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4월 15일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발주하고 일본의 미쓰이물산합명회사가 납품한‘군함’이 인천항에
모습을 드러낸다. 고종 황제는 이 배에‘양무’(揚武)라는 이름을 붙인다. 일본에 속아 55만원에 사서 고
물처럼 방치되다가 1909년 일본에 다시 4만여 원에 매각. 일본의 수송선으로 이용되다가 1960년 철광석을
싣고 싱가포르로 가던 중 침몰하여 그 운명을 다한다. 고종 황제는 배 한 척을 더 들여왔었다. 이름하여
광제호. 이 배는 상선을 개조한 배 아닌 진짜 군함이었지만 이 배 역시 침략자를 향해 대포 한 번 못 쏴보고
일본 해군으로 편입됐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해방까지 보게 되는데, 그때 일본인들의 철수선으로 이용된다.
출범(出帆)의 노래-계유원단(癸酉元旦)에
- 김해강 / 1926, [조선 지광] -
해는 오르네.
둥실 둥실 둥실 둥실......
어어 내 젊은 가슴에도 붉은 해 오르네
둥실 둥실 둥실 둥실......
바다는 춤추네.
추울렁 출렁ㆍ추울렁 출렁
어어 내 젊은 가슴에도 붉은 해 오르네.
추울렁 출렁ㆍ추울렁 출렁
바닷 바람에 햇발을 쪼각 쪼각 깨물며,
돛대 끝에 높이 달린 깃발은 펄럭인다.
퍼얼럭 펄럭ㆍ퍼얼럭 펄럭......
어어 내 젊은 가슴에도 깃발은 시원스리 펄럭인다.
퍼얼럭 펄럭 퍼얼럭 펄럭......
닺을 감아라
배는 떠난다.
바다라도 육지라도 드쉬려는
우리 젊은이들 그득 실은 배는 떠난다.
북소리 둥 둥
북소리 둥 둥
오색 테이프줄 줄줄이 늘이고
바다를 두쪽에 푸른 물결을 차며
배는 떠난다.
두발은 펄펄
불 붙은 얼굴에
구리 북채를 들어 북을 둥 둥 울리며
배는 떠난다.
새날을 실러 가는 배는 떠난다.
* 작품해설 : 이 시의 또 하나의 주제를 ‘조국 예찬’이라고 잡아볼 수도 있다. 배는 조국이다. 선
원들은 새로운 의지에 불타는 민족이다. 바다는 역사적 현실이다. 선원들은 새로운 의지에 불타는
민족이다. 바다는 역사적 현실이다. 떠오르는 해는 민족의 새로운 역사 의식이요, 희망이다. 깃발은
민족의 기상이요, 기백이다. 이 배는 위의 가정 아래서 볼 때, 단순한 고깃배도 아니고, 화물선도 아
니고, 여객선도, 유람선도, 군함도 아니다. 새로운 역사 앞에 나서는 새 민족의 출발인 것이다. ‘오
색 테이프를 줄줄이 늘이고/바다를 두 쪽에 가르며 푸른 물결을 차며/배는 떠난다’에서 보듯이 희망
에 들뜬 이 출발, 이와 같은 주제, 이와 같은 소재를 시에 담자면, 이와 같은 형식과 표현과 리듬을
갖게 되는 것이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1920년대 그 어두운 시기에 이토록 건강하고 희망에 찬 시
는 그 예가 드물다. 이 시인의 또 다른 시 <초적을 불며>를 보면 역시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민족의
밝은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이 시 <출범의 노래>는 저항을 초월한 승리감이 넘치고 있다.
- 권웅 : <한국의 명시 해설>(보성출판사.1990) -
1911, photographer Norbert Weber,
봄을 맞는 폐허에서
- 김해강 / <조선일보>(1927) -
어제까지 나리든 봄비는 지리하던 밤과 같이
새벽바람에 고요히 깃을 걷는다.
산기슭엔 아즈랑이 떠돌고 축축하게 젖은 땅 우엔 샘이 돋건만
발자취 어지러운 옛 뒤안은 어이도 이리 쓸쓸하여 …….
볕 엷은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어
깨어진 새검파리로 성을 쌓고 노는
두셋의 어린아이
무너진 성터로 새어가는
한 떨기 바람에
한숨지고 섰는 늙은이의
흰 수염만 날린다.
이 폐허에도 봄은 또다시 찾어 왔건만
불어가는 바람에
뜻을 실어 보낼 것인가.
오 - 두근거리는 나의 가슴이여!
솟는 눈물이여!
그러나 나는
새벽바람에 달음질치는
동무를 보았나니
철벽을 깨트리고
새 빛을 실어오기까지
오 - 그 걸음이 튼튼하기만 비노라 이 가슴을 바쳐 -.
* 봄비 → 계절적 소재
* 고요히 깃을 걷는다. → 비가 그치는 것을 새가 날개를 걷는 것에 비유함.(활유법)
* 아즈랑이 → 아지랑이, 계절감
* 발자취 어지러운 옛 뒤안 → 일제치하의 조국
* 2연 → 1행과 2행이 서로 대비됨.
* 새검파리 → 깨진 사기그릇의 조각
* 두셋의 어린아이 → 세상 물정 모르고 노는 아이들
* 무너진 성터 → 폐허, 망국의 국토
* 한숨지고 → 조국의 상실감(맥수지탄), 무상감
* 이 폐허에도 봄은 또다시 찾어 왔건만 → 두보의 시 '춘망'을 연상시킴.
* 뜻을 실어 보낼 것인가. → 조국 광복의 뜻을 헛되이 보낼 것인가.
* 오 - 두근거리는 나의 가슴이여! → 부는 바람에 뜻(조국 광복에의 의지)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 솟는 눈물이여! →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회한과 안타까움.
* 그러나 → 시상의 전환
* 새벽바람에 달음질치는 / 동무 →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독립운동가), 나약한 화
자와 대비되는 존재
* 철벽 → 장애물
* 새 빛 → 희망, 밝은 미래, 조국의 광복
* 오 - 그 걸음이 튼튼하기만 비노라 이 가슴을 바쳐 -. → 조국광복을 향한 간절한 소망, 화자의 목
소리가 분명히 드러남.
◆ 1연 : 봄비가 그침.
◆ 2연 : 봄의 풍경 속에서 느끼는 쓸쓸함.
◆ 3연 : 양지쪽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
◆ 4연 : 무너진 성터에서 한숨짓는 노인의 모습
◆ 5연 : 봄이 찾아온 폐허에서 느끼는 회한
◆ 6연 : 동무가 실어올 새 빛에 대한 소망
* 작품해설 : 이 시는 망국의 국토인 '폐허'의 공간에서 화자가 느끼는 쓸쓸함과 밝은 미래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노래한 작품이다. 시의 전반부는 봄이 찾아온 폐허의 정경을 주로 드러내고 후반부는
화자의 심리를 주로 드러내고 있다.
김해강은 활동 초기 프로문학 운동이 왕성할 때에는 동반 작가로서 경향적인 시를 많이 발표하였으
나, 1930년대 후반부터는 순수 서정 시인으로서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통한 한국의 전통적 서정 세계
를 주로 노래하였다. 이 시는 그의 초기 시세계를 잘 보여주는 경향적 작품이다.
1~2연은 간밤의 봄비가 그치면서 봄빛이 가득한 세상을 보여 준다. 그러나 봄비는 지리한 밤과 함께
새벽바람에 물러가고 '산기슭엔 아즈랑이 떠돌고', '땅 우엔 샘이 돋건만', '발자취 어지러운 옛 뒤
안'을 돌아본 시적 자아는 그저 쓸쓸함을 느낄 뿐이다. 이때, '옛 뒤안'은 단순히 집 뒤의 공터라는
의미보다는 그동안 식민지 시기의 온갖 고난과 역경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3~4연에서 시적 자아의 시야는 집 밖의 세상으로 확대된다. 그곳은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이 양지
쪽에 쭈그리고 앉아 놀고 있는 한가로운 장소이지만, 회한에 잠겨 '한숨지고 섰는 늙은이'의 흰 수염
이 바람에 날리는 '무너진 성터'로서, 봄을 맞는 폐허의 구체적 공간적 배경이 된다. 그러나 이때의
'무너진 성터'는 폐허의 대유적 표현이며, 이는 곧 나라를 잃은 망국의 국토를 상징한다.
5~6연에서 시적 자아의 현실 인식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시적 자아는 그대로 폐허에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서 다시 찾아온 봄에 의탁해 막연하나마 희망을 실어보낸다. 그러나 정면으로 맞서지도
나서지도 못하는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은 고작 두근거리는 가슴 속에 눈물을 삼키는 회한으로 표현된
다. 그렇지만 그는 '새벽바람에 달음질치는 동무'를 봄으로써 이러한 막연한 희망에서 구체적인 현실
적 방법의 모색으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 동무는 아마도 남몰래 노동 운동을 하거나 지하
정치 운동을 하는 젊은이리라. 시적 자아는 드디어 '철벽을 깨뜨리고 새 빛을 실어오기'를 '가슴을
바쳐' 기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의 이 작품은 '이 폐허에도 봄은 찾아 왔건만'의 표현에서 보듯
두보의 시 <춘망(春望>)의 모티프를 연상시킨다.
이 시는 전반부의 봄을 맞는 비관적 정조에서 벗어나 주체의 현실적 자각을 획득함으로써, 현실을 뚜
렷이 응시할 수 있는 비판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특히 마지막 연의 '그러나 나는'에서 보
듯, 시상의 전환과 함께 분명하게 시적 자아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있는 점은 이러한 현실 인식을 직
접적으로 보여주는 경향시의 대표적 특성인 것이다.
이는 후기 임화를 필두로 하는 '단편 서사시'라고 명명되는 갈래와는 확연한 차이점을 보인다. 단편
서사시의 경우는 서사성을 갖춘 산문시의 양식으로써 시 전반에 서정적 정서가 아닌 경향적 정서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즉 1920년대 전반에 한국문학사에 주류를 이루었던 낭만주의적 서정성을 바닥
에 깔고 그 위에 리얼리즘적 경향성이 덧 데인 과도기적 성격을 보이는 시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문치장, 설빔차림의 아이들, 젤라틴실버프린트,1936.
새 날의 기원-계유원단(癸酉元旦)에
- 김해강 / 동아일보, 33.1.8 신춘문예당선작 -
1.
새해라, 첫 아침
동녘 한울엔 붉은 햇살이 뻗혀오르나이다
무릎꿇고 정성을 구을려 비옵는 마음 한껏 떨리옵니다
이 땅 겨레의 가슴에도
이 땅 겨레의 가슴에도
새로운 붉은 해가 돋아오르사이다
새로운 힘이 뛰고, 새로운 기쁨이 피어날
가장 경건한 아침이 열려지이다
2.
해마다 첫새벽이 오면 비옵는 마음
이해라 다름이 잇사오리까마는
팔짚고 정성을 구을려 비옵는 마음 더욱 두근거리옵니다.
주먹을 놓고 맹서하오니
주먹을 놓고 맹서하오니
적은 일이옵든 큰일이옵든
하고 많은 가운데 한 가지일지라도
이 해에만은 뜻대로 일우어짐이 있어주소서
3.
새해를 맞이하옵는 마음
가슴이라도 베여 정성을 다하고 싶으옵거든
어깨라도 끊어 정성을 다하고 싶으옵거든
오오 새 날이여!
이 땅에 열리소서. 힘차게 열리소서.
이 땅에 빛나소서. 아름다이 빛나소서.
전북 고창, 1971,
산상 고창(山上高唱)
- 김해강 -
1.
산도 들도 마을도 저자도
한결같이 눈 속에 고요히 잠든
오오 푸른 월광이 굽이쳐 흐르는
백색의 요람이여!
골짝을 지나 비탈을 돌아
그리고 강뚝을 넘어 들판을 꿰어......
끝없이 뻗은 두 줄기의 수레바퀴
달빛이 빛나는 두 줄기의 수레바퀴
오오 발 아래 엎어져 꿈꾸는 대지여!
네 병 앓는 유방(乳房)을 물고
네 싸늘한 품에 안겨 보채는 야윈 아기들
가늘게 떨리는 그들의 숨결 위에
너는 무슨 보표(譜表)를 꽂아 주려느냐.
네 요람의 어린 딸들이여!
눈 덮인 지붕 밑에는
꿈길이 아직도 멀구나
내 마음 파랑새 되어
그대들의 보채는 숨결 위에
봄 소식을 물어 날으리!
창공을 떠받고 기차게 서 있는 모악(母岳)
백파(白波)를 걷어차고 내 닫는 변산의 연봉
오오 발 아래 엎어져
새벽을 숨쉬는 대지여!
달려와 내 가슴에 안기라!
창공을 쏘아 떨어뜨리고
해 뜨는 가슴에 와 안기라.
남쪽 하늘 밑에 숨쉬는 황해바다!
구름이 백장미인 양 피어 오르는 곳
그리로 흘러가면 달밤의 시화가 있을 듯싶어
강반(江畔)의 모래들을 5리나 따라갔었네만
그 밤 나 홀로 들은 건
향수에 빠진 기러기 외마디 울음......
간간이 들려오는 상선(商船)의 허거픈 Bo였음네.
* 작품해설: 김해강의 1933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작품이다. 이 시는 그 제목에서 보듯
새해를 맞는 소망을 기도체의 문장으로 담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적 자아는 ‘이 땅
겨레의 가슴에도’ ‘새로운 붉은 해가 돋아노르’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러한 기원은 해마다 비는
연례적인 행사이긴 하지만, 특히 이 해에 더욱 간절한 마음이 되는 것은 그만큼 시적 자아가 처한 현
실이 어둡고 답답하기 때문일것이다 이는 1930년애 이후 더욱 악랄해진 일제의 폭압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데, 시인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의 애타는 염원을 ‘붉은 해’로 표상하고 있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이러한 염원을 그냥 엎드려 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담아 ‘주먹을 놓고
맹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가슴이라도 베여 정성을 다하고 싶’고 ‘어깨라도 끊어
정성을 다하고 싶’을 정돌 절대 절명의 소원으로 표현 된다. 그리하여 시적 자아는 현실의 어둠과
답답함을 ‘붉은 해’가 힘차게 열고 빛나게 하기를 새해를 맞아 빌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새해
첫날은 사실 1년 365일의 모든 날을 의미하는 것일 테지만, 새해 첫날을 빌어 시인이 평소 간직하고
있는 깊은 소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이러한 소망의 표현도 더 이상 마음 놓고
하지 못하게 된 현실의 역설적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리라. 일제 치하의 암담한 현실에서 숨조차 제
대로 쉬지 못하는 시인의 간절한 소망이 눈물겹도록 애처로울 뿐이다.
전북 고창, 1973
가던 길 멈추고- 마의 태자 묘를 지나며
- 김해강 / 시집'동방서곡'수록 -
골짝을 예는
바람결처럼
세월은 덧없이
가신 지 이미 천 년.
한(恨)은 길건만
인생은 짧아
큰 슬픔도 지내다니
한 줌 흙이러뇨.
잎 지고
비 뿌리는 저녁
마음 없는 산새의
울음만 가슴 아파
천고(千古)에 씻지 못할 한
어느 곳에 멈추신고.
나그네의 어지러운 발끝에
찬 이슬만 채어.
조각 구름은
때없이 오락가락하는데
옷소매를 스치는
한 떨기 바람.
가던 길
멈추고 서서
막대 짚고
고요히 머리 숙이다.
국경에서
- 김해강 / 동아일보,1940년 -
1
물이 얼다
국경을 흐르는 물이 얼다
낮이면
구름도 떠돌지 않는
하늘이 멱을 감고
밤이면
푸른 별들이 내려와
꿈을 파묻고 가는
국경(國境)
二千里를 흐르는
얄루江 물이 얼다.
2
한결
휘파람만 치는
삭북(朔北)의 하늘!
아아 한 자락 하늘도 만져 볼 수 없는
내 마음이여
얼음을 깨뜨리고
떨어지는 하늘을 마시고 싶다.
한 울음
두 울음
싫도록 퍼 마시고 싶다.
슬픔
- 김해강 / 1952 -
나는
능금을 땄노라.
그러나
진정 너를 사랑하길래
능금을
푸른 바다에 던지노라.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 김해강 / 김해강 / 시집『동방서곡』교육평론사, 1968.9 -
학도 아니면서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춤을 모르는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날만 새면 뭇 참새
떼지어 지절대도
조으는 채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비바람
번개가 날리고 우뢰가 흘러도
천 년인 양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오욕과 허화의 도가니 속
어지럽고 시끄러운 실의의 나날에도
한가한 손님같이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어디를 가나
시장마다 악화가 판을 치고
흙탕물 도도히 거리를 휩쓸어도
오연히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해는 빛을 잃고
꽃밭은 향기를 잃고
눈이랑 무너지듯
하늘은 무너져도 무너져도
으젓이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금촉 화살에 심장이 꿰뚫려도
끝내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징그러운 비늘에 온 몸이 휘감겨도
그저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흙 썩는 냄새만
코를 찌를 뿐
바위틈 콸콸 샘 솟고,
하늘 한 자락 파랗게 깔린
아름다운 해뜨는 동산
삼삼한 솔밭도 아닌데
춤 너울너울
빛 풍요로운
눈부신 아침도 아닌데
언제나 고고히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춤도 못추는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20대 무렵의 김해강
* 김해강(金海剛, 1903 ~ 1987)
본명 : 김대준(金大駿)
1903년 전라북도 전주 출생
1925년 전북사범학교 졸업, 전주사범학교 전주고등학교 근무
1925년 시 「달나라」가 『조선문단』 응모에 당선
193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새 날의 기원」이 당선
1936년 『동아일보』 동인으로 참가
1963년 예총 전북지부장 역임
1884년 사망
시집 : 『청색마(靑色馬)』(1940), 『동방서곡(東方曙曲)』(1968)
저서(작품) : 청색마, 동방서곡, 기도하는 마음, 달나라, 새날의 기원, 흙, 무너진 옛 성터에서, 출
범의 노래, 오월의 태양, 훈풍에 날으는 오월의 기폭, 광명을 캐는 무리, 용광로, 장설라, 사랑의 여명
대표관직(경력) : 진안국민학교 교사, 전주사범학교 교사, 전주고등학교 교사, 한국예술문화단 체총
연합회 전라북도 지부 초대 지부장
<생애>
전라북도 전주 출생. 본명은 김대준(金大駿). 1922년 신흥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5년 전주사범학교
를 졸업하였다. 1925년 진안국민학교에 부임한 이래 전주사범학교(1945∼1952)와 전주고등학교(1952
∼1968) 등에 재직하며 정년을 맞을 때까지 거의 한평생을 교육계에 종사하며 시작(詩作)에 전념하였다.
<활동사항>
1925년 11월『조선문단』(제13호)에 주요한(朱耀翰)의 추천으로 시 「달나라」가 발표되었다. 이어
1926년『동아일보』 제1회 신춘문예에 시 「새날의 기원」이 당선되었으며, 거듭 『조선문단』 3월호
(제14호)와 6월호(제17호)에 「흙」과 「무너진 옛 성터에서」가 각각 발표됨으로써 문단에 등단하였
다. 그 뒤 「출범(出帆)의 노래」(『조선지광(朝鮮之光)』, 1928.1)·「오월의 태양」(『조선지광』,
1928.7)·「훈풍에 날으는 오월의 기폭」(『대조(大潮)』, 1930.6·7) 등을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시작 초기에는 「광명을 캐는 무리」·「용광로」 등 경향적인 작품활동을 통하여 동반자작가로도 활
약하였다. 그러나 1936년 시 전문지 『시건설(詩建設)』에 참여하면서부터 순수시의 경향으로 돌아왔
다. ‘예언의 시인’, ‘태양의 시인’(백철), 혹은 ‘선학(仙鶴)의 시인’(김해성)으로도 불릴 만큼
정열적이며 선학상의 풍모로, 일생 동안 향토를 지키며 시작 활동을 지속하여왔다.
김해강의 시세계는 일반적으로 3기로 나누는데, 초기 시(1925∼1945)는 주로 정열적으로 암울한 시대
상을 표출하거나 혹은 자연과의 친화를 대상으로 한다. 중기 시(1945∼1960)는 자연과 인사(人事)와
의 교정(交情)이 특징을 이루고 있으며, 후기 시는 한국적 전통의 순수서정시로 돌아가 인생을 관조
하는 시정이 나타나 있다.
한편, 문단의 교우 관계는 그리 넓지 않았으나 엄흥섭(嚴興燮)·김병호(金炳昊)·윤곤강(尹崑崗) 등
과는 두터운 교분을 맺어왔다. 특히, 김남인(金嵐人, 본명 김익부(金益富))과는 형제애와 같은 우정
으로 2인 시집 『청색마(靑色馬)』(1940)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시집으로는 『동방서곡(東方曙曲)』(1968)·『기도하는 마음』(1984) 등이 있으며, 1940년대에는 연
재소설 「장설라(張雪羅)」와 「사랑의 여명」을 『동광신문(東光新聞)』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1962
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라북도 지부 초대 지부장을 역임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작 활동과 교육계의 공적으로 전라북도문화상(1957) 및 전주시민의 상(1968)을 받았다. 1993년 김
해강시비가 전주에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태양의 시 학의 시인 김해강』(이운룡 편저, 대흥출판사, 1992)
『전북문단』김해강특집(전북문인협회, 1989)
『한국현대시인론』(김해성, 진명문화사, 1974)
노년의 김해강
* 동반자작가(同伴者作家)
동반자(fellow-traveller)란 ‘길을 함께 가는 동무’의 의미로 문학사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의 방
향성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도 조직적인 활동은 함께 하지 않는 작가’를 일컫는다. 1925년 6월 소련
의 ‘러시아 당 중앙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이를 동반자작가들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쪽으로 이끌
어 내야 한다고 하여 동반자자가 문제를 조직적으로 제기하였다. 이후 1930년 11월 우크라이나의 수
도 하리코프에서 열린 국제혁명가작가동맹 제2회 대회[하리코프 대회]에서 농민문학 문제와 동반자작
가의 획득 문제를 국제적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의 일환으로 제기하였고, 이 방침이 권환에 의해
1931년 5월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카프에 동조적인 일부 작다들의 이데올로기의 성격 규정에 대한 문제가 1930년 1월부
터 함일돈과 유진오 · 채만식, 이갑기와 채만식 등의 논쟁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
후 박영희가 1930년 9월 「갑푸작가와 수반자(隨伴者)의 문학적 활동」이라는 글을 통하여 동반자작
가의 획득 문제를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동반자작가의 성격과 창작 수준, 작품 실천 방안 등의 문제
는 1933년까지 프로문학 전(全) 진영의 중요한 논제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동반자를 끌어들여 혁
명의 길을 함께 가기 위한 동반자 획득 문제가 이러한 논쟁을 거치면서 오히려 동반자작가들을 가프
에서 멀리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어, 이러난 ‘동반자작가 논쟁’은 1933년 가을 안함광 등에 의해 서
둘러 봉합되고 만다.
논쟁 직후에 김기진이 「조선문학의 현재의 수준」(『신동아』, 1934.1)에서 “소시민적 자유주의의
대오로부터 계급의식에 각성하면서 점차로 좌익 진영에 접근하는 동반자적 경향의 각종 요소의 그룹
과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개척과 아울러 그것의 수립을 그 임무로 하고 있는 ‘카프’일파의 그
룹이 존재하고 있다.”고 소개하면서 문단의 계보 중의 하나로 동반 자작가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유진오, 장혁주, 이효석, 이무영, 채만식, 조벽암, 안함광, 안덕근, 엄흥섭, 홍
효민, 박화성, 한인택, 최정희, 김해강, 이흡, 조용만.
하루 아침에 사라진 김해강 '친일 단죄비'…'누가 이런 짓을?'(2021/07/01 연합뉴스)
* 전북출신 문인들의 친일논란
새전북신문 - 2003.08.14
지금으로부터 꼭 1년전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선배들의 과오를 사죄한다는 문인들의 선언이 있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민족문제연구소·계간 실천문학 등이 중심이 된 이들은 친일문학인 42명의 명단
을 발표하는 침통한 뉴스를 전했다. 문단의 친일시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날의 선언이 관
심을 모은 것은 42명의 문인을 엄선(?)하여 발표함으로써 그간 분분하게 진행돼온 친일문학인의 범주
를 일정부분 규정했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남은 이들 중에 도내 출신은 시인 서정주와 김해강, 소
설가 채만식이 있다. 서정주·채만식의 친일 행적은 어느 정도 논란을 거쳐온 터라 새삼스러울게 없
었으나 김해강의 경우는 달랐다.
김해강은 해방 이후 전북문단과 전북예총을 건설한 주역이며 ‘도민의 노래’를 비롯한 각급 학교 교
가 등의 작시를 맡아 지역 사회와 끈끈하게 친화된 인물이다. 지역에서조차 거론되지 않던 그의 친일
행적이 전체문인 42명에 포함될 정도였다는데 문화계는 혼란스러웠다. 다시 광복절을 맞아 최근 미당
시를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싣는 것이 옳은가 싣지 않는 것이 옳은가로 평단에 소요가 일고 있
다. 민족이 있는 한 민족을 배반한 문학에 대한 시비는 멈추기 어렵다.
△서정주·채만식·김해강 문학의 빛우리 문단에서 가장 골 깊은 애증의 대상인 미당 서정주(1915∼
2000).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으나 이미 한 해 전
‘스물 세햇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로 시작 되는 시 ‘자화상’을 발표하여 천재의 등
장을 알렸었다. 고향을 떠나 있었으나 그에게는 항상 ‘질마재’ ‘선운사’ ‘불교’의 이미지가 따
라 다니며 그를 낳고 키운 고창의 자랑으로 부각됐다. 생전에 1천여 편의 시를 발표한 그는 왕성한
창작열과 괴기로움까지 풍기는 예술가적 풍모, 문단에서의 영향력으로 항상 우리 문단의 중심을 차지
했었다. 그의 고향 선운초등학교는 미당문학관으로 개편됐다.
백릉 채만식(1902∼1950)은 옥구 임피 출신이다. 1924년 ‘조선문단’에 단편 ‘세길로’가 추천되어
등단했으며 1934년 발표한 ‘레디 메이드 인생’이 출세작이다. 김해강과 채만식은 카프가 사실상 그
들과 신념이 같다고 인정한 동반자 작가들이다. 가난과 조화롭지 못한 가정으로 평생 불우했으나 그
의 문재(文才)만큼은 생전에도 충분히 빛을 발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전업작가가 되
어 발표한 작품이 장편 ‘탁류’이다. 그 자신 생생하게 보고 경험한 군산 지역 민중들의 부초 같은
삶, 완급 없이 급발진으로 묘사한 남녀관계, 식민사회 지배와 피지배의 역학관계가 잘 드러난 작품이
었다. 100여 편의 소설을 남긴 그를 기념하는 문학관이 군산 금강하구둑에 세워졌다.
김해강(1903∼1987)은 과작(寡作)의 시인이다. 1925년 전주사범을 졸업하던 해 ‘조선문단’에 시
‘달나라’가 당선돼 등단한 그는 다시 193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새 날의 기원’이 당선됐다.
1936년 서정주를 최초로 소개한 ‘시건설’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청색마’와 ‘동방서곡’ ‘기도
하는 마음으로’ 등 세 권의 시집을 냈다. 초기에는 반일시에 가까운 강한 어조의 작품을 발표했으나
1930년대 이후 현실과 한 걸음 떨어진 채 자연과 교감하는 전통적 서정세계를 보였다. 그는 신석정·
백양촌·박동화 등과 전북예총을 건설,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 그리고 그림자‘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그대/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1944년 매일신보에 발표한 미당의 ‘오장(伍長) 마쓰이 송가(頌歌)’의 일부이다. 미당은 1942년부터
44년까지 모두 11편의 친일작품을 발표했다. 42년 매일신보에 ‘시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조선의 젊
은이들이 대일본제국의 자랑스러운 군인이 되기를 원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지난해에는 그가 창씨
개명한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이라는 이름으로 ‘국민문학’에 발표한 시 ‘무제’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 시에는 ‘사이판섬에서 전원 전사한 영령을 맞이하며’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유독 미당
이 친일비판의 표적이 되는 것은 그가 죽을 때까지 끝끝내 진심어린 사죄를 하지 않았던 이유가 크
다.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군사정권을 미화하고 칭송한 행적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채만식의 친일 작품은 1940년부터 발견된다. ‘인문평론’에 ‘나의 꽃과 병정’을 발표했고, 같은
해 매일신보에 ‘대륙 경륜의 장도 그 세계사적 의의’를 썼다. 41년에는 소설 ‘혈전’을 신시대에
발표했고 43년에는 자폭한 한 군인의 유가족을 방문하고 그를 추모하는 글을 썼다. 43년에는 매일신
보에 ‘홍대하옵신 성은’을 발표하는 등 모두 13편의 친일작품을 남겼다. 징병제도가 시작됐음을 기
뻐하는 ‘홍대하옵신 성은’은 ‘(나는) 이미 병정 갈 나이를 훨씬 지나친 몸이다. 일종의 노후물(老
朽物)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커다란 감격과 영광을 직접 몸으로 느낄 길이 없다. 천추의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자라는 2세가 있다. 그놈이 앞날에 나의 이 유감을 풀어줄 것이다.
그것으로 미흡하나마 위안을 삼는다’고 마치고 있다.
김해강의 친일 작품은 1942년에 발표한 3편이 발견됐다.
3월에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와 ‘호주(濠洲)여’를 발표했고
6월에는 ‘조광’에 시 ‘아름다운 태양’을 썼다.
국기를 손에 흔들며
어매에 등의 등에 매달린
착한 내 아들과 딸들
태양과 함께 커가는
내 아름다운 가족의 적은 손을 꼬옥 쥐여줍니다
태양과 함께 커가는
내 아름다운 가족의 어린 볼을 사뭇 부벼 줍니다
라고 노래하는 ‘아름다운 태양’은 친일의 표현이 모호하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는 다르다.
아름답고 위대한 죽음으로써
오호 우리 해군의 빛나는 전통을 유감없이 발휘한
그리하여 대동아전쟁 벽두에
제국불패의 태세를 반석 위에 세워 놓은
대동아건설의 거룩한 초석이여! 소화의 군신이여!
하며 격렬하게 외친다.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는 1941년 특수잠수함을 타고 진주만 깊숙이 침
공하여 미 해군 애리조나 호를 격침시키고 죽은 일본 대본영의 수군 9명을 기리는 작품이다. ‘특별
공격대의 위훈을 추모하며’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친일 행적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은 작품들
이 증거한다. 이로 인해 그는, 2002년 2월 28일에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들의 모임’과 ‘광
복회’에서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708명의 명단에 들어갔으며, 동년 8월 14일에 「민족문학작가회
의」에서 발표한 ‘친일문인’의 詩 분야에서 서정주, 노천명, 모윤숙 등과 함께 12명의 친일문인 명
단에 선정되어 부끄럽게도 친일파로 규정되었다. 감추거나 외면하는 것이 능사일 수 없다. 서정주·
채만식·김해강, 돌아간 이는 말이 없다. 제대로 짚어 바로잡는 것은 남은 이들의 몫이다.
/김선희기자 sunny@sjbnews.com
* “ 화(昭和)의 군신”을 격찬한 김해강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 2005/03/26
황국만대에 영원한 영광을 찬양하리
1942년 4월 8일, 일본 토쿄 히비야 공원에서는 미국의 전함 ‘애리조나’호를 격침시키고 죽은 일제
의 해군 이와사(岩佐直治) 중좌 등 아홉명의 자살특공대 장례식이 수십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거행되
었다. 일제는 이들을 2계급 특진시키고, ‘쇼화(히로히토 일왕)의 아홉 군신’으로 추대하였다. 그리
고 그들의 죽음을 찬미하고, 각급 학교의 교과서에도 싣게 했다. 그런데, 식민지 조선에서는, 이 보
다(아홉명의 군신을 발표한 때) 한 달이나 앞선 1942년 3월 13일자「매일신보」에 이들 ‘천황의 군
신’을 격렬하게 찬양한 선동적인 시가 발표되었다. 바로 김해강의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 (부
제:특별공격대의 위훈을 추모하며)였다.
황군(皇軍)흥폐의 중임을 두 어깨에 지고 ‘저희는 나갑니다.’
명경지수와 같은 담담한 태도로
바람 높고 파도 거친 3천 5백 해리의 대양을 건너
한 번 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아아 우리 해군혼의 정화인 아홉 장사여!
아름답고 위대한 죽음으로써
오호 우리 해군의 빛나는 전통을 유감없이 발휘한
그리하여 대동아전쟁 벽두에
제국불패의 태세를 반석 위에 세워 놓은
대동아건설의 거룩한 초석이여! 소화의 군신이여!
태평양 상에 힘차게 펄럭이는 욱일승천의 깃발 아래
고요회 잠자는 아홉 장사의 영령이여!
천고에 빛나는 불멸의 무훈과 함께
황국만대에 영원한 영광을 가슴 높이 찬앙하오리.
‘특별공격대원의 위훈을 추모하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1942년 매일신보에 실린 것으로서 김
해강은 시를 통해서 미군함을 향해 돌진한 자살특공대의 희생을 최대한의 수사로 칭송하고 있다.
김해강은 또 1942년 3월 6일자 「매일신보」에 “英蘇 合作 策謀의 報를 接하고” 라는 부제가 달린
3억 5천만의 ‘印度民衆에게’ 와 3월 27일, 28일에는 ‘ 濠州여 上,下 ’를 연일 발표했다. 여기에
서 김해강은 인도와 호주에게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가 함락되었으니 미국과 영국을 믿지 말고, 무적
황군의 진격을 환영하고 대동아공영 건설에 동참하라고 선동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하니하고
같은 해「조광」6월호에 황도신민의 정서가 담긴 ‘아름다운 태양’을 발표했다. 이렇듯 김해강은 일
제 강점기 때 일제의 파시즘과 ‘야마도 다마시’(大和魂)을 찬양하고, 황국신민화를 옹호하며, 대동
아 공영권을 외치는 친일 작품을 썼다.
그 동안 金海剛(본명 大駿)은 한국의 서정적인 시 세계를 노래한 시인으로, 태양의 시인으로 알려져
왔다. 일제식민지 때는 ‘초적’을 비롯해서 ‘새날의 기원’ ‘봄을 맞는 폐허에서’ 등 여러편의
저항의지가 담겨있는 시를 남겨서 문단의 일부에서는 저항시인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주
요한 등이 부르짖는 임전체제제하의 결전문학, 즉 많은 시인들이 붓을 총검으로 삼고 대동아전쟁에
충성해야 한다라고 하는 시대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지조를 지키지 못했다. 대다수의 친일지
식인들이 그러했듯 해강도 결국 친일부역이라는 굴절된 삶으로 훼절하고 말았다.
* 친일반민족행위자 김해강 단죄비 세워
새전북신문 / 기사 작성: 권동혁 - 2020년 08월 30일
전주시, 덕진공원 김해강 시비 옆에 친일행적 담긴 단죄비 세우고 제막식
김해강, 자살특공대원 칭송하는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 등 친일행적
시, 토지·임야대장 등 공적장부 존재 일본식 이름 정비 착수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 일본은 전략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전투기를 적함으로 돌진시켜
폭파시키는 전술을 구사한다. 일종의 자살특공대인 셈이다. 당시 일본은 이렇게 미국의 전함을 격침
시킨 사례를 두고 “천황의 식민이 작렬하게 전사했다”면서 대대적인 홍보를 했다고 한다. 이 작전
에 성공한 대원 9명을 칭송하는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라는 시까지 지었다. 시는 ‘이들이 우
리가 바라는 천황의 식민이다. 황국 만대에 영원했다’는 등의 내용이다. 그런데 시를 지은 사람이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던 조선인 김해강(金海剛)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된 시인 김해강은 전
북지역 각급 학교 교가의 작사자로도 유명하고, 전북도민과 전주시민의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전주시가 110년 전 일본에 국권을 상실한 치욕을 잊지 않고, 친일 시인의 행적을 알리기 위해 29일
김해강 단죄비를 세웠다. 110주년 경술국치일을 맞아 덕진공원에서 열린 김해강 단죄비 제막식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와 광복회 전북지부 회원 등 1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시와 민족문제연구소, 광복회는 김해강 시비 옆에 친일행적이 담긴 단죄비를 세우고, 행적을 낭
독했다. 이는 김해강이 전북 도민의 노래, 전주 시민의 노래를 작사하는 등 오랫동안 지역에서 존경
받는 문인으로 평가돼왔으나, 일본 자살특공대를 칭송한 시를 비롯한 친일작품을 쓴 것으로 드러나면
서 광복회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또 시는 토지·임야대장 등 공적장부에 존재하는 일본식 이름의 공부를 정비하는 ‘공적장부 일본이
름 지우기’도 추진하고 있다. 이는 공적장부에 일본식 이름으로 남아 있는 일본인, 일본기업, 창씨
개명자의 귀속재산을 찾아내 국유화하는 게 핵심이다. 시는 9월까지 제적등본과 등기부등본, 토지대
장 등 총 250건에 대한 조사작업
에 들어갈 계획이다.
시는 창씨개명 기록이 있는 공부의 실제 토지 존재유무를 파악한 뒤 △공부정비 △창씨개명 정리 △
공공재산에 해당하는 필지 등으로 분류해 조달청에 통보키로 했다. 특히 일본식 이름으로 등재된 재
산은 창씨개명 이전의 성명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 공부를 정리하고, 이외에는 조달청을 통해 단계적
으로 국유화 처리키로 했다.
앞서 시는 일제가 남긴 치욕스러웠던 역사를 잊지 않고,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지난 3월, 조례 개정
을 통해 김해강이 쓴 전주시민의 노래를 폐지했다. 또 지난해 일본 미쓰비시 창업자의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의 호인 ‘동산’을 따 지은 ‘동산동’의 명칭을 ‘여의동’으로 변경했다. 일제강점기 다가
교에 세워진 일본 건축양식의 석등에는 안내판을 설치했으며, 중노송동 기린봉 초입에는 명성황후 시
해를 도운 이두황의 단죄비를 세웠다.
김재호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은 “친일잔재의 흔적을 지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역사적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라며 “앞으로도 후손들에게 부끄럽고 치욕적인 역사를 널리 알려 반복되
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시 관계자는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민간단체와의 긴밀한 협조체계 속에서
행정력을 집중할 것”이라며 “폐지된 전주시민의 노래 또한 올바른 방향을 설정해 연내 공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권동혁 기자
봄비 연가 / 은파 오애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