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의 정도전 최후 묘사 장면
정도전은 조선 왕실의 한양 천도를 성공시켰을 뿐 아니라
왕조의 기초를 세우는 모든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경복궁의 창설에서부터 법률의 정비, 제도의 확립도 모두 정도전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는 태조 이성계의 후처였던 현비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자
그의(방석) 편에 섰다가 정안군 방원의 원한을 사게 된다. 마침내 방원은 태조의 명을
거역하고 사병과 가신격인 이숙번 등을 동원하여 정도전을 선참후계 하기에 이른다.
다음은 <해동 육룡이 나르샤>(2015 로크 미디어),
<북악에서 부는바람>(1994년 동아출판사)등에서 발췌하여 정도전의 최후 장면을 소개한다.
* * *
(전략)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정안군이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이숙번을 내려다보며 황급히 물었다.
“간악한 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요절을 내야 합니다.”
“그들은 어디 있느냐? 대궐 안에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정도전과 남은 등은 지금 솔재 고개 넘어 남은의 첩 일타의 집에 모여 있습니다.”
민무질이 자신있게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낮에 이무가 자기도 거길 간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 집을 포위하고 불을 지르면 제 놈들이 나오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그리로 갑시다.”
이숙번이 앞장서서 맞은편 호조 건물 뒤로 해서 솔재(松峴) 고개로 올라갔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갔다.
조그만 도랑을 건널 때 말발굽이 물을 차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김용세는 두려움으로 이가 딱딱 마주쳤다. 그러나 이마에서는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마음속으로는 몇 번이나 자기가 지금 하는 짓이 역적의 짓이냐 혁명이냐를 따져 보았다.
그들이 솔재를 넘어 수진방 입구에 다다를 때까지 거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 길에 남은의 소실 집이 있습니다.”이숙번이 정안군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정안군은 소근을 불러 소리나지 않게 집을 포위하라고 일렀다.
그리고 이백경을 시켜 집 안의 동정을 보고 오라고 했다.
정안군은 사람을 보내면서 누구든지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재차 당부했다.
이경백이 고양이처럼 소리내지 않고 달려가 동정을 살피고 돌아왔다.
“집 앞에 안장이 얹힌 말 네 필이 있습니다. 노비들은 모두 잠든 것 같고
두 방과 대청 마루에만 기름등이 켜져 있었습니다.”
“방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는가?”
이숙번이 물었다.
“이야기 소리와 간간히 남녀의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남녀가 웃고 있어?”
정안군이 의외란 듯 되물었다.
“그러하옵니다.”
그때였다. 갑자기 휙휙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집을 포위하고 있던 종 소근이 뛰어왔다.
“어디서 화살이 지붕으로 날아왔습니다.”
“그건 내가 쏜 거야.”
이숙번이 말 위에 앉은 채 말했다.
“빨리 가서 집 여기저기에 불을 질러라. 그리고 두 사람씩 골목 양쪽을 막고 있어라.”
이숙번과 그의 갑사들이 그 집 앞에 이르렀을 때 집에서는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곧 이어 남녀의 아우성 소리가 나고 방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거의가 상투바람이었다.
“웬놈들이냐?”
남은이 먼저 뛰어나오며 소리 지르다가
상대가 갑옷에 말을 탄 사람들이란 것을 알자 급히 들어가 버렸다.
자다가 불벼락을 맞은 노비들이 뛰쳐나오다
정안군 군사들이 던진 창과 철퇴를 맞고 하나둘 쓰러졌다.
순식간에 좁은 골목은 아수라장이 되고 불길은
캄캄한 여름 밤 하늘을 대낮처럼 밝히며 붉게 타올랐다.
“이놈들아!”
흰 수염을 날리며 쫓아 나오던 남자가 회안군 집 가노의 창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세자 빈 현빈의 친정 아버지 심효생이었다. 그는 전주 사람으로 예문관 대제학에 있었다.
“방원이 이놈!”
피를 토하듯 외마디 소리를 남기고 쓰러진 그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딸이 국모가 된다면 부원군으로서 한때의 호사를 누릴 그가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소리치면서 나오던 이근이 갑사의 철퇴를 맞고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죽이지 마라!”
뒤에서 보고 있던 정안군이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피를 본 갑사와 가노들은 닥치는 대로 죽이고 찔렀다.
조영무가 도망가는 홍성군 장지화를 잡아 왔다. 그는 머리를 산발한 채 맨발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오, 살려주시오.”
그가 이숙번의 말 앞에 꿇어앉았다. 이숙번이 미처 무엇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갑사 한 사람이 피묻은 칼로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목 없는 몸둥이에서 피가 치솟아 이숙번의 갑옷을 붉게 물들였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김용세는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이것은 지상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옥의 모습이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남은의 소실 집을 태운 불길은 이웃집까지 옮겨붙고 있었다.
“정도전과 남은은 어디 있느냐?”
정안군이 소리쳤다. 그러나 어디로 가서 숨었는지 알수가 없었다.
김용세는 겁이 나서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고 솔재 숲속으로 들어갔다.
집들이 타면서 불꽃이 여기까지 간간히 날아왔다. 그가 소나무 아래에 앉아
이마에 흐른 땀을 씻을 때였다. 곁에서 여자의 신음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숨이 막혀 죽는 소리 같았다.
김용세가 일어서 숨을 죽이고 소리 나는 곳으로 가보았다.
소나무 아래서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그 와중에
어느 남녀가 뒤엉켜 야사를 치르느라 한창이었다.
그런데 남녀의 그 짓치고는 모양이 좀 이상했다. 자세히 보았더니
남자가 여자 위에 걸터앉아 겁간을 하고 있었다. 옷이 거의 다 찢겨
허연 살이 다 드러난 여인은 남자의 한 손에 입이 막힌 채 몸부림을 쳤다.
위에서 덮치고 있는 남자는 한 손으로 여자의 목을 누른 채 하체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머리에 흰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검은 전복을 입은 채 바지만 내리고
덤벼드는 사나이가 누구란 것을 김용세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죽일 놈!’
그것은 지금 습격을 해온 정안군의 일행 중의 하나인 방간의 집 종놈이었다.
김용세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은 분노를 느꼈다.
그는 곁에 있는 머리통만한 돌을 번쩍 들었다.
“이 나쁜 놈!”
김용세는 있는 힘을 다해 사나이의 얼굴을 내려쳤다.
방화, 살인에 겁간까지, 이놈들이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윽!”
사나이는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아이쿠, 죽었구나!’
김용세는 겁이 덜컥 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죽은 줄 알았던 종놈이 벌떡 일어나
바지를 움켜쥐고는 줄행랑을 쳤다. 급하게 도망가느라
누가 자기를 습격했는지조차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뜻밖에 구원을 받은 여인은 곧 옷 매무새를 고치고 김용세 앞에 앉았다.
“어느 어르신인지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김용세는 언뜻 보기에도 이 여인이 여염집 부인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만 하기 다행이오. 뉘 집 마님이신진 모르지만 이 야밤에 혼자 나오시다니…….”
“소녀는 의령군 나으리의 소첩이옵니다. 방금…….”
“예?”
그러면 이 여인이 저기 불타는 집에서 도망쳐 나온 남은의 첩실 일타란 말인가?
“빨리 도망쳐 목숨이나 건지시오. 내가 누군지는 알 필요가 없소.”
김용세는 그 말을 남기고 솔밭에서 나왔다.
그는 다시 살육이 계속되고 있는 골목으로 갔다.
“우리 집 마루 밑에 어떤 뚱뚱한 놈 하나가 상투바람으로 숨어 있습니다.”
웬 사나이가 뛰어나와 정안군 앞에 고했다.
“댁은 뉘시오?”이숙번이 물었다.
“저는 여기 사는 민부(閔富)라는 사람입니다. 전에 판사를 지냈습니다.”
“대감 댁 마루 밑에 수상한 놈이 숨어 있단 말이지요?”
“예. 덩치가 크고 뚱뚱한 놈입니다.”그 모양이 정도전임에 틀림없었다.
“들어가서 정가 놈은 끌어내라.”
이숙번이 소리치자 갑사 여러 명이 우르르 민부의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죽이지 말라.”정안군이 소리쳤다.
소근과 다른 세 명의 갑사가 조금 뒤에 정도전을 개끌듯이 끌고 나왔다.
벌써 초주검이 된 정도전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손에는 단검을 꼭 쥐고 있었다.
정안군이 칼을 뺏으라고 명했다.
소근이 발로 정도전의 턱을 차고는 칼을 뺏으려 했다. 그때였다.
정도전이 벌떡 일어서더니 칼을 팽개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나를 죽이지 말라. 한마디만 하게 하라!”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나왔는지 모두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어디서 나팔 소리와 북 치는 소리가 갑자기 요란하게 들렸다.
“저게 무슨 소리냐?”정안군이 물었다.
“대궐의 숙위병들이 이곳의 불길을 보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이거이가 대답했다. 말에 탄 방원과 입에 피를 문 채
상투바람의 정도전이 마주 서서 불꽃 튀듯 서로 노려보았다.
이 날 살고자 해도 살지 못하고,
살리고자 해도 살리지 못하니 하늘에는 붉은 기운이 뻗치고
땅에는 귀신의 곡소리만 가득하였도다. - <무인록>
정도전은 핏발이 선 눈으로 장안군을 노려보며 한참동안 서 있었다.
“이제 와서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이오.”
정안군 방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공은 왜 이런 일을 저지르시오. 일찍이 주상 전하와 함께
흥국사에서 맹세를 하고 나라를 일으킨 일을 잊었단 말이오?”
정도전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공이야말로 딱한 사람이오. 조선의 봉화백 자리에 있으면서
무엇이 부족해 작당을 해 나라를 그르치려고 하오?
사직을 공의 손아귀에 넣고도 부족해 통째로 삼키려고 하다니…….
죽은 현비의 그늘 아래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 나라 왕통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으니
그도 딱한 일이고 게다가 나라를 사욕 아래 두려하다니…….”
“그게 무슨 당치도 않은 역설이오.”
정도전이 목청을 높였다. 종 소근이가 흥분해 정도전의 목에 칼을 가져다 댔다.
정도전이 움찔하며 비켜섰다. 그러나 다른 무사들이 그의 팔을 잡고
방원의 말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방원은 그냥 두라고 말했다.
“공은 <경제문감>이란 책에서 모든 정사의 결정권,
병마권, 재정권 등 모든 실권을 한 사람이 쥐어야 한다고 주장했소.
그 한 사람이란 것이 왕이 아니라고 했소. 왕이 아니면 그 사람이 누구요?
바로 그대 봉화백 아니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다 알 거요.
공은 판삼사사가 되어 이 나라의 모든 논밭 토지에 관한 권한을 다 쥐었고,
삼군부를 손아귀에 넣어 병마권을 쥐었고, 파당을 구축하여 모든 정사의 결정권을 쥐었소.
그 다음은 뭐요? 왕손들을 없애고 그대가 주장하는 방벌(放伐)을 이루자는 속셈 아니오?
죽어 마땅한 죄요!”
<경제문감>이란 정도전이 쓴 저서 중의 하나로
<경제문감 별집>과 함꼐 정치의 도를 논한 책이다.
그는 이 책을 비롯해 정치, 역사, 병법, 음악에 이르기까지 십여 권의 저서가 있었다.
“그것은 대군이 크게 오해한 것이오.
나는 순리적으로 주상 전하가 선택하신 왕통을 지키려 한 것뿐이오.
내가 방벌을 논한 것은 주상 전하의 개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입니다.
따라서 군도君道는 그런 사람을 선택할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기 때문에
아무도 범접할 수 없다고 논한 것은 왜 잊으십니까?”
“방자하다!”그때 이숙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것을 제지하고 방원이 다시 말했다.
“그러면 공은 <경국전(經國典)>에서 부민자국지본야(夫民者國之本也)라고 하며
군주보다는 국가가 위에, 국가보다는 민이 위에 있다고 주장하여
왕권을 땅에 떨어뜨린 것은 목적이 어디 있는지 천하가 다 아는 일 아니오?”
“그것은 맹자의 사상을 인용했을 뿐이오.
우리 개국의 뜻을 알리고자 한 것인데 어찌 그렇게 곡해를 하시오?”
“저 자가 아직 주둥이가 살았군.”
이번에는 마천목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대군은 임신년에도 나를 살려준 일이 있소. 이번에도 살려주리라 믿소.
나는 방벌을 꿈꾼 일이 없소이다. 그것은 전 왕조를 밀어내야 한다는 뜻일 뿐이오.”
방벌이란 인심을 잃은 왕조를 쫓아내고 새 왕권을 세워야 한다는
중국의 역성혁명의 방법을 말함이다.
“그대는 전하가 가짜 왕조 신돈의 핏줄 우와 창을 쫓아내고
새 왕조를 일으킨 것을 핑계 삼아 왕손들을 다 없애고 역성혁명,
아니 방벌의 수단으로 혁명을 일으키려고 한 죄인임이 다 탄로났소.
그러니 죽음으로 그 죄를 씻어야 하오.”
“대군이 지금 하는 일은 대역에 해당하는 일이오.
전하의 윤허를 얻어서 지금 군사를 일으킨 것이오?
사사로이 군사를 일으켜 나라의 중신들을 해치는 것은 반역이 아니오?”
정도전이 피를 뿜어내며 소리를 질렀다.
“반역은 그대가 먼저 저지른 것이오!”방원도 눈을 부라렸다.
“꼭 이렇게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전하에게 상계上啓하여
조정의 공론을 거쳐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전하께서 내가 죽어야 한다면 달게 따르겠소.
그러나 야밤에 몰래 사병을 일으켜 중신을 마구 가두고 죽이는 것은
천추에 용납 안 될 역모요.”
“역적모의를 한 주제에 무슨 변명이 그렇게 많은가?
여봐라, 저 역신의 입을 영원히 봉하라!”방원이 그렇게 말하고 말고삐를 돌렸다.
“대군…….”
정도전의 절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종 소근이 들고 있던 칼로 정도전의 가슴을 찔렀다.
“으음……. 네 놈들이…….”
정도전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소근이 다시 들고 있던 철퇴로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는 처참한 모습을 횃불이 비추고 있었다.
“왕, 왕후 마마…….”
정도전은 말을 잇지 못한 채 땅에 엎어졌다.
그 위에 소근이 다시 짓이기다시피 철퇴질을 해댔다.
뒤에 멀리 서서 이 지옥 같은 모습을 보고 있던 김용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는 정안군 방원을 다시 생각했다.
진취적이고 사려 깊은 장부요, 정의를 숭상하는 무장으로만 알았는데
그의 심장이 저토록 잔인무도한가?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은 마치 피에 굶주린 이리 같지 않은가?
저런 사람이 정권을 휘두르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도
겁에 질려 꼼짝하지 못하는 자신을 불쌍하게까지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고려의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의 아들로 태어나
우여곡절 끝에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일으키고 제도와 문물의 개혁을 주장하던
당대의 인물 봉화백 정도전은 50대의 나이로 처참하게 죽었다.(중략)
덧붙임)
■ 제1차 왕자의 난.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숙청되다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1번째기사 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의성군(宜城君) 남은과
부성군(富城君) 심효생(沈孝生) 등이 여러 왕자(王子)들을 해치려 꾀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정안군(靖安君)의 건국(建國)한 공로는 여러 왕자들이
견줄 만한 이가 없음으로써
특별히 대대로 전해 온 동북면 가별치(加別赤) 5백여 호(戶)를 내려 주고,
그 후에 여러 왕자들과 공신(功臣)으로써 각도(各道)의 절제사(節制使)로 삼아
시위(侍衛)하는 병마(兵馬)를 나누어 맡게 하니,
정안군은 전라도를 맡게 되고, 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은 동북면을 맡게 되었다.
이에 정안군이 가별치(加別赤)를 방번에게 사양하니,
방번은 이를 받고 사양하지 않았는데, 임금도 이를 알고 또한 돌려주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정도전과 남은 등은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자 하여
어린 서자(庶子)를 꼭 세자(世子)로 세우려고 하였다.
심효생은 외롭고 한미(寒微)하면 제어하기가 쉽다고 생각하여,
그 딸을 부덕(婦德)이 있다고 칭찬하여 세자 이방석(李芳碩)의 빈(嬪)으로 만들게 하고,
세자의 동모형(同母兄)인 방번(芳蕃)과 자부(姉夫)인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 등과 같이
모의(謀議)하여 자기편 당(黨)을 많이 만들고는, 장차 여러 왕자들을 제거하고자
몰래 환자(宦者) 김사행(金師幸)을 사주(使嗾)하여 비밀히 중국의
여러 황자(皇子)들을 왕으로 봉한 예(例)에 의거하여
여러 왕자를 각도(各道)에 나누어 보내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그 후에 임금이 정안군에게 넌지시 타일렀다.
"외간(外間)의 의논을 너희들이 알지 않아서는 안 되니,
마땅히 여러 형들에게 타일러 이를 경계하고 조심해야 될 것이다."
도전 등이 또 산기 상시(散騎常侍) 변중량(卞仲良)을 사주(使嗾)하여
소(疎)를 올려 여러 왕자의 병권(兵權)을 빼앗기를 청함이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점(占)치는 사람 안식(安植)이 말하였다.
"세자의 이모형(異母兄) 중에서 천명(天命)을 받을 사람이 하나뿐이 아니다."
도전이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곧 마땅히 제거할 것인데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의안군(義安君) 이화(李和)가 그 계획을 알고 비밀히 정안군에게 알렸다.
이때에 이르러 환자(宦者) 조순(曹恂)이 교지(敎旨)를 전하였다.
"내가 병이 심하니 사람을 접견하고 싶지 않다.
다만 세자 외에는 들어와서 보지 못하게 하라."
김사행과 조순은 모두 그들의 당여(黨與)이었다.
정도전·남은·심효생과 판중추(判中樞) 이근(李懃)·전 참찬(參贊) 이무(李茂)·
흥성군(興城君) 장지화(張至和)·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 등이
임금의 병을 성문(省問)한다고 핑계하고는, 밤낮으로 송현(松峴)에 있는
남은의 첩의 집에 모여서 서로 비밀히 모의하여,
이방석·이제와 친군위 도진무(親軍衛都鎭撫) 박위(朴葳)·
좌부승지(左副承旨) 노석주(盧石柱)·우부승지(右副承旨) 변중량(卞仲良)으로 하여금
대궐 안에 있으면서 임금의 병이 위독(危篤)하다고 일컬어
여러 왕자들을 급히 불러 들이고는,
왕자들이 이르면 내노(內奴)와 갑사(甲士)로써 공격하고,
정도전과 남은 등은 밖에서 응하기로 하고서 기사일에 일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다.
이보다 먼저 정안군은 비밀히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 이숙번(李叔蕃)에게 일렀었다.
"간악한 무리들은 평상시에는 진실로 의심이 없지마는,
임금이 병환이 나심을 기다려 반드시 변고를 낼 것이니,
내가 만약 그대를 부르거든 마땅히 빨리 와야만 될 것이다."
이때에 와서 민무구(閔無咎)가 정안군의 명령으로써 이숙번을 불러서 이르게 되었다.
이때 임금의 병이 매우 급하니 정안군과 익안군(益安君) 이방의(李芳毅)·
회안군(懷安君) 이방간(李芳幹)·청원군(淸原君) 심종(沈淙)·
상당군(上黨君) 이백경(李伯卿)·의안군(義安君) 이화(李和)와 이제(李濟) 등이
모두 근정문(勤政門) 밖의 서쪽 행랑(行廊)에서 모여 숙직(宿直)하였는데,
이날 신시(申時)에 이르러 민무질(閔無疾)이 정안군의 사저(私邸)에 나아가서 들어가
정안군의 부인(夫人)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한참 동안 하니,
부인이 급히 종 소근(小斤)을 불러 말하였다.
"네가 빨리 대궐에 나아가서 공(公)을 오시라고 청하라." 소근이 대답하였다.
"여러 군(君)들이 모두 한 청(廳)에 모여 있는데, 제가 장차 무슨 말로써 아뢰겠습니까?"
부인이 말하였다. "네가 내 가슴과 배가 창졸히 아픔으로써 달려와 아뢴다고 하면 (公)께서 마땅히 빨리 오실 것이다."
소근이 말을 이끌고 서쪽 행랑에 나아가서 자세히 사실대로 알리니,
의안군(義安君)이 청심환(淸心丸)과 소합환(蘇合丸) 등의 약을 주면서 말하였다.
"마땅히 빨리 가서 병을 치료하십시오."
정안군이 사저(私邸)로 즉시 돌아오니, 조금 후에 민무질(閔無疾)이 다시 와서
정안군 및 부인과 함께 세 사람이 서서 비밀히 한참 동안을 이야기하다가,
부인이 정안군의 옷을 잡고서 대궐에 나아가지 말기를 청하니, 정안군이 말하였다.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대궐에 나아가지 않겠소!
더구나 여러 형들이 모두 대궐안에 있으니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가 없소.
만약 변고가 있으면 내가 마땅히 나와서 군사를 일으켜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될 것이오."
이에 옷소매를 떨치며 나가니, 부인이 지게문 밖에까지 뒤따라 오면서 말하였다.
"조심하고 조심하세요."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 이때 여러 왕자들이 거느린 시위패(侍衛牌)를 폐하게 한 것이
이미 10여 일이 되었는데, 다만 방번(芳蕃)만은 군사를 거느림이 그전과 같았다.
정안군이 처음에 군사를 폐하고 영중(營中)의 군기(軍器)를 모두 불에 태워버렸는데,
이때에 와서 부인이 몰래 병장기(兵仗器)를 준비하여 변고에 대응(對應)할
계책을 하였던 것이다. 이무(李茂)는 본디부터 중립(中立)하려는 계획이 있어
비밀히 남은 등의 모의(謀議)를 일찍이 정안군에게 알리더니,
이때에 와서 민무질을 따라와서 정안군을 뵈옵고 조금 후에 먼저 갔다.
이무는 무질의 가까운 인척(姻戚)이었고, 죽성군(竹城君) 박포(朴苞)도
또 그 사이를 왕래하면서 저쪽의 동정(動靜)을 몰래 정탐하였다.
이에 정안군은 민무구에게 명령하여 이숙번으로 하여금 병갑(兵甲)을 준비하여
본저(本邸)의 문 앞에 있는 신극례(辛克禮)의 집에 유숙하면서 변고를 기다리게 하고는,
그제야 대궐에 나아가서 서쪽 행랑(行廊)에 들어가서 직숙(直宿)하였다.
여러 군(君)들은 모두 말을 남겨 두지 않았으나,
홀로 정안군만은 소근을 시켜 서쪽 행랑 뒤에서 말을 먹이게 하였다.
방번이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정안군이 그를 부르니,
방번이 머리를 긁으며 머뭇거리다가 대답하지 않고 들어갔다.
밤 초경(初更)에 이르러 어느 사람이 안으로부터 나와서 말하였다.
"임금께서 병이 위급하여 병을 피하고자 하니,
여러 왕자들은 빨리 안으로 들어오되 종자(從者)는 모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오."
화(和)·종(淙)·제(濟)가 먼저 나가서 뜰에 서고,
정안군은 익안군(益安君)·회안군(懷安君)·상당군(上黨君) 등
여러 군(君)들과 더불어 지게문 밖에 잠시 서서 있다가, 비밀히 말하기를,
"옛 제도에 궁중(宮中)의 여러 문에서는 밤에는 반드시 등불을 밝혔는데,
지금 보니 궁문에 등불이 없다."하면서, 더욱 의심하였다.
화(和)와 제(濟)·종(淙)은 먼저 안으로 들어갔으나,
정안군은 배가 아프다고 말하면서 서쪽 행랑 문밖으로 나와서 뒷간에 들어가 앉아서
한참 동안 생각하고 있는데, 익안군과 회안군 등이 달려나오면서
정안군을 두 번이나 부르니, 정안군이 말하기를,
"여러 형님들이 어찌 큰소리로 부르는가?"하고,
이에 또 서서 양쪽 소매로써 치면서 말하였다.
"형세가 하는 수가 없이 되었다."
이에 즉시 말을 달려 궁성(宮城)의 서문으로 나가니
익안군·회안군·상당군이 모두 달아나는데, 다만 상당군만은 능히 정안군의 말을 따라오고
익안군과 회안군은 혹은 넘어지기도 하였다.
정안군이 마천목(馬天牧)을 시켜 방번을 불러 말하였다.
"나와서 나를 따르기를 바란다. 그 종말에는 저들이 너도 보전해 주지 않을 것이다."
방번이 안 행랑 방에 누웠다가, 마천목을 보고 일어나 앉아서 이 말을 다 듣고는
도로 들어가 누웠다. 방번의 겸종(傔從)은 모두 불량(不良)한 무리들로서
다만 활 쏘고 말 타기만 힘쓸 뿐이며, 또한 망령되이 세자(世子)의 자리를 옮기려고
꾀한 지가 오래 되었다. 어느날 방번에게 일렀다.
"우리들이 이미 중궁(中宮)에 연줄이 있어 공(公)으로 하여금
이방석(李芳碩)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어 교명(敎命)이 장차 이르게 될 것이니,
청하건대 나가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방번이 이 말을 믿고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사람들은 이를 비웃었다.
정안군은 그들이 서로 용납하지 못한 줄을 알고 있었던 까닭으로
방번을 나오라고 불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정안군이 본저 동구(本邸洞口)의 군영(軍營) 앞길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이숙번을 부르니,
이숙번이 장사(壯士) 두 사람을 거느리고 갑옷 차림으로 나왔으며,
익안군·상당군·회안군 부자(父子)도 또한 말을 타고 있었다.
또 이거이(李居易)·조영무(趙英茂)·신극례(辛克禮)·서익(徐益)·문빈(文彬)·
심귀령(沈龜齡) 등이 있었으니, 이들은 모두 정안군에게 진심으로 붙좇는 사람인데,
이때에 이르러 민무구·민무질과 더불어 모두 모였으나, 기병(騎兵)은 겨우 10명뿐이고
보졸(步卒)은 겨우 9명뿐이었다. 이에 부인이 준비해 둔 철창(鐵槍)을 내어
그 절반을 군사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여러 군(君)의 종자(從者)들과
각 사람의 노복(奴僕)이 10여 명인데 모두 막대기를 쥐었으되, 홀로 소근만이 칼을 쥐었다.
정안군이 달려서 둑소(纛所)087) 의 북쪽 길에 이르러 이숙번을 불러 말하였다.
"오늘날의 일은 어찌하면 되겠는가?"
숙번이 대답하였다.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군호(軍號) 【방언(方言)에 말마기[言的]라 한다.】 를 내리기를 청합니다."
정안군이 산성(山城)이란 두 글자로써 명하고
삼군부(三軍府)의 문앞에 이르러 천명(天命)을 기다리었다.
방석 등이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싸우고자 하여,
군사 예빈 소경(禮賓少卿) 봉원량(奉元良)을 시켜 궁의 남문에 올라가서
군사의 많고 적은 것을 엿보게 했는데, 광화문(光化門)으로부터 남산(南山)에 이르기까지
정예(精銳)한 기병(騎兵)이 꽉 찼으므로 방석 등이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였으니,
그때 사람들이 신(神)의 도움이라고 하였다. 정안군이 또 숙번을 불러 말하였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숙번이 대답하였다. "간당(姦黨)이 모인 장소에 이르러 군사로써 포위하고
불을 질러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문득 죽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밤이 이경(二更)인데, 송현(松峴)을 지나다가 숙번이 말을 달려 고하였다.
"이것이 소동(小洞)이니 곧 남은 첩의 집입니다."
정안군이 말을 멈추고 먼저 보졸(步卒)과 소근(小斤) 등 10인으로 하여금
그 집을 포위하게 하니, 안장 갖춘 말 두서너 필이 그 문 밖에 있고,
노복(奴僕)은 모두 잠들었는데, 정도전과 남은 등은 등불을 밝히고 모여 앉아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소근 등이 지게문을 엿보고 들어가지 않았는데,
갑자기 화살 세 개가 잇달아 지붕 기와에 떨어져서 소리가 났다.
소근 등이 도로 동구(洞口)로 나와서 화살이 어디서 왔는가를 물으니, 숙번이 말하였다.
"내가 쏜 화살이다."
소근 등으로 하여금 도로 들어가 그 집을 포위하고 그 이웃집 세 곳에 불을 지르게 하니,
정도전 등은 모두 도망하여 숨었으나, 심효생·이근(李懃)·장지화 등은
모두 살해를 당하였다. 도전이 도망하여
그 이웃의 전 판사(判事) 민부(閔富)의 집으로 들어가니, 민부가 아뢰었다.
"배가 불룩한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습니다."
정안군은 그 사람이 도전인 줄을 알고 이에 소근 등 4인을 시켜 잡게 하였더니,
도전이 침실(寢室) 안에 숨어 있는지라, 소근 등이 그를 꾸짖어 밖으로 나오게 하니,
도전이 자그만한 칼을 가지고 걸음을 걷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
소근 등이 꾸짖어 칼을 버리게 하니, 도전이 칼을 던지고 문 밖에 나와서 말하였다.
"청하건대 죽이지 마시오. 한마디 말하고 죽겠습니다."
소근 등이 끌어내어 정안군의 말 앞으로 가니, 도전이 말하였다.
"예전에 공(公)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 주소서."
예전이란 것은 임신년088) 을 가리킨 것이다. 정안군이 말하였다.
"네가 조선의 봉화백(奉化伯)이 되었는데도 도리어 부족(不足)하게 여기느냐?
어떻게 악한 짓을 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느냐?"
이에 그를 목 베게 하였다.
처음에 정안군의 부인이 자기 스스로 정안군이 서서 있는 곳까지 이르러
그와 화패(禍敗)를 같이하고자 하여 걸어서 나오니,
정안군의 휘하사(麾下士) 최광대(崔廣大) 등이 극력으로 간(諫)하여 이를 말리었으나,
종 김부개(金夫介)가 도전의 갓과 칼을 가지고 온 것을 보고 부인이 그제야 돌아왔다.
도전이 아들 4인이 있었는데, 정유(鄭游)와 정영(鄭泳)은 변고가 났다는 말을 듣고
급함을 구원하러 가다가 유병(遊兵)에게 살해되고,
정담(鄭湛)은 집에서 자기의 목을 찔러 죽었다.
처음에 담(湛)이 아버지에게 고하였다.
"오늘날의 일은 정안군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전이 말하였다. "내가 이미 고려(高麗)를 배반했는데 지금 또 이편을 배반하고
저편에 붙는다면, 사람들이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홀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이무(李茂)가 문밖으로 나오다가 빗나가는 화살을 맞고서 말하였다.
"나는 이무이다."
보졸(步卒)이 이무를 죽이려고 하니, 정안군이 말하였다.
"죽이지 말라."
이에 말을 그에게 주었다. 남은은 반인(伴人) 하경(河景)·최운(崔沄) 등을 거느리고
도망해 숨고, 이직(李稷)은 지붕에 올라가서 거짓으로 노복(奴僕)이 되어
불을 끄는 시늉을 하여 이내 도망해 빠져 나갈 수 있었다.
대궐 안에 있던 사람이 송현(松峴)에 불꽃이 하늘에 가득한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서 임금에게 고하니, 궁중(宮中)의 호위하는 군사들이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고함을 쳤다. 이천우(李天祐)는 자기 집에서 반인(伴人) 2명을 거느리고 대궐로 가는데,
마천목(馬天牧)이 이를 바라보고 안국방(安國坊) 동구(洞口)에까지 뒤쫓아 가서 말하였다.
"천우 영공(天祐令公)이 아닙니까?"
천우가 대답하지 않으므로, 천목(天牧)이 말하였다.
"영공(令公)께서 대답하지 않고 가신다면 화살이 두렵습니다."
천우가 말하였다. "그대가 마 사직(馬司直)이 아닌가? 무슨 일로 나를 부르는가?"
천목이 대답하였다."정안군께서 여러 왕자들과 함께 이곳에 모여 있습니다."
천우가 달려서 정안군에게 나아가서는 또 말하였다.
"이번에 이 일을 일으키면서 어찌 일찍이 나에게 알리지 않았습니까?"
정안군이 박포(朴苞)와 민무질을 보내어 좌정승 조준을 불러 오게 하니,
조준이 망설이면서 점(占)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거취(去就)를 점치게 하고는,
즉시 나오지 않으므로, 또 숙번으로 하여금 그를 재촉하고서,
정안군이 중로(中路)에까지 나와서 맞이하였다.
조준이 이미 우정승 김사형과 더불어 오는데 갑옷을 입은 반인(伴人)들이 많이 따라왔다.
가회방(嘉會坊) 동구(洞口)의 다리에 이르니,
보졸(步卒)이 무기(武器)로써 파수(把守)해 막으며 말하였다.
"다만 두 정승만 들어가십시오."
조준과 김사형 등이 말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다리를 지나가매, 정안군이 말하였다.
"경 등은 어찌 이씨(李氏)의 사직(社稷)을 걱정하지 않는가?"
조준과 김사형 등이 몹씨 두려워하면서 말 앞에 꿇어앉았다. 이에 정안군이 말하였다.
"정도전과 남은 등이 어린 서자(庶子)를 세자로 꼭 세우려고 하여 나의 동모 형제
(同母兄弟)들을 제거하고자 하므로, 내가 이로써 약자(弱者)가 선수(先手)를 쓴 것이다."
조준 등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하였다.
"저들의 하는 짓을 우리들이 일찍이 알지 못했습니다."
정안군이 말하였다. "이같은 큰일은 마땅히 국가에 알려야만 될 것이나, 오늘날의 일은
형세가 급박하여 미처 알리지 못하였으니, 공(公) 등은 마땅히 빨리
합좌(合坐)089) 해야 될 것이오."
노석주(盧石柱)와 변중량(卞仲良)이 대궐 안에 있으면서
사람을 시켜 도승지 이문화(李文和)와 우승지 김육(金陸)을 그들의 집에 가서
불러 오게 하니, 문화(文和)가 달려와 나아가서 물었다.
"임금의 옥체(玉體)가 어떠하신가?"
석주(石柱)가 말하였다. "임금의 병환이 위독하므로
오늘 밤 자시(子時)에 병을 피하여 서쪽 작은 양정(涼亭)으로 거처를 옮기고자 한다."
이에 여러 승지들이 모두 근정문(勤政門)으로 나아갔다.
도진무(都鎭撫) 박위(朴葳)가 근정문에 서서 높은 목소리로 불렀다.
"군사가 왔는가? 안 왔는가?"
문화가 물었다. "이때에 임금이 거처를 피하여 옮기는가? 어찌 피리를 부는가?"
박위가 말하였다. "어찌 임금이 거처를 피하여 옮긴다고 하겠는가?
봉화백(奉化伯)과 의성군(宜城君)의 모인 곳에 많은 군마(軍馬)가
포위하고 불을 지른 까닭으로 피리를 분 것뿐이다."
이보다 먼저 정안군이 숙번에게 이르기를,
"세력으로는 대적할 수 없으니, 정도전과 남은 등을 목 벤 후에
우리 형제 4, 5인이 삼군부(三軍府)의 문 앞에 말을 멈추고 나라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아서
인심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한결같이 쭉 따른다면 우리들은 살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정안군이 돌아와 삼군부(三軍府)의 문 앞에 이르러 말을 멈추니,
밤이 벌써 사경(四更)이나 되었는데,
평소에 주의(注意)하던 사람들이 서로 잇달아 와서 모였다.
찬성(贊成) 유만수(柳曼殊)가 아들 유원지(柳原之)를 거느리고
말 앞에 와서 배알(拜謁)하니, 정안군이 말하였다.
"무슨 이유로 왔는가?"
만수(曼殊)가 말하였다. "듣건대, 임금께서 장차 신(臣)의 집으로 옮겨
거처하려 하신다더니 지금 옮겨 거처하지 않으셨으며,
또 변고가 있다는 말을 듣고 급히 와서 시위(侍衛)하고자 한 것입니다."
정안군은 말했다. "갑옷을 입고 왔는가?"
만수가 말하였다. "입지 않았습니다."
즉시 그에게 갑옷을 주고 말 뒤에 서게 하니, 천우가 아뢰었다.
"만수는 곧 정도전과 남은의 무리이니 죽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정안군이 말하였다. "옳지 않다."
이에 회안군과 천우 등이 강요하여 말하였다.
"이같이 창졸한 즈음에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저지(沮止)시킬 수 없습니다."
정안군이 숙번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형세가 그만두기가 어렵겠다."하면서,
그 죄를 헤아리게 하니, 만수가 즉시 말에서 내려
정안군이 탄 말의 고삐를 잡고서 말하였다. "내가 마땅히 자백(自白)하겠습니다."
정안군이 종자(從者)를 시켜 말고삐를 놓게 하였으나,
만수는 오히려 단단히 잡고 놓지 않으므로, 소근(小斤)이 작은 칼로써 턱 밑을 찌르니,
만수가 고개를 쳐들고 거꾸러지는지라, 이에 목을 베었다.
정안군이 원지(原之)에게 이르렀다. "너는 죄가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
회안군이 뒤따라 가서 예빈시(禮賓寺) 문 앞에서 목을 베었다.
조준과 김사형 등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들어가 앉았는데,
정안군은 생각하기를, 방석 등이 만약 시위(侍衛)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궁문(宮門) 밖에 나와서 교전(交戰)한다면, 우리 군사가 적으므로 형세가
장차 물러갈 것인데, 만약 조금 물러가게 된다면 합좌(合坐)한 여러 정승(政丞)들이
마땅히 저편 군사의 뒤에 있게 될 것이므로,
혹시 저편을 따를까 여겨, 사람을 시켜 도당(都堂)에 말하였다.
"우리 형제가 노상(路上)에 있는데, 여러 정승들이 도당(都堂)에 들어가 앉았는 것은
옳지 못하니 마땅히 즉시 운종가(雲從街) 위에 옮겨야 될 것이다."
마침내 예조(禮曹)에 명령하여 백관(百官)들을 재촉해 모이게 하였다.
친군위 도진무(親軍衛都鎭撫) 조온(趙溫)도 또한 대궐 안에 숙직(宿直)하고 있었는데,
정안군이 사람을 시켜 조온과 박위(朴葳)를 부르니, 조온은 명령을 듣고 즉시
휘하(麾下)의 갑사(甲士)·패두(牌頭) 등을 거느리고 나와서 말 앞에서 배알(拜謁)하고,
박위는 한참 동안 응하지 않다가 마지 못하여 칼을 차고 나오니
정안군이 온화한 말로써 대접하였다. 박위는 군대의 세력이 약한 것을 보고 이에 고하였다.
"모든 처분(處分)은 날이 밝기를 기다리겠습니다."
그의 뜻은 날이 밝으면 군사의 약한 형세가 나타나서
여러 사람의 마음이 붙좇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정안군이 그를 도당(都堂)으로 가게 했는데, 회안군이 정안군에게 청하여 사람을 시켜
목 베게 하였다. 정안군이 조온에게 명하여 숙위(宿衛)하는 갑사(甲士)를 다 나오게 하니,
조온이 즉시 패두(牌頭) 등을 보내어 대궐에 들어가서 숙위하는 갑사를 다 나오게 하였다.
이에 근정전 이남의 갑사는 다 나와서 갑옷을 벗고 무기(武器)를 버리니,
명하여 각기 제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처음에 이무(李茂)가 군대의 세력이
약한 것을 보고는 거짓으로 정신이 흐리멍덩하다고 일컬으면서
사람을 시켜 부축하고서 정안군에게 아뢰었다. "화살 맞은 곳이 매우 아프니
도당(都堂)의 아방(兒房)090) 에 나아가서 휴식하기를 청합니다."
정안군은 말하였다. "좋다."
조금 후에 이무는 박위가 참형(斬刑)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도로 나왔다.
이튿날 닭이 울 적에 임금이 노석주를 불러 대궐로 들어오게 하고,
이른 새벽에 또 이문화를 부르니, 문화가 서쪽 양정(涼亭)으로 나아갔는데,
세자와 방번·제(濟)·화(和)·양우(良祐)·종(淙)과 추상(樞相)091) 인 장사길(張思吉)·
장담(張湛)·정신의(鄭臣義) 등이 모두 벌써 대궐에 들어와 있었다.
여러 군(君)과 추상(樞相), 대소내관(大小內官)들과 아래로 내노(內奴)에 이르기까지
모두 갑옷을 입고 칼을 가졌는데, 다만 조순(曹恂)과 김육(金陸)·노석주·변중량만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석주가 문화에게 교지(敎旨)를 전하여,
"교서(敎書)를 지으라."하니, 문화가 사양하기를 청하므로, 석주가 말하였다.
"한산군(韓山君)092) 이 지은 주삼원수교서(誅三元帥敎書)093) 의 뜻을
모방하여 지으면 된다."
문화가 말하였다. "그대가 이를 아는가?"
석주가 말하였다. "적을 부순 공로는 한 때에 혹 있을 수 있지마는,
임금을 무시한 마음은 만세(萬世)에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그 문사(文詞)이다."
문화가 말하였다. "지금의 죄인의 괴수(魁首)는 누구인가?"
석주가 말하기를, "죄인의 괴수는 다시 임금에게 품신(稟申)하겠으니
먼저 글의 초안(草案)부터 잡으라."하면서, 독촉하기를 급하게 하였다.
문화가 붓을 잡고 쓰면서 말하였다. "그대도 글을 지을 줄 아니,
친히 품신(稟申)하려는 뜻으로써 지으면 내가 마땅히 이를 쓰겠다."
이에 석주가 글을 지었다.
"아무아무[某某] 등이 몰래 반역(反逆)을 도모하여
개국 원훈(開國元勳)을 해치고자 했는데, 아무아무 등이 그 계획을 누설시켜서
잡히어 모두 죽음을 당했지만, 그 협박에 따라 반역한 무리들은
모두 용서하고 문죄(問罪)하지 않는다."
초안이 작성되자 석주가 초안을 가지고 들어가서 아뢰니, 임금이 말하였다.
"잠정적으로 두 정승이 오기를 기다려 의논하여 이를 반포(頒布)하라."
조금 후에 도당(都堂)에서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도당(徒黨)을 결합(結合)하고 비밀히 모의하여
우리의 종친 원훈(宗親元勳)을 해치고 우리 국가를 어지럽게 하고자 했으므로,
신 등은 일이 급박하여 미처 아뢰지 못하였으나 이미 주륙(誅戮) 제거되었으니,
원컨대 성상께서는 놀라지 마옵소서."
이제(李濟)가 그때 임금의 곁에 있다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여러 왕자들이 군사를 일으켜 함께 남은 등을 목 베었으니, 화(禍)가 장차
신에게 미칠 것입니다. 청하옵건대, 시위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공격하겠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걱정하지 말아라. 화(禍)가 어찌 너에게 미치겠는가?"
화(和)도 또한 말리며 말하였다.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니 서로 싸울 필요가 없다."
이에 이제가 칼을 빼어 노려보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화(和)는 편안히 앉아서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이때 영안군(永安君)이 임금을 위하여 병을 빌어
소격전(昭格殿)에서 재계(齋戒)를 드리고 있었는데, 변고가 났다는 말을 듣고는
몰래 종 하나를 거느리고 줄에 매달려 성을 나와 걸어서 풍양(豐壤)에 이르러
김인귀(金仁貴)의 집에 숨어 있었다. 정안군이 사람을 시켜 그를 찾아서 맞이하여
궁성(宮城) 남문 밖에 이르니, 해가 장차 기울어질 때였다.
이때 사람들이 모두 임금에게 청하여 정안군을 세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정안군이 굳이 사양하면서 영안군을 세자로 삼기를 청하니, 영안군이 말하였다.
"당초부터 의리를 수립(樹立)하여 나라를 세워서 오늘날의 일까지 이르게 된 것은
모두 이것이 정안군의 공로이니, 내가 세자가 될 수 없다."
이에 정안군이 사양하기를 더욱 굳게 하면서 말하였다.
"나라의 근본을 정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적장자(嫡長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영안군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처리함이 있겠다."
이에 정안군이 도당(都堂)으로 하여금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고 소(疏)를 올리었다.
"적자(嫡子)를 세자로 세우면서 장자(長子)로 하는 것은 만세(萬世)의 상도(常道)인데,
전하(殿下)께서 장자를 버리고 유자(幼子)를 세웠으며,
도전 등이 세자(世子)를 감싸고서 여러 왕자들을 해치고자 하여
화(禍)가 불측한 처지에 있었으나, 다행히 천지와 종사(宗社)의 신령에 힘입게 되어
난신(亂臣)이 형벌에 복종하고 참형(斬刑)을 당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적장자(嫡長子)인 영안군(永安君)을 세워 세자로 삼게 하소서."
소(疏)가 올라가매, 문화가 이를 읽기를 마치었는데, 세자도 또한 임금의 곁에 있었다.
임금이 한참 만에 말하였다. "모두 내 아들이니 어찌 옳지 않음이 있겠는가?"
방석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너에게는 편리하게 되었다."하고는, 즉시 윤허를 내리었다.
대궐 안에 있던 정승들이 무슨 일인가를 물으니, 문화가 대답하였다.
"세자를 바꾸는 일입니다."
석주(石柱)가 교초(敎草)를 봉하여 문화로 하여금 서명(署名)하게 하니,
문화가 받지 않으므로, 다음에 화(和)에게 청하였으나 또한 받지 않으므로,
다음에 자리에 있던 여러 정승들에게 청하여도 모두 받지 아니하였다.
이에 문화가 말하였다. "그대가 지은 글을 어찌 자기가 서명(署名)하지 않는가?"
석주는, "좋다."하면서, 이에 서명하고 이를 소매 속에 넣었다.
조금 후에 석주가 대궐에 들어가 명령을 받아 나오면서 말하였다.
"교서(敎書)를 고쳐 써서 빨리 내리라."
문화가 말하였다. "어떻게 이를 고치겠는가?"
석주가 말하였다. "개국 공신(開國功臣) 정도전과 남은 등이 몰래
반역(反逆)을 도모하여 왕자와 종실(宗室)들을 해치려고 꾀하다가,
지금 이미 그 계획이 누설되어, 공이 죄를 가리울 수가 없으므로,
이미 모두 살육(殺戮)되었으니, 그 협박에 따라 행동한 당여(黨與)는
죄를 다스리지 말 것입니다."
변중량(卞仲良)으로 하여금 이를 써서 올리니, 임금이 시녀(侍女)로 하여금 부축해
일어나서 압서(押署)하기를 마치자, 돌아와 누웠는데, 병이 심하여 토하고자 하였으나
토하지 못하며 말하였다. "어떤 물건이 목구멍 사이에 있는 듯하면서 내려가지 않는다."
정안군이 군기 직장(軍器直長) 김겸(金謙)을 시켜 무기고(武器庫)를 열고
갑옷과 창을 내어 화통군(火㷁軍) 1백여 명에게 주니, 군대의 형세가 조금 떨치었다.
갑사(甲士) 신용봉(申龍鳳)이 대궐에 들어가서 정안군의 말을 전하였다.
"흥안군(興安君)과 무안군(撫安君)은 각기 사제(私第)로 돌아갔는데,
의안군(義安君) 이하의 왕자는 어찌 나오지 않는가?"
여러 왕자들이 서로 눈짓하면서 말하지 아니하므로, 다시 독촉하니,
화(和) 이하의 왕자들이 모두 나오다가,
종(淙)은 궁성(宮城)의 수문(水門)을 거쳐 도망해 나가고,
정신의(鄭臣義)만이 오래 머무르므로 이를 재촉하니,
그제야 나왔다. 도당(都堂)에서 방석을 내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이미 주안(奏案)을 윤가(允可)했으니, 나가더라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방석이 울면서 하직하니, 현빈(賢嬪)이 옷자락을 당기면서 통곡하므로,
방석이 옷을 떨치고서 나왔다. 처음에 방석을 먼 지방에 안치(安置)하기로 의논했는데,
방석이 궁성(宮城)의 서문을 나가니, 이거이(李居易)·이백경(李伯卿)·조박(趙璞) 등이
도당(都堂)에 의논하여 사람을 시켜 도중(道中)에서 죽이게 하였다.
도당(都堂)에서 또 방번을 내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방번에게 일렀다.
"세자는 끝났지마는 너는 먼 지방에 안치(安置)하는 데 불과할 뿐이다."
방번이 장차 궁성(宮城)의 남문을 나가려 하는데,
정안군이 말에서 내려 문안에 들어와 손을 이끌면서 말하였다.
"남은 등이 이미 우리 무리를 제거하게 된다면 너도 또한 마침내 면할 수가 없는 까닭으로,
내가 너를 부른 것인데, 너는 어찌 따르지 않았는가?
지금 비록 외방에 나가더라도 얼마 안 되어 반드시 돌아올 것이니, 잘 가거라. 잘 가거라."
장차 통진(通津)에 안치(安置)하려고 하여 양화도(楊花渡)를 건너
도승관(渡丞館)에서 유숙하고 있는데, 방간(芳幹)이 이백경(李伯卿) 등과 더불어
또 도당(都堂)에 의논하여 사람을 시켜 방번을 죽이게 하였다.
정안군이 방석과 방번이 죽었단 말을 듣고 비밀히 이숙번에게 일렀다.
"유만수(柳曼殊)도 내가 오히려 그 생명을 보전하고자 했는데, 하물며 형제겠는가?
이거이(李居易) 부자(父子)가 나에게는 알리지도 않고서 도당(都堂)에게만 의논하여
나의 동기(同氣)를 살해했는데, 지금 인심이 안정되지 않은 까닭으로
내가 속으로 견디어 참으면서 감히 성낸 기색을 보이지 못하니,
그대는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
군사들이 변중량·노석주와 남지(南贄) 등을 잡아 가지고 나오니,
변중량이 정안군을 우러러보면서 말하였다.
"내가 공(公)에게 뜻을 기울이고 있은 지가 지금 벌써 두서너 해 되었습니다."
정안군이 말하였다. "저 입도 또한 고기덩이다."
또 남지는 남은의 아우로서 이때 우상 절도사(右廂節度使)가 되었는데,
모두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가 뒤에 길에서 목을 베었다. 이제(李濟)가 나오니,
정안군이 이제에게 일렀다. "본가(本家)로 돌아가라."
임금께서 마침내 영안군(永安君)을 책명(策命)하여 세자로 삼고 교지(敎旨)를 내리었다.
"적자(嫡子)를 세우되 장자(長子)로 하는 것은 만세(萬世)의 상도(常道)이며,
종자(宗子)는 성(城)과 같으니 과인(寡人)의 기대(期待)이다.
다만 그대의 아버지인 내가 일찍이 나라를 세우고 난 후에 장자(長子)를 버리고
유자(幼子)를 세워 이에 방석(芳碩)으로써 세자로 삼았으니,
이 일은 다만 내가 사랑에 빠져 의리에 밝지 못한 허물일 뿐만 아니라,
정도전·남은 등도 그 책임을 사피(辭避)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때에 만약 초(楚)나라에서 작은 아들을 사랑했던 경계로써094) 상도(常道)에 의거하여
조정에서 간(諫)했더라면, 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정도전 같은 무리는 다만 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세자로
세우지 못할까를 두려워하였다. 요전에 정도전·남은·심효생·장지화 등이 몰래
반역을 도모하여 국가의 근본을 요란시켰는데, 다행히 천지와 종사(宗社)의 도움에 힘입어
죄인이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하고 왕실(王室)이 다시 편안하게 되었다.
방석(芳碩)은 화(禍)의 근본이니 국도(國都)에 남겨 둘 수가 없으므로
동쪽 변방으로 내쫓게 하였다. 내가 이미 전일의 과실을 뉘우치고,
또 백관(百官)들의 청으로 인하여 이에 너를 세워 왕세자로 삼으니,
그 덕을 능히 밝혀서 너를 낳은 분에게 욕되게 함이 없도록 하고,
그 마음을 다하여 우리의 사직(社稷)을 진무(鎭撫)하라."
이에 문화와 김육(金陸)에게 명하여 나가서 세자를 알현(謁見)하게 하니,
세자가 문화를 불러 말하였다.
"대궐 안에 시위(侍衛)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그대가 빨리 대궐 안으로 도로 들어 가라."
문화가 즉시 도로 들어가니, 조순(曺恂)이 세자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시녀(侍女)와 내노(內奴)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은 모두 밖으로 나가게 하라."
문화가 또 나오니, 세자가 말하였다. "그대는 어찌 나오는가?"
문화가 그 사유를 상세히 아뢰므로, 세자가 말하였다.
"그대를 이르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빨리 도로 들어가 시위(侍衛)하라."
또 상장군 이부(李敷)로 하여금 대궐 안에 들어가 시위(侍衛)하게 하니,
임금이 조순에게 명하여 세자에게 갓과 안장 갖춘 말을 내려 주었다.
세자가 대궐 안으로 들어 갔다. 이제(李濟)가 사제(私第)에 돌아가니,
옹주(翁主)가 이제에게 일렀다.
"내가 공(公)과 함께 정안군의 사저(私邸)에 간다면 반드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듣지 않더니, 저녁때에 군사들이 뒤따라 와서 그를 죽이었다.
정안군이 이 소식을 듣고 그제야 놀라서, 즉시 진무(鎭撫) 전흥(田興)을 불러서 말하였다.
"흥안군(興安君)이 죽었으니 노비가 반드시 장차 도망해 흩어질 것이다.
그대가 군사 10여 명을 거느리고 흥안군 집에 이르러 시체를 거두게 하고,
노비들에게 신칙하기를, ‘만약 도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후일에 반드시 중한 죄를 줄 것이다.’ 하라."
전흥이 그 집에 이르러 시비(侍婢)를 시켜 들어가 고하기를,
"놀라지 마시오! 나는 정안군의 진무(鎭撫)입니다."
하고는, 이에 시체를 염습(斂襲)하는 모든 일을 한결같이 정안군의 명령대로 하니,
옹주(翁主)가 감격하여 울었다. 남은은 도망하여 성(城)의 수문(水門)을 나가서
성밖의 포막(圃幕)에 숨으니, 최운(崔沄)·하경(河景) 등이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남은이 순군옥(巡軍獄)에 나아가고자 하니,
최운 등이 이를 말리므로, 남은이 말하였다.
"정도전은 남에게 미움을 받았던 까닭으로 참형(斬刑)을 당하였지마는,
나는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
이에 스스로 순군문(巡軍門)밖에 이르렀다가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전하095) 께서 왕위에 오르매, 하경과 최운은 섬기는 주인에 충성했다는 이유로써
모두 발탁 임용하게 되었다. 정안군이 여러 왕자들과 함께 감순청(監巡廳) 앞에
장막을 치고 3일 동안을 모여서 숙직하고, 그 후에는 삼군부(三軍府)에 들어가 숙직하다가,
세자가 내선(內禪)096) 을 받은 후에 각기 사제(私第)로 돌아갔다.
[註 087] 둑소(纛所) : 원수(元帥)의 대기(大旗)가 있는 곳.
[註 088] 임신년 : 태조 즉위년.
[註 089] 합좌(合坐) : 몇 사람의 당상관(堂上官)이 모여 대사를 의논함.
[註 090] 아방(兒房) : 장신(將臣)이 머물러 자는 곳.
[註 091] 추상(樞相) : 중추원의 상신(相臣).
[註 092] 한산군(韓山君) : 이색(李穡).
[註 093] 주삼원수교서(誅三元帥敎書) : 고려 공민왕 때의 명장(名將)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등 세 사람의 원수(元帥)를 목 벤 교서(敎書).
[註 094] 초(楚)나라에서 작은 아들을 사랑했던 경계로써 : 춘추 시대(春秋時代) 초(楚)나라 평왕(平王)이
신하의 참소를 듣고 태자 건(建)을 폐하고 작은 아들 진(珍)을 사랑하여 나라가 어지러웠던 고사(故事).
[註 095] 전하 : 태종(太宗).
[註 096] 내선(內禪) : 임금이 왕세자에게 양위(讓位)는 하였으나 아직 즉위(卽位)의 예(禮)를 올리지
않은 것을 말함.
■ 자조(自嘲) -삼봉집에서-
操存省察兩加功 조심하고 조심하여 공력을 다해 살면서
不負聖賢黃卷中 책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네
三十年來勤苦業 삼십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온 사업
松亭一醉竟成空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