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와 광장
- 김규동 / <연합신문> (1952) -
현기증 나는 활주로의
최후의 절정에서 흰나비는
돌진의 방향을 잊어 버리고
피 묻은 육체의 파편들을 굽어본다.
기계처럼 작열한 작은 심장을 축일
한 모금 샘물도 없는 허망한 광장에서
어린 나비의 안막을 차단하는 건
투명한 광선의 바다뿐이었기에
진공의 해안에서처럼 과묵(寡默)한 묘지 사이사이
숨가쁜 Z기의 백선과 이동하는 계절 속
불길처럼 일어나는 인광(燐光)의 조수에 밀려
이제 흰나비는 말없이 이지러진 날개를 파닥거린다.
하얀 미래의 어느 지점에
아름다운 영토는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푸르른 활주로의 어느 지표에
화려한 희망은 피고 있는 것일까.
신도 기적도 이미
승천하여 버린 지 오랜 유역
그 어느 마지막 종점을 향하여 흰나비는
또 한 번 스스로의 신화와 더불어 대결하여 본다.
* 도래샘 : 도랑가에 저절로 샘이 솟아 빙 돌아서 흘러 나가는 샘물, '도래'는 '도랑'의 함북 방언
* 작품해설 : 시인 김규동은 전후 모더니즘의 대표 주자 중의 한 사람으로, 비판적이고 지성적인 시선으로 현대
문명 비판의 논리를 형상화하려고 노력한 시인이다. 현대 문명을 비판하려는 시적 의도를 현대 도시 문명적인 언
어를 사용함으로써 나타내고자 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현기증 나는 활주로, 허망한 광장, Z기의 백선, 기계처럼
작열한, 인광의 조수' 등이 그것에 해당한다. 이러한 시어들은 도시 문명의 건조성, 비인간성, 삭막함 등을 표출
시키는데 기여하며, 시인의 비판적 의도에 합당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이고 철학
적 성찰을 결여한 채 현대문명과 관련된 언어만을 사용해 문명 비판의 잣대로 삼겠다는 의도는 그다지 타당한 논
리는 되지 못한다. 1950년대 모더니즘 시인들의 실패 요인이 있었다면 이것도 한몫 했을 것으로 본다.
'나비'와 '광장'은 제목부터가 하나의 대립쌍으로 이루어져 있고, 주제를 암시하는 기호로 작용하고 있다. '(흰)
나비'는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화자의 정서와 주제를 표출하기 위한 객관적 상관물이라 할 수 있다. 즉, 흰나비는
시적 화자의 전쟁에 대한 감각적 체험 또는 현대 도시 문명에 대한 체험을 구체적이고 실감있게 표현하기 위한 감
각적 등가물로서, 화자의 사상과 정서는 곧 흰나비의 묘사에 스며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상황은 동원된 몇 가지 소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활주로'와 '제트기', '피묻은 육체'와 '묘지'와
같은 것은 전쟁의 상황을 말하기 위해 쓰인 것이다. 그리고 돌진하는 나비와 그를 가로막은 투명한 광선, 번지는
불꽃 등의 상황을 통해서 전쟁의 숨막히는 극한 상황을 느낄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시는 전쟁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일상적 인식을 초월한 그 비정한 상황적 분위기를 비판적으로 그려내려 한 것이다. 4연에서는 바로
이러한 화자의 전쟁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비극적 현실을 벗어나려는 염원으로 표현되어 있다. 결국 이 시는 전쟁
으로 인해 비인간화된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질서와 평화를 회복하려는 휴머니즘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전후의 시대상황과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보일러 사건의 진상
- 김규동 -
어둠과 보일러 -
물체의 형상을 헤아릴 길 없었음은 암흑했다는 까닭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과 인간 들 속에서 시인은 침전으로 굳어간 육체를 보일러의 어느 경사면에 누이고
성좌와의 대화를 최후로 사랑하였다
높아가는 고압전선의 울음소리는 밤의 인광처럼 척주에 스며들고
굶주려 넘어지는 생명들과 수없는 임종의 눈 내리는 새벽
향락의 극치와 극치의 마찰에서 일어나는 뿌연 암모니아의 빚깔
폐문이 부은 바다와 하늘, 그리고 다가오는 25시
광선! "모든 운명의 전말을 똑똑히 보라"
기관장의 비명과 그에 따르는 기관사들의 아우성
폭발!
아크등의 밝음속에 시인은 하나의 예감을 육안으로 체험한다
보일러엔 모세혈관같은 무수한 절망의 선이 서려 있었던 것을 -
죽음과 시체들속에 시인은 끄스른 머리와 떨어진 팔다리의 상처 그대로를
지니고 쓰러졌을 뿐
태양의 음악과 바다의 빛깔
오! 새로운 바다의 광선과 태양의 음악만이
또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
고향(故鄕)
- 김규동 -
고향엔
무슨 뜨거운 연정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山)을 둘르고 돌아 앉아서
산(山)과 더불어 나이를 먹어가는 마을
마을에선 먼 바다가 그리운 포푸라 나무들이
목메어 푸른 하늘에 나부끼고
이웃 낮닭들은 홰를 치며
한가히 고전(古典)을 울었다.
고향엔 고향엔
무슨 뜨거운 연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등산
- 김규동 -
한 몸이 되기도 전에
두 팔 벌려 어깨를 꼈다
흩어졌는가 하면
다시 모이고
모였다간 다시 흩어진다
높지도 얕지도 않게
그러나 모두는 평등하게
이 하늘 아래 뿌리박고 서서
아 이것을 지키기 위해
그처럼 오랜 세월 견디었구나.
* 김규동(金奎東], 1925-2011)
호는 문곡(文谷)이다. 1925년 2월 13일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하여 1944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
연변의과대학을 수료하였다. 1948년 평양종합대학교를 중퇴하고 월남하였다.
1948년 『예술조선』에 「강」을 발표하였으며,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우리는 살리라」가 당선되었
고, 같은 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포대가 있는 풍경」이 당선되었다. 첫 시집 『나비와 광장』(1955), 『진
공회담』, 『밤의 신화』에서는 한국전쟁의 비극적인 상황을 다루지만 새로운 문학적 도전과 실험을 시도한다. 이
들 시집에는 외국의 문학이론, 특히 초현실주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입체파 운동 등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
쳤으며, 전망 없는 사회에 대한 고민과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박인환, 조향, 김경린, 이봉래, 김차영 등과 ‘후반기’ 동인을 결성, 당시 생명파와 청
록파의 순수서정성을 비판하면서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현실 속에서 인간존재의 황폐함과 현대문명의 한계를
중심 주제로 다루었다. 1959년 『새로운 시론』으로 후반기 동인 중 유일하게 시론을 발표한 시인은 시에는 현실
반영과 비판 그리고 역사의식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시인이 홀로 현대문명의 소음을 피하여 화조풍
월의 고향 산천을 찾아 영구히 하향(下鄕)해서는 아니된다. 한 시대의 예술정신이란 그 시대의 가장 강렬하고 대
표적인 저항정신이다.”라고 주장하였다. 후반기 회원들은 청년의 기개로 전통을 반대하며 도시적 취향으로 과감
하게 언어를 두고 실험정신을 발휘하였으나, 시선집 『깨끗한 희망』(1985)에서 밝힌 바와 같이 1950년대 모더니
즘 문학운동이 민족 현실을 절실하게 노래하지 못하였다고 고백하였다. 50년대 시에서는 전쟁을 체험한 세대답게
문명에 대한 깊은 반성과 실험을 담은 치열한 문학정신을 읽을 수 있다. 이는 전쟁과 분단으로 일어난 사회·역사
문제를 문학 담론으로 해석해본 결과이다. 이후 야만스러운 문명의 그늘에서 고향과 어머니를 발견하여 문학세계
를 넓혀나갔다.
언론계와 출판계에서 생계를 꾸려나갔지만 당시 문단상황에 상처를 받고 1962년부터 10년에 걸쳐 절필을 하였다.
1974년부터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등 민족문학 진영에 활발하게 참여하면서 공백기를 끝냈
다. 민족분단 문제, 사회노동 문제 등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서 문학의 현실참여를 실천하였다. 이후 『죽음 속의
영웅』(1977)을 발표하면서 긴 침묵의 시간을 걷어냈다. 시집 자서에서 “비탄에 젖은 절망의 노래가 어찌 사회와
민중의 내일을 위하여 빛이 될 수 있었을까 보냐.”라고 하면서 시창작이란 것이 개인의 정서에 머무는 것이 아니
라 하나의 운동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음을 피력하였다.
1970년대 군부독재와 산업화의 분위기 속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현실비판의 목
소리를 담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주로 민중시를 창작하면서 분단문제를 극복하려는 희망과 의지를 시에 담았다.
80년대 들어 발표한 시는 독재권력을 직접적으로 비판하였다. 정치적 부조리를 정면으로 언급하며 사회정의와 민
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문학운동에 동참하였다.
팔순을 맞아 2005년에 출간한 『느릅나무에게』에 수록된 83편의 시는 그동안 쓴 3백여 편에서 고른 것이다. 시인
은 일생을 시에 의지하며 살아왔지만 ‘인격과 품성의 잘못은 나에게 있지만 다른 한편 절반의 책임은 분단에 있
다.’고 썼다. 이에는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드러난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변화의 의지와
집념을 청년 못지않게 간직한 시인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시인으로서의 자존감을 끝까지 지
켜내다가 2011년 9월 28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고문과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
을 역임하였다. 1959년 자유문인협회상을 시작으로 하여 1996년 은관문화훈장, 2006년 만해문학상, 2011년 대한민
국예술원상 등을 수상하였다.
김규동 시인이 직접 목각한 자신의 시 ‘죽여주옵소서’
* 김기림 찾아 월남한 모더니스트 김규동의 깊은 서정
한겨레신문 2022/07/29 임인택 기자
늙으신
어머니를 내버리고
이남땅 나온 놈이
잘 되면 얼마나 잘되겠냐
40년 동안
38선이 막혀 못 돌아갔다는 건
변명이고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 이렇게 꾸짖는 사람이 있어야 했는데
지금껏 이런 높은 어른을 만나보지 못한 것이
한이다.
일평생 호 없이 살다간 김규동 시인의 시 ‘형벌’이다. 기존 질서에 맞선 모더니즘의 선구자라 불린 시인 김기림
이 경성고보 스승이고, 모더니스트 시인 박인환이 1950년대 함께 모더니즘을 선도한 ‘후반기’의 동인이다. 평양
종합대학 재학 중인 1948년 스승 김기림을 찾아 홀로 월남한 이후 전위와 서정을 넘나든 그의 시 세계는 디아스포
라의 걱센 각오에서였을지 모른다. 그는 박정희 정권 들어서부터 민주화투쟁에도 나선다.
한 백 년 동안 잠재울 작정으로 바위는 육박해왔다/…/ 뜻하지 않은 이별이 곤충의 일생을 어둡게 하였다”(‘내
면의 기하학’)는 인식은 “누님/ 찾지 말아요/…/ 40년도 못 보고 헤어져 살았는데/…/ 통일되기 전에는/ 바람에
띄워서라도 찾지 말아요/ 울고 헤어지는 만남은 죽어도 못해요/…”(‘찾지 말아요’)의 정서와 닿고, 정보당국에
연행됐다 나온 뒤 “문학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은 안 했습니다”는 시 바깥에서의 표명과도 닿는다. 태가 달랐을
뿐 언어가 달라진 적 없다.
시인(1925~2011)의 타계 11주기를 맞아 나온 추모집의 제목은 <귀향>이다. 대표시와 새 평론들, 5주기에 문인들이
냈던 추모 산문(비매) 등이 엮여 있다. 경계 없는 사후의 한 어른이 되레 보낸 책 같다, 경계의 쓸모없음을 타이
르는 거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사진 한길사 제공
김규동 시인
* 김규동과 김기림
경인일보 2014/07/29
김규동은 열심히 책을 읽고 인정을 베풀고 역사의식을 가지고 한평생 북한에 남겨둔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과 고
향을 그리워하며 통일을 노래한 시인이다. 시인은 1925년 함북 종성에서 태어나 경성고보를 거쳐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과에 다니다가 1948년 교복을 입은 채 38선을 넘었다. 그가 월남한 이유는 자신의 삶의 방향을 존경하
는 선생님으로부터 듣고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학교에서 마르크스 레닌 사상에 입각한 문학 공부를 강요받으면서
문학이 무엇인지, 어떤 시를 써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는데, 그것을 해결하려고 남한에 있는 선생님을 찾아온 것이
다. 김규동 시인은 경성고보 시절에 김기림 선생님으로부터 영어와 수학 과목을 배웠고 시 쓰기의 지도를 받았다.
그리하여 자신을 낳고 키운 부모님보다 선생님을 따르려고 했던 것이다. 김규동 시인의 경우를 보면 스승과 제자
의 관계가 얼마나 아름답고도 위대한지를 깨닫는다.
주지하다시피 김기림은 193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였다. 또한 학생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는 선생님
이었다. 김규동 시인은 김기림 선생님의 근면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다른 사람을 감싸는 인품과 역사의식을 존경했
다. 그리하여 자신의 운명을 맡겼을 뿐만 아니라 평생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했다.
김기림은 문명의 변화에 뒤떨어지지 않고 적응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잠도 자지 않고 공
부해 일본인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수들로부터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식민지 조선인이라는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
려고 이를 악물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노력으로 김기림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 되어 시와 문학평론 등의 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김규동 시인은 김기림의 그와 같은 모습을 본받고 열심히 공부했다. 여든 살 이후에는 눈이 흐려 글씨가 잘 보이
지 않는데도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책을 읽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자다가 깨면 다시 책을 보았다.
여든 살 이전에는 하루에 예닐곱 시간을 읽었다. 책을 읽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 같아 슬프다고 에
세이집 '나는 시인이다'에서 밝히기도 했다.
김기림은 공부를 열심히 했을 뿐만 아니라 인연들을 소중히 여겼다. 제자인 김규동이 월남해 일자리를 찾기가 어
려운 사정을 잘 알고 상공중학교(현재 중대부고)의 교사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 그 단적인 예다. 김규동 시인은 김
기림 선생님의 그 인품을 따르려고 했다. 그리하여 주로 소외된 시인들을 격려해주고 도와주었다. 지금까지 여러
문인들의 장례식에 가보았지만, 김규동 시인의 장례식만큼 많은 조문객이 찾아온 경우는 보지 못했다. 그만큼 시
인은 김기림 선생님의 인품을 배워 실천한 것이다.
김기림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인연들을 감싸 안았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식이 분명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의 지식
인이었지만 친일 글을 한 편도 쓰지 않았다. 그의 명성이나 사회적 위치로 보았을 때 친일 글을 쓰지 않기가 매우
어려웠을 텐데도 그는 피해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좀 더 살펴봐야 하겠지만, 그가 친일 글을 한 편도
쓰지 않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흔히 김기림을 1930년대의 모더니즘 시인이라는 선입견으로 역사의식이 없는 것
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큰 오류이다. 김기림은 소설작품 '철도연선'에서 1930년대의 농촌사회가 무
너져 가는 과정을 함경도 지방의 어휘들을 통해 여실하게 그려내었고, 희곡 '바닷가의 하룻밤'에서 인격적인 대우
가 없는 가정생활을 거부하고 평등한 결혼 생활을 추구했다. 뿐만 아니라 '어째서 네게는 날개가 없느냐' 등의 많
은 수필에서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나타내었다.
김규동 시인은 김기림의 그 역사의식을 배우고 따랐다. 1950년대에 '후반기' 동인을 결성해 모더니즘을 추구하면
서 혼란한 시대 상황을 적극적으로 반영해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점점 탄압의 강도를 더해가는 군사정권에
맞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가담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와 같은 행동이 군사정권의 눈엣
가시가 되어 아들이 사법시험의 최종면접에서 탈락하는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지만, 시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김기
림 선생님께 배운 역사의식을 실천해 나간 것이다.
며칠 전 스승의 날, 필자는 김규동 시인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보살핌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규동 시인은 2011년 마지막 작품으로 '인사'를 발표하고 세상을 떴는데, 그 작품의 부제로 필자의 이름을 넣어
줄 정도로 아껴주셨다. 그리하여 필자는 열심히 책을 읽고 인정을 베풀고 역사의식이 분명했던 김규동 선생님의
가르침을 다시금 받는다. 늘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책을 읽고, 음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길을 내밀고, 분단 극복
이며 정치 민주화의 실현에 좀 더 나서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진정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높기만 하다.
/맹문재 안양대 국어국문학교수
57년만에 개방된 무등산(2023) / 이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