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洪益參考資料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59 : 한글 전용론 비판 / 벽운 이경숙]

이름없는풀뿌리 2020. 2. 13. 13:13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59 : 한글 전용론 비판 / 벽운 이경숙] 1. 한글 전용론자들의 무지와 편견 그리고 어거지 벽운 이경숙 2010.04.01. 14:15 말이 나온 김에 한글전용론자들의 무지와 편견, 그리고 오해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자. 한글은 우리글, 한자는 남의 글이라는 이들의 주장은 사실 무지의 소치요, 편견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한자는 그 기원이 옛 은나라 사람들이 점을 칠 때 썼던 갑골문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사용하는 한자의 대부분의 원형이 은허의 갑골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은나라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갑골과 함께 출토된 사람들의 유골을 유전적으로 조사해본 결과 갑골문을 만든 은나라 사람들은 지금의 중국인인 한족(漢族)이 아니라 동이족에 가장 혈통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이며 산동지방의 성자애에서 흑도문화를 일으킨 사람들과 혈통이 같았다. 이들은 모두 우리 동이족이다. 은나라의 주왕이 달기와 방탕한 생활을 하고 학정을 할 때 주나라가 이에 반란을 일으키는데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 땅에서 나는 곡물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수양산에서 고사리만 먹다가 죽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당시 은나라 사람들은 주나라 사람들과는 혈통이 다른 귀족이요, 천신족으로서 감히 이에 거역하거나 반역하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런 지배계층이 만든 문자가 갑골문이며 은나라를 타도하고 처음으로 한족의 왕조를 세운 주나라가 이를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 한자이다. 이렇게 볼 때 한자는 중국인이 만든 문자가 아니라 동이족의 창작물이며 한글과 함께 찬란하게 빛나는 우리 민족의 발명품이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표의문자인 한자와 표음문자인 한글을 모두 발명한 주인공인 것이다. 설사 갑골문을 만든 은나라 사람들이 우리 동이족이 아니라 하더라도 한자는 우리 민족이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제1의 문자로 사용해 온 것이다. 한자를 우리 민족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남의 글자로 치부하는 것은 영어를 미국말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과 진배 없는 소리다. 한자는 어떤 시각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문자이며 그 사용기간과 우리말에서 차지하는 비중, 그리고 문화적 가치에 있어서 오히려 한글보다 더 중요시되어야 옳은 것이다. 굳이 순위를 멕인다면 한자는 제1국어요, 한글은 제2국어라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문화적 지적 유산이 문자화되어 남아있는 것을 자산 가치로 따진다면 한자자산이 80%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민족이 한글이라는 용기에 우리의 생각을 담기 시작한 것은 겨우 100년이 될까말까이다. 한글이 창제된 것은 5백년이 더 되었지만 사실상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문자로 기능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부터인 것이다. 그 이전에 전하는 한글 저작물은 실로 손꼽을 정도이다. 한자를 버리면 100년 이전까지의 모든 문화적 유산은 소실되며, 그 전승의 맥은 끊긴다. 이것은 역사가 단절되는 것을 말하고 우리 민족의 역사를 100년으로 줄이게 된다. 이보다 더한 역적질이나 망국의 패악은 달리 찾을 수 없다. 또 한 가지 한글전용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한글전용이 한글을 아끼고 사랑하고 더 잘 가꾸는 길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도 황당무계하고 어처구니없기는 한자를 남의 글자라 하는 소리보다 더 심하다. 우리의 문자생활을 발달시켜 언어를 풍족하고 윤택하게 만들고자 하면 우리 말을 담아내는 두 가지 그릇인 한자와 한글의 양쪽 모두를 연마해야 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한글을 전용하는 것은 우리말을 반신불수로 만들고 우리의 언어자산 중 80%를 훼손하여 우리 민족의 사고능력 자체를 극단적으로 저하시키고 퇴보시킬 것은 명약하기가 관화와 같다. 한자를 연마하는 것은 한글이라는 그릇에 상감을 입히고 금칠을 하는 것이나 같다. 한글을 제 아무리 다듬고 가꾸고 사랑한다 해도 한글 자체로는 질그릇밖에 못 만든다. 결코 전세계인이 부러워할 청자는 만들 수 없다. 한글 전용은 한글을 가꾸고 사랑하는 행위가 아니라 한글을 병신을 만들고 조잡한 기호로 전락시키는 짓임을 알아야 한다. 이들은 ‘나라 말쌈이 뒹국에 달라 문자와르 서로 사맛디 아니할 새 백성이 니르고자 할 배 있어도 쉬이 펴지 못할 노미 하니라’ 는 한글 창제문을 들이대면서 세종대왕께옵서 한자는 우리글이 아니라서 한글을 만드셨다 하지 않았느냐 하고 나발을 분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로 한번 더 살펴보자. 과연 나랏 말쌈이 뒹국에 달랐는지.... 2. 나라말쌈이 둥귁에 달라. 벽운 이경숙 2010.04.01. 14:16 나라말쌈이 둥귁에 달라. 한글을 창제하게 된 이유를 세종대왕께서 ‘나랏말쌈이 뒹국에 달라서’였다고 하신 때문에 많은 오해가 있게 되었다. 물론 세종대왕은 한자의 원형인 갑골문을 발명한 사람들이 조선사람들의 조상인 동이족 혈통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고(은허의 발굴은 1910년대에 이루어졌고 은인들의 유골에 대한 유전자 검사는 50년대에 이루어짐) 한자는 당연히 상국인 중국의 문자이며 중국에서 전해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때문에 세종대왕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 전부가 한자는 중국의 문자이고 남의 나라 문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 맥락에서 창제문은 조선사람들에게 새 글자의 필요성과 창제의 당위성을 설명할 때 가장 쉬운 방법일 수 있고, 더 이상의 설명은 대단히 복잡한 여러 문제를 야기했을 것이다. 우리가 쓰는 말이 중국사람의 글과 다르기 때문에 백성들이 글에 뜻을 실어펴는데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우리 말과 일치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쉽게 익힐 수 있는 글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창제이유가 집약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말이 중국의 문자인 한자와 서로 달라서 불편했다면, 중국사람의 말은 중국의 문자라는 한자하고 같아서 쓰기에 편했느냐 하는 것이다. 조선말이 한자와 다른 것이라면 중국말은 한자와 같은 거냐 이 말이다. 한자라는 문자와 다르기로 치면 조선말이나 중국말이나 왜말이나 그 점에서는 도낑대낑이다. 아무 차이가 없다. 말이라는 것은 입을 통해 소리라는 것으로 전달되어진다. 그런데 소리라는 것은 들리는 순간이 지나면 바로 사라지는 것이어서 듣는 순간 이해하고 기억하지 않으면 영원히 되살릴 수가 없다. 보존과 기록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순간적으로 존재했다가 곧바로 소멸되는 정보인 소리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한 기록수단으로 문자가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표음문자이다. 표음문자는 하나의 소리를 하나의 기호에 대응시킨 것이다. 따라서 표음문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이 입으로 낼 수 있는 소리가 몇 가지나 되는지 구분해야 하고 음소와 음절의 구성요소를 파악해야 한다. 한글로 표현할 수 있는 소리의 가짓수는 약 200개이지만 히라가나는 고작 50여개 뿐이다. 한글은 초성, 중성, 종성이라는 소리의 구성요소를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음소를 결합하는 문자이지만 히라가나는 거저 소리마다 각기 다른 기호를 만든 것이다. 때문에 일본말은 소리의 가짓수가 너무나 작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말이 문자에 의해 제한되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런데 한자라는 문자는 이런 의미의 문자와는 본질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다. 표음문자가 귀에 들린 소리를 기호로 변환하는 것인데 비하여 한자는 귀로 들은 소리가 아니라 눈으로 본 것을 그림으로 변환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한글이나 라틴어, 히라가나와 같은 표음문자가 청각정보의 기록수단인데 반해 한자는 시각정보의 기록수단인 것이다. 눈으로 본 것을 무엇을 보았는지 그림으로 그려서 남기자는 것이 한자라는 상형문자의 본질이고 그것이 바로 표의문자이다. 사람의 말은 개가 짖는 소리나 자연의 소리들과 달라서 미리 약속된 규칙을 갖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미리 정해진 약속이 없으면 사람의 말은 소리가 된다.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청각정보의 특성인데 시각정보는 사전의 약속이 아니라 사후의 약속이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약속을 하지 않아도 누구의 눈에도 닭은 닭이고 소는 소로 보인다. 때문에 시각정보는 사전의 약속이 필요 없다. 닭을 닭과 비슷하게 그려놓으면 이렇게 그린 그림을 닭이라 한다는 사전약속이 없더라도 누 구의 눈에도 닭을 그린 그림은 닭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사람의 눈을 그려놓으면 누가 봐도 눈이라고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상당히 정교하고 복잡하게 그려져야 알아볼 수 있었지만 이런 그림들이 점차로 도안화되는 과정을 그쳐 그림에서 형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표음문자는 소리정보의 기록이고 표의문자는 시각정보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너무나 다른 차원의 정보이다. 만약에 사전에 약속된 소리정보를 가지고 닭이라는 짐승을 소리로 설명한다고 하자. 이것은 닭을 말로 설명하는 것과 같다. 표현력이 뛰어나고 어휘가 충분하다면 닭에 대한 설명을 들은 사람은 그것이 닭이라는 짐승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닭을 그려서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소리정보가 불완전하면 닭이 아니라 오리를 그려서 보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단어와 어휘를 사용해서 설명한 닭이라는 대상은 그림으로 그리면 하나의 그림이 된다. 도안이 있다면 아주 빠르게 그릴 수도 있다. 이것은 하나의 그림에는 아주 많은 의미가 포함됨을 말한다. 닭의 그림 속에는 닭이라는 짐승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특징이 들어있다. 한자라는 문자를 사용하는 것은 많은 의미와 개념이 복합되어 있는 사물을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다. 때문에 말로 하면 장황하게 길어질 내용을 함축하고 압축하는 사고의 발달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된다. 동양의 뛰어난 정신문화는 한자라는 문자를 사용함으로서 야기된 추상적 사고능력의 배양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근본적으로 시각정보의 기록인 한자는 청각정보인 말과 같을 수가 없기 때문에 표의문자를 쓴다는 것은 말이라는 청각정보와 글이라는 시각정보의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하여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표음문자만을 사용하는 사람들과는 요구되는 사고능력이 대단히 다른 것이다. 표음문자는 소리와 대응되는 기호의 나열이기 때문에 기호대로 소리를 내면 바로 말이 되고 바로 정보가 재생되지만 표의문자는 그렇지가 않다. 시각정보인 그림을 보고 전혀 다른 정보체계인 소리정보의 형태로 다시 한 번 변환을 해주어야 한다. 이것은 서로 다른 정보체계로의 번역과정과 같다. 그래서 그림을 소리로, 다시 소리를 그림으로 바꾸는 대단히 정교하고 복잡한 사고활동을 요구한다. 나라말쌈이 둥귁과 다른 것이 아니라 나라말쌈이 한자라는 문자와 다른 것이며, 이것은 중국도 조선과 똑 같은 처지였다. 말쌈이 글자하고 다르기는 중국이나 조선이나 일본이나 매한가지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간과하면 중국사람들은 자기들 말과 글이 다 자기 것이라서 말과 글이 똑같고 아무나 쉽게 배워 누구나 쓰는 반면에 우리나라만 말쌈이 둥귁에 달라 불편했던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한자가 다소 불편하고 익히기 힘든 글자인 이유는 한자가 우리 글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표의문자이기 때문이고 본래 그림으로 시작된 상형문자이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중국사람들도 말과 글이 다른데서 오는 괴로움과 고통은 우리하고 똑 같아서 말을 소리나는 대로 적는 방법을 찾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오늘날까지도 중국은 이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고, 일본인들은 극히 불편하고 불완전한 방법밖에 안 가지고 있지만 우리 한국사람들은 퍼펙트한, 그야말로 완벽한 해결책을 갖고 있다. 그것이 훈민정음이고 한글이다. 한자와 한글은 본질에서 전혀 다른 두 개의 문자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서로 상보적이다. 표음문자인 한글과 표의문자인 한자의 양자를 다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면 문자생활에서는 최고의 경지가 된다. 한국사람은 그런 점에서 축복받은 사람들이며, 사고능력과 사유의 차원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세계에 노니는 으뜸가는 지성인들인 것이다. 한국인의 우수한 두뇌는 바로 한자와 한글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두 가지 문자의 혼용과 병용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중국은 한글과 같은 뛰어난 표음문자를 가지고 보완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양자택일을 해야하는 불행에 직면해 있다. 즉 말과 글이 서로 다른 체계를 유지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거나 아니면 표의문자를 폐기하고 한자를 소리를 적는 기호처럼 사용하거나이다. 근래 중국은 컴퓨터시대를 맞이하여 어쩔 수 없이 후자를 선택하고 있다. 30년 전 대만이나 홍콩영화에 한자 자막이 나오는 경우 우리는 자막을 보고 대충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 중국영화의 한자 자막을 보면 우리는 단 한줄도 못 읽는다. 간자가 표현하는 것이 본래의 의미가 아니라 소리이기 때문이다. 자막의 한자들은 우리가 아는 것도 있고, 처음 보는 생소한 기호같은 것도 있는데 어느 쪽이던 우리가 알고 있는 한자의 뜻하고는 관계없이 그 자리에 쓰이고 있다. 단지 소리를 나타내는 기호로써. 이것이야말로 현대중국의 가장 근본적인 불행이며, 미래 중국 문명의 한계를 보여주는 척도이며 상대적으로 한글을 갖고 있는 우리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 주는 단초가 아닌가 한다. 한글로서 한자를 대체하자고, 또 대체할 수 있다고 우기는 사람들은 세종대왕이 왜 고마운지 한글이 왜 소중한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3. 한글은 중국과 일본의 유일한 선택 벽운 이경숙 2010. 8. 4. 23:45 한글전용론자들이 주장하는 또 한 가지 전용론의 근거는 한자의 발명국인 중국이 한자를 포기하고 있다는 것과 일본 역시 원형으로서의 한자는 폐기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그렇다면 왜 그런가를 살펴보자. 중국은 현대화 과정에서 디지털화가 불가능한 한자라는 문자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받아야 했다. 한자를 키보드로 입력하는 작업은 마치 옛날 인쇄소에서 사식 작업을 하는 것과 동 일한 것이었고 이것은 고도로 숙련된 기능에 속하는 일이었다. 더구나 한자는 배우고 익히는 것 자체가 일정 수준 이상의 지적능력과 학습취미를 요구하는 것이어서 중국의 문맹률은 해결이 난망한 과제였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수천 년의 문화유산과 지적자산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문자생활의 대중화와 디지털화를 달성하는데 문자정책의 최우선을 두게 된다. 그래서 간자를 만들어 글자의 모양을 단순화시키고 간자를 이용하여 한자로서 소리를 표기하는 방법을 찾게 된 것이다. 물론 키보드 입력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절박한 해결과제였다. 일본도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컴퓨터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졸렬한 문자생활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한글은 워낙 우수한 표음문자이고 세계 공용의 발음기호로 선택하자는 제안들이 나올 만큼 소리를 옮기는 기능이 탁월하다. 사실 그동안 사라진 몇 가지 자모음을 복원하거나 새로운 음소를 추가로 개발하여 보완하기만 하면 한글로 표기할 수 없는 음성은 거의 없는 상태까지 표음기능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다. (영어로 개 짖는 소리나 오리 우는 소리를 어떻게 표기하는지 보라, 그리고 우리 한글의 그 다양한 의성어들을 생각해 보라). 사람이 입으로 내는 소리를 그대로 옮기는 기능과 표음의 영역이 워낙 넓기 때문에 한글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자를 병기하지 않아도 의사소통에 별 혼란이 없다. 물론 한자의 병기가 반드시 필요한 문장과 표현이 있기 때문에 한자 없는 한글만의 표현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나 일상의 대화 정도라면 한자 없이도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다. 오늘날 신문이 100% 한글로만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은 바로 한글의 완벽한 표음기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반면에 일본의 히라가나는 표음기능이 워낙 제한되고 묘사할 수 있는 소리의 가짓수가 작아서 한자를 병기하지 않으면 올바른 의사소통이 힘들게 된다. 한자의 의미를 이용하여 만든 단어를 소리 나는 대로 히라가나만으로 옮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은 컴퓨터와 문자를 접목시키는 데 있어서 중국과 다름없는 고민에 빠지게 되고 그 해결책은 역시 한자의 단순화와 간략화였다. 그래서 일본은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간자의 개발에 들어가게 된다. 간자의 개발과 사용이라는 것은 이전까지 써왔던 한자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즉 간자를 배운 새로운 세대들은 이전의 조상들이 썼던 한자를 해독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형 한자와 간자는 전혀 다른 문자이며 두 가지를 한꺼번에 배우지 않는다. 다 배워야 된다면 간자를 만들 이유가 없을 것이다. 수천 년의 문화유산은 남의 나라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변하고 만다. 특별하게 타국의 문자를 배우고 익힌 소수의 사람들이 자기나라 글로 번역해주지 않으면 읽을 수 없는 문서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와 역사의 단절이며 엄청난 손실로서 일종의 재앙에 가까운 사태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일본이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 오리지널 한자를 포기하는 것은 그야말로 울며 겨자먹기요, 독배를 마시는 일로 궁여지책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에 명태조나 청태종이 문자생활의 불편함을 알아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면 아마도 중국은 전 세계의 영구적 지배자가 될 것이 틀림없고 지난 역사는 전부 달라졌을 것이다. 누구도 중국에 맞서지 못한다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한글이 없다는 사실은 중국과 일본에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우리는 훈민정음이 있어서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는 행복을 누리고 있다. 구태여 간자를 만들 필요도 없고, 한자를 기피할 이유도 없으며 컴퓨터시대에 전 세계에서 가장 편리하고 쉬운 문자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문자전송 시합을 하면 한글로 전송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조건 1등을 하게 마련이다. 입력과 음소조합의 편리함에서 한글을 따라올 문자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문자 입력은 가히 신기에 가깝다. 두 손도 필요 없이 엄지손가락 하나로 그야말로 번개처럼 글을 찍어 보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한자라는 가장 고도의 지적사유가 요구되는 의미글자를 수천 년 경험에 의한 발전을 그대로 계승하여 아무런 훼손이나 변형 없이 우리 것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감사한 일인가 말이다. 만약에 중국이 이런 표음문자를 개발해서 한자와 병용할 수 있다면 중국이 간자를 만들고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 소리는 씨도 안 먹힐 것이고 만약에 한글전용론을 주장하는 자가 있으면 역적으로 치죄될 것이다. 중국과 일본이 원형한자를 포기하고 간자를 만드는 것은 우리와 달리 한글이라는 탁월하고 우수한 표음기호가 없기 때문이다. 저들은 눈물을 머금고 독배를 마시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복받은 민족인지도 모르고 한자를 버리자고 우기는 바보들이 있다. 가만히 놔두면 동양의 모든 정신유산은 전부 우리 민족의 것이 된다. 한자를 버린 중국과 일본은 문화와 역사의 상속권을 포기한 놈들이다. 그 방대하고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직 이 세상에 한민족뿐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만이 한자를 고유한 그대로 계승하고 앞으로도 발전시키고 더욱 가꾸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다 한글의 덕분이다. 한글 없이는 꿈도 꿀 수 없다. 사정도 모르는 자들이 중국과 일본이 버리고 있는 한자를 왜 우리가 배우고 가르쳐야 하느냐고 오두방정을 떤다. 중국과 일본이 궁한 대로 편법과 임기응변으로 디지털시대에 맞추어서 문자생활을 왜곡하여 구겨 넣고 있는 중이지만 저것이 결코 완벽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간자는 어디까지나 임시변통이며 불완전한 땜질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중국과 일본에 희망은 없는 것일까? 있다. 오직 한 가지 유일한 길이 있음이다. 그것이 바로 중국과 일본이 간자와 히라가나를 버리고 한글을 선택하는 것이다. 일본은 히라가나 대신 한글을 표음기호로 쓴다 해서 전혀 문제될 것이 없고 그 순간 모든 문자생활의 고민과 불편함은 한방에 끝이 난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한글을 약간 보완하면 중국말을 소리 나는 대로 옮기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사성조차도 한글을 이용하여 표기할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이 첨단의 과학기술과 산업력을 총동원해도 한글보다 더 우수한 문자를 발명해낼 수는 없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사실 불가능한 기적이 실현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미 한글이 있기 때문에 새로 고생할 이유도 없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중국과 일본이 한글을 한자와 병용하는 문자로 선택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한국의 경제력이 커지고 위상이 높아지고 동북아 3국이 점차로 하나의 문화권 경제권으로 통합되어 가면 언젠가는 한글이 그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해결책으로 부각될 것이다. 한중일 3국이 한자와 한글로 문자가 통일되면 이것은 세계사의 분수령이 된다. 진실로 아시아의 시대가 열릴 것이며 서구문명은 동양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 날이 오리라고 확신한다. 우리가 한글과 함께 한자를 보존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것이야말로 한민족이 다시 한 번 세계의 주인이 되는 가장 유력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미래세의 개벽을 한민족이 주도하게 되고, 주도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한자와 한글이라는 위대한 정신유산의 주인이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으면 말해 보라. 오직 그것밖에 없다. 한자와 한글은 한민족의 생명이며, 혼이며, 세계정신이다. 둘 중 하나를 버리면 우리민족은 죽는다.


 

[동양학 읽기] 6. 연재를 끝내며

고전에 대한 나의 해석이 정통 학계의 전문가분들께는 상당히 생경하고 당돌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지금까지의 어떤 해석들과도 다른 독창적 해석에 놀라움을 표하면서 한편으로는 2천년 이상 ... 주신 중앙일보와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신 여러분들 그리고 여러 가지 조언과 비판을 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다 못한 답변은 책을 통해서 해드릴 생각이다. 이경숙 저자 #동양학 #연재 #조선시대 유학자들 #동양 고전 #본래 글자
  • '이경숙 · 김용옥 동양학 논란'을 보고…

    '도올 현상' 에서 출발, '아줌마 논객 이경숙' 의 등장으로 이어진 동양학 열풍이 세간의 화제다. 이런 열풍에 대해 간간 반론이 있었지만, 정작 정통학계에서는 '논외(論外)' 의 대상으로 ... 김씨에 대한 무모할 정도의 저돌적 '도전'으로 언론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의 도전은 동양고전 읽기가 김씨와 같은 화려한 학벌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세상사람들에게 ... #이경숙 #김용옥 #성공 김용옥씨 #김용옥 동양학 #김용옥 교수
  • [동양학 읽기] 5. 고전의 독해 (2)

    ... '敬 鬼神而遠 之' 이지 '敬鬼神而 遠之' 도 아니고 '敬鬼神 而遠之' 도 아닌 것이다. 고전의 해석서들이 띄어 읽기조차 정확치 않는 것이 많다. 그러다 보니 번역은 물론 공자의 사상도 ... 된다. 이 외에도 '이(而)' 라는 어조사의 용법은 몇 가지가 더 있다. 이런 것만 알면 고전의 독해는 어려울 것이 없다. 이경숙 저자 '敬鬼神而遠之' 지금까지 해석〓귀신을 공경하되 ... #동양학 #고전 #동양학 읽기 #용법과 역할 #인과 관계
  • [동양학 읽기] 4. 고전의 독해

    고전의 문장들은 글자의 생략과 의미의 압축이 심하다. 이것은 옛사람들이 말을 아끼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간결한 표현을 좋아해서 구질구질하게 쓰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말을 소리나는 ... 내지 않으니 그것 역시 군자가 학문을 대하는 자세이다' 라는 것이 공자 말씀의 본의이다. 이경숙 저자 '이(而)' 는 우리말의 '~이 ,~는, ~가' 나 마찬가지로 한문에서 안 쓰이는 ... #동양학 #고전 #군자가 학문 #두번째 구절 #다음 구절
  • [동양학 읽기] 3. 고전을 다시 읽자

    ... 그러나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다. 우리는 선조들이 남긴 글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읽어야 한다. 고전은 원전을 그대로 읽어야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참 뜻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 ... 쳐다보고 중국에 기대한다는 것이 될 말인가□ 동양 고전의 정확하고 올바른 번역과 이해는 한국에서 나와야 하고, 일본과 중국이 우리에게서 배워가는 것이 정상이고 순리다. 이경숙 저자 #동양학 #고전 #표의문자인 한자 #표음문자인 한글 #번역 자체
  • [동양학 읽기] 2. 동양학 다시 시작해야 한다

    ... 점에서 나의 '음모' 가 약간은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뭐냐. 도올 김용옥씨의 고전 강의 내용이 엉터리라는 점에 대한 충격을 받기를 내가 바랬느냐?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무명의 ... 기존의 해석서만을 옳은 것이고 최선의 번역 결과라고 믿어 버렸을까' 이런 자책과 함께 '아줌마 이경숙이 하는 데 내가 왜 못하랴' 는 의욕과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번역된 결과를 남에게서 ... #동양학 #시작 #고전 번역 #우리말 번역 #도올 김용옥씨
  • [동양학 읽기] 1. 고전 읽기는 어렵지 않다

    최근 장안에 화제가 된 『노자를 웃긴 남자』(자인)의 저자 이경숙씨가 오늘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중앙일보에 동양학 읽기에 관한 칼럼을 연재합니다. 도올 김용옥의 도덕경 번역을 매섭고 설득력있게 ... 대표적인 두 고전 논어와 도덕경을 같이 보면서,그리고 유사한 부분에서 불교의 논지를 곁들여 고전을 읽는 방법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물론 고전을 읽는 즐거움도 같이 만끽하였으면 한다. 이경숙 ... #동양학 #고전 #동양학 읽기 #동양 삼교 #동양 철학



  • [사람사람] '완역 도덕경' 펴낸 아줌마 논객 이경숙씨

    [사람사람] '완역 도덕경' 펴낸 아줌마 논객 이경숙

    ... 비판해 화제를 모았던 李씨가 새 책을 들고 동양학계에 다시 나타났다. 새 책의 제목은 '완역 이경숙 도덕경'(명상.전 2권). 새 책에서 李씨는 김용옥 교수에 대한 비난을 하지 않고 있다. '이경숙 ... 李씨는 컴퓨터 엔지니어인 남편 金씨와 고3, 초등 6년생인 두 딸을 두고 있다. -공교롭게도 김용옥 교수가 방송 강의를 재개한 시점에 책이 출간됐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원고의 절반은 2년 ...
    • '도올 저격수'로 이름을 날린 '아줌마 논객' 이경숙(44)씨가 돌아왔다. '노자를 웃긴 남자'란 책으로 도올 김용옥(중앙대 석좌교수)씨를 힐난했던 바로 그 이경숙씨다. 새로 펴낸 책은 ... 비판하지 않았다. '노자 도덕경'총 81장을 기존의 해석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그야말로 '이경숙 식'으로 완역했다. 기존의 책은 도덕경 21장을 번역하는 데 그쳤었다. 책의 맨 앞에 40개 ...
    • '노자를…'저자 이경숙 유료

      지난해 『노자를 웃긴 남자』(자인)를 펴내 도올 김용옥씨의 도덕경 해석을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라고 비판해 화제를 모은 '아줌마 논객' 이경숙(42)씨. 고전 해석에 학벌이 왜 ... 언제 장안을 시끌벅적하게 만든 적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다고 말하는 그에게 도올 김용옥씨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나 할 수 있는 특정인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들이 ...

     

     

    기이한 책’ 쓴 ‘평범한 아줌마’
    배영대 중앙일보 문화부

     

    도올 신드롬을 정면으로 뒤집어 숱한 화제를 낳고 있는 “노자를 웃긴 남자”의 저자 이경숙씨.

    한사코 자신을 감춰왔던 그가 기자와 처음 인터뷰를 갖고 마침내 실체를 드러냈다.

    그는 가공의 인물도 아니었고, 쟁쟁한 학벌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중학교때 도덕경을 처음 접한 이후 따로 공부한 적조차 없는 평범한 아줌마였다.

    그가 누구인지 특별한 주제 없이 전화와 인터넷을 통해

    나눈 사랑방 담화 같은 솔직한 이야기를 육성 그대로 중계한다.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된 “노자를 웃긴 남자 1,2”(자인)의 저자 이경숙(41)씨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2001년 2월24일자 33면)를 통해 부분적으로 실체를 드러내면서

    그에 대한 관심이 다시 타오르고 있다.

    특히 인터뷰에서 이씨는

    “우리 사회의 학벌중시 풍조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 더 큰 목적일 수 있다”며

    학력을 밝히지 않는 이유를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문적 이력과 실력의 수준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오히려 증폭되고 있다.

    여기에 이씨가 지난 3월12일자부터 “중앙일보” 지면에 싣는 동양 고전에 대한 칼럼은

    그 특유의 자신만만함과 설득력으로 그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이씨는 이에 대해 언제까지나 감출 수는 없는 만큼 칼럼을 통해

    차차 고전을 공부한 과정과 김용옥을 비판한 배경 그리고 주부로서 느끼는 최근의 심경 등을

    밝혀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기자와 다시 가진 이번 인터뷰에서도

    여전히 “내가 쓴 모든 글과 책이 곧 나의 이력”이라며 구체적인 이력을 밝히기를 거부했다.

     

    “내가 쓴 글과 책이 내 이력”

    기자는 이씨의 실체에 조금이라도 접근하기 위해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다양한 방면에 대한 다각적인 질문을 통해

    그의 실체에 조금이라도 접근하기 위해

    특별한 주제를 정하지 않고 세상 사는 이야기 전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은 이씨와 인터넷과 전화로 주고받은 내용 전문이다.

     

    ─ “중앙일보”에 첫 인터뷰 기사가 나간 후 생활에 변화가 없지 않을 텐데….
    “지금까지 만나기를 거절했던 분들께 입장이 무척 곤란해졌다.

       한 사람을 만나면 다 만나야 할 것 같아 그토록 인터뷰를 사양했었다.

       염려대로 많은 인터뷰 요청에 시달리고 있다.

       신문·잡지사 기자들과 학계·종교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온다.”

     

    ─ 가족들도 기사를 보았나.
    “물론이다.”

     

    ─ 가족들의 반응은.
    “남편과 아이들은 내가 언론사 사람들이나 팬들 또는 적대적인 사람들 모두에게 시달릴까 봐

       염려하고 있다. 그냥 조용히 내버려 두기를 바란다.”

     

    ─ 꽤 많은 인세를 받았을 텐데….
    “액수를 밝히고 싶지 않다. 책으로 인한 수입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 인터넷 홈페이지를 잠정폐쇄했다고 들었다.
    “홈페이지로 격려와 질책이 많이 쏟아졌다.

       일부 도올을 지지하는 네티즌들의 원색적 비방도 있었고,

       내가 책을 쓴 동기와 목적을 곡해하는 사람이 많은 듯해 잠시 닫아 두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중앙일보에 칼럼을 연재하기로 결심한 것도 이를 불식시키려는 마음이 컸다.

       칼럼과 인터뷰를 통해 시간을 갖고 대해 나가다 보면 오해는 풀릴 것으로 본다.

       그러면 다시 홈페이지를 열어 독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 물론 비난만 있지는 않았을 텐데.
    “나로 인해 도덕경의 올바른 뜻과 노자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감사의 뜻을 전하는 글이 가장 많았다.

       동양학을 전공하거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분들 가운데 부끄럽다고 고백하신 분들도 있다.”

     

    ─ 이참에 학력을 밝힐 수 없나.
    “노자나 공자의 학벌을 묻고 싶다. 논어나 도덕경을 읽을 때 저자의 출신 대학이나 학벌을

       보고 읽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 도덕경은 언제 처음 접했나.
    “중학교때 고서를 본 것이 처음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이사하면서 그 책을 잃어 버렸다.

       가족 누군가가 버린 것 같다.”

     

    ─ 도덕경에 대해 누구의 강의를 들은 적은 있는가.
    “없다.”

    “도덕경 공부한 적 없다”

     

    ─ 구체적으로 공부한 과정은 있을 것 아닌가.
    “따로 공부한 적이 없다고 누누이 말했지만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다.

       도덕경을 비롯한 동양의 고전들은 ‘공부하는 책’이 아니다.

       그저 깨끗한 마음과 맑은 심성으로 읽고 그 뜻을 삶에서 실천하면 되는 책이다.

       왜 자꾸 ‘공부’나 ‘연구’를 들먹이는지 이해할 수 없다.

       고전에 대한 그런 잘못된 ‘공부벽’ ‘연구벽’에 대한 우려에서

       중앙일보의 ‘고전 읽기’ 칼럼을 쓰기로 했다. 칼럼을 통해 동양 고전은 공부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 그런 나에게 자꾸 ‘얼마나 공부했느냐?’고 묻는 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 한문은 언제 배웠나.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집안 어른들께 배웠다.”

     

    ─ 한문의 특징은 무엇인가.
    “글자 자체가 사상을 담고 있다고 본다.

       중국의 학문은 사실 옛날에 만들어진 글자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글자 자체가 철학을 잉태하고 있는 씨앗이다.”

     

    ─ 예를 든다면.
    “예컨대 음()이나 양()이란 글자의 상형과 그 뜻을 푸는 과정 끝에

    ‘음양’이라는 개념이 나오는 식이다. 도()나 인()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상이나 철학의 이름이 도나 인이 아니라

       도와 인이라는 글자에서 도교와 유교가 나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상이 있고 그것을 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글자가 먼저 있고 그 글자의 뜻을 푸는 데서 사상이 세워진 것이 동양의 철학이다.

       노자의 생각은 ‘도’라는 글자에서 시작되었고,

       공자의 사상은 ‘인’이라는 글자에서 출발한 것이다.

       생각을 글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글자가 생각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문자가 바로 한자라고 본다.

      동양 철학은 한자라는 문자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철학 자체가 문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 도덕경은 어떤 책인가.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며 쓴 애민(愛民)의 글이고,

       인위적인 사회구조를 자연적인 생활로 되돌리려는 정치사상서다.

       도가(道家) 계통의 사람들이 양생법이나 신선술이 기록된 경전으로

       변조시키려고 노력해온 탓에 일종의 수련서처럼 왜곡됐지만

       도덕경은 수련법과는 전혀 무관한 책이다. 도덕경의 어디에도 그런 설명은 없다.”

     

    ─ 중앙일보에 쓴 첫 기고문(2월24일자 34면)에서 도덕경은 전체가 하나의 문장이라고 했는데….
    “전체를 엮지 않고 낱낱의 문장을 읽으면 모든 구절이 제각기 따로 노는 것이 도덕경이란 책이다.

       뒤를 보지 않으면 앞을 알 수 없고, 앞을 기억하지 못하면 뒤를 이해할 수 없다.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논리로 연결해야만 비로소 각 문장이 제대로 읽힌다.”

     

    ─ 자세히 듣고 싶다.
    “도덕경이란 책의 구조는 놀랄 만큼 정교한 장치를 해놓은 미로와 같다.

       안으로 들어가면 결코 길이 보이지 않는다.

       미로 전체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입구와 출구를 확인해 머리에 담은 다음 들어서야

       바르게 빠져나갈 수 있다.

       미로의 지도를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우선 들어간 다음 더듬거리며 헤매는 것이

       도올을 비롯한 기존의 도덕경 해석이다.”

     

    ─ 기존 도덕경 해석서의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나.
    “약간 잘못됐다는 생각은 했지만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된 것은 도올의 TV 강의를 보면서였다.

      하도 황당해서 책(노자를 웃긴 남자)을 쓰면서 시중에 나와 있는 10여종의 도덕경 주해서를

      세밀하게 봤다.”

     


    공자·노자 잘못 그리는 도올 강의

     

    ─ 귀하의 해석에는 직관력이 돋보이는 것 같은데, 고전 해석에서 직관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전의 번역은 직관보다 원문을 존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직관력의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원문의 무시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원문과는 전혀 다른 해석들이 보편적인 것으로 통용되어 왔다는 이야기다.

       원문을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지,

       이해할 수 있는 해석에 원문을 맞추면 안된다는 말이다.

       때문에 고전 해석에 직관력을 동원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 직관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예컨대 도덕경은 고전 중에서도 아주 특이한 책이라

       전체적인 구조의 비밀을 알아채는 데 직관의 도움을 받았다.

       극한으로 절약된 문장과 글자의 의미를 여러 군데 분산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다른 고전들은 직관에 크게 의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 다양성을 용인하는 것이 철학의 기초라고 본다. 당신의 고전 번역의 특징인 일관성은

        다른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사항인가.
    “해석의 다양성은 인정할 수 있어도 번역의 다양성은 인정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번역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없다.

       다양한 번역이 가능한 글이라면 그것은 글이 아니고 비문이다.

       인간의 말을 옮기는 데는 불완전한 면이 있는 문자인 한자의 특성상

       하나의 문장이 몇가지 뜻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올바른 하나의 번역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장 자체는 여러 가지 번역이 가능하지만

       하나의 사상이나 철학으로서 일관성을 가질 수 있는 번역은 제한되기 때문이다.”

     

    ─ 도덕경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받은 주석서가 있는가.
    “도움을 많이 받은 책은 도올을 비판하기 위해 쓴 글이므로

       당연히 도올의 ‘노자와 21세기’다.

       가장 좋아하는 주석서는 불교의 공(空)사상에 대한 용수(나가르주나)의 ‘중론송’이다.”

     

    ─ 논어에 대해 지금까지의 질문을 다시 한다면.
    “논어도 중학교 무렵 처음 읽었고 강의는 별도로 들은 적이 없다.”

     

    ─ 도덕경과 논어 해석에서 발생할 수 있는 차이는 무엇인가.
    “논어는 평이한 문체로 쓰인 책이고 유별난 생략이나 압축 또는 공자가 지어낸 단어들이

       별로 없어 도덕경과 달리 번역 자체에 이론이 있을 부분이 많지 않다고 본다.

       물론 많은 이론이 있지만 공자라는 성현의 지적 수준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전체적인 논리의 일관성을 조합해 내는 과정에서 어느 것이 가장 올바른 해석인지는

       결정할 수 있다고 본다. 둘 중 하나다.

       공자의 논리가 부실하거나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 도올의 논어 강의는 봤나?
    “봤다.”

     

    ─ 도올의 논어 강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도덕경 해석과 마찬가지로 할 말이 많다.

       기고문에도 일부 썼지만 중앙일보 칼럼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밝히겠다.”

     

    ─ 지금 몇가지 예를 말해 줄 수 있나.
    “몇몇 문장의 번역이나 해석이 틀리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통해 그려내는 노자와 공자라는 인물이다.

       도올이 논어와 도덕경 강의를 통해 대중에게 보여주는 공자나 노자의 모습은

       공자나 노자가 아니다. 이 문제를 간단한 대답으로 다 말할 수는 없다.

       앞으로 차차 지적해 나갈 생각이다.”

     

    ─ 귀하의 번역에는 띄어 읽기 등 한문독법상의 오류가 있다는 지적도 있는데.
    “학계 전문가들로부터 정식으로 나온 지적이나 비판은 거의 없었다.

       대개 네티즌들이 도올 관련 사이트에서 떠드는 이야기들인데

       반론을 제시해야 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은 보지 못했다.

       특히 책의 내용 중 극히 일부분만 가지고 비방할 뿐

       전체적인 내용에 대한 논리적 반박은 접해본 바 없다.

       있다면 한국학 연구소장인 박 현씨가 쓴 글 정도인데 이에 대해서는

       인터넷을 통해 답변한 바 있다. 좀더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비판이나 지적이 있기를 바란다.”

     

    ─ 가정주부이니 묻겠다. 아이를 키우는 데도 도()가 있는지.
    “아이들뿐만 아니라 남편을 포함한 모든 가족에게 내가 견지하는 자세가 있다면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가족들이 다른 가족 누구에게도 하지 않는 말이 있다.

    ‘하지마’와 ‘안돼’라는 두마디다.

       무엇이든 가족들 중 누군가가 하고 싶어하는 것이 있으면 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무엇을 하고 싶은가는 본인의 선택이고 모든 가족은 그것을 존중한다. 그것이 도라면 도다.”

     

    ─ 동양의 전통교육은 어렸을 때는 강제로라도 잘못 뻗어나가는 가지를 쳐 주는 것 아닌가.
    “자연상태의 나무에 잘못 뻗어나가는 가지는 없다.

       나무를 기르는 사람의 마음에 안드는 가지가 있을 뿐이다.”

     

    두 딸에게 한문 따로 안 가르쳐

     

    ─ 아이들이 엄마의 책을 읽었나.
    “큰애가 중학교 3학년이고 둘째가 초등학교 3학년인데 큰애는 내 책을 읽을 만한 나이가 되었다.

       책뿐만 아니라 큰애는 내 사이트에 올린 글을 함께 본다.

       비판하는 글도 보지만 별다른 얘기는 안한다. 내가 쓴 책을 학교 선생님들께도 선물했다.”

     

    ─ 선생님들의 반응은?
    “선생님에 따라 다소 다른 것 같다. 도올을 좋아해서 그의 강의를 열심히 듣고

       수업시간에 얘기하는 분도 있고 또 내 책에 감명받았다고 하는 선생님도 있다고 한다.”

     

    ─ 아이들이 엄마의 활약을 알고 있나.
    “잘 모른다. 단지 책 나오고 인터뷰가 나간 후 엄마의 영역이 커졌다는 정도는 아는 것 같은데

       기뻐하기보다 그런 일에 엄마를 빼앗길까봐 걱정하는 눈치다.”

     

    ─ 모범생이 아닌 아이들 이른바 문제아는 어떻게 교육해야 하나.
    “문제아는 없다. 어른들이 문제아라고 생각하는 불행한 아이들이 있을 뿐이다.

       하기 싫고 자기에게는 어려운 공부를 강요하니 문제아가 된다.

       잘할 수 있고 또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허락하면 문제아 대신

       활력이 넘치는 건강한 아이를 보게 될 것이다.

       문제아란 하고 싶은 일을 억제당하고 하기 싫은 일을 강요받으며 사는 아이들이다.

       하고 싶어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주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 두 딸에게는 따로 한문교육을 하는가.
    “한문을 따로 가르치지도 않고 배우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큰딸은 학교에서도 한자를 배우지 않지만 내가 한문 보는 것을 보고 스스로 배우려 한다.

       둘째딸도 언니가 공부하는 한자를 보고 가끔 아는 체하기도 한다.”

     

    ─ 책과 기고에서 여러 차례 한글전용의 문제를 지적했는데,

        한문교육은 언제부터 하는 것이 좋을까.
    “한문을 배워야 우리 글에 대한 이해도 빠르다. 적어도 초등학교 때는 가르쳐야 한다고 본다.”

     

    ─ 초등학교때 가르친다면 교재는 어떤 것이 좋을까.
    “따로 만들 수도 있겠지만 한글 뒤에 괄호를 넣어 한문을 표기하는 것부터 실시해도 좋겠다.”

     

    ─ 국한문 혼용이 오히려 ‘한문을 안다’는 어설픈 자만심을 키우는 것은 아닐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기존의 고전 한문 해석이 너무 어렵게 풀어놔 일상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누구나 이해가능한 고전 번역이 이루어진다면

       그러한 우려도 해소될 것이다.”

     

    ─ 맞벌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같이 벌어야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많으니 어쩔 수 없지만,

       가능하면 아이들이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는 주부가 가정을 지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 불교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는데, 스스로 불자(佛子)라고 생각하나.
    “진정한 불자는 아니다.”

     

    ─ 무슨 뜻인가.
    “남을 위해 살 줄 알고 희생할 줄 알아야 진정한 불자다.”

     

    ─ 진정한 불자로 존경하는 사람이 있는가.
    “흔히 유명한 사람들만 평가하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드러나지 않은 진정한 불자들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쉽다.”

     

    ─ 불자라는 말 대신 종교인이라고 표현해도 좋은가.
    “물론이다. 기독교인 중에도 드러나지 않지만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

       드러내놓고 하는 선행보다 드러내지 않는 선행을 해야 진정한 종교인이다.”

     

    ─ 종교를 택한다면.
    “물론 불교다.

       하지만 보이지 않게 선행을 한다는 면에서 굳이 종교를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 주부들도 재교육을 받아야 할까.
    “주부 역시 자기계발을 게을리하면 안된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이 다라면 아이들이 크면 무시당할 수 있다.

       엄마가 먼저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어떤 고액과외보다 더 좋은 교육이다.”

     

    ─ 구체적으로 어떤 공부를 해야 하나.
    “필요하다면 학원에라도 다니면서 하고 싶은 공부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항상 책을 가까이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 좋다.”

     

    “지금 무엇 뿌릴까 고민할 때”

     

    ─ 인터넷시대에 책의 중요성은 감소하지 않을까.
    “인터넷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교양의 원천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나.
    “열심히 애쓰고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가난이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본인들이 스스로 가난을 느끼는 것 아닐까.”

     

    ─ 운명은 있다고 보는가.
    “그렇다.”

     

    ─ 주역을 공부한 탓인가.
    “주역과는 상관없다.

       내가 처음 펴낸 책인 ‘마음의 여행’(정신세계사)에 그에 대한 얘기들을 썼다.”

     

    ─ 타고난 운명이 있다면 열심히 애쓰고 부지런하게 사는 것도 그 사람의 운명인가.
    “운명을 개척할 수도 있다.”

     

    ─ 어렵다. 안주하지 않고 개척하는 것도 운명일 수 있나.
    “밭에 콩을 심었을 때 콩이 나는 것은 운명이다. 그러나 콩을 심을 것인가,

       팥을 심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다.

       사람들은 콩을 심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고

    ‘팥이 필요한데 콩이 나버렸으니 그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운명은 자기가 선택한 것의 결과다. 선택하는 순간 결정되지만 선택의 자유는 있다.

       이미 선택한 것의 오지 않은 결과가 운명이다.

       때문에 선택한 사실이 있는 이상 그것의 결과인 운명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아직 선택하지 않은 많은 일들이 있다.

       지금까지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면 정해진 운명도 좋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의 선택이고 결정이며 행동이다.

       이미 뿌린 씨앗은 뿌린대로 거둘 것이지만, 지금 무엇을 뿌릴 것인가는 지금 결정할 수 있다.”

     

    ─ 운명을 믿는 것이 고전 공부와 관련 있나.
    “큰 관련은 없다. 그러나 인생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보다 올바른 선택을 할 가능성을

       넓혀 줄것이다.”

     

    ─ 기()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
    “물론 기의 존재를 인정하며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다.

       모든 물체에서는 기가 나온다. 여러 개의 종이컵 중 하나에만 어떤 물건을 넣고 손으로 기운을

       느껴보면 물건이 들어 있는 컵을 정확하게 고를 수 있다.

       기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리고 누구나 가능한 일이다. 모든 만물은 각자의 기가 있다.”

     

    ─ 두 딸에게 따로 영어 공부는 시키는가.
    “과외를 시키지는 않는다. 친척이 영어학습지 선생이어서 둘째딸에게 테이프를 갖다 주었는데

       첫날 한번 하더니 치워버렸다. 역시 강요는 안한다.

       하지만 언니와 대화하면서 자기가 이런 영어 단어도 안다고 자랑하면서 배우기도 한다.”

     

    ─ 특별한 운동을 시키는 것은 있나.

    “큰딸은 특별히 미술을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동물이나 사물의 이미지를 잘 그린다.

       둘째는 태권도 하나만 가르친다. 태권도 사범에게도 둘째가 게으름피우면 그냥 두고

       강요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 아이들 교육에 전혀 강요를 안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강요보다 더욱 효과적인 것이 동기부여다.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어머니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동기부여를 못하기 때문에 윽박지르는 강요가 나온다.

       강요는 바로 효과가 나지만 일시적이고 동기부여는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지만 지속적이다.

       때문에 동기를 부여하고 그 효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하다.

       동기를 부여하는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바로 칭찬이다.”

     

    ─ 아이들 학교 성적은 어떤가.
    “잘하는 편이다.”

     

    ─ 지방에 살면 서울보다 정보가 적어 교육에 불리하지 않을까.
    “교육의 목적이 성적에만 있다고 할 때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정보가 많다는 것은 경쟁이 심하다는 이야기다.

       지나친 경쟁이 교육에 좋은 것만은 아니다.

       서울보다 정보가 적은 만큼 경쟁이 약해 오히려 아이들의 정신건강에는 유익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비결은 뭔가.
    “화목한 집안 분위기가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서로 다정하고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는 분위기라면 자연히 아이들도 자기 할 일에

       충실하게 마련이다. 아이들 공부에는 심리적 안정이 가장 중요하다.

       가정의 분위기가 안정되지 못하면 아이들은 공부를 잘하기 어렵다.

       부모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늘 부모가 책을 가까이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큰딸이 커서 무슨 일을 하기를 바라나.
    “교편생활이 어울릴 것 같다. 하지만 본인이 하고 싶다는 방향도 중시할 것이다.”

     

    ─ 지난 10년간 컴퓨터통신에서 ‘구름’(Cloud)이란 필명을 날렸는데, 컴퓨터는 잘하나.
    “그렇게 잘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통신에 글을 올리는 데는 대단한 컴퓨터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 글쓰기는 언제부터 했나.
    “본격적으로는 컴퓨터통신을 할 때부터다.”

     

    ─ 그때부터 그렇게 학벌 중시에 반대했나.
    “아니다. 도올의 책과 강의 때문이다. 학벌을 강조하지 않고도 옛날에는 알 수 있었고,

       또 지금도 알 수 있다고 보는데 유달리 학벌을 강조하는 것이 귀에 거슬렸다.

       게다가 그 많은 학벌을 가지고도 번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 학벌에 원한진 일이라도 있나.
    “도올의 강의가 학벌이 약한 많은 사람들에게 체념과 절망감을 안겨줄 것 같아

       그것을 염려했을 뿐이다. 나는 학벌을 의식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내세울 이유도, 필요도 없다고 본다.”

     

    ─ 장시간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원래 말이 적은 편이다. 자꾸 말을 시키니 대답 안할 수도 없고 해서 하다 보니 말이 많아졌다.”

     

     

    노자를 웃긴 男子 도올을 울린 女子


    ‘도올논쟁’의 시작과 끝 /
    동양학 붐 일으킨 功 크나 동양학의 귀족화는 큰 잘못
    배영대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노자를 웃긴 남자 1,2”(자인)는 기이한 책이다.

    다른 고전 해석서들처럼 각주를 다는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 번역과 해설의 파괴적 설득력은 기존의 어떤 해석서보다 탁월하다.

    도올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통나무)를 저본으로,

    책을 비판하는 데 일관한 이경숙(41)씨의 이 책은 도올을 직접적 타깃으로 삼았지만

    궁극적으로 기존의 도덕경 해석 2,500년의 역사를 뒤집는 파괴력을 보인다.

     

    저자 이씨는 “어려서부터 도덕경을 보았는데,

    우연히 도올의 TV강의를 보고 저렇게 도덕경의 취지를 왜곡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쓰게 됐다”고 한다. 처음부터 책을 쓰려 한 것은 아니고 10년 전부터

    ‘구름’(Clouds)이란 ID로 필명을 날리고 있던 컴퓨터통신에 글을 올렸다.

    이씨의 표현을 따르면 “조그만 통신모임방에서 글을 연재한 것은 이발사가 숲속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이씨는 통신상의 글쓰기 특성상 재미있게 쓰다 보니

    도올에 대한 인식공격성 발언도 많았다고 고백한다.

    도대체 도올의 도덕경 해석이 얼마나 잘못됐길래 이씨는 이다지도 흥분하는 것인가.

    고전의 번역과 해석은 2,000∼3,000년의 역사적 간격을 고려한다면 저자가 다시 살아나 밝히지

    않는 한 번역서 각각의 다양성을 용인해야 하는 것이 오히려 마땅해 보인다.

     

    이씨와 도올의 논어 해석은 정반대

    이씨의 책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도덕경 1장에서 20장까지를 번역 해설한 이씨의 책은

    1장 첫머리인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에서부터 20장이 끝날 때까지 거의 90% 이상을

    도올과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아니 완전히 정반대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나의 고전을 번역한 두 책이 전혀 다른 말을 할 수 있을까.

    도올과 이씨의 번역은 조사조차 전혀 다른 의미로 쓰고 있다.

    더욱이 도올의 도덕경 해석은 기존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측면이 많아 도올에 대한 부정은

    곧 기존 해석에 대한 부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씨의 책을 처음 접한 지난 해 말 기자의 느낌은 놀라움 외에는 다른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습관처럼 얼른 표지를 뒤적여 저자의 이력을 찾아 보았다.

     ‘1960년 마산 출생, 컴퓨터통신에서 활약, “마음의 여행”(정신세계사)이란 책을 낸 바 있음.’

    이것이 전부였다. 저자 이경숙씨는 과연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어느 대학을 나와 어떻게 공부했을까. 인터뷰(중앙일보 2월24일자) 기사가 나간 이후

    이씨의 학문적 이력과 실력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더 커졌지만,

    이씨는 자신의 이력을 밝히기를 극구 거부하고 있다.

    학계에서 이씨를 비판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이씨로부터 매서운 비판을 받은 도올은 자신을 드러냈으므로

    이씨 또한 당연히 자신을 드러내야 게임의 룰에 맞다는 것이다.

     

    복잡하게 얽혀 가는 도올논쟁 속에 왜 관련 학계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하지 않느냐는 요구들이

    많다. 기실 학계에서는 도올과 이경숙씨 그리고 서지문 교수에 대해 냉담한 것이 사실이다.

    그간 학계에서는 대체로 사석에서 도올을 피상적으로 비판하는 데 그쳤고 TV강의에 대해서도

    ‘엔터테이너’라는 식으로 비켜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학계의 반응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해 초 “서평문화”(간행물서평위원회, 2000년 봄호)에 기고한 최진석(서강대 철학과) 교수의

     “노자와 21세기”에 대한 서평은 도올의 학문적 공과에 대한 학계의 본격적인 첫반응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최교수의 서평은 원고지 50매라는 한정된 분량에 도올의 학문적 공과를

    모두 반영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이후 도올은 노자강의에 이어 KBS TV에서 논어를 강의한다.

    그리고 올초 도올논쟁을 촉발시킨 서지문(고려대 영문과) 교수의 ‘소인(小人)이 군자(君子)를

    강(講)하는 시대’라는 자극적 칼럼이 “중앙일보”에 나가고,

    이것을 일간지에서 도올과 서교수가 논쟁을 벌이는 식으로 보도하면서 문제는 불거지기 시작했다. 잇따라 각종 학술전문지에서 ‘상품성’ 높은 도올과 그의 책에 대한 비평이 나오면서

    논쟁은 확대되기 시작한다.

    그 논쟁의 한가운데에 이경숙씨의 책이 놓여 있다.

    이씨의 “노자를 웃긴 남자”는 도올의 노자 해석에 대해 원문 글자를 하나하나씩 비교하면서

    도올과는 완전히 다른 자신의 독창적인 번역과 해설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면적인 도올 비판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다.

     

    지난 해 12월 제 1권이 출간된 이씨의 책권은 입소문만으로 두 달 넘게 베스트셀러에 목록에

    올라 있다. 그러나 저자가 무명의 가정주부라는 이유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이쯤에서 나온 이씨의 “중앙일보”와의 인터뷰 기사는 논쟁에 휘발유를 끼얹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이후 인터넷 등 토론공간에서는 전례 없는 철학논쟁이 전개되고 있다.

    기실 도올이 그런 비판만 받을 정도의 사람은 아니다.

    그가 우리 사회에 동양학 붐을 불러일으킨 공은 이경숙씨도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그 공에 대한 긍정이 번역에서의 과실(過失)조차 덮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도올이 외국유학을 마치고 1980년대 초반 귀국했을 때는

    그의 표현대로 동양학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학문이었다.

    당시 도올이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통나무)를 펴내며 우리 지식사회에 던진 충격은 막대하다.

    도올은 이 책에서 “동양학은 나의 살아 움직이는 실존적 삶의 영원한 현재적 기록일 뿐”이라며

    동양학 붐의 깃발을 높이 치켜든다.

    기존에 보던 고리타분한 해석이 아니라 동서양 고금과 학제(學際)를 넘나드는 도올의 설명은 대단한 설득력을 얻었다.

    의외로 도올이 들고나온 무기는 너무나 사소해 보이는 ‘번역’의 문제였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번역은 단순히 글자를 외국어에서 국어로 옮기는 작업이 아니었다.

    도올은 “번역이란 한문을 순수 옛 우리말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통용되는 일상언어

    즉 누구에게든지 의미전달이 가능한 보편적 언어로 바꾸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컨대 동양 고전인 “중용”(中庸)에 나오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을 ‘천이 명한 것,

    그것을 성이라 위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천, 명, 성의 내용을 일상언어로 풀어 전달해야 하며

    글자 하나 하나를 한마디로 대응해 풀 수 없을 때는 반드시 상세한 주해를 첨부해 자기가 이해한

    바를 논리적으로 풀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올은 한 발 더 나아가

    “오히려 서양인의 번역이 훨씬 더 정확하고 논리적이며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까지 말했다.


    “논어”라는 책 이름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보다

    서양인들처럼 “공자라는 사람의 어록집”(The Confucian Analects)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쉽게 이해된다는 것이었다. 최근 도올이 한 방송에서 “오늘날 학문의 본령은 고전 번역이며,

    나도 그런 번역자의 한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발언이다. 그가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제기한 문제는 동양학 방법론이었다.

    지금에 와서 그의 문제제기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다.

    문제는 그 방법론이 담고 있는 내용의 정확성 여부다.

    이런 문제제기의 맨 앞줄에 이경숙씨가 서 있는 셈이다.


    이경숙씨가 지적하듯 도올의 해석에는 ‘밑반찬’이 많다.

    풍성한 ‘밑반찬’은 도올이 동양학 붐을 일으키는 촉매로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도올은 도덕경 한줄을 해석하면서도 그 몇십배에 달하는 설명을 한다.

    기존 주석의 성과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자신의 체험과 일상사 섞어 설명한다.

    물론 이런 자세가 나무랄 일은 아니다.

    오히려 대중을 상대로 하는 계몽적 글쓰기와 강연에 이런 작업은 필수적이며

    전문가들이 더욱 정진해야할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밑반찬이 아무리 훌륭해도 메인요리에 오류가 있다면 시정돼야 한다.

    이것이 이경숙씨가 지적하고 나온 도올 비판의 핵심이다.

     

    “동양학의 귀족화가 도올의 큰 잘못” 비판

    도올과 이씨는 여러 면에서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먼저 소위 학벌만 해도 그렇다. 도올이 처음 동양학을 들고 나왔을 때 그가 하버드대를 나왔다는 것은 특별한 관심거리였다. 나아가 그가 동양학 붐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배경으로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도올이 학벌을 강조한 것은 동양학의 불모지에서 관심을 끌기 위한 전략일 수 있다.

    이후 40권에 가까운 그의 대중적 저술은 그의 카리스마를 더해 주는 작업이었으며, TV 강의는 동양학 열풍에 대한 그의 공적을 사회적으로 공인받는 것이었다. 인문학과 TV의 만남도 극적이었다. ‘인문학의 죽음’을 말하는 한켠에서 도올이 개척한 TV와 인문학의 접속은 하기에 따라서는 인문학도 얼마든지 새로운 영역과 관심을 도출해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씨가 도올의 잘못으로 지적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학벌 문제다. 학벌을 강조하는 것이 ‘동양학은 어려운 것’이라는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씨는 자신의 학력을 초증학교 졸업이라고 말한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동양학을 어렵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 이씨의 주장이다.

    이씨는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내가 본 것은 철학의 대중화가 아니라 귀족화요, 엘리트화였다. 동양 고전이라는 것이 저렇게 어렵고 난해하고 일반인들은 함부로 접근하기조차 힘든 것으로 인식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씨는 ‘고전은 누구나 읽을 수 있다’ ‘아줌마도 옥편 한권 들고 앉으면 고전의 원문을 읽어나갈 수 있다’ ‘동양 철학은 그렇게 난해한 말들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라고 말한다.

    도올은 1980년대 초반 “동양학은 더 이상 공자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씨는 “동양학은 공자왈”이라고 말한다. 이씨가 보는 동양에서의 학문이란 ‘옛 성현의 말씀을 익히고 깨쳐 실천하는 것’이며, 공부란 ‘공자왈 맹자왈’이었고 고전을 읽을 수 있는 문자를 숙지하는 것이었다. 도올이 동양학 방법론의 문제를 제기했다면, 이씨는 동양학 공부의 내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씨의 노자 번역과 도올의 번역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도덕경만 해도 2,500년 동안 일일이 손으로 써서 전승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수로 혹은 의도적으로 왜곡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것이 고전 번역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판본의 문제다.

    판본이란 한 고전이 발견된 시대에 따라 각각의 특징을 따서 구별하는 것이다. 도덕경의 대표적 판본으로는 죽간본·백서본·하상공본·왕필본·성현영본 등이 존재한다. 나열한 순서가 대체로 오래된 순서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읽히는 판본은 왕필본이다.

    이 때문에 번역자가 도덕경의 어느 판본을 보았느냐에 따라 해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판본 이야기를 늘어 놓는 이유는 도올과 이경숙씨 번역의 큰 차이가 이 때문에 빚어졌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판본의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전파시킨 사람은 바로 도올이다. 도올이 펴낸 “노자와 21세기”는 위에 열거한 여러 판본을 비교하며 여러 해석이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 도덕경 해설서라고 볼 수 있다.

    도올이 노자를 강의하고 나서 “나는 노자를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상대적 정답의 가능성밖에 없는 과거를 말하는 대신 그보다 정답의 가능성이 훨씬 높은 오늘의 나를 얘기했다는 말인 것이다.

     

    노자철학 핵심 해석부터 다른 두 사람

    더하여 나의 해석만을 정답이라고 강변하거나 강요할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결국 도올이 노자나 논어를 강의해도 그것은 도올 자신의 철학을 말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경숙씨가 “도올의 도덕경 강의에는 노자가 없고, 논어 강의에는 공자가 없으며, 불경 강해에는 부처가 없다”는 말로 도올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판본들 사이에 몇가지 다른 자구 해석을 놓고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수많은 판본을 관통하는 노자철학의 핵심에 대한 번역에서는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경숙씨의 도올 비판 중 하나는 도올의 해석이 한 문장에서조차 앞뒤 문맥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씨는 도올이 오늘의 문제의식으로 과거를 덮어씌우는 것을 중시하다 보니 과거에 통용되던 너무도 쉬울 수 있는 고전을 오리무중의 난해한 책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씨가 말하는 노자철학의 진수가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노자 철학의 핵심은 당연히 ‘무위’(無爲)다. 도올과 이씨는 물론 누구나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무위는 노자사상의 상징인 것이다. 문제는 무위에 대한 번역이다. 무위에서 ‘무’는 논란의 여지가 없으므로 결국 문제는 ‘위’(爲)자에 모아진다. 이씨는 이 한 글자야말로 도덕경을 푸는 열쇠라고 말한다.

    도올을 포함한 대부분의 기존 도덕경 번역은 위를 ‘할 위’로 풀었다. 그래서 ‘무위’를 ‘함이 없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씨는 ‘위’자를 ‘꾸밀 위’로 풀어 무위란 ‘꾸미는 것이 없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씨가 볼 때 노자의 무위는 무엇을 하고 안하고의 뜻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위’자는 도덕경 2장에서 처음 나온다. 이씨와 도올 모두 도덕경 2장이 노자철학의 핵심을 설명하는 장으로 보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씨는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했다.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은 무위고, 추한 것이 있는 그대로 추한 것도 무위다. 선한 것도 무위요, 악한 그대로 드러난 악도 무위다. 노자는 미추와 선악을 구별하지 않는다. 다만 추한 것이 아름다운 것으로 위장하거나 악한 것이 선한 것을 가장하는 것을 유위(有爲) 즉 꾸미는 것이라 하여 멀리할 뿐이다. 선악과 미추와 고저와 장단이 모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것은 모두 무위인 것이다.”

    이에 비해 “도올은 ‘위’자는 쳐다고 안보고 미추와 선악 등 가치의 상대주의로 해석하여 노자의 원의를 왜곡했다”는 것이 이씨의 비판이다. 이씨가 무위를 꾸밈이 없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는 데 반해 도올은 그 무위를 윤리적 선악의 판단과 같은 이분법의 거부, 즉 가치상대주의를 피력하는 장으로 보는 것이 차이다.


    ‘동양학을 왜 어렵게 만드는가’

    그렇다면 도덕경 제 1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기존의 해석은 도(道)의 본질을 설명한 총론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이씨는 노자가 자신의 사상을 ‘도(道)라는 이름(名)’으로 명명하게 된 의미를 말하는 서론으로 간주한다. 또 기존의 번역이 1장의 키워드를 ‘도’로 봤다면, 이씨는 ‘명’(名)으로 본다. 이씨에 따르면 “노자가 앞으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생각의 이름을 도라고 이름 붙이지만 이것은 도가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무방하다”고 일러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씨는 노자가 ‘도’ 자체에 대해 그다지 많은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노자의 말처럼 ‘도’는 보거나 만지거나 설명하거나 분석해서 그 실체와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최고의 경지는 도라는 말로 표현했지만, 도덕경이란 책에서 노자가 말하는 것은 그러한 경지에 대한 묘사보다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정치적 리더를 포함한 일반인들이 어떻게 하면 그 도에 가깝게 살 수 있는가를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경”이란 제목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제목은 노자가 스스로 붙인 것이 아니다. 또 백서본이 발견되었을 때는 현재 통용되고 있는 38장 즉 흔히 ‘덕경’(德經)이라고 불리는 도덕경 후반부의 첫장이 앞에 쓰여 있었다.이 점을 생각하면 ‘도덕경’이 아니라 ‘덕도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만큼 제목에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씨는 도덕경만큼 오랫동안 오해와 편견 속에 묻혔던 책은 없다고 말한다.
    ‘도’라는 하나의 종교철학과 그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 지침서인 것처럼 곡해되기도 했고, 심지어 ‘도인술’이나 ‘신선술’ 같은 것을 가르친 신비스러운 비서(秘書)처럼 왜곡되기도 했다고 말한다.


    이씨는 “동양의 고전은 대개 극히 일상적이고 평이한 삶의 덕목들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바른 정치를 위한 지침서가 아니면 지혜롭게 살기 위한 처세의 경구거나 인간다운 인간을 만들기 위한 교육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이씨는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역시 동양학의 이러한 가치는 변함없다고 말한다.
    이런 동양 고전을 읽는 데 논리적 증명이 요구되거나 객관적이고 실험적인 사실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씨는 동양 고전의 이해에도 고도의 지적능력과 실천이 요구되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극소수의 수행자들이나 내부의 전승자들에게만 가능한 경지라는 것이다.
    이씨는 말한다.

    “그러한 특수한 실천은 사실 고전이라는 것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심신적 수행의 결과로 체득해야 하는 극히 개인적 체험 영역이며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고전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동양학이란 그런 것과는 구분되는 일반적 메시지다. 즉 고전은 아무나 읽을 수 있고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옛 성현들의 가르침이 적힌 책이다.”

    그래서 이씨는 도올에게 묻는다. “왜 동양 고전을 전문서적으로 만드는가? 도대체 동양학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라고 말이다. 물론 고전의 원문 한 줄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무수한 문헌과 자료를 뒤지고 역대의 주석들을 다 참조하는 작업들이 전혀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전통과 현대 융합시킬 중요한 계기

    현재 관련 학계와 대중의 이씨에 대한 인식은 다소 차이를 보인다. 학계는 아직 이씨의 번역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반면 대중의 관심은 높다. 학계 일부에서는 이씨의 번역에 대한 구체적 지적보다 이씨가 이력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점과 컴퓨터통신 글쓰기의 맹점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씨도 이러한 지적에 대해 공인으로서 좀더 개방적 자세를 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도올은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제기한 해석학적 입장을 바탕으로 최신의 현대적 성과를 반영하고 있다. 현대적 번역의 대표격인 셈이다. 반면 이씨는 전문가들에 의해 왜곡돼온 전통적 고전 번역의 원래 모습을 복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통적 번역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대 우리 사회의 주요 화두 가운데 하나는 전통과 현대를 어떻게 융합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다. 현대적 도올과 전통적 이씨의 번역이 만난다면 전통과 현대를 융합하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마련될 수도 있다. 어쨌든 도올과 이씨의 완전히 다른 번역 가운데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일까.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 논쟁과 토론의 과정일 것이다.

     

    論難돋보기


    기본 틀이 다른 두 사람의 한문讀法

    이씨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장안의 화제가 되면서 이씨의 한문독법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한문이란 어디서 끊어 읽느냐에 따라 의미가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에 한문 번역의 논란은 기실 띄어읽기 문제가 대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앞에서 언급했듯 도올과 이씨의 번역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독법에 대한 문제제기는 소홀히 할 수 없다. 또 과연 이씨의 한문 실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가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에 더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이씨의 독법에 대한 공식적인 문제제기는 한국학연구소장 박 현씨가 모 주간지를 통해 발표한 것이 대표적이다.

    박씨의 반론에 대한 이씨의 재반론을 통해 이씨의 도덕경 번역에 대한 수준을 판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박씨나 또 다른 사람의 재반론이 이어진다면 물론 환영할 일이다.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독자들도 고전 해석의 뒤편에 이런 고민들이 있구나 하는 감상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문제를 제기한 박씨의 결론은 이렇다.

    “도올과 이씨의 번역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가 있다. 첫문장부터 끝문장까지 9할 정도는 다르니 말이다. 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유감스럽지만 결론부터 말하겠다. 이씨의 한문문법은 이씨가 역사상 처음으로 만든 ‘특수하고도 유연한’ 문법이다. 이에 견주어 도올의 한문문법은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이다.”
    과연 그런지 박씨가 예로 든 구절을 놓고 두 사람의 주장을 비교해 보자.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덕경 1장>


    도올의 번역:“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씨의 번역:“도를 도라고 할 수는 있으나 언제나(꼭)도여야 할 필요는 없다.”


    박소장의 평가(이씨는 박씨의 번역에 대해 어떤 문법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함):“도올의 번역에도 문제는 있다. 그는 可를 ‘말하다’로 옮겼는데, 이런 경우 可는 ‘여기다’는 뜻의 ‘以爲’가 축약된 것으로 ‘여기다’ 또는 ‘판단하다’로 옮기는 것이 마땅한 바, 그런 것이 불분명하다. 아무튼 ‘도는 항상성에 달려 있지 않다’(道不于常)는 개념은 춘추전국시대의 유행어이기도 했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면 문법을 창조하지 말고 스스로의 의식을 재창조해야 할 것이다.”

    이씨의 반론:“도올의 번역을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에 의한 번역’이라고 해놓고 예로 든 문장을 말하기를 ‘도올의 번역에도 문제는 있다’고 한다. 그럼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에 의한 번역’이 왜 문제가 있을까? 그건 그렇다 치고 나의 번역은 ‘특수하고도 유연한 문법에 의한 것’이어서 틀렸고 도올의 번역은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에 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있다면 박씨는 ‘어떤 문법’에 의해 번역하며 그 번역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말해야 한다. 그러나 박씨 자신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 버리고 두 사람의 번역에 ‘다 문제가 있다’고 해버리니 보는 사람들만 다시 한번 헷갈리게 만들고 말았다.

    박씨의 말대로 ‘가’(可)를 ‘이위’(以爲)가 축약된 것으로 ‘여기다’ 또는 ‘판단하다’로 놓고 번역해 보면 어떻게 될까? ‘도를 도라고 여길 수도(판단할 수도) 있지만 도는 도가 아니다.’ 이렇게 되는가? 이것이야말로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 같은데.... 남의 답이 틀렸다고 말할 양이면 정답을 보여 줘야 한다. 틀렸다고만 하고 ‘정답은 각자가 생각해 봐’하는 식의 학문은 곤란하다.”

    박소장의 반론:“먼저 앞 서술부의 술어인 可와 뒤 서술부의 부정사인 非는 어떤 한문에서도 결코 짝을 이루지 않는다. 可와 짝을 이루는 부정사는 非가 아니라 不(弗)이다. 다음으로, ‘반드시’라는 뜻의 必자가 생략되었다고 하더라도, 부정사는 역시 非가 아니라 不이어야 한다. 따라서 可道와 非常道는 결코 병렬된 두개의 서술어가 될 수 없다.”

    이씨의 재반론:“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의 문장에서 ‘可道’와 ‘非常道’가 결코 병렬된 두개의 서술어가 될 수 없다면 도올의 번역(지금까지 이 구절에 대한 대부분의 번역)인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야말로 엉터리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도올의 번역은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에 의한 번역’이라고 하니 말이 앞뒤가 안 맞는다. 도올의 번역에서 可는 ‘이라고 하면’으로 옮겨졌고, 非는 ‘아니다’로 옮겨졌으므로 이것이야말로 可에 대응하는 부정사로 非를 사용한 잘못된 번역이다.

    그러나 이 문장에서 非가 부정하는 것은 앞 문장의 可가 아니라 바로 뒤따라오는 常이다. 즉 可에 대한 非가 아니라 常에 대한 非다. 常이란 글자는 ‘언제나 그러함’을 말한다. 이 常을 부정하는 글자는 非이지 不이 아니다. 비상구(非常口) 또는 비상연락망(非常聯絡網)이란 말은 있어도 불상구(不常口)나 불상연락망(不常聯絡網)이란 말은 없다. 常을 부정하는 非를 可를 부정하는 非로 볼 정도라면 아직 도덕경을 가지고 훈수하고 나오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박씨의 주장에 따른다면 도올의 번역이야말로 ‘특수하고 유연성이 넘치는 황당한’ 번역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즉 나의 번역은 문법상 전혀 하자가 없다. 박씨가 하는 말 ‘도는 항상성에 달려 있지 않다’는 말은 번역의 정오가 아니라 ‘항상성이 없는 것’이 ‘도냐’ 아니면 ‘도라는 이름이냐’ 하는 해석상의 차이에서 전통적인 번역과 나의 차이를 찾을 일이다.”

    ‘천하개지미지위미’(天下皆知美之爲美) <도덕경 2장>


    박소장의 문제제기:“이씨는 두번째 장에서 ‘天下皆知美之爲美’를 ‘세상 사람들이 다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꾸며진 아름다움이면’이라고 옮겼다. 도올은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고 옮겼다. 결론부터 밝히자면, 이 또한 원칙적으로 도올의 번역이 옳다. 그렇다면 이씨 번역의 문제는 무엇인가.

    이씨는 허사인 之자의 다양한 용법을 무시했다. 이 경우 之자는 독립적 문장을 예속된 절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안다’는 문장과 ‘그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독립적인 문장을 묶어 “나는 ‘그가 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로 만들 경우 ‘그가…것’의 내용은 목적어절이 되는데, 그렇게 만드는 허사가 바로 之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살펴보자. 天下는 주어가 되며, 皆知는 서술어가 되고, 美之爲美는 목적어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씨는 목적어절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다 하여 마음대로 끊었는데, 그런 문장은 춘추시대 이래 어디에도 없다.”

    이씨의 반론:“박씨는 한문의 문법은 아는 듯한데 적용을 틀리게 하고 있다. 앞서의 예에서 보았듯 박씨가 설명하는 문법에 따를수록 오히려 올바른 것으로 증명되는 것은 나의 번역이다. 之가 독립적인 문장을 목적어절이 되게 만들 때 그 목적어절은 之 이하의 문장이다. 이 문장에서 목적어절은 美之爲美가 아니라 之爲美다. 之가 만드는 목적어절은 之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한문의 기초다. 도대체 어떤 문헌에서 之의 앞뒤에 있는 글자들이 모두 목적어절이 되더란 말인가? 다시 한번 풀어 보자. 주어는 天下다. 서술어는 皆知美다.

    모두 아름답다고 안다. 무엇을? ‘꾸며진 아름다움’을, 즉 之爲美가 목적어절로 기능하는 것이다.”


    박소장의 반론:“이씨는 爲자에 대해서도 너무 일면적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도올이 이 글자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爲라는 글자는 분명히 ‘함’이다. 다만 그것은 ‘행’(行)이라는 글자와 달리 ‘목적의식적인 함’을 가리킨다. 이 글자가 ‘위하여’의 뜻으로 쓰이는 것도 그 때문이며, 때로 ‘이’(以)와 엮여 ‘여기다’나 ‘판단하다’로 쓰이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爲가 거짓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 것은 꽤 뒷날의 일로, 위 문장을 옮기면 ‘세상 사람들은 알고 있다,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으로’쯤 될 것이다. 요컨대 이 문장에서 爲자는 ‘여기다’의 뜻으로 쓰였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여김’이니 조금 어색하게 들릴지 모르나, 이와 비슷한 맥락의 문장들은 춘추전국시대의 유행이었다. 예를 들어 ‘어울림을 어울림으로 아는 것’(知和以和) 등이 있는데, 이런 논리는 전국시대 변설가들의 애용구로도 되었던 바 “국책”(國策)이란 문헌만 살펴봐도 그런 용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씨의 재반론:“이상하다. 박씨의 말은 모두 나의 번역과 주장을 뒷받침하니 말이다. 爲가 ‘목적의식적인 함’이라 하는데 이 말이 무엇인가? 바로 ‘꾸밈’이다. 목적이 무엇인가? 어떤 저의를 말한다. 못난 것을 잘나게 보이고자 하는 목적, 선하지 않은 것을 선하게 꾸미려는 목적,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는 목적, 이와 같은 목적을 염두에 둔 행위가 爲다. 즉 노자가 말하는 무위인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가 아닌 것’으로 바꾸는 것이 바로 爲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경의 爲는 ‘함’으로 번역하면 안되고 ‘꾸밈’으로 번역해야 한다.

    박씨의 모든 주장은 나의 번역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내용인데 결론을 이상하게 내려 읽는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함’이라고 번역하면 도덕경의 모든 내용은 번역이 불가한 이상한 글이 되어 버림을 우리는 알았다. 爲는 결코 수식 없는 ‘함’이 아니라 ‘꾸미려는 함’이다. 본의는 ‘함’이 아니라 ‘꾸밈’이다. 爲를 도올처럼 ‘함’으로 번역하는 것은 ‘조작한다’라는 말에서 ‘조작’을 빼고 ‘한다’만 남긴 것과 마찬가지다. ‘한다’는 빼도 관계없다.‘조작’이라 해도 뜻은 통한다. ‘조작한다’ ‘가식한다’ ‘위장한다’에서 중요한 것은 ‘조작’ ‘가식’ ‘위장’이지 ‘한다’가 아니다. 모든 설명은 나의 번역이 맞고 도올은 틀렸다인데 결론만 나의 번역이 틀리고 도올이 맞다로 쓴 글이 박씨의 글이다.”

    이씨의 결론:“도올과 나의 번역은 9할이 다르다고 하는 박씨는 이와 같은 결론을 뒷받침할 예문으로 불과 3개의 문장을 드는 데 그쳤다. 그리고 ‘특수하고도 유연한 문법’과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의 근거를 댄 것이 없다. 더구나 박씨가 이게 옳다고 말하는 ‘번역’은 도올의 번역과 같지도 않고 나의 번역과 같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박씨의 번역은 ‘특수하고도 유연한 문법’에 의한 것도 아니고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으로 한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박씨의 번역은 어떤 문법에 의한 번역인지 궁금하다.”

    하버드대 졸업과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에서부터 도덕경 번역의 자구 하나 하나의 완전히 다른 번역에 이르기까지 극단적 대비를 보이는 도올과 이경숙씨. 이들의 번역을 둘러싸고 복잡하게 전개되는 논쟁을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독자들도 도올과 이경숙씨의 책을 차분히 살펴보면 나름의 견해는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배영대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이경숙이 던지는 도올 공개비판 2題


    “도올은 철학의 대중화 아닌 독점화하려 한다”
    “도올이 강의하는 도덕경은 노자 卑下요, 논어는 공자 冒瀆이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지침을 밝혔던 도올 김용옥 교수에게 이경숙씨는 ‘동양학이 무엇인가’라고 먼저 묻고 있다. 이씨는 동양학이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소수 학자들이 독점할 난해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의 완성’을 위해 초등학생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옛 성현들의 가르침이 적힌 책이라고 주장한다. 이씨는 도올을 향한 비판의 초점을 철학을 대중화한 것이 아니라 엘리트화했다는 데 맞추고 있다.

     

    동양학이란 한마디로 옛 성현의 말씀을 배우고 익혀 오늘을 사는 삶의 지표로 삼기 위한 공부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동양학은 옛 성현의 말씀이 기록된 책, 즉 고전으로 시작해서 고전으로 끝난다. 고전을 부지런히 읽고 그 뜻을 알고 외우는 것이 사실 동양학이다. 가르침의 실천은 공부와는 또 다른 문제이니 논외로 치자. 이런 동양의 고전은 불가(佛家)와 도가(道家), 병가(兵家) 등의 저작들을 빼고는 대개 극히 일상적이고 평이한 삶의 덕목들로 되어 있다. 바른 정치를 위한 지침서가 아니면 지혜롭게 살기 위한 처세의 경구이거나 인간다운 인간을 만들기 위한 교육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논리적 증명이 요구되는 객관적이고 실험적인 사실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저자 개개인의 가치관에 토대를 둔 주관적 주장들이어서 맞느냐 틀리느냐를 따질 수 있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사회에 도움이 되는 소리냐 아니냐가 가치의 척도다.

    때문에 동양학의 교재가 되는 고전들이란 인간세상의 다툼을 줄이고, 전쟁을 없애고, 학정을 파하고, 질서를 부여하고, 서로 위하며 살게 만들자는 것으로 결론이 정해진 소리들이다. 바람직한 인간상을 상정해 그런 인간상에 가까운 사람들을 만들기 위한 교육의 지표가 되는 텍스트다.

    동양학은 쉽다는 것이 특징

    때문에 고전을 통해 배우는 동양학이란 ‘어떤 인간을 만들기 위한 교육을 할 것인가’를 궁리하는 학문이다. 노자는 성인을, 공자는 군자를, 석가는 부처와 보살을 그것으로 내세운다. 불교는 워낙 심오하고 방대한 사상체계여서 동양학의 범주에 포함시키기 힘들다. 그 자체로 동양학이 아니라 세계학이고 우주학이기 때문이다.


    불교를 빼면 남는 두개의 그 목적을 하나로 묶어 ‘성인군자’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동양학은 성인군자를 만들기 위한 학문이다. 성격이 그렇다 보니 사실 동양학은 아주 쉽다는 특징이 있다. 텍스트인 고전들이 일종의 도덕 교과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칸트나 데카르트·헤겔의 철학은 일반 민중을 위한 철학이 아니다. 상당한 정도의 지적능력을 소유한 지식층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들이다. ‘순수이성비판’이나 ‘변증법’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초등학생은 천재라고 할 수 있다.

    왜 고전을 전문서적으로 만드는가?

    그러나 논어를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초등학생은 바보다. 물론 요즘 아이들은 뜻이 어려워 이해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한자를 몰라 아예 읽지를 못한다. 그러나 한글로 옮겨 주고 읽으라 하면 누구나 알아듣는 소리들이다.

    옛날 서당에서는 코흘리개 학동들이 훈장님에게 회초리로 맞아가며 외웠던 글들이 공맹(孔孟)이요, 사서오경(四書五經)이었다. 동양에서의 공부란 바로 ‘공자왈, 맹자왈’이었고 고전을 읽을 수 있는 글자인 한자의 숙지였다. 그래서 동양학의 문제는 이해가 아니라 실천에 있다. 동양철학이 서양철학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다. 동양철학은 실천철학이다. 그리고 그것의 목적은 오직 하나 ‘인간의 완성’에 있다.


    서양철학이 추구하는 바는 ‘인간’이 아니라 ‘논리의 완성’이다. 그래서 유가와 도가와 불가는 이상적 인간상의 모델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는 반면 실존적 인간상, 변증법적 인간상이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서양철학은 인간의 완성이라는 실천을 요구하지 않는다. 물론 철학이라기보다 신앙을 위한 교설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는 예외로 하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동양학의 가치는 변함이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소리냐 아니냐’이고 ‘도움이 된다면 실천할 수 있는 소리냐 아니냐’이다. 실천의 결과 도달 가능한 인간상이 21세기를 살아가는 데도 여전히 바람직스러운 것이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소리냐 아니냐는 따질 이유는 없다. 이해하는 데 특별한 재능이나 능력이 필요한 소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하는 데 고도의 지적능력이 요구된다면 그 실천은 극소수의 수행자나 내부 전승자들만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동양의 철학은 이런 부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특수한 실천은 사실 고전이라는 것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심신의 수행을 통해 체득해야 하는 극히 개인적 체험의 영역이며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고전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동양학이란 일반적 메시지다. 즉 고전은 아무나 읽을 수 있고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옛 성현들의 가르침이 적힌 책이다.

    나의 이런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기도 하지만 더러는 심한 반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고전의 원문 한 줄의 올바른 해석에도 무수한 문헌과 자료를 뒤져야 하고 역대의 주석들을 다 참조해야만 한다고 그들은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작업들이 전혀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런 작업의 대상이 되는 원전(原典)이 담고 있는 철학은 그렇게 어렵거나 난해하지 않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대하는 동양학은 어떠한가? 고전의 번역은 역자나 주석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어떤 경우에는 터무니없는 오역과 악역으로 일관한 것도 있다. 그래서 어떤 해석서를 보았느냐에 따라 고전에 대한 이해가 심한 편차를 보이는 것이다. 주석은 물론 한글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안되는 소리가 너무나 많다.

    그래서 이런 주석서를 통해 고전을 읽는 현대인들은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것이 고전’이라거나 ‘논리적으로 연결이 안되고 말이 안되는 소리 같지만 뭔가 심오한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 동양철학인가 보다’ 심지어 ‘나는 머리가 나빠 동양철학은 도저히 모르겠다’며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도 생긴다는 것이다.


    오늘날 동양철학이 대중으로부터 멀어진 가장 큰 이유는 세가지다. 한자교육을 철폐하고 한글 전용을 주창해온 교육정책의 잘못이 하나요, 고전에 대한 정확하고 올바른 주석을 해내지 못한 학계 전문가들의 태만과 무능력이 그 둘째다. 마지막 한가지 이유에 대해서는 조금 긴 글이 필요할 것 같다.

    소수의 학자들이 고전을 자신의 상품으로 독점하려고 노력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도올이다. 한자교육의 철폐 덕분에 한자 해독 능력이 ‘특수한 지적능력’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동양철학이란 지식 자체를 독점하고 일반대중으로부터 유리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시골 서당의 학동들도 다 읽을 수 있었던 공자왈 맹자왈이 세계 유수의 명문 대학을 거쳐야 가능한 고도로 난해하고 고급스러운 학문으로 둔갑한 것이다. 천자문만 떼도 할 수 있는 동양학을 하버드대 졸업장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강변하는 사람이 바로 도올이다. 그래서 아줌마도 읽을 수 있는 고전을 대학 교수라야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이야기다. 과연 그럴까?

    내가 컴퓨터통신의 조그만 모임방에서 도올의 강의를 비판한 ‘노자를 웃긴 남자’라는 글을 연재한 것은 이발사가 숲 속에 대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소리를 바람이 전하고 나뭇잎이 대답하듯 퍼져나간 끝에 책으로 출판되기에 이르러 이제 세상 사람들이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것을 알게 되고 말았다. 귀만 당나귀 귀가 아니라 옷까지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었는데 위대한 왕께옵서는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

    귀가 당나귀 귀면 어떻고, 옷이야 벗었으면 어떠하랴. 동양학의 제왕이신 위대한 도올이 아니면 이 방황의 세기, 탐욕과 환락과 끝없는 이기적 욕망의 전차가 질주하는 21세기에 누가 있어 온 국민의 눈과 귀를 노자의 말씀과 공자의 가르침에 쏠리도록 할 수 있었겠는가. 오직 도올이 아니면 불가능한 기적의 실현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도올 TV강의는 개그쇼

    과연 어느 나라에서 철학강의 프로그램이 황금시간대에 TV를 통해 방영되며, 또 그 프로가 코미디나 드라마나 영화를 시청률에서 압도하며 흥행대박을 터뜨린 경우가 있었나. 이것이 인문학의 불모지라는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21세기에 일어난 사건이니 온 나라가 시끄럽지 않을 수 없다. 온 세계에 떠들어 자랑할 만한 사건이다.

    ‘코리아는 TV 철학강의가 최고 인기 프로인 나라라더라’하는 소문이 한번 나기만 하면 세계인이 한국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것이다. 모든 재외공관의 관리들은 만사 제쳐두고 이 사실을 적극 홍보할 일이다. 월드컵 공동주최나 한두 사람의 노벨상 수상보다 더 획기적인 홍보거리다.

    도올의 노자 강의가 진행중일 때 우리나라의 술좌석 화제 중 베스트는 단연 ‘노자’였다. 도올의 강의를 안보고 ‘노자’를 모르면 사람 취급을 못받았다. 도올의 강의 이전에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 일인가.


    방송국도 놀랐고, 학계도 놀랐고, 민초들도 놀랐다. 본인도 물론 놀랐을 것이다. 황수관·구성애는 아침 햇살에 끄지 않은 가로등 신세가 돼 버렸다. 다른 방송국들도 불난 집이 돼 버렸다. ‘철학이나 동양학의 인재를 찾아라! 한의학도 괜찮고 안되면 동냥학도 좋다!’ 그러나 도올대왕의 인기와 카리스마에 누가 감히 맞설 수 있다는 말인가?

    사상 초유의 철학 100강이 이어지고 대한민국에 동양학 붐이 노도광풍처럼 몰아치는 사이 온나라의 학계가 숨을 죽이고, 난다하는 학자들이 말을 삼갔으며, 신문사도 잘못 걸리면 백주에 망국의 원흉으로 몰리는 판이 되고 말았다.

    도올이 TV를 통해 동양학 붐을 일으키고 철학에 대해 대중의 관심을 불러모은 것은 한국사 100장면에 들 만한 대단한 공적이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그 붐은 동양학 붐이 아니었고, 대중의 관심을 모은 것은 철학이 아니었다. 동양학이라 광고하고 철학이라는 간판을 내건 쇼 프로그램이었다. 문제는 쇼 프로그램을 학술적 교양 프로그램이라고 알렸다는 데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앞서 말한 도올의 공을 높이 사 여타의 문제들은 덮어 줘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동양학에 대한 국민대중의 관심을 끌어올리고, 개그나 코미디 같은 쇼 프로나 보던 시청자들에게 노자나 공자의 사상에 대한 강의를 보게 하였다’는 그 한가지로 모든 허물을 덮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의 강의에 대한 비판은 ‘인기를 시샘하는 소아병적 딴지’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나는 도올의 인기를 시샘할 이유가 없는 아줌마다. 그런 내가 “노자를 웃긴 남자”를 쓰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는 도올식 동양학이 왜 잘못됐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왜 그의 과(過)가 공(功)을 앞지르는지 분석하면서 기왕 동양학을 하려면 제대로 하자는 바람 때문이었다. 나는 학계에서 명성을 다투는 경쟁자도 아닐 뿐더러 인기를 다투는 스타도 아니다. 다만 그의 강의에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문제점들이 있다.

    사람들은 도올의 업적으로 ‘철학을 대중화’했다는 것을 든다. 이 말은 철학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일반대중에게 철학이나 고전에 관심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올 자신이 그것을 자랑삼아 내세우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과연 도올은 철학을 대중화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도올에 대하여 말을 하고 나선 첫번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도올은 철학을 대중화한 것이 아니라 엘리트화, 독점화에 전력투구했다. 도올의 강의를 듣다 보면 누구나 ‘철학이라는 것은 과연 하버드대나 도쿄(東京)대를 나온 도올 정도는 되어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도올은 모르는 한자를 옥편을 찾아 더듬거려서라도 고전의 원문을 읽어 보려는 의욕의 싹을 자르는 독소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도올은 자기의 화려한 학벌과 수십년간의 연구노력과 수만권의 장서와 독서량을 날마다 강의마다 책마다 떠들어 자랑하면서 ‘철학이란 얼마나 어려운지, 그 공부에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한지’를 대중에게 세뇌하고 있다.


    이런 강의를 보는 시청자들은 그의 방대한 지식과 학문적 깊이에 감탄하고 탄복할지언정 스스로 철학을 공부해 보겠다는 의욕이 사라져 버릴 것은 불문가지다. 이것이 ‘철학의 대중화’인지 묻고 싶다. 이것은 대중화가 아니라 흥행화다.

    쇼 프로는 듣고 즐기는 데 목적이 있다. 가수에게는 팬들에게 ‘나도 열심히 노래를 배워 저 가수만큼 잘 불러야 되겠다’는 의욕이나 동기를 부여할 이유가 없고 또 그래서는 안된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희소하기 때문에 가수가 인기스타가 되고 돈을 버는 것이다. 가수의 입장에서 일반대중은 노래를 못부를수록 좋고, 노래 잘하는 사람이 귀할수록 좋다. 그러나 학자는 그렇지 않다. 학자의 책임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식을 얻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철학강의’와 ‘개그쇼’가 달라야 하는 이유다.

    지식독점 상술의 폐해

    도올은 자기의 저서나 강의를 통해 ‘동양의 고전을 하나 읽는 데도 세계 유수의 학벌과 수십년간의 피나는 노력과 타고난 천재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체념과 절망을 대중에게 심어준 크나큰 죄가 있다. 그의 현란하고 지칠 줄 모르는 자기 자랑이 철학을 공부하려 했거나 철학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조차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면 그 철학은 어디에 소용되느냐는 말이다.

    그런 학벌과 연구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아닌 고전의 원문 한줄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 횡설수설로 일관하고 조금만 어렵다 싶으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도망이나 가고 그것도 아니 되면 진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말을 더듬는 모습에서 누가 철학을 공부해 보겠다는 용기를 가지겠는가.

    도올이 강의를 통해 놀랄 만한 집념과 에너지로 시청자들에게 주입하고자 하는 것은 ‘나 같은 사람이 강의해 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배우기나 하지 언감생심 내 수준에 오를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이다. 지식을 독점생산해 판매하겠다는 상술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노래나 개그나 코미디의 노하우를 개발해 자기만의 것으로 팔아야 하는 연예인은 당연하다고 봐줄 수 있다. 그러나 소위 교수직을 가졌었고 학자라는 사람이 이 따위로 학문을 독점하려 하고 그것을 혼자서만 팔아먹으려 하는 작태가 용서될 수 있는 일인가? 이것이 ‘대중화’라는 말인가? 대중화는커녕 독점화의 노골적인 광태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 강의가 쇼 프로처럼 보고 즐기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아예 그 강의를 ‘도올의 철학쇼’라고 제목을 붙일 일이다.

    진정한 ‘철학의 대중화’란 국민대중이 누구나 철학을 공부해 보겠다는 의욕을 갖게 하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심어 주고, 철학이 소수의 엘리트 학자들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철학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도올이 해온 강의를 보라. ‘자기만이 할 수 있고, 자기만이 알고 있고, 자기만이 강의할 수 있고, 자기만이 옳고,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온몸을 동원한 열강으로 부르짖는다. 그래서 내가 도올의 강의를 ‘개그쇼’라고 하는 것이다.

    좋다. 그것도 스타의 흥행 노하우라 치자. 그러나 그처럼 대단한 학벌과 노력을 했다는 사람의 강의가 도대체 그게 뭐냐는 말이다. 고전의 해석이란 어느날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고 1,000∼2,000년에 걸친 선대의 수많은 학자들의 주석과 연구성과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때문에 그러한 것 중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주석이나 해석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비난할 일이 아니다.


     

    올바른 지식 전달이 무엇보다 중요

    그러나 기존 학설 중 소수가 지지하는 학설이나 자신의 독창적 해석을 내놓을 때는 정통적인 학설을 뒤집을 만한 가치와 설득력을 가져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도올의 경우 기존의 해석에 의지해 그 권위를 비는 모습을 취하는 듯하면서도 기실 그려내는 철학의 전체 모습은 전혀 엉뚱한 창작물이다.


    그 대상의 변조 과정은 실로 교묘하고 지능적이어서 그의 주 대상인 일반대중은 그가 그려내는 그림이 진짜 철학의 참모습인 줄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노자 철학이 될 수 없는 것을 노자 철학이라고 가르치고 공자의 사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을 공자라고 그릇 전하는 것은 철학 강의가 아니라 철학의 훼손이다.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도 도올의 강의는 재미있다고. 길거리 약장수나 개그쇼는 재미있어야 한다. 그러나 학문적 강의는 재미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재미있어 좋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재미있다’는 사실에는 나도 동의하고 싶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도올의 강의는 ‘개그쇼’다. 더욱 큰 문제는 그 ‘개그’에는 엄청난 학벌과 타고난 재능이 필요하다고 국민들이 믿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학문의 강의란 ‘재미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재미있으면 좋겠지만 그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지식의 전달이며, 학문에 대한 동기 부여’다. TV강의는 시청률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아무리 고매하고 유익한 철학도 들어주거나 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가 선택권을 갖는 TV강의를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는 강의는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강사는 학문적 깊이와 지적 바탕 외에도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카리스마와 적당한 쇼맨십과 유머와 유창한 언변, 그리고 연출 감각과 인간적 매력도 있어야 할 것이다. 외모도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


    그러나 둘 중 우선되는 가치는 분명히 전자라는 데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쇼’이기 때문이다. ‘학문적인 철학 강의’라는 전제가 붙고 그 주인공이 교수요, 학자라고 하면 벌써 ‘재미있자는 프로’는 아니다. 재미를 위해 노자를 ‘숭무주의자’(崇武主義者) 혹은 ‘쿵푸의 달인’으로 만들고 공자를 ‘공짱구양아치’로 둔갑시켜도 좋은 일인가.

    과학과 철학의 차이가 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과학은 과학자를 보지 않지만 철학은 철학자를 본다’고. 아인슈타인의 인품이 훌륭해서 상대성이론을 배우는 것은 아니고 뉴턴의 사생활이 엉망이었다 해도 뉴턴의 법칙은 평가절하되지 않는다.

    그러나 노자의 철학은 노자의 인품으로 뒷받침돼야 하고, 공자의 철학은 공자의 인격이 증명해야 한다. 부처의 가르침은 부처의 평생이 그 옳음의 토대이고, 예수의 복음은 예수의 생애가 곧 복음의 증좌다.


    과학은 과학자에 대한 존경을 요구하지 않지만 철학은 철학자에 대한 존경이 전제된다. 공자가 양아치같이 살았다면 논어가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이며, 노자가 벼슬이나 탐한 속물이었다면 “도덕경”을 누가 읽을 것인가?

    사마천을 생각할 때 불알 발린 구차한 인생이 떠오른다면 어떻게 “사기”(史記)를 읽고 감명받을 것이며, 성서를 읽는데 예수의 방귀가 생각나면 경건한 신앙이 가능하겠는가 말이다.
    도대체 ‘예수님도 방귀 뀌었소?’하고 묻는 것이 철학인가? 그런 질문을 던지거나 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의에 쌍스런 소리를 마구 쓰는 것이 용기라고 생각하나? 그것은 용기나 솔직함이 아니라 우행이고 치기다.


    과학을 가르칠 때는 과학자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철학자를 말해야 한다. 철학의 가치는 글로 쓰여진 저작물이 아니라 그것을 남긴 선인의 삶이고 생애에 있다. 그 철학을 말한 주인공을 회화화하면 그 철학도 희극이 되는 것이다.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철학이 말하는 것과 그 철학을 남긴 사람의 삶이 일치했느냐 하는 생각과 행동의 일치성이다. 우리가 위대한 철학이나 사상을 남긴 사람들을 성인 혹은 성현이라 부르는 것은 그 사상과 삶이 일치했기 때문이지 저작물의 가치 때문은 아니다.
    때문에 철학을 강의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철학자에 대한 존경과 그의 생각과 삶에 대한 동경의 고양이다. 그 사상과 일치하고 그 철학에 걸맞은 위대한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 보여주는 것이 철학 강의다.

    “도대체 동양학을 어떻게 하려는가?”

    그런데 도올의 강의는 어떠한가. 그가 그려 보여주는 노자는 노회한 책략가이고 쿵푸의 달인이며, 깡패와 칼잡이들의 우상이고 기문둔갑술의 창시자다. 공자는 또 어떠한가. 논어를 강의하는 초두에 본인은 짱구요, 그 아들은 잉어요, 태생은 천민이며, 공짱구는 본처를 버렸고, 그 아들도 마누라를 내쫓았고, 아들에게 친어머니 초상에 울지도 못하게 한 개차반이었다고 떠벌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이어서? 사실도 아니지만 사실이더라도 실제보다 더 비하해 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공자의 태생을 천하다고 하면서 자기는 부유한 의사 집안에 태어나 온갖 부의 혜택을 다 받고 엘리트 코스만 두루 밟은 선택받은 귀족이라고 자랑하는 심사는 무엇인가? 이런 지식재벌, 지식귀족이 ‘철학의 대중화’를 공으로 내세우면서 성현들을 마음대로 깔아뭉개는 작태가 왜 용인돼야 하는 것일까. 재미있어서?


    ‘강의에 재미를 더하고 시청자를 TV 앞에 붙잡아둘 방법이 그런 재미밖에 없는 강의라면 차라리 집어치우는 것이 낫지 않을까. 노자의 권모술수, 공자의 개차반 행실, 예수의 방귀, 사마천의 불알발림을 떠드는 이유는 암만 생각해도 그놈의 재미밖에 없는데 재미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도올의 강의를 ‘개그쇼’라고 말하는 세번째 이유가 이것이다. 재미를 위해 철학 강의에서 가장 조심스럽게 그려야 할 철학자의 모습을 양아치에 건달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을 강의하는데 강사가 자신은 하늘만큼 높이고 철학의 주인은 땅바닥에 처박으면 되겠나? 논어를 강의한다는 인간이 논어의 저자이고 유교의 시조인 공자를 말하면서 공자의 아버지를 일부러 ‘아비’라 하고 그 어머니를 굳이 ‘어미’라고 표현하는 심리적 내면동기가 나는 궁금하다.

    ‘공짱구의 아비는 성이 없고 어미는 이름이 없다’는 얘기가 논어 강의에 왜 나와야 하는지 설명을 듣고 싶다. 그러면서 자기 어머니가 자기를 얼마나 잘 교육시켰는지 자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자기 어머니는 어머니라 하면서 공자의 어머니는 ‘어미’라 부르는가 묻고 싶다. 반대로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도올의 노자 강의는 노자 비하요, 공자 강의는 공자에 대한 모독이다. 이게 무슨 철학 강의인가? 도대체 동양학을 어떻게 하려는 것인가? 도올의 대답을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