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실이 썼던 명품 유리잔·장신구.. 원산지 비밀 풀렸다
손영옥 입력 2021. 03. 17. 04:04 댓글 99개
국립경주박물관 '고대 유리와 신라'展
국립경주박물관은 4월 11일까지 여는 ‘오색영롱, 한국 고대 유리와 신라’전을 통해 신라를 비롯한 삼국시대 왕릉급 고분에서 나온 당시 초고가 수입품 유리식기와 유리구슬을 선보이고 있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국보·보물급 유리식기는 성분 분석 결과 수입한 지역이 다양한 것으로 확인됐다. 유리구슬은 나라마다 취향이 달랐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지중해보다 더 짙은 파란색 그릇, 파란 물결무늬를 세련되게 덧댄 유리잔, 점박이 무늬가 박힌 찻잔, 입구가 봉황머리처럼 날렵한 유리병….
지금 봐도 화려하고 고급스럽다. 전시장에 진열된 유리 식기는 놀랍게도 5, 6세기 신라시대 왕릉급 무덤에서 나온 것이다. 1500∼1600년 전 신라의 왕과 왕족이 최고의 권력과 신분을 과시하듯 사용했던 최고 사치품이었다. 신라 왕족 여인들은 짙은 청색 유리구슬을 목이나 귀에 주렁주렁 달거나 옷에 꿰매 장식하기도 했다. 신라 시대 낙타에 실려 멀리 실크로드를 타고 건너온 저 유리그릇들은 어디에서 생산된 것일까. 그 비밀이 풀렸다.
경북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은 그간의 연구 성과를 모아 ‘오색영롱, 한국 고대 유리와 신라’전을 하고 있다. 고대 한국에서 사용한 유리를 주제로 한 전시로는 최초이자 최대 규모다. 철기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유리제품 1만 8000점을 볼 수 있다.
하이라이트는 신라 왕릉 급 무덤에서 나온 국보·보물 유리그릇이다. 4∼6세기 신라 권역의 대형 고분에서는 유리그릇이 23점이나 출토됐다. 경주의 황남대총(10점), 서봉총(3점), 천마총(3점), 금관총 (2점), 금령총(2점), 경주 안계리 4호분(1점), 합천의 옥천 고분(1점)등이다. 이 같은 발굴 규모는 동양에서도 최대다. 전시에선 그 가운데 국보·보물 등 15점이 한자리에 모여 모처럼 눈 호강을 했다.
유리는 모래와 불의 조화로 탄생한 신비로운 물질이다. 딱딱한 고체인 줄 알았던 유리는 불에 녹아 액체 상태가 되고 색깔과 모양, 크기 등 무한 변신이 가능하다. 4500년 전 이집트 혹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처음엔 거푸집으로 생산했지만, 기원전 1세기 경 ‘대롱 불기’라는 혁신적 기법이 개발됨에 따라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덕분에 준보석류의 사치품이었던 유리는 일상 용기로 만들어져 ‘로만 글래스’라는 이름으로 로마제국 시절 지중해 연안에서 유럽과 아시아 전역으로 퍼졌다. 마침내 중국을 건너 한반도로도 흘러왔던 것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이번에 일본 아즈텍 회사와 공동으로 형광X선 분석기를 통해 성분 분석을 했다. 유리는 석영 등을 녹여서 제작할 때 끓는점을 낮추기 위해 융제(용융점을 낮추기 위해 첨가되는 물질)를 쓰기 때문에 성분으로 생산지를 유추할 수 있다. 그 결과 다양한 지역에서 유리 식기가 건너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시리아·팔레스타인 산(황남대총 북분), 이집트 산(천마총), 중앙아시아 산(황남대총 남분).
이를테면 황남대총 북분과 천마총, 경주 안계리 출토 유리잔은 로마의 속국이었던 이집트에서 건너온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에 황남대총 남분에서 나온 투명한 유리잔과 봉황 모양의 유리병은 중앙아시아에서 것으로 추정됐다. 또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 코카서스 산맥 이남 지역 등 다양한 곳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황은순 연구관은 “신라가 여러 지역과 국제적인 교류를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신라가 얼마나 역동적이고 개방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여인들이 치장했던 유리구슬도 쏟아져 나왔다. 유리구슬은 3세기 삼한시대 이래 한반도에서 사용된 이래, 화려한 색채 덕분에 보석처럼 사랑받았다. 중국의 역사서 위지 동이전에서는 그 시절을 이렇게 전한다. “구슬을 보배로 삼아 장식했고 금·은·비단은 진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실제 삼한∼삼국시대 무덤에서 발견된 유리구슬만 해도 수십만 점이다.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신라(황남대총) 출토, 백제(오산 수청동)출토, 가야(김해 양동리) 출토.
흥미로운 건 나라마다 취향이 달랐다는 점이다. 백제권역에서는 오색영롱하게 다양한 색상을 즐겼지만 신라에서는 유독 블루톤이 사랑받았다. 가야의 여인들은 작은 유리구슬과 큼지막한 수정을 함께 엮어 멋을 냈다. 반면에 고구려에서는 구슬이 애용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유리를 수입만 한 건 아니었다. 직접 제작한 흔적들이 나온다. 거푸집을 사용해 유리구슬을 제작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인 토기 거푸집이 삼한 시기 이후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 여러 곳에서 발견됐다. 이번 전시에선 그런 거푸집과 유리를 녹이던 도가니도 나와 당시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는 진화된 대롱 불기 기법으로 유리그릇을 제작하지는 못했을까. 이에 대한 연구는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고 있다.
경주=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국립경주박물관 ‘오색영롱, 한국 고대 유리와 신라’ 특별전 연장 운영
황기환 기자 승인 2021년 02월 28일 15시 16분
보물 제620호 천마총 출토 유리잔.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국립경주박물관은 당초 3월 1일까지 개최키로 한 특별전 ‘오색영롱, 한국 고대 유리와 신라’를 4월 11일까지 약 한 달간 연장한다고 밝혔다.
이번 특별전은 신라 사람들이 특별히 귀하게 여기고 아꼈던 유리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 유리의 역사 전반을 살펴보기 위해 기획됐다.
특히 초기철기~통일신라에 이르는 1만 8000여 점의 유리가 한자리에 모인 최초의 전시로, 관람객들에게 다시없을 명품전 관람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전시실 입구에서는 발굴품 중 유일하게 손상이 가지 않은 채 출토돼 1500여 년 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천마총 출토 유리잔(보물 제620호)이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이번 전시를 맞아 실시한 성분 분석 결과, 이집트에서 제작된 것으로 확인된 전시품이기도 하다.
전시 초반부 이집트에서 신라 수도 경주에 이르는 유리잔의 여정을 묘사한 영상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뒤이어 한반도 중남부 각지에서 출토된 1만 4000점 이상의 유리구슬을 맞이하는 순간, 관람객들은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에 압도당하게 된다.
유리구슬을 하나씩 들여다보고 있으면 당시 육ㆍ해로를 통해 유라시아 동-서를 오갔을 수많은 유리 제품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황남대총 출토 유리구슬.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다양한 생산지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수많은 유리 장신구를 들여와 사용했던 전통은 삼국시대 이후까지 이어졌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중층 유리구슬, 상감 유리구슬과 같은 화려함의 극치를 뽐내는 유리 제품이 등장하게 됐다.
사람 얼굴이 새겨진 상감 유리구슬 목걸이(보물 제634호)처럼 익숙한 전시품도 있지만,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이후 근 100년 만에 처음 고운 자태를 드러낸 식리총 출토 상감구슬도 눈여겨봐야 한다.
더불어 출토지가 분명한 유리 용기 22점 중 신라 능묘에서 출토된 유리 용기 13점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게 마련한 코너는 이번 특별전의 백미이다.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봉황모양 유리병과 유리잔(국보 제193호)을 비롯한 십수점의 유리 용기는 세련된 디자인과 영롱한 빛깔을 지니고 있어 당시 신라 왕실 사람들의 화려한 취향을 고스란히 반영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물 제624호 유리잔.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이번 연장 전시에는 황남대총 남분 출토 유리잔 대신 신라 고총의 발생을 알려주는 이른 시기 돌무지덧널무덤인 월성로 가-13호 무덤에서 출토된 유리잔으로 교체 전시할 예정이다.
국립경주박물관 관계자는 “한국 고대 유리의 진수를 전함으로써 코로나19 확산으로 심신이 지친 관람객들을 위로함과 동시에 한국 고대 유리의 미를 전달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면서 “한국 고대 유리에 관한 연구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것처럼, 이번 특별전을 통해 관람객들 역시 한국 고대 유리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갖기 바란다”고 밝혔다.
[김호동의 실크로드에 길을 묻다] 9세기 아랍 지리학자 “중국 맨 끝 너머에 신라가 있다”
[중앙일보] 입력 2021.06.11 00:32 | 종합 24면 지면보기
한반도와의 오랜 인연
불과 한 세기 반 전만 해도 서양에선 우리나라를 ‘고요한 아침의 나라’ 혹은 ‘은자의 나라’라고 불렀다.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해 온갖 나라와 교역하고 있는 오늘날과 비교하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 과연 한반도는 고대 이래로 유라시아 대륙을 이어준 실크로드와 단절된 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왔던 것일까.
삼국시대부터 지속적 문물 교류
서역 유리·금세공 기술 받아들여
몽골은 고려를 ‘솔랑가’로도 표기
마테오리치 지도에 ‘조선’ 첫 등장
중세 아랍 지리학자 이드리시가 만든 ‘이드리시 세계지도’(1154). 왼쪽 상단에 신라로 추정되는 나라가 표기돼 있다. [사진 미국 의회도서관]
실크로드 역사를 살펴보면 한반도는 유라시아 교류 네트워크에서 결코 고립된 지역이 아니었다. 실크로드 동쪽 끝에 있었다는 지리적 한계는 분명했지만, 서방으로부터 흘러들어온 문물이 부단히 한반도를 적셔왔다. 유럽이나 서아시아에서도 중국이라는 제국 너머에 있는 한반도를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고, 우리도 중국 너머 서방 세계와 미약하나마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섬 6곳에 신라로 보이는 ‘(min) al-Sila’가 적혀 있다.
신라 도읍 경주에서 출토된 유물은 이런 사실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예를 들어 4~6세기 지배층 무덤에서 많은 유리 제품이 나왔는데, 재료나 제작기법 혹은 양식으로 볼 때 그 상당수는 지중해 동부 연안이나 페르시아에서 만들어진 ‘로만 글래스’가 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식 보검·금팔찌·금관 등 장신구의 금세공 기술과 모티프 역시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 전래한 것이다.
신라 처용은 서아시아 무슬림의 후예?
통일신라 시대에 들어서면 서구와의 접촉을 시사하는 문헌 기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삼국유사』에는 8세기 후반 하서국(河西國) 사람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현재 중국 간쑤성(甘肅省)에서 신장성(新疆省)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 연변의 어느 지역으로 추정된다. 최치원은 ‘향약잡영(鄕樂雜詠)’이라는 글에서 ‘속독(束毒)’의 무용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는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부근의 지방인 소그드(Soghd)를 가리킨다. 이용범·정수일 같은 학자는 신라 설화의 주인공인 처용(處容)에 대해서도 9세기 말 서아시아 무슬림이 바다를 거쳐 신라에 도래한 사람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실제로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土俑)들은 얼굴 모양과 수염 모습이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인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곤여만국전도’(1602)에 등장한 조선.
서방에서도 신라를 알고 있었다. 9세기 무렵부터 아랍권 문헌에 신라에 대한 언급이 자주 보이기 시작한다. 아랍 지리학자인 이븐 후르다드비가 쓴 글에 “중국의 맨 끝 깐수라는 곳의 맞은편에 신라(al-Silla)가 있다”라는 대목이 나타난다. 그의 기록은 이후 많은 무슬림 지리학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됐는데, 흥미롭게도 신라는 중국 너머의 바다에 있는 섬으로 인식됐다. 알 이드리시(al-Idris)가 그린 세계지도에 신라가 여섯 개의 섬으로 표시돼 있다.
하지만 신라의 정확한 실체는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12세기 초 페르시아 지방의 서사시 ‘쿠쉬나메(Kushname)’에 중국 연안에 있는 ‘바실라(Basila)’ 섬이 등장하는데, 이희수 교수는 이것이 신라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앞서 말했듯이 9세기 이래 신라를 섬이라고 여겼던 아랍인의 판단이 그대로 투영된 셈이다.
경주 황남대총에서 나온 유리병(국보 193호). 지중해 일대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아랍-페르시아인은 신라라는 나라를 주로 해로를 따라 중국을 왕래한 상인을 통해 전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는 육로를 통해서도 서방에 알려졌다. 북방 초원 유목민 돌궐인들은 8세기 전반에 자신들의 문자로 비문들을 새겨서 남겼는데, 거기에 ‘뵈클리(Bökli)’라는 명칭이 보인다. 돌궐의 군주가 사망했을 때 여러 나라에서 조문 사절단을 보냈는데, 그중에 동쪽 해가 뜨는 곳에 있는 뵈클리의 군주(카간)도 사신을 보냈다는 내용이다. 이 말의 어원은 논란이 많지만 대체로 고구려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한반도 주민들은 몽골 초원 너머 중앙아시아까지도 알려졌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도시 외곽에는 몽골인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구도시, 즉 아프라시압 언덕이 있다. 그곳에서 7세기 중반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궁전 벽화가 발견됐는데, 한반도에서 간 것으로 추정되는 두 명의 사신이 묘사돼 있다. 머리에 새 깃털이 꽂힌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허리에는 환두대도(環頭大刀)를 차고. 또 손을 소매 안에 가지런히 모아 넣은 모습이다. 여러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고구려에서 파견한 사신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10세기 한반도에는 고려 왕조가 들어섰다. ‘코리아(Korea)’의 기원이 된 고려가 서방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방 문헌에 고려가 확인된 것은 이보다 조금 뒤늦은 13세기 중반부터다.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대부분을 정복하게 되자 위협을 느낀 유럽이 사신들을 동방으로 파견했다. 1240~50년대에 몽골리아를 방문한 수도사 카르피니(Carpini)나 루브룩(Rubruck) 등이 여행기를 남겼는데, 거기에 처음으로 ‘카울레(Caule)’ 혹은 ‘카울리(Cauli)’가 등장한다. 이들보다 20~30년 늦게 중국에 온 마르코 폴로의 글에도 ‘카울리(Cauli)’ 지명이 보이지만 아쉽게도 별다른 설명을 찾아볼 수 없다.
‘코리아’가 서방에 알려진 건 13세기
경주 용강동에 출토 된 토용. 얼굴과 수염 모습이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인을 닮았다.
몽골이 지배한 13세기에는 ‘고려’ 이외에 또 다른 명칭이 사용됐다. ‘솔랑가(Solanga)’, 혹은 ‘솔랑기(Solangi)’다. 오늘날 몽골에서 우리나라를 ‘솔롱고스(Solongos)’라고 부르는 것도 여기서 비롯했다. 현대 몽골어로 ‘무지개’를 뜻하지만 13세기에도 그런 뜻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명칭은 당시 몽골인이 남긴 『몽골비사』를 비롯해 카르피니와 루브룩의 여행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카르피니는 몽골 제국 수도인 카라코룸에서 러시아와 조르지아의 군주 및 수많은 술탄과 함께 ‘솔랑기의 수령’도 보았다고 썼는데, 이는 고려에서 파견한 왕족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몽골제국 시대에는 한반도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카울리’와 ‘솔랑기’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채 혼용되고 있었다. 페르시아 역사가 라시드 앗 딘(1247~1318)의 글에도 이 두 가지 명칭이 동시에 사용됐다.
이처럼 한반도는 실크로드와 끊임없는 관계를 유지해왔다. 예컨대 근대 세계지도의 효시로 꼽히는 이탈리아 마우로 신부(Fra Mauro·1400~64)가 1459년 만든 지도가 있다. 한반도 모습이 막연하게 표현돼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반도로서의 형태는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16세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사정은 급변했다. 1550~60년대에 제작된 유럽 지도에서 한반도는 역삼각형 모양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테오 리치가 그린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1602)’에 한반도의 정확한 모습과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이 기록됐다.
실크로드 역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반도는 결코 고립된 은둔의 존재가 아니었다. 동서 문물 교류가 끊임없이 진행됐다. 한반도 국가와 주민도 어렴풋하게나마 서방에 알려졌다. 다만 우리가 스스로 나서서 서방과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모색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반도를 ‘발견’하고 그것을 세계지도 속에 분명히 자리매김한 것은 대항해 시대를 주도한 유럽인들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12세기 이슬람 세계지도에 등장한 신라
이드리시 세계지도(1154)라는 유명한 중세 지도가 있다. 북아프리카 모로코 출신의 아랍 지리학자 무함마드 알 이드리시(1100~65)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섬을 통치하던 로저왕(Roger II·재위 1130~54)의 부탁을 받고 완성한 지도다.
이 지도는 고도로 발달한 이슬람권의 지리 지식을 망라한 당시 최고 수준의 세계지도다. 지도에서 위쪽이 남방이고 아래쪽이 북방이다. 중세 이슬람 문명에선 성지 메카가 남쪽으로 처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방위를 반대로 정했다. 이드리시 지도 좌측 상단을 보면 중국 남부 연안에 섬 여러 개가 그려져 있고, 그 가운데 6개에 신라로 추정되는 ‘(min) al-Sila’라는 이름이 표기돼 있다. 김호동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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