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 김춘수 / <현대문학>(1952)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꽃을 위한 서시
- 김춘수 / <문학예술>(1957) -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 金春洙 詩全集' 민음사(1994) -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 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시(詩)1
- 김춘수 / <타령조,기타>(1969) -
동체(胴體)에서 떨어져 나간 새의 날개가
보이지 않는 어둠을 혼자서 날고
한 사나이의 무거운 발자국이 지구(地球)를 밟고 갈
허물어진 세계(世界)의 안쪽에서 우는
가을 벌레를 말하라.
아니
바다의 순결(純潔)했던 부분을 말하고
베고니아 꽃잎에 듣는
아침 햇살을 말하라.
아니
그을음과 굴뚝을 말하고
겨울습기(濕氣)와
한강변(漢江邊)의 두더지를 말하라.
동체(胴體)에서 떨어져 나간 새의 날개가
보이지 않는 어둠을 혼자서 날고
한 사나이의 무거운 발자국이
지구(地球)를 밟고 갈 때
능금
- 김춘수 / <꽃의 소묘>(1959) -
Ⅰ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 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Ⅱ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만이
익어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Ⅲ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김춘수, 뉴욕 맨해튼 힐튼호텔, 1983년. [사진 임영균]
* 김춘수(金春洙, 1922-2004)
1922년 11월 25일 경남 충무 태생.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교를 거쳐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했으나 1942년 12월 퇴학 처분을 당했다.
통영중‧마산고 교사, 마산대‧경북대‧영남대 교수 등으로 재직하였다.
문예진흥원 고문, 한국시인협회장 등을 거쳐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었다.
1981년에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1958), 제7회 아시아자유문학상
(1959), 경남문학상, 경북문화상, 예술원상, 대한민국문학상, 문화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1945년 충무에서 유치환(柳致環)‧윤이상‧심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어 예술운동을 전개했고,
1946년부터 조향(趙鄕)‧김수돈(金洙敦) 등과 동인지 『노만파』를 발간했다.
1948년 대구에서 발행되던 『죽순』 8집에 시 「온실」 등을 발표하는 한편 첫시집
『구름과 장미』를 간행하면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1956년 유치환(柳致環)‧송욱(宋稶)‧고석규(高錫珪) 등과 시동인지 『시연구』를발행하기도 했다.
시집으로 『늪』(1950), 『기』(1951), 『인인』(1954), 『꽃의 소묘』(1959),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 『타령조 기타』(1969), 『처용』(1974),
『김춘수시선』(1976), 『꽃의 소묘』(1977), 『남천』(1977), 『비에 젖은 달』(1980),
『처용 이후』(1982), 『처용 단장』(1991), 『서서 잠드는 숲』(1993),
『들림, 도스토옙스키』(1997), 『의자와 계단』(1999) 등이 있다.
시론집 『한국현대시형태론』(1958), 『시의 이해』(1972), 『의미와 무의미』(1976),
『시의 표정』(1979) 등과 수상집 『빛 속의 그늘』(1976), 『오지 않는 저녁』(1979),
『시인이 되어 나귀를 타고』(1980) 등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986년 『김춘수 전집』(1권 시, 2권 시론)을 간행하였다.
김춘수의 시 세계는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진다.
첫째 시기는 「꽃」, 「꽃을 위한 서시」 같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존재에의 탐구를
수행하던 시기로, 이때에는 존재와 언어의 관계가 강조된다.
둘째 시기는 「부두에서」, 「봄바다」 같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하는데, 이 시기에는 이른바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가 강조된다. 이는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 곧 묘사를 지향하는 세계로,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전반까지의 시편들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언어유희가 두드러진 「타령조」 같은 시들도 나타난다.
셋째 시기는 「처용단장」 제2부를 중심으로 하여 탈이미지의 세계가 강조된다.
넷째 시기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로 종교 혹은 예술에 대한 성찰이 강조되며,
그후 1990년대 초에는 「처용단장」 제3‧4부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꽃(김춘수) / 시낭송 봉경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