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
- 박성우 / <가뜬한 잠> 창비 / 2007년 03월 -
뒤척이는 밤, 돌아눕다가 우는 소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귓밥 구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누군가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가 명명하게 들려왔다
고추는 매운 물을 죄 빼내어도 맵듯
마른 눈물로 얼룩진 그녀도 나도 맵게 우는 밤이었다
가뜬한 잠
- 박성우 / <가뜬한 잠> 창비 / 2007년 03월 -
곡식 까부는 소리가 들렸다
둥그렇게 굽은 몸으로
멍석에 차를 잘도 비비던 할머니가
정지문을 열어놓고 누런 콩을 까부르고 있었다
키 끝 추슬러 잡티를 날려보내놓고는,
가뜬한 잠을 마루에 뉘였다
하도 무섭게 조용한 잠이어서
생일 밥숟갈 놓고 눈을 감은 외할매 생각이 차게 다녀갔다
물의 베개
- 박성우 / <가뜬한 잠> 창비 / 2007년 03월 -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 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
강가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
* 물도 잠을 자는가? 만약에 잠을 잔다면 강물도 베개를 베고 자는가? 박성우 시인은 그렇다고 말한
다. 시인이 그걸 시골 마을에서 직접 보았다는데 어쩔 것인가. 어느 여름날 밤, 고향에 내려간 시인
이 잠이 오지 않아 마을 앞의 강가로 나간 모양이다. 그리고 강 건너편에 앉아 밤이 이슥토록 마을
앞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다가 문득 마음의 화폭에 새겨진 커다란 그림 한 장이 바로 시「물의 베
개」가 되었다.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인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를 나는 왜 보지 못했던가. 여름날 밤, 내 고향 마을 앞 동창천에서 수
도 없이 봐 왔던 이 그림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는 위 시 4연에 열거된 것처럼 우리네
살림살이가 그대로 수놓아져 있다. 고된 농사일로 관절을 상한 늙은 농부의 신음 소리와 자식 대학등
록금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중년 부부의 대화도, 술에 찌든 서방을 탓하는 젊은 베트남 새댁의 서툰
악다구니와 몇 명 되지는 않지만 새근새근 잠자는 아이의 숨소리도 수놓아져 있을 테다. 나는 박성우
시인의 둘째 시집『가뜬한 잠』을 읽으며 그가 언어로 짜 올린 이러한 감동적인 큰 그림을 여럿 만날
수 있어 참 행복했다. -이종암(시인)
* 박성우(1971-)
* 1971년, 전북 정읍시 출생
* 원광대 문예창작학과 같은 대학원에서 「박정만 시 연구」로 박사
* 데뷔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거미' 등단
* 신동엽창작상, 윤동주 젊은작가상 . 제20회 백석문학상 등
* 시집 『거미』『가뜬한 잠』『자두나무 정류장』, 동시집으로 『불량 꽃게』. 청소년시집으로 『난 빨강』 등
* 현재, 우석대학교 교수
물의 베개(박성우) / 시낭송 박성우