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 유치환 / <울릉도>(1948) -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鬱陵島)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國土)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東海) 쪽빛 바람에
항시(恒時)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風浪)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朝國)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懇切)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생명의 서(書)
- 유치환 / <동아일보>(1938) -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灼熱)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烈烈)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本然)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바위
- 유치환 / <삼천리>(1941) -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1853년 1월 부산을 항해한 한국해협에 들어온 최초의 미국 포경선.
깃발
- 유치환 / 『조선문단』, 1936.1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룬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닮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 유치환 / <동아일보(1960)> -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窈窕)ㅎ던 빛깔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 간 기술사(奇術師)의 모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에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에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라.
들어 보라.
이 거짓의 거리에서 숨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일월
- 유치환 / <문장>(1939) -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 소냐.
머언 미개(未開)적 유풍(遺風)을 그대로
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熱愛)하되
삼가 애련(愛憐)에 빠지지 않음은
---그는 치욕(恥辱)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憎惡)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두 동공(瞳孔)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不意)에 짐승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日月)에
또한 무슨 회한(悔恨)인들 남길소냐.
* 작품 해설 : 이 시는 첫 시집 『청마시초』에 수록되어 「생명의 서」와 더불어 세칭 ‘생명파’로
서의 위치를 굳히게 한 작품이다. 그가 일제 압제를 피하여 가족과 함께 북만주로 탈출하기 1년 전에
쓴 것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그의 치열한 생명 의식과 사회악에 준열한 윤리의식을 결합하여 생명과
시의 실체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전 6연의 구성이나 내용상 4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단락[1연]에서는 광명의 지표인 백일
(白日)에 대한 확신을 갖는 화자가 망명(亡命)을 결행(決行)하고 있으며, 2단락[2~3연]에서는 문명
이전의 건강하고도 원초적인 생명에 대한 희구와 함께 애렴애 빠지는 약하고 속된 감정을 경계하고
있다. 3단락[4연]에서는 원수와 그 아첨배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정의를 결의하고 있으며, 4단락[5~6
연]에서는 극에 달한 증오심으로 의로운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치열한 윤리덕 대결 자세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원수’란 생의 모순과 부조리는 물론 인간다운 삶을 저해하는 모든 요인들을 의미한다.
망명살이 어디에고 ‘백일(白日)’로 표상된 밝고 정의로운 세상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안고 화자
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떠나가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그 곳 별과 비바람의 대자연속에서 우
주 섭리를 근심하면서 살아가는 미개적 유풍의 원시적 삶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또한 그 속에
서 자신것임을 스스로 다짐한다. 왜냐하면 애련에 빠지는 것이야말로 원시적 삶을 사는 자연인에게는
부끄러움이고, 이 애련을 초극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성신’, ‘비와 바람’, ‘일웡’ 등
의 원시적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한편 화자는 민족의 원수인 일제와 그들에게 아첨하는 민족 배반자들에게 베풀 수 있는 일이란 오직
증오밖에는 없다고 단언한다. 그 증오는 불의와 부정한 세력에 대한 것이므로 당연히 ‘옳은 증오’
임을 굳게 믿고 있다. 설령 그 곳에서 자신이 죽는다 하더라도 결코 원수들을 두고 죽을 수는 없다.
어느 뜻하지 아니한 때, 짐승처럼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들을 증오하는 마음은 결코 버릴 수 없
기에 어더한 후회나 한탄도 있을 수도 없다. 이와 같이 이 작품은 불의와 악에 대한 타협 없는 증오
와 대결의 의지를 관념적 시어와 강건하고 비장한 어조로 나타내고 있다. ‘생며에 속한 것을 열애하
되 / 삼가 애련에 빠지지 않음’을 추구하는 이러한 의지적 태도로 말미암아 청마를 흔히 ‘의지의
시인’이라 부르는 것이다.
길림 5회분 삼족오와 일월신도
왕의 절대적인 권위의 칭송과 왕족의 무궁번창을 기원하는 궁궐 길상장식화인 일월오봉도는 한국의 5
대 명산과 해, 달, 소나무를 그린 그림이며 일월도,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 오봉일월도, 일월곤륜
도(日月崑崙圖) 등으로도 부른다.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어좌 뒤에 병풍 장식으로 놓았고 왕
의 초상인 어진을 모신 진전(眞殿)이나 왕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에도 두었다. 왕권을 상징하는
그림이므로 왕이 있는 곳에는 항상 일월오봉도가 있으며, 주로 병풍 위에 그려놓기 때문에 일월오봉
병(日月五峰屛), 일월오악병이라고도 이른다. 왼쪽에는 흰 달, 오른쪽에는 붉은 해가 떠 있고, 가운
데에 녹색과 청색으로 채색된 다섯 산봉우리가 솟아 있다. 양쪽 계곡에는 폭포수가 쏟아지고, 산 아
래는 반원꼴의 이어진 문양의 물결과 파도가 강을 이루고 있으며, 양쪽 구릉에는 붉은 노송이 두 그
루씩 서 있다. 붉은 해는 왕을, 흰 달은 왕비를, 다섯 산봉우리는 산신에게 제를 올리던 오악(五嶽 :
백두산·금강산·묘향산·지리산·삼각산) 등 한국의 5대 명산을 그린 것으로, 왕이 다스리는 국토를
상징하며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것이고 소나무는 왕손 번창 기원을, 파도는 조정(朝廷)을 의미하
는 것이다. 왕이 천명을 받아 삼라만상을 통치하는 존재이며, 그가 다스리는 세상은 음양오행의 작
용으로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뜻이다. 해, 달, 산, 소나무, 물 등은 천계(天界), 지계(地界), 생물계
의 영원한 생명력의 표상으로 여러 신의 보호를 받아 자손만대까지 번창하라는 사상을 반영한다.
* 유치환(柳致環, 1908-1967)
청마(靑馬), 아버지 : 유준수(柳焌秀), 형 : 유치진(柳致眞)
1908년 경상남도 통영 출생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을 발표하여 등단
1937년 문예 동인지 『생리』 발행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회장 역임
1947년 제1회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시인상 수상
1957년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
1967년 사망
시집 :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8), 『청령일기(蜻蛉日記)』
(1949), 『보병과 더불어』(1951), 『예루살렘의 닭』(1953), 『청마시집』(1954), 『제9시집』
(1957), 『유치환 시초』(1953), 『동방의 느티』(1959),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
『미루나무와 남풍』(1964),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1965), 『청마시선』(1974), 『깃발』(1975),
『유치환-한국현대시문학대계 15』(1981)
현대 시인. 경상남도 통영출생. 본관은 진주(晉州). 호는 청마(靑馬). 준수(焌秀)의 8남매 중 둘째아
들이며, 극작가 치진(致眞)의 동생이다. 11세까지 외가에서 한문을 배웠다. 1922년 통영보통학교 4년
을 마치고, 일본 도요야마중학교(豊山中學校)에 입학하였다. 이무렵 형 치진이 중심이 된 동인지
《토성(土聲)》에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가세가 기울어 4학년 때 귀국, 1926년 동래고등보통학교
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이듬해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퇴폐적인 분위기에 불만을 품고 1년
만에 중퇴하였다. 당시 시단을 풍미하던 일본의 무정부주의 자들과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감동하여,
형 치진과 함께 회람잡지 《소제부(掃除夫)》를 만들어 시를 발표하였다.
1931년 《문예월간(文藝月刊)》에 시 〈정적(靜寂〉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 뒤 잡다한 직
업을 전전하다가 1937년 부산에서 문예동인지 《생리(生理)》를 주재하여 5집까지 간행하고,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를 발간하였다. 여기에 초기의 대표작인 〈깃발〉,〈그리움〉,〈일월〉등
55편이 수록되었다.
1940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 연수현(煙首縣)으로 이주하여, 농장관리인 등에 종사하면서 5년여에 걸
쳐 온갖 신산을 맛보고, 광복 직전에 귀국하였다. 이때 만주의 황량한 광야를 배경으로 한 허무의식
과 가열한 생의 의지를 쓴 시 〈절도(絶島)〉 · 〈수(首)〉 · 〈절명지(絶命地)〉 등이 제2시집
《생명의 서》에 수록되었다.
광복 후에는 청년 문학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문학운동을 전개하였고, 6 · 25동란중에는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의 일원으로 보병3사단에 종군하기도 하였다. 《보병과 더불어》는 이 무립의
시집이다. 1953년부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이후에는 줄곧 교직으로 일관하였고, 안의중학교(安義中
學校) 교장을 시작으로 하여 경주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를 거쳐 부산남여자 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중 교통사고로 죽었다.
40여년에 걸친 그의 시작은 한결같이 남성적 어조로 일관하여 생활과 자연, 애련과 의지 등을 노래하
고 있다. 그의 시세계를 '생명에의 의지', '허무의 의지', '비정의 철학', '신채호적(申采湖的)인 선
비기질의 시인'으로 평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생명의 긍정에서 서정주(徐廷株)와 함께 이른
바 '생명파 시인'으로 출반한 그의 시는 범신론적 자연애로 통하는 열애가 그 바탕을 이루며, 그 바
탕 위에서 한편으로는 동양적인 허정(虛靜) · 무위(無爲)의 세계를 추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러한 허무를 강인한 원시적 의지로 초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시에 허무의지의 극치인 '바위'와 고고함의 상징인 '나무'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
이다. 묘지는 부산직할시 서구 하단동에 있으며, 그의 시비는 경주 불국사, 부산 에덴공원, 충무 남
망공원(南望公園) 등에 세워졌다. 시집으로 《울릉도》 · 《청령일기(蜻蛉日記)》 · 《청마시집》
·《제9시집》 · 《유치환선집》 ·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 《미루나무와 남풍》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등이 있고, 수상록으로는 《여루살렘의 닭》과 2권의 수필집, 자작시 해설
집 《구름에 그린다》 등이 있다.
청마 유치환 : 출처 네이버
유치환 (1908-1967) : 호는 청마(靑馬). 경남 통영(統營) 출생.
유명한 연극인 극작가 유치진(柳致眞:1905-1974)은 청마 유치환의 실형(實兄)이다.
청마는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 중학교에 다니다
부친의 사업이 기울자 귀국하여 동래고보 5학년에 편입한다.
1928년 연희전문(延禧專門)을 중퇴하고 진명 유치원의 보모로 있던 권재순과 결혼한 이듬해
고향으로 내려와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깊은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행복 / 유치환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봇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그리움1 / 유치환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즉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긴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주의 기(旗)빨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그리움2 / 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그리움1, 2는 정운에게 바치는 사랑의 절규였다.
유교적 가풍의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는 정운이기에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고 청마의 사랑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았다.
청마는 하루가 멀다하고 3년 동안 편지를 쓰고 시를 써댔다.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청마의 사랑 시편들에 마침내 빙산처럼
까딱 않던 정운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으니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들은 모두 그대로 시였다.
편지내용 일부 / 유치환
내가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던?
그러나 얼굴을 부벼들고만 싶은 알뜰함이
아아 병인양 오슬오슬 드는지고 덧없는 목숨이여
소망일랑 아예 갖지 않으매
요지경 같이 요지경 같이
높게 낮게 불타는 나의 노래여, 뉘우침이여
나의 구원인 정향! 절망인 정향!
나의 영혼의 전부가 당신에게만 있는 나의 정향!
오늘 이 날이 나의 낙명(落命)의 날이 된달지라도 아깝지 않을 정향
정운 이영도. 금정산 애일당 앞에서 : 출처 네이버
이영도 (1916-1976) : 시조시인. 호는 정운(丁芸).
경북 청도(淸道) 출생. 시조 시인 이호우(李鎬雨)의 여동생.
민족 정서를 바탕으로 잊혀가는 고유의 가락을 시조에서 찾고자 노력하였으며,
간결한 표현으로 자신의 정감을 다스리며 인생을 관조하는 세계를 보여주었다.
정운은 재색을 고루 갖춘 규수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홀로 되어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 교사로 부임했다.
청마는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된다.
청마의 첫눈에 정운은 깊은 물그림자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일제하의 방황과 고독으로 지쳐 돌아온 피가 뜨거운 서른 여덟의 청마는
스물 아홉의 청상 정운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이 치솟았다.
통영여중 교사로 함께 근무하면서 알게 된 정운.
그녀는 일찍이 결혼하여 21살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당시 딸 하나를 기르고 있었다
청마는 1947년 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다.
그러기를 3년, 마침내 정운의 마음도 움직여 사랑은 시작됐으나
청마가 기혼자여서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청마는 1967년 2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년 동안 편지를 계속 보냈고, 정운은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 것은 전쟁 때 불타 버리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아있는 편지는 5,000여 통이었다.
정운은 시전문지 '현대시학'에 '작품상' 기금으로
기탁 운영해 오다 끝을 맺지 못하고
1976년 3월 6일 예순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탑(塔) / 이영도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하고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정운은 1976년 예순에 세상을 떠난 뒤
무남독녀 박진아씨가 유품을 정리하니 미리 써둔 유서가 나왔고
유서에는 딸과 사위, 외손에게 부탁하는 말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죽음을 알릴 사람의 이름과 화장해 달라는 말,
장례비에 써달라는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함께 들어 있었다.
남에게 신세지기를 꺼리고 신세를 지면 갚으려고 하는 분이었기에
당신의 죽음 역시 비록 딸이지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한 모양이다.
무제 1 / 이영도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窓)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통영에서 당시 교편을 잡고 있던 정운은
청마와의 연정을 한창 싹틔우고 있을 무렵 정운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작품이다.
끝이 없을 것 같았던 청마의 사랑은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이 났다.
1967년 2월 13일 저녁,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60세에 세상을 떠난다.
울릉도(유치환) / 시낭송 박혜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