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절사(顯節祠) : 숙종14(1688) 유수 이세백 建享, 숙종19賜額, 숙종37 김상헌, 정온 追配
□ 병자호란과 김상헌, 실록으로 본 김상헌
정묘약조(인조5, 1627) 이후 조선은 후금의 요구에 따라
중강과 회령에서 각각 후금에게 세폐를 보내고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하였다.
하지만 후금은 당초의 맹약을 깨고
식량을 공급해줄 것을 강요하고 병선 및 군사적인 지원을 요구해왔다.
그뿐만 아니라 후금군은 수시로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
그러자 조선 내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여론이 비등해지기 시작했다.
조선에 대한 후금의 압박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1636년부터 정묘약조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관계로 개약(改約)하자고 하면서
황금과 백금 1만 냥, 전마 3천 필 등 종전보다 더 무거운 세페를 요구하고
정병 3만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해왔다.
이때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명의 북경 부근을 위협하고 있었다.
후금의 요구 사항이 이처럼 터무니없이 늘어나자
조선은 화의조약을 깨고 후금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던 중 그해 2월에 용골대, 마부대 등이 후금 태종의 존호를 조선에 알리고
인조 비 한 씨 문상을 겸할 요량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그들은 맹약을 바꿔 형제 관계를 군신관계로 개약해야 한다고 하면서
조선이 후금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강요했다.
그러자 조정 대신들은 이에 분개하며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칠 것을 극간했고,
인조도 이에 동조하여 후금 사신이 가지고 온 국서를 거부하였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후금 사신들은 조선의 동정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민가의 마필을 빌려 급히 본국으로 도주해갔는데
이 과정에서 공교롭게도 조선 조정이 평안관찰사에게 내린 유문을
그들에게 탈취당하고 만다. 이 유문은 전시에 대비하여
병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군비를 손질하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여차하면 후금을 치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유문을 읽은 후금 태종은 조선을 재차 침략할 뜻을 비친다.
그리고 이해 4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개칭하고 연호를 숭덕이라 하였으며,
태종은 황제의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청은 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격하겠다고 협박을 가한다.
하지만 청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있던 조선 조정은 그들의 제의를 묵살해버린다.
그해 11월 청은 다시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내세우는 인물들을
심양으로 압송하라는 최후통첩을 해왔으나 이번에도 조선 조정을 이를 무시해버렸다.
그해 12월 1일 청 태종은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족 군사 2만 등
도합 12만을 이끌고 직접 압록강을 건너 쳐내려왔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고 있는 의주 백마산성을 피해 직접 한성으로 진군하였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도원수 김자점과
의주부윤 임경업의 장계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12일이었다.
그리고 13일 오후 늦게 청군이 이미 평양에 도착했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청군이 그렇게 빨리 밀고 내려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조선 조정으로서는
이 장계로 극도로 혼란에 휩싸였고 도성 내의 주민들은 피난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4일 개성유수의 급보로
청군이 이미 개성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인조는 급히 판윤 김경징을 검찰사로, 부제학 이민구를 부사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에게 주사대장을 겸직시켜 강화도 수비를 명령했다.
또한 윤방과 김상용에게 명하여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 씨, 원손 둘째 아들 봉림대군, 셋째 아들 인평대군을 인도하여
강화도로 피난하도록 했다. 인조 자신도 그날 밤
도성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적정을 탐색하던 군졸이 달려와
청국군이 벌써 영서역(지금의 서울 은평구 불광동)을 통과했으며
강화도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자 이를 포기하였다.
조정 대신들은 사후 대책을 논의한 끝에 최명길로 하여금
적진에 들어가 시간을 끌게 하고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뒤
영의정 김류 등은 그곳이 지리적으로 불리하다는 이유를 대며
야음을 틈타 강화도로 옮겨갈 것을 역설했다.
다음 날 15일 새벽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빠져나와 강화도로 떠나려 했지만
폭설로 인해 말을 움직일 수가 없어 포기했다. 인조가 남한산성을 남게 되자
한성 주변의 관리들은 각기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그곳으로 집결하였고
이에 총 병력은 약 1만 3천이 되었다. 이때 성안에 있는 식량은
양곡 1만 4천3백 석, 장 220항아리 정도로 약 50일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한편 청군은 12월 16일 남한산성에 당도했고
청 태종은 1월 1일 군사를 20만으로 늘려 남한산성 밑 탄천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후 별다른 싸움 없이 40여 일이 경과하자 성안의 식량은 떨어지고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조선군들은 싸움에서 모두 대패하여 패주하고
명에 청한 원군도 내부 사정으로 오지 못했다.
이리하여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절망적인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청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더 이상 해결책을 모색할 수 없게 되자
대신들 사이에서 다시 강화론이 대두되었다.
대신들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갈라져 다시 한 번 심한 논쟁을 벌였고
주전파가 난국을 타개할 방책을 내놓지 못하자
주화파의 주장에 따라 청군 진영에 화의를 청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최명길이 국서를 작성하고
좌의정 홍서봉, 호조판서 김신국 등을 청군 진영에 보냈다.
그러나 청 태종은 조선 국왕이 직접 성 밖으로 나와 항복을 맹세하고
척화 주모자 3인을 결박여 보내라고 하였다.
내용이 너무 가당찮다는 생각으로
인조와 대신들은 청의 재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가운데
주전론과 주화론이 팽팽하게 맞서 다시 수일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있자 성안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화도에서 포로가 된 윤방과 한홍일 등의 장계가 전달되자
인조는 별수 없이 항복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의 항복이 목전에 다가오자
예조판서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 등은 청과의 화의를 반대하며
자결을 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인조가 출성하여 항복할 결심을 굳히자
홍서봉, 최명길, 김신국 등은 적진을 왕래하며
조선 측의 항복 조건을 제시하고 청군 진영에서는
용골대, 마부대 등의 사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회담에 응하였다.
조약서에 명시된 청의 요구 사항은 총 열한 가지였다.
청에 대해 신하의 예를 갖추는 한편
명과의 교호를 끊을 것
청에 물자 및 군사를 지원할 것
청에 적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말고 공물을 보낼 것 등이었다.
조약이 체결되자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서문으로 나가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춘 뒤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는데
이 관계는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이 일본에게 패할 때까지 계속된다.
청은 철군하면서 소현세자, 빈궁,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을 볼모로 삼고
미리 유치하였던 척화론자 오달제, 윤집, 홍익한을 심양으로 끌고 갔다.
청군은 조선에서 철수하는 도중에 단동의 동강진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때 청 태종은 패륵 아탁과 항복한 명나라 장수 공유덕 등으로 하여금
병선을 만들게 하였으며 조선 측에서도 황해도의 병선을 지원했다.
또한 항복 조건에 따라 평안병사 유림을 수장으로 하고
의주부윤 임경업을 부장으로 하여 청군을 도와 싸우도록 하였다.
이 싸움에서 임경업은 척후장 김여기를 몰래 보내어
명제독 심세괴에게 피하도록 알렸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싸우다가 끝내 전사하였다.
청군에 의한 군사적 피해 못지않게 민간의 피해도 막심했다.
청군은 도적질을 일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철군하면서
60만에 달하는 조선인들을 끌고 갔는데 이들의 목적은
끌고 간 여자들을 돈을 받고 조선에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끌려간 여자들이 대부분 빈민 출신이라 속가를 낼만한 입장이 못 되었다.
그러나 비싼 값을 치르고 아내와 딸을 되찾아오는 경우도 꽤나 많았는데
되돌아온 환향녀들이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혼 문제가 정치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병자호란을 통해 이러한 굴욕적인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은
당시의 집권당인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대명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광해군의 실리주의 노선을 제대로 살렸더라면
변란은 물론이고 그동안 중국과 맺어오던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국력을 신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노라 삼각산아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야
고국산천(故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時節)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시절(時節) : 여기서는 시세(時勢), 시국(時局)의 뜻.
삼각산(三角山) :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의 옛 이름. 보통 북한산이라 부른다.
백운(白雲), 인수(仁壽), 국망(國望)의 세 봉우리가 빼어나서 이렇게 불린다.
한강수(漢江水) : 한강의 물줄기, 곧 한강.
고국산천(故國山川) : 고국(故國)의 산과 물. 조상 적부터 살아온 고향인 나라. 祖國山河.
하랴마는 : 하겠는가마는. 물론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하 수상(殊常)하니 : 하도 별스러우니. 하도 보통 때와 다르니. 뒤숭숭하니.
올동말동 : 올지 어떨지.
인조(仁祖) 14년 병자호란 때 작자는 끝까지 청나라를 대항해 싸울 것을
주장하던 '주전파'였으나, '주화파' 최명길 등의 주장으로
전란 후에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볼모로 잡혀가게 되었는데
그 때의 심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출전 : <청구영언> <고금가곡>
작자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서 척화항전(斥和抗戰)을 주장한 사람이다.
그러나 화전(和戰)이 성립되자 파직(罷職)되고,
1639년(인조 17) 청나라가 명을 치기 위하여 출병을 요구하였을 때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청의 노여움을 사
1640년 심양(瀋陽)에 잡혀가 1642년에 풀려났으나,
당시 청과 밀무역(密貿易)을 하던 이계(李桂)의 무고로 심양에 다시 잡혀갔다가
1645년에야 풀려나 귀국했다.
이 시조는 제1차로 잡혀갈 때의 作으로 전한다.
초장의 ‘삼각산’을 ‘화산(華山)’, ‘한강수’를 ‘한수(漢水)’라 했는데,
조선 초기의 악장 <화산별곡> <용비어천가>에도 쓰인
왕도(王都) 한양을 대표하는 산천이다.
패전국의 전범자(戰犯者)로 승전국(勝戰國)에 끌려가는 지은이로서
부르지 않을 수 없던 간절한 이름이었다. 중장, 종장은 고국 산천에 대한 애착과
귀국에 대한 얼마쯤의 회의가 서정되어 있다.
그는 처음부터 대청 감정(對淸感情)에 결연(決然)하였으므로
불굴의 저항과 꿋꿋한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가 지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도 그의 이러한 저항의식은 대단했다.
남팔(南八)아 남아(男兒)이 사(死)이언정 불가이불의굴의(不可以不義屈矣)여다.
웃고 대답하되 공(公)이 유언 감불사(有言敢不死)아
천고(千古)에 눈물 진 영웅이 몇몇인 줄 알리오. <청구영언>
애국충정이 끓어 넘치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는 시조이다.
지은이 자신의 체험적 상황이 단적으로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초장의 적절한 도치법이 의미의 강조와 운율의 신선미를 한껏 돋우었다.
김상헌 글씨
□ 강직한 의기로 나라의 절개를 지키다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1652)
국가를 경영하는 데는 상황에 따른 유연한 판단력과 결정도 필요하지만,
도리를 중히 여기며 이를 현실 정치로 끝까지 실현하고자 하는 강직함도 필요하다.
병자호란 때 화의를 주장한 주화파에 맞서 의리를 중요시하며
끝까지 척화를 내세워 절개를 굳건히 지킨 이가 있으니 김상헌이 바로 그 사람이다.
김상헌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이다.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김극효(金克孝)이고, 형은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다.
어린 시절 윤근수(尹根壽)에게서 수학했다.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급제해 부수찬, 좌랑, 부교리를 지내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 문과중시에 급제해 사가독서한 뒤,
교리, 응교, 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1615년(광해군 7)에 지은
〈공성왕후책봉고명사은전문〉이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
김상헌은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 등에는 반대하면서도 인조반정에는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대사헌, 대사성, 대제학을 거쳐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다 인조가 청에 항복하자 파직되었다.
1639년(인조 17) 삼전도비를 부쉈다는 혐의를 받고
청나라에 압송되었다가 6년 만에 풀려났으며, 귀국 후 좌의정에 올랐다.
사후에 서인 정권이 유지되면서 절개를 지킨 대로(大老)로 추앙받았다.
1) 강직한 언론 활동으로 출사와 파직을 반복하다
김상헌은 안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이황의 문인이었던 윤근수에게서 수학했다.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여 한번 품은 뜻은 굽힐 줄을 몰랐다.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가서도 출사와 파직을 반복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광해군 대에 동부승지에 오른 김상헌은 당시 실세 정인홍(鄭仁弘)이
자기의 스승 조식(曺植)을 옹호하고 퇴계를 규탄하는 상소인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를 올리자 이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신들이 삼가 우찬성 정인홍의 차자를 보건대, 선정신(先正臣) 이황이 일찍이
자기 스승인 고(故) 징사(徵士) 조식의 병통을 논한 일과
고 징사 성운(成運)을 단지 ‘청은(淸隱)’이라고만 칭한 것을 가지고,
화를 내면서 당치 않게 헐뜯었다는 등의 말을 하는가 하면
이말 저말을 주워 모아 한껏 지척을 했고,
선정신, 이언적까지 언급하면서 그를 마치 원수 보듯 했습니다.
아, 인홍은 그의 스승을 추존하려다가 저도 모르게 분에 못 이겨
말을 함부로 한 나머지, 도리어 그 스승의 수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광해군일기》 권40, 광해군 3년 4월 8일
정인홍의 차자는 선현을 모함한 사특한 글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사람은 저마다의 소견이 있는 법이니, 굳이 몰아세워
억지로 자기에게 부화뇌동하게 할 것은 아니다.”라며 자신의 정치적 세력 기반인
대북파의 정인홍 편을 들어 상소를 못마땅해 했고, 김상헌은 이를 알고 사직했다.
후에도 출사와 파직을 반복했는데,
1615년(광해 7)에는 사과(司果)로서 작성한 공성왕후(恭聖王后)의 책봉 고명(誥命)에 대한
사은 전문에 “어머니가 자식으로 말미암아 귀해짐을 생각한다.”,
“삼가 허물을 보면 어진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는 데 관계된다.”는 등의 말이
신하가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라 하여 관직을 삭탈당하기도 했다.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 사건이 일어나자
김상헌은 의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폐모론을 격렬히 반대하면서 낙향했다.
김상헌은 김류, 최명길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조반정에도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군주를 폐출하고 새 임금을 세우는 일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서인은 인조반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공서(功西)와
참여하지 않은 청서로 나누어졌다. 김상헌은 청서파의 영수 격이었다.
공서와 청서의 대립은 인조 7년을 전후해 김류의 노서(老西)와
최명길의 소서(少西)로 나누어졌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 다시 조정 신료들은
척화파와 주화파로 나뉘어졌으며, 김상헌은 대표적인 척화파였다.
한편 명분과 도리를 중시하는 김상헌은 인조의 아버지 정원부원군의
추숭 문제가 거론되었을 때도 대의에 어긋나는 일이라면서 반대를 했다.
전하께서 조정의 의논을 물리치시고 추숭하는 일에 마음을 굳혀
기어이 전례를 거행하고자 하시니,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대원군의 신주를 올려 부(祔)하고
성종 대왕의 구묘(舊廟)를 체천해 철거해야 합니다.
대원군은 전하의 친(親)이며, 성종의 신하이며 자손입니다.
올려서는 안 될 신하와 자손을 올리는 일과 조천(祧遷)해서는 안 될
임금과 할아버지를 철훼(撤毁)하는 일이야말로
등급을 폐기하고 명분을 무너뜨린 것이니,
묘사(廟社)의 변치고 어느 것이 이것보다 더 크겠습니까.
《인조실록》 권26, 인조 10년 2월 18일
대사헌으로 재직하면서는
“첫째 사사로운 욕심을 끊어 성상의 옥체를 보양할 것,
둘째 효과 있는 은덕을 실천하기에 힘써서 하늘의 경계에 조심할 것,
셋째 언로(言路)를 넓혀 듣고 보는 바를 널리 구할 것,
넷째 궁궐의 드나드는 자를 엄히 단속할 것,
다섯째 번잡한 일을 덜어 백성들의 수고를 늦추어 줄 것,
여섯째 훌륭한 장수를 가려 뽑아 변경의 수비를 튼튼히 할 것”의
여섯 조목을 상세하게 들어 왕의 정사에 대해 꼼꼼하게 건의하기도 했다.
2) 선비의 도리로 화의를 반대하다
광해군 대에는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정책을 취해
중국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후금과의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국면은 크게 바뀌었다. 새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대북 정권의 중립정책을 버리고
친명반후금(親明反後金)정책을 천명했다. 그리하여 후금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자 후금과 조선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마침내 명나라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조선의 후방 공격을 우려하고 있던 후금은
1627년(인조 5) 1월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했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평양에 도착한 후금군은 화의를 청해 왔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란을 갔고
후금의 사신이 다시 와서 화의를 청하니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강화에 응했다.
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조선에서는 화의를 주도한 주화파들을
비난하는 상소가 잇달았고, 후금과의 국교를 단절하자는 논의가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세는 조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 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사신을 보내
‘군신의 예’를 다하라고 통보해 왔다.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다시 사신을 죽여 조선의 뜻을 알려야 한다는 척화파와
힘이 부족하니 화의를 해야 한다는 주화파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인조가 우유부단하게 왔다갔다 하는 사이
청이 요구한 최후의 시한을 넘겼고 급기야 병자호란이 터지고야 말았다.
미처 강화로 피란하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고,
청나라에서는 군사력을 앞세워 화친을 요구했다.
그러나 김상헌은 여전히 ‘명분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며
윤집, 오달제, 정온(鄭蘊), 홍익한(洪翼漢)등과 함께 격렬하게 척화를 주장했다.
인조 역시 주전론에 마음이 기울었으나
날은 춥고 성은 점점 고립되어 결국 항복을 결정했다.
대표적인 주화파였던 최명길이 항복 문서를 작성할 때
예조 판서였던 김상헌은 뛰어들어 국서를 갈기갈기 찢고 통곡했다.
그리고 인조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명분이 일단 정해진 뒤에는 적이 반드시 우리에게 군신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일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성문을 나서게 되면
또한 북쪽으로 행차하게 되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군신이 전하를 위하는 계책이 잘못되었습니다. 진실로 의논하는 자의 말과 같이
왕과 세자가 마침내 겹겹이 포위된 곳에서 빠져나오게만 된다면,
신 또한 어찌 감히 망령되게 소견을 진달하겠습니까.
국서를 찢어 이미 사죄(死罪)를 범했으니,
먼저 신을 주벌하고 다시 더 깊이 생각하소서.
신이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는 압니다.
그러나 한번 허락한 뒤에는 모두 저들이 조종하게 될테니,
아무리 성에서 나가려 하지 않더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군사가 성 밑에까지 이르고서 그 나라와 임금이 보존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진 무제(晋武帝)나 송 태조(宋太祖)도 제국(諸國)을 후하게 대우했으나
마침내는 사로잡거나 멸망시켰는데,
정강(靖康)의 일에 이르러서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당시의 제신(諸臣)들도 나가서 금의 왕을 보면 생령을 보전하고
종사를 편안하게 한다는 것으로 말을 했지만, 급기야 사막에 잡혀가게 되자
변경에서 죽지 못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면
전하께서 아무리 후회하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인조실록》 권34, 인조 15년 1월 18일
인조는 김상헌의 말을 듣고 한참 동안이나 탄식하면서 말했다.
“위로는 종사를 위하고 아래로는 부형과 백관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하는 것이다.
경의 말이 정대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나
실로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한스러운 것은 일찍 죽지 못하고 오늘날의 일을 보게 된 것뿐이다.” 하니
주변의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소현세자 또한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인조가 청의 황제 앞에 무릎 꿇고 항복하자, 김상헌은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진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병자록(丙子錄)》은 그 일을 이렇게 전한다.
어떤 사람이 와서 예조 판서 김상헌이 스스로 목을 매어
거의 죽게 되었다고 알려 주기에 급히 가 보니
얼굴빛이 죽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달려가 목맨 것을 풀었는데 얼마 후 다시
가죽 허리띠로 목을 매는 것이 보이기에 다시 말렸다.
간신히 사람을 붙여 자결할 수 없게 한 후에야 마음을 놓았고
이튿날 척화를 주장한 신하들을 오랑캐 진영에 보내기 위한 논의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자결할 마음을 버렸다.
김상헌이 거짓으로 죽으려 하는 체했다는 말이 있지만
이것은 김상헌의 인품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나만갑, 《병자록》
척화신으로 자신이 잡혀가려고 자결을 그만두었지만,
청나라에는 젊은 척화파 윤집과 오달제 등이 가게 되었다.
3) 청나라도 인정한 절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한 후
김상헌은 울분을 삼키며 안동으로 내려가 학가산 아래 칩거했다.
그러나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까지 닫은 것은 아니었다.
1639년(인조 17)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을 요구해 오자
김상헌은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근래 또 떠도는 소문을 듣건대 조정에서 북사(北使)의 말에 따라
장차 5,000명의 군병을 징발해 심양을 도와 대명(大明)을 침범한다고 합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놀랍고 의심하는 마음이 정해지지 못한 채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죽고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반역을 따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 어떤 사람이
“원수를 도와 제 부모를 친 사람이 있다.”고 아뢴다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유사(有司)에게 다스리도록 명하실 것이며,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로 자신을 해명한다 할지라도
전하께서는 반드시 왕법(王法)을 시행하실 것이니, 이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리입니다.
《인조실록》 권39, 인조 17년 12월 26일
싸우다가 안 되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나라가 망하더라도 명의를 지켜야 나라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러나 김상헌은 삼전도비를 부쉈다는 혐의를 받고 청나라에 끌려가게 되었다.
그때 그가 청으로 가면서 지었던 시조가 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냐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고국을 떠나면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착잡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예순아홉 노구(老軀)의 몸으로 끌려간 김상헌을 청나라 사신 용골대가 심문했다.
“정축년의 난에 국왕이 성을 나왔는데도 유독 청국을 섬길 수가 없다 했고,
또 임금을 따라 성을 나오려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무슨 의도였는가?”
용골대의 물음에 김상헌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말했다.
“내 어찌 우리 임금을 따르려 하지 않았겠는가. 다만 노병으로 따르지 못했을 뿐이다.”
용골대가 다시 물었다.
“주사(舟師)를 징발할 적에 어찌하여 저지했는가?”
이네 김상헌은 “내가 내 뜻을 지키고, 내가 나의 임금에게 고했는데,
국가에서 충언을 채용하지 않았다.
그 일이 다른 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굳이 듣고자 하는가?”
용골대를 비롯한 청인들이 감탄했다.
“조선 사람은 우물쭈물 말하는데 이 사람은
대답이 매우 명쾌하니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김상헌이 심양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는 마침 주화파의 대표인
최명길도 명나라와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갇혀 있을 때였다.
조선 땅에서는 척화파와 주화파로 서로 대립했던 두 사람은
이때 시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을 이해했다.
최명길은 김상헌에게
“그대의 마음은 돌과 같아서 마침내 구르기가 어렵고,
나의 도는 가락지 같아서 시의에 따라 믿음이 바뀐다.”는
시를 보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멀리서 그리워한 지 몇 해이던가.
오늘에야 기쁘게 서로 만났네.
스스로 돌아보면 둔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데
그래도 너그러운 도량으로 용납했네.
주옥같은 말들은 하나하나 통하고
마음의 막이 한 겹 두 겹 걷히기에
좋은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참으로 도(道)의 기운이 짙어만 가네.
최명길의 시에 김상헌은 다음과 같이 차운(次韻)했다.
세상사란 본래 어긋남이 많지만
인생에는 만남도 있다네.
어찌 반드시 득실을 비교할 필요가 있으리오.
다만 종용(慫慂)하게 있는 것이 옳도다.
술 떨어지고 돈도 부족한데
추위 누그러지자 취막(毳幕, 흉노의 천막)이 무겁게 여겨지네.
새로 지은 시를 번갈아 서로 화답하니
병든 눈에도 먹물 자국은 뚜렷이 보이도다.
적국의 감옥에서 같은 사형수의 입장이 되어 많은 시를 주고받으며,
서로 방법은 달랐으나 결국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는
다름이 없음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그저 이름을 내려는 사람이라고 의심했는데,
죽을 자리에서도 절개를 지키는 것을 보고 그 의리 있음을 믿게 되었으며,
김상헌도 최명길이 청나라의 감옥에서 끝내
굴복하지 않는 것을 보고 역시 충정을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본디 두 사람의 성향은 다르니
1644년(인조 22) 청나라가 북경을 함락한 후
이듬해 세자와 봉림대군들과 함께 돌아올 때 김상헌과 최명길은 역시 다른 모습을 보였다.
청의 장수 용골대는 그들을 돌려보내면서 황제가 있는 서쪽을 향해 절을 하라고 했다.
최명길은 김상헌을 끌어당기면서 함께 절하자고 했으나
김상헌은 허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절을 하지 않았다.
최명길만 4배를 하니 용골대는 김상헌을 노려보다 물러갔다.
때로 나라를 지킬 힘이 없는데도 의리만을 내세우며
척화를 주장한 척화파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청나라는 김상헌은 물론, 척화론자로 청에 잡혀간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의 굽히지 않는 절개를 보고
“조선을 정복할 수는 있어도 통치할 수는 없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그러니 왕이 항복을 하고도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주화파의 적절한 대응력에 더해
김상헌과 같은 척화파의 꼿꼿한 선비정신이 존재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김상헌의 《설고시첩》 병자호란당시 척화를 주장하다가 심양에 볼모로 잡혀간
김상헌이 볼모 생활을 하는 동안에 지은 한문 기행 시첩이다.
심양에 함께 잡혀갔던 조한영(曺漢英, 1601~1637년)이 편찬했다.
4) 대로로 추앙을 받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 김상헌은 인조에게 좌의정과 영돈녕부사 등을 제수받았으나
곧 나이가 들어 사직을 고하고 낙향해 은거했다.
실록에는 청나라 경중명(耿仲明)이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김상헌의 안부를 묻고는 칭찬하기를
“동국에는 김 상서(金尙書)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했다.
또 명나라 예부 상서 이사성(李思誠)은 이자성(李自成)의 난리에 절개를 굽혀
각형(脚刑)을 면치 못했는데, 그가 우리나라 역관을 만나서
“김 상서는 별고 없는가? 나는 지금까지 구차하게 살아남아 있다.”면서,
자기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효종이 등극한 뒤 서인의 명분론이 우세해지면서
김상헌은 대로로 추앙받았으며, 좌의정에 다시 제수되기도 했다.
그의 졸기에는 그의 성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됨이 바르고 강직했으며 남달리 주관이 뚜렷했다.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독실했고, 안색을 바루고 조정에 선 것이
거의 50년이 되었는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말을 다하여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며
말이 쓰이지 않으면 번번이 사직하고 물러갔다.
악인을 보면 장차 자기 몸을 더럽힐까 여기듯이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공경했고 어렵게 여겼다.
김류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숙도를 만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등이 땀에 젖는다.” 했다.
《효종실록》 권8, 효종 3년 6월 25일
조선 후기 문예부흥을 이끌었던 정조가 김상헌에 대해
내린 평가도 주목할 만하다. 정조는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청음(淸陰)의 바른 도학과 높은 절의를 우리나라에서 존경할 뿐 아니라
청나라 사람들도 공경하고 복종했으니 문장은 나머지일 뿐이다.
내가 그를 말할 때는 고상(故相)이라 하지 않고 선정(先正)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조, 《홍재전서》
선정(先正)이라는 용어는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
문묘에 배향된 몇몇 사람에게만 선별적으로 쓰는 학자로서의 최고 존칭으로
학문에 뛰어났던 정조가 김상헌의 학문을 알아보고 내린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눈앞의 이익을 버리고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걸고 절개를 지킨다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손수 지은 묘비명에 그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지성은 금석에 맹서했고
대의는 일월처럼 걸렸네.
천지가 굽어보고 귀신도 알고 있네.
옛것에 합하기를 바라다가
오늘날 도리어 어그러졌구나.
아, 백 년 후에 사람들
내 마음을 알겠구나.
그의 바람처럼 우암 송시열의 주자학 지상주의가
노론의 집권 명분이 되면서 김상헌의 절개는 추앙받았으며
그의 가문 또한 세도가문으로 오래 영달했다.
김상헌 글씨
□ 실록으로 본 김상헌(金尙憲, 1570∼1652)
◯ 선조수정실록 39권, 선조 38년 8월 1일 1605년
김상헌을 경성 판관으로 삼다
김상헌(金尙憲)을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삼았다.
처음 상헌이 전랑(銓郞)으로 있을 때 이조 참판 기자헌이 유영경을
대사헌으로 의망하려 하자 상헌이 이를 힘써 막았다. 이 때문에 영경의 당이
깊이 유감을 품게 되었다. 얼마 있다가 영경이 국정(國政)을 훔쳐 잡자 이를 인연하여
때를 보아 복수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상헌을 배척하여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삼았다가 파직되어 돌아오자마자 바로 경성 판관으로 보임시켰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모두 분해하며 탄식하였다. 《실록》을 살피건대,
"상헌이 일찍이 전랑이 되었을 때 일을 임의로 처리하니,
자헌이 영경을 끌어들여 응견(鷹犬)을 삼으려 하였는데, 상헌에게 저지당했다."하였으니,
그 강직하고 방정하여 흔들리지 않았던 것을 여기에서 또한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에 미움을 받은 것이다. 《실록》에 또,
"좌의정 기자헌은 성품이 너그럽고 일찍부터 덕망을 지니고 있었다."하였는데,
자헌이 《실록》을 감수할 때 자기 속셈대로 감행하면서
이토록 조금도 거리낌없이 하였으니 주벌(誅伐)해도 모자라다 하겠다.
◯ 광해군일기[중초본] 40권, 광해 3년 4월 8일 1611년
동부승지 김상헌 등이 정인홍의 차자는 선현을 무함한 사특한 글이라고 아뢰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우찬성 정인홍의 차자를 보건대,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일찍이 자기 스승인 고(故) 징사(徵士) 조식(曺植)의 병통을
논한 일과 고 징사 성운(成運)을 단지 ‘청은(淸隱)’이라고만 칭한 것을 가지고,
화를 내면서 당치 않게 헐뜯었다는 등의 말을 하는가 하면 이말 저말을 주워모아 한껏
지척을 하였고, 선정신 이언적(李彦迪)까지 언급하면서 그를 마치 원수 보듯 하였습니다.
아, 인홍은 그의 스승을 추존하려다가 저도 모르게 분에 못이겨 말을 함부로 한 나머지,
도리어 그 스승의 수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들이 일찍이 듣건대,
이황은 조식과 더불어 비록 왕래하며 상종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소절(素節)을 허여하고 그의 훌륭한 점을 취한 것이 자못 깊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서찰 가운데 ‘내가 그와 더불어 신교(神交)를 나눠온 지 오래이다.’ 하였고,
또 ‘평소 흠모하기를 깊이 한 바이다.’ 하였고,
또 ‘오늘날 남방(南方)의 고사(高士)로는 유독 이 한 사람을 꼽는다.’ 하였으며,
성운에 대해서도 ‘청은(淸隱)이 훌륭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심이 일도록 하는데,
지금 사람들이 그의 고매한 점을 그다지 알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점은 이황의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조식 또한 일찍이 이황에게 서신을 보내
‘평소 존경해 온 마음이 하늘에 있는 북두칠성만큼 크다.’고 하였습니다.
조식이 이황을 성심으로 흠모한 정도가 이만큼 깊었는데도,
인홍은 그만 ‘이황이 엉뚱하게 헐뜯었다.’고 하면서,
이구(李覯)와 정숙우(鄭叔友)가 맹자(孟子)를 헐뜯고032)
양웅(揚雄)이 안자(顔子)를 논했던 일033) 에다 비하기까지 하였으니,
누가 봐도 심하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노장(老莊) 사상이 학문의 병통이 되었고
중도(中道)로서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한 것은, 그의 치우친 점과 병통이 되는 점을
논한 것에 불과할 따름이지, 조식이 벼슬을 하지 않은 일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대현(大賢)으로 비록 성인(聖人)에 가까운 백이(伯夷)와 유하혜(柳下惠) 같은
사람일지라도 오히려 편협하고 공순치 못한 병통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대체로 중용(中庸)의 지극한 덕은 성인이 아니고서는 잘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선유(先儒)가 백이를 칭하여 ‘조금은 노자(老子)와 비슷하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염계(濂溪)의 졸부(拙賦)034) 는 황노(黃老)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단지
그 일단(一段)의 근사한 점을 말한 것으로서, 엉뚱하게 헐뜯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홍이, 만일 이황이 그의 스승과 더불어 혹 서로 좋게 지내지 못한 점이
있었던 것을 이유로 이렇게 흡족하지 못한 얘기를 하였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겠으나, 그는 본정(本情) 이외에 스스로 허다한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 차자 중에 이른바 ‘식견이 투철하지 못했다.’느니,
‘사의(私意)가 덮어 가리웠다.’느니 한 것은, 정작 자신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종묘에 올려 배향하는 전례(典禮)로 말하자면, 바로 일국(一國)의 공론(公論)이자
공론(共論)인 것입니다. 유선(儒先)이 일생동안 갈고 닦은 조예의 실상에 대해서는,
신들이 모두 말학(末學)으로서 비록 쉽게 논변할 수 없는 바이나,
그 유풍(流風)과 유운(遺韻)은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이목에 남아 있습니다.
세속의 풍습을 크게 변화시키고 선비의 추향(趨向)을 일신하여 안정시켰으니,
이치를 밝히고 도를 호위한 공적이 동방의 주자(朱子)로 칭송을 받고 있는 것도
진정 부끄럽지 않은 일입니다. 위로 조정의 벼슬아치부터 아래로 초야의 선비들에
이르기까지 다들 그의 덕이 숭상할 만하고 그의 공이 인정할 만하다고 하여
종사(從祀)하기를 청한 지가 40년이 넘습니다. 우리 성상께서 즉위하심에 이르러
시원스레 공의를 따라 서둘러 사전(祀典)을 행하셨으니,
이야말로 세상에 보기 드문 성대한 일이자, 사문(斯文)의 커다란 행복입니다.
그런데 인홍이 그만 감히 저 혼자만의 치우친 소견으로 앞장서서 비난을 하여
위로 성상을 번독스럽게까지 하였으니, 신들은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대체로 그가 한 말을 살펴보건대, 결코 화평한 심기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여염에서 다투어 따지는 사람처럼 화난 김에 분풀이를 하고자 다른 일까지 들먹거렸습니다.
군자(君子)로서의 다툼은 이와 같아서는 안 될 듯싶습니다. 그 마음에서 나와
그 정사를 해치는 법이니, 한쪽에 치우친 말이 어찌 몹시 밉살스럽지 아니하겠습니까.
신들이 처음에 한마디 변론하는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삼가 생각건대,
전하의 성학이 고명하여 능히 통찰하시고 명확히 분변하시어, 더욱 존상(尊尙)하는
도리를 다하심으로써 호오(好惡)의 바름을 보이실 것이라고 예상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봉차(封箚)를 들인 지 벌써 열흘이 지났건만 명확한 분부가 아직껏 내리지 않고
있으니, 사림(士林)은 마음이 아프고 여정(輿情)은 답답하게 여깁니다. 신들이 외람스레
근밀한 자리에 있어, 감히 끝까지 잠자코 있을 수 없으므로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하였다.
〈동부승지 김상헌의 글이다. 왕이 그 점을 알고 못마땅한 뜻을 갖자,
상헌이 즉시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상이 답하기를,
"사람은 저마다의 소견이 있는 법이니,
굳이 몰아세워 억지로 자기에게 부화뇌동하게 할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 차자를 아직 내리지 않았는데 정원의 계사는 너무 이른 것이 아닌가."하였다.
【좌부승지 오윤겸, 동부승지 김상헌이 함께 이 계사를 올렸는데
상헌이 계사를 기초(起草)하였다. 왕이 그것을 알고서 크게 노하여 책망을 하려고
하였는데, 상헌이 유씨(柳氏)와 인척이 되는 까닭에 궁중으로부터 전해 듣고는
즉시 병을 이유로 사직하는 소를 올리니, 왕이 그를 체직시켰다. 】
[註 032] 이구(李覯)와 정숙우(鄭叔友)가 맹자(孟子)를 헐뜯고 : 이구는
송나라 남성(南城) 사람으로 자는 태백(泰伯), 호는 우강(盱江)이고,
정숙우는 정원(鄭原)을 가리킨다. 이들은 《상어(常語)》와 《예포절충(藝圃折衷)》을 지어
맹자를 헐뜯었다. 이를 비난한 내용이 《주자대전(朱子大全)》에 보인다.
[註 033]양웅(揚雄)이 안자(顔子)를 논했던 일 : 양웅은 한나라 성도(成都) 사람으로,
자는 자운(子雲)이다. 그의 저서인 《법언(法言)》 중에 안자(顔子)를 평론한 글이 있는데,
주자는 "양웅이, 안자를 마치 제 몸만을 아낀 흙덩이 같은 사람으로
그르쳐 놓았다."고 비난하였다. 《한서(漢書)》 권87.
[註 034]염계(濂溪)의 졸부(拙賦) : 염계는 북송의 학자 주돈이(周敦頤)의 호.
그는 처세에 있어 졸(拙)이 교(巧)보다는 우위에 드는 것을 논지로 글을 지었다.
《주원공집(周元公集)》 권2.
◯ 광해군일기[중초본] 155권, 광해 12년 8월 18일 계해 2번째기사 1620년
원접사 이이첨이 폐고된 인재들의 출사를 청하다
원접사 이이첨이 아뢰기를,
"중국 사신을 접대하고 응대하는 데에는 응수하는 말이 진실로 중요합니다. 해조는 지금
물력(物力)이 고갈된 것을 염려하지만, 신은 인재가 없는 것을 민망스럽게 여깁니다.
종사관 세 사람은 반드시 재주와 명망을 함께 갖추고 있어야
시문을 함께 지을 수 있으며 직무를 나누어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제술관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좋습니다.
유몽인(柳夢寅)은 문예(文藝)에 매우 뛰어난 사람으로서 지금 한산한 직책에 있으며,
홍서봉(洪瑞鳳)·김상헌(金尙憲)·장유(張維)·조위한(趙緯韓)·임숙영(任叔英)·김세렴(金世濂)등도
역시 한 시대의 뛰어난 인재로서 모두 일에 연루되어 폐고(廢錮)되어 있습니다.
유근(柳根)·이호민(李好閔) 같은 이는 모두 시문을 짓는 데 노련한 사람으로서
죄를 입어 아직 단죄되지 않은 채 벌써 몇 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폐고된 자를 출사시켜서 죄를 씻어 주어야 할 때를 당하여,
만약 특별히 죄를 용서하고 성과가 있도록 책임지우는 명이 없다면 장차 어떻게
이처럼 나라를 빛나게 하는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외람되이 사신을 영접하는 직책을 띠게 되어 사직을 간절히 청하였지만
아직까지 체직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마땅히 규례에 구애됨이 없이 오직 일을
잘 해나갈 수 있는 방도만을 생각하여 뭇 인재를 수습하고
뭇 훌륭한 이들을 모으는 것이 참으로 시급한 일이기에 감히 이에 무릅쓰고 진달합니다.
참람된 죄는 참으로 면하기 어렵습니다만, 단지 성스럽고 밝은 세상에서
끝내 재주를 갖고도 버림을 받는 억울함이 없도록 하고자 합니다.
삼가 성상께서 행여 용납하여 살펴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마땅히 헤아려서 처리하겠다."하였다.
◯ 인조실록 10권, 인조 3년 9월 7일 1625년
대사헌 김상헌이 언로를 넓힐 것 등을 건의하다
대사헌 김상헌(金尙憲)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지난번 사헌부의 동료들과 함께 의논하여 차자를 올렸었는데
문장이 거칠고 내용이 잡스러워 전하의 마음을 번거롭게 해드렸습니다.
삼가 견책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 질병이 발생하여 감히 사직 단자를 올렸는데
전하께서는 물러가도록 허락해 주지 않으시고 도리어 지극한 총애를 내려주시어
무거운 임무를 맡겨 구책(驅策)에 대비하게 하셨으니, 신이 지극히 미련한 사람이긴 하지만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저 정성을 다하여 성상의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길을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진실로 마음속에 품은 것이 있으면 어찌 감히
다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살펴 받아들이신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신이 삼가 천상(天象)의 경계를 살펴보니 갈수록 더욱 심해집니다.
백성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거짓된 소문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예측할 수 없는
변란이 아침이 아니면 저녁에 일어날 것만 같아
대소 신료들이 허둥지둥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구중 궁궐에 단정히 앉아 계시므로
그런 것을 철저히 살피지 못하십니다. 때로 경연에 나아가시면
신하들을 엄하게 위압하므로 임금의 권위는 날로 높아지는 데 반하여
신하들의 사기는 날로 위축되어 다만 망령되이 실언(失言)을 하여
성상의 뜻을 거스리게 될까만을 두려워한 나머지 혀를 깨물고 나아갔다가
입을 다물고 물러갑니다. 간혹 한두 마디 진계하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실속 없는 허식으로 책임만 메우려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어찌 안위와 존망의 계획에 대해 깊이 있게 의논하는 것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아, 오늘날의 형세는 참으로 위태롭고 오늘날의 사정은 진실로 답답하기만 합니다.
전하께서 일찍 깨달으시어 한번 크게 경장(更張)할 것을 시도하지 않으시면
국가의 화가 곧 닥쳐 올까 두렵습니다. 대각의 신하들은 의기가 저상되어
모두 앞다투어 인피(引避)하였고, 대신들은 자리에 편안치 못하고 오래도록 물러갈 뜻을
생각하고 있고, 훈신들은 위태롭고 두렵게 여겨 서운하게 여기는 자들이 많으니,
초야에 있는 선비 가운데 강개한 마음으로 세상을 걱정하여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하여 순절할 자가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백성들의 부역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인데도 도리어 원망을 윗사람에게 돌리는 자가 많으며, 간사하게 속이고
이익을 탐내어 주인을 배반하고 세력 있는 자에게 투탁(投託)하는 자와
죄진 집안의 뜻을 잃은 족속으로 난을 다행하게 여기는 무리들이 또한 수없이 많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무엇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으십니까?
다행히 하늘이 전하를 사랑하여 도와주심을 힘입어 경고하는 부지런함을 늦추지 않고
자상하게 타일러 주는 것과 다름없이 합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보통으로 여기시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시는 것 같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이 전하를 인애하는 뜻에
부합되는 처사이겠습니까. 신은 먼저 하늘이 전하를 사랑하여 도와주심이
언제나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린 뒤에 전하께서
하늘의 도리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과거에 광해(光海)가 덕을 상실하여 윤리(倫理)를 무너뜨리고
간신(諫臣)과 보상(輔相)을 내쫓아 귀양 보냈으며 온 나라에 포학한 독을 뿌렸으므로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가 드높은 상황은 도탄 속에 빠진 것보다도 더 참혹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늘이 진노하여 천명을 끊어버리고 덕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시어
신기(神器)061) 를 전하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전하께서 천명을 받으신 초두에
모든 것을 일제히 바른 데로 돌이켰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기뻐하였고
따라서 하늘의 뜻에 순응할 수 있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오직 이를 게을리하지 마시고
날로 새롭고 또 새롭게 하신다면
치평(治平)을 이루실 시기는 날짜를 세면서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정치를 하심에 있어 간혹 사람들의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으므로
하늘이 역적 이괄(李适)의 변란을 발생시켜 전하로 하여금 마음을 움직이고
성품을 강인하게 하여 길이 나라를 보존할 계책을 생각하게 했는데,
전하께서는 도성으로 돌아오신 뒤로 의지와 사려가 점차 해이해져 조정에서 하는 일이
날로 달라지고 달로 변경되어 이제는 거의 수습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전하께서 바른 말을 듣기 싫어하심에 따라 상하의 의견이 막히게 된 데서
연유된 것으로, 상하의 의견이 막히면 공도(公道)가 시행되지 않는 것입니다.
정치의 본원인 조정이 이와 같은데 백성들이 어떻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백성이 편안하지 못한 데에서 하늘의 뜻을 점칠 수 있는 것이니,
태백성과 형혹성이 나타나고 있는 까닭에 대해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습니다.
전하께서 지금 도모하여 고치지 않으신다면 하늘도 전하를 버리고
끝까지 도와주지 않을 것이니 전하께서는 또다시 무엇을 믿고 자립할 수 있겠으며
무엇으로 위로 종묘의 신령을 위로해 드릴 수 있겠으며,
무엇으로 중흥한 초지(初志)를 펼 수 있겠으며, 무엇으로 천하 후세에 변명하시겠습니까.
신은 주야로 생각하느라 간장(肝腸)이 찢어질 듯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순응하는 도리가
어찌 다른 데 있겠습니까. 인심에 순응하는 것이 바로 하늘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오늘부터 통렬하게 자책하여 한 마디 말, 한 가지 일에 대한 허물부터
모두 조목조목 기록하고 빨리 자신에게 죄를 돌리는 교서를 내려 깊이
뉘우치는 단서를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교서만 내릴 것이 아니라 바로 실천하여야 하며
후회만 할 뿐 아니라 바로 고쳐야 하고, 이미 잘못인 것을 알았으면
더러운 것을 물에 씻어버리듯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금방 명했다가 금방 환수하는 것을
혐의로 여기지 말고 또 금방 시행했다가 금방 중지하는 것을
의심쩍게 여기지도 말아서 조금도 지체하거나 인색한 뜻이 없으면
그로 인해 성덕은 실로 허물이 없었던 처음보다 더 낫게 될 것입니다.
또 직언을 구하는 교지를 내려 가까이는 좌우에서 보필하는 신하에서부터
멀리는 초야에서 나무하고 꼴베는 무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할 말을 다하게 하여,
그 가운데 성상에게 보탬이 되고 다스리는 방도에 도움이 있는 것은 채택하여 시행하고,
혹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성심(誠心)을 열어 보여
성상의 뜻이 어느 곳에 있는가를 환히 알게 할 것이며,
망령되어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 있을지라도 아울러 너그럽게 용서하고 죄주지 마소서.
그리하여 간하는 말을 받아들여 허물을 고치는 아름다움을 극진히 한다면
언로가 넓어지고 공도가 행해질 것입니다. 공도가 행해지면 인심이 기뻐하게 될 것이니,
인심이 기뻐하는데도 하늘이 순응하지 않는다는 말은 신이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어찌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는 것을 걱정하고 형혹성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잘못 전하는 말이 떠도는 것을 우려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요즈음 본부(本府)의 관원 가운데 외방에 나가 체류하는 자가 많고
서울에 있는 사람도 휴가를 청하는 자가 서로 잇따라서 사헌부가 텅 비게 되어
기상이 쓸쓸합니다. 그래서 신이 홀로 그릇된 소견을 올리게 되었으니 매우 황공스럽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우직함을 살펴 주시고 신의 참람스러움을 용서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내용을 잘 알았다. 경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차자의 사연을 유념하도록 하겠다."하였다.
◯ 인조실록 10권, 인조 3년 9월 19일 1625년
우의정 신흠 등이 변방의 방수가 단약한 점 등을 말하다
상이 조강에 자정전에서 《맹자》를 강하였다. 우의정 신흠이 아뢰기를,
"근래 서쪽 변방의 경보(警報)가 그다지 급박하지 않은데도
방수(防戍)가 단약하기 때문에 변방의 인정이 위태롭고 두렵게 여기고 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쟁은 사기를 위주로 하는 것인데 장사들의 사기가 저상된다면 참으로 염려스런 일이다."
하였다. 대사헌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무릇 전쟁은 군사의 다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적격자인 장수를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이흥은 겁이 많은데다가 무재(武才)가 없어서 심복하지 않는 장사들이 많습니다.
미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양장(良將)을 가려 뽑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희건(李希健)은 용맹이 삼군(三軍)에서 뛰어나 얻기 어려운 명장이라고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남이흥에게 대단한 과실이 없고 또 겨울철의 방수가 이미 절박해졌는데
체임을 논하는 것은 불가하다."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장수를 등용하는 방법은 위임하는 데 있습니다.
전일 정충신(鄭忠信)을 평안 병사로 삼고 이홍주(李弘胄)를 원수(元帥)로 삼자
사람들은 더러 그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의심했습니다.
만약 조정에서 십분 믿는 사람이 아니면 모두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니,
이런 처지에서 어떻게 공을 세울 수가 있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식견이 밝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 않았으면 모두 의심하는 법이다.
한 사람의 근거없는 말이 이리 저리 전해져 서로 의심하게 되는 것이니
이보다 더 해로운 것이 없다."하였다.
◯ 인조실록 16권, 인조 5년 5월 6일 1627년
동지 성절사 김상헌 등이 돌아오면서 그간의 사정을 치계하다
동지 성절사(冬至聖節使) 김상헌(金尙憲) 등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오다가
용만(龍灣)에 이르러 치계하기를,
"3월 9일 신들이 연경에서 본국이 적의 침입을 받았다는 것을 처음 듣고서
병부(兵部)에 정문(呈文)하기를 ‘우리 나라가 명조(明朝)를 위해 직분을 다하여
지난해 심하(深河)의 전쟁 때에는 오랑캐와 흔단을 맺었고
또 모진(毛鎭)이 우리 나라에 의지해 있으니, 오랑캐가 우리 나라를 씹어 삼키고 싶은
생각이야 어찌 잠시인들 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안으로 산해관과 영원(寧遠)의 형세를 꺼려 저희 소굴을 염려한 나머지
감히 분풀이할 생각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신추(新酋)가 즉위(卽位)하고 나서
저희 전 임금의 상(喪)으로 인해 약함을 보이며 까닭없이 우호를 요청하였었는데,
기회를 틈타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정예병을 모두 거느리고
동쪽으로 우리 나라를 침범하였으니, 이는 그 형세가 어찌
우리나라만을 삼키고 말려는 것이겠는가. 우리 나라가 지탱하지 못하게 되는 날이면
모진도 의지할 데가 없게 되고 모진이 의지할 데가 없게 되면
저들은 전력을 기울여 서쪽으로 명조를 침범하려 들 것이니 강역(疆域)의 근심이
오늘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실로 이때에 속히 한 부대의 군사를 보내어
빈 틈을 타서 그들의 소굴을 공격하여 적의 수미(首尾)를 견제(牽制)하게 하면
일거에 온 요동(遼東)을 수복할 수 있고 속국(屬國)도 보전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병가(兵家)의 놓칠 수 없는 기회이다.’ 하였습니다.
본부(本部)가 제본(題本)하여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오랑캐가 동쪽으로 조선을 침범하였으니 조선이 필시 지탱하지 못할 것이다.
조선이 꺾이게 된다면 오랑캐의 기세가 더욱 드세어질 것이니,
즉시 차관을 보내어 영원(寧遠)의 무신(撫臣)을 말하되 오랑캐가 멀리 노략을 떠나
소굴이 빈 틈을 타서 산해관·영원의 정예병을 선발하고 지략과 용맹이 있는 장수를 골라
적의 소굴을 공격하게 하고, 대병(大兵)이 기회를 보아 하수(河水)를 건너
잇따라 후원하여 오랑캐의 뒤를 견제해서 속국의 위급한 사태를 풀어주도록 하라.
그리고 군량과 호상품(犒賞品) 및 행군의 필수품에 대해서는 호부(戶部)와 병부(兵部)에서
지체하지 말고 급히 처리하여 앉아서 기회를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병부에 정문(呈文)하기를 ‘삼가 모진(毛鎭)의 당보(塘報)를 듣건대
「고려 사람이 요동 백성들의 폐해를 한스럽게 여겨 몰래 오랑캐의 첩자노릇을 하여
모진을 해치려 한다.」 하였는데, 아, 이것이 무슨 말인가?
우리 나라가 모진의 환심을 잃게 된 것은 삼·칼·종이 등의 미세한 것에 불과한데도
항시 날조하여 무함하는 것이 너무도 심하더니, 오늘날에 와서 함께 병화(兵禍)를 입어
군민(軍民)의 시체가 썩어 문드러지고 국토가 무너져 찢김을 당하였는데도
남의 화를 도리어 다행으로 여겨 거짓말을 늘어놓아 불측한 이름을 덮어씌었다.
아, 천하에 어찌 동포(同胞)를 원수로 보아 한 집안을 해치려 하고
원수의 오랑캐와 상의하여 집안으로 끌어들여 군부(君父)를 배반하고
스스로 화를 당하여 패망하는 것을 좋아할 리가 있겠는가.
어제 역관(譯官)의 말에 의하면 합하(閤下)께서 우리 나라가 왜(倭)와 혼인한 사실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한다. 저 왜는 악기(惡氣)가 모인 자들로서
사해(四海)의 오랑캐 중에도 그처럼 별난 종자는 없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는
저들과 이웃하고 있으므로 이리와 독사처럼 여기면서도 감히 심하게 배척하지는 못했었다.
그러다가 만력(萬曆) 임진년에 이르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하여 길을 빌린다는 이름으로
우리 팔도를 함락하고 우리 3도(都)를 무너뜨렸으며 선군(先君)의 세 무덤을 파헤치고
두 왕자(王子)를 포로로 잡아갔으니 이들은 우리 나라의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깊은 원수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병력이 미약하여 스스로 버티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중국 군사가 철수한 뒤에 다시 관시(關市)를 허락하여 저들의 침략을 막으라는
천조(天朝)의 권의책(權宜策)을 받들어 따랐을 뿐이고 우리 나라가 까닭 없이 스스로
원수와 교통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나라가 궁벽하게 바다 한 모퉁이에 있지만,
오랫동안 중국의 교화에 젖었으므로 군신·부자·부부의 도리에 대해서 평소부터 익혀왔는데,
어찌 차마 오랑캐와 원수를 잊고 화친을 맺어 선조를 욕되게 하고
신민(臣民)을 부끄럽게 하여 천하 후세에 더러운 비난을 끼치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예부에 정문하기를 ‘본직(本職)은
처음에는 우리 나라가 중국에 대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무고를 입고,
두 번째는 오랑캐를 인도해 끌어들였다는 무함을 입었으므로,
진정을 토로해 머리를 조아리며 애절하게 호소하려 하였으나 구
중궁궐의 문을 스스로 통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삼가 성지(聖旨)를 듣건대,
우리 나라가 중조(中朝)를 사랑하여 추대하고 있다고 전교하셨다 하니,
구중궁궐을 우러러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생각건대 중국에 대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무고는 시원하게 풀렸지만 오랑캐를 인도해 끌어들였다는
억울함은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배신(陪臣)으로서 이런 말을 듣고서
악명을 씻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서 우리 임금을 뵐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근자에 또 듣건대 관상(關上)의 당보(塘報)에
「노추(奴酋)가 살았을 적에는 고려 사람이 쌀 12포(包)를 보내주었고,
그가 죽자 모두가 상구(喪柩)를 전송하였다.」 하고,
심지어 우리 나라가 후일 오랑캐를 두려워하여 관망(觀望)할 염려가 있을까
의심된다고까지 하였으니, 아, 이것이 무슨 말인가. 지난 만력(萬曆) 임진년에
왜추(倭酋) 수길(秀吉)이 우리 나라에 화를 입혀 종사(宗社)가 폐허가 되고
생민(生民)이 빠짐없이 화를 당하였는데, 선군(先君) 소경왕(昭敬王)045) 께서
서쪽으로 의주(義州)에 피란하시어 명조(明朝)에 군사를 청하였으니
당시의 사세가 매우 위급했다. 그런데도 일찍이 오랑캐의 조정에 통호(通好)하는 말을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 오랑캐가 우리 나라를 침범한 지는 이미 10년이 되었다.
그들이 요양(遼陽)을 함락하고 광녕(廣寧)으로 들어왔을 때
또 압록강(鴨綠江)에서 말에 물을 먹이고 삼한(三韓)을 유린할 계획을 하였으니
그 기세가 대단하였다. 모장(毛將)이 저들을 공격하고 나서 우리 나라에 의지하고 있으니
오랑캐가 우리 나라에 대해 이를 갈고 있는 것이 이 때문에 더욱 심하였다.
그런데도 한 사람의 사신을 오랑캐에게 보낸 적이 없었고,
우리 나라는 온 나라의 재물을 다 기울여 모진(毛鎭)을 받들면서
오히려 충분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는데, 어느 겨를에 군량을 운반하여 멀리
원수에게 가져다 주었겠는가. 상구를 전송했다는 설에 이르러서는
혹 의심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은 지난해 심하(深河)의 전쟁 때
우리 나라의 원수(元帥) 강홍립(姜弘立) 등 전군(全軍)이 오랑캐에게 함몰되어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했으니, 이들이 적중(賊中)에 오래 있었으므로
오랑캐 임금이 죽었을 때 송장(送葬)한 일이 없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 더욱 부끄러운 것은 2백 년 동안 충순(忠順)했던 우리 나라가 오랑캐를
두려워하여 관망할 것이라는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시장에 범이 나타났다고 하자
듣는 자들이 의혹하였고 증삼(曾參)이 사람을 죽였다고 하자
증삼의 어머니도 북을 버리고 도망하였으니, 예로부터 충신 효자로서 불행하게도
이런 경우를 당해 원한을 품지 않은 이가 없었다.
바라건대 대부(大部)046) 에서는 밝게 분변하여 황제께 아뢰고 이어 널리 선포하여
다시 천하로 하여금 우리 나라가 애당초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한 뒤에야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금수나 이적(夷狄)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다.
만약 그렇게 해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북궐(北闕) 밑에서 죽을지언정
어찌 악명을 덮어쓰고 천지 사이에 살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예부가 제본(題本)하여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조선 배신(陪臣)이 해국(該國)이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와 교통했다는 무고에 대해
변설한 것을 보건대 매우 분명하였다. 어찌 여러 대에 걸쳐 공경했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순리를 배반하고 역적을 본받겠는가. 짐(朕)의 마음으로 미루어 보건대
저들에게 그런 일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니 해국의 군신(群臣)들은 스스로
의구하지 말고 더욱 마음을 굳건히 하여 함께 원수를 갚는 데 힘을 다해서
다른 생각이 없었음을 밝히라. 짐도 영원히 그대들의 충정(忠貞)이 변치 않음을 보아
그대 나라에 대해 회유(懷柔)하겠다. 배신 김상헌(金尙憲) 등의 극
진한 정성이 가상하니 해부(該部)도 그 점을 알라.’ 하였습니다.
또 흠차 순무 등 래 등처 지방 비병 방해 찬리 정동 군무 겸 관양향 도찰원 우첨도
어사(欽差巡撫登萊等處地方備兵防海贊理征東軍務兼管粮餉都察院右僉都御史)에게
정문(呈文)하였더니, 글로 답하기를 ‘등진(登鎭)에서 이미 군사 1천 명을 출발시켰는데,
지금 다시 3천 명을 출발시켰으며,
영원(寧遠)에서는 육군(陸軍) 1만 2천과 수군(水軍) 2천 5백을 출발시켜
함께 내려가도록 하였으니 3개월 이내에 동쪽으로 가서 응원할 것이다.
그리고 해국(該國)이 일찍부터 충정(忠貞)을 맹서하여 힘을 다해 명조(明朝)를 섬겼으며
오랑캐를 위해 간첩질을 하지 않고 왜(倭)와 혼인을 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통찰하여 자세히 알고 있으니 자세히 변명할 것이 뭐 있겠는가.
바라건대 본관(本官)은 국왕(國王)께 아뢰어 조금 좌절당한 것으로 의기소침하지 말며
남의 말로 인해 애태우지도 말고 오직 여력을 수습하여 권토중래(捲土重來)해서
흉악한 요기(妖氣)를 깨끗이 씻어내고 함께 회복을 도모할 것을 기약하라.’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가 올린 주본(奏本)에 대해 내린 성지(聖旨)에
‘왕의 주본을 보건대 소경왕(昭敬王)의 유언(遺言)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임진년의 구은(舊恩)을 생각하여 동진(東鎭)과 화합하고 중국을 사랑해 추대하는
충정(忠貞)의 정성이 언외(言外)에 흘러 넘치니 짐이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진군(鎭軍)이 멀리 나아가 있는 데다가 요동 백성이 섞여 있는가 하면
오래 머무는 나그네가 주인에게 누를 끼치고 생산은 적은데 먹는 이는 많으니,
비록 왕의 말이 없었다 하더라도 짐이 어찌 앉아서 만리 밖을 실피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오랑캐도 왕의 나라를 사랑하여 공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모수(毛帥)가 중국에 있어서는 적을 견제하는 중요한 위치이고 왕의 나라에 있어서는
역시 순치의 형세이다. 해상(海上)으로 추량(蒭糧)을 운송하는 문제는
짐이 근자에 해부(該部)에 독촉하여 다방면으로 계획하고 있으니
기한 안에 공급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요동 백성 중 장정들은
군적(軍籍)에 편입시키기도 하고 혹은 다른 섬으로 분산시키기도 하고
혹은 내지(內地)로 이주시키도록 하여 역시 모수로 하여금 마음을 다해 절차에 따라
잘 계획하여 처리해서 거듭 왕에게 누를 끼침이 없게 하였다.
그리고 힘과 마음을 합하라 하였으니 왕도 노력하기 바란다. 노추(奴酋)가 이미 죽었으니
휴식할 때가 있게 될 것이다. 왕의 앞길이 창창한데 어찌 중도에서 그만둘 수 있겠는가.
주문(奏文)에 개록(開錄)한 윤의립(尹義立) 등의 사정이 하나하나 명백하니
와전(訛傳)된 말은 족히 개의할 것도 없다. 짐이 속국(屬國)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왕이 짐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에 못지 않으니 왕은 이 뜻을 알라.’ 하였습니다."
【 김상헌이 본국이 침범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정문(呈文)하였는데
글의 내용이 강개하였으므로, 중국 사람들은 모두 조선에 신하가 있다고 하였다.】
하고, 또 치계하기를,
"작년 6월에 황자(皇子)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호양보(胡良輔) 등 네 사람이 혹은 총독(總督)으로서 진수(鎭守)하고
혹은 제독(提督)으로서 분수(分守)하기 위하여 피도(皮島)에 주둔하려고
2월 24일에 이미 황도(皇都)를 떠났다고 합니다."하였다.
[註 045]소경왕(昭敬王) : 선조(宣祖).
[註 046]대부(大部) : 예부(禮部).
◯인조실록 26권, 인조 10년 2월 18일 1632년
도승지 김상헌이 올린 대원군의 추숭을 반대하는 상소
행 도승지 김상헌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삼가 예조의 계사를 보건대, 종묘(宗廟) 제1실(第一室) 계단이 까닭없이
무너져 소리가 신어(神御)를 놀라게 하였는데 무너진 곳의 길이가 4칸 남짓이라고 하니
신은 그 말을 듣고 놀라워 몹시 걱정하였습니다.
태묘(太廟)는 조종(祖宗)의 신령이 모여 있는 곳으로 임금이 잘못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경계하여 알리어 수성(修省)하고 개과(改過)할 단서를 보이는 것입니다.
옛날 꿩이 날아와 솥 위에 오르니 은 고종(殷高宗)이 덕(德)을 쌓았고020)
침랑(寢郞)이 꿈을 아뢰자 한 무제(漢武帝)가 허물을 뉘우친 일021) 이 있습니다.
신(神)과 사람은 이치상 어느 때를 막론하고 통하게 되어 있으니
그 정령한 뜻은 순순(諄諄)하게 명할 뿐만이 아닙니다. 대체로 계단은 등급이며,
등급은 명분(名分)과 같습니다. 명분이 무너졌다고 한다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고
신하가 임금을 범하는 상(象)인 것입니다. 신도(神道)가 까마득하여
비록 무슨 일에 대한 응험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일은 실로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태묘(太廟) 9실(室) 가운데 성종(成宗)이 제5실에 계시는데
제1실에서부터 숫자에 따라 4칸을 넘어 제5실에 이르고,
제9실에서는 역수(逆數)로 4칸을 넘어 제5실에 이르는데, 종묘의 계단이 무너진 숫자가
마침 실의 차례와 서로 부합되는 것이 매우 의심스럽고, 매우 두렵습니다.
전하께서 조정의 의논을 물리치시고 추숭하는 일에 마음을 굳혀
기어이 전례를 거행하시고자 하시니,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대원군의 신주를 올려 부(祔)하고 성종 대왕의 구묘(舊廟)를 체천해 철거해야 합니다.
대원군은 전하의 친(親)이며, 성종의 신하이며 자손입니다.
올려서는 부당한 신하와 자손을 올리는 일과 조천(祧遷)해서는 부당한
임금과 할아버지를 철훼하는 일이야말로 등급을 폐기하고 명분을 무너뜨린 것이니,
묘사(廟社)의 변치고 어느 것이 이것보다 더 크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은 조종의 신령이 이에서 반드시 크게 변동하고 크게 경척(警惕)하여
우리 전하의 회오(悔悟)하는 마음을 경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전하께서 만약 변이 없는 것처럼 보고 무상(無常)한 것으로 들으시어
은 고종이 덕 닦은 것과 한 무제가 허물 고친 것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한갓 우연히 그렇게 된 것으로 미루시면 신은 조종의 오르내리시는 영혼이
크게 편치 못하실까 염려됩니다. 대저 귀신의 일을 만약 무지몽매하다고 하신다면
명위(名位)를 반드시 숭봉하기에 힘쓸 것이 없거니와
만약 신명스러워 어긋남이 없다고 하신다면 철거해 체천하는 것을
예(禮)를 넘어 경솔히 의논해서는 안 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만일 인정에 편함을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신도(神道)에 편안하게 함을 구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조손(祖孫)과 부자(父子)는 본디 한 기운이니 다만 마땅히 어버이를 친히 하는
마음으로써 나의 친(親)이 조(祖)를 높이는 뜻을 본받는다면 마음속에
자연히 깨닫게 되어 사람들이 번거롭게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재변을 만나 두려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시고 반성하소서.
그리고 빨리 회오(悔悟)하시는 뜻을 내려 지나친 예의 허물이 없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글을 아뢰었으나 답하지 않았다.
[註 020]은 고종(殷高宗)이 덕(德)을 쌓았고 : 은 고종이 성탕(成湯)의 제사를 지낸 이튿날
꿩이 날아와 솥 위에 앉아 울었다. 고종이 두려워하니,
조기(祖己)가 두려워하지 말고 먼저 정사를 닦으라고 하여 시킨대로 하니
은 나라가 다시 흥하게 되었다 한다. 《사기(史記)》 은본기(殷本記).
[註 021]한 무제(漢武帝)가 허물을 뉘우친 일 : 한 무제 때 여태자(戾太子)가
강충(江充)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었는데
고조(高祖)의 침랑(寢郞)인 전천추(田千秋)가 태자를 위해 변명하자
무제도 그제서야 깨달으며 "고조의 신령이 나를 깨닫게 하는구나."라고 하였다.
◯ 인조실록 28권, 인조 11년 12월 16일 1633년
김상헌 등이 여섯 조목을 들어 왕의 정사에 대해 건의하다
대사헌 김상헌(金尙憲), 집의 최연(崔葕), 지평 심재(沈𪗆) 등이
차자를 올려 여섯 가지 조목을 들어 아뢰기를,
"첫째는 사사로운 욕심을 끊어 성상의 옥체를 보양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한 몸의 주재(主宰)라서 마음에 사사로운 욕심이 없으면 지기(志氣)가 맑고 밝아
온갖 바르지 못한 것이 접근하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미진한 찌꺼기가 남아 있게 되면
부정한 기운이 침범하여 마음이 도리어 그것에 제어됩니다. 대개 부정한 기운이란
반드시 음과 양의 조화를 깨뜨리고 귀신의 빌미가 되는 것만이 아니요,
편사(偏邪)나 기욕(嗜慾)으로서 마음에 해를 끼칠 수 있는 것들이 바로 이것입니다.
전하께서 늘 학문에 종사하시는 뜻은 비록 근실하지만
사욕을 다스리는 공력이 아직 미진해서 사물을 응접하는 즈음에
사심의 동요를 면치 못하여 맑고 밝은 의기가 그로 말미암아 어지러워졌습니다.
그리하여 생각이 의심을 낳고 의심이 의혹을 낳고 의혹이 병을 낳아
점차로 고질이 되어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므로 몇 년 동안 꾸준히 조섭하셨으나
병의 근원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일반 의원의 얕은 의술로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적게 하며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루고 다스리어,
부정한 기운이 그 사이에 범하지 못하게 하여 옥체를 조섭하시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둘째는 실지로 효과 있는 은덕을 실천하기에 힘써서 하늘의 경계에 조심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사람은 한 이치이므로 이쪽과 저쪽이 서로 간격이 없습니다.
속마음이 움직이자마자 참과 거짓이 바로 나타나 어린 아이도 속일 수 없는데,
하물며 하늘이겠습니까. 삼가 살펴보건대, 몇 해 사이에 나타난 천지의 재변이
거의 낱낱이 세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정전의 낙뢰는 그 변괴가 더욱 컸으니,
하늘이 우리 전하에게 어찌 이다지도 준엄하게 경고한단 말입니까?
그 당시 정전을 피하시고 악기를 거두자는 주청은 형식이나마 닦자는 것이었는데,
그 역시 너무나 간략히 하고 말았으니,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혼자 계시면서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감히 과도하게 편히 지내지 않으셔서
하늘의 뜻을 감격시킬 수 있는 점이 있으셨습니까?
임금은 하늘과 땅으로 부모를 삼습니다.
부모가 노여워하는데도 정성스런 마음으로써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그 자식의 직분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재변이 나타난 것은 우연한 일이니
깊이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한 자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진실로 이런 말이 있었다면
이는 곧 간특한 사람들이 전하를 그르치려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실덕(實德)을 힘써 실천하여 하늘을 감동시켜 재앙을 완화하는 근본을 삼으소서.
셋째는 언로(言路)를 넓혀 듣고 보는 바를 널리 구하는 것입니다.
나라에 대간(臺諫)이 있는 것은 마치 사람에게 귀와 눈이 있는 것과 같은데
임금이 대간을 가볍게 여겨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는 마치 귀와 눈을 가리고서 잘 들리고 잘 보이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천하에 어찌 이같은 이치가 있겠습니까. 아, 사람치고 누가 귀가 밝고 싶지 않으리오마는
그의 귀가 밝지 못한 까닭은 남의 귀밝음이 나만 못하다고 여기기 때문이요,
누가 눈이 밝고 싶지 않으리오마는 그의 눈이 밝지 못한 까닭은
남의 눈밝음이 나만 못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남의 귀밝음으로 자기의 밝음을 삼는다면 이는 천하가 다 나의 귀요,
남의 눈밝음으로 자기의 밝음을 삼는다면 이는 천하가 다 나의 눈입니다.
천하로써 귀와 눈을 삼고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한 자는 있지 않았고, 스스로 자기의
귀밝음과 눈밝음만 쓰기를 좋아하고서 나라를 어지럽히지 않은 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언로가 막히어 사람마다 입을 다물고
다시금 귀에 거슬리는 바른 말을 주상에게 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외로이 계신 처지를 누구나 한심스럽게 여기고 있는데
전하께서는 홀로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계시니, 만일 하루 아침에 무슨 변이라도 생기면
갑자기 와해되어 국가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잘못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마시고
언로를 활짝 열어서 눈을 밝게 하고 귀를 트이게 할 수 있는 방도를 다하소서.
넷째는 궁금(宮禁)을 엄히 단속하여 왕래하며 교제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임금이 구중 궁궐에 계시면서 신하들이 하는 일이나
여론의 시비나 여염의 풍속 등등을 알고 싶을 때 환관들이나 친척붙이,
그리고 사적으로 친근한 사람에게 물으실 것인데,
간사하고 아첨하는 그들이 임금의 뜻을 살피며 엿보고 있다가
반드시 어떤 기회를 틈타서 그의 사삿일을 행사할 것입니다.
또한 왕비의 가까운 친척이 궁중에 드나들면서 대궐 밖의 일을 망령되이 아뢰고
대궐 안의 일을 경솔히 누설하면서 악을 선이라 하고
곧은 것을 굽은 것이라 하며 개인의 말을 공평한 의논이라 하고
바른 사람을 바르지 못한 사람이라 하여, 마침내 그들에게 가리워지고 마는데
이는 말세 제왕들에게 늘 있는 걱정거리입니다. 신들은 이와 같은
성군(聖君)의 치세에 과연 이러한 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정이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단서와 음과 양이 성하고 쇠하는 기틀이
반드시 이것으로 말미암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군은 대신으로 배와 가슴을 삼고 대간으로 귀와 눈을 삼는 것인데,
어째서 곧지 않은 길을 때로 열어 바르지 못한 사람들을 드나들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내전을 엄하게 단속하여
안팎의 구분을 확실히 지어 왕래하며 교제하는 조짐을 길이 막으소서.
다섯째는 번잡한 일을 덜어 백성들의 수고를 늦추어 주는 일입니다.
국가의 훌륭한 정치는 백성들의 힘을 느슨하게 해 주는 일보다 앞에 할 일이 없는데,
번잡한 일을 덜어 주지 않으면 백성들의 힘이 늦추어질 수 없습니다.
오늘 한 가지 분부를 내리고 내일 또 하나의 명령을 내리고는
내가 백성들의 폐단을 없앴다고 한다면, 이것은 이른바 말로만 베푸는 은혜로서
실제로는 백성에게 혜택이 이르지 않으니 무슨 덕택을 입혔다고 하겠습니까.
민생(民生)이 무겁게 지우는 세금에 시달려 찌든 적이 지금과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위로 중국 조정을 섬기면서 섬에 있는 우방 인민들을 겸하여 구제하며
북쪽으로는 노(虜)에게 재폐(財幣)를 바치고
남쪽으로는 왜인(倭人)의 요구를 감당하고 있으니
사소한 백성의 힘으로는 이미 견디어 낼 수 없는데,
거기다 제사(諸司)가 물건을 흥정 판매하여 하찮은 물건까지도
세금을 매겨 거두어 들이면서 경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여
모두 잡다하게 빠져나가 버리고 마니,
이 때문에 백성들이 거듭 곤궁해지고 나라도 따라서 피폐해지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백성에게 너그럽게 해 줄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고 이익만을 추구하는 계책을 엄히 물리치게 하되,
수재나 화재를 구제하는 것처럼 급히 하여 혹 조금도 늦추지 말게 하소서.
그리고 전하께서도 의당 깊이 우려하시고 매우 가슴 아파하여 백성을 자식처럼 여겨,
왕자의 저택이 너르지 못한 것이 염려되면 생활고로 이리저리 떠돌며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는 아랫백성을 생각하고, 왕자의 재산이 풍족하지 못한 것이
염려되면 세금이 무겁고 공역이 번거로워 파산한 아랫백성들을 생각하고,
왕자의 심부름하는 하인이 부족한 것이 염려되면
노비를 내사(內司)나 궁가(宮家)에게 빼앗겨 원통함을 품고도
씻을 길이 없는 아랫백성을 생각하여, 은택을 널리 베풀어
친해야 할 사람을 친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덕을 힘써 베푸소서.
여섯째는 훌륭한 장수를 가려 뽑아 변경 수비를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는 위급한 때에 자기 몸을 잊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공을 세우고 일을 이룬 자는 전날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던
하찮은 사람 중에서 나오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대개 훈공을 세운 신하와 노련한 장수는 부귀를 이미 끝까지 누린 자들입니다.
대체로 부귀하면 교만한 마음이 생기고
교만심이 생기면 평소 거느린 사졸들을 따뜻이 어루만지지 않아
그들이 전쟁을 당해서 목숨 바쳐 싸우기를 즐겨 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자연적인 형세입니다. 반드시 한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이나 1백 명을 거느리는
우두머리나 부장(副長)들 가운데서나 군대의 항오 사이에서 인재를 구하여,
그의 계책이나 재주를 시험하여 그 천성이 후하고 침착하면서 굳센 사람을 택하소서.
조그마한 결점을 따지지 말고 그 재주와 지략을 살핀 연후에,
특별히 뽑아 쓰는 예로 대우하고 녹봉을 후하게 주어
그의 아내와 자식들의 생활이 부족함을 없게 해주는 한편
굳세고 날랜 병졸들로 하여금 그의 지휘를 받게 하소서. 또 그 가운데서 자부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다른 마음이 없이 충직하고 성실한 자를 관찰하여
대장으로 뽑아, 그로 하여금 조정 밖의 병마(兵馬)을 통제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그 적임자를 얻게 되어 국가를 적에게 넘겨주는 걱정이 없을 것이요,
국경의 방어도 따라서 길이 튼튼해질 것입니다."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잘 알았다. 차자의 사연을 의당 유념하겠다."하였다.
◯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3월 7일 1636년
예조 판서 김상헌이 국방책에 대해 상소를 올리다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차자를 올리기를,
"화친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오늘을 기다리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병란이 일어나는 것은 비록 분명히 언제라고 알 수는 없으나 또한 위험하고 위태롭습니다.
그런데 국가와 종사의 안위를 안주(安州) 한 성의 승부에다만 걸고 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습니까. 도적이 해서(海西)로 넘어 들어 온다면 일은 어찌할 수 없게 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도원수는 자모성(慈母城)을, 부원수는 철옹성(鐵甕城)을,
본도 병사는 안주성(安州城)을 진압하게 하고,
관서(關西)를 셋으로 나누어 세 진(鎭)에 소속시킨 다음,
정예한 속읍의 군민과 용감한 무사를 선출하여 무양(撫養)하고 훈련시켜
때로 번갈아 교대해서 스스로 지키게 하면, 반드시 큰 이익이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군사의 수가 적고 힘이 약하여 오랫동안 대적(大敵)을 막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유사시에는 황해도의 군사로 자모성을 구제하고
함경남도의 군사로 안주성을 구제하고
함경북도의 군사로 철옹성을 구제하게 하되,
안주성이 공격을 받을 때는 자모성과 철옹성이 함께 구제하게 하고
철옹성이 공격을 받을 때에는 안주성과 자모성이 또한 그렇게 하도록 하소서.
또 대신과 중신(重臣) 중에 충성스럽고 위망이 있는 자를 가려 평양에 보내어
3진을 통어하게 하되, 먼 곳에서 꼭 일마다 제어하지 말고 전쟁에 나아가
우물쭈물 동요하여 군율을 잃는 자가 있으면 왕명을 청하여 군법을 시행하게 하소서.
또 삼남(三南)·관동(關東)·기내(畿內)의 군사를 뽑아서 무기를 정비하게 하고
급할 때 즉시 불러서 숙위(宿衛)에 보충하게 하소서.
그리고 3진에 소속된 요해처 수령을 간혹 주장(主將)에 천거하여
보고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깊이 가상하게 여겼다.
차자에 진달한 일은 마땅히 의논하여 처리하겠다."하였다.
◯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5월 21일 1636년
《시전》을 강하다. 금나라에 답서를 보내는 일을 의논하다
조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대사헌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오랑캐 사신이 참람된 글을 가지고 왔을 적에 애당초 뜯어 보지 않았고
또 화친을 끊은 뜻을 도독에게 통보하여 천하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다시 화친하는 일을 한다면 나라의 체통이 전도될 것이니,
장차 어떻게 얼굴을 들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참으로 정론이다. 그러나 오랑캐가 만약 침략해 온다면 어떻게 막아내겠는가? "
하였다. 우상 홍서봉이 아뢰기를,
"답서를 해도 무익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를 도모하는 도는 대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대신이 막아낼 수 있다고 한다면 답서를 보낼 필요가 없다. "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7일 1636년
예조 판서 김상헌이 화의의 부당함을 극언하다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청대(請對)하여 화의(和議)의 부당함을 극언하니,
상이 용모를 바르게 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30일 1636년
예조 판서 김상헌이 사자 문제와 강도유수 장신에 대해 아뢰다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내일 재신을 오랑캐 진영에 보내려 한다고 하는데, 가령 오랑캐가
우리의 뜻을 거절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닌 듯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말인가?"하자,
대답하기를,
"며칠 전 소와 술을 저들이 이미 받지 않았는데다가
어제의 일을 바야흐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을 것이니, 지금 사람을 보내더라도
반드시 그 실상을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성안의 사람들과 근왕병이 많이들 풀이 죽어 있는데, 며칠이 지나고 나면 사태가
반드시 변할 것입니다. 저들이 사람을 보내 오기를 기다려 대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좋지만, 세시(歲時)에 존문하는 것이 안 될 것은 없다."하였다.
아뢰기를,
"세시의 예는 우리가 이미 행하였습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세시라는 말은 지난번에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니,
내일 사람을 보내도 명분이 있는 것이다."하였다.
상헌이 아뢰기를,
"강도 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이 그의 형에게 글을 보내기를
‘본부의 방비를 배가해서 엄히 단속하고 있는데, 제지를 받는 일이 많다.’고 했답니다.
장신은 일처리가 빈틈없고 이미 오래도록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데,
신임 검찰사가 절제하려 한다면, 과연 제지당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방수(防守)하는 일은 장신에게 전담시켰으니,
다른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도록 전령하라."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8일 1637년
예조 판서 김상헌이 최명길이 지은 국서를 찢고 주벌을 청하다
대신이 문서(文書)를 품정(稟定)하였다. 상이 대신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문서를 제술(製述)한 사람도 들어오게 하라."하였다.
상이 문서 열람을 마치고 최명길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한 뒤
온당하지 않은 곳을 감정(勘定)하게 하였다.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군부(君父)를 모시고 외로운 성에 들어와 이토록 위급하게 되었으니, 오늘날의 일에 누가
다른 의논을 내겠습니까. 다만 이 일은 바로 국가의 막중한 조치인데 어떻게 비밀스럽게
할 수 있겠습니까. 대간 및 2품 이상을 불러 분명하게 유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의 마음은 성실성이 부족하여 속 마음과 말이 다르다.
나랏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니, 이 점이 염려스럽다."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설령 다른 의논이 있더라도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하였다.
최명길이 마침내 국서(國書)를 가지고 비국에 물러가 앉아 다시 수정을 가하였는데,
예조 판서 김상헌이 밖에서 들어와 그 글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 버리고, 인하여 입대(入對)하기를 청해 아뢰기를,
"명분이 일단 정해진 뒤에는 적이 반드시 우리에게 군신(君臣)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일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성문을 나서게 되면
또한 북쪽으로 행차하게 되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군신(羣臣)이 전하를 위하는 계책이 잘못되었습니다. 진실로 의논하는 자의 말과 같이
이성(二聖)009) 이 마침내 겹겹이 포위된 곳에서 빠져나오게만 된다면,
신 또한 어찌 감히 망령되게 소견을 진달하겠습니까. 국서를 찢어
이미 사죄(死罪)를 범하였으니, 먼저 신을 주벌하고 다시 더 깊이 생각하소서."하였다.
상이 한참 동안이나 탄식하다가 이르기를,
"위로는 종사를 위하고 아래로는 부형과 백관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하는 것이다.
경의 말이 정대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나 실로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한스러운 것은 일찍 죽지 못하고 오늘날의 일을 보게 된 것뿐이다."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는 압니다.
그러나 한번 허락한 뒤에는 모두 저들이 조종하게 될테니,
아무리 성에서 나가려 하지 않더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군사가
성 밑에까지 이르고서 그 나라와 임금이 보존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진 무제(晋武帝)나 송 태조(宋太祖)도 제국(諸國)을 후하게 대우하였으나
마침내는 사로잡거나 멸망시켰는데, 정강(靖康)의 일010) 에 이르러서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당시의 제신(諸臣)들도 나가서 금(金)나라의 왕을 보면
생령을 보전하고 종사를 편안하게 한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지만,
급기야 사막(沙漠)에 잡혀가게 되자 변경(汴京)에서 죽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면 전하께서 아무리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였다.
이때 김상헌의 말 뜻이 간절하고 측은하였으며 말하면서 눈물이 줄을 이었으므로
입시한 제신들로서 울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세자가 상의 곁에 있으면서 목놓아 우는 소리가 문 밖에까지 들렸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은 삼가 대청국 관온 인성 황제에게 글을 올립니다.
【 이 밑에 폐하(陛下)라는 두 글자가 있었는데 제신이 간쟁하여 지웠다.】
삼가 명지(明旨)를 받들건대 거듭 유시해 주셨으니,
간절히 책망하신 것은 바로 지극하게 가르쳐 주신 것으로서
추상과 같이 엄한 말 속에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의 기운이 같이 들어 있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대국이 위덕(威德)을 멀리 가해 주시니 여러 번국(藩國)이 사례해야 마땅하고,
천명과 인심이 돌아갔으니 크나큰 명을 새롭게 가다듬을 때입니다.
소방은 10년 동안 형제의 나라로 있으면서 오히려 거꾸로 운세(運勢)가 일어나는 초기에
죄를 얻었으니, 마음에 돌이켜 생각해 볼 때 후회해도 소용없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원하는 것은 단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구습(舊習)을 말끔히 씻고
온 나라가 명을 받들어 여러 번국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진실로 위태로운 심정을 굽어 살피시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허락한다면,
문서(文書)와 예절(禮節)은 당연히 행해야 할 의식(儀式)이 저절로 있으니,
강구하여 시행하는 것이 오늘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에서 나오라고 하신 명이 실로 인자하게 감싸주는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합니다만,
생각해 보건대 겹겹의 포위가 풀리지 않았고 황제께서 한창 노여워하고 계시는 때이니
이곳에 있으나 성을 나가거나 간에 죽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용정(龍旌)을 우러러 보며 반드시 죽고자 하여 자결하려 하니
그 심정이 또한 서글픕니다. 옛날 사람이 성 위에서 천자에게 절했던 것은
대체로 예절도 폐할 수 없지만 군사의 위엄 또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방의 진정한 소원이 이미 위에서 진달한 것과 같고 보면, 이는 변명도
궁하게 된 것이고 경계할 줄 알게 된 것이며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것입니다.
황제께서 바야흐로 만물을 살리는 천지의 마음을 갖고 계신다면,
소방이 어찌 온전히 살려주고 관대하게 길러주는 대상에 포함되지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황제의 덕이 하늘과 같아 반드시 불쌍하게 여겨 용서하실 것이기에,
감히 실정을 토로하며 공손히 은혜로운 분부를 기다립니다."
[註 009]이성(二聖) : 인조와 소현세자를 가리킴.
[註 010]정강(靖康)의 일 : 송(宋)나라 흠종(欽宗) 정강 2년(1127)에 금(金)나라
태종(太宗)에게 변경(汴京)이 함락되어 휘종과 흠종 부자를 비롯해서 많은 황족과 신하가
사로잡혀 간 변란을 말함. 《송사(宋史)》 권23(卷二十三) 본기(本紀) 제20(第二十).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3일 1637년
예조 판서 김상헌이 죽게 해 줄 것을 청하다
예조 판서 김상헌이 관을 벗고 대궐 문 밖에서 짚을 깔고 엎드려
적진에 나아가 죽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 1637년
이조 참판 정온과 예조 판서 김상헌이 자결 시도와 사론
이조 참판 정온이 입으로 한 편의 절구(絶句)를 읊기를,
사방에서 들려오는 대포 소리 천둥과 같은데
외로운 성 깨뜨리니 군사들 기세 흉흉하네
늙은 신하만은 담소하며 듣고서
모사에다 견주어 조용하다고 하네
하고, 또 읊기를,
외부에는 충성을 다하는 군사가 끊겼고
조정에는 나라를 파는 간흉이 많도다
늙은 신하 무엇을 일삼으랴
허리에는 서릿발 같은 칼을 찼도다
하고, 또 의대(衣帶)에 맹서하는 글을 짓기를,
군주의 치욕 극에 달했는데
신하의 죽음 어찌 더디나
이익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려면
지금이 바로 그 때로다
대가(大駕)를 따라가 항복하는 것
나는 실로 부끄럽게 여긴다
한 자루의 칼이 인을 이루나니
죽음 보기를 고향에 돌아가듯
하고, 인하여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스스로 배를 찔렀는데, 중상만 입고 죽지는 않았다.
예조 판서 김상헌도 여러 날 동안 음식을 끊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자손들이 구조하여 죽지 않았다. 이를 듣고 놀라며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사신은 논한다. 강상(綱常)과 절의(節義)가 이 두 사람 덕분에 일으켜 세워졌다.
그런데 이를 꺼린 자들은 임금을 버리고 나라를 배반했다고 지목하였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다 보지 않겠는가.
○吏曹參判鄭蘊口號一絶曰:
"砲聲四發如雷震, 衝破孤城士氣恟。 唯有老臣談笑聽, 擬將茅舍號從容"
又曰:
"外絶勤王帥, 朝多賣國兇。 老臣何所事, 腰下佩霜鋒。"
又作衣帶誓辭曰:
"主辱已極, 臣死何遲? 舍魚取熊, 此正其時。
陪輦投降, 余實恥之。 一劍得仁, 視之如歸。"
因拔所佩刀, 自刺其腹, 殊而不絶。 禮曹判書金尙憲, 亦累日絶食,
至是自縊, 爲子所救解, 得不死, 聞者莫不驚歎。
【史臣曰: "綱常節義, 賴此二人而扶植。 忌之者, 以棄君負國目之, 其無天哉?"】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1637년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다. 서울 창경궁으로 나아가다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상이 산에서 내려가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얼마 뒤에 갑옷을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기(騎)가 달려 왔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5월 28일 1637년
전 판서 김상헌이 호종한 일로 표창 받자 자신의 죄를 논한 상소문
전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상소하기를,
"신은 본래 병든 사람입니다. 게다가 나이도 많고 도리에도 어두워서
마음은 잘못을 사죄하는 글에 시들고 본성은 천지가 번복될 때 잃었습니다.
형체는 있어도 마음은 죽었으니 토목과 동일하여 다시는 조정에 서서 벼슬할 희망이 없고
보잘것없는 신세로 전락하여 아침저녁으로 생명이 다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뜻밖에 들으니 남한산성에서 호종했던 여러 신하가 모두 표창을 받았는데,
신의 이름도 그 중에 있다고 합니다.
신은 처음에는 놀라고 의심하다가 마침내는 두려움에 쌓여 날이 갈수록 더욱 불안합니다.
어가가 산성에 계셨을 때 대신과 집정이 다투어 출성(出城)하기를 권하였으나
신은 감히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는 의리로 망녕스레 탑전에 진달하였으니,
신의 죄가 하나이며, 항복하는 문자를 차마 볼 수 없어서 그 초본을 찢어버리고
묘당에서 통곡하였으니, 신의 죄가 둘이며,
양궁(兩宮)이 친히 적의 진영에 나아갔는데, 신은 이미 말 앞에서 머리를 부수지도 못했고
질병으로 또한 수행하지도 못했으니, 신의 죄가 셋입니다.
신이 이 세 가지의 대죄를 지고도 아직 형장(刑章)을 받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끝까지 수행한 제신과 함께 균등하게 은전을 받겠습니까.
삼가 전하께서는 속히 성명을 거두시어 권선 징악하는 도리를 밝히소서.
신처럼 외람한 자는 반드시 개정하라는 공론이 있을 것인데,
멀리 떨어진 시골에 있다 보니 보고 듣는 것이 미치질 못하므로
외람되게 번거롭게 구니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삼가 생각건대 추위와 더위가 끝나지 않으면 구의(裘衣)와 갈포(葛布)를
버릴 수 없는 것이며, 적국이 멸망하지 않으면 전쟁과 수비도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와신상담의 뜻을 가다듬고 보장(保障)의 지방을 더욱 수리하여
국가가 또다시 욕되게 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 일시의 맹약을 믿지 말으시고
전일의 대덕을 잊지 마소서. 짐승같은 자의 인자함을 지나치게 믿지 말으시고
부모의 나라를 가벼이 단절하지 마소서. 누가 능히 이것으로 전하를 위하여 진계하겠습니까.
대저 천리의 나라를 가지고 남의 부림을 받는 자가 되는 것을 옛사람이 수치로 여겼습니다.
매번 선왕(先王)께서 주문(奏文)에 쓴 ‘만절필동(萬折必東)’이란 말은 생각하노라면
저절로 눈물이 옷깃을 적십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생각하고 생각하소서.
신은 광혹하고 미란하여 또다시 망발을 하였으니, 신의 죄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하였다.
소를 올렸는데 회답하지 않았다.
◯ 인조실록 37권, 인조 16년 10월 29일 1638년
대사헌 이행원·지평 정태제 등이 김상헌과 정온 등의 일에 대해 계하다
대사헌 이행원(李行遠)이 아뢰기를,
"근래 김상헌과 정온 등의 일로 점점 혼란하여
공격하는 자는 터무니없는 말로 덮어 씌우고
구원하는 자도 또한 실상(實狀)을 얻지 못하니, 신은 매우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 두 신하는 남한산성에 있을 때부터 죽으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였는데,
서울로 돌아온 뒤에 미쳐서는 척화(斥和)를 배척하는 의논이 날로 더욱 성하였습니다.
그 본심을 헤아려 보건대, 감히 나아가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닐 뿐만이 아니라
또한 세상에 용납되지 못해서였던 것이니, 그 정상이 참으로 애처로워 성낼 수 없습니다.
지금 그를 공격하는 자는 애당초 내려보내지도 않은 교지를
‘봉한 채 돌려보냈다.[封還]’ 하고
난리 전에 이미 체직한 빈객(賓客)을 ‘아직까지 지니고 있다.[猶帶]’ 하며,
한번 호서(湖西)에 가서 그 형의 상(喪)에 곡(哭)한 것을 ‘떠돌아 다닌다.[浮遊]’고 합니다.
옛 도읍으로 임금이 돌아가는 것은 애산(厓山)과 비교할 수 없고056)
영남에 피하여 숨어 사는 것은 또한 점성(占城)과 같지 않은데057) ,
심지어는 의중(宜中)이 도망친 것에 비유하였으니,
말한 바가 분명하지 못하고 시비가 뒤바뀌었습니다.
이같이 하고도 능히 공론을 세울 수 있으며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정온의 죄를 논함에 이르러서는 적합한 말을 찾지 못하여
처음에는 ‘명예를 구한다.[要名]’ 하였고,
끝내는 ‘발끈 성을 냈다.[悻悻]’는 것으로 구실을 삼았으니, 아, 또한 괴이합니다.
죄를 주려고 하다가 구실을 찾지 못했으면 그만두는 것이 옳은데,
어찌 반드시 억지로 꾸며서 말을 만듭니까.
두 신하를 구원하는 자도 또한 말은 번잡하나 뜻을 다 밝히지 못하고
혹은 분노를 참지 못하여 마치 피차 서로 다투는 자와 같으니,
아마도 성상의 마음을 일깨우고 시비를 밝히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신처럼 쇠약하고 용렬한 자가 외람되게 장관 지위에 있으니,
이처럼 의논이 마구 분열되는 때를 당하여 결코 근거 없는 의논을 진정시키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신을 파직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지평 정태제(鄭泰齊)가 아뢰기를,
"요즈음 본부(本府)에는 김상헌과 정온 등의 일로 논의가 무성한데,
그 사이에 의견이 조금 같지 않은 자가 있으면 문득 배척하니,
신은 실로 몹시 가슴이 아픕니다. 아, 천지가 번복하는 때를 당하여
마음에 맹서하고 뜻을 바꾸지 않은 자는 다만 김상헌과 정온뿐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뜻을 끝내 이루지 못했고 척화(斥和)의 의논이 국가를 그르쳤다고 한다면,
두 신하가 감히 스스로 죄가 없다고 여겨 다시 도성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그 정상이 참으로 애처롭습니다. 이러한 것은 헤아리지 않고
시기를 틈타 모함하는 것이 이에 이르니, 아, 또한 심합니다.
칼로 찌르고 목을 맨 것이 죽기를 도모한 것은 마찬가지이고,
살아서 자정(自靖)한 것도 그 뜻이 서로 다르지 않은데,
억지로 분별하니 또한 무슨 마음입니까. 교지를 봉한 채 돌려보냈다는 것이
이미 근거가 없자 즉시 상으로 가자(加資)한 것을 받지 않았다 말하고,
지니고 있다는 빈객(賓客)의 직위는 난리 전에 이미 체직된 것인데
갑자기 억지로 죄목(罪目)으로 더하였습니다.
정온에 이르러서는 취사(取舍)의 자취를 엄폐시키려고 추후하여 발론하고,
그 죄를 찾았으나 죄목이 없자 말을 이랬다저랬다 하였으니,
그들이 말한 ‘당론(黨論)이 사람의 심술(心術)을 무너뜨렸다.’는 것은
참으로 스스로를 말한 것입니다. 신의 소견이 이미 여러 동료들과 서로 다르니,
억지로 굽히고 구차스레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시키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장령 홍진(洪瑱)·박돈복(朴敦復), 지평 이운재(李雲栽),
정언 이도장(李道長)·임효달(任孝達)이 배척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대사간 김세렴이 아뢰기를,
"김상헌의 일은 당초 국가의 존망에 관계된 것이 아닌데,
의논이 한번 분열되자 갑(甲)과 을(乙)이 모순되어 진정과 화합은 다시 바라지 못하겠습니다.
신처럼 쇠약하고 용렬한 자가 장관 지위에 있으니,
어찌 감히 시비를 타개하고 근거 없는 의논을 진정시키겠습니까. 신을 체직시키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사간 홍명일(洪命一)이 이행원(李行遠)과 정태제(鄭泰齊)는
출사시키고 홍진·박돈복·이운재·이도장·임효달·김세렴은 체차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행원과 정태제는 별도로 의견을 내어 저들의 허물을
엄폐하려고 하였으니, 또한 몹시 오활하고 괴이하다. 아울러 체차하라."하였다.
[註 056]옛 도읍으로 임금이 돌아가는 것은 애산(厓山)과 비교할 수 없고 :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것을
남송(南宋)이 원나라에 대항하고자 애산으로 옮긴 것에 비유할 수 없다는 것임.
남송 경염(景炎) 3년에 단종(端宗)이 죽자, 문천상(文天祥)·장세걸(張世傑) 등이
단종의 아우 위왕 병(衛王昺)을 황제로 받들고 남해 중의 애산으로 옮겼는데,
다음해 원장(元將) 장홍범(張弘範)에게 패하자 육수부(陸秀夫)가 병(昺)을 업고
바다에 빠져 죽으니, 송나라가 드디어 망했다. 《송사(宋史)》 장세걸전(張世傑傳).
[註 057]영남에 피하여 숨어 사는 것은 또한 점성(占城)과 같지 않은데 :
김상헌이 척화를 주장하다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의리를 지키려고
영남으로 내려간 것이, 동한(東漢) 말기에 구규(區逵)가 점성을 점거하여
임읍왕(林邑王)이라고 자칭하고 한나라에 반기를 든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임.
◯ 인조실록 39권, 인조 17년 12월 26일 1639년
청나라에 대응할 것에 대한 전 판서 김상헌의 상소
전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상소하기를,
"신은 뼈에 사무치는 비방을 받고 거친 외방에 버려짐을 달게 여기고 있었는데,
삼가 천지 부모와 같으신 은혜를 받아 죄를 면해주시고
직첩(職牒)이 또 돌아왔으나 죽을 때까지 초야에서 칩거할 마음으로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건대 늙고 병든 이 목숨은 아침 저녁으로 죽기만 기다리고 있으니,
성덕(聖德)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방법이 없어
오직 밤낮으로 감격하며 눈물을 흘릴 따름입니다. 지난번에 상후(上候)가 불편하시어
오래도록 회복하지 못하고 계시다는 말씀을 삼가 듣고 신하된 자의 마음에
근심하는 마음 간절하였으나, 본래 의술(醫術)에 어두워 정성을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근래 또 떠도는 소문을 듣건대 조정에서 북사(北使)의 말에 따라
장차 5천 명의 군병을 징발하여 심양을 도와 대명(大明)을 침범한다고 합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놀랍고 의심하는 마음이 정해지지 못한 채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릇 신하로서 군주에 대하여 따를 수 있는 일이 있고 따를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자로(子路)와 염구(冉求)가 계씨(季氏)에게서 신하 노릇을 하였으나
공자(孔子)는 오히려 ‘따르지 않을 바가 있다.’고 칭찬하였습니다050)
당초 국가의 형세가 약하고 힘이 다하여
우선 눈앞의 보존만을 도모하는 계획을 하였던 것이나,
지금은 전하께서 난을 평정하고 바르게 되돌리려는 큰뜻을 가지고
와신상담해 오신 지 3년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머지 않아 치욕을 씻고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되었다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어찌 가면 갈수록 미약해져서 일마다 순순히 따라 끝내
하지 못하는 바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줄이야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예로부터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죽고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반역을 따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 어떤 사람이 ‘원수를 도와 제 부모를 친 사람이 있다.’고 아뢴다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유사(有司)에게 다스리도록 명하실 것이며,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로 자신을 해명한다 할지라도 전하께서는 반드시
왕법(王法)을 시행하실 것이니, 이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리입니다.
오늘날 계획하는 자들이 예의(禮義)는 족히 지킬 것이 못 된다고 하니
신은 예의로써 분변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해만 가지고 논한다 하더라도
강포한 이웃의 일시적인 사나움만 두려워하고
천자(天子)의 육사(六師)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원대한 계책이 못 됩니다.
정축년 이후로 중조(中朝)의 사람들이 하루도 우리 나라를 잊지 않고 있는데,
특별히 용서해 주고 있는 까닭은 우리를 구해 주지 못하여 패배하였고
우리가 오랑캐에게 항복한 것이 본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관하(關下) 열둔(列屯)의 군병들과 해상 누선(樓船)의 병졸들이 오랑캐를 쓸어내고
옛 강토를 회복하기에는 부족하다 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잘못을 금하기에는 충분합니다.
만약 우리 나라 사람들이 호랑이 앞에서 창귀(倀鬼)051) 가 되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 죄를 문책하는 군대가 벽력같이 달려와 배를 띄운 지 하루면
곧바로 해서(海西)와 기도(畿島) 사이에 당도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의 두려움이 심양에만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저들의 세력이 한창 강하여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화가 있을 것이다.’고 하는데, 신은 명분과 의리야말로 지극히 중대한 것인 만큼
이를 범하면 반드시 재앙이 이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리를 저버리고 끝내 망하는 것보다는 정도(正道)를 지키면서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린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이 순조로우면 백성들의 마음이 기쁘고 백성들의 마음이 기쁘면 근본이 공고해집니다.
이렇게 나라를 지키고서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한 적은 아직 없습니다.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의리를 들어 회군(回軍)하여
2백 년의 공고한 기업(基業)을 세우셨고,
선조 소경 대왕(宣祖昭敬大王)께서는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임진왜란 때에 구원해 준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지금 만일 의리를 버리고 은혜를 잊고서 차마 이 일을 한다면,
천하 후세의 의론은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지하에 계신 선왕(先王)을
뵐 것이며 또 어떻게 신하로 하여금 국가에 충성을 다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단연코 다시 도모하고 서둘러 대계(大計)를 정하시며
강포함에 뜻을 뺏기지 말고 사특한 얘기에 두려움을 갖지 마시어
충신과 의사의 기대에 부응하소서. 신이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대부(大夫)의 반열에 오른 지 오래 되었습니다.
비록 폐하여 물러나 있는 중이나 이 국가의 막대한 일을 당하여
의리상 잠자코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지난번 유림(柳琳)이 갈 적에는
신이 원방에 있었고 일도 급박하여 미처 말씀을 올리지 못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여한이 뼈에 사무쳐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감히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고
어리석은 정성을 진달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살펴 주소서."
하였는데, 회보하지 않았다.
[註 050]자로(子路)와 염구(冉求)가 계씨(季氏)에게서 신하 노릇을 하였으나
공자(孔子)는 오히려 ‘따르지 않을 바가 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
공자의 제자인 자로와 염구가 노(魯)나라의 권력가 계씨(季氏)의 신하가 되었으나
공자는 군부(君父)를 시해하는 일만큼은 따르지 않을 것이라며
그들의 인격을 인정하였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註 051]창귀(倀鬼) : 호랑이에게 죽어 그 앞잡이 노릇을 하는 귀신.
◯ 인조실록 40권, 인조 18년 1월 7일 1640년
김상헌의 상소에 대해 반박하는 장령 유석의 상소
장령 유석(柳碩)이 상소하기를,
"신은 원래 성질이 차분하지 못하고 어리석어 기미를 살피지 못하는데다가
자신의 의견만 믿고서 굽신거리지를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김상헌은 벼슬이 높고 총애가 두터운 신하인데도 임금을 저버리고
국가를 배반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임금이 있다는 것만 알 뿐
권신(權臣)의 존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니, 차라리 모략에 걸려드는 한이 있어도
차마 전하를 저버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일찍이 외람되이 본직에 있으면서
생각하고 있던 바를 대략 진술하였습니다마는, 신도 속이 있는 사람인데,
어찌 이러한 인간을 한 번 논하였다가는 곧바로 뜻밖의 화가 닥치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대체로
광망(狂妄)한 신의 소견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조정에는 모두 상헌을 두둔하는 사람만 있어서
눈을 흘기고 이를 갈며 기필코 신을 죽이려 드는데,
다행히도 성상께서 천지 부모와 같이 분에 넘치는 관용을 베풀어 주신 덕택에
말단 직책이나마 채우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기회를 틈타 습격하려는 음모가 형체없는 가운데 감추어져 있고
물여우처럼 모래를 머금고 해독을 끼치려 그림자를 살피고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으로서 신 역시 스스로 짐작하고 있는 바이니,
마음 씀씀이와 일을 행함에 있어 어찌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께서는 구중 궁궐에 깊이 계시니, 어떻게 오늘날의 상황을 아시겠습니까.
상헌이 굳건한 형세와 타오르는 위세로 한 세상의 화복을 마음대로 해 온 지 18년 동안에
자기편이 아닌 자는 곤궁케 하고 자기와 같은 자는 영달케 하였습니다.
신 역시 인간의 정리가 있는 자로서 진실로 이미 얻은 직책을 잃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있고 보면, 하필 이롭기 마련인 길을 버려두고 범하지 말아야 할
노여움을 돋구어서 스스로 전복되는 결과를 자초하겠습니까. 상헌의 소를 보건대
‘예로부터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고 죽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일개 필부의 몸인데도 자결하지 못하고서
스스로 목을 매는 필부의 작은 절개를 종묘 사직을 받드는 임금에게 기대하고 있으니,
어찌 이렇게도 생각이 부족하단 말입니까.
신은 바로 전하의 신하로서 아낄 분은 오직 임금뿐이니,
비록 수만 번 주륙을 당하더라도 의리상 입을 다물고 있기가 어렵지만,
신 역시 걱정스럽습니다."하니,
답하기를,
"대간의 논이 바르지 못함을 내가 이미 통촉했으니,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직책을 살피라."하였다.
◯ 인조실록 40권, 인조 18년 1월 11일 1640년
유석의 상소에 대해 교리 조석윤 등이 반박하는 차자를 올리다
교리 조석윤(趙錫胤), 수찬 조계원(趙啓遠)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장령 유석(柳碩)은 본래 성질이 사악하여 온갖 음험한 방법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자로서 행실은 편벽되고 말은 번지르르한데
모략을 장기로 삼고 당파 만들기를 능사로 삼았으므로, 발신(發身)하기 전부터
식자들이 벌써 그의 상서롭지 못함을 걱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벼슬길에 막 발을 들여 놓기가 무섭게 동지 몇 사람과 더불어
괴이한 논을 빚어 냈습니다. 그의 마음의 형적을 추측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평소 절친했던 자도 모두 곁눈질로 흘겨볼 정도이니, 그가 매우 간악하고 사특한 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꺼려하여 감히 말문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김상헌만이 홀로 엄한 말로 배척한 결과 유석이 이에 저촉되어
10여 년간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그동안 악감정을 품고
칼날을 감춘 채 기회를 엿보아 온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김상헌이 시의(時議)에 죄를 얻게 되자 입술을 놀리고 혀를 내둘러
묵은 감정을 마음껏 풀면서 임금을 무시한 부도(不道)의 죄명으로 덮어 씌웠습니다.
유석의 원래의 정체가 이에 이르러 모두 드러났다고 하겠는데,
유독 성상께서만 밝게 보시지 못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가 국가에
해를 끼치는 것이 어찌 좋은 곡식을 갉아 먹는 해충의 피해 정도뿐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살펴보실 때 오늘날 조정의 신하 중에 과연 임금을 무시하고
스스로 전횡하면서 위엄과 복록의 권한을 점거하고 있는 자가 있습니까.
오늘 유석을 논하는 자가 있어도 유석은 상헌으로써 막아 내고
내일 유석을 논하는 자가 있어도 또 상헌으로 빌미를 삼아 막아 내면서
한결같이 상헌을 이용물로 삼아 종신토록 자신을 보호할 계책을 삼을 것이니,
아, 역시 교활하다고 하겠습니다.
심지어 유석은 ‘신은 전하의 신하’라는 등의 말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또한 혼조(昏朝) 때 적신(賊臣)이 남긴 영향으로서 그 당시에도 듣고 경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또 성명의 조정에서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박황(朴潢)이 아뢸 적에 김상헌의 현부(賢否)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는데,
전하께서는 유석이 들쑤셔 낸 상소에 의거하여 낱낱이 거론하고 상헌의 죄를 지적하셨으니,
아, 성명께서 치우쳐 얽매인 것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또 이토록 한결같이 잘못된 분부를 내리실 줄은 생각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유석의 마음가짐과 행실이 화를 빚어 내고 국가의 발전을 방해한 죄는 버려두고라도,
조정을 경멸하고 터무니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현혹시킨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마음을 비워 이치를 살피시고
시비를 밝게 분변하시어 속히 파직을 명하심으로써 조정을 안정시키소서."하니,
답하기를,
"유석의 상소가 비록 과격하다 할지라도 그 말이 모두 꼭 옳지 않다고는 못할 것이다.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과연 상소의 말과 같다면 마땅히 더욱 힘쓰기만 하면
될 것인데, 어찌 감히 이렇듯 아름답지 못한 행동을 하여
위복의 권한을 행사한다는 말을 실증하려 하는가."하였다.
◯ 인조실록 41권, 인조 18년 12월 6일 1640년
김상헌의 일에 관한 승평 부원군 김류 등의 상차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 영중추부사 이성구(李聖求),
판중추부사 심열(沈悅)이 상차하기를,
"김상헌 등이 끝내 이역으로 떠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성상의 본심이겠습니까. 지난날 산성(山城)의 위급한 상황에서
여러 사람의 의논에 몰리어 윤집(尹集) 등을 내보낼 적에도
성상께서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불쌍해 하는 빛이 옥안에 가득하였었는데,
이제 상헌 등의 떠남에 대해서 신들은 참으로 성상의 회포가 더욱 말할 수 없을 줄 압니다.
삼가 생각건대 김상헌은 병자년 봄에 그의 소견이 연소배와는 전혀 달랐는데,
나덕헌(羅德憲)을 논한 일로038) 인하여 연소배의 공격을 받아
대사헌의 직에서 체직되기까지 하였고, 그의 상소에 ‘위세를 끼고 자존 망대함은 없었다.’는
등의 말이 있었으니039) 바로 그의 본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산성이 포위를 당하여 어찌할 수 없음을 보고서는
사수(死守)하자는 의논을 창도하여 비로소 강화하자는 의논과 어긋나게 되었으며,
일이 위급하게 된 뒤에는 또 ‘성을 나가면 반드시 온전할 리가 없다.’고 강력히 고집하여
일관하였는데, 이는 당시 망언을 하여 흔단을 야기한 자와는 다른 것입니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본성이 강직하고 편협해서 자기의 소견을 지나치게 고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본심이야 어찌 다른 의도가 있겠습니까.
불행하게도 유언비어가 전파되어 점점 더 보태어져서
마침내는 간사한 자가 나라를 파는 기화가 되었으니 통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오늘날의 사태가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러나 상헌은 바로 선조(先朝)의 구신으로서 숭품의 반열에 있어
전부터 후한 은총과 대우를 받아왔으며, 나머지 조한영(曺漢英)과 채이항(蔡以恒) 2인은
시종을 역임했거나, 유적(儒籍)에 이름이 있는 이들입니다.
옛말에 ‘선비는 죽일 수는 있을지언정 욕을 보일 수는 없다.’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일은 반드시 도리에 맞도록 처리해야 합니다.
어찌 차마 도망쳐 온 한인이나 향화인의 무리와 같이 험한 처지에 뒤섞이게 하여
구박과 곤욕을 당하도록 내버려두고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청사가 의주에 머물고 있어 이목이 상당히 번거로우니
참으로 가엾게 여기는 기색을 드러내어 그들의 의아심을 더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원역(員役)을 차출해서 대동하여 들어가게 하면서 명목을 압송한다고 하고
호위를 겸하게 하고, 또 노자를 지급하여
삭방의 들녁에서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들의 논의가 비록 조정에서 채용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협박을 받은 뒤에 부득이해서 보낸다는 뜻을 저들이 모를 리가 없으니,
우리가 채용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태연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대죄(待罪)한다는 뜻을 진술한 국서 한 장을 보내고
아울러 상헌에 대한 전후의 사실을 사실대로 나열하되,
그중에 이미 상신(相臣)이 말한 관교(官敎)를 받들지 않았다는 한 조목과
와전된 데서 나온 연호를 쓰지 말도록 사주했다느니 하는 등의 말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해명하여야지 분명치 못하게 뒤섞어서 의논해서
그의 죄목을 첨가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여러 신하들이 횡의(橫議)한 문자는 신들이 원고를 보지 못하여
어떻게 표현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지난해 척화의 논의와는 필시 간격이 있을 것이니,
진실로 적당하게 잘 말하여 본 실정을 알게 하되 다른 희망을 갖는 모습을 보이지 말고
다만 스스로 깨닫게만 하면 만에 하나 모두 살아날 가망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관소(館所)의 신하들에게 자신들의 의견으로 정역에게 말하게 하기를
‘지난달 윤집(尹集) 등을 죽이고, 전년에 정뇌경(鄭雷卿)을 죽였는데,
이는 모두가 그들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으니, 말할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과는 다르다. 그리고 사면령 이전이니
이제 완전 석방은 안 되더라도 본국에 돌려보내어 본국에서 스스로 죄를 내리게 해야 한다.
상국의 체면에 어찌 이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는가.’ 하여
용장의 귀에 흘러 들어가게 한다면 조금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하니,
답하기를,
"신득연이 이미 입증하였으니 자문(咨文)에 쓸 말이 참으로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경들의 소견이 이러하니 계사대로 시행하라."하였다.
[註 038]나덕헌(羅德憲)을 논한 일로 : 금나라에 춘신사로 갔던 나덕헌 등이
한(汗)이 황제라 칭한 답서를 받아오다가 통원보(通遠堡)에 이르러
말이 병들었다고 핑계하여 다른 짐과 같이 서신을 슬그머니 그곳에다 두고 왔는데,
이에 대해 삼사와 유생들이 당초에 거절하지 않고 받아가지고 온
잘못을 지척하여 참수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대해 김상헌이 죽이기까지 할 일은
아니라고 건의하여 유배를 보낸 일을 말한다. 이는 김상헌이 처음부터
척화 일변도가 아니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5 인조조 고사 본말(仁祖朝故事本末).
[註 039]‘위세를 끼고 자존 망대함은 없었다.’는 등의 말이 있었으니 :
병자년 2월에 용골대가 한(汗)의 서신과 금에 항복한 몽고의 여러 왕자가
우리나라에 보내는 서신을 가지고 왔었는데, 당시 접대한 대신들이
군신의 의리를 들어 몽고 왕자들의 서신 접수를 거부하자 용골대 등은
서신까지도 전하지 않고 지레 도망쳐버렸다. 조정에서는 접대한 대신들이
대충 본 내용을 근거로 답신을 보내자는 의논이 제기되었는데, 김상헌은 상차하여
부당함을 말하고 그들 서신에 자존 망대한 말이 없었는데도 거절하여
공연히 그들의 분노를 사게 된 잘못을 지적하였다. 여기서는 그 당시의 주장을 볼 때
김상헌의 본심이 척화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청음집(淸陰集)》 권20 청노서보답무실국체차(請虜書報答毋失国體箚).
◯ 인조실록 41권, 인조 18년 12월 8일 1640년
김상헌의 심양으로 가는 길에 편의를 조치하다
비국이 아뢰기를,
"김상헌이 이제 떠나려 하는데, 노병으로 죽어가니 무사히 도착하기가 어렵겠습니다.
자제 1인을 대동하고 가도록 허락하소서. 그리고 심양에 들어간 뒤에
형편에 따라 주선해야 할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니
관향 은화(管餉銀貨)를 하사하여 가엾게 여기시는 성상의 뜻을 보이소서."하니,
답하기를,
"은화는 이미 해조로 하여금 계산해서 지급하도록 하였다."하고,
또 명하여 수행하는 그의 자제에게 말을 지급하게 하고
각읍으로 하여금 음식을 제공하도록 하였다.
◯ 인조실록 41권, 인조 18년 12월 9일 1640년
김상헌의 하직하는 상소
김상헌이 떠나면서 상소하기를,
"신은, 말은 조금도 도움됨이 없이 몸은 멀리 떠나게 되었습니다.
국문(國門)을 지나 궁궐과 멀어지니 근심스런 마음에 사모하는 생각만 더해갑니다.
뜻밖에 성상께서 하찮은 저의 정상을 곡진히 살피시어 내사(內使)를 시켜
간절하신 말씀으로 안부를 물어주셨습니다. 보배스런 초구를 입으니,
따뜻한 기운에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조정에 나아가 다시 용안을 뵈옵게 된다면
비록 죽는 날이라 하더라도 사는 날과 같을 것입니다.
신은 성상께로 향하는 피눈물 어린 충정을 억누르지 못하겠습니다."하니,
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보니 매우 비통스럽다.
경은 모쪼록 잘 대답하여 지극한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하고,
인하여 선전관 1인을 보내 호송하게 하니, 도성의 백성이 모두 통곡하였다.
◯ 인조실록 41권, 인조 18년 12월 19일 1640년
김상헌이 의주에 도착하여 용골대를 만나다
김상헌이 의주에 도착하자
용골대가 영상 이하 여러 재신과 사은사 일행을 관(館)에다 모아놓고 불러들이게 하였다.
상헌이 베옷에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걸어와 절을 하지 않고
이현영(李顯英)의 우측에 의지해 누워있었다.
청차(淸差) 3인이 한참 동안 서로 의논한 뒤에 묻기를,
"우리들이 들은 바가 있으니 모두 말하라."하니,
상헌이 답하기를,
"묻는 말이 있으면 내 의당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단서를 말하지 않고서 말하라 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하였다.
용호가 말하기를,
"정축년의 난에 국왕이 성을 나왔는데도 유독 청국을 섬길 수가 없다 하였고,
또 임금을 따라 성을 나오려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무슨 의도였는가?"하자,
상헌이 말하기를,
"내 어찌 우리 임금을 따르려 하지 않았겠는가.
다만 노병으로 따르지 못하였을 뿐이다."하였다.
또 묻기를,
"정축년 이후로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하였는데도 받지 않고
고신(告身)을 반납한 것은 무슨 의도였는가?"하자,
상헌이 말하기를,
"국가에서 노병 중이라 하여 직에 제수한 적이 없는데 무슨 관직을 제배하여
받지 않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처럼 허탄한 말을 어디서 들었는가?"하니,
또 묻기를,
"주사를 징발할 적에 어찌하여 저지하였는가?하자,
답하기를,
"내가 내 뜻을 지키고, 내가 나의 임금에게 고하였는데, 국가에서 충언을 채용하지 않았다.
그 일이 다른 나라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굳이 듣고자 하는가?"하니,
용호가 급히 말하기를,
"어찌해서 다른 나라라고 하는가?"하자,
말하기를,
"피차 두 나라는 각기 경계가 있는데 어찌 다른 나라라고 할 수 없는가?"하였다.
세 호인이 서로 쳐다보면서 말이 없다가 즉시 나가도록 하였다. 나간 뒤에
오목도(梧木道)가 말하기를,
"조선 사람은 우물쭈물 말하는데 이 사람은 대답이 매우 명쾌하니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다."하였는데,
여러 호인이 둘러서서 보고 감탄하였다.
용호가 말하기를,
"김상헌 판서와 신득연 승지는 심양으로 들여가야겠다.
차사원을 시켜 압송해 오라. 빈객 보덕은 우리와 내일 강을 건너야 한다."하였다.
◯ 인조실록 42권, 인조 19년 1월 20일 1641년
김상헌·조한영·채이항 등이 심양에 도착하여 문초를 받다
전 판서 김상헌, 전 지평 조한영(曺漢英), 학생(學生) 채이항(蔡以恒) 등이
심양에 도착하였는데, 목에 철쇄(鐵鎖)가 가해지고 두 손이 결박된 채
형부(刑部)의 문밖에 끌려나갔다. 질가왕(質可王)·용골대(龍骨大) 및
피패(皮牌)·가린(加麟)·범문정(范文程) 등 박씨(博氏)들이 부중(府中)에 늘어 앉고,
세자와 사은사 신경진을 맞이하여 동참하게 하였으며,
형관(刑官) 등은 문밖에 나열해 서 있었다. 차례대로 문초하였으나
세 사람의 말이 의주에서 했던 대답과 같자, 마침내 신득연(申得淵)에게 묻기를,
"조·채 두 사람의 대답이 이와 같은데, 당초의 네 말과 어째서 서로 틀리는가?"하니,
득연이 말하기를,
"이는 모두 내가 심양에 있을 때의 일이다. 용장(龍將)이 엄하게 문초하였을 적에
들은 대로 말했을 뿐이고, 여러 사람들의 상소 내용은 사실 무슨 뜻인지 몰랐다."하였다.
또 묻기를,
"인부와 말을 징발할 때에 네가 국왕에게 아뢰어 중지하도록 한 것은 어째서인가?"하니,
득연이 말하기를,
"그때 조정의 의논은 먼 길에 반드시 도달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하여
가은(價銀)을 들여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말하기를
‘상국에서 조발(調發)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다시 품정(稟定)하지도 않고
먼저 가은을 보낸다는 것은 매우 미안한 일이니 꼭 주문(奏文)을 보내
결정해서 해야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소견을 대략 진달했던 것은
신중을 기하려는 뜻에 불과한데, 그 사이에 어찌 멋대로 의논한 점이 있겠는가."하였다.
청인(淸人)이 정명수(鄭命壽)를 시켜 말을 전하기를,
"신하된 자는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이 곧 그 직분인데,
병자년에 잘못된 의논이 분분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그런데도 황제께서 특별히 너그러운 용서를 베풀고 곡진하게 보전토록 하셨으니
성심껏 순종했어야 마땅한 일인데, 김상헌 등의 무리들은 뉘우칠 줄을 모르고
오히려 그전 습관대로 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
조한영이 신료들과 자주 접촉하여 한 말은 필시 상국(上國)에 대한 일이었을 것이고,
채이항이 요역의 번중(煩重)을 말한 것은 반드시 세폐(歲幣)와 군량을 두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신득연은 인부와 말을 조발해 보낼 때에 함부로 소장을 올려 기한에 미치지
못하게 하였다. 또 조·채 두 사람의 일은 당초에 이미 발고(發告)하였다가
서로 대면시키자, 그만 애초의 말을 반대로 바꾸었으니 그 간사함을 헤아릴 수 없다.
종전에 있었던 본국의 잘못된 일들은 모두 이런 무리들이 멋대로
논의한 때문에 일어난 것이니 그 죄를 용서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번 열두 건의 일은 너희 나라에서 모두 자복하였고,
또 이 무리들을 즉시 압송하여 황제의 명을 어기지 않았으니,
기왕의 실수는 모두 덮어두겠다. 그리고 네 사람이 범한 죄도 재량하여 처리하겠다."하고,
이어 구속한 뒤 외부의 사람과 절대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 명수를 시켜 세자에게 말을 전하기를,
"박황(朴潢)에게도 물어볼 일이 있으니 즉시 보내 오도록 하고,
의주 부윤(義州府尹)·평양 서윤(平壤庶尹)·창주 첨사(昌洲僉使)·청성 첨사(靑城僉使)의
범죄는 본국에서 경중에 따라 논단(論斷)토록 하십시오."하였다.
◯ 효종실록 6권, 효종 2년 5월 9일 1651년
영돈녕부사 김상헌이 서울을 떠나며 상소를 올리다
영돈녕부사 감상헌이 상소하기를,
"신은 국상의 날짜에 맞추어 죽을 힘을 다해 서울에 들어와
가까스로 곡반(哭班)에 참여하였는데, 정신이 이미 떨어져서 하루라도 더 머물러
남은 소원을 풀 수가 없으니, 구구한 정성을 바칠 길이 없습니다.
이제 장차 다시 강가로 나가 배를 빌려 타고 동쪽으로 돌아갈 예정인데,
신은 금년에 82세로서 이제 가면 영원히 대궐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삼가 원컨대 성상께서는 더욱 하늘이 내린 경계를 삼가고 백성의 고통을 돌보시어
억만년토록 끝없는 우리 동방의 계책을 세우소서. 신은 눈물이 하염없이 흐릅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소장을 살펴볼 때 이미 돌아갈 계획을 세웠으니 내 마음이 매우 섭섭하여
무어라고 형용할 말이 없다. 헤어진 지가 오래되어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조금이라도 머물러 줄 수 없겠는가. 소장의 하단에 나를 경계하고 가르치는 말은
요긴하고 간략할 뿐만 아니라 나라를 잊지 못하는 정성이 언어의 밖에 넘쳐흐르니,
참으로 감탄스럽다. 더구나 군주의 직책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감히 마음속에 새기지 않겠는가."하였다.
◯ 효종실록 8권, 효종 3년 6월 25일 1652년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김상헌의 졸기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김상헌(金尙憲)이 양주(楊州)의 석실(石室) 별장에서 죽었다.
죽음에 임해서 상소하기를,
"신은 본래 용렬한 자질로 여러 조정에서 다행히도 은혜를 입어
지위가 숭반(崇班)에 이르렀는데도 작은 공효도 이루지 못하고 한갓 죄만 쌓아 왔습니다.
병자년 정축년 난리 이후로는 벼슬에 뜻을 끊었는데 중간에 다시 화를 당하여
온갖 어려움을 갖추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도 선왕(先王)께서
초야에 있던 신을 부르시어 태사(台司)에다 두시기에, 은명에 감격하여
힘든 몸을 이끌고 한번 나아갔으나, 흔단만 쌓은 여생이 힘을 다할 희망이 없어,
조상의 묘소가 있는 고향 땅에 물러나 지내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조(聖朝)에 이르러서는 남다른 은총을 과분하게 받아 노쇠한 몸이 보답할 길이 없기에,
다만 사류(士類)를 현양하고 강유(綱維)를 진작시켜
새로운 교화의 정치에 만에 하나라도 보답코자 하였는데,
불행히도 일이 마음과 어긋나서 뜻을 조금도 펴보지 못하고 외로이 성덕을 저버린 채
낭패하여 돌아왔습니다. 질병과 근심 걱정이 점점 깊이 고질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목숨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거듭 천안(天顔)을 뵙기에는
이 인생 이제 희망이 없으니 멀리 대궐을 우러러보며 점점 죽어갈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처음 왕위를 물려받으시던 때의 뜻을 더욱 가다듬으시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을 바꾸지 마시어, 선한 사람을 등용하여
훌륭한 정치를 이루시고 실제적인 덕업을 잘 닦아 왕업을 넓히소서.
그리하여 우리 동방 억만 년 무궁한 아름다움의 기반을 크게 마련하시면
신이 비록 죽어 지하에 있더라도 거의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죽음에 임해 기운이 없어서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하늘이 사람을 남겨두지 않고 내게서 원로를 앗아갔으니 매우 슬프고 슬프다.
이 유소(遺疏)를 보니 말이 간절하고 훈계가 매우 지극하다.
나라 위한 충성이 죽음에 이르러서 더욱 독실하니 매우 가상하다. 가슴 깊이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근신에게 하유한다."하였다.
김상헌은 자는 숙도(叔度)이고, 청음(淸陰)이 그의 호이다.
사람됨이 바르고 강직했으며 남달리 주관이 뚜렷했다.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독실하였고, 안색을 바루고 조정에 선 것이
거의 오십 년이 되었는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말을 다하여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며
말이 쓰이지 않으면 번번이 사직하고 물러갔다.
악인을 보면 장차 자기 몸을 더럽힐까 여기듯이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였고 어렵게 여겼다. 김류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숙도를 만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등이 땀에 젖는다." 하였다.
광해군 때에 정인홍(鄭仁弘)이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을 무함하여 욕하자
이에 진계하여 변론하였다. 윤리와 기강이 없어진 것을 보고는
문을 닫고 세상에 나오지 않고, 《야인담록(野人談錄)》을 저술하여 뜻을 나타냈다.
인조 반정(仁祖反正)이 있자, 대사간으로서 차자를 올려
‘여덟 조짐[八漸]’에 대하여 논한 것이 수천 마디였는데, 말이 매우 강개하고 절실하였다.
대사헌으로서, 추숭(追崇)이 예에 어긋난다고 논하여,
엄한 교지를 받고 바로 시골로 돌아갔는데, 오래지 않아
총재(冢宰)와 문형(文衡)에 제수되었다가 상의 뜻을 거슬러 또 물러나 돌아갔다.
병자년 난리에 남한산성에 호종해 들어가,
죽음으로 지켜야 된다는 계책을 힘써 진계하였는데, 여러 신료들이, 세자를 보내
청나라와 화해를 이루기를 청하니, 상헌이 통렬히 배척하였다.
출성(出城)의 의논이 결정되자, 최명길(崔鳴吉)이 항복하는 글을 지었는데,
김상헌이 울며 찢어버리고, 들어가 상을 보고 아뢰기를,
"군신(君臣)은 마땅히 맹세하고 죽음으로 성을 지켜야 합니다.
만에 하나 이루지 못하더라도 돌아가 선왕을 뵙기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는 물러나 엿새 동안 음식을 먹지 아니했다.
또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구하여 죽지 않았다.
상이 산성을 내려간 뒤 상헌은 바로 안동(安東)의 학가산(鶴駕山) 아래로 돌아가
깊은 골짜기에 몇칸 초옥을 지어놓고 숨어 목석헌(木石軒)이라 편액을 달아놓고 지냈다.
늘 절실히 개탄스러워하는 마음으로 한밤중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풍악문답(豊岳問答)》을 지었는데, 그 글에,
"묻기를 ‘대가(大駕)가 남한산성을 나갈 때에
그대가 따르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대의(大義)가 있는 곳에는 털끝만큼도 구차스러워서는 안 된다.
나랏님이 사직에 죽으면, 따라 죽는 것이 신하의 의리이다. 간쟁하였는데
쓰이지 않으면 물러나 스스로 안정하는 것도 역시 신하의 의리이다.
옛 사람이 한 말에, 신하는 임금에 대해서 그 뜻을 따르지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사군자(士君子)의 나가고 들어앉은 것이 어찌 일정함이 있겠는가.
오직 의를 따를 뿐이다. 예의를 돌보지 않고 오직 명령대로만 따르는 것은
바로 부녀자나 환관들이 하는 충성이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의리가 아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적이 물러간 뒤에 끝내 문안하지 아니하였으니, 이 뜻은 무엇인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변란 때에 초야에 낙오되어 호종하지 못했다면
적이 물러간 뒤에는 의리로 보아 마땅히 문안을 해야 하겠거니와,
나는 성안에 함께 들어갔다가 말이 행해지지 않아 떠난 것이니,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하다.
어찌 조그마한 예절에 굳이 구애되겠는가. 자가기(子家羈)가 말하기를
「겉으로 따라 나온 자는 들어가는 것이 옳고 계손씨(季孫氏)를 적으로 여겨
나온 자는 떠나는 것이 옳다.」고 했으니,092)
옛 사람들은 출입하는 즈음에 의로써 결단함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또 묻기를 ‘자네가 대의는 구차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그 말은 옳으나,
대대로 봉록을 받은 집안으로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조종조의 은택을 생각지 않는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내가 의리를 따르고 명령을 안 따라 이백 년의 강상(綱常)을 부지하려 하는 것은
선왕께서 가르치고 길러주신 은택을 저버리지 아니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나라가 평소 예의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하루아침에 재난을 만나
맹세코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임금에게 다투어 권하여
원수의 뜨락에 무릎을 꿇게 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천하의 사대부를 볼 것이며
또한 지하에서 어떻게 선왕을 뵙겠는가.
아, 오늘날 사람들은 또한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했다."하였다.
상소하여 산성(山城)의 상자(賞資)를 사양하였는데, 그 상소에,
"신은 머리를 뽑으며 죄를 청한 글에서 【항복하는 글.】
마음이 떨어졌고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즈음에 천성을 잃었습니다.
형체는 있으나 정신은 죽어 토목과 같습니다.
바야흐로 성상께서 산성에 계실 때에 대신과 집정자들이
출성(出城)을 다투어 권했는데도 신은 감히 죽음으로 지켜야 된다고
탑전에서 망령되이 아뢰었으니 신의 죄가 하나요,
항복하는 글이 차마 볼 수 없는 것이어서 그 초고를 손으로 찢어버리고
묘당에서 통곡했으니 신의 죄가 둘이요,
양궁(兩宮)이 몸소 적의 진영으로 갈 때에 신은
말 앞에서 머리를 부딪쳐 죽지도 못하였고 병이 들어 따라가지도 못했으니
신의 죄가 셋입니다. 이 세 가지 죄를 지고도
아직 형장(刑章)을 면하고 있으니
어찌 끝까지 말고삐를 잡고 수행한 자들과 더불어
감히 은수를 균등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또 신은 삼가 듣건대,
추위와 더위가 없어지지 않으면 가죽옷과 갈포옷을 없앨 수 없고
적국이 없어지지 않으면 전쟁과 수비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와신상담하는 뜻을 가다듬으시고
보장(保障)의 땅을 증수하시어, 국가로 하여금 다시 욕을 당하는 일을 면케 하소서.
아, 한때의 강요에 의했던 맹약을 믿지 마시고 전일의 큰 덕을 잊지 마소서.
범이나 이리같은 나라의 인자함을 지나치게 믿지 마시고 부모와 같은 나라를
가벼이 끊지 마소서. 누가 이것으로써 전하를 위해 간절히 진계하겠습니까.
대저 천리 강토로 원수의 부림을 받는 일은 고금에 부끄러운 바입니다.
매양 선왕(先王)의 주문(奏文)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말이 있음을 생각하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옷깃을 적십니다."하였다.
그 뒤 유석(柳碩)·이도장(李道長)·이계(李烓) 등이,
임금을 버렸다는 것으로 논하여 멀리 귀양보낼 것을 청하였는데, 삭직하라고만 명하였다.
청인(淸人)이 장차 우리 군대로 서쪽 명나라를 치려 했는데,
김상헌이 글을 올려 의리로 보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극언하였다. 그 상소에,
"근래 거리에 떠도는 말을 듣건대, 조정에서 북사(北使)의 말을 따라
장차 군대 오천 명을 발동하여 심양(瀋陽)을 도와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 합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놀라움과 의혹스러움이 진정되지 않은 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저 신하가 임금에 대해서는 따를 만한 일도 있고 따라서는 안 될 일도 있습니다.
자로(子路)와 염구(冉求)가 비록 계씨(季氏)에게 신하 노릇을 하였으나,
공자(孔子)는 오히려 그들도 따르지 않을 바가 있음을 칭찬했습니다.093)
당초 국가가 형세가 약하고 힘이 모자라 우선 목전의 위급한 상황을 넘길 계책을
했던 것인데, 난을 평정하고 바름으로 돌이키신 전하의 큰 뜻으로 와신상담한 것이
이제 3년이 흘러, 치욕을 풀고 원수를 갚는 일을 거의 손꼽아 바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찌 갈수록 더욱 희미해져서 일마다 굽혀 따라 결국 못하는 일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예로부터 죽지 않는 사람은 없었고
또한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죽는 것과 망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있지만 반역을 따르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전하께 아뢰기를 ‘원수를 도와 부모를 공격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전하께서는 필시 유사에게 명하여 다스리게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비록 말을 잘 꾸며 스스로를 해명하더라도
전하께서는 용서하지 않으시고 필시 왕법으로 처단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천하에 통용되는 도리입니다.
오늘날 일을 계획하는 자들은, 예의는 지킬 것이 없다고 합니다만,
신이 예의에 근거하여 변론할 겨를도 없이, 비록 이해만으로 논해 보더라도,
강한 이웃의 일시의 포악함을 두려워하고
천자(天子)의 육사(六師)의 정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원대한 계책이 아닙니다.
정축년 이후로부터 중국 사람들은 하루도 우리 나라를 잊지 않고,
그 구제하지 못하고 패하여 융적(戎賊)에게 절한 것이 본심이 아니었음을
특별히 이해해 주었습니다. 관하(關下) 열둔(列屯)의 병사들과 바다 배 위의 수졸들이
비록 가죽 털옷이나 걸치고 다니는 오랑캐를 소탕하여 요동 땅을 회복하기에는 부족하나,
우리 나라가 근심거리가 되는 것을 막기에는 넉넉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 나라 사람이 호랑이 앞에서 창귀(倀鬼) 노릇을 한다는 것을 들으면
죄를 묻는 군대가 우레나 번개처럼 치고 들어와
바람을 타고 하루만에 해서(海西) 기도(圻島) 사이에 곧바로 도달할 것이니,
두려워할 만한 것이 오직 심양에만 있다고 하지 마소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저들의 형세가 바야흐로 강하니
어기면 반드시 화가 있을 것이다.’고 합니다만,
신은 명분 대의가 매우 중하니 범하면 또한 재앙이 있으리라 여깁니다.
대의를 저버리고 끝내 위망을 면치 못할 바엔 바른 것을 지켜서
하늘에 명을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명을 기다린다는 것은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일이 순리를 따르면 민심이 기뻐하고 민심이 기뻐하면 근본이 단단해집니다.
이것으로 나라를 지키면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태조 강헌 대왕께서 거의(擧義)하여 회군(回軍)을 하시어 이백 년 공고한 기반을 세우셨고,
선조 소경 대왕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대국을 섬겨 임진년에 구해주는 은혜를 입었는데,
지금 만약 의리를 버리고 은혜를 잊고서 차마 이 거조를 한다면,
비록 천하 후세의 의논은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지하에서
선왕을 뵐 것이며 또한 어떻게 신하들로 하여금 국가에 충성을 다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즉시 생각을 바꾸시고 큰 계책을 속히 정하시어
강한 이웃에게 빼앗기는 바 되지 마시고 사악한 의논을 두려워 마시어,
태조와 선조의 뜻을 이으시고 충신과 의사의 여망에 부응하소서."하였다.
흉인(兇人)이 유언 비어로 청인에게 모함하여, 구속되어 심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길이 서울을 지나게 되자 상이 특별히 초구(貂裘)를 내려 위로하였다.
심양에 이르러 청인이 심하게 힐문하니 상헌은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고 말하기를,
"내가 지키는 것은 나의 뜻이고
내가 고하는 분은 내 임금뿐이다. 물어도 소용없다."하니,
청인들이 서로 돌아보며 혀를 차고 말하기를,
"정말 어려운 늙은이다. 정말 어려운 늙은이다."하였다.
오랜 뒤 비로소 만상(灣上)으로 나왔는데,
그 뒤 신득연(申得淵)·이계(李烓)의 무함을 받아 또 심양에 잡혀가 있게 되었다.
모두 6년 동안 있으면서 끝내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청인이 의롭게 여기고 칭찬해 말하기를 ‘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인조 말년에 좌상에 발탁되었는데, 와서 사례하고 바로 돌아갔다.
상이 즉위하여 큰 일을 해보려고 다시 불러 정승을 삼았는데,
청인이 잘못된 논의를 하는 신하를 다시 등용하였다고 책망을 하여,
상헌이 드디어 속 시원히 벼슬을 털어버리고 시골로 돌아갔다.
끝내 그 뜻을 펴보지 못했으므로 조야가 애석히 여겼다.
그의 문장은 간엄(簡嚴)하고 시는 전아(典雅)했다.
《청음집(淸陰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일찍이 광명(壙銘)을 지었는데, 그 명에,
지성은 금석에 맹서했고(至誠矢諸金石)
대의는 일월처럼 걸렸네(大義懸乎日月)
천지가 굽어보고(天地監臨)
귀신도 알고 있네(鬼神可質)
옛것에 합하기를 바라다가(蘄以合乎古)
오늘날 도리어 어그러졌구나(而反盭于今)
아(嗟!)
백년 뒤에(百歲之後)
사람들 내 마음을 알 것이네(人知我心)
하였다. 죽을 때의 나이는 여든 셋이요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사신은 논한다.
옛 사람이 "문천상(文天祥)이 송(宋)나라 삼백 년의 정기(正氣)를 거두었다." 고 했는데,
세상의 논자들은 "문천상 뒤에 동방에 오직 김상헌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註 092]자가기(子家羈)가 말하기를 「겉으로 따라 나온 자는 들어가는 것이 옳고
계손씨(季孫氏)를 적으로 여겨 나온 자는 떠나는 것이 옳다.」고 했으니, :
노(魯)나라 소공(昭公)이 계평자(季平子)를 토벌하다가 실패하여 제나라로 망명할 때
자가기가 따라갔다. 소공이 간후(乾侯)에서 죽은 뒤,
노나라 세도가인 계손씨가 자가기를 불러들여 함께 정치를 하려 하였는데,
자가기가 이런 말을 하였다. 《좌전(左傳)》 정공(定公) 원년(元年).
[註 093]자로(子路)와 염구(冉求)가 비록 계씨(季氏)에게 신하 노릇을 하였으나,
공자(孔子)는 오히려 그들도 따르지 않을 바가 있음을 칭찬했습니다. :
자로와 염구는 공자의 제자로서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이었다.
계자연(季子然)이 공자에게 이들을 대신(大臣)이라고 할 만하냐고 물으니, 공자가 답하기를
"대신이라는 것은 도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되지 않으면 그만두는 것이니,
지금의 자로와 염구는 구신(具臣)이라고 하겠다." 하였다. 그러자 묻기를
"그렇다면 계씨가 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는 자들입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아비나 임금을 시해하는 일은 따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들이 비록 대신 노릇은 제대로 못하나, 군신의 의리를 잘 알기 때문에
시역하는 일은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김상헌 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