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혼(虛無魂)의 선언(宣言)
- 오상순 /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
물아
쉬임 없이 끝없이 흘러가는
물아
너는 무슨 뜻이 있어
그와 같이 흐르는가
이상스레 나의
애를 태운다
끝 모르는 지경(地境)으로 나의 혼(魂)을
꾀어 간다
나의 사상(思想)의 무애(無碍)와 감정(感情)의 자유(自由)는
실로 네가 낳아준 선물이다
오―그러나 너는
갑갑다
너무도 갑갑해서 못 견디겠다.
구름아
하늘에 헤매이는
구름아
허공(虛空)에 떠서 흘러가는
구름아
형형(形形)으로 색색(色色)으로
나타났다가는 슬어지고
슬어졌다가는 나타나고
슬어지는 것이 너의 미(美)요―생명(生命)이요
멸(滅)하는 순간(瞬間)이 너의 향락(享樂)이다
오―나도 너와 같이 죽고 싶다
나는 애타는 가슴을 안고 얼마나 울었던고
슬어져가는 너의 뒤를 따라……
오―너는 영원(永遠)의 방랑자(放浪者)
설움 많은 `배가본드'
천성(天性)의 거룩한 `데카당'
오―나는 얼마나 너를 안고
몸부림치며 울었더냐
오―그러나 너는
너무도 외롭고 애닯다
그리고 너무도
반복(反覆)이 무상(無常)타.
흙아
말도 없이 묵묵(黙黙)히 누워 있는
흙아 대지(大地)야
너는 순하고 따뜻하고
향기(香氣)롭고 고요하고 후중(厚重)하다
가지가지의 물상(物相)을 낳고
일체(一切)를 용납(容納)하고
일체(一切)를 먹어 버린다
소리도 아니내고 말도 없이……
오―나의 혼(魂)은 얼마나
너를 우리`어머니'라 불렀던가
나의 혼(魂)은 살찌고 기름지고
따뜻한 너의 유방(乳房)에
매어 달리고자
애련(哀憐)케도 너의 품 속에
안기려고 애를 썼던고
어린 애기 모양으로……
그러나 흙아 대지(大地)야
이 이단(異端)의 혼(魂)의 아들을 안아주기에
너는 너무도 갑갑하고 답답하고
감각(感覺)이 둔(鈍)하지 아니한가.
바다야
깊고 아득하고 끝없고
위대(偉大)와 장엄(莊嚴)과 유구(悠久)와 원시성(原始性)의 상징(象徵)인
바다야
너는 얼마나
한(限)없는 보이지 아니하는 나라로
나의 혼(魂)을 손짓하여 꾀이며
취(醉)케 하고 미치게 하였던가
오―그러나
너에게도 밑이 있다
밑바닥에 지탱되어 있는
너도 드디어
나의 혼(魂)의 벗은 될 수 없다
별아
오―미(美)의 극(極)
경이(驚異)와 장엄(莊嚴)의 비궁(秘宮)
깊은 계시(啓示)와 신비(神秘)의 심연(深淵)인
별의 바다야
오―너는 얼마나 깊이
나의 혼(魂)을 움직이며 정화(淨化)하며
상(傷)해 메어지려 하는 나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었던가
너는 진실로 나의 연인(戀人)이다
애(愛)와 미(美)와 진(眞) 그것이다
그러나
별아 별의 무리야
나는 싫다
항상 변함 없는 같은 궤도(軌道)를 돌아다니며 있는
아무리 많다 하여도 한(限)이 있을 너에게 염증(厭症)이 났다.
사람아
인간(人間)아
너는 과시(果是) 지상(地上)의 꽃이다 별이다
우주(宇宙)의 광영(光榮)―그 자랑이요
생명(生命)의 결정(結晶)―그 초점(焦點)이겠다
그리고 너는 정녕 위대(偉大)하다
하늘에까지 닿을
`바벨'의 탑(塔)을 꿈꾸며 실로 싸우며 있다
절대(絶對)의 완성(完成)과 원만(圓滿)과 행복(幸福)을 끊임없이 꿈꾸며
쉬임없이 동경(憧憬)하고 추구(追求)하는
인자(人子)들아
너희들은
자연(自然)을 정복(征服)하고 신(神)들을 암살(暗殺)하였다 한다
정녕 그러하다
오―그러나
준엄(峻嚴)하고 이대(異大)한 파멸(破滅)의 `스핑스'
너를 확착(攫捉)할 때
너의
검은 땅도
붉은 피도
일체(一切)의 역사(役事)도
끔찍한 자랑도
그 다 무엇인가……
세계(世界)의 창조자(創造者) 된 신(神)아
우주자체(宇宙自體) 일체(一切) 그것인 불(佛)아
전지(全智)와 전능(全能)은
너희들의 자만(自慢)이다
그러나
너희도 `무엇'이란 것이다
적어도 `신(神)'이요 `불(佛)'이다
그만큼 너희도 또한
우상(偶像)이요 독단(獨斷)이요 전제(專制)다
그러나 오 그러나
일체(一切)가 다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참(斬)하는 것이다
너희들까지도
허무(虛無)의 검(劍) 가지고
허무(虛無)의 칼!
오!
허무(虛無)의 칼!
불꽃아
오―무섭고 거룩한
불꽃아
다 태워라
물도 구름도
흙도 바다도
별도 인간(人間)도
신(神)도 불(佛)도 또 그 밖에
온갖 것을 통털어
오―그리고
우주(宇宙)에 충만(充滿)하여 넘치라.
바람아
오―폭풍(暴風)아 흑풍(黑風)아
그 불꽃을
불어 날려라
쓸어 헤치라
몰아 무찔러라
오―위대(偉大)한 폭풍(暴風)아
세계(世界)에 충일(充溢)한 그 불꽃을
오―그리고
한(限)없고 끝없는
허공(虛空)에 춤추어 미쳐라.
허무(虛無)야
오―허무(虛無)야
불꽃을 끄고
바람을 죽이라!
그리고 허무(虛無)야
너는 너 자체(自體)를
깨틀어 죽여라!
* 공초문학상은 / 서울신문 / 2019.06.05
공초(空超) 오상순(1894~1963) 시인은 ‘나와 시와 담배’라는 시에서 ‘나와 시와 담배는/이음동곡
(異音同曲)의 삼위일체’라고 노래했다. 친한 문인들도 농담 삼아 ‘꽁초’라 부를 정도로 그는 담배
를 사랑했다. ‘꽁초’는 1926년 작품 활동을 접고 부산 동래 범어사에 입산해 불교와 인연을 맺은
이후 ‘공초’가 되었다. 불교의 공(空)을 초월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담겼다. 평생 독신으로 살던
시인은 혈육 하나, 집 한 칸 두지 않은 무욕의 삶을 살았다. 생전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시집 한
권 남기지 않았다. 시인은 1920년 김억·남궁벽·황석우 등과 함께 ‘폐허’ 동인으로 참여해 한국
신시 운동의 선구자로 활약했다. ‘방랑의 마음’, ‘허무혼의 선언’, ‘폐허의 낙엽’ 등 50여편의
시를 남겼으며 대한민국예술원상(1956), 서울시문화상(1962) 등을 수상했다. 1992년 지극한 무욕의
삶을 살았던 그를 기리기 위해 공초문학상이 제정됐다. 1993년 첫 수상자로 이형기 시인을 선정한 이
래 공초문학상은 매해 등단 20년 차 이상 중견 시인들이 최근 1년 새 발표한 작품 중에서 수상작을
고른다. 역대 수상자로 신경림, 정호승, 신달자, 유안진, 나태주 등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들이 있다.
공초 오상순 장례식 비화 / 이근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