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전쟁 막지 못한 가짜 평화… 임란 이후 호란 시작됐다
[김명섭의 그레이트 게임과 한반도] [5] 평화협상으로 못끝낸 임진왜란
임진왜란 전후 유럽은 종교전쟁의 시대였다. 16세기 프랑스 종교전쟁에 이어서 중부 유럽마저 1618년부터 30년 종교전쟁에 휩싸였다. 축구 리그전이 열리듯 참혹한 전투들이 이어졌고, 1648년까지 40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 전쟁의 광기를 봉인하고 평화의 염원을 실현한 것은 웨스트팔리아(베스트팔렌) 지역에서 체결된 오스나브뤼크조약과 뮌스터조약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Imperator)도 개신교 국왕(Rex)과 평등하게 조약을 체결했다. 국경 너머의 종교에 대해서는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여기서 발전한 주권평등과 내정불간섭의 원리들이 국제사회의 평화적 규범이 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동북아시아에서도 평화의 염원을 담은 평화 협상들이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평화 게임
임진왜란에서 처음 평화 협상을 제의한 사람은 침략의 선봉장(1군 사령관)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였다. 그는 독실한 기리시탄(크리스천) 다이묘(大名, 영주)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7년 예수회 선교사들을 추방한 이후에도 고니시는 가톨릭 교인들을 보호했고, 히데요시의 대륙 정복에 협조했다.
고니시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한 후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는 할복자살을 거부하고, 참수당한다. 고니시의 외손자 만쇼는 예수회 사제가 되어 순교한다.
임진왜란 당시 2군 사령관이자 불교도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는 고니시가 사무라이 출신이 아니라 약재상 출신의 기리시탄이라며 능멸했다. 고니시가 가톨릭 교인들을 보호한 것이 둘 사이를 더욱 나쁘게 만들었다. 그러나 고니시는 사무라이 출신이었던 가토보다 먼저 한양과 평양을 점령해서 공을 세웠다.
파죽지세로 북진하면서도 고니시의 평화 제의는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사실상 빨리 항복하고 명을 정복하는 데 동참하라는 요구였다. 몽골제국에 맞서 28년간 항쟁한 고려가 항복 이후 기대했던 평화 대신 일본정벌 전쟁에 동원되었던 역사가 반복되는 듯했다. 그러나 조선의 성리학적 세계관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평화의 길이었다.
참수로 끝난 심유경의 평화 게임
고니시가 평양을 점령하고 있던 1592년 가을 명나라의 심유경(沈惟敬)이 평화 게임을 벌였다. 춘추전국 시대에 활약했던 유세객(遊說客)처럼 말로써 전쟁의 광기를 잡아매고자 했다. 심유경은 고니시와 평양 근방에서 일단 정전(停戰)하는 데 합의했다.
고니시가 심유경의 평화 게임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해군이 서해로 가는 일본군의 병참선을 끊었던 데도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평양성에는 선조가 농성할 것을 대비해서 상당량의 군량미가 비축되어 있었기에 이런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심유경이 말로써 시간을 버는 동안 명나라의 구원병이 조직되었다. 명황제 만력제는 선조의 내부(內附, 망명)를 허락하지 않고, 조선에서의 선전(善戰)을 당부했다. 만력제가 파견한 이여송과 송응창은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벽제관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했다.
다시 심유경이 나섰고, 한양의 용산에서 고니시와 만나 평화 협상을 재개했다. 일본이 요구한 평화의 조건들은 명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后妃)로 보낼 것, 무역을 재개할 것, 조선 팔도 중 남부 4도를 일본이 차지할 것, 조선 왕자 및 대신들을 일본에 인질로 보낼 것 등이었다.
심유경은 바다를 건너 히데요시를 만났다. 고니시와 함께 만력제와 히데요시를 적당히 속여서 평화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유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조선이 왕자를 보내지 않고, 직위가 낮은 사신을 보낸 것에 히데요시는 분노했다. 히데요시가 조선의 남부라도 차지하고자 하는 야심을 버리지 않았다는 예수회 선교사 프로이스의 기록도 있다. 1597년 히데요시는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히데요시를 책봉하여 성리학적 질서 안으로 끌어들이려던 심유경의 평화 게임은 실패했다. 만력제의 미움을 받고 도주를 시도하던 심유경은 명나라 장수에게 붙잡혀 참수당했다.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평화 게임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는 장인 고니시가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군에게 패배하여 죽임을 당한 후에도 살아남았다. 요시토시는 도쿠가와가 혐오하던 가톨릭을 버리고, 자신의 아내이자 고니시의 딸인 마리아마저 추방했다. 요시토시에게는 도쿠가와에게 필요한 것이 있었다. 조선과의 오랜 교섭 경험이었다. 조선과의 통교는 대마도의 이익과도 직결되는 것이었다.
대마도주로부터 관계 회복 의사를 전달받은 조선은 세 개의 평화조건들을 제시했다. 피로인(被擄人, 군인 포로 및 납치 민간인)들의 송환, 임진왜란 당시 선·정릉을 파헤쳤던 범릉적(犯陵賊)의 송환, 그리고 전쟁의 과오를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받는 것이었다.
첫째, 피로인의 송환은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에서 차별받던 불교계의 지도자 사명당 유정(惟政)이 1604년 탐적사(探賊使)로 파견되어 문을 열었다. 1607년에는 ‘회답 겸 쇄환사(回答 兼 刷還使)’가 파견되었다. 약 10만으로 추정되는 피로인들 중 돌아온 피로인의 수는 1만을 넘지 못했다.
둘째, 범릉적은 소 요시토시가 대마도의 잡범들을 대신 압송했다. 완강하게 혐의를 부인하는 두 일본인들을 친히 추궁한 선조도 가짜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대마도의 왜인이면 누군들 우리나라의 적이 아니겠는가. 도주가 이미 포박하여 바쳤으니, 길거리에서 효수(梟首)하라.”
셋째, 도쿠가와의 친서는 전쟁 원인을 분명히 하고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한 조선의 당연한 요구였다. 요시토시는 가짜 국서를 만들어서 조선에 전해 주었다. 조선은 의심했지만 받아들였다.
1609년(광해군 1) 만력기유약조(萬曆己酉約條)가 체결되어 만력제가 인정하는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재개되었다. 명, 조선, 일본 간의 주권 평등에 입각한 웨스트팔리아 평화체제와 같은 국제관계는 수립되지 못했다. 대신 조선통신사가 1811년까지 일본에 파견되어 평화 염원의 상징이 되었다. 비록 도쿠가와 막부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도 했지만 통신사를 통한 문화 교류는 임진왜란과 같은 지옥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가짜 평화가 진짜 전쟁보다 낫다는 생각은 매혹적이다. 임진왜란의 지옥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절박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최소한 전쟁 재발에 대한 방책은 세워두었어야 했다. 종잇장 위의 평화에 안주하다가 짧게는 17세기 초 만주족의 병자호란을 막지 못했고, 길게는 19세기 말 일제에 한반도를 빼앗기고 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평화 게임
1598년 사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계승 세력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 간의 대결은 1600년 세키가하라 대전 이후 도쿠가와 쪽으로 기울었다. 1600년은 가톨릭과 경쟁하던 영국 성공회 교인으로 네덜란드 선단에서 일하던 윌리엄 애덤스가 일본에 도착해서 도쿠가와와 인연을 맺은 해이기도 했다.
도쿠가와에 맞서서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아버지 히데요시가 세운 오사카성(大阪城, 당시 표기는 大坂城)에서 웅거하고 있었다. 아버지 히데요시는 주군 오다 노부나가가 불교 세력과의 전투에서 고전했던 혼간지(本願寺) 터에 오사카성을 세웠다. 이중의 해자(垓字)로 둘러싸인 요새였다.
1615년 도쿠가와는 히데요리에게 평화를 제의했다. 평화 의식의 일환으로 방어용 해자를 메우는 조건이었다. 히데요리는 어리석게도 이 평화 제의를 받아들였다. 일단 위기를 모면한 후 73세의 도쿠가와가 죽기를 기다렸을 수도 있다. 실제로 도쿠가와는 다음 해에 사망했다. 그러나 해자가 메워진 오사카성을 함락한 이후였다.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했고, 도쿠가와 막부의 시대가 1868년 메이지 유신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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