없는 공산당본부건물, 각국대사관 등의 정부행정건물이 모여 있고, 호치민 생가와 박물관 및 한 기둥사원도 있습니다. 공무원들이 일하는 노란 건물은 창원의 용호동처럼 조달청, 병무청 등이 모여 있는 곳이죠. 국기하향식에는 엄숙하게 지켜봅니다. 매주월요일, 금요일은 휴관이라 호치민 생가와 박물관, 영묘입장이 불가하네요. 입장 시 잡담불가, 하이힐이나 샌들대신 바지에 운동화사용만 가능합니다.”
호치민은 그야말로 청렴검소소박한 정치가에 베트남건국의 아버지라 국부로서 당연히 추앙받아야 할 인물이 아닐 수 없다. 호치민이라는 사람과 도시명은 사람이 먼저 태어나고, 그 사람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인민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쓰면서 사회주의자로서 지켜야하고, 해야 할 덕목이나 가치관들을 주장, 실천했음에도 여전히 고위공직자들의 부정부패가 심하다니....... 평생 독신으로 간소하게 살면서 스케줄을 공개하지 않아 그때그때 행적이 바뀌어 3분대기조처럼 같이 움직였다하니 세계적으로 위대한 인물반열에 끼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베트남전쟁과 6.25전쟁이 비슷하고, 독립과 해방일도 며칠 차인데 베트남은 호치민이 이끄는 공산주의가 승리했고, 우리는 아직도 휴전상태라는 점이 다르다.
“호치민 생가입장은 우선 티켓을 끊어야하는데 노란색건물의 주석궁이 있습니다. 검소했던 호치민은 혼자 지내기에 너무 화려하다며 국빈이 방문할 때만 접대실로 사용했습니다. 호치민이 사용했던 차가 석 대 있는데 평상시 직접 운전하던 차는 가장 싼 차입니다. 2층의 작은 노란 집은 주석궁을 거절하고, 1954년부터 58년까지 살았던 곳이지요. 식탁이나 업무를 보던 책상 등이 매우 소박하며 아름다운 인공호수가 있습니다. 1958년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았던 목조건물로 1층은 주차장처럼 기둥만 세워졌고, 2층은 침실과 업무를 보던 곳입니다.”
마침 교대식이 행해져 영묘 앞으로 다가서며 동영상과 사진을 찍었다. 햇빛이 강했지만 남는 건 사진밖에 없으므로 인내심을 발휘, 사방을 배경으로 사진기와 폰을 바꿔가며 열심히 찍었다.
‘저 큰 과일이름이 뭐지? 처음 보네.’ 일단 사진기에 담아두었다.
입장불가에 의해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는 곳들에 대한 아쉬움을 안고, 바딘광장좌측으로 걸어갔다. 소담스럽게 피어있는 이름 모르는 꽃송이들과 뿌리들이 땅 밖으로 드러나 줄기와 얽혀있는 신비로운 거목이 반겨주었다. 호치민 영묘정문교대식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자유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
한 개의 기둥 위에 세워진 사원으로 천수관음을 모신 한기둥사원이 보였다.
“1049년에 연꽃을 본떠 만든, 베트남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으로 국보1호이자 하노이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불임부부에게 아기를 점지해주기 때문에 많이 찾는데 한 기둥사원을 두 바퀴 돌고, 관음보살에게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오른쪽으로 돌면 아들을, 왼쪽으로 돌면 딸을 낳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왼쪽의 불교를 모시는 사당에서 기도하면 정말로 딸이나 아들이 생긴다는 말은 믿거나말거나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하하하....... 베트남 대표적 고찰로 일주사로도 불립니다.”
기념품판매소 앞 의자 뒤에 새겨진 글자가 궁금했다. 사원규모는 매우 작으면서 내부모습이 우리와 많이 달랐다. 거목들로 둘러싸인 정방형연못 위에 떠있는 자태는 균형이 잘 잡혀있어 안정감을 주었고, 우아하며 신비롭기까지 했다. 네 귀퉁이에 연꽃이 새겨져있었다. 동영상과 사진을 찍고, 나무그늘 밑으로 가니 우리를 위해 가이드가 서비스하는 수박과 바나나가 있었다. 사진 찍느라 늦게 안 우리일행은 유난히 시뻘건 수박의 먹다 남은 흔적만 구경, 겉이 퍼런데도 강도가 높은 바나나만 실컷 먹었다. 남은 건 당증세로 틈만 나면 걷기운동을 열심히 하시는 세무사님을 위해 챙겨드렸다.
유료화장실을 다녀온 후 쉬운 인원파악을 위해 조를 짰다. 24명 명단 중 맨 앞에 있다는 이유로 우리6명이 1조가 되었다.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만약의 돌발 사태에 대비하려는지 거리에 군인들이 경비하고 있었다.
“바딘광장에서 본 파랗고 큰 과일이름이 뭐였죠?”
“잭 프룻이라고 베트남말로 밋이라 불러요. 나무에서 자라는 과일 중 가장 큰 것으로 겉모습이 두리안과 비슷한데 겉에 돌기가 있는 점이 다르죠.”
“한 기둥사원 뒤의 흰 건물이 뭐예요?”
“호치민 탄생100주년을 기념하여 1990년에 지은 호치민 박물관이요.”
베트남 돈마다 새겨져있는 호치민의 생애와 베트남혁명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모아 전시해놓았다는 박물관을 뒤로, 베트남의 나무인 대나무 숲을 지났다. ‘내가 바라는 정치가상을 지닌 호치민님이여, 바딘광장과 함께 안녕!’ 버스대기 장소로 걸었다. 대우자동차의 마티즈가 흔히 보였다. 운전석 앞에 다인투어용지가 놓인 '30Y-9081' 버스번호를 확인, 탑승했다.
“하노이는 오토바이천국으로 차량평균운행속도는 40km입니다. 경적소리가 유난한 것은 ‘뒤에 내가 가고 있으니 앞에서 급 변경을 자제하라’는 뜻입니다. 많은 인력거들과 오토바이들은 신호등이 있지만 무단 횡단하는 게 일반적이므로 길을 건널 때는 주변을 잘 살피고, 절대 뛰지 마세요. 오토바이가 알아서 피해갑니다.”
수많은 차량들과 오토바이들, 사람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우리가 버스 안에서 그들을 이상하게 내려 보듯 그들도 우리를 이상한 눈초리로 올려 바라보고 있었다. 식민지지하 때의 규모가 작은 구식건물과 넓고 깨끗한 현대식건물들이 혼합되어 있는 하노이거리가 예전의 들떴던 기분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하노이에서 하롱베이까지 평균시속60Km속도로 달려도 4시간정도 걸립니다. 예전에는 11시간 걸렸는데 그만큼 도로사정이 좋아졌다는 거겠죠. 관광도시로 유명한 하롱베이에 머지않아 공항이 들어서면 더 많은 외국인들이 찾을 겁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베트남 전통가옥들이 즐비한 하노이구시가지 풍경과 벽에 작은 거울 하나 걸어놓고, 머리를 깎아주는 거리의 이발사모습은 예전과 별 다름이 없는 것 같다. 이사 간 사람이 사용하던 전선줄을 그대로 두고, 새로 이사 온 사람이 또 다른 전선줄을 끌어와 전선줄이 마구 뒤엉켜있는 모습이나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리와 골목을 활보하는 오토바이족들 뒤로 신축이거나 공사 중인 빌딩들 숫자가 더 늘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도로양가주차장에 서있는 현대자동차들이나 경차들, 대로를 신나게 달리는 우리나라의 버스들, 집집마다 설치된 에어컨의 LG상호들, 빌딩1층에 자리 잡은 삼성전자간판이 유독 빛나게 돋보이면서 반가운 이유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통으로 느끼는 자부심일 것이다. 주차선도 없이 차도와 인도에 걸쳐 주차된 차량들에 주차위반딱지와 벌금이 부과될까 걱정되었다. 신호불문하면서 직진, 좌우회전하고 있는 오토바이행렬들이 매우 신기, 흥미, 불안해보였다.
“무질서 속에서도 질서 있는 하노이거리에서 서로의 배려로 교통사고는 그리 많지 않아요. 하지만 교통사고 시 119도 없고, 병원도 많지 않아 사후처리가 매우 미흡해요. 심지어 피해자가족이 올 때까지 거리에 그대로 방치해놓는 경우도 있어요. 오토바이는 대부분 일본식으로 기름이 나오는 베트남의 기름 값은 쌉니다. 베트남의 오토바이숫자를 알 수 없어요. 그만큼 베트남국민들은 이동수단으로 오토바이를 많이 이용합니다. 피부가 검게 타는 것을 방지하고, 지독한 매연으로 건강상 마스크, 선글라스는 물론 오토바이용 겉옷을 착용하는데 헬멧사용은 무조건입니다. 인도 위 오토바이주차장에 오토바이를 세워놓는 것도 돈을 지불하는데 흔한 만큼 도난사고도 많이 일어납니다.”
한국에서 볼 수 없는 풍경들이라 귀는 가이드설명을, 시선은 창밖으로,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주차선 안에 가지런히 주차시킨 오토바이주인들은 모범생 같은데 선밖에 아무렇게나 버티고 있는 오토바이주인들은 얄밉다는 생각을 하면서 혼자 웃었다. 우리의 목욕탕의자보다 약간 높은 의자들을 깔고 앉은 남녀노소모습, 관공서인 듯 노란색건물 앞에서 자전거에 과일을 싣고 파는 장사꾼, 베트남전통모자 쓴 여자, 자동차사이를 곡예 하듯 비집고 달리는 오토바이들, 옛 전통을 고집하고 있는 구옥들을 향해 부지런히 셔터를 누르다보니 홍강 위를 달리고 있었다.
“상하의 나라, 아시아의 마지막 잠룡인 베트남은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동부에 위치한 사회주의공화국으로 사유재산이 인정됩니다. 천 만 명이 사는 호찌민이 최대도시로 경제도시라면 800만 명이 사는 호수도시인 하노이는 정치도시입니다. 북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 서쪽으로는 라오스 및 캄보디아와 국경을 접하고, 동쪽과 남쪽으로는 남중국해에 면해 있습니다. 면적은 33만 제곱킬로미터, 국화는 연꽃, 국 목은 대나무, 국조는 공작, 나라명칭은 월남(越南), 킨 족(베트남인)이 90%, 불교(70%)와 로마가톨릭(10%)을 믿으며 베트남어를 사용합니다. 2011년 인구통계에 의하면 인도차이나반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로 세계에서 13위죠. 공산주의국가지만 중화인민공화국과 같은 공산시장경제체제를 가진 명목상 공산주의국가입니다. 고대베트남은 중국지배를 받았지만 938년 박당 전투에서 응오 왕조의 시조인 응오꾸옌이 오대십국의 하나인 남한과 싸워 독립하였습니다. 이후 베트남왕조들은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인도차이나반도의 동안을 따라 남쪽으로 국경을 넓혀갔는데 19세기 말에 프랑스식민지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프랑스지배를 받는 동안 베트남은 프랑스령인도차이나 일부로 편입, 계속 독립운동을 벌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기간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은 하노이의 바딘광장에서 베트남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수립을 선언하였지만 프랑스가 인정하지 않아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벌어졌습니다. 1954년 3월 13일 디엔비엔푸전투에서 베트남이 대승을 거둬 독립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구열강은 제네바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다시 북위17도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시켰고, 약속하였던 전국선거를 거부한 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를 왕으로 내세워 베트남국을 수립하였습니다. 베트남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응오딘지엠의 쿠데타로 붕괴, 베트남공화국이 세워져 남북대결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은 도미노이론을 내세워 베트남에 개입하였으며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전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전쟁동안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한 것보다 훨씬 많은 폭탄을 북베트남지역에 투하하였고, 막강한 화력과 인력을 동원하였으나 베트남의 끈질긴 저항과 명분 없는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 일어난 전 세계와 미국 내의 반전여론에 밀려 결국 1973년 파리협정을 맺고 철군하였습니다. 1975년 북베트남은 사이공을 점령하였고, 1976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을 수립하였습니다. 전쟁 후 베트남은 전후복구와 공산주의경제체제를 통한 발전을 도모하였지만 1979년 크메르 루주와 전쟁을 치렀고, 중화인민공화국과도 국경분쟁으로 중국-베트남전쟁을 치르는 등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986년 베트남공산당은 도이 머이를 시작하여 시장경제를 도입, 2000년에는 대부분의 국가와 수교를 맺었습니다. 북부지역에는 지하자원이, 남부지역에는 쌀이 많이 나며 시차는 서울보다 2시간 늦는 것, 잘 아시죠?”
잦은 비로 피뢰침이 있는 지붕, 불교국가답게 지붕 끝을 사원처럼 지은 집, 태양열주택, 물 흔한 나라로 이름 없는 작은 호수, 열대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야자수들이 많이 보였다.
도심을 벗어나면서 점차 오토바이떼거지들이 줄었고, 거리도 한산했다. 녹색과 노란제복의 교통경찰이 법규를 위반한 여자운전자가용을 세우는 모습, 면허증검사에 이어 사무소 앞에서 처리하는 모습을 사진기에 담으며 또 웃었다.
“교통경찰의 위엄이 매우 높아서 위반 후 도망가면 난리칩니다. 헬멧을 쓰지 않고 오토바이 타다가 거리에서 고개 숙이며 야단맞는 장면을 쉽게 목격할 수 있지요. 초등학생들이 6시 반에 등교하는 대신 점심식사 후 낮잠 자는 시간이 있는 베트남의 교육열도 매우 높은데 행복지수는 세계5위입니다. 사유재산이 허락된다지만 아직도 공산제도의 흔적들 때문에 큰 욕심을 부리지 않기 때문이죠. 모두 하루일과를 일찍 시작하는 대신에 퇴근도 5, 6시경에 하는데 저녁식사는 꼭 가족과 함께 합니다. 외식한다는 것은 외도와 같이 생각하고, 밤 문화가 없으므로 남자들은 가정적이지요. 1억 인구 중 70%가 30대인 노동집약형국가로서 20대 초반에 결혼하여 40대에 할머니, 할아버지소리 듣는 경우가 흔합니다.”
하노이도심을 빠져나오니 낡은 건물들 주변에 쓰레기들이 잡초들과 뒤섞여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예전대로 도로 변 정비 상태가 엉망이었다. 넓은 들판에는 모심기를 기다리는 논, 방금 모심기를 끝낸 논, 푸른 벼가 싱싱하게 자라는 논, 벼이삭이 고개 숙인 논, 농부가 낫으로 벼 베고 있는 논, 이미 벼를 벤 논, 남은 풀을 소가 뜯어먹고 있는 논, 마른 풀을 쓸어 모아 태워 연기가 하늘로 오르는 논 등 우리나라에서는 한해에 걸쳐 볼 수 있는 논농사모습을 3모작까지 가능한 베트남에서는 한눈으로 동시에 볼 수 있었다.
“날씨가 따뜻하여 잘 자라는 풀을 처리하는 일도 더운데 고생이므로 황소를 이용하여 뜯어먹게 합니다. 베트남에서는 오리들을 울타리 없이 논에서 키워요.”
수확한 벼들을 재래식으로 털거나 차도 변에 널었던 벼들을 쓸어 모으는 모습에서 우리보다 3, 40년쯤 뒤떨어진 농사제도임을 알 수 있었다. ‘시내도로뿐 아니라 논밭도 구획정리하여 기계화하면 한결 편리하면서 수확량도 더 많이 늘릴 수 있을 텐데’ 안타까웠다. 한강의 기적 등 많은 부분에서 급속화한 한국을 본 따기 위해 애쓰고 있다지만 아직도 먼 베트남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마을에서 먼 산중에 묘나 납골당을 세우지만 베트남국민들은 조상을 늘 가까이 대해야 항시 보살펴준다고 믿어 논밭한가운데 설치한 납골당을 볼 수 있습니다.”
가로수역할하는 야자수 뒤의 넓은 들판은 하노이시내의 복잡한 풍경과는 정반대다. 오토바이대신 자전거를 많이 이용하는 모습, 논 가운데에서 어슬렁거리며 방목되는 소들, 전봇대 서있는 논둑에서 떼 지어 몰려다니고 있는 개들 등 푸른 들판은 어린 시절에 본 시골외가풍경이라 참으로 정겨우면서도 다소 낯설었다.
크고 작은 어선들이 떠있는 강과 모내기준비 작업으로 바쁜 농부들의 논, 여자들이 과일을 길바닥에 놓고 파는 거리, 재래시장입구, 퇴근하여 상의 벗은 채 아기를 돌보는 남자들을 사진기에 담고, 눈의 피로를 풀기위해 눈을 붙였다.
“베트남은 까오다이교라 하는 일명 잡신교로 딱히 정해진 신 없이 하느님, 공자 등 여러 가지 신들을 모두 섬기는 종교가 있는데 불교의 타락으로 국민의 정신을 마비시켜 월맹에 망했죠. 베트남장례문화는 중국의 유교사상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전통생활양식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장례풍습은 주로 북쪽지방을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사망한 경우에는 집으로 시신을 들이지 않고, 장례식장에서 장의사의 도움을 받습니다. 남쪽은 장례 후 사원이나 교회에 시신을 안장하거나 화장하여 집이나 사원에 안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잠시 아베쎄 휴게소에 들르시겠습니다. 건물안쪽으로 쭉 들어가시면 화장실이 있어요. 이왕 들어가셨으니 노니로 끓인 차, 깨로 만든 베트남전통과자 등도 맛보시면서 두루두루 구경해보시기 바랍니다. 가방이나 옷들은 진짜 같은 짝퉁입니다.”
화장실부터 다녀온 후 여기저기 사진을 찍는데 여점원이 손사래 저으며 안 된다고 했다. 한국에서 자주 사먹던 낯익은 과자들이 모두 진열되어 있어 반가웠다. 주스, 사이다, 냉 깡통커피도 보였지만 하롱베이 도착즉시 저녁식사 할 것이라 하여 참았다. 다른 팀 여자가 짐 담을 큰 가방을 구입하는데 가이드가 중간번역 해주었다.
다시 전용버스탑승, 계속 달리기 시작했다. 소들의 낙원인 들과 벽돌공장, 연꽃이 가득 피어있는 논, 납골당, 여러 개의 도자기판매소, 오리사육지 등을 사진기에 담으면서 1시간 넘게 달려도 지루한 줄 몰랐다.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니 어렸을 때, 초가지붕굴뚝에서 모락모락 하던 연기가 생각났다. 아궁이 앞에서 불 때던 엄마의 젊었던 모습도 떠올랐다.
어둑어둑 저녁이 가까워졌을 때, 새 단장했다는 톨게이트를 통과했다.
“하노이시내를 벗어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려 170km 떨어진 하롱베이에 들어서면 곧 저녁식사 할 수 있는 식당으로 가실 겁니다. 낮에 어느 남자분이 왜 점심식사를 주지 않느냐고 하셨는데 기내에서 제공한 식사로 대신한 겁니다.”
하노이도심과 다른 풍경을 하고 있는 하롱베이 거리가 이미 컴컴하여 눈도장으로만 찍었다.
“자, 내리셔서 하롱정 한식당으로 들어가세요. 제육복음, 상추, 닭도리탕으로 맛있는 저녁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시장하실 테니 맘껏 드시고, 모자라는 반찬은 얼마든지 더 달라고 하세요.”
24명이 길게 한 줄로 자리 잡아 앉았다. 연하디 연한 상추가 식욕을 당겼다. 확실히 시장기가 최고의 반찬이다. 웬만한 한국식당보다 더 맛난 제육볶음과 닭도리탕, 반찬들을 연신 추가하면서 배를 두둑하게 만들었다. 베트남소주를 주문하여 맛을 보았는데 남들은 누룽지 맛이라며 잘도 마셨지만 술과는 거리가 먼 나는 남은 술잔을 남편에게 주었다.
잠시 이동하여 베트남에서의 숙소인 HARONG PALACE HOTEL에 도착했다. 호텔답게 로비가 넓고, 깨끗했다. 에어컨시설도 잘 되어있는 듯 시원했다.
이틀 동안 묵을 405호 룸을 배정받아 올라갔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작동되고 있는 룸은 나무 바닥에 두 개의 침대가 있었다. TV에서는 한국음악프로인 뮤비뱅크가 방영되고 있었다. 액자가 걸려있는 욕실에 예쁘게 포장된 휴지가 놓여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샤워 후 TV를 시청하기 위해 누웠지만 언제 잠이 들었는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꿈나라로 직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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