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좌주(座主) 류숙공(柳淑公)께 올리는 제문(祭文)
2018.08.21. 10:41
按)文僖公 卽柳淑 公之座主 代淑之子 密直副使 實作此文
嗚呼。有昊天之德而不能報。有窮天之憾而不能釋。
按)恭愍戊申 柳淑論辛旽杖流 旽縊殺于靈光郡 不肖孤所以痛心而泣血也。
而又行高於一世而不能紀。功在於王室而不能白。則不肖孤尤得罪於名敎也。
惟我先考。當玄陵潛邸之日。間關萬里。身負羈絏。及王定位。東還于國。
入掌樞機。昵侍帷幄。從容參贊。多所裨益。變故相仍。禍亂屢作。
不避危險。苦心焦力。以濟艱難。此功在王室者也。間言一入。抽身而出。
泥塗其軒冕。弊屣其爵祿。欣然若將終身。無纖芥之形於辭色。
至於死生之際。確乎有不可奪之節。其行可謂高於一世矣。自先考之逝。
日月倏忽。至十有八年之久。而誌墓之石始刻。不肖孤稽緩之罪。
不以是而免也。而先考之行之功。幾泯而復存。豈非幸之萬一哉。
卜于吉日。埋此碑石。先考有知。歆我明酌。
문희공 즉, 류숙(柳淑)은 나의 좌주(座主)이기에
아들 밀직부사 실(實) 대신 글을 올립니다.
아아! 공(公)께서는 하늘같은 덕(德)이 있었지만 보답 받지 못하고,
하늘에 사무치는 한이 있었지만 풀지를 못하였으니
[무신년(1368년)에 신돈에 의해 장류되고 그가 보낸 자객에 의해
영광에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일]로 인하여
불초한 소생 마음이 원통하여 피눈물을 흘립니다.
또한 공(公)께서는 행실이 한 세상에 높이 빛나셨지만
기록되지 못하고 공로가 고려왕실에 있지만 제대로 밝힐 수 없어,
불초한 소생 공(公)의 공로를 제대로 밝히지 못한
명교(名敎)의 죄를 얻었습니다.
공(公)께서는 현릉(玄陵)이 잠저(潛邸)에 계실 때
험난한 만 리 길을 마다않고 몸소 말고삐를 잡으셨으며
왕위에 올라 동으로 돌아 온 뒤에는 조정에 들어가
추기(樞機)의 직무를 장악했으며,
왕의 곁에서 유악(帷幄)에 간여하고 추진하여 나라에
비익(裨益)한 바가 많았으며,
변고가 잇따르고 환란이 여러 번 일어났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어려움을 구제 하였으니
이것이 고려왕실에 공로가 있다 할 것입니다.
한 번의 간언(間言)이 있은 후 몸을 빼어나와
벼슬을 진흙처럼 보고 봉록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종신토록 살려는 마음가짐으로
조금도 말이나 얼굴빛이 티끌만큼도 변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죽음에 이르러서도 그 마음이 확고하여
빼앗을 수 없는 절개가 있었으니 그 행실이
한 세상에 높이 뛰어났다고 할 만한 것입니다.
공(公)께서 돌아가신지 세월이 빠르게 흘러 18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산소에 지석(誌石)을 새겨 묻게 되었습니다.
불초한 소생의 더디고 늦춘 죄가 이것으로 모면 될 수 없습니다만
공(公)의 행실과 공로가 거의 민몰(泯沒)할 번 하다
다시 존재하게 되었으니, 어찌 만의 하나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날을 택하여 이 비석을 묻으오니 공(公) 이시어
앎이 있으시거든 저의 술잔을 받으시옵소서.
1385년(우왕11, 을축년) 문생(門生) 정도전(鄭道傳) 씀.
<주석>
-좌주(座主): 과거에 합격 할 때 지공거, 동지공거를 말하며 스승이며 양부모의 예를 갖춘다.
-명교(名敎): 인륜의 명분을 밝히는 교훈. 즉 문생(門生)으로서 名分(명분)을 분명히 하는 가르침
-현릉(玄陵): 류숙이 모셨던 고려 제31대 공민왕(恭愍王)을 일컫는 말.
-잠저(潛邸): 임금이 왕위(王位)에 오르기 전이나 또는 그 동안에 살던 집을 이르는 말.
-추기(樞機): 국가의 중추(中樞)가 되는 기관(機關). 즉, 중추원(中樞院)을 일컫는 말
-유악(帷幄): 참모부(參謀部)의 가장 중요한 작전(作戰)의 계획(計劃)을 수립 하는 임무. 즉, 공민왕의 개혁정치의 계획을 하는 임무를 의미함.
-비익(裨益): 보익(補益) 즉, 후대에 까지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
-민몰(泯沒): 자취나 흔적이 아주 없어짐.
-인(按): 묘지명 또는 제문에 덧붙임 말. 즉, 의거하여 또는 근거하여로 해석된다.
류숙(柳淑, 1316년 ~ 13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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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숙(柳淑, 1316년 ~ 1368년)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서령(瑞寧), 자는 순부(純夫), 호는 사암(思庵)이다.
휘호는 문희공(文僖公), 군호는 서령군(瑞寧君)이다.
고려 공민왕 때의 정치가, 학자, 문인,
공민왕의 반원자주개혁정치의 설계자,
공민왕의 스승, 삼봉 정도전의 스승.
1) 생애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서령(瑞寧), 자는 순부(純夫),
호는 사암(思庵). 휘호는 문휘공(文僖公), 봉군은 서령군(瑞寧君)이다.
1331년(충혜왕 원년) 성균시(成均試)합격하고
1340년 문과에 급제하여 좌주(座主)는 김영돈(金永旽)과 안축(安軸)이다.
1341년 강릉대군(후에 공민왕)의 시학(侍學)이 되어
원나라에서 공민왕의 곁을 지켰다.
1346년 잠시 귀국해서 춘추수잔(春秋脩撰)과 편수관(編修官)이 되어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실록을 편수하고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다.
1351년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자 함께 고려에 돌아와
1차 반원 자주 개혁정치(反元 自主 改革政治)를 주도적으로 설계하고 추진하였다.
하지만 친원파 세력은 강력하게 반발하였고
원나라의 승상(丞相) 탈탈(脫脫)은 핵심자인 류숙(柳淑)과 김득배(金得培)를
‘섬인(憸人)’으로 지목하여 그들의 처벌을 요구하여
결국 공민왕(恭愍王)은 이들을 파직(罷職) 하였다.
친원파인 조일신(趙日新)의 난이 평정(平定)된 후 다시 등용(登庸)되어
2차 개혁을 추진하여 기철 등 28명의 친원파 세력들을 일시에 제거하고
정동행중서성 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파하고
압록강 서쪽 8참(八站)과 파사부(婆娑府) 등 3참(站)을 격파(擊破)
요동을 회복하고 쌍성(雙城) 등지를 수복(收復)하게 하였다.
몽고풍을 일소하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통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제하였다. 원나라에 대한 간섭을 제거하고
반원 자주 개혁정치(反元 自主 改革政治)를 성공 시켰다.
1355년 성균시를 주관하여 전익(全翊) 등 99명의 인재를 뽑았다.
1361년 홍언박(洪彦博)과 함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문과를 주관하여,
박실(朴實), 정도전(鄭道傳), 이숭인(李崇仁), 안경온(安景溫),
강호문(康好文), 설장수(偰長壽), 김자충(金子盅) 등 33명의 문생을 뽑았다.
벼슬은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
예문관대제학(藝文舘大提學)·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상호군(上護軍),영서운관사(領書雲觀事)에 이르렀고
신돈의 등장이후 공민왕에 간청하여
결국 은퇴의 허락을 받아 스스로 물러나 고향에 은거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신돈은 그의 복직을 두려워하며 참소를 계속했으므로
류숙은 장형에 처해지고 가산을 몰수당하기까지 했으며,
1368년 영광군(靈光郡)에서 신돈이 보낸 자객에게 끝내 교살당했다.
2) 사후
신돈이 처형당한 후 왕은 비로소 모든 사정을 알고는,
류숙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고 조서를 내려 그의 억울함을 밝혀 주었으며,
문희(文僖)라는 시호를 내렸다.1376년(우왕 2) 11월 공민왕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류숙(柳淑)은 총 5회에 걸쳐 공신(功臣)을 하사 받았는데.
1352년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
1356년 안사공신(安社功臣),
1361년 충근절의찬화공신(忠勤節義贊化功臣),
1363년 흥왕토적공신(興王討賊功臣),
1376년 배향공신(配享功臣)이 되고 고려충신(高麗忠臣)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3) 가족 관계
※근거 자료는 『류숙 묘지명』이다.
증조 - 류공기(柳公器) : 합문지후(閤門祗候), 증(贈)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수문전대학사(修文殿大學士)·감수국사(監修國士)·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조부 - 류굉(柳宏) :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증 도첨의평리(都僉議平理)·상호군(上護軍)
아버지 - 류성계(柳成桂) : 태상경(太常卿)·지다방사(知茶房事)
어머니 - 증 도첨의찬성사 강문세(姜文世)의 딸
첫째 부인 - 청주(淸州) 양씨(楊氏)
장남 - 류실(柳實) : 밀직사부사상의(密直司副使商議)·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상호군
차남 - 류후(柳厚) : 관찰사(觀察使), 류기(柳沂, ? ~ 1410년)의 아버지
첫째 사위 - 김자충(金子盅)
둘째 사위 - 최정유(崔正濡)
둘째 부인 - 오씨(吳氏) 셋째 사위 - 이행(李行, 1352년 ~ 1432년) : 유후(留後)
4) 성암서원(聖岩書院)
충청남도 서산시 읍내동에 있는 유숙과 김홍욱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성암서원은 고려후기 공민왕대의 문신인 유숙과
조선중기 인조-효종 대의 문신인 김홍욱의 위패를 모셔놓은 서원이다.
건립 시기는 1719년이며 2년 뒤인 1721년에 왕으로부터
'성암'이라는 서원이 이름을 받았다.
유숙(1316∼1368)은 고려 문신으로 홍건적의 난 때 공을 세워
서령군으로 봉해지고 일등공신 칭호를 받았으나,
공민왕 14년(1365) 그의 충직을 두려워하던 신돈에게 교살당하였다.
본관이 서산으로 개심사 밑의 양천장에서 출생하였고, 죽은 후에 인접한 덕산에 묻혔다.
김홍욱(1602∼1654)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황해도 관찰사 등 여러 벼슬을 거친 분이다.
효종의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으로 죽음에 이르렀는데
‘언론을 가지고 살인하여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본관이 경주이며, 그의 증조 김연 때 서산에 정착하였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왕을 모셨으며, 이조좌랑에 올랐다.
효종 대에는 홍청도관찰사가 되어 충청도에 대동법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성암서원은 1729년에 일시 철거되었다가 영조 26년에 복원되었으며,
1871년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다시 헐리기도 하였다.
1923년 서원을 다시 세우자는 움직임이 일어나 이듬해인 1924년에 사우를 세우게 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고쳐지었으며,
1988년에는 군의 재정지원으로 전면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대문 격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게 배치되어 있고,
유숙과 김홍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이 서원에서는 해마다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