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 김광림 / <학의 추락>(1970) -
한여름에 들린
가야산(伽倻山)
독경(讀經) 소리
오늘은
철 늦은 서설(瑞雪)이 내려
비로소 벙그는
매화 봉오리.
눈 맞는
해인사(海印寺)
열두 암자(庵子)를
오늘은
두루 한겨울
면벽(面壁)한 노승(老僧) 눈매에
미소가 돌아.
* 작품해설 : 이 시는 눈 내리는 가야산의 선적(禪的) 고요와 종교적 깊이를 노래한 것으로, 그것을
그려내는 수법 또한 불교적 성격을 띠게 되어, 한 편의 절묘한 조화를 일구어낸 작품이라 하겠다. 이
시에서는 선적(禪的)인 세계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선의 세계는 점진적 논리 구조나 인과관계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설명되는 세계가 아니라, 느닷없는 깨달음이라는 사유의 비약이 그 본
질이다. 선의 세계에 있어서 시작과 그 끝인 깨달음까지의 거리는 사유의 시간적 경과를 의미하지,
논리의 진행 과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시에 있어 시간의 비약적 제시는 바로 이런 선의 세계와
절묘하게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읽는 데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사물, 이미지를 음
미하면서 그것들이 연상적 관계 속에서 저절로 어울리도록 하는 일이다. 현재의 작중 상황은 겨울,
해인사의 암자가 있는 어느 산 속이다. 철 늦게 푸근한 눈이 내리고, 그 속에서 매화 봉오리가 막 피
어나려 하고 있다. 여기서 화자는 갑자기 언젠가 들었던 가야산에서의 독경 소리를 연상한다. 그러나
지금은 눈 내린 한겨울, 암자에서 오래도록 벽을 향하여 마주 앉아 수도하던 노승의 눈매에 미소가
어린다. 어떤 그윽한 진리를 깨친 때문일까? 밖에는 눈이 희게 내려 있고, 그 서늘한 빛깔 사이에서
매화 봉오리가 보인다. 이것뿐이다. 시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더 이상 알 수 없다. 제시된
이러한 이미지들의 통일성을 바탕으로, 단순히 겨울 산의 한 풍경으로 보든지 아니면 불교의 오묘한
깨달음의 세계를 그린 것으로 보든지는 독자의 몫인 듯하다.
쥐
- 김광림 / <학의 추락>(1970) -
하나님
어쩌자고 이런 것도
만드셨지요.
야음을 타고
살살 파괴하고
잽싸게 약탈하고
병폐를 마구 살포하고 다니다가
이제는 기막힌 번식으로
백주에까지 설치고 다니는
웬 쥐가
이리 많습니까
사방에서
갉아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연신 헐뜯고
야단치는 소란이 만발해 있습니다.
남을 괴롭히는 것이
즐거운 세상을
살고 싶도록 죽고 싶어
죽고 싶도록 살고 싶어
이러다간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교활한 이빨과
얄미운 눈깔을 한
쥐가 되어가겠지요.
하나님
정말입니다.
* 작품해설 : 쥐라는 동물은 혐오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그 정도로 부정적인 존재가 바로 자기 자신
이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 시는 그러한 상상에서 시상이 시작된다. 하느님이 이렇게 부정
적인 존재를 만드는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또한 이러한 비판을 받는 존재가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
면서 고백을 하는 모습에서 화자의 비판 정신은 절정에 다다른다. 사람들이 누구나 자신은 '법 없이
도 살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 살지만 다른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면 사회의 위악에 은근슬쩍 참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 점을 시인은 자신이 쥐로 변한다는 우화를 통해 모두가 부정 사회에 참여
하고 있으며 앞으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모두 쥐와 같은 존재가 되고 말리라는 부정적인 암
시를 해 준다.
김광림(金光林, 본명 김충남(金忠南, 1929-)
시인. 본명은 충남(忠男). 함남 원산(元山) 1929 출생.
1946년 원산중학을 졸업. 화가 이중섭(李仲燮)과 사귀면서 문학수업을 시작했다.
북한의 문예정책을 반대, 1947년 월남했다. 신문 · 잡지에 작품을 투고하면서 그 동안
〈국방(國防)〉 · 〈전시문학선집(戰時文學選集)〉 등에 시를 발표했으나
작품활동을 본격화한 것은 1950년대 후반부터였다.
1957년 초기의 작품들을 묶어 전봉건(全鳳健) · 김종삼(金宗三)과 함께 연대시집(連帶詩集)
《전쟁(戰爭)과 음악(音樂)과 희망(希望)》을 냄으로써 시단에 알려지기 시작,
1959년 제1시집 《상심(傷心)하는 접목(接木)》을 내고 이를 전후하여 〈현대시(現代詩)〉 동인이
되는 한편 시지 〈모음(母音)〉 · 〈현대시학(現大時學)〉 등 시지(時誌)를 발간하기도 했다.
시의 경향은 처음부터 전통적 서정주의를 거부하고 현대성을 지향했는데 전쟁을 체험한 저항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그러나 제2시집 《심상(心像)의 밝은 그림자》(62)에 이르러서는 언어의 의미성(意味
性)을 배제하고 이미지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여 서정의 주지적(主知的) 형상화를 시도함으로써
주지적 서정파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제3시집 《오전(午前)의 투망(投網)》(65)에서는 이미지 추구
의 태도가 더욱 심화되었고, 제4시집 《학(鶴)의 추락(墜落)》(70)에서는 다시 존재성(存在性)의 추
구와 선적 미학(禪的美學)에 대한 관심이 보태졌다. 일본 · 대만 등지의 시인과도 교류하며 1972년
한국시인문화공보부 출판부, KBS 문화계장, 1967년 한국외환은행 입사, 1992년 제 28대 한국시인협회
장 역임, 장안대 일어과 교수(1983~1996)로 정년퇴임,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문학상, 대한민국 보
관문화훈장, 재미교포시인들에 의한 '박남수문학상', 일·한 문화교류기금상 등을 수상했고 저서로는
시집 '상심하는 접목' 등 18권이 있고, 선시집 '소용돌이' 등 4권이 있고, 시론집 '존재에의 향수’
등 8권이 있고, 한역시집 7권, 일역시집 3권, 영역시집 'Pain of the Peninsula' 등이 있다. 韓國詩
人協會賞을 수상. 1973년 제5시집 《갈등(葛藤)》을 발표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새》 · 《주일(主日)》 · 《사막(沙漠)》 · 《갈등(葛藤)》 · 《O》 ·
《상심(傷心)하는 접목(接木)》 · 《풍경 A》 등이 있다.
쥐(김광림) / 바리톤 윤치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