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그리고 인조와 홍타이지□ 병자호란 일별(一瞥)
(1)
그동안 산성을 여러 번 가면서
인조와 병자호란을 생각해보고 자료를 찾아보았다.
산성과 떼려야 땔 수 없는 인물로 인조(仁祖)가 있다.
대부분 인조에 대하여 아주 박한 평가를 내리는 편이다.
조선의 병란(兵亂)은
임진왜란 : 1592년 4월 ~ 1593년 1월 휴전
정유재란 : 1597년 1월 ~ 1598년 11월
정묘호란 : 1627년 1월 ~ 1627년 3월
병자호란 : 1636년 12월 ~ 1637년 1월 으로
이중에서 역사상 중요한 전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다.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의 연속이고, 정묘호란은 병자호란의 전초전이기 때문.
이렇게 볼 때, 1575년경 태어난 사람은
10대에 임진왜란,
20대에 정유재란,
50대에 정묘호란,
60대에 병자호란을 겪게 되는데
이는 전쟁으로 피폐한 국력을 회복하기도 전에
끊임없이 전란을 겪어야 했고 이는
거의 대부분 일반 평민들에게 고통으로 주어졌다.
(2)
조선이 이렇게 엉뚱하게 힘을 빼고 있을 때
일본은 임진왜란으로 꽤 많은 국력이 소실됐지만
서방과의 활발한 교류로 내부의 힘을 기르고 있었다.
18C 산업혁명시 런던 인구가 5만일 때 조선 한성은 20만이었고
에도(도쿄) 인구가 100만으로 세계적 무역도시가 되어 국력을 키워
근세 말 세계를 넘보고 동아시아를 석권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일본이 1889년 명치유신으로 쇄국을 버리고 개방정책을 편 것이 사실이지만
그 전까지 오로지 쇄국정책만 편 것은 아니고
막부와 막부간, 막부와 천왕간의 권력다툼 중에도
네덜란드등 서방과 무역을 하며 세계 최대 도시 에도를 건설하며
이미 내부적으로 엄청난 힘을 비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3)
인조는 반정의 과정에서
여러 번 절대 성공할 수 없었던 곡절이 있었는데 즉,
1) 1622년 가을 정변 계획이 누설되어,
대간이 평산부사 이귀를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였는데 광해가 묵살.
2) 1622년 겨울 이귀·김자점 등이 인목왕후 비호사건 규명 안함
3) 1623 3.23 저녁 -> 이이반이 이후원에 오늘 밤 거사 일어난다 알려
추국청까지 설치했으나 후궁들과 연회중인 광해군이 묵살
4) 1623 3.23 저녁 박승종이 이확에게 창의문 밖 수색케 했으나 묵살
5) 1623.3.12. 밤2경(9-11시) 홍제원 앞 집합 약속했으나
김류, 이서 미도착으로 우왕좌왕 했으나 이괄이 앞장서서 수습, 위기였슴
이와 같이 여러 번 실패 위기를 딛고 반정을 성공했으니
이는 古來의 역사를 일별하더라도 큰 사변일수록 겪게 되는 고비인지도 모른다.
비근한 예로 윤석열 당선인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는 명약관화해진다.
9수 끝에 사시에 붙은 그는
정상적인 시스템의 사회라면 부장검사 정도로 퇴직함이 정상일 것이다.
그는 현재 정적이 된 문재인에 의해 발탁되어
여러 단계를 뛰어넘는 승진에 승진을 거듭 했지만
문재인의 당부대로 살아있는 권력의 부정에 대하여 칼을 겨누다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다가 평생 몸담았던 검찰에서 쫓겨 나와서
국민의 거센 요구로 한 때는 반대편이었던 보수진영에 의하여 대통령 후보로 나와
정치생활 8개월 만에 2022.03.09.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사변이 일어났다.
그의 당선 이유인 공정과 정의의 세상이 펼쳐진다면
구정권의 부정부패가 만천하에 드러날 게 뻔하여
퇴임하는 문재인이 두려움에 떨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서 역사는 살아있는 생물이요 역사 앞에 겸허해야 되는 이유이다.
(4)
각설하고 仁祖가
후금과 명과의 사이에서 아주 능란한 외교를 펼친
광해군에 대하여 반정을 해서 27년간이나 집권을 했으면
후금을 오랑캐로 깔보지 말고 신흥강국임을 인지하고
균형외교를 펼친 숙부 광해군보다 외교를 더 잘해야 했음에도
오로지 친명 사대 외교로 일관하다 2번의 胡亂을 야기한 점,
당시 중원 경략에 조선을 이용하려는
淸에 대한 최신 정보를 읽어내는 국제 정세에 둔감했던 점,
더구나 전란 후에도 당시 중원 경략에 조선을 이용하려는
淸에 대한 최신 정보를 갖고 온 소현세자에 대하여
자신의 아들임에도 경계하여 죽음에 이르도록 했던 점,
또한 반정에 대한 논공행상을 부적절하게 하여
이괄의 난이 일어남으로 인해서
관련자들에 대하여 전무후무한 무지막지한 처벌을 하여
당시 잘 훈련된 북방군 1만 6천이 散播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예군인 5군영과 지방 속오군등
근왕군의 총책임자(도원수) 김자점이
잘 연통 통솔하여 대처하지 못하는 미숙함을 보였고,
줏대없이 척화와 주화를 넘나드는 반정 공신인 김류를
남한산성 총사령관(체찰사)으로 임명하여
대책없는 북문 출전으로 8명의 장교와 200여 사졸을 몰살시키고도
인조의 비호로 계속 벼슬을 유지하면서
항전 막바지에는 四營의 장수들을 동원하여
척화파 신하들을 잡아 청에 넘기자는 시위를 하게하고는
주화로 급격하게 몰아간 점등과 아울러
선조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영창대군과 광해군을 극복하고
29세에 즉위, 27년 재위 기간 조선을 통치했으면서
끊임없는 정적 견제에만 치밀했던 인조의 한계였던 것.
인조가 반정은 했을 지라도
광해군의 외교정책만이라도 승계 발전시켰더라면
60만 명 이상이 잡혀가는 패전은 없었을 것이며
용골대 침공 59일(1636/12/02 ∼ 1637/01/30),
남한산성 항전 47일(1636/12/14 ∼ 1637/01/30)만에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하며
항복을 하는 치욕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5)
사실 홍타이지는 청의 총 15만의 군력 중
3만정도의 병력만 심양에 남겨두고
여진족7만, 한족2만, 몽고족3만,
도합 12만 연합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공하게 되는데
모든 산성을 우회하고 속전속결로 한성까지 진격하여
군왕을 잡으면 신속히 전쟁을 끝낼 것으로 생각했다.
사실 영원성의 명장 원숭환이 있는 明을 생각하면
오랫동안 전쟁을 끌고 갈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 청의 입장이었다.
즉, 그들의 진격과정에서 산천과 양민을 결단내지 않은 것은
조선에서는 재정과 식량을 공급받고
내몽골에서는 인력과 말을 공급받아
궁극적인 목표인 明 정벌에 이용하기 위한
병참기지 확보 성격이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사실 후금(淸)의 전술은 그보다 600여년 전
고려를 1차 10만, 2차 40만으로 침입한 거란의 소배압이
모든 산성을 우회하고 개경으로 직행한 전술과 너무 닮았는데
그 때에는 강감찬이란 불세출의 영웅이 있었기에
거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무찌르고 오히려
동아시아에 고려의 위상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었다.
조선에도 임경업등의 명장이 있었고
5군영, 속오군등 10만 정도의 軍力이 있었지만
고려의 강감찬 장군만큼
일사분란하게 통괄 지휘할 능력이 없었고
제법 큰 산성이라고 하지만 험한 산지가 대부분인 남한산성에
관료, 군인 1만2천여명, 양민 1만여명, 도합 2만2천여명 정도가
외부의 원조가 미약한 가운데 한겨울에 밀집형으로 갇혀 있다 보니
식량이 쉬이 고갈되어 버틸 힘이 없던 측면도 있다.
(6)
최근 淸측 사료 연구에 의하면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조금만 더 버티었다면
청군이 내부 사정으로 스스로 물러갔을 것이란 보고가 있다.
당시 청군은 속전속결로 주군 인조를 잡고
당초의 목적인 明 정벌을 위하여 철군하려는 계획이었는데
조선이 난공불락의 남한산성에 꽤 집요하게 저항하고
청군 陣營에 그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천연두가 나타나
홍타이지가 철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실재 조선에도 곧 황제가 심양으로 돌아가니
빨리 항복하라고 통보까지 하였는데
이러한 사정을 잘 이용하지 못하고
최명길, 김류등 주화파의 잘못된 판단과
고립된 남한산성에서 더 버틸 여력이 없던
주화파로 기운 우유부단한 인조의 결정으로
항복이 전격적으로 이뤄졌다니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인조의 삼전도 삼궤구고두례도 사실 후금에서는
부족 간 전투에서 승자에 대한 패자의 당연한 禮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어쨋튼 후금을 오랑캐로 알고
小中華를 자처한 朝鮮으로서는 커다란 수치였을 것이다.
인조가 삼전도 수항단에서 항복의 예를 하고
바로 창경궁 양화당으로 갔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들은 점령지 한성 및 궁궐에 대하여 파괴하지 않았고
최후의 항전인 남한산성에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진, 거란, 말갈, 숙신, 몽골, 돌궐, 흉노등과 함께
만주족인 홍타이지가 선조격인 동이족인 우리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선조의 나라라 인식하여 짓밟지는 않았다고
일부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기도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전 조선 인구(1,000만)중 60만(6%)이란
엄청난 숫자의 조선인을 끌고 가
노예로 매매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며
앞서 언급했듯 단지 명 정벌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으려 했다는 논거는
오로지 한성 확보와 임금 생포란 목표를 달성하자
바로 철군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신빙성이 있다 할 것이다.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0/03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2/03/22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補正
□ 병자호란(丙子胡亂) 경과
기간 1636년 12월 28일(음력 12월 2일) ~ 1637년 2월 24일(음력 1월 30일)
청 지휘관
숭덕제, 아이신 교로 다이샨, 아이신 교로 지르가랑, 아이신 교로 도르곤,
아이신기오로 호오거, 아이신 교로 요토, 아이신 교로 도도, 타타라 잉굴다이,
슈무루 양구리, 마푸타, 사르후다, 상가희, 경중명, 공유덕
조선 지휘관
인조, 김자점, 임경업, 이완, 신경원, 김준용, 유림, 홍명구, 허완
청 병력
1차 선봉대 300명, 2차 선봉대 1,000명, 3차 선봉대 3,000명
좌익군 12,761명, 본군 15,272명, 후미군 12,840명, 쿠툴어 2천
총 병력 47,173명 ~ 140,000명
조선 병력
속오군(지역군, 예비군) 80,000~90,000
정규군 54,000명, 수군 30,000명
총 병력 80,000명 ~ 174,000명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 12월 28일(음력 12월 2일)부터
1637년 2월 24일(음력 1월 30일)까지 조선과 청 제국 사이에 59일간 벌어진 전쟁이다.
병자란, 병란, 병자노란(丙子虜亂), 병정노란(丙丁虜亂), 만주의 조선 침공,
청의 조선 침공이라고도 부른다. 청 제국의 숭덕제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였고,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왕실이 피난한 강화도의 함락, 남한산성의 포위를 풀기 위한 근왕병의 작전 실패 등으로
말미암아 항복하였다.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명청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며,
조선으로서는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로 수십만의 백성이
청 제국으로 끌려가 그 사회적 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하였다.
1. 전쟁 전 조선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의 사회복구사업,
이괄의 난으로 인한 정예병의 손실 등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이괄의 난으로 인한 1만 6,000명의 북방군의 손실은 매우 큰 타격이었다.
당시 4영군을 제외한 정규군은 북방군이 유일했는데, 이괄의 난 때문에
7천 500명의 정예병이 손실되었고, 수천의 속오군 병력도 피해를 입어
조선군의 전력이 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인조의 국방정책으로 인해
조선군은 1만의 훈련도감군, 2만의 충융군, 1만 4천명의 수어군을 확보하게 된다.
7천의 어영군은 전국에 분산되어 속오군에 편제되며, 속오군의 전력을 더 강화시켰다.
전국적으로도 약 9만 명이 속오군이 마련되며, 3만 명의 수군과 약 600척의 전선을 확보했다.
2. 개요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었으나,
강화조약에 따라 명과의 관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칭제를 결심하고
조선에 의견을 구하는 사신을 보냈을 때 조정이 사신의 접견조차 거부하고,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이 홍타이지에게 배례하지 않는 등
친명정책을 변경할 의사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명과의 전면전 전에
조선을 확실히 굴복시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1636년 12월 2일, 12만 군사로 조선을 침공했다. 당시, 조선의 대청 방어 전략은
청야견벽(淸野堅壁)으로, 강한 청의 기병과 직접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고
침공로 주변의 성에 군사를 집결하여 공성전을 강요함으로써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명이 아무리 약체화 되었더라도
이를 배후에 두고서는 장기전을 벌이기 어려운 청의 약점을 노린 것으로,
유사시에는 수군이 약한 청의 공세를 피할 수 있도록 강화도에 파천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을 지켜본
경험이 있는 청은 조선군이 지키고 있던 산성을 우회해서, 한양으로 신속히 남하하여
인조와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을 차단하였다. 봉화를 통한 긴급 통신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조정이 청군의 침공을 인지한 것은 12월 13일이었으며,
인조는 청군이 한양에 거의 접근한 12월 14일에서야 파천에 나섰으나
강화도로 향하는 길이 이미 차단당한 이후라 남한산성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로 1만 3천여 명의 조선군이 수성에 나서 청군이 이를
공략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사전에 방어를 위한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던 터라
한 달 남짓 버틸 수 있는 군량 밖에 없어 장기전을 도모하기 어려웠다.
조정은 남한산성과 강화도가 항전하는 동안 전국 각지의 관군이 집결하여 청군의 포위를
풀 것을 기대하였으나, 충청도 근왕병의 진격이 죽산에서 멈추었고(12월 19일)
12월 27일에는 강원도 근왕병이 검단산 전투에서 청군에게 패배하였으며
수원 광교산 전투에서 청군에게 승리를 거둔 전라도 근왕병마저
탄약 부족으로 퇴각함으로써 남한산성의 고립은 심화되었다.
한편,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청야견벽 전략에 따라 수성을 준비하다 허를 찔린 조선군은
청군의 뒤를 쫓아 남하하였으나 12월 25일 도르곤이 이끄는 청의 우익군에게
기습을 당하여 양근 미원으로 퇴각하였다. 양근 미원에는
약 1만 7천여 명의 조선군이 집결하였으나 청군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못하였다.
강화도에는 세자빈과 봉림대군(후일 효종)을 비롯하여
왕실과 역대 임금의 신주가 피난해 있었다. 인조와 조정은 수전의 경험이 적은
청군이 강화도를 공략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였으나,
청군은 명 수군 출신의 공유덕과 경중명 등을 앞세워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홍타이지는 인조가 1월 19일까지 항복하지 않자 강화도 공격을 명령하였고,
청군은 1월 22일 새벽부터 강화도 상륙을 시도하여 당일 오후에 강화산성을 함락시켰다.
비축 식량의 소진으로 어려움을 겪던 인조와 조정은 1월 26일
강화도 실함 사실을 접하자 항전의지를 상실했고,
결국 1월 30일(양력 2월 24일) 출성하여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였다.
3. 배경
여진족은 그들이 세운 금이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한 후
명나라 북동 지역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던 여진족은
명과 조선 양측에 이중으로 관계하던 중 아이신 교로 누르하치가
숙신, 말갈, 여진을 규합, 16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이들을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잦은 군대 동원과 이에 따른 경제상 손실은
명의 국력을 쇠약하게 만들고 몰락시킨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누르하치가 명나라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공격하자 수세에 몰린 명은
조선에 소총수 7000명을 지원하라고 요구하였고 누르하치는 파병하지 말라고
조선 조정에 강력히 요구했다. 당시 조선 조정은 광해군과 그의 즉위를 도운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신료들은 조선이 국내 수비에 치중하는 것이
후방 수비라는 차원에서 유익하다며 명이 한 요구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으나
임진왜란 때 명이 원군을 파견해 도운 일을 감안하면 원병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명에 원군을 보내되 싸움이 시작될 때 항복해
조선이 부득이 파병한 실정을 설명하게끔 하였다는 야사가 있으나
이는 파병된 인원의 80%가 전사한 뒤에 항복했다고 전해진다.
3.1 정묘호란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 서인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이 급선회하였다. 서인은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했고
신료들은 광해군의 중립 대외정책을 기존 친명배금 정책으로 바꾸어
조선에 예로부터 내려오는 대로 명을 잘 모시어 받들려고 했으며,
후금에서는 조선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해 왔던 홍타이지가 즉위하여
후금의 대조선(對朝鮮) 정책과 태도도 변하였다.
후금은 명나라와의 전쟁 탓에 교역로가 끊겨 물자 부족에 심히 허덕여
이를 조선과 하는 통교를 이용하여 타개해야 할 처지에 있었고
후방을 안정시키려고 조선 가도에 주둔한 모문룡과
적대 정책을 펼치는 조선을 정벌할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였다.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의 잔당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속히 조선을 정벌해달라고 종용하였다. 홍타이지는 더욱 결전할 뜻을 굳히어
이괄의 난 때 후금에 투항한 한명윤의 아들, 한윤과 한택과
1619년 부차 전투에서 항복한 강홍립을 데리고 조선 정벌에 나섰다.
1627년(인조 5년) 홍타이지는 광해군을 보복한다는 명분으로
군사 3만을 일으켜 조선을 공격해 왔는데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이괄의 난으로 말미암아 북변의 군사 체계가 붕괴된 상태였던 조선은 수세에 몰렸고
조선 조정 내에서도 화의론이 대세를 이루고 후금도 오랜 기간에 걸치는
출병이 곤란했으므로 전쟁은 지속되지 않았고 청군은 약 두 달 만에
강화조약을 하고 철수했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은 후금과 “형제지맹”을 하였다.
3.2 정묘호란 후 양국 관계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조선에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다.
이 요구에는 식량 지원과 명 정벌에 사용할 병선(兵船) 제공이 포함되었고
1632년(인조 10) 조선에 “형제지맹”을 “군신지의”로 바꾸기를 요구했는데
이것은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삼으려는 굴욕스러운 요구였다.
후금의 무리한 요구와 강압 정책으로 조선 내에서는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화친하자는 논의를 배척하자는 척화론(斥和論)이 대두되었고
후금과의 관계는 악화하기 시작했다. 한편 후금의 홍타이지는 내몽골을 평정한 뒤
만주족의 왕을 일컫는 칭호인 한(汗)을 버리고 황제를 칭하려 했다.
1636년(인조 14) 음력 2월에 잉굴다이(Inggūldai, 龍骨大)와 마푸타(Mafuta, 馬福大) 등을
보내어 여러 만주·몽골의 부족장들이 홍타이지에게 올린 존호의 글을 보이면서
조선 조정도 이같이 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척화론을 좇아 인조는
후금의 사신을 접견하지도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물론 조정에서는
최명길과 같이 전쟁을 피하고 화해하거나 평화롭게 지내자는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한 자도 있었지만, 대세는 척화선전(斥和宣戰) 하는 기운으로
기울어졌고 드디어 팔도에 선전(宣戰) 교서를 내리어 방비를 굳게 하고 적의를 보였다.
그해 음력 4월 황제 칭호와 더불어 국호를 청(淸), 연호를 숭덕이라 고친 청 태종
홍타이지는 조선의 도전하는 태도에 조선을 원정하려고 군을 조직할 준비를 서둘렀다.
4. 전쟁의 발발
1636년 12월 28일 청 태종이 이끄는 군대 약 10만이
야루 우라(ᠶᠠᠯᡠ ᡠᠯᠠ Yalu Ula)를 건너 남하하자 의주부윤(義州府尹) 임경업은
백마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의 진로를 차단하고 기세를 꺾어 놓을 만반의 준비를 마쳐놓았다.
하지만 청군은 왕인 인조를 잡는 게 목적이었던 청나라군은
백마산성을 비롯한 모든 산성을 우회해서 한성을 향해 신속히 진격했고,
1월 9일 개성을 통과해서, 1월 10일 한성이 청나라에게 함락 당했다.
한편 인조를 비롯한 조정은 1월 9일 청나라가 개성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도로 대피하려고 했지만, 청나라가 신속히 남하한 나머지
강화도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고, 결국 남한산성으로 긴급히 대피했고,
강화도로 대피하려고 했으나 청나라군에게 막혀서, 1월 10일 남한산성에 대피하였다.
4.1 근왕병의 소집과 실패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각 도에 잔글씨로 써서
벌집을 만들려고 꿀벌이 분비하는 물질을 이용해 뭉친 글을 몰래 보내
근왕군을 모으려고 했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한성과 인조만을 노린 전격전을
전개했으므로 한성과 그 주변을 제외한 배후지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고
특히 삼남(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지방이 건재했으므로, 여기서 근왕군을 편성해
산성을 포위한 청군을 역포위하면 전세를 유리하게 바꿀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근왕군을 지휘할 책임이 있는 도원수(都元帥) 김자점은
경기도 양평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각 도에서 올라오던 근왕군은 합류하지 못한 채
청군의 별동대에게 각개격파 당했고 남한산성을 구원하지 못하였다.
각 근왕군의 동향은 다음과 같았다. 가장 먼저 12월 17일,
강원감사 조정호가 근왕군 약 7000여 명을 조직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원주 영장 권정길이 이끄는 선봉대 1000여 명이 12월 24일 남한산성 근처의
검단산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이튿날 청군의 별동대에게 격파 당했고
사기가 떨어진 근왕군은 토붕와해(土崩瓦解)했다.
조정호는 잔여 군사를 이끌고 가평으로 퇴각하여 다른 근왕군과의 합류를 꾀했다.
함경감사 민성휘는 12월 27일 근왕군 7000여 명을 규합하여 진군했으나 북병사
서우신과 함경감사 민성휘이 지휘권을 놓고 말썽을 일으켜 시끄럽고 복잡하게 다퉜다.
서우신은 곧장 남한산성으로 진군하자고 주장했지만,
민성휘는 양평의 김자점과 합류한 후에 세력을 키우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민성휘의 의견을 좇아 함경도 근왕군은 양평으로 향했지만,
도원수 김자점은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북변의 오랑캐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정예병이었던 함경도의 군사와 중앙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강원도 근왕군의 패잔병도 합류한 양평의 군세는 2만 3천에 달했지만,
김자점은 결국 군사를 움직이지 않아서 전쟁에서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충청감사 정세규는 12월 18일에 인조가 잔글씨로 써서
벌집을 만들려고 꿀벌이 분비하는 물질을 이용해 뭉쳐 몰래 보낸 글을 받았다.
정세규는 즉시 근왕군을 규합, 12월 25일 공주를 출발하여
12월 27일 남한산성 남쪽의 험천에 당도해 화전(火箭)을 이용해 남한산성에 신호했지만,
이번에도 청군의 별동대가 험천 서(西)에 있는 고지를 점령 후 근왕군을 요격했다.
근왕군은 공격을 10여 차례 방어에는 성공했으나 기력이 다했고
김홍익, 이경징, 이상재를 비롯해 지휘관 다수가 전사했으므로 더는 성과 없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험천전투는, 조선군의 대패로 끝나고 말았다.
청군이 처음 압록강을 건너 한성으로 남하하면서 평안도를 통과한다.
당시 평안감사 홍명구는 청군의 압록강 도하 소식을 접하고 병력을 조직 후
평양성 북(北)에 있는 자모산성(慈母山城)에 들어가 청군을 방어하려 했으나
청군이 이를 무시하고 그대로 남진(南進)하였으므로 아무것도 대처할 수 없었다.
홍명구는 평안병사 유림 휘하의 병력을 합세, 1636년 12월 18일 평양을 출발해 남하했으나
철원, 연천 등지에 이들의 진격을 막고자 주둔한 청군의 별동대에 가로막혀
더는 접근할 수 없었다. 1637년 1월 26일 강원도 김화 탑동 부근에서
청군과 한 전투에서 홍명구는 전사했고 유림은 고지에 주둔하면서 공격해 온 청군을
격퇴에는 성공하여, 본래 목적지였던,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이미 조선 조정과 청의 조약이 체결된 뒤여서, 군사를 돌려 서울로 회군하였다.
전라감사 이시방은 12월 20일 근왕(勤王)하라고 명령받았다.
29일 병력 6,000여명을 모은 이시방은 전라병사 김준용과 함께 전주 군영을 출발,
북상했고 이어 화엄사의 승병 2,000여 명이 이에 합류하였다.
선봉을 맡은 김준용은 1월 4일 광교산 부근까지 진출했으나
이틀 전 충청도 근왕군을 격파한 청군과 만났다.
1월 5일, 김준영은 청군의 돌격을 막아내고
다음날은 청군 장수 양굴리를 죽이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나
역시 물자가 부족하여 인해 더는 진군하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수원으로 퇴각하였으며, 이시방이 이끄는 근왕군 본대는,
광교산 전투를 패배로 오인하고 공주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4.2 쌍령 전투
한편 경상감사 심연이 이끄는 경상도의 근왕군은
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이 이끄는 총 규모 약 4만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속오군 편제상 총병력 4만이 모두 집결해 있었는지를 놓고 이론(異論)할 여지가 있지만,
허완과 민영이 이끄는 병력 8,000여 이상은 1637년 1월 3일 광주의 쌍령 근처까지
진출했다. 이 병사들을 저지하려고 인근 불당리에 매복하던 청군은
기병대 3백 기(騎)와 칼과 창을 주 무기로 삼아 최후 돌격 단계에서 적에게 돌진하여
승패를 결정하는 구실을 하는 병사 1천 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부대였다.
조선군 대부분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훈련도는 매우 낮았고
청군 기병 3백기가 칼을 빼어 들고 용감하게 돌격하자 조총으로 중무장한
8천여 조선군은 겁먹은 채 거리조차 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구 사격한 끝에
화약과 화살을 모조리 소모한다. 청군은 일단 후퇴하고 나서
조선군이 화약을 소모한 상황을 확인하고 재차 돌격을 감행하여
허완이 이끄는 좌군을 완벽히 궤멸시키고 허완도 베어 죽였다.
민영이 이끄는 우군은 좌군이 패주하는 와중에도 열심히 싸웠으나 화약이 떨어져
이를 재보급하던 도중에 화약이 폭발하여 군사 수십이 그 폭발로 말미암아 죽고
전선이 무너졌다. 이를 틈탄 청군 기병대가 총돌격하자
우군도 완벽히 붕괴했고 민영도 이 와중에 죽었다.
경상도 근왕군은 청군의 수십 배에 이르는 우월한 병력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한 채
결국 참패했고 본진을 이끌고 여주에 진을 치고 있었던 심연은
선봉 부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군사를 돌려 조령 이남으로 철수했다.
이렇게 팔도의 근왕군이 전부 청군에게 격파당하여
남한산성은 완벽히 고립되었고 근왕군은 더 조직되지 못하였다.
4.3 강화부 전투
청군은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왕자들을 인질로 잡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당시 강화산성에 주둔한 조선군의 수는
채 몇 백이 되지 않았고, 강화도수비총대장인 강화검찰사 김경징과
강화유수 겸 주사대장(舟師大將) 장신이 지휘권을 놓고 다투면서 분열되어 있었다.
1637년 1월 21일 청군은 1만6천명의 군사를 배에 태워 강화도로 향했다.
충청 수사 강진흔은 수군을 이끌고, 강화도로 접근해오는 청군을 연이어 격퇴하였다.
강진흔이 적은 수의 배로 수많은 배를 가진 청군을 힘겹게 대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사대장인 장신은 강진흔을 돕지 않고 도주하였다.
청군이 강화도로 오고 있다는 것을 김적이 강화검찰사 김경징에게 알렸으나,
김경징은 "물이 모두 얼었는데 어떻게 청군이 오느냐?"라고 하며
김적에게 군율을 물어 목을 베려까지 하였다. 김경징은 갑곶을 지키는 장수가
김적과 같은 보고를 하자, 그제서야 군사를 정비하고 갑곶을 수비하려 들었다.
결국, 강진흔의 충청 수군 방어선을 뚫고 청군의 배가 강화도에 상륙하게 되었고,
청군은 진해루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뒤이어 강화도에 속속
상륙한 청군은 강화산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김경징과 강화 부사 이민구는 배를 타고 강화도 근처 섬으로 도주하였고,
청군은 텅텅 빈 강화산성을 단숨에 함락하였다.
많은 강화 백성들이 청군에 의해 살해되었고,
몇몇 사대부들은 자결하기도 하는 등 강화 곳곳에서는 참극이 벌어졌다.
1월 22일 강화부를 함락한 청군은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인질로 붙잡고,
인조에게 항복을 요구하였다. 강화도 함락은 인조에게 큰 충격을 안겼고,
쌍령전투와 함께 인조가 항복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말았다.
전란 후, 조정에서는 강화부 전투의 책임을 묻기 시작하였고,
신하들은 패배의 원흉인 김경징의 목을 베기를 원하였으나
인조는 김경징과 강화부사 이민구를 귀양보냈다.
또, 충청 수사 강진흔을 귀양보내고 장신은 자결하게 하였다. 그러나, 김경징을
사사하라는 여론이 들끓자 그제서야 인조는 김경징에게 사약을 내렸다.
또, 충청 수군들과 장수들이 애통하게 강진흔의 억울함을 호소하였음에도
인조는 강진흔에게 강화부 전투 패배의 책임을 물어 참형한 뒤 효수하였다.
4.4 근왕병의 집결
수만 명의 근왕병이 모여 들었지만 청군이 두려워 제대로 진격하지 못한다.
충청도의 근왕병 7,000명은 이미 청군에게 격파당하고,
다른 조총으로 무장한 정예군들도 주저하면서, 남한산성의 구원에는 실패한다.
청군은 맹렬한 기세로 남한산성을 공격하지만, 14,000명의 조선 수비군은
잘 수비하여 낸다. 장단방어사 이서의 주도로, 소규모 특공대가
청군 수백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다. 하지만 청군의 매복으로 300명이 전사하자,
조선군의 사기는 떨어진다. 이들은 각종 화포와 조총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물자부족으로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고립 당한다.
김준룡 장군이 이끄는 3,700명의 의병과 관군은 광교산으로 모여든다.
처음에는 대규모 기병대에 밀리지만, 김준룡 장군의 분전으로,
포수들이 일제사격을 시작하여, 청군 수천 명을 죽인다. 마지막, 살수의 돌격으로
청군 다수를 사살하고, 조선군은 광교산을 사수한다.
이날, 청태종의 사위와 청 장수 2명, 그리고 청군 10,000여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평안감사 홍명구와 평안병마사 유림은 5,000명의 관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구원하러
떠난다. 하지만 두 지휘관의 의견분열로 조선의 정예군이던 5,000명의 군대는
각각 2,000명과 3,000명으로 나뉘고, 평안감사 홍명구는 관군 2,000명과 합류한
의병 300명을 이끌고 탑동에 진을 친다. 청의 군대를 만나 분전하지만,
평안감사 홍명구와 순안현령 허노를 포함한 조선군 1,000명이 전사한다.
평안병마사 유림이 이끄는 3,000명의 조선 관군은 천혜의 요지인 백동에 진을 치고
청군을 기다린다. 그들이 보유한 우수한 화기를 살려 산중에 진을 친 그들은
청군과 맞싸운다. 하지만, 전투 초반, 1,000명의 탑동전투 패잔병들이 몰려들며
조선군의 진영이 흐트러진다. 하지만, 장군의 분전으로,
그들은 1선 살수의 진격으로 시작하여 돌격한다.
2선 사수와 3선 포수의 일제사격은 위력적이었다.
마지막까지 포와 조총을 쏴대며 지원한 어영청 소속 포수들이 승리를 이끌었다.
조선군은 청군 수천 명을 전사시키며 승리를 거두고,
조정에 강화소식이 들려지자, 그들은 평양으로 돌아간다.
4.5 기근
청군이 기병 중심의 편제였던 데다가 그 진격 속도가 매우 신속했으므로,
전국 각지에서 청군은 신출귀몰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조선군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경험을 토대로 군사상 요지에 축성된
산성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는 농성 전술을 구사하려 했지만
팔기군을 중심으로 한 청군은 이를 무시하고 곧바로 한성을 향했고
각지의 근왕군도 청군의 별동대에 격파당하여
조선군은 청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사실을 입증했을 뿐이었다.
인조는 근왕군 후퇴에 당황했고 청군을 피해 후퇴하는 군사를 처벌하겠다고 공언했으나
이것이 조선군이 청군에게서 느끼는 공포와 무력(無力)을 없애지는 못했으며,
조선군은 당초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왕과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도망쳤으므로 성 내부로 퇴각한 군사 1만2천과 백성 수만을 지탱할
비축 물자가 없었다. 쌍령전투 이후 남한산성은 완벽히 고립되었으므로
더는 보급을 기대할 수 없어서 조선군의 사기는 점점 저하된 데다가
겨울철의 추위 탓에 수많은 사람이 얼어 죽었고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인조조차 결국 죽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상황에 이르렀고 기근에 지친
군사들은 군마를 죽여 먹기까지 했으나 굶어 죽는 사람이 결국 속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권을 유지하려는 인조는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였고
1월 10일 종전을 위해 청군과 협상을 시작했으나 내부상으로는
김상헌을 필두로 한 주전파와 최명길의 주화파가 여전히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청군은 인근의 망월봉에 홍이포를 설치하고 산성 내부를 직접 조준하여
사격을 시작했다. 조선군은 반격을 시도 천자총통을 이용해 홍이포가 설치된
포대에 포격하기도 했으나 이것도 물자 부족 탓에 계속할 수 없었다.
215센티미터 포신과 10센티미터의 구경에서 뿜어져 나온 탄환은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벽을 타격했고 직결된 피해는 작았으나
조선군의 사기를 꺾기에는 충분했다. 1월 22일, 세자빈과 봉림대군이 피난했던
강화도를 청군이 함락했다는 소식은 1월 25일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이 일로 조선군은 항전 의지가 꺾였다.
결국 1월 28일, 인조는 항복하기로 결심했고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나왔다.
5. 항복
항복할 한 화약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하의 예(禮)를 행할 것.
2. 조선은 명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과 교통을 끊고 명에서 받은 고명과 책인을 헌납할 것.
3. 조선은 왕의 장자(長者)와 제2자 그리고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낼 것.
4. 청이 명을 정벌할 때는 기일을 어기지 않고 원군을 파견할 것.
5. 내외 여러 신하와 혼인하고 사호(私好)를 굳게 할 것.
6. 성곽의 증축과 수리는 사전에 허락을 얻을 것.
7. 황금 100냥, 백은 1,000냥을 비롯한 물품 20여 종을 세폐(歲幣)로 바칠 것.
8. 성절·정삭·동지·경조 등 사신은 명 구례(舊例)를 따를 것.
9. 가도(假島)를 공격할 때는 병선(兵船) 50척(隻)을 보낼 것.
10. 포도(逋逃)를 숨기지 말 것.
11. 일본과 하는 무역을 허락할 것.
1637년 2월 2일 청 태조는 먼저 청을 향해 출발하였고
2월 8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예친왕 도르곤을 따라 심양으로 떠났다.
조선 백성은 후금(후에 청으로)군에게 포로가 된 백성을 제외하고도
심양에 있는 노예시장에서 60만 이상이 거래되었다.
이리하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왕자 부부가 인질로 가고
척화파 강경론자인 이른바 삼학사인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잡혀가 참형되고
김상헌도 뒤에 잡혀가서 오랫동안 옥중에서 생활하였다.
이 사람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여인과 여러 관리와 대신의 많은 자녀가
청의 사신 잉굴다이에게 붙잡혀갔는데 그 수는 197명이다.
한양은 종로와 광통교 일대에 있던 집은 모두 파괴되었고 많은 마을이
약탈과 방화로 아수라장이 되어 임진왜란 후 회복하려는 노력 또한 수포로 돌아갔다.
그 후 이 원한을 씻고자 사사로이 북벌을 계획하는 자도 있었다.
임경업이 명과 연락하여 청을 치려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6. 병자호란 대패의 원인
조선 : 임진왜란에서의 국력상실. 이괄의 난으로 인한 북방군의 감소,
오합지졸의 군사, 수성위주의 방어전술, 최고지휘관의 무능, 강화도 도하 실패
청 : 산성과 거점 지역을 무시한 빠른 진군, 강화도 함락
남한산성 내부에 비축된 식량의 부족, 청에 의한 강화도 함락,
구원군의 지속적인 패배로 인한 사기저하로 항복하게 되었음
7. 병자호란 시계열표(날짜는 양력/음력)
◇ 1616년 누르하치 후금 건국
◇ 1619년 사르후전투 -> 강홍립 포로
◇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
◇ 1624년 이괄의 난 -> 한명윤 아들(한윤, 한택)
◇ 1626년 영원성 전투(원숭환) 후금 패배 -> 누르하치 사망
◇ 1627년 후금 3만 침략 -> 강홍립, 한윤, 한택 -> 최명길, 정묘화약 -> 형제지국
◇ 1628년 벨테브레(박연) 내도 -> 서양 인식
◇ 1636년 음4/11 후금 -> 청(칭제건청)
12/27(12/01) - 비변사가 청나라에 서신을 보낼 것을 제안하여 인조가 허락하다.
-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아
- 예친왕(禮親王) 대선(代善), 다이곤(多爾袞), 다탁(多鐸)과
패륵(貝勒) 악탁(岳託)·호격(豪格)·두도(杜度)등 심양에 집합
12/28(12/02) - 박로가 사신으로 출발. 같은 때 청군 12만명 압록강 도하.(親征 전쟁개시)
12/30(12/04) - 이후 며칠 동안 척화파들이 박로를 도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1637년
01/03(12/08) - 청군 야루 우라 도하
01/04(12/09) - 청군 압록강 도하, 전봉장(前鋒將) 마부태에 명해 바로 서울로 진격
01/07(12/12) - 청군 안주 도달(청군 침공 장계 조정에 도달)
01/08(12/13) - 청군 평양에 도달
01/09(12/14) - 청군이 장단에 도달하다. 마복탑 홍제원 도달
파천을 논의하고 종묘의 신주 및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2子효종(孝宗)(鳳林大君), 3子인평대군(麟坪大君)을 강화로 보내다.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 도착.
01/10(12/15) - 청군 한성 함락 주변 차단으로
인조와 조정도 강화도로 가려고 했으나 도로 남한산성에 들어가다.
적진에 사신으로 파견된 최명길이 돌아오다.(王弟및 대신 인질 요구)
01/11(12/16) - 청군 담태(潭泰)의 군사 남한산성 도달.
능봉수(綾峯守) 칭(偁)을 王弟라 칭하고 판서 심집(沈諿)을 보냈으나
탄로 나서 잉굴다이가 그 자리에서 박난영을 살해하다.
01/12(12/17) - 강원감사 조정호 7천 근왕군 출발. 김상헌 화의 부당함 극언.
01/13(12/18) - 평안감사 홍명구, 평안병사 유림 근왕군 5천이 출발하다.
심광수 최명길 참 건의, 전승결의
01/14(12/19) - 1차교전, 청군이 남성에 육박, 공격하는 것을 화포로 격퇴하다.
충청도 근왕군 죽산에서 멈춤
01/15(12/20) - 홍타이지가 개성에 도착하다. 전라병사 이시방 근왕 명령
01/16(12/21) - 충청도 원병 헌릉도착, 화전(火箭)으로 서로 응하다.
마푸타(馬夫達)가 남한산성 밑에 와서 조선 대신들과 회동하다.
01/17(12/22) - 김류(체찰사)에게 결전 촉구, 김류 주저함.
윤집 등이 주도하여 주화파 처형 주청하려다가 김반, 채유후 만류.
01/18(12/23) - 경상도 근왕군이 충주에 도달하다.
01/19(12/24) - 어영청 군사 400여명 출전, 적 100여명 사살
원주 영장 권정길 1천 검단산에서 패퇴. 강원감사 조정호 가평으로 퇴각.
진눈깨비가 그치지 않자 천지신명에게 제사 지내며 통곡하다.
01/20(12/25) - 충청감사 정세규 근왕군이 출발하다.
예조가 백제 온조왕에게 제사 지낼 것을 청하다.
사영대장(四營大將, 申景禛, 具宏, 元斗杓, 李時白)에 결전 촉구
01/21(12/26) - 강원도 근왕군이 검단산 근처까지 왔으나 청군에게 패하고 후퇴하다.
01/22(12/27) - 함경감사 민성휘 7천 근왕군이 출발하다. 청군에게 술과 고기를 전달했으나
잉굴다이가 필요 없으니 너희들이나 먹으라며 거부하다.
公淸監司 鄭世規가 병사를 거느리고 험천(險川)에 도착했으나 패몰
01/23(12/28) - 최명길의 건의로 익위(翊衛) 허한(許僩)보내 강화를 논하게 하다.
01/24(12/29) - 전라감사 이시방 6천 근왕군,
전라병사 김준용 2천, 화엄사 승병 2천 합류 출발하다.
유도 대장(留都大將) 심기원(沈器遠) 승전보고.
김류가 북문으로 나갔다가 장수8명, 병사 300여명 전사하다.
01/25(12/30) - 김상헌이 지금은 적진에 사자를 보낼 때가 아니라고 주장하다.
대간들이 나서서 사자를 아예 보내지 말라고 주장하다.
01/26(01/01) - 홍타이지가 탄천에 도달, 진(陣)을 치다.
조정에서는 홍타이지 도착믿지 못함 위산보(魏山寶)를 파견 정탐
01/27(01/02) - 충청도 근왕군이 청군에게 패배하고 공주까지 후퇴하다.
홍타이지가 “관온인성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교유하노라”라는
유명한 항복 요구 서한을 보내다.
일부 신하가 홍타이지가 보낸 서한을 소각할 것을 주장하다.
완풍부원군 이서가 성 안에서 죽다.
01/28(01/03) - 홍타이지에 최명길 작성 답서, 홍서봉이 신하국 칭 건의
경상감사 심연, 좌병사 허완, 우병사 민영 4만 집결
허완, 민영 8천 쌍령 전투 청군 기병 3백에 패사,
경상도 근왕군이 쌍령전투에서 전멸하다.
선봉 패배로 주력 여주 경상감사 심연 조령 이남 철수
01/29(01/04) - 척화와 강화의 의논이 진행되다. 김준용 3,700 광교산 도착
윤집, 이명웅 등이 최명길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나 허락하지 않다.
01/30(01/05) - 전라도 근왕군(김준룡)이 광교산 전투에서 승리하다.
01/31(01/06) - 전라병사 김준용 양고리 전사(청 장군2, 1만여명 전사)
함경도 근왕군이 강원도 금화에 도달했다는 장계가 도착하다.
강원도 근왕병 검단산 전투후 용진(龍津)으로 후퇴 전열 정비
02/01(01/07) - 인조가 말단 병사들을 위무하다.
서흔남,두청, 도원수金自點, 황해병사 李碩達, 전라감사 李時昉의 장계 전달
전라감사 이시방 여주 본대 광교산 전투 패배로 오인 공주방면 철수
02/02(01/08) - 식량이 부족하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다.(당초 6천석->2.8천석)
02/03(01/09) - 김류, 최명길 등이 적진에 국서 보낼 것을 허락받다.
김상헌과 대간들이 반대하다.
02/04(01/10) - 국서를 작성 및 수정하다.
02/05(01/11) - 작성한 국서를 인조가 확인하다. 척화파는 계속 사신 파견 반대를 주장하다.
02/07(01/13) - 최명길 등을 적진에 사신으로 보내다.
정명수에게 은 1천 냥, 마푸타와 잉굴다이에게 각각 3천 냥을 뇌물로 주다.
헌릉에 불이 나서 3일 밤낮 불타다.
02/08(01/14) - 얼어 죽는 병사가 발생하기 시작하다.
02/09(01/15) - 근왕군들이 대부분 패배, 궤멸했음을 알리는 심기원의 장계가 도착하다.
02/10(01/16) - 청군이 커다란 깃발에 "항복하라"[招降]고 써서 내보이다.
최명길이 적진을 다시 찾아갔으나 잉굴다이는
새로운 이야기가 없으면 올 필요가 없다고 하며 문전박대하다.
02/11(01/17) - 홍타이지의 서한이 서문에 도달하여 밖에 나가 받아보다.
02/12(01/18) - 김상헌이 최명길이 쓴 항복문서를 찢고 울부짖다.
대간이 계속 항복은 불가하다 주장하자 폭발한 최명길이 그들을 꾸짖다.
눈이 엄청 내리다. 국서를 받지 않아 폐하(陛下)라는 두 글자를 더하다.
02/13(01/19) - 홍이포 포환이 성 안에 떨어져 맞아 죽은 사람이 더러 나오다.
이조참판 정온이 최명길이 나라를 팔았다고 주장하다.
검찰사(수비대장)김경징, 강화유수(주사대장) 장신 지휘권 다툼
강화도 청군 공격 개시, 충청수군 강진흔 분전, 장신 도주
02/14(01/20) - 청측에서 답서를 보내며 항복을 반대하는 신하들을 묶어 보내라 하다.
02/15(01/21) - 최명길이 돌아와 국왕이 성 밖으로 나오라는 청측의 요구를 전달하다.
잉굴다이가 서문 아래 왔기에 나가 보니
국서는 우리 황제의 말씀을 거슬러 받을 수 없다며 되돌려 주고 가버리다.
청군 1,6만 강화로 출발
02/16(01/22) - 세자가 부왕 대신 자신이 나가겠다고 청하다.
척화파 대신들이 자신들을 묶어 보낼 것을 청하다.
검찰사 김경진, 강화부사 이민구 배를 타고 섬으로 도주
강화 방어전에서 조선군이 패배, 강화 함락되고 왕족들이 포로로 잡히다.
02/17(01/23) - 김상헌이 죽게 해 줄 것을 청하다.
水原의 將官들이 政院 문 밖에 모여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내보내도록 청
청군이 서성과 동성을 공격했으나 이시백이 막아내다.
윤집, 오달제, 윤황 오랑캐에 보내달라 상소
최명길이 척화신들을 내보낸다는 국서를 작성하다.
02/18(01/24) - 망월봉에서 청군 홍이포를 발사했는데 포환이 행궁에 떨어져 박살나다.
청군이 남성에 육박하였으나 격퇴하다.
청측 강화 함락 통고, 출성요구
02/19(01/25) - 성첩이 적의 대포에 모두 허물어지다.
잉굴다이와 마푸타가 와서 국왕이 나오지 않으려거든
다시는 사신을 보내지 말라며 그동안의 국서를 몽땅 돌려주고 가버리다.
02/20(01/26) - 평안도 근왕군 홍명구 전사, 유림 김화 전투에서 승리하다.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장교, 병사들이 척화신을 내보내라고 시위하다.
강화도 함락 소식이 남한산성에 도달.
인조가 성 밖으로 나가기로 결정하다.
02/21(01/27) - 황제의 약속을 보장받고자 하는 국서를 마푸타에게 전달하다.
02/22(01/28) - 잉굴다이가 홍타이지의 항복 조유칙서를 가지고 오다.
그동안 청을 오랑캐라고 지칭했던 문서들을 모아 소각하다.
정온, 김상헌이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다. 항복 결정.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무슨 자살을 하냐고 최명길이 김상헌을 비웃다.
02/23(01/29) - 항복 국서 전달, 윤집, 오달제가 하직 인사를 하다.
02/24(01/30) - 정축하성. 인조와 대신들이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다.(전쟁 종료)
의식이 끝나고 창경궁 양화당으로 돌아가는 길에
포로로 끌려가는 백성들이 울부짖는데 그 수가 만여 명에 이르다.
02/26(02/02) - 청태조 심양으로 출발.
03/04(02/08) - 구왕(예친왕, 도르곤), 소현세자, 봉림대군 심양으로 출발.
8. 영향
자신에게 조공하던 오랑캐에게 반대로, 조공을 관계하는 사실에
조선 왕과 백관(百官)과 명을 떠 받들던 식자층은 큰 충격을 받아 이후 북벌론이
대두하였으며, 청의 앞선 문물을 수용하고 배워야 한다는 북학운동이 일어났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는 문학작품으로는 《박씨전》, 《임경업전》등이 있다.
9. 북벌 운동
두 차례의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의 지배층은
청에 대한 적대감과 복수심에 불탔다. 이에 청나라를 쳐서 복수해야 한다는
북벌론이 일어났다. 특히, 청나라에 인질로 억류되었던 효종은
심양에서 겪은 인질로서 고초와 굴욕을 분히 여겨 북벌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상 목표로 삼았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과 함께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수축(修築)하고 군대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청이 한족의 반발을 누르면서
대중국(對中國) 지배를 공고히 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였으므로,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조선으로서는 강대국으로 부상한
청과 관계 개선이 불가피하여 경제상ㆍ문화상 자주 교류하였다.
18세기 후반에는 청의 발달한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여
적극으로 수용하였고 이 무렵, 러시아가 침략해오자 청은 이를 격퇴하려고
조선에 원병을 명하자 조선은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출병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나선정벌).
10. 인구 손실
청나라 - 6,000명 이하 추정
조선 - 전사자 30,000명 이상. 포로로 끌려간 노예 600,000명
11. 국제 정세 변화
명나라 - 국운 쇠퇴. 가장 강력한 제후국을 잃음으로서 사실상 청나라와의 경쟁력 상실.
청나라 - 명나라를 치러갈 때의 후방 위협 요인을 사전제거. 명나라와의 경쟁에서 승리.
조선 - 국운 쇠퇴. 청나라의 제후국이 됨으로써 국가 정체성이 흔들리고
조선 말기의 암흑기를 야기.
일본 - 동아시아 지역의 경쟁 세력인 명나라의 멸망과 조선의 쇠퇴로
반사이익을 보며 국력을 기름.
12. 인구 변화
전쟁 전 조선 – 3,800,000명
전쟁 후 조선 – 3,300,000명(대략 13.2%인구 감소)
인조 부친 정원군(추존 원종) 어진 중에서
□ 인조(仁祖, 1595음력11/7~1649/5/8)1. 생애
1.1 생애 초반
1.1.1 출생
인조(仁祖, 1595년 12월 7일(음력 11월 7일) ~ 1649년 6월 17일(음력 5월 8일))는
임진왜란 중에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과 의정부좌찬성을 지낸
구사맹(具思孟)의 딸 군부인 구씨(인헌왕후) 사이에서 장남으로
조선 황해도 해주부(海州府) 관사에서 태어났다.
그가 해주에서 태어나게 된 이유는 당시는 임진왜란 난중으로 전란이 계속되어
왕자 제궁(王子諸宮)이 모두 해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실록 즉위일 기록에 의하면 그가 탄강할 때 붉은 광채가 빛나고
이상한 향내가 진동하였으며, 그 외모가 비범하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첫 이름은 천윤(天胤)으로 정해졌다.
황해도 해주부 몽진 관사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황해도 개성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기도 하였으며 그 후 한성부 정원군 사저에서 성장한
그의 이름은 이종(李倧)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천윤(天胤), 화백(和伯)이라
하였으며 호는 송창(松窓)이었다. 그의 자(字, 본이름 대신 부르던 이름) 중
천윤(天胤)이라는 자는 당시 국왕이었던 그의 할아버지 선조가 종(倧)이라는 이름과 함께
친히 직접 지어준 것이다. 나중에 광해군이 누군가에게 이 말을 듣고,
“어찌 이름 지을 만한 뜻이 없어서 반드시 이것으로 이름지어야 하겠는가.”라고 하면서
언짢아했다 한다. 할아버지 선조에게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으나
그 중 정원군이 일찍 결혼하여 얻은 첫 손자였다.
선조는 그 자신이 방계출신에 서출인 탓에 첫 손자인 그가
서손(서자 정원군의 아들)이었음에도 특별히 불러다 왕궁에서 기르며 총애하였다.
능양군은 태어나면서 모습이 범상하지 않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사마귀가 많이 있었는데,
이듬해 봄에 할아버지 선조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기며,
'이것은 한 고조(漢高祖)와 같은 상(相)이니 누설하지 말라.'고 했다 한다.
그러나 선조의 이와 같은 말은 곧 누설되었고,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성하다,
인빈의 묘자리가 좋다는 등의 소문과 함께 퍼지면서
훗날 그의 친동생 능창군 종이 사형당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고려왕들의 어진은 이씨조선에서 고의적으로 땅에 묻었다하며 그 업보인가?
조선 왕들의 어진은 6.25동란시 부산 국악원 창고에 보관중 1954 용두산 화재시
불에 타 겨우 몇 점만 일부 불에 탄 채 발견 되었으며 위는 인조 부친 원종의
불에 탄 어진을 이당 김은호 화백이 복원했다 하며 인조의 잔영이기에 올림.
1.1.2 유년기
2, 3세가 지나서는 사저에서 자라지 않고 할아버지 선조의 배려로
곧 궁중에서 자랐는데, 의인왕후는 그를 특별히 귀여워하였다.
그는 장난을 좋아하지 않고 우스갯말이 적어 이 때문에 사랑이 날로 융성해져
다른 왕자들이 비교되지 못하였고, 특히 할머니뻘인 의인왕후는
더욱 사랑하고 귀중히 여겼다고 한다. 5, 6세가 되어서는 선조가 직접 그를 품안에 두고
가르치며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는데, 일찍부터 글자를 해독하고 말귀를 알아듣자
선조가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선조는 그의 외삼촌이기도 한 능해군 구성(綾海君 具宬)을
왕손사부로 삼아 어린 능양군의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어느 정도 자란 뒤에도
그는 스스로 글 읽기를 힘쓰고, 왕손이라는 지위를 내세우지 않았으며
내외척 사이에서 귀한 체한 적이 없었다.
1601년(선조 34년) 능양수(綾陽守)에 첫 책봉되었으며
1604년(선조 37년) 임진왜란 당시 관료와 의병장, 장수들을 포상할 때
그를 특별히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넣어 책록되었고,
1608년(광해군 즉위) 유영경의 옥사 직후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몽학의 난 진압에 참여한 관원들을 청난공신(淸難功臣)에 녹훈할 때는
청난원종공신 1등(淸難原從功臣一等)에 각각 녹훈되었다.
해당 원종공신록은 인조가 즉위하면서 소각되었지만 누군가 해당 훈작을 보고 작성한
어휘원종공신첩(御諱原從功臣帖)이 현대까지 전해져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1607년(선조 40년)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졌다가
이어 능양군에 봉해졌다. 할아버지 선조가 별세하면서 정원군 일가는
경희궁으로 나와 살았고, 부모를 따라 경희궁으로 갔다.
1.2 청년기1.2.1 신경희의 옥사
1610년(광해군 2)에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으로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청주 한씨 한준겸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인조보다 1년 연상인 한씨(인렬왕후)는
1594년(선조 27) 7월 1일 원주 읍내 사제에서 태어났다.
가례를 행하고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에 봉하여졌는데, 선조가 일찍이
왕자 부인으로 뽑았다가 낙방하였으나 관상을 보고 귀하게 될 것을 안 선조가
그대로 다시 능양군을 위하여 배필로 간택하였다고 한다. 한씨와 가례를 올린 뒤
경행방 향교동 사저로 분가하고 1612년(광해군 4) 18세 때 장자인 소현세자를 낳았다.
1613년(광해군 5) 임해군의 옥사 직후 익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나자 둘째 아우인 능창군이 죽임을 당하였다.
능창군은 일찍이 인빈 김씨 소생 왕자들 중 선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 물망에 올랐던 신성군이 일찍 죽자 정원군에 의해 그의 양자로 들어갔었는데,
당시 17살이던 능창군은 수안군수 신경희 등이 획책하는 모반에 추대되었다 하여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이 무렵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성하다,
인빈의 묘자리가 좋다, 정원군의 집터가 좋다 등의 소문이 돌았고, 광해군은 이를
신경희의 옥사 직후 능창군이 사전에 왕위에 뜻을 두었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1.2.2 반정 직전
능창군이 사사되자 아버지 정원군은 화병을 얻어 몸져누웠고,
술도 좋아했던 정원군은 1619년(광해군 11)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때 능양군은 빈소에서 곡을 하며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
집안의 풍비박산을 초래한 이 사건은 인조반정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1620년(광해군 12) 무인 이서, 신경진, 김류와 그의 외척인 구굉, 구인후 등이
반정을 모의하고 능양군을 추대할 계책을 결정하였다. 능양군은 이들과 비밀리에 만나며
정변을 모의하였고 서인과 남인계 인사들의 지지와 자문을 구하였다.
반정을 감행하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1622년 가을 정변 계획이 누설되어,
평산부사 이귀·신경진 등이 거사를 계획한다 하여 대간이 이귀를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였다. 동년 겨울에는 이귀·김자점 등이 유폐된
서궁(西宮, 인목왕후를 일컬음)을 비호한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1.2.3 반정과 즉위
1623년 4월 11일(광해군 15년 음력 3월 12일, 인조 29세)
서인의 김류·이귀·이괄·최명길 등이 일으킨 정변을 준비하고 그해 4월 12일
(음력 3월 13일) 새벽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진입, 반정군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반정의 명분을 확립하여 정통성을 다지는 동시에
서인계를 중심으로 정부를 재구성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작업을 폈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 정권의 부도덕성과 실정에서 구했다.
반정의 명분인 광해군의 부도덕성과 실정의 근거자료가
인조시대 때 작성된 광해군 실록과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시대에 작성한 인조실록이 그 근거이므로
인조가 자신의 역모를 정당화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광해군의 부도덕성과 실정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농후할 수 있으나
광해군일기는 정초본과 중초본, 정초본은 역사적 사료 즉 사초이며
중초본은 사초를 엮어서 만든 완성본 이기 때문에
그들이 광해군의 행적을 왜곡했더라면 당연히 사초를 남기지 않고 없애야 마땅하므로
광해군일기는 그만큼 신뢰성이 높다. 한편 인조반정의 주요 명분 중의 하나는
광해군의 인목왕후 폐모론이었다. 반정 후 형식적으로 인목왕후를 복귀시킨 뒤 그녀의
교서를 받아 즉위하는 형식을 취하였으나 즉위 이후 그녀에 대한 예우는 소홀하였다.
1.3 재위기간 중1.3.1 즉위 초기
즉위 직후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하고, 영창대군, 임해군을 죽인 것과
후금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일을 문제 삼아 반정을 합리화시켰다.
또한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유배 보내고, 광해군대의 정국을 주도했던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 등 수십 명을 처형했다. 조선시대 고관대작들을
수십 명을 처형한 기록은 연산군 때의 사화 등에서도 존재하지 않으며
조선시대의 왕이 즉위 직후에 수십 명의 고관대작들을 처형한 기록은 인조가 유일하다.
조선시대에 왕은 집권하면 널리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여
사형수도 사형을 면제해 주었으며 대부분의 죄수들을 사면하고 풀어주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100여 가문을 파멸하고
1,000여명을 연루시켜 당연히 쫒아내는 게 마땅하고
북인들은 광해군의 옥사를 이용해 정적을 숙청하고 권신화되어
각종 폭정을 일삼아 이들은 사형당하고도 도로 살려내 사형해야 마땅하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33명은 3등급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봉하고
관직을 내렸다. 이와 함께 광해군대의 정치를 비판, 자진해서 물러났거나
대북계로부터 축출 당했던 서인·남인의 사림들을 중앙 정계로 불러들였다.
서인계의 정엽·오윤겸·이정구·김상헌 등과 남인계의 이원익·정경세·이수광 등이 그들이었다.
1.3.2 북인 숙청과 이괄의 난
즉위 초기인 1623년 7월 기자헌·유몽인 등 북인계 인사들을
역모로 몰아 숙청, 하옥하였으며, 동년 10월에는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황현·이유림 등의 역모가 있었다.
특히 1624년에는 반정공신이던 이괄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흥안군을 추대,
그는 공주 공산성 쌍수정까지 피난할 정도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괄은 반정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도감대장 이수일이 내응의 공이 있다 하여
공조판서로 중용된 데 비해, 자신은 2등으로 평가받고 도원수 장만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1624년 이괄의 난 이후 피난 가던 인조는
전영의정 기자헌, 유몽인 등 옥에 갇힌 북인계 인사 40명을 전격 처형했다.
인조는 이러한 반왕권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제어함으로써
비정통적인 방법에 의해 승계한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을 세워
신료를 장악하거나 독자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서인세력은 반정 이후 정국을 주도하고,
남인의 정계 진출을 견제하여 인조의 왕권행사를 제약했다.
인조반정 공신 세력이 정국을 장악하면서 공신 세력의 과도한 세력 강화에
위협을 느낀 그는 공신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독재 김집과 송준길, 송시열로 대표되는 산림 세력을 중용한다.
1.3.3 서인 세력 견제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서인 세력은 수시로 자신들이 공을 세워서
인조가 즉위할 수 있었음을 공석과 사석을 가리지 않고 발언하였다. 서인 공신 세력의
이 같은 행위에 분노하면서도 힘을 쓸 수 없었던 그는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의
산림학자들과 김육 등 비공신 계열 서인 세력을 기용하여 서인 공신 세력들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또한 반정 초기 왕족 출신 남인계 정승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기용한
것을 비롯, 남인 계열의 정치참여를 확대시켜 이들을 통해 서인 공신 세력을 견제한다.
서인들은 이괄의 난이 진압되면서부터 계속하여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성균관 문묘에 종사할 것을 건의한다. 남인계 성균관유생들은 이이가 입산하여
불교승려가 되었다는 것과 성혼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가마를 보고도
호종하지 않았다며 비난하는 소를 올렸고, 서인의 이념이 국시가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인조는 이이와 성혼의 의혹들을 언급하며 문묘 종사를 거절하였다.
이후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으로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여론은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1.3.4 정원군 추숭 여론
인조가 즉위하면서 아버지 정원군은 대원군으로 추존하여 정원대원군이 되었다.
그러나 인조는 생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고,
정치적 기반이 부족한 인조반정의 반정공신들 또한 선조-정원군-인조로 이어지는
가계도를 구성하여 자연스러운 계승 순서와 인조의 정통성 강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서인계 성리학 예학자인 김장생, 김집과 송시열과 남인계 허목 등은
인조가 선조의 후사를 계승하였으므로, 선조를 아버지라 하고
정원군은 황숙부나 황백부로 불러야 된다고 고집하였다. 인조는 반정 공신인
이귀, 이정구 등을 중심으로 정원군의 추존 작업을 추진하였고,
중론을 듣는 것처럼 여론을 각색한 후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여 원종이라 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자들의 반발은 계속되어 정원군의 추존에 반대하여
김장생, 김집 등은 사퇴, 낙향하였고, 허목은 이를 비판하다가
불이익을 받고 관직 임용이 금지당하기도 했다.
1.3.4.1 정묘호란
인조 정권은 광해군의 중립외교와는 다르게 친명정책을 펼쳐 청의 반발을 샀다.
이러한 때에 1623년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결국 진압은 되었지만, 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킨 한명윤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도망가 정묘호란의 명분이 되기도 했다.
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청나라가 패배하고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후방 안정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이무렵 선양(瀋陽)으로 수도를 옮기고 태종이 왕위를 계승하는 등
국세가 날로 강대해지고 있었던 후금은 후방 안정을 꾀하고
악화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1627년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침략했다.
이괄의 난이 진압된 뒤 이괄의 잔당 중 한명윤의 아들,
한윤과 한택은 후금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또 조선의 병력이 약하며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烏合)임을 말하여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다. 명나라와의 교전으로 인한 경제단교(經濟斷交)로 심한 물자 부족에 처하여 있던
후금 태종에게, 이괄 잔당의 이러한 종용은 더욱 조선 침입의 결의를 촉진시켰다.
1627년 1월 14일 인조 5년에 후금 홍타이지는 버일러(beile, 貝勒 : 만주·몽골의 부족장)
아민(Amin, 阿敏)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조선을 침입케 했다.
1.3.4.2 정묘화약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 부대 3만 명은 1월 16일 의주를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1월 21일에는 능한산성을 함락시켰으며,
1월 24일에는 평양을 함락하였다. 인조는 부랴부랴 1월 25일 강화도로 피신을 하였다.
안주성에서 남이흥, 양진국, 장돈, 김언수, 함응수, 김준, 김양언, 송덕영을 전사시키고
평양을 거쳐 1월 25일에는 황주에 이르렀다.
이에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가고, 인조 이하 조정의 신하들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의주를 거쳐 평산 까지 함락되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했으며,
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양국의 대표가 회맹(會盟),
형제의 의를 약속하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었다.
1628년 네덜란드선박이 난파되어 제주도에 네덜란드 사람
얀 얀스 벨테브레이(Jan Jansz Weltevree) 등이 표류하였다. 인조는 친히
벨테브레이를 통해 서양 사정을 알게 되었고 그에게 박연이라는 이름을 내려
조선에 정착시켰다. 벨테브레이는 원산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벨테브레이의 조선 표류로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들은
고려시대 벽란도와 예성강을 오간 아랍 외에는 막연하던 서구 세계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인조는 그에게 들은 화포와 총기를 만들게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재료와 기술이 부족하였고 그것이 한계였다.
1.3.4.3 병자호란
1636년 12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는데 (인조 42세)
청나라는 조선을 완전히 박살내고 복속시키기 위해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를 막지 못했고 봉림대군·인평대군과 비빈을 강화도로,
인조 본인은 남한산성으로 후퇴하여 항거했다.
1.3.4.4 인조의 원병 요청과 전멸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각 도에 납서를 보내 근왕군을 불러 모았다. 산성을 포위한
청나라 군대를 조선의 군사들이 역포위하면 해볼만 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근왕병은 오지 않았다. 납서는 작게 쓴 글씨를 밀로 뭉쳐 몰래 전하는 비밀편지다.
경기도 원병이 왔으나 청나라 군사에 의해 모두 전멸 당했다.
충청도 원병이 헌릉에 도착하여 불화살로 신호를 보내어 서광이 비쳤으나
청나라 군사들의 함성 속에 사라져버렸다. 당황한 충청도 병력은
청나라 병사들과 교전도 제대로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전멸 당했다.
강원도 영장 권정길이 이끄는 군사는 검단산에서 그리고
충청감사 정대규가 데리고 온 군사는 험천에서 청나라 군사들의 칼날 앞에 쓰러졌다.
원군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접한 경상감사 심연은 8000명으로 근왕군을 편성했다.
좌병사 허완, 우병사 민영에게 군사를 주어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라 명했다.
그러나 선봉부대는 남한산성 동남쪽 40리 지점 쌍령에 이르렀을 때
불당리에 매복하고 있던 청나라군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고 말았다.
본진을 이끌고 여주에 진을 치고 있던 심연은 선봉부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군사를 돌려 조령 이남으로 철수했다.
그 후 강원감사 조정호, 함경감사 민성휘, 전라감사 이시방이 군대를 출정시켰지만
그것은 임금을 구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문책을 면하기 위해 오는 척하였던 것이었다.
이후 근왕군이 결성되었다는 소식은 없었다.
1.3.4.5 기근과 굶주림
조선팔도에는 괴소문이 퍼졌다. 청나라 군사는 바람같이 나타나
귀신같이 사라진다는 소문이었다. 옹성 전술을 구사하는 조선군들에게
만주벌판을 달리며 단련된 팔기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괴소문은 헛소문일 뿐이라고 선언하고 소문을 확대하는 자들에게는
처벌을 공언하였다. 조선인 병사들의 후퇴에 당황해한 인조는 청나라 군사를 피해 후퇴하는
조선인 병사 몇 명을 처벌하였으나 조선인 병사들의 공포감과 무력감을 없애지는 못했다.
남한산성 성안의 군사들은 추위에 얼었고 식량은 바닥나기 시작했다.
인조는 죽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갔고, 굶주림에 지친 군사들은 말을 잡아먹었다.
설상가상으로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까지 날아들었다. 성안에 피신한 백성들은 물론
사대부들과 수종자들도 굶주렸고 기근으로 쓰러져 아사, 동사하는 일도 속출했다.
망월봉에서 천둥벼락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커다란 포탄이 성안에 떨어졌다.
홍이포다. 행궁에 머물던 백관들은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 가기 바빴고
군사들은 혼비백산했다. 215센티미터 포신과 10센티미터의 구경에서 뿜어져 나온 탄환은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성벽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홍이포는 현대의 미사일 이상으로
공포의 무기였다. 당황한 인조는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치열했던 논쟁도 허무했다. 인조는 대신들을 불러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물었으나
아무도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옛 제도를 고수하고 의리를 지키자던
김상헌과 대륙에 지각변동이 일어났으니 우리도 변해야 된다는 최명길이 각을 세웠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척화와 주화 논쟁이 불붙었을 때 일찍이 결론을 도출했다면
전쟁의 참화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인조에게는 그러한 덕망이 없었다.
1.3.4.6 항복과 인질
1636년(인조 14) 인조는 청나라 군대를 되돌아가게 하고자
왕자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진짜 왕자대군이나 왕자군 대신
영양군 이거의 손자 풍해군 이잠의 차남 능봉수 이이(綾峯守 李人+爾)를
능봉군으로 봉하고 왕제라고 속여서 청나라에 보내고 화의를 체결했다.
청나라 군대는 일부 퇴각하였다. 그러나 능봉군을 가짜 왕자로 꾸미고,
형조판서 심집(沈諿)은 재상으로 속여서 심양에 보냈다가
어느 조선인이 이들의 정체를 폭로하여 결국 되돌아왔다.
청나라 군대는 퇴각을 중단하고 계속 조선 왕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결국 59일간을 버티던 인조는 항복을 결심했다.
그러나 인조는 항복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 않아 스스로 하성(下城)이라 표현했다.
이후 인조는 영을 내려 남한산성 하산을 항복이라 하지 않고 하성이라 쓰도록 명했다.
이후 공식 기록에는 정축하성(丁丑下城)이라 쓰였다.
성문을 나선 임금이 눈밖에 쌓인 비탈길을 내려와
수향단에 좌정한 홍타이지(숭덕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세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는 의식이다.
청나라의 입장에선 비교적 관대한 항복의식 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반합(飯哈)을 요구했다.
반합은 장례를 치를 때 염하는 의식에서 차용한 방법으로
'임금의 두 손을 묶은 다음 죽은 사람처럼 구슬을 입에 물고 빈 관과 함께 나와
항복하라'는 것이었다. 괴기스럽지만 중국에서는 흔히 쓰이던 항복의식이다.
임금이 오랑캐에게 무릎 꿇고 절하는 모습을 지켜본 백관들과 유신들은 충격을 받았다.
소중화를 자처하며 명나라의 멸망 이후 중화의 도를 계승하였으며,
여진족, 거란족, 왜인, 유구인, 월남인 등을 야만인으로 간주하던
조선의 사대부와 지식인들은 엄청난 정신적 공황과 충격에 사로잡히게 된다.
조정에서는 전쟁 수행 여부를 놓고 김상헌·정온을 중심으로 한 척화파와
최명길 등의 주화파 간의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주화파의 뜻에 따라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에서 군신의 예를 맺었다. 이와 함께
소현세자·봉림대군과 척화론자인 삼학사, 즉 홍익한·윤집·오달제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1.3.5 국방 정책과 경제 정책
인조는 허약한 왕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친명정책을 추진하면서 생겨난
전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책을 활발히 추진했다.
먼저 1623년 호위청을 신설하여 반정을 주도한 세력의 사병을 정규병력으로 변화시켰다.
1624년에는 어영군을 창설했으며 이해 6월에는 기존의 경기군을 정비·강화하여
총융군으로 재편했다. 이와 함께 방어의 거점으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강화도의 군사력을 정비했다. 한편 군역 자원과 재정의 확보를 목적으로
직후부터 호패청을 설치하고 호패법을 시행하여 거의 완성했으나
정묘호란 때 소실되어 이를 통한 군사력 증강은 실패로 돌아갔다.
1627년 정묘호란이 끝난 후, 군사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즉 남한산성의 수비강화를 위해 수어청을 신설하고
어영청과 훈련도감의 인원을 증강함으로써 조선 후기 5군영 체제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 같은 군제의 재편과 함께 경제질서의 재건을 위한 정책도 각 방면에서 실시되었다.
이는 왜란과 호란으로 말미암아 파탄 직전에 놓였던
국가재정·농민경제·농업생산력을 되살리기 위한 일련의 조치였다.
광해군 때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했던 요역과
공물의 전세화(田稅化) 조치인 대동법을 이원익의 건의로 1623년 실시했다.
애초 강원도·전라도·충청도 등 3도에 시행하기로 했으나
1626년에 강원도에만 실시했다. 1634년에는 삼남지방에 양전을 실시하여
전결(田結)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세원을 확대했다.
이와 함께 세종 때 제정되었던 연등구분의 전세법을 폐지하고
전세의 법적인 감하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영정법과 군역의 세납화를 실시했다.
1633년 김육의 주장에 따라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그 유통을 시험했다.
이는 실패로 끝나기는 했으나 효종대 이후 화폐 유통의 기초를 이루었다.
또한 청인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하여 1637년 북관의 회령(會寧) 및 경원개시,
1647년 압록강의 중강개시가 행해졌다.
개시에는 상고(商賈)의 수, 개시기간, 체류일수, 매매총수 등을 미리 결정하도록 했다.
1.4 생애 후반1.4.1 소현세자 일가 숙청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昭顯世子)는
그곳에서 선교사 아담 샬 등을 통해 서구의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청나라에 대한 시각이 바뀌게 된다. 1644년 11월 석방된 소현세자는
1645년 2월 조선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백성들로부터 인망이 높은 그가
자신을 왕위에서 쫓아낼 것을 두려워한 인조는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소용 조씨(후일의 귀인 조씨)와 김자점 일파는
소현세자를 공격했고, 1645년 그를 독살하였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는
그 아내인 민회빈 강씨가 세자를 독살하고 소용 조씨를 저주했다는 소문을 이유로
민회빈과 그녀의 친족들을 죽이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 보낸다.
이후 유배간 세 아들 중 장남 경선군(慶善君)과 차남 경완군(慶完君)은
제주도에서 죽고 막내 경안군(慶安君)만이 살아남는다.
경선군과 경완군이 제주도에서 죽자, 세인의 비난 여론을 무마하고자
인조는 손자들이 유배될 때 따라가 그 시중을 들던 나인들을 잡아다가 문초,
장살하는 것으로 여론을 무마시키려 했다.
그러나 인조가 손자들을 죽게 했다는 소문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퍼졌다.
1.4.2 전란 이후
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의 옥사, 봉림대군의 세자책봉과 왕위승계는
이러한 대립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병자, 정묘호란 이후 원칙론을 내세운
산림세력은 북벌을 주장했고 지나친 북벌 여론을 그는 부담스러워하게 된다.
2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된 국가 기강과 경제는
파탄 상태로 빠지는 한편, 정국은 친청파와 배청파로 분화·대립해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서인의 분화는 가속화하여 김자점(金自點)을 영수로 하는 낙당(洛黨)과
원두표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 김집·김장생·송시열 등의 산당(山黨),
김육(金堉) 등의 한당(漢黨)이 형성되었다. 인조 말년 김자점은 외척으로서
친청세력을 규합하여 정권을 장악했고, 이에 반해 산당을 중심으로
반청친명사상과 북벌론이 강화되어 광범위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1635년(인조 13년, 인조 42세) 정비 인렬왕후가 죽자
3년 후인 1638년(인조 16년) 왕비간택령을 내려, 그해 10월 당시 14세인
인천 부사 조창원의 딸 장렬왕후를 간택하여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인조는 그로부터 10년 뒤에 사망하고
아들과 며느리보다 나이 어린 계비는 후일 복상과 예송 등의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1.4.3 최후
1641년에는 군량조달을 위해 납속사목(納粟事目)을 발표하고,
납속자에 대한 서얼허통(庶孽許通) 및 속죄(贖罪)를 실시했다. 그러나 재정 조달은
확충되지 않았고, 산림 세력의 북벌론에 인조는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1644년(인조 22년) 명나라 황제 숭정제가 자결하자
황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뭇 신하를 거느리고 슬퍼하여 상복을 입고,
진위사(陳慰使)와 진향사(進香使)를 남명 조정에 파견하였다.
1644년 11월 볼모에서 석방된 소현세자가 귀국하였으나
친청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자 그를 독살한다.
세자가 죽자 조정은 세자 책봉 문제로 시끄러웠는데,
산림은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을 세손으로 책봉해야 된다고 하였으나 그는 이 의견을
물리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소현세자빈 강씨를 사사(賜死)하였다.
사림의 계속된 북벌 요구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던 인조는
1646년(인조 52세) 그는 친청파 인사인 김자점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이후 군제를 정비하여 총융청과 수어청 등을 신설하였으며,
북쪽 변방의 연해 방위를 위하여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의 여러 곳에 진(鎭)을 신설하였다.
또한 서적 간행에 힘써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동사보편(東史補編)》
《서연비람(書筵備覽)》 등의 서적도 간행하였다.
1649년 (인조 27년, 인조 55세) 손자 연(棩)(현종)을 왕세손으로 책봉하였다.
1649년 초 병석에 누웠다가 그해 5월 8일 새벽에 적장자인
왕세자 효종 내외를 찾지 않고 서녀 효명옹주와 서자 숭선군 낙선군을 찾았다.
인조는 왕세자 효종 앞에서 효명옹주와 숭선군 낙선군을 벌하지 말고
죽는 순간까지 친형제 지간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많이 도와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결국 이날 유시(오후 5시~7시)에 창덕궁 대조전 동침에서 55세를 일기로 승하 하였다.
1.5 능묘
능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있는 장릉(長陵)이다.
인조와 그의 원비 인렬왕후가 같이 합장된 릉이다.
인조 13년 1635년 12월 9일 산후병으로 42세의 나이로 인렬왕후가 승하하자
능호를 장릉이라 하고 이듬해 1636년 4월 12일 파주 운천리의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인조는 장릉을 조성하면서 오른쪽에 미리 자신의 능을 마련해 두었다가
인조 27년 1649년 1월 30일 승하한 후 그곳에 묻혔다.
그러나 후에 화재가 일어나고 뱀과 전갈이 능 주위로 무리를 이루어
석물 틈에 집을 짓는 등 이변이 계속되어
영조 7년 1731년 8월 30일 천장을 결정하고 현재의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로 옮겼다.
1.6 평가
옛으로 보나 지금으로 보나 인조는 조선 최악의 왕 무능한 왕으로 평가받는다.
만약 그가 세계정세에 조금만 관심이 있었더라면 병자호란과 같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평가도 잇따른다. 친명배청주의자인 인조가 즉위한 이후
조선은 외교 기조를 실리외교에서 친명외교로 바꾸었다. 그래서 광해군의 밀명을 받아
청에게 항복했던 강홍립, 박난영의 일가친척을 전부 몰살시켰고 척화파를 중용하였다.
그리고 인조는 청을 형의 나라로 인정하겠다고 타협책을 제시한 후
강홍립의 숙부인 강인을 가짜 형조판서로 꾸며 회답서를 보냈으나 이 문서엔
명이 내려준 연호를 사용하는 등 청을 자극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분노한 청나라 사신은 4만 필의 옷감과 소 4천 마리를 제공하지 않으면
화의는 없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조선은 할 수 없이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다른 일화도 있다. 병자호란 중에 청나라가 포위된 남한산성을 향해
"임금의 아우와 대신을 인질로 보내면 항복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병력을 물리겠다"고
제안하자 인조는 다른 사람을 보냈으나 용골대가 본인들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이번엔
세자를 요구했다. 이처럼 인조는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일들에서도 꼭 손해를 보았다.
2. 가계
조선 제16대 국왕 인조 仁祖
재위 1623년-1649년
전임 광해군 후임 효종
섭정
왕숙 흥안군 이제(1624년 3월 26일 ~ 1624년 4월 1일)
영의정 이원익(1624년 4월 1일 ~ 1624년 4월 21일)
영의정 김자점(1646년 12월 1일 ~ 1647년 3월 1일)
왕세자 이호(1647년 3월 1일 ~ 1649년 6월 17일)
휘 이종(李倧) 별호 자 천윤(天胤), 화백(和伯), 호 송창(松窓).
존호 개천조운정기선덕 (開天肇運正紀宣德)
시호 장목 헌문열무명숙순효 대왕 (莊穆 憲文烈武明肅純孝 大王)
능호 장릉 (長陵)
출생지 조선 황해도 해주 정원군 잠저
사망일 1649년 6월 17일 (53세)
사망지 조선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매장지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부 원종대왕 元宗大王
정원군 定元君 전주 1580년 - 1619년 선조대왕 宣祖大王
경혜인빈 김씨 敬惠仁嬪 金氏 인조 10년(1632년) 추존
모 인헌왕후 구씨 仁獻王后 具氏
연주군부인 連珠郡夫人 능성 1578년 - 1626년 능안부원군 구사맹 綾安府院君 具思孟
평산부부인 평산 신씨 平山府夫人 平山 申氏
배우자 인렬왕후 장렬왕후
자녀 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 효명옹주, 숭선군, 낙선군
인조(仁祖, 1595년 12월 7일(음력 11월 7일) ~ 1649년 6월 17일(음력 5월 8일))는
조선의 제16대 임금(재위: 1623년 ~ 1649년)이다.
휘는 종(倧), 본관은 전주, 자는 천윤(天胤), 화백(和伯), 호는 송창(松窓)이다.
시호는 인조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仁祖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이며 이후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인조개천조운정기선덕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
(仁祖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이다.
1649년(효종 원년) 6월 24일(음력 5월 15일)에 열조(烈祖)의 묘호를 받았으나,
8일 뒤 인조(仁祖)로 개정되었다.
청나라로부터 장목(莊穆)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청나라와의 외교문서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 숭덕제(崇德帝, 아이신 교로 홍 타이지)
대청국 황제 재위 1636년 5월 15일 ~ 1643년 9월 21일
즉위식 숭덕(崇德) 원년 4월 11일(1636년 5월 15일) 大淸(1626년 10월 20일)
시호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 弘德彰武 寬溫仁聖 睿孝敬敏 昭定隆道 顯功 文皇帝)
숭덕제(崇德帝, 1592년 11월 28일(음력 10월 25일) ~ 1643년 9월 21일(음력 8월 9일))는
후금의 제2대 한이자, 청 제국의 창업 군주이다. 휘는 아이신 교로 홍 타이지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시호는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줄여서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
별호로는 태종한조종(太宗汗祖宗)이 있다.
1. 이름
한국 학계의 일반적인 관행은 홍타이지지만 원래는 홍 타이지라고 표기해야 한다.
사실 그의 진짜 정확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 역시 알려져 있지 않다.
현대학자들은 홍 타이지가 본명이 아니라 칭호라고 많이 여기는데,
몽골 귀족의 칭호인 콩타이지(渾台吉)에서 유래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러시아의 한 학자인 G.V. 고르스키는 홍 타이지의 본명을
아바하이(Abakhai)라 주장하여 한때 서구 학계에서 널리 알려졌지만
당시 한문과 만주 문자로 서술된 문헌에 등장하지 않아 오류로 여겨진다.
명대 진인석(陳仁錫)의 《산해기문(山海紀聞)》에는 홍 타이지를
갈간(중국어 정체자: 喝竿, 병음: Hēgān)이라 하였고,
조선의 《인조실록》에는 명 장수 서고신(徐孤臣)의 말을 인용하면서
홍 타이지를 흑환발렬(黑還勃烈)이라고 기록했다.
일본의 한 학자 미타무라 타이스케(三田村泰助)는 흑환(黑還)을 홍 타이지의 본명,
발렬(勃烈)을 만주어 버이러를 음차한 것으로 해석하여
홍 타이지의 실제 이름을 허칸(Hekan)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2. 생애
2.1 생애 초반
1592년 11월 28일, 홍 타이지는 누르가치의 측복진이었던
예허나라 몽고저저의 소생으로, 누르가치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누르가치의 차남 다이샨, 누르가치의 아우인 슈르하치의 차남 아민(阿敏),
누르가치의 5남 망굴타이(莽古爾泰) 등과 함께 사대왕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2.2 치세
2.2.1 후금의 한
1622년 4월 13일, 누르가치는 자신의 일곱 아들과 친동생 슈르가치의 아들
아민을 부른 자리에서 자신의 후계자는 힘센 자나 강한 자는 안 되고,
팔기의 기주 여덟 명을 여덟 왕으로 삼게 하고,
여덟 왕이 논의하여 말을 잘 듣는 사람을 한으로 추대하고,
만약 한이 여덟 왕의 의견을 묵살하고 폭정을 일삼는다면 한을 교체하고,
만약 한이 교체 의견을 거부한다면 폐위할 것을 당부했다.
1626년 9월 30일에, 누르가치가 병사하자,
요토가 그 동생 사하랸과 함께 다이샨에게 홍 타이지를 받들어
한의 지위를 이어받게 할 것을 청하자,
다이샨이 여러 버이러에게 홍 타이지를 강력하게 지지할 것을 선언했다.
누르가치에 이어 새로운 한으로 즉위한 홍 타이지는
암바 버이러 다이샨, 아민 버이러, 망굴타이 버이러 세 버이러를 형으로 대우하며
한의 양측에 앉게 했고,
어느 곳이든지 항상 한과 나란히 앉게 하고 아래에 앉도록 하지 않았다.
홍 타이지는 후금의 식량과 물자의 부족을 타개하기 위하여
조선 연해의 가도(樓島)에 근거지를 두고
배후를 위협 하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침공하였으니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이때 홍 타이지는 조선과의 관계를 공식화하고 대명전쟁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목적에서
희생(犧牲)과 맹서(盟誓) 그리고 저주(詛呪)라는 형식을 수반하는 맹약을 강요하여 체결하였고,
이 맹약을 통해 후금은 병자호란 이전까지 조선의 대외관계를 상당히 제한했다.
홍 타이지는 정묘호란을 통해 하늘이 우리를 사랑하여 조선을 항복시켰다고 선언했다.
1629년 홍 타이지는 문서처리 기구인 서방(書房)을 설립했고
이 기구에 많은 한족 관료를 기용했다.
1631년에는 전형적인 중국식 정치제도인 육부(六部)을 설치함으로써 국가 기구를 완비했다.
홍 타이지에게 직속된 기구인 육부는 국가의 대소사를 논의함으로써,
기존의 팔기의 버이러들이 공동으로 수행하던 국가 통치의 영역을 잠식해 나갔다.
육부의 업무를 총관한 것은 6명의 버이러였지만,
그들 가운데 아바타이(만주어: Abatai)만이 홍 타이지의 형이고
나머지는 모두 홍 타이지의 아들과 조카였다.
그해 12월부터 홍 타이지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처음으로 명나라를 침략했다.
청군은 요서를 지나치고 몽골 지역으로 우회하여 홍산구(洪山口)로 진격했다.
3개월 뒤 홍 타이지는 묵던에 있던 아민과 쇼토를 불러
영평(永平)과 천안(遷安) 등의 네 개의 성을 지키도록 하였으나,
명군의 반격에 아민을 비롯한 야전 지휘관들은 거주민들을 관대하게 다루라는
홍 타이지의 명령이 무색하게도, 천안과 영평의 주민들을 살육하고 회군해버렸다.
이 사건은 청의 대민관계에 악영향을 미쳤고,
명 변방의 백성들을 회유하려던 홍 타이지의 노력에 큰 흠집을 냈다.
이에 홍 타이지는 죄를 범한 이들을 공개적인 재판을 통해 처벌했다.
1630년 의정왕대신회의는 아민이 명령을 거역하고,
단 한 번의 교전도 없이 적과 대치하지 않고, 많은 병력을 잃은 죄를 비롯한
16개 죄목으로 그를 사형시킬 것을 규탄했고, 홍 타이지는 이를 감형하여 그를 유폐시켰다.
이로써 홍 타이지는 양람기를 보유한 아민을 숙청하는데 성공했고,
이듬해 9월 19일 대릉하성 전투의 선봉에 선 탓에 병력 손실을 본 망월타이가
정람기로의 인원 보충 요구를 거부당하자 홍 차이지에게 칼을 뽑아들자,
의정왕대신회의가 소집되었으며 홍 타이지는 망굴타이를 일반 버이러로 강등하고,
정람기의 권력을 삭감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1632년 1월 무렵 홍 타이지는 예부의 참정 이백용(李伯龍)의 건의를 받아들여
의정왕대신회의를 소집하고 다이샨과 홍 타이지가 나란히 앉는 문제를 논의하도록 했고,
다이샨으로부터 이 자리에서 자신이 홍 타이지의 신하이며,
망굴타이와 함께 지존인 그를 보좌할 것이라는 발언을 받아냄으로써
자신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냈다.
홍 타이지는 1631년 9월 초를 전후로, 외번 몽골군과 만주군을
현재의 요령성의 해안을 따라 견고하게 방어된
대릉하의 명군의 요새와 무역 도시 인근에 집결시켰다.
대릉하성의 병력이 보병 7천, 마병 7천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홍 타이지는
2만 이상의 병력으로 성을 포위했고,
포르투칼에서 갓 들여온 대포로 대릉하성을 공격했고,
11월 21일 대릉하성은 식량이 고갈되어 많은 아사자를 내고 항복했다.
대릉하성 전투의 경제적 효과가 미미했지만,
점차 새롭게 흥기하던 신흥국으로서는 중요한 승리였다.
만주, 내칼카, 코르친 연합군이 릭단을 목표로 한 원정에 나섰다는 소식이 접하고
후후노르 지역으로 서천하여 종교적 권위를 이용하여 통합체제를 유지하려 한
릭단 칸은 1634년 감숙 지역에서 천연두로 사망했다.
이에 홍 타이지는 1635년 9월 13일 도르곤, 요토, 사하랸, 호오거 등으로 하여금
차하르를 정벌하여 릭단 칸의 아들 어르커 어저이 콩고르와 수타이 태후의 항복을 받아내고,
수타이 태후의 처소에 있던 쿠빌라이 카안 이래 몽골 제국 카안의 권위를 상징하는
'제고지보(制誥之寶)'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는
'대원전국(大元傳國)이라는 이름의 금으로 만든 도장을 획득했다.
1635년 12월 30일, 홍 타이지는 '주션'이라는 이름을 폐기하고
'만주'를 여진 종족들의 공식적이고 유일한 이름으로 선포했다.
— 만문원당(滿文原檔)
이 날에 한이 말하길, "우리의 나라의 이름은
본래 만주, 하다, 우라, 예허, 호이파이니라. 그것에 무지한 사람들이 주션이라 한다.
주션이라는 것은 시버의 초오 머르건의 후예이니라. 그들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로부터 앞으로 모든 이들은 우리 나라의 본래 이름인 만주라고 부르라.
주션이라고 부르면 죄이다."
이는 홍 타이지가 주션이라는 족명을 폐기함으로써
특히 건주여진과 해서여진간 상쟁의 기억을 일소하고, '만주'만을 사용함으로써
여진 종족들을 새로운 명칭 아래 하나로 통합하고자 한 것이었다.
평복차림의 숭덕제
2.2.2 청 제국의 군주
1636년 홍 타이지는 각각 이부 장관 도르곤, 코르친 투시예투 지농 바다리,
도원수 공유덕으로 대표되는 만주인, 몽골인, 한인으로 이루어진
버이러와 대신, 문무 명관들로 부터 조선을 정복하고 몽골을 하나로 합쳤으며
또 옥새를 얻은 것은 천명이라는 명분으로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스스로 세 언어로 된
칭호인 어질고 관대하고 온화하고 성스러운 군주(弘德彰武皇帝)를 칭하였으며,
국호를 아이신 구룬에서 다이칭 구룬으로 개칭하고,
만주인의 한이자 요동 한인의 황제이자 몽골인의 카안이 됐다.
이는 곧 만주족이 한인, 몽골인과 공존하겠다는 의지를 선포한 것이었고
다종족국가의 표방을 의미했다 사간 세첸의 《몽골원류》는
누르가치를 칭기스 칸의 정치적 계승자로 인정하고
숭덕제가 정권을 장악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몽골인들도 그러한 주장을 수용했음을 보여준다.
같은 해, 홍 타이지는 명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감찰 기관인 도찰원(都察院)을 설립했다.
도찰원의 임무는 황제에게 간언하고, 버이러와 대신들의 불법을 규찰하며,
육부를 감찰하고, 논의와 상주에 참여하며, 사건을 심리하는 것이었다.
도찰원도 버이러들의 권력을 잠식했다.
홍 타이지는 더 이상 여러 친왕(親王)과 동등한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는 이제 유일한 황제(천자)였고, 팔기의 소유자들은 관료의 일부분이었다.
이 움직임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했는데,
첫째는 남쪽의 광대한 땅을 정복하는 데 적합한 최상의 정치 조직 형태를 제공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명 황제에 대한 도전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1636년 당시 홍 타이지가 제위에 올랐다고 선포하면서
들이민 근거 중 하나는 10년 전 정묘호란으로 조선을 정복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행사에 참석한 조선 사신들은
홍 타이지에게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삼궤구고두의 예를 거부했다.
홍 타이지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고,
인조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화의가 단절되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홍 타이지는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홍 타이지는 조선의 사신들의 소동으로 인해 인해 '미완'에 그쳤던
자신의 '황제 즉위식'을 정축년 정월 30일 삼전도에서 '완성'하고자 하였다.
그는 조선의 사신이 아니라 국왕인 인조를 출성시켜 의례의 현장에서 자신과 직접
대면하게 함으로써, 묵던의 '황제 즉위식'보다 더 완성도가 높은 의례를 구현하고자 했다.
1638년 9월, 홍 타이지는 1군 우익군은 요토를 사령관으로 삼아 고북구를,
2군 좌익군은 도르곤을 봉명대장군으로 삼아 동가구를 통해
요서를 우회하여 명나라를 침략했다.
청군은 북경을 포위하고 여덟 길로 남하하여 경기 지역을 무인지경으로 휩쓸어
40성을 함락시키고 한족 25만여 명을 사로잡아 청으로 끌고 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청측의 1군 사령관인 요토가 병사했는데,
조카 요토의 사망을 접한 홍 타이지는 3일간 단식했다.
산해관을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명전쟁을 정복 전쟁으로 확장시킬 수 없었던
홍 타이지는 산해관 외곽의 즉 금주, 송산, 행산, 탑산을 공략하고자 했다.
1640년 3월 18일, 홍 타이지가 지르가랑과 도도를 각각 좌·우익 군의 대장으로 임명하여
금주 근방에 주둔시키고 둔전을 행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9월 홍승주가 이끄는 명군이 청군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송산(松山)·금주(錦州) 전투가 발발했고
이에 9월 23일 홍 타이지가 직접 자신의 병력을 송산에 당도했다.
1642년 3월, 마침내 청군은 송산성을 함락하고,
5월에 금주성의 항복도 받아냈으며 7일에는 탑산성을 함락하고,
19일에는 행산성이 청군에게 항복했다.
청이 송금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요서 지역의 거점들을 줄줄이 확보하자,
한족 관료들은 홍 타이지에게 좀 더 과감하게 북경을 직접 공격할 것을 상주하였다.
그러나 청군이 반복적으로 중국 도시들을 함락하고 밭의 곡식을 추수한 후
회군했다는 점에서 드러나듯이 청 제국은 중국 정복을 추진할 만큼 강력하지 않았다.
홍 타이지는 무리해서 산해관을 장악하거나 북경을 점령할 의도가 없었고,
가능하다면 명나라와 화의를 맺고 청 내부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그해 11월 초 홍 타이지는 아바타이를 봉명대장군(奉命大將軍)에 임명하여
명나라를 침공하도록 했다. 청군은 8개월 간 18주, 67현 88성을 함락하고
황금 1만 2천여 량, 은 220만 량, 한족 포로 37만,
타(駝)·말·노새·당나귀·소·양 32만여 마리를 노획하였다.
2.2.3 사망
○是夜。亥刻。上無疾。端坐而崩。上在位十有七年。壽五十有二
○이날 밤 21시~23시에 상이 병이 없었는데 단정하게 앉아서 붕어하였다.
상의 재위 17년이었고 나이 52세였다. — 청태종문황제실록
홍 타이지는 1643년 9월 21일 밤에 급사했고 심양의 소릉(昭陵)에 안치되었다.
홍 타이지가 붕어한지 5일이 지난 후 호쇼이 머르건 친왕 도르곤이 삼관묘에 이르러
소닌을 불러 새 황제 옹립에 대해 의논하였다.
소닌은 홍 타이지의 황자 중 한 명을 옹립하는 것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하였고,
당일 밤에 홍 타이지의 1등 시위인 바아랴 투 장긴 투라이(만주어:Tulai) 등은
황자를 옹립할 것을 결정했다.
홍 타이지 직속 정황기와 양황기의 대신들이 대청문에서 맹세한 뒤,
무장한 두 황기 바야라 병력으로 하여금 궁전을 포위하고 숭정전에 이르자,
여러 왕과 대신들이 동서의 복도에 열 지어 앉았는데
소닌과 오보이는 황자를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도르곤이 이들을 잠시 물러나게 하였는데, 다이샨은 홍 타이지의 장남 호오거를
추천했으나 호오거는 추천을 거절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직후 도르곤의 친동생인 군왕 아지거와 친왕 도도는 도르곤이 황위에 오르길 권하였다.
도르곤은 꺼리자 도도는 누르가치의 유조에 자신의 이름이 있었다는 점을 명분으로
자신을 옹립할 것을 주장했으나 도르곤은 파풍가 친왕 호오거의 이름 또한 있다는 이유로
거부하였고, 도도의 추천을 받은 다이샨 또한 황위를 기피하였다.
결국 의논을 통해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씨의 소생이자
홍 타이지의 9남인 푸린의 옹립이 결정되었다
소닌·오보이·투라이·탄타이은 삼관묘에서 어린 황제를 잘 보좌할 것을 맹세했다.
이후 도르곤을 비롯한 제왕(諸王), 버이러, 대신들은 함께 푸린의 즉위를 봉하였다.
제왕과 버이러 그리고 대신들은 의논을 통해
우전 친왕 지르가랑과 도르곤을 섭정으로 세웠다.
□ 도르곤(睿親王, Dorgon)
아이신 교로 도르곤, 愛新覺羅多爾袞, 懋德修遠廣業定功安民立政誠敬義皇帝, 睿親王)
출생(1612. 11. 17) 사망(1650. 12. 31)
청조 제1대 황제인 순치제를 도와 나라를 다스렸던 최초의 섭정이었다.
도르곤은 청나라를 세운 태조 누르하치의 아들 가운데 14번째 아들이었다.
그는 1628년에 시작된 차하르 몽골족과의 전쟁에서 명성을 떨쳤으며,
1643년 누르하치의 대를 이었던 홍타이지가 죽었을 때
후계자로 지명되었지만 이를 거절했을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었다.
1644년 이자성의 반란군이 베이징을 점령했을 때, 도르곤은 원정군을 거느리고
중국으로 쳐들어가 명나라 장군 오삼계와 함께 이자성의 군대를 크게 패배시켰다.
베이징에 입성해 명을 접수한 그는 저명한 한족 전문가들의 협조를 받아가면서
정치적·행정적인 여러 제도들을 정비하는 한편 베이징을 수도로 정하고
많은 한족 관습들을 받아들여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1650년 12월 사냥을 하던 도중에 죽었다.
호는 성종(成宗), 시호는 황제(皇帝).
청조 제1대 황제인 순치제(順治帝)를 보정(輔政)했던 최초의 섭정이었다.
도르곤은 청나라를 세운 태조(太祖) 누르하치의 16명의 아들 가운데 14번째 아들이다.
누르하치는 1616년 자신을 중국의 황제로 선포했으나
명실상부한 황제가 되지 못하고 1626년에 죽었다.
그의 후계자인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아바하이, 8번째 아들] 치하에서
도르곤은 황자(皇子)의 칭호인 호소이 베일레를 수여받았다.
그는 1628년에 시작된 차하르 몽골족과의 전쟁에서 명성을 떨쳤으며,
황자들 가운데 최고의 지위인 예친왕(睿親王)에 봉해졌다.
1638~39년 명(明) 정복을 위한 홍타이지의 출정기간에 만리장성을 돌파하고
허베이 성[河北省]과 산둥 성[山東省]의 40개 도시들을 점령한
팔기군(八旗軍)의 두 부대 중 한쪽을 지휘했다.
쑹산[嵩山]과 진저우[錦州]를 점령하는 데도 참여하여
몽골족의 세력을 넓히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643년 홍타이지가 죽었을 때 후계자로 지명되었지만 도르곤은 이를 거절했다.
1644년 4월, 이자성(李自成)의 반란군이 베이징을 점령했을 때,
도르곤은 한족 고문관의 충고에 따라 원정군을 거느리고 중국으로 쳐들어갔다.
이전에 그의 가장 큰 적이었던 명나라 장군 오삼계(吳三桂)는
이자성에게 나라를 세우게 하기보다는 도르곤과 힘을 합치는 쪽을 택했고,
이 연합군은 이자성의 군대를 크게 패배시켰다.
1644년 6월 도르곤이 베이징으로 입성했을 때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는 이미 목을 매달아 죽은 뒤였다.
이자성의 패잔병들을 몰아낸 후,
도르곤은 신중하게 저명한 한족 전문가들의 협조를 받아가면서
정치적·행정적인 여러 제도들을 정비하는 데 주의를 쏟았다.
그는 베이징을 수도로 정하고 많은 한족 관습들을 받아들여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도르곤은 명조의 매우 발달한 통치체제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한족 관료들을 재등용하고 관리 선발을 위한 시험으로
이미 그 효용성이 증명된 과거제도를 통해 새로운 관리들을 등용했다.
독일인 예수회 선교사였던 아담 샬 폰 벨이 수학자로서,
흠천감(欽天監:국립천문기상대)의 감정(監正)과 대포제조 고문으로서 그를 도왔다.
토지몰수와 변발과 같은 만주풍습의 강압적인 도입도 있었지만
다른 모든 조치들이 전반적으로 새 왕조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었다.
1650년 12월 31일 만리장성 근처에 있는 카라호툰에서 사냥을 하던 도중에 죽고 말았다.
죽은 뒤에 의황제 성종(義皇帝成宗)으로 추존되었다.
도르곤이 갑자기 죽자, 제국 내에는 혼란과 무질서가 일어났다.
그에게는 후계자가 될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특히 그가 지휘하던 백기단(白旗團:팔기군의 일부) 내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그후 정치권의 내부 변화로 이전에 도르곤의 정적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들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순치제는
1651년 3월 도르곤을 제위 침탈의 뜻을 품었던 반역자로 선언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1733년 건륭제(乾隆帝) 때에 비로소 새 제국 수립에 기여한 도르곤의 공로가 추인되어
방치되었던 그의 무덤이 다시 복원되고 마침내 완전하게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