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 <52인 시집>(1967) -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산에 언덕에
- 신동엽 / <아사녀>(1963) -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봄은
- 신동엽 / <한국일보>(1968) -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 속에서
움트리라.
움터서,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눈 녹이듯 흐물흐물
녹여 버리겠지.
진달래 산천
- 신동엽 / <조선일보>(1959) -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 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에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 <고대문화>(1969)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 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 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모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북한산 백운산장 앞에 선 신동엽 시인. 신동엽 시인은 암벽등반을 즐기던 클라이머였다
신동엽 시인이 도봉산 거북바위 부근에서 선인봉(맨 우측 봉우리)과 만장봉을 배경으로 서있다.
* 신동엽(申東曄, 1930-1969)
신동엽(申東曄)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는 석림(石林)이다. 동시대에 활동
한 김수영(1921 ~ 1968)과 함께 1960년대를 대표하는 참여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태생이다. 1944년 부여국민학교 (현 부여초등학교) 를 수석으로 졸업
하고 전주사범학교에 진학했으나 중퇴한다. 이후 단국대학교에 입학해 사학을 전공했으며, 1953년에
졸업했다. 1950년 국민방위군에 징집되었고, 1951년 국민방위군이 해체되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배가
고픈 나머지 게를 함부로 먹었다가 디스토마에 감염되었는데, 이는 그의 요절의 원인이 되었다.
1953년 단국대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의 자취방에 살다가 돈암동 네거리에서 헌
책방을 운영했다. 이때 이화여고 3학년이던 인병선을 만났고 1957년 결혼했다. 결혼한 그 해인 1957
년, 인병선은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수학하는 대신 가난한 시인과의 삶을 택하고 학교를 중퇴한
다. 그리고 신동엽의 고향인 부여로 내려갔다.
인병선은 부여에서 양장점을 열어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고, 신동엽은 충남 보령시의 주산농업고등학
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1959년 폐결핵을 앓기 시작했고, 교편에서 물러난 후 처와 자식들을
다시 서울 돈암동 처가로 돌려보냈다. 자신은 부여에서 요양하며, 이때 글에 집중한다. 그로부터 1년
후 1959년,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처음 등장했다.
그리고 조선일보 1959년 3월 24일자를 통해 당선작 이후로의 첫 작품을 발표하는데, 그게 바로 6.25
전쟁 전후기의 빨치산을 애틋하게 노래한 <진달래 산천>이다.
다행히 1960년부터 다시금 건강이 좋아졌고, 신동엽 역시 다시 서울로 올라갔으며, 이때 교육평론사
에 입사한다. 이번엔 돈암동이 아니라 성북구 동선동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그해 4월에 <<학생혁명시집>>
(교육평론사)을 편찬하며 4.19 혁명의 정신을 기렸다. 이때의 기억을 되살려 신동엽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와 <껍데기는 가라>를 창작했다.
1961년에 명성여고 야간 교사로 취직하여, 안정된 직장 덕에 비교적 시작(詩作)에 몰두할 수 있었고
1963년 시집 <<아사녀>>를, 1967년에 장편 서사시 <금강>을 발표한다. 그러나 1969년, 지병인 간 디
스토마로 간암이 악화되어, 아내와 2남 1녀의 자식을 남겨둔 채, 4월 7일에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만 38세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4] 묘지는 처음엔 당시 파주군 금촌읍 월롱산 기슭에 안장했다가,
1993년에 고향인 부여군의 능산리 고분군 근처 산으로 이장했다. 사후 부여읍내에 있는 생가를 복원
하고 신동엽문학관을 세웠다.
우리가 시인 신동엽을 알고 있는 이유는 그의 부인 인병선의 덕이 매우 크다. 인병선은 신동엽이 죽
고 나자, 혼자 2남 1녀를 키우기 위해 출판사에 다니며 생활하면서도, 신동엽의 육필 원고를 모아 유
고집 발간에 힘을 썼다. 그 결과 1975년 6월에 <<신동엽전집>>(창작과비평사)이 출간되지만, 불과 한
달만에 긴급조치 9호 위반의 이유로 당국에 의해 판매금지되었다. 1979년 3월에는 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창작과비평사)가 출간되었다.
1982년 12월에, 신동엽 시인의 문학과 문학정신을 기리고 역량 있는 문인을 지원하기 위해 유족과 창
작과비평사 공동 주관으로 '신동엽 창작기금'이 제정되었다. 2004년부터는 '신동엽창작상'으로, 2012
년부터는 '신동엽문학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껍대기는 가라(신동엽) / 안치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